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13화 (14/72)

13화

손각시(孫閣氏) (4)

“고마워요, 차휘 씨. 이번 작품은 정말 기대해도 될 겁니다. 차휘 씨 역할이 아주 클 테니 잘 부탁해요. 우리, 대상 타자고요!”

이준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제게 손을 내미는 황규호 감독의 말에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감독님 연출은 믿고 있고, 최 작가님 대본이 너무 좋더군요. 작가님, 좋은 캐릭터 만들어 주셔서 감사해요.”

“벼, 별말씀을요! 기획 단계부터 우리 황 감독님이 차휘 씨가 합류해 준다고 언질 주셨던 터라, 이상하게 글이 잘 써지더라니까요?”

호호호―.

회의실을 울리는 웃음소리는 몇 번의 덕담이 오간 끝에 멈추었다.

“참.”

촬영 들어가기 전, 조만간 한 번 더 미팅이 있을 예정이라 말하는 황규호 감독을 바라보던 이준은 돌아서는 그를 불러세웠다.

“감독님, 그런데 이 작품, 투톱 극이잖아요.”

“으응?”

“저 말고 다른 분은 이미 캐스팅이 됐나요?”

“아, 그, 그게―.”

“호호, 이준 씨. 아직 이준 씨 상대 배우는 컨택 중이에요. 윤곽이 잡히면 아마 감독님께서 바로 언질 주실 거예요!”

“그렇습니까?”

이준이 황 감독을 응시하자 황 감독이 대답했다.

“그럼, 다, 당연하죠! 용호 역할은 아주 중요하니 당연히 캐스팅이 확정되면 이준 씨한테 먼저 알려야지. 걱정 마요. 하하하!”

이준은 저만 믿으라는 듯 손바닥으로 가슴 부분을 탕탕 치는 황 감독을 향해 빙긋 웃어 주었다.

‘<역린>……이라.’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황규호 감독과 최재선 작가를 배웅한 후, 천천히 돌아온 이준은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나랑 우리 최 작가가 이번에 준비하고 있는 신작 드라마는 사극이에요.]

[사극이요?]

[응. 정확히는 전통 사극이라기보다는 퓨전 및 가상 시대극이에요. 가상 조선의 한 미쳐 버린 왕과 그 왕의 부하로 지낸 노비의 왕위 찬탈극을 그려볼까 하거든.]

[감독님의 말씀에 보태자면, 긴 호흡의 드라마니만큼 로맨스도 존재는 하겠지만 큰 줄기는 정치극이에요. 왕위를 빼앗긴 왕이 제 자리를 차지한 노비에게 복수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부분은 변경될 수 있어요.]

[맞아. 아무래도 감정 변화가 중요해서 미친 왕 역할이 중요한데……. 우리는 이준 씨가 그 역할, ‘이태’를 소화해 줬으면 해요.]

‘재미있겠네.’

여태껏 이준은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려 왔으나 사극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남자 투톱 드라마라.’

영화를 제외하고는 평범한 로맨스 드라마 위주로 이름을 알려 왔던 이준에게 있어선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괜히 두근거리는 마음에 손에 들린 대본집을 세게 움켜쥐던 이준은 코를 킁킁대는 양랑의 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왜.”

《아니. 익숙한 냄새가 나서. 본군의 착각인가.》

이준이 양랑이 있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이쪽! 이쪽입니…… 컥!”

이준의 시야로 누군갈 데리고 대표실로 향하던 이정후 대표가 보였다.

《저 녀석, 그 녀석 아냐?》

딱딱하게 굳은 이준을 향해 양랑이 말했다.

《주인이랑 입 맞춘 그 녀석 말이야.》

이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 어이. 무슨 그런 섬뜩한 소리를 해? 입을 맞췄다니.’

그러자 양랑은 태연하게 되물었다.

《맞춘 거 아니야? 아주 물고 빨고 다 하던데?》

‘야, 뚱냥이! 너는 하급 비생한테서 영기 빼앗는 행위를 입을 맞춘다고 표현해?’

《하급 비생? 설마 저자를 비유하는 거야? 주인, 말은 바로 해야지. 저 녀석은 주인보단 월등히……》

“<함(喊)>.”

《――!》

누가 제 편인 줄도 모르지?

이준은 언령을 사용하여 코웃음을 치던 양랑의 입을 다물게 했다.

양랑이 불쾌하다는 듯 우우웅 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검은 눈이 정면을 향했다.

클레몽 엔터테인먼트의 이정후 대표는 이준과 시선이 마주치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도둑이 제 발 저린 사람처럼 이준의 시선을 애써 회피하고선 제 뒤편에 있던 남자와 이준 사이를 막으려 애썼다.

“대…….”

“배우님! 여기 계셨군요!”

그때였다.

이준이 이정후 대표를 부르면서 이 대표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이준의 뒤편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태경이었다.

“두 분은 잘 배웅해 드렸어?”

“당연하죠. 참, 그것보다 최 작가님이 앞으로 캐릭터 구상 때문에 배우님이랑 연락을 주고받고 싶으시다는 말씀을 미처 못 드렸다면서, 배우님 개인 연락처 좀 얻을 수 있을지 여쭈어보셨어요.”

“그래?”

“제가 임의로 배우님 업무용 번호 알려 드렸는데, 괜찮으시죠?”

“어. 당연히 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다시 이 대표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이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배우님?”

“없어.”

“예?”

이준이 짜증스럽게 두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어디 갔지?

“차, 차휘 씨! 잠깐만요.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성큼성큼 대표실로 움직이려는 이준의 앞을 큰 키의 여자가 막아섰다.

이준은 단정한 오피스룩 차림인 유승아 비서를 응시했다.

유 비서는 대표실로 직진하던 이준이 돌연 뚝 멈춰 서선 저를 내려다보다 적잖이 놀랐는지 흠칫거렸다.

이준은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우리 유 비서님, 오늘은 좀 이상하시네.”

“예, 예?”

“평소엔 제가 가고 싶지 않아도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반기시더니, 오늘은 왜 저렇게 커튼까지 쳐서 대표실을 꼭꼭 가린 거래요?”

유 비서의 기다란 목 사이로 침이 넘어가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포착한 이준이 더 짙게 웃었다.

“안에 뭐, 좋은 걸 숨기기라도 하셨나?”

“호, 호호! 그, 그럴 리가요. 차휘 씨가 오해하시는 거예요.”

“오해? 제가 오해를 했을까요?”

“당연하죠. 마치 대표님이 우리 차휘 씨한테 뭔갈 숨기시는 걸로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절대로 아닙니다!”

“호오, 그렇군요. 저한테 아무것도 안 숨겼다라…….”

유 비서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 대표님은 지금 VIP를 접대 중이세요.”

“VIP?”

“예. 그러니 차휘 씨도 다른 볼일을 보고 다시 오시는 게 좋겠어요. 아마 한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손목에 찬 시계까지 흘긋거리며 말하는 유승아 비서의 말에 이준은 눈을 가늘게 떴다.

“허억.”

유 비서가 그런 이준의 예리한 눈빛을 마주하고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VIP라니. 조금 전에 구승효가 들어가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물론 갑자기 나타난 태경 탓에, 검은 볼캡을 눌러 쓴 남자가 구승효임은 완벽하게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저 녀석, 그 녀석 아냐? 주인이랑 입 맞춘 그 녀석 말이야.]

천하의 호랑이 비생 양랑이 거짓을 말할 리 없지 않은가.

《난 거짓말 안 한다니까.》

몇 분 전, 언령을 사용하여 제 입을 틀어막은 이준에게 양랑은 불만을 느낀 게 분명하다.

퉁명스레 대답하는 양랑의 말을 외면하던 이준은 “다음에 다시 오시죠.” 하고 호호 웃는 유 비서를 응시했다.

‘엄청나게 수상한데.’

수상해도 보통 수상한 것이 아니다.

이준은 유 비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녀는 처음엔 생글생글 웃고 있다가 제게서 눈을 떼지 않는 이준으로 인해 몹시 당황하는 듯싶었다.

“차, 차휘 씨…….”

끝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고 우뚝 서 있기만 하는 소속사 최고참의 행동에 결국에는 글썽글썽 눈에 눈물방울까지 맺자 이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중에 저한테 연락 달라고 꼭 전해 주세요.”

“……!”

의심쩍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이준은 물러났다.

돌아서는 이준의 뒷모습을 보며 유 비서가 손을 흔드는 걸 얼핏 본 듯했으나, 그는 모르는 척했다.

―Rrrr. Rrrr.

대표실 앞을 서성거리다 결국 태경의 차로 내려온 이준이 막 의자에 착석하는 순간, 웬 전화가 걸려 왔다.

강주였다.

“응.”

―한가하십니까?

“바쁘십니까?”도 아니고 “한가하십니까?”다.

이준은 픽 웃고 말았다.

“어. 한가하네.”

올 초까지 가열 차게 일했던 이준은 확실히 근래 들어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외향적인 성격이었지만 밖으로 나가면 매번 원치 않은 일에 휘말리곤 했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을 순 없잖아.’

하여 차기작을 정할 동안엔 주로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사옥에 드나들며 얼굴을 비추었던 것이다.

가끔, 이렇게 강주의 전화를 받을 때를 제외하고는.

―잘됐습니다.

차이준의 두 살 아래 동생인 차강주는 살갑게 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작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이준에게 꼬박꼬박 말을 높였다.

특히 이번처럼 극존칭의 말투를 구사할 때면 비생과 관련 있을 확률이 있었다.

이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야?”

―예.

강주의 사무적인 말에 이준은 한탄했다.

“강주야. 이 오빠, 나 본가 다녀온 지 얼마 안 됐어. 그것뿐이냐? 오늘 영감님한테 욕 문자도 받았다니까.”

―예? 욕…… 문자요?

강주의 당황한 목소리가 귀를 울린다. 이준은 말했다.

“응. 그 영감님, 곧 죽을 나이가 돼서 그런지 나한테 아주 야박하더라. 내가 친손자가 맞기는 한지 아주 의문이…… 내 말, 안 듣고 있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습니다.

이준은 헛웃음을 삼켰다.

“알겠어.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자.”

―예.

“몇 급 비생이지?”

이준의 눈이 매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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