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손각시(孫閣氏) (8)
《캬아악!》
드득. 드드득!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쇠사슬을 풀기 위해 몸을 비틀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이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이건, 이건 대체……!
“그러게, 방심하지 말았어야지.”
……뭐?
“양랑!”
《맡겨 둬, 주인!》
그녀는 분명 조금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거대한 흑호가 저를 향해 하얗고 날카로운 이를 번뜩이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그녀 또한 자그마치 3미터에 육박하니 결코 적은 몸집이 아니었으나, 그녀와 대적하고 있는 흑호는 그녀만큼이나 컸다.
‘도망…… 도망쳐야!’
단 한 번도 이런 무시무시한 것은 만난 적이 없었기에 그녀는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그녀는 포박당한 상태에서도 얼른 쇠사슬을 끊고 도망치고 싶어졌다.
그런 그녀가 뒷걸음질 치려 하자, 그녀의 앞에 서 있던 보라색 트레이닝복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못 도망쳐!”
그러고는 외쳤다.
“천지신명의 약속 아래 맺은 영혼의 계약을 이행하니, 양랑, 힘을 해방하라! <현(現)>!”
보라색 트레이닝복 남자의 외침에 그녀와 같은 눈높이였던 흑호의 몸집이 2배 이상은 커졌다.
크아아앙!
곧 커다란 입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 * *
“선배님이 미끼가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구승효는 말했다.
“뭐?”
이준은 제 귀를 의심하며 물었으나 승효는 말을 뱉어 낼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기, 잘못 들은 건 아니지?”
《아닌 것 같네. 저 녀석은 주인을 미끼로 삼으려고 해. 아니, 정확히는 제물인가.》
“제물은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이준이 몸을 부르르 떨며 아마도 양랑이 있는 곳을 향해 말하자 구승효가 여전히 쾅, 쾅 소리가 들리는 대강당의 입구 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보통의 하급 손각시는 원한을 풀어 주면 사라집니다. 하지만 저 손각시는 원한이 쌓이고 쌓여 진화한 것 같군요.”
승효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런 것들은, 소멸시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 그래. 알겠어. 아무래도 그동안 사람들에게 큰 해를 끼쳐 왔으니 당연히 없애야겠지. 나도 알아. 그런데, 하필 왜 내가 미끼가 되어야 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준이 묻자 승효는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럼, 선배님께서 포박 언령을 사용해서 그녀를 붙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포박술이 느슨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강력해도 안 되죠. 선배님께서 그런 언령을 사용해 주실 수 있다면 제가 기꺼이 미끼가 되겠습니다.”
반대의 입장도 괜찮다며 승효가 말하자 이준은 순간 머뭇거렸다.
‘내 언령술은 어깨너머로 배운 게 다인데…….’
할 줄 아는 언령도 몇 가지밖에 없어서 이준은 쉽게 대꾸하지 못했다.
그런 이준의 반응을 지켜보던 승효가 말했다.
“첫 번째 의견대로 가죠.”
* * *
“으아악!”
이준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괴성을 질렀다.
헉, 헉, 헉, 헉.
온몸이 땀에 젖은 듯 축축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한 뼘 차이였다.
그 무시무시한 손각시와 자신의 거리는 고작 한 뼘 차이.
만약 적절한 시기에 구승효가 포박 언령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이준은 손각시가 달려드는 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
덜덜.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조금 전의 일처럼 생생했다.
잠깐.
‘조금 전?’
이준은 홱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웬 침대에서 눈을 떴고 보라색 트레이닝복 차림이 아닌 환자복 차림임을 깨달은 것이다.
“……!”
이준은 자신이 눈을 뜨고 난 후 취한 모든 행동을 지켜본 사람이 존재함을 인지했다.
그 존재가 하고 있던 행동을 멈추고 말했다.
“깨어나셨군요.”
이준은 미간을 좁혔다.
“어떻게 된 거야? 강주 네가 왜 여기 있어?”
여기는 또 어디고?
이준은 강주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창밖의 풍경이, 그가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검은 하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서둘러 주변을 살펴보니 벽시계에 걸린 시침과 분침은 각각 11시와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날이 밝았단 말이야?’
이준은 분명 TVX 방송국 광장에서 손각시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몹시 당황했다.
차이준의 동생이자 전국 견자 협회에서 서울 지부 팀장을 맡고 있는 차강주는 후, 숨을 뱉어 내더니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오라버니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셨습니다.”
“내가?”
강주는 대답했다.
“당시 오라버니와 구승효 씨를 포착했던 방송국 내, 혹은 밖의 CCTV엔 손을 써 두었으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
“이번에 발견된 중급 비생, 손각시는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죽은 강씨 성을 지닌 여자였던 걸로 밝혀졌고요.”
“23년 전이라고?”
어쩐지.
‘그래서 그리 원기가 강했던 거구나.’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주는 말을 이었다.
“저희 측 조사에 의하면 강 씨는 TVX의 전신인 ‘태방 미디어’ 방송 그룹에서 단막극 작가로 활동하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비교적 활달하지 못한 성격이었던 강씨에게는 연인이 있었는데, 23년 전 그 연인에게 버림받게 되면서 자살을 했다더군요.”
강주는 설명했다.
“알고 보니 그 죽음에 연인의 탓이 적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적지 않다니?”
“강 씨를 두고 방송국 내의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워서, 강씨를 힘들게 했고 그에 강씨가 그런 죽음을 맞은 거라고…….”
“원한은 연인의 바람이었다, 라.”
“저희의 첫 번째 조사는 틀렸던 거죠. 13년이 아니라 23년 동안 방송국의 직원들을 크고 작게 괴롭히다 사람을 죽였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겁니다.”
“…….”
“실제로, 강 씨에 의해 죽은 피해자들은 전부 방송국 내에서 좋지 않은 소문들이 나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정’한 자들인가?”
이준의 중얼거림에 강주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 비생으로 인해 죽음을 맞은 피해자 대부분이 남성인데, 남성 피해자를 훨씬 더 잔혹하게 살해했습니다.]
그제야 유독 남성들에 대한 원한이 가득했던 손각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을 해결하고도 찝찝한 기분이 남아 미간을 좁히던 이준에게 강주가 입을 열었다.
“어젠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짓자 강주는 말했다.
“구승효 씨의 전화를 받고 놀랐습니다. 오라버니께서 비생을 퇴치하기는 했는데, 너무 강한 영기를 받아서 정신을 잃으셨다고 하더군요.”
뭐?
“오라버니. 구승효 씨에게서 받은 영기가…… 그리 강력했던 거예요?”
이준은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강주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 * *
[저 문을 여는 순간, 작전은 개시됩니다.]
기기기긱.
듣기 싫은 굉음이 대강당의 문 쪽에서 들려왔다. 이준은 제게 당부하는 승효를 쳐다봤다.
구승효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준에게 말했다.
[제게서 영기를 받으면, 선배님은 순식간에 영기를 방출해야 합니다. 그래야 산군께서 쓸 수 있는 힘이 커질 테니까요.]
《네 녀석은 본군이 본래의 힘을 쓰기를 바라는 거군.》
[본래의 산군이라면 저 비생을 어렵지 않게 퇴치하실 테지만, 지금은 힘을 온전히 쓰실 수 없어 적지 않은 피해가 발생할지도 모르니까요.]
《흥! 본군은 그리 약하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산군의 피해와 무관하게, 선배님이 피해를 입는 걸 원하지 않아요.]
구승효는 갈색 눈을 이준에게 고정시키며 말했다.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흠흠.’
아마도 혼인 상대로서의 차이준이 다치는 걸 바라지 않는 거겠지.
[뭐, 알겠어. 승효 씨 말대로 할게.]
[약속해 주세요.]
[응?]
[위험하다 생각되면, 그냥 도망치신다고.]
[잠깐. 그러면 포박 언령을 사용하고 있을 승효 씨도 위험해지는 거 아니야?]
이준의 되물음에 승효는 빙긋 웃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요.]
[그래도……]
[시간이 없습니다. 선배님.]
[으응?]
[입, 벌리세요.]
구승효의 명령에 이준은 침을 꼴깍 삼키더니 이내 심호흡을 했다.
그드드득! 드드득!
여전히 대강당 밖의 문에서는 불유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굵은 손톱이 부서지는 그 소리에 입술을 꽉 악문 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뒤, 승효의 앞으로 다가갔다.
[눈.]
[감아, 감는…… 웁!]
퉁명스럽게 대꾸하려던 이준이 눈을 감기가 무섭게 말랑하고 뜨거운 무언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곧 강렬한 열기가 이준의 전신을 휘감았다.
연이어 맛있는 숨결을 쉬지 않고 삼키고 또 삼키던 이준의 오른쪽 귀의 검은색 귀걸이에서 짙은 보랏빛 기운이 피어올랐다.
예의 기운은 더욱더 찬란하게 빛을 발하며 점점―.
“……니. 오라버니?”
간밤에 있었던 ‘의식’을 떠올리던 이준은 정신을 차렸다.
“바, 방금 뭐라고 했었지?”
이준의 물음에 강주의 검은 눈에 의문이 내려앉았다. 이준은 하하 웃으며 강주가 한 말을 떠올렸다.
그는 머쓱하게 대답했다.
“영기. 그래, 꽤 많은 영기였지. 아주 정신없이 빨아들……. 하여간 많았어. 응. 영감님이 왜 그 녀석이랑 손을 잡으려 하는 건지 알겠더라고.”
이준의 말에 강주는 대꾸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준은 병석에 앉은 채로 오른쪽 귀에 걸린 귀걸이를 만지작댔고, 강주는 그 옆의 간이 의자에 앉아 이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주야.”
침묵을 깬 건, 이준이었다.
“그 손각시가…… 겨우 중급 비생이랬지.”
물론 상급이 되어 버린 중급이긴 하지만.
강주는 이준을 응시했다.
이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놈은…… 특급이야.”
특급 비생.
중급이나 상급 비생보다 훨씬 더 높고, 강력한 존재.
[선배님이 빠른 결단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아시다시피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구승효의 말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상급에 가까운 비생도 혼자 잡지 못해 끙끙대는 자신이, 특급인 ‘그놈’을 어떻게 상대하겠나.
하루라도 빨리 구승효에게 영기를 받아서, 더욱 강해져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