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20화 (21/72)

20화

삼충(三蟲) (3)

‘그뿐이냐.’

심지어 오늘 이준은 동성의 상대와 혼인 의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여기서 의아한 점은, 놀랍게도 이 혼인 의식이 거부감이라고는 전혀 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여자라도 마찬가지였을 테니.’

인간이 아닌 것들을 볼 수 있는 입장에선, 볼 수 있냐와 없냐가 중요하지, 성별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구승효랑 나는 꽤 잘 맞는 조합인가?’

의식이 치러지기를 기다리고 있자니 온갖 생각이 다 든다.

이준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

이준은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여전히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는 신랑 1의 대기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본가의 수많은 방 중 하나였다.

[혼인 의식 절차는 내게 맡겨라. 이 할아비가 그 정도는 해 주마!]

이준의 혼인 의식은 승효가 했던 말처럼, 견자의 전통대로 제대로 치러야 했다.

특히나 이번 혼인은 남과 남의 결합이었고 5대 퇴마 종가 간에 일어난 혼사였으니, 의식을 치르는 장소 역시 세간에 알려져서는 안 됐다.

그래서 고른 곳은 다름 아닌 성북구 고현동에 있는 차이준의 본가였던 것이다.

‘어찌나 해야 할 일들은 많은지.’

대충 의식을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이준과는 달리, 차태모 회장은 본인이 직접 나서서 혼인 의식을 주관했다.

지금, 이준이 이렇게 대기실에 앉아 있는 것도 그 말도 안 되는 혼인 의식의 일부분이었다.

‘진짜 귀찮은 영감이라니까.’

제 가문의 종손이 남자랑 혼인한다는 데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하하 웃는 모습을 보이다니.

입가에 웃음꽃이 만발하던 태모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입술을 씰룩이고 있을 때였다.

스윽.

‘……응?’

이준은 웬 고사리 같은 손이 제 앞으로 다가와 있음을 인지했다.

‘뭐, 뭐야.’

혹시 헛것을 봤나 싶어 눈을 감았다 다시 떠보았지만, 놀랍게도 변한 건 없었다.

이준은 여전히 제 앞에 드리워진 작은 손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던 여자아이가 동그랗게 부풀린 볼 사이로 공기를 빼내더니 곧 입술을 움직였다.

“자. 줄게요.”

이름 모를 소녀는 웬 꽃팔찌 하나를 건넸다.

‘설마.’

이준은 의심 어린 표정으로 눈앞의 소녀를 쳐다봤다.

그녀에게는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으나 지나치게 곱상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혹 그와 구승효의 혼인을 막기 위해 비생이 저택으로 침투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일었다.

《하암.》

하지만 아마도 이준의 주변에 있을 양랑은 미동이 없었다.

조용히 하품까지 하는 그의 행동에 살짝 안도한 이준은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소녀를 내려다봤다.

‘비생이 아닌 건가?’

소녀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준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이거 달아요. 손목에. 내가 주는 선물!”

“……고, 고맙다.”

“별말씀을!”

헤헤, 웃으며 이준에게 억지로 꽃팔찌를 건네준 소녀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낯익다면 착각인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만약 누군가 웃는다면, 꼭 이렇게 화사하게 웃을 것 같기도―!

곰곰이 생각하던 이준의 머리가 해답을 찾았다.

“너, 구승효 동생이구나?”

소녀가 자신이 준 꽃팔찌를 손목에 차고선 말하는 이준을 보며 하얀 이를 드러냈다.

긍정의 답변이다.

이준은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녀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그냥 보내 주던데?”

“그래? 흐음, 이제 와 도망치진 않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군.”

이준이 작게 중얼거리자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준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미소 지었다.

그는 물었다.

“이름이 뭐야?”

“구승희!”

“승희는 몇 살인데?”

“여덟 살!”

“내가 누군지 알아?”

“알아요. 차휘! 우리 오빠 아내!”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승희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려던 이준이 미간을 좁혔다.

아내?

“인마. 아내는 무슨 아내. 네 오빠가 내 아내면 또 몰라. 남편은 당연히 연장자인 내가 해야지!”

승희가 불만에 차 외치는 이준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아니다, 차이준. 넌 대체 어린애를 상대로 무슨 짓이냐.’

이준은 헛웃음을 삼키고선 몸을 일으켰다.

“헉!”

“이러고 있지 말고 나가자.”

“으익!”

“아마 지금쯤 네가 어디 있는지 찾고 난리도 아닐 거야.”

“꺅! 헤헤.”

“자자, 내 옷에 뭐 묻히지는 말고. 곧 중요한 의식 치러야 할 몸이니까.”

승희는 저를 번쩍 들고 성큼성큼 움직이는 이준의 어깨 위에서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아마도 이 꼬맹이는 고현동의 넓은 저택 안에서 빨빨거리며 움직이다 길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의식이 시작되려면 아직 한참은 남았으니 이준은 그녀를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려 했다.

달칵.

하지만 그보다 먼저 돌처럼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스르륵 열린 문밖에서 예복을 입은 이준을 발견하고선 멈칫한 두 남자가 보였다.

한 명은 구승효와 비슷한 외양을 지니기는 했으나 조금은 어린 티가 났고, 다른 한 명은 저와는 반대 색인 백색 단령을 입고 있는 구승효였다.

“너너, 구승희!”

“헉!”

“너 이리 와. 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싫어! 나 차휘랑 같이 있을래! 오빠랑 안 가!”

“무슨 소리야? 그리고 차휘가 뭐야! 함부로 이름을 부르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

“흐이잉!”

“형님, 죄송합니다. 저희 승희가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 어어, 네.”

이준은 제 어깨 위에 철썩 붙어선 내려올 생각하지 않는 구승희를 끝내 데려가는 웬 청년을 바라봤다.

청년은 “오늘은 무슨 일 있어도 소란 피우지 말랬지?” 하고 말하며 입을 쭉 내밀고 있는 승희를 안아 들고선 그녀와 함께 어딘가로 사라졌다.

‘…….’

혼인 의식을 치르기도 전 맞닥뜨린 갑작스러운 소동에 멍하니 서 있던 이준은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백색 단령을 입고 있는 승효가 보였다.

“승효 씨도 장남이야?”

그 말에 굳은 얼굴로 동생들을 지켜보던 구승효의 눈동자가 이준을 향했다.

“몇이나 있어?”

구승효가 대답했다.

“저를 포함해서 3남 1녀입니다.”

“승희가 막내?”

“예.”

“아, 그렇지. 부모님은 안 계신다고 했었지…….”

구승효의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과거 그의 이름을 처음 접하게 됐을 때 한 번, 그리고 얼마 전 혼인을 확정 지었을 때 한 번, 알아보기는 했었다.

승효는 막냇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님 모두를 여의었다.

‘이 녀석, 은근히 나랑 비슷한 처지네.’

물론 이준은 나름, 아니 정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기에 부족함 없이 생활했으나, 몰락한 집안 내에서 한순간에 부모를 잃고 동생 여럿을 키워야 할 처지였던 구승효는 쉽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을 거다.

“고생했네.”

나지막한 이준의 중얼거림에 승효의 어깨가 아주 살짝 흔들렸다.

물론 이준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고 구승희와 그 오빠가 향한 곳을 응시하다 씩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닮은 점이 아예 없지는 않아. 안 그래?”

이준의 말에 승효가 그를 내려다봤다.

이준은 멈추지 않았다.

“나도 동생들이 있어서 그런지, 승효 씨가 가문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이해돼. 저런 귀여운 동생이 있다면 당연히 무슨 짓을 해서든 지키고 싶겠지.”

승효가 눈썹을 꿈틀거리자 이준은 휘, 손을 저었다.

“걱정 마. 동생들한테는 우리 계약에 대해 알리지는 않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서로의 의도가 어떻든, 적어도 1년 동안 우리는 가족이잖아.”

‘가족’이라는 이준의 표현에 승효의 갈색 눈이 거세게 요동쳤다.

이준은 백색 단령을 입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곧 고승희가 준 꽃팔찌를 찬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 어디 한번, 잘 지내 보자고.”

* * *

으으으.

‘빌어먹을 노인네.’

정오부터 시작한 혼인 의식은 어찌 된 영문인지 오후 9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기껏해야 고작 1년짜리 단기 계약일 뿐인데 이 정도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가문의 이름을 걸고 하는 의식이다. 당연히 승효 군 말대로 제대로 치러야지!]

―라 외치며 본가에서 직접 준비한 의식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강제로 치르게 하는 차태모 회장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준은 어느새 아래로 내려간 각대를 위로 올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힘드십니까?”

피곤에 절어 있던 이준의 귀에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강주가 이준에게 물잔을 건네고 있었다.

강주에게서 받아 든 물을 벌컥벌컥 마신 이준은 빙긋 웃었다.

“괜찮아. 견딜 만해. 휘준이는?”

“구가의 막내와 놀아 주고 있습니다.”

“아, 그 애. 승희라고 했었지. 귀엽더라.”

“예.”

“…….”

“…….”

“왜 그런 표정이야?”

이준은 저를 바라보고 있는 강주에게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강주는 그런 이준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 이내 후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안 들어서요.”

“뭐?”

뭐가?

이준은 강주의 차가운 발언에 크게 놀랐다. 내가 뭐 실수라도 했나?

‘아닌데? 하라는 의식은 제대로 치렀는데…….’

이준이 당황하자 인상을 쓰던 강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희생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듭니다.”

이준은 그 말에 조금 놀랐다.

강주는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는 자유로운 분이시잖습니까. 그런 분이 괜한 일에 얽매여 강제로 다른 누군가와 인연을 맺는 것이 싫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제가 할 걸 그랬어요.”

“실제로 보니 구승효가 꽤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고?”

“예?”

강주가 얼굴을 찌푸리며 이준을 응시하자, 이준이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생글댔다.

“그런 농담은 마음에 안 드네요.”

강주가 심드렁하게 콧방귀를 뀌자 피식 웃던 이준은 후,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희생,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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