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손각시(孫閣氏) (7)
현월 구가는 현재 명맥이 다하여 젊디젊은 구승효가 가주 직을 겸하고 있다.
구가의 식구들은 어디로 갔는지 뿔뿔이 흩어져 있었고 5대 종가라고 칭하기에는 세력이 부족하다.
‘고현 차가를 제 휘하 안에 넣으려고 그러는 건가?’
이준은 아직 고현 차씨 일가의 종손이다.
휘준이 귀영 의식을 치르지 않는 한, 차태모 회장의 뒤를 이어 후계의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 역시 이준이었다.
이준 본인은 격렬히 거부하고 있다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그래.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승효의 의도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미간이 좁아졌다.
그때였다.
“선배님.”
승효가 이준을 불렀다.
이준은 손을 휘이 저으며 말했다.
“알아. 승효 씨도 내 대답 기다리는 거. 하지만 잠깐만 기다려 봐. 나도 생각을 좀 해 봐야겠어.”
이준은 인상을 쓴 채 대답했다.
‘이 혼인 의식에 있어 구승효의 의도를 명확히 알 수 없다면 후일 고현 차씨 일가에 해가 될 수도 있다고.’
“선배님.”
“아니, 승효 씨. 나 지금 생각 중이잖아. 보통 일도 아닌데 대답이 그리 쉽게 나올 거라 생각 마. 참을성 있게 기다려 보라고.”
“…….”
다른 일도 아닌, 무려 제 ‘혼인’이 달린 문제다.
법적으로도 아무 효력이 없을 일이기는 하나 가문의 사람들은 누구나 알게 될 일일 터.
이준은 신중해야 했다.
‘그래. 신중해야 해.’
16년 전의 그때와 같은 끔찍한 일을 겪지 않으려면…….
“선배님.”
《주인.》
하아.
“아니, 이젠 너까지 왜 자꾸 부……!”
자꾸만 그의 생각을 방해하는 승효와 언제 언령이 풀린 건지 저를 부르는 양랑의 목소리에 이준은 짜증을 내려다 멈칫했다.
“저기…….”
“…….”
“하하. 설마…… 지금, 여기 있어?”
주변이 싸늘해진 것을 이제야 자각한 이준이 경직된 얼굴을 펴며 묻자 승효는 대답했다.
“손각시입니다. 그러니 이러고 있지 말고…….”
“어?”
바보처럼 반문하는 이준의 손을, 승효가 확 잡아채며 소리쳤다.
“달려요!”
* * *
그그극. 그극. 끼긱.
‘맙소사. 맙소사. 맙소사.’
드득. 드드득. 그극. 득!
쾅―.
“헉!”
앞으로 달려가던 이준이 대강당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문이 닫혔다.
《주인, 괜찮아?》하고, 양랑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이준을 향해 말을 건넸다.
이준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다 덜덜덜, 흔들리는 문고리를 내려다봤다.
“<봉(封)>!”
이준의 입술 사이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큰 글자가 허공에 떠올랐다.
이어 연기는 곧 문고리를 향했다.
쿠웅!
급히 봉인 언령을 사용하기는 했으나 쾅쾅대는 문을 막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두두두. 두두두―.
‘젠장!’
기껏해야 1, 2분 정도려나?
이준은 주변에 결계를 친 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승효를 올려다봤다.
[좁은 곳은 위험합니다. 방송국엔 아직 퇴근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있으니 일단 넓은 곳으로 유인하죠. <수(搜)>. 선배님, 이쪽입니다!]
“일단 유인하라는 곳으로 유인하긴 했는데, 이제 어쩔 작정이야?”
이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도통 멎지 않는다.
이준은 조금 전, 자신이 두 눈으로 목격했던 비생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앞으로 내리깐 기다란 머리카락에 뚝, 뚝 흘러내리는 핏방울.
새하얗다 못해 혈기라고는 없는 얼굴에 피 칠갑이 되어 있는 입술.
그리고 공중에 둥둥 뜬 채 그들에게 날아오던 흰 소복 자락까지.
‘끔찍했지.’
이준은 견자 종가의 출신으로 기괴한 비생들을 종종 보아 왔으나 이번 ‘손각시’는 그가 여태껏 접한 비생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중급으로 분류됐다고는 하지만 상급이나 매한가지라더니, 그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붙잡혔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네.’
수년간의 원한으로 인해 진한 흑색으로 물든 그녀의 영기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쾅, 쾅, 쾅!
드득. 그그극! 드드득!
확실히 이준은 상급에 가까운 비생을 퇴치한 적이 없었기에 경험자의 말을 듣는 것이 중요했다.
손각시는 당장이라도 대강당 안으로 침투하려는 듯 문밖에서 기분 나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글쎄요.”
숨을 죽이며 승효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리던 이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승효는 당황한 이준을 응시하며 말했다.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비생입니다. 확실히 상급으로 진화한 게 맞는 것 같습니다.”
《흐응, 그래서 저리 강한 원기가 느껴지는 게로군.》
“산군께서는 퇴치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뭐, 본군은 네 말대로 한때 산군이라 불렸던 자다. 현재는 모든 힘을 쓸 수는 없으나 실제론 특급에 가깝지. 당연히 저런 중상급 비생 따위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 잠깐, 너, 본군의 말이 들리는 거냐?》
코웃음 치던 양랑이 깜짝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준의 눈 역시 이준의 옆을 응시하고 있는 승효에게 꽂혔다.
승효가 미소 지었다.
“예. 들립니다.”
그러자 양랑은 중얼거렸다.
《그래? ……희한한 일이군. 네가 본군을 볼 수 있는 건 그 영기 때문이라도 이해가 간다만, 말을 듣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젠데…….》
“차원? 무슨 차원! 그것보다 이봐들. 그런 사소한 건 나중에 다시 말하고.”
드득. 콰쾅!
쾅. 쾅!
“저거, 어떻게 처리할 거야?”
이준이 손톱 긁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요란한 굉음에 다급히 묻자 승효가 이준을 빤히 응시했다.
‘으응?’
그 뜨거운 시선에 이준의 몸이 오싹해졌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 * *
《용서 못 해.》
오래전, 그녀에게는 이름이 존재했다.
들으면 기분이 좋고 콧노래까지 흘러나오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더 이상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의 이름을 불러 주었던 이는 그녀를 배신했다. 간절한 마음을 짓밟았으며 매정하게 돌아섰다.
미웠다.
죽을 만큼 미웠고,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스러웠다.
[저, 저, 저리 가. 저리, 저리 가! 저리 가란 말…… 끄어억!]
그래서, 죽였다.
맑고 사랑스러웠던 눈을 뽑아 잘근잘근 씹어먹었고 보기 싫은 얼굴은 마구 밟았다.
통쾌했다.
뚝, 뚝 흐르는 그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한 번 더, 이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제발, 크아악!]
[집에, 집에 아직 어린아이가 있어요! 목숨만은, 컥!]
[잘못했어요. 잘못했다고요!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
이곳엔, 죄를 지은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
고르고 또 골라 그것들의 목숨을 빼앗기는 했지만 부족했다.
《더…….》
더, 죽여 버려야 해.
매일 밤, 불이 꺼진 복도를 돌아다니며 그녀는 먹잇감을 찾아 헤맸다.
긴 머리카락을 내리며 다가가는 그녀를 보곤 대부분의 이는 놀라 달아났으며, 몇몇 이들은 고꾸라졌다.
심약한 이들은 기절도 했었다.
한데…….
“이봐! 여기, 여기야!”
저건 대체, 뭐지?
그극, 그그극―.
그녀의 가려진 시야 사이로 보인 것은 보라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웬 남자였다.
그가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이후 줄곧 쫓아온 새로운 ‘먹잇감’이다.
“여기라고, 여기!”
멀끔하다 못해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지닌 남자의 얼굴은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다.
저것은 분명, 부정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내버려 두어서도 안 돼.’
그녀는 이런 형태로 존재하게 된 이후로 오랜 시간 동안 이곳에서 머물렀기에 간혹 저런 인간들을 마주치곤 했다.
아마도 저 어리석은 인간은 그녀를 ‘퇴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녀는 “여기라고!”라 외치며 저를 유인하는 인간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피라미 주제에.’
인간들은, 특히 남자들은 도대체가 정직하지 못하다.
하니 저 이상한 인간 역시, 겉보기엔 멀끔해도 속은 시커멀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는 또다시 분노에 휩싸였다.
“크윽!”
대강당을 지나 방송국 밖 광장으로 그녀를 유인한 사내를 제압하기 위해 그녀가 힘을 분출하자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용서…… 못 해.》
보라색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가 강력한 그녀의 원기에 옴짝달싹 못 하는 사이, 그녀는 순식간에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한 뼘.
딱 한 뼘의 거리.
그녀는 자신의 신경을 거스른 이 사내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
평소의 그녀였다면 이렇게 상대를 제압한 뒤 곧바로 입을 벌려 그를 잡아먹었을 것이다.
그녀의 입은 크고 잔인했으니까.
‘…….’
그러나 그녀는 조금 놀랐다.
어째서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이 사내를 단번에 입 안으로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했는데, 의외로 답은 빠르게 나왔다.
《너에겐, 달콤한…… 냄새가 나는군.》
눈앞의 사내에게서는 다디단 향기가 났다. 탐스러운 복숭아를 베어먹을 때의 향기와도 같았고 만개한 꽃봉오리에서 풍기는 향기와도 같았다.
어찌 인간이 이런 향기를 풍길 수 있지?
그녀는 의문에 가득 찼다.
지금까지, 기나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인간을 먹는 데 주저한 적은 없었는데.
그극. 그그극.
그녀는 팔을 뻗어,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었다. 이 단 냄새는 대체 어디서 풍기는 것인지 궁금해졌――!
“<박(縛)>!”
그때였다.
딱 한 뼘.
정말이지 한 뼘이면 가능할 거라 확신한 그 거리에서 그녀가 남자의 얼굴 끝을 부여잡으려는 순간, 굵은 쇠사슬이 그녀의 몸을 묶었다.
놀라 고개를 돌리니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웬 남자가 그녀를 향해 언령을 사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