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삼충(三蟲) (2)
“승효 씨도 참…… 섭섭하네. 난 어디까지나 승효 씨를 생각해서 한 말이었어.”
헛웃음을 흘리던 이준이 뱉어 낸 말은 승효의 눈꼬리를 휘어지게 했다.
“저를 말입니까?”
승효가 모르는 척 묻자 이준은 흠흠 기침을 뱉으며 대답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나 이래 봬도 ‘로맨스의 황제’라 불릴 만큼 숱한 드라마에 나온 사람이라고. 승효 씨 말대로 그런 키스신은 수도 없이 찍었었지. 그래서 다른 사람이랑 입을 맞추는 덴 거리낌이 없어.”
“그렇습니까?”
“그래. 그런데 승효 씨는 다르잖아?”
이준이 그를 올려다봤다.
“아직 승효 씨는 어리고, 아무리 ‘의식’이래도 남자랑 입을 맞추는 덴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서…….”
“불편하지 않습니다.”
승효는 곧장 대답했다.
“선배님께서 저를 배려해 주셨다니 너무 감사합니다만, 전 딱히 그 ‘의식’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 그다지 어리지도 않고요.”
스물여덟이면 알 것은 다 아는 나이지.
승효의 답변에 이준의 얼굴에 난처함이 감돌았다.
승효는 더욱 뻔뻔하게 밀고 나갔다.
“그러니 방식은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죠. 어차피 다른 방식으로는 힘들 테니까요.”
단호한 승효의 대답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이준이 하하 웃었다.
“그, 그래, 뭐. 그 방식으로…… 그 방식으로…… 하지, 뭐. 오, 오케이.”
중얼거리는 이준의 낯빛이 한층 어두워졌지만 승효는 모르는 척했다.
“맞다, 그리고 의식의 ‘횟수’ 말인데.”
“횟수는 하루 한 번이면 될 겁니다.”
이준이 ‘그렇게나 많이?’라는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자 승효는 설명해야 했다.
“선배님이 제안하신 1년의 계약 기간 안에, 선배님이 되찾을 수 있는 영기를 넘기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횟수의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선배님의 동생분도 안전해질 테고요.”
“그렇……지.”
“게다가.”
승효가 억지로 납득하는 이준에게 말했다.
“어차피 영기를 빼앗기는 건 저니, 선배님이 손해 볼 건 없지 않습니까?”
승효의 발언을 들은 이준은 더는 입술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럼, 정리된 것 같으니 회장님께는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승효는 빙긋 웃었다.
* * *
“저기 말이야. 아무래도 나…… 말린 것 같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이준의 말에 상황을 방관하던 양랑이 대답했다.
《확실히. 아주 맥을 못 추던데.》
터덜터덜 구승효의 집을 나서던 이준은 그 말을 듣자 뚝 걸음을 멈췄다.
“안 되겠어.”
《응?》
“이거 왠지 지는 느낌이라 기분이 안 좋아. 이 차이준이 그 녀석한테 고개를 숙인 기분이라고.”
《그래?》
“그래!”
이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다시 한번 그 녀석의 얼굴을 보면서 내 조건을 말해야…….”
《말한다면 달라지려나?》
“……!”
《오히려 더 말려들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던데, 그 녀석과 대면한 주인은.》
양랑은 냉정했다.
지독하다 못해 신랄할 정도였다.
그는 결코 제 주인과 구승효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상황을 지켜봤기에 더욱 객관적이었다.
《내가 보기엔 그 녀석은 보통내기가 아니야.》
양랑은 말했다.
《그 녀석이 세상에 찌든 흙탕물이라면 주인은 깨끗한 약수물이지. 주인은 생각 이상으로 순진하단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주인이 어디까지 물들지 궁금해지는군.》
“아주 악담을 해라. 약수물은 무슨. 내가 뭐가 순진해.”
틱틱대는 이준의 말에 양랑이 클클 웃었다.
[선배님과의 협력이 기대되는군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준에게 손을 내밀던 구승효의 말이 귀를 맴돌았다.
‘확실히 만만찮은 녀석이란 말이지.’
승효의 아파트 로비를 지나 정원으로 걸어온 이준은 승효의 집이 있는 곳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까딱하다간 잡아먹힐지도 모르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이준은 흥 코웃음을 치고 승효의 집 쪽에서 시선을 떼고선 몸을 돌렸다.
* * *
―뭐? 이틀?
적지 않게 놀란 음성이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왜?” 하고 묻는 정후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순간 난처해졌으나, 이준은 연기자다.
그것도 아주 수준급의 연기자.
이런 대응 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
“나 이틀 전에 잠깐 입원했던 거 기억하지?”
―못 할 리가 없지! 갑자기 쓰러졌대서 나랑 한 사원이 얼마나 놀랐는지……. 왜? 아직도 그 후유증이 남아 있어?
“어어, 뭐. 그런 것 같아. 온몸이 으슬으슬한 게 영 상태가 안 좋네.”
―다시 병원에 입원해서 건강검진이라도 해 봐야 하는 거 아냐?
“그 정도는 아니고. 여하튼 스케줄 조정해 줄 수 있어?”
―당연히 해 줄 수 있지. 지금 네가 당장 촬영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근래엔 계속 차기작 선정에만 집중했으니까.
걱정 말라는 듯 흔쾌히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이정후 대표의 말에 이준은 쓰게 웃었다.
―우리 한 사원이라도 보내 줘?
“어?”
―이준이 너 혼자 집안일 잘 못하잖아. 소 여사님이 계신다 해도 불편할 거고, 차라리 태경이라도 보내서…….
“아, 아냐. 그럴 필요 없어. 그냥 이틀 정도 쉬면 괜찮아질 테니 그동안 일은 형한테 맡길게.”
―어? 어어, 그래.
“끊는다!” 하고 행여나 정후가 다른 소리를 할까 싶어 얼른 통화를 종료한 이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양심에 찔리는 얼굴이군.》
곁에서 들리는 양랑의 말에 이준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왜 아니겠어. 찔리다 못해 아주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
《그렇다면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는 건 어때?》
이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누구한테? 정후 형한테? 아서라. 어떻게 말하겠어.”
다른 사람도 아닌 구승효와의 혼인 의식에 대해 정후에게 말하면 어떻게 될지 뻔하다.
[그놈이 너를 채어갔다고? 말도 안 돼! 내 구승효 이놈을 그냥!]
이준이 구승효를 좋게 보지 못한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사람이 바로 정후가 아니던가.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구승효의 최신 소식이며 근황까지 모조리 들고 와 따박따박 알리며 이준에게 경각심을 불어넣던 정후가 두 사람이 협력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끔찍하군.’
이준은 휘휘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다 슬쩍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한 그는 커다란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오늘의 그는, 짙은 흑색 단령을 입은 채 사모를 쓰고 허리엔 각대까지 두른 상태다.
그뿐인가.
목이 긴 목화(木靴)를 신고선 신랑의 얼굴을 가릴 때 사용하는 사선(紗扇)까지 들었다.
이준은 현재, 누가 봐도 장가가는 사람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엿 같은 상황이냐고.
[두 사람 이야기는 승효 군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혼인하기로 했다며? 잘했다. 이왕 결심했으니, 쇠뿔도 단김에 빼야지! 이틀 뒤에 본가로 오거라. 그날, 너희 두 사람의 혼인 의식을 거행할 거다.]
고현 차씨 가문의 가주, 차태모 회장은 몹시나 행동력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이준과 승효가 협력하기로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마자 이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러고는 번개보다 빠른 속도로 두 사람의 혼인을 추진했고, 정확히 그 말이 나온 지 이틀 뒤인 오늘, 혼인 의식을 거행하기로 확정했다.
‘이거 참.’
돌이켜 보면 꽤나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다른 누군가랑 인연을 맺게 될 줄이야.’
차이준과 구승효는 인연이라기보단 ‘악연’에 가까웠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은 적지 않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비교되었다.
선배인 이준이 신경을 쓰지 않으려도 않을 수 없는 불편한 시선을 줄 수밖에 없는 구승효와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고는 몇 주 전까진 상상도 못 했다.
‘혼인이라…….’
이준은 낯설다 못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 단어에 코웃음을 흘렸다.
그는 평생 자신이 다른 사람과 연애하거나 혹은 혼인 관계가 될 거라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유인즉 간단했다.
이준은 평범하지 않았고, 일반인들과는 달랐다.
그는 일반인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것에 익숙했다.
아무리 보통 사람처럼 행동하고, 평범하게 반응하려 노력할지라도 같은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완벽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당연히 일반적인 인간관계는 유지할 수 없었기에 이준은 어느 날, 세상을 대하는 시점을 비틀어 보기로 했다.
연예계라는 세계로 뛰어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처음에는 도피나 마찬가지였지.’
자신을 캐스팅한 정후의 제안을 받아들인 건, 첫째로는 부모님과 막냇삼촌의 죽음 이후 들게 된 회의감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둘째로는 자신이 비생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평범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걸 자각했던 까닭이다.
‘연예인이 된다면 아무도 쉽게 접근할 수 없으니까.’
그래.
일반인들은 분명 그러할 것이다.
특히나 그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면 같은 업계 사람이라도 자신을 함부로 대할 순 없겠지.
‘그리고 그 방법은 생각보단 잘 먹혔어.’
결과적으로 보면 이준이 연예인이 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물론 가끔, 아주 가끔.
촬영 도중 나타나는 비생들로 인해 곤란을 겪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소수였고 이준은 지금까지 비교적 평온한 솔로 라이프를 즐겨 오고 있었다.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그래.’
그런데 현재, 그는 완벽한 혼례복은 아니나 견자들이 혼인 의식을 치를 때나 입는 예복을 입고 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견자 사회의 일원처럼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