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21화 (22/72)

21화

삼충(三蟲) (4)

단 한 번도.

맹세코 단 한 번도, 이 일을 ‘희생’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이준은 제 발언에 놀라 저를 바라보는 강주에게 웃어 보였다.

“정확히는 ‘책임’이야.”

“오라버니.”

만일 그날.

저의 귀영 의식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 끔찍한 날, 이준이 견자로서 각성하지 않았고 동시에 휘준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놈으로 인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막내 삼촌까지 화를 입을 일은 없었을 거다.

‘전부 내 탓이야.’

하필이면 자신의 귀영 의식과 휘준의 탄생이 겹쳤다.

하필이면 이준이 견자로 각성했고 휘준이 태어났다.

처음부터 이준이 그곳에 가지 않았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한동안 거리를 뒀어야 했다.

‘내가 아니었더라면…….’

아무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모든 것은 차이준이 짊어져야 할 죄였다. 그러니 희생이 아니다. 감히 희생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이준은 “오라버니.” 하고 계속해서 저를 부르고 있는 강주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여하튼 휘준이는 내가 책임져야 할 녀석이야. 못난 형이라 그런지 그 애한테는 미안한 게 너무 많거든.”

이준은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강주를 향해 빙긋 웃었다.

“인마, 내가 뭐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 관계에 영원히 얽매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죽을상이야?”

“그건…….”

“기껏해야 일 년짜리 계약이야. 나도 알고, 구승효 본인도 알고, 심지어 영감님도 아는 계약. 우린 구가로부터 영기를 얻어서 좋고 구가는 우리의 보호를 받아서 좋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계약이지.”

“…….”

“영기를 받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거라면, 걱정 마. 그리고 강주야, 이거 보여?”

이준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오른쪽 귀의 귀걸이를 가리켰다.

“이 오빠, 벌써 이만큼 모았어. 앞으로 일 년 뒤면 얼마나 많이 모일지 상상이 돼?”

“…….”

“게다가 협의까지 됐으니 완벽해. 하루에 한 번, 그 녀석한테 영기를 받으러 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그 외엔 부딪힐 일도 없을 거고 또…….”

“네?”

승효와의 협약을 떠올리며 말하던 이준이 갑자기 손을 드는 강주의 행동에 입을 다물었다.

“영기를 받을 때 말고는 구가의 가주님과 부딪힐 일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어?”

“설마, 그분과 다른 곳에서 산다고 생각한 건 아니시죠?”

이준은 “으응?” 하고 세 번 연속으로 의문을 뱉어 냈다.

강주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준에게 말해 주었다.

“앞으로 1년 동안, 오라버니는 구가의 가주님이랑 같은 지붕 아래 지내셔야 해요.”

뭐?

“짧더라도 무조건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은 같이 있어야 한다고요. 만일 365일 중 하루라도 빼먹는 날엔 이 혼인 의식은 모두 무효화 된다는 거, 모르셨어요?”

* * *

쾅!

요란한 소리가 났다.

기나긴 혼인 의식 끝에 짧디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승효의 고개가 문 쪽으로 향했다.

그의 시야에는 흑색 단령을 반쯤 풀어헤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단단히 화가 난 얼굴을 하고선.

“구승효! 너 알고 있었어?”

차이준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승효를 향했다.

승효는 그런 이준을 올려다보더니 빙긋 웃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선배님.”

다짜고짜 알고 있었냐고 물으면 알고 있다고 대답할 이는 아마 없을 거다.

“이 뻔뻔한 자식!” 하고 조금 전 막 혼인을 치른 상대인 승효에게 험악한 말을 쏟아 낸 이준이 차갑게 으르렁댔다.

“이 의식을 치른 이후 매일같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거! 단 하루라도 어기면 혼인 의식은 모두 무효화되고 영기를 주고받는 일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거!”

아, 그것 때문이었군.

대체 왜 이리 흥분하나 했더니 고작 그런 문제로 달려와 성질을 부리는 모습이라니.

승효는 씩씩대며 “왜 말 안 했어!”라 외치는 이준을 향해 물었다.

“모르셨습니까?”

이준은 오히려 되받아치는 승효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승효는 말했다.

“오히려 놀랍군요. 선배님은…… 당연히 알고 계실 줄 알았는데. 365일 저와 함께 있는다는 것에 동의하셔서 찾아오신 거, 아니셨습니까?”

“난!”

“의식은 이미 치러졌습니다.”

버럭 외치려던 이준이 이어지는 승효의 말에 뚝 행동을 멈추었다.

“더는 물릴 수도, 물려서도 안 되죠.”

“…….”

“물론 선배님께서 이 모든 일이 무효화 되기를 원하신다면 바라지는 않으나, 협조는 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뒷일은 책임을 질 순 없겠어요. 저 역시 피해가 상당할 테니까요.”

냉정하게 선을 긋는 승효의 발언에 이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재미있는 장면이었다.

구승효가 알고 있는 차이준이라는 남자는 언제나 높은 곳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친절하고 다정하나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는 평도 받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을 이리 간단히 흥분시킬 수 있다니…….’

참을 수 없는 희열이 차올랐으나, 결코 밖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준은 불같이 화를 낸 직후면서도 승효에게 감히 ‘혼인 무효’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에게 욕설을 뱉어 내지도 않았다.

그저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승효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눈썹을 꿈틀거리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이전에 내가 한 말은 취소하겠어.”

얼마 뒤, 생각을 정리한 이준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난, 승효 씨와는 잘 지낼 수 없을 것 같네. 난 겉과 속이 다른 사람과는 깊은 정을 못 트거든.”

이준의 발언에 승효의 안면에 미세하게 경련이 일어났다.

이준은 그 모습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는지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따지고 보면 승효 씨가 날 속인 건 아니군.”

“…….”

“그렇지만 승효 씨는 내가 그 사실을 모른다는 걸 인지하면서도 ‘굳이’ 그것에 대해선 알리지 않았잖아. 안 그래?”

승효는 대꾸하지 않았다.

후우, 길게 숨을 뱉어 내는 이준이 보였다.

“좋아, 받아들일게.”

“…….”

“한 지붕 밑에서 1년? 어렵지 않지. 그럼 대체 어디서 지낼 건지 물어봐도 되나?”

이준의 질문에 승효가 잠시 침묵했다가 답했다.

“차 회장님께서 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본가를 나서면 바로 그곳으로 향할 거고요. 듣자 하니 당장 필요한 물품은 이미 있다고 하더군요.”

“둘은 이미 말이 된 상황인가 보군.”

“…….”

“하하, 이 망할 노인네랑 구승효 씨가 아주 나를 가지고 놀았네.”

승효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애초에 계약을 하기로 한 내 잘못이겠지. 알았어. 앞으로 1년간 함께 지낼 집에 가는 덴 동의해.”

이준은 의외로 순순히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이쯤에서 의문이 생기는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피치 못할 경우라는 게 있잖아. 구승효 씨는 생각 안 해 봤어?”

이준의 검은 눈동자가 승효를 올려다봤다.

“나랑 승효 씨의 신분은 특수하잖아.”

이준은 말했다.

“촬영이 잡히다 보면 당연히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

“…….”

“이럴 때는 매일 한 시간씩은 같이 있을 수가 없는데, 이건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야?”

“그건……”

승효가 대답하려 했지만 이준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나랑 승효 씨 소속사도 달라서 스케줄을 조정할 수도 없다고.”

“…….”

“빌어먹을! 대체 이런 중요한 일을 왜 내게 말하지 않은 거야? 구승효 씨랑 계약한 사람은 나지, 우리 영감이 아니라고. 그쪽은 나랑 계약할 의사가 있기는 했던 거야?”

이야기를 하다 화가 북받쳤는지, 이준이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승효는 흥분해 마지않는 이준을 내려다보았다.

단단히 화가 난 이준의 얼굴이 보인다. 아래로 내려간 눈썹 머리부터 시작하여 구겨진 얼굴과 씰룩거리는 입꼬리까지.

살짝 붉어진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만 뜨거운 무언가가 용솟음쳤다.

“이 망할 노인네. 남자를 혼인 상대로 데려온 걸로도 모자라 동거까지 시켜?”

“…….”

“어쩐지, 오늘따라 이상하게 해야 한다는 의식이 많더니 그 일을 다 하게 만들어서 빼도 박도 못하게…… 우웁!”

단단히 화가 났는지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뱉던 이준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갑자기 다가온 손길 때문이다.

이준이 놀라 그 손을 뿌리치지 못하는 사이, 벌어진 입술 위를 무언가가 뒤덮었다.

승효는 큼지막해진 검은 눈동자에 제 시선을 고정시킨 후 몸속의 영기를 동그랗게 만들어 그의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아.”

은은하게 빛나는 오색빛깔의 구체가 승효의 입 안에서 그의 목 안으로 넘어가자 흥분하던 이준의 눈동자가 차츰 가라앉았다.

이준의 검은 눈동자를 뒤덮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그가 눈을 내리감았다.

이어, 이준의 온몸에 퍼져 있던 모든 기운이 그의 귀에 걸린 검은색 귀걸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우웅―.

이준의 귀걸이가 흑색에서 남청빛으로, 그리고 점점 짙은 보랏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스륵.

곧 제 품 안으로 쓰러지는 흑색 단령의 남자를 부축하던 승효에게 흑색 털을 지닌 호랑이가 다가왔다.

《아무래도 네 녀석은 주인을 다루는 법을 깨우친 모양이군.》

의식을 잃은 이준을 내려다보던 승효가 쓴웃음을 흘렸다.

“욕을 먹겠죠?”

《어디 욕뿐이겠어? 엄청나게 미움을 살 거다.》

“예상은 했던 거니 괜찮습니다.”

그 말에 흑호의 붉은 눈이 일렁였다.

《특이한 놈이군. 욕먹는 걸 뻔히 알면서 꼭 이렇게 대해야 해?》

그 질문에 승효는 제 품에 쓰러진 이준을 쳐다봤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구겨진 얼굴을 편 아름다운 남자가 잠들어 있었다.

“그리해서라도 선배님과 함께 있어야 하니까요.”

그 말에 잠시 승효와 이준을 바라보던 양랑이 쯧쯧 혀를 차며 사라졌다.

승효는 그런 이준을 내려다보더니 그를 안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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