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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이라면 악연-14화 (15/72)

14화

손각시(孫閣氏) (5)

순식간에 달라진 이준의 목소리에 강주가 잠시 대꾸하지 않았다.

“강주야?”

이준이 한 번 더 그녀를 부르자 다시 핸드폰 너머로 답변이 들려왔다.

―중급입니다.

뭐야, 중급이야?

이준은 심드렁하게 대답하려 했다.

“중급이면 뭐…….”

―하지만 그간의 중급 비생들과는 다를 겁니다.

“무슨 뜻이야?”

강주는 설명했다.

―중급일지라도 오랫동안 활동해 오면서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어쩌면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상급으로 진화했을지도 모르죠.

“조심……해야 하는 건가?”

이준이 조심스레 묻자 강주는 대답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다행히 이번에는 ‘조력자’가 있거든요. 그분이 오라버니를 도와줄 테니, 어렵지 않게 해결 가능할 겁니다.

“아, 그래? 조력…… 뭐? 조력자?”

‘강주야. 혼자 일하는 것도 살 떨려 죽겠는데 웬 떨거지까지 붙이는 거냐.’

이준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끝내 뱉어 내지 못했다.

“그럼 자세한 사항은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하고 말한 강주가 통화를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성격도 급하지.”

강주는 해야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분명하게 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애초에 맡기지도 않았을 거야.’

그렇게 되어서, 현재 시각 오후 11시 29분.

서울시 마포구 상운동에 있는 TVX 방송국의 문 앞을 서성이던 이준은 쓰고 있던 남색 볼캡의 뚜껑 부분을 만지작댔다.

[이번 비생은 여성형으로 보입니다.]

[여성체?]

[예. 이 비생으로 인해 죽음을 맞은 피해자 대부분이 남성인데, 남성 피해자를 훨씬 더 잔혹하게 살해했습니다. 남성 피해자들의 얼굴은 뭉개진 반면, 여성 피해자에게는 약간의 배려도 보이더군요.]

[적지 않은 사상자를 냈댔지. 그럼 지금까지 몇 명이나 당했는데?]

[피해자는 총 일곱입니다. 여성 둘, 그리고 남성 다섯입니다. 가장 최근의 피해자는 사흘 전에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게……]

[예. TVX 방송국 지하 주차장입니다.]

꿀꺽.

[저희의 조사 결과 이 비생은 13년에 걸쳐 일곱 명의 피해자를 만들었습니다. 워낙 조심스럽게 움직여 그 뒤를 쫓는 게 늦었죠. 근래 두 명의 피해자를 내놓지 않았다면, 다시 몇 년이 더 흐른 뒤에야 흔적을 발견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주의하십시오.]

강주는 경고했다.

‘중급 비생이라.’

괜히 목이 말랐다.

“그래. 별거 아니야.”

고작 중급이잖아.

“지금까지 이 몸이 해 온 게 있는데, 상급만큼 강하다고 해도 중급 정도면 껌이지.”

적어도 특급은 아니니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던 이준에게 양랑이 말했다.

《맞다. 걱정 마라, 주인. 주인에겐 접근도 못 하도록 본군이 손 써 주겠어.》

“하지만 양랑, 네가 손을 쓸 수 없는 경우에는?”

《뭐?》

“그런 경우에는 어떡하냐?”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이준은 언령을 다룰 수 있기는 하나 아직은 부족했고, 도중에 모든 것을 그만두고 뛰쳐나왔던 터라 정식 비생 교육은 받지 않았다.

“만약 내 목숨이 위험해질 때는 어떻게…….”

“그럴 때는, 제가 지켜 드리죠.”

이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목소리…….’

이준은 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다.

한번 들으면 쉬이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기에 더욱더.

‘양랑.’

《왜.》

양랑의 심드렁한 대답이 머리를 울렸다. 이준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혹시 말이야. 지금 내 뒤에 있는 녀석…… 너도 아는 녀석이야?’

이준은 얼굴을 펴지 않은 채 물었다. 그러자 흐음, 하고 콧소리를 낸 양랑이 말했다.

《키는 크고 얼굴은 허옇고 눈은 부리부리하고 네 녀석처럼 익숙한 걸 보니…… 그러네. 아는 녀석이네. ‘그 녀석’이야. 너랑 입 맞춘 녀석.》

양랑은 쓸데없는 수식어까지 사용하면서 이준에게 답해 주었다.

‘빌어먹을.’

살 떨리는 대답이 들려오자 이준은 후우 숨을 내쉰 이후 곧 생긋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하하, 구승효 씨가 이 시각에 여기는 웬…… 꼴이 그게 뭡니까.”

최대한 미소를 지으려던 이준의 얼굴이 구겨졌다.

현재 승효는 검고 긴 두루마기 차림이었는데, 그의 갈색 머리카락과 함께 매치되자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거기다 190센티를 넘는다는 남자가 이 늦은 밤, 두루마기를 입고 서 있는 모습을 보니 황당했다.

이준이 어이없다는 듯 그를 응시하자 승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가요?”

당연히 이상하지!

‘무슨 저승사자야?’

이준은 그만 웃어 버렸다.

“지금 이 차림에서 검은 모자만 쓰면 당장 지옥으로 안내하는 존재라 봐도 무방하네요.”

그 말에 승효가 순간 놀라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모자가 있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으응?

“원래 검은 모자를 쓰기는 하는데, 오늘은 마침 세탁을 맡겼던 터라 쓰지 못했어요.”

“아…….”

이런 상황에선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진지하기 그지없는 승효의 대답에 순간 목이 막혔다.

“그런데 선배님은…… 그 복장이십니까?”

“왜요. 내 옷차림이 뭐 이상하기라도 합니까?”

이준은 남색 볼캡을 눌러쓰곤, 아래에는 연한 보라 바탕에 노란색 줄로 포인트를 준 트레이닝복 세트를 입고 있었다.

보통 이런 복장은 20대 초중반의 대학가 인물들이나 착용할 복장이기는 했으나……. 왜, 30대는 사람 아니야?

이준이 따지듯 묻자 승효는 빙긋 웃었다.

“귀엽습니다.”

흥.

“당연하지. 이 차이준은 항상 귀…… 뭐?”

코웃음 치며 투덜대던 이준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승효가 그런 이준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뭐, 뭐야.’

농담인지 진담인지.

‘아니, 농담인 게 분명하지!’

《과연 그럴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넌 좀 가만히 있어.’

《그건 주인 아니야?》

이준은 제 부아를 채우는 것이 틀림없는 양랑에게 한 번 더 주의 준 뒤 어느새 자정을 향해 달려가는 밤하늘을 힐긋거렸다.

“가, 강주가 말한 ‘조력자’라는 게 다름 아닌 구승효 씨군요.”

승효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견자를 파견해도 되건만, 차 회장이 일부러 구승효를 보낸 것이 틀림없다.

‘요망한 노인네 같으니.’

아무리 그래 봐라.

내가 남자랑 가짜라도 혼인하는지.

이준은 입술을 씰룩이며 구승효를 노려보다 물었다.

“현 상황에 대해선 알고 있어요?”

승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TVX 방송국 내에 여성형 비생이 나타났다고 들었습니다. 피해자만 일곱 명에 육박한다고.”

“맞아요. 여자 둘에 남자 다섯이 죽었다더군요.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을 죽여 온 것으로 보아 강력한 원한을 지닌 비생인 게 분명하고요. 혹시 등급도 들었어요?”

승효는 대답 대신 검지와 중지를 펼쳐 보였다.

중급이라는 의미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승효의 물음에 이준은 대부분의 불이 꺼진 방송국을 힐긋거렸다.

“글쎄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정말로 방송국 내에 그 비생이 주둔하고 있는지 살펴봐야겠죠.”

“퇴치할 방법은 생각해 두셨습니까?”

“그거야…….”

이준은 아마도 제 주변에 있을 양랑을 찾으려 했다.

지금까지 이준은 양랑에게 퇴치 명령을 내렸고 거의 모든 비생들을 그리 처치해 왔다.

하지만 중급이라면…….

“이렇게 하시죠.”

이준이 대답을 머뭇거리자 승효는 말했다.

“선배님께서는 주로 하급이나 중하급의 비생들을 퇴치해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상급에 가까운 중급 비생을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고요. 맞습니까?”

“예, 뭐…….”

“보통 상급 비생들은 중급이나 하급 비생들과는 달리 사람한테 달라붙을 수 있습니다. 빙의될 수 있다는 소리죠. 이번 녀석은 중급 등급을 받기는 했지만, 상급으로 진화했을지도 모르는 녀석이니 퇴치하는 데 보다 유의해야 하고요.”

“그 말은…….”

이준이 묻자 구승효는 대답했다.

“하니, 이번 일은 제 의견을 따라 주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 * *

상명하복이라는 말이 있다.

위에서 명령하면 아래는 따른다는 말로, 상하 관계가 분명하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물론, 연예계에선 차이준이 구승효보다 훨씬 선배의 위치에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열여덟에 데뷔를 했고 이 업계에서 지낸 지 벌써 14년이 지났으니까.

하지만 견자 사회에 있어 이준은 확실히 구승효보다는 후배에 속했다.

견자로서의 미래를 포기했었던 이준과는 달리 구승효는 자신의 가문을 이끌기 위해 그 일 역시 저버리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끄응.

현재 시각 오후 11시 48분.

이준은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 아니었기에, 저보다 몇 발은 경험 많은 ‘선배 견자’ 구승효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이봐요, 구승효 씨.”

“네, 선배님.”

“정말 이 방법이 먹히겠어요?”

이준은 자정에 가까워진 현 시각, 아무렇지도 않게 TVX 방송국 대문을 지나고 있는 구승효를 향해 결국 의문을 던졌다.

그러자 앞서가던 구승효의 연갈색 눈동자가 이준에게 꽂혔다.

[뭐라고요? 정면…… 정면 돌파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최대한 조용히 일을 처리해도 모자랄 판에 그냥 방송국으로 쳐들어가자고?]

[그럼 다른 수가 있습니까?]

[있죠! 하다못해 후문을 통해 들어간다든가 하면…….]

[선배님. 전견협(전국 견자 협회)에서 굳이 우리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우리가 이 업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걱정 마세요. 먹힐 거니까.]

구승효가 의심쩍어하는 이준을 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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