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15화 (16/72)

15화

손각시(孫閣氏) (6)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확신에 차서 말하는 승효를 보면서도 이준은 의심을 거둘 수 없었다.

승효는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멈칫하는 이준을 보고 싱긋 웃더니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이준 역시 그런 승효에게 한마디 하려다 말고선, 그의 뒤를 따랐다.

‘이거, 기자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상황이 우습겠는데.’

야밤의 방송국.

그 방송국으로 침투하려는 큰 키의 두 사람.

차휘와 구승효라는 가장 핫한 두 사람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은 고요한 현 연예계에 풍파를 일으키기엔 충분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준은 최대한 볼캡을 눌러쓰려 애쓰며 TVX 방송국 로비의 회전문을 통과하려 했다.

“자, 잠깐! 거기! 거기 두 사람 멈춰요!”

멀리서 봐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키 큰 두 사람이, 한 사람은 트레이닝복 차림에 다른 한 사람은 검은 두루마기를 착용하고 있다.

졸고 있던 경비원도 벌떡 일어나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

‘거봐!’

이준은 안내데스크에 앉아 꾸벅꾸벅 고개를 아래위로 흔들던 방송국 경비 요원의 외침에 움찔했다.

“이 시각에 방송국엔 어쩐 일이십니까? 누구시고요? 성명이랑 소속을 밝혀 주십시오.”

평소의 밝기에 비해 반은 줄어버린 로비의 조명 때문에 이준과 승효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의심스러운 복장으로 거침없이 방송국 안으로 들어오는 두 남자를 보며 경비 요원이 들고 있던 플래시로 그들을 비췄다.

이준은 하하, 웃으며 말하려 했다.

“선생님, 사실 저희는……”

“고생 많으십니다. 저는 구승효입니다.”

……인마!

어떻게든 정체를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준이 모자를 눌러쓴 것과는 달리, 구승효는 오히려 경비 요원에게 다가가며 인사를 했다.

기겁한 이준이 멈칫한 것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구승효는 말을 이었다.

“이쪽은 차휘 선배님이시고요.”

물귀신 작전이냐?

이준은 저를 가리키는 승효의 발언에 승효의 뒷머리를 노려보다 이내 쓰고 있던 볼캡을 벗었다.

“안녕하십니까. 차휘입니다.”

“헉, 차, 차차, 차…….”

“네. 그 차휘입니다.”

이준이 생긋 입꼬리를 올리자 경비원이 홱 고개를 숙였다.

“차휘 씨, 작년 드라마 잘 봤습니다!”

이준도 경비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야, 그거 OTT에서만 방송됐던 건데 봐 주셨어요?”

“그럼요. 하도 재밌다고 소문이 나서 안 볼 수가 없었죠!”

“감사해요. 이거…… 경우 님이 봐 주셨다니 더 뿌듯합니다. 고생한 보람이 있어요.”

“헉, 제, 제 이름을…… 아하하! 명찰, 명찰이 있었지!”

이준이 순식간에 경비 요원의 이름을 스캔하여 미소를 그리자 흠칫 놀라던 요원이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한데 이 시각에 두 분께서 저의 방송국엔 어쩐 일이십니까?”

그렇게 한참 이준의 전작에 대해 대화를 주고받던 두 사람 중 먼저 현실로 돌아온 이는 경비 요원이었다.

‘그래. 대체 정체를 밝혀서 어쩔 생각인데?’

이준이 입꼬리를 차마 내리지 못하고 경비 요원과 비슷한 눈초리로 승효를 노려보자 승효는 차분하게 말했다.

“예능국의 박민종 PD님과 긴급 상의할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박 PD님이요?”

“예. 저와 여기 계신 차휘 선배님이 조만간 신작 예능에 참여할 예정인데, 박 PD님이 갑자기 저희 두 사람을 동시 호출하셨거든요.”

《이 녀석, 보기보다 헛소리에 능하네. 주인, 너랑 비슷한 녀석임이 분명해.》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승효의 행동에 양랑이 속삭였다.

‘조용히 해.’

이준은 입술을 삐죽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승효의 거짓말을 듣고 ‘아…….’ 하고 탄식하던 경비 요원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예능 쪽은 야밤의 호출이 꽤 많은 편이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박 PD님께 확인 전화를 해도 되겠습니까?”

‘뭐?’

“그건…….”

“얼마든지요.”

이준이 정중하게 요청하는 경비 요원을 말리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승효의 대답이 빨랐다.

고맙다며 다시 안내데스크로 돌아가는 경비 요원의 뒤를 보던 이준이 승효를 응시했다.

허공에서 이준과 시선이 부딪힌 승효가 빙긋 웃었다.

얼마 뒤, 다시 돌아온 경비 요원이 미소와 함께 말했다.

“박 PD님께 확인했습니다. 두 분의 길을 막아서 죄송합니다. 얼른 올라가시죠. 예능국은 신관에 있습니다.”

* * *

―하하, 걱정 마. 볼일이 있다는데 당연히 도와줘야지. 오늘 일도 발설 안 할 테니, 나중에 승효 씨도 나 한 번 도와줘. 빚은 지고 살면 안 되잖아?

“감사합니다, 박 PD님. 들어가십시오.”

이준은 복도의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러고는 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전화 통화를 하며 누군가에게 정중하게 인사하는 구승효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생각보다 인맥은 있나 보네.’

구승효의 방법이 먹힐 줄이야.

이준은 새삼 감탄했다.

《누구랑은 다르게 말이야.》

‘뭐래. 나도 방송국에 인맥 정도는 있어.’

《그런 녀석이 저런 쉬운 방법을 사용할 생각도 안 하고 무작정 침투하려고 해?》

‘그건…….’

《가끔 보면 주인은 무척 순진해. 그런 의미에서 주인이 저 녀석과 혼인하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겠네. 태모가 주인이랑 저 녀석을 혼인시키려는 것도 이해가……!》

“<함(喊)>.”

제 귀에 대고 쉴 새 없이 말을 늘어놓던 양랑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듣다 못한 이준이 언령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꼭 이렇게 언령을 쓰게 만든다니까.’

우우웅―.

이준은 그에 으르렁대듯 파동을 보내는 양랑의 반항을 외면했다.

“죄송합니다. 기다리셨죠?”

그렇게 이준이 TVX 방송국 예능국의 복도 한가운데서 양랑과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통화를 마친 승효가 그에게 다가왔다.

‘밝은 곳에서 보니 이 검은 두루마기, 진짜 웃기네.’

물론 저 아닌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이준에게 다가오는 구승효의 모습에 또 한 번 반했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옷태 하나만큼은 완벽한 남자였으니까.

그러나 이준은 구승효가 어째서 이 옷을 입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비생을 퇴치할 때는 의식처럼 이런 옷을 입습니다. 아마도…… 징크스 같은 건지도 모르겠네요.]

어째서 그런 두루마기 차림으로 나왔냐고 물었을 때, 승효는 대답했다.

‘징크스라는데 어쩌겠어.’

이준은 “선배님?” 하고 부르며 저를 내려다보는 승효에게 답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흥미롭네요. 난 구승효 씨가 이렇게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어.”

그러자 구승효의 눈이 살짝 가라앉았다.

그는 미묘한 눈으로 이준을 응시했다. 그 시선이 꽤나 기묘해서 이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생의 일이니까요.”

곧 구승효의 입이 열렸다.

“저는 거짓말을 그리 즐기지는 않지만, 비생과 관련되는 일은 일반인이 알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리가 있는 발언이다.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생이 존재하는 세계와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엄연히 구분되어 왔고, 일반인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그들로부터 비생을 떨어트려 놓아야 하죠. 이에 가끔은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라 생각하고요.”

이준은 자신의 신념에 대해 말하고 있는 승효를 똑바로 응시했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어서인지, 승효의 눈동자가 빛나서인지.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 마음가짐은…… 꽤 괜찮네.’

그동안 이준은 구승효를 제 자리를 탐내는, 발랑 까진 어린 녀석이라 생각해 왔다.

게다가 비교적 순식간에 톱의 자리에 오르는 바람에 다른 이들을 대할 때 교만함을 버리지 못한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본가에서의 만남 이후 승효와 몇 번 대화를 나눈 뒤 받은 느낌은 그간 생각하고 있던 제 머릿속의 ‘구승효’와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교만한 것이 아니라 진중했고, 발랑 까진 것이 아니라 사람을 대함에 있어 그저 서툴 뿐이었다.

제멋대로인데다 되바라진 녀석인 줄 알았더니, 단지 꽉 막혔을 뿐인가.

그리 생각하자 괜스레 픽 웃음이 났다.

“구승효 씨.”

“선배님이라면 이름을 부르셔도 됩니다.”

이준은 묘하게 들리는 그 말에 살짝 멈칫하다 대답했다.

“좋아, 승효 씨. 그렇게 말하니 나도 편하게 대할게.”

아직 네 녀석을 ‘친한’ 범주에 넣지는 않았지만 언제까지나 날을 세울 순 없으니.

이준은 제 다음 말을 기다리는 승효에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간, 내가 승효 씨를 오해했던 모양이야.”

“오해요?”

승효가 미간을 찡긋대며 되묻자 이준은 머쓱하게 대답했다.

“응. 난 승효 씨가 내 자리를 노리는 버릇 없는 신인인 줄 알았거든.”

승효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준은 하하 웃었다.

“알잖아, 이 업계. 버티지 못하면 누구든 추락하는 거. 그러니 작은 자극에도 반응할 수밖에.”

“…….”

“뭐, 그래서 승효 씨 인상이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인데…… 이건 내 잘못이네. 사과할게. 미안해.”

이준은 머리를 숙였다.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승효 씨한테 안 좋은 가졌던 거, 확실히 잘못된 일이야. 선입견이라는 건 의외로 오래 남아 있어서 나도 모르게 승효 씨를 대하는데 딱딱했던 것 같아. 그래서 그날도…….”

이준은 고현동의 본가에서 승효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승효에게 적대감을 가지며 차가운 언행을 쏟아 냈던 제 모습들이 떠올랐다.

미동 없는 구승효의 연갈색 눈동자에 제 얼굴이 비쳤다.

돌연,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나야 휘준이를 위해서라도 구승효한테 영기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기는 해.’

이준은 가족들 내에서는 많은 영기를 지니고 있다지만 귀영 의식을 치르기에는 한없이 부족했고, 영력을 다루는 데 있어도 수련이 덜 됐다.

아마도 구승효와 함께 지낸다면 견자로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그에게 이런저런 일들을 배울 수는 있겠지.

그런데 구승효는?

‘이 상황에서 구승효가 얻는 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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