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삼충(三蟲) (5)
“후우.”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던 이준은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전, 그는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과 마주 보며 혼례를 치렀다.
그 의식을 치르는 동안 어찌나 떨리는지,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방도가 없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서방님.”
이준이 손님을 대접할 준비를 할 동안 신부가 된 여인은 그에게 다가와 낮게 속삭였고, 이준은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었다.
“좋아, 할 수 있어.”
그리고 지금.
접대를 마친 이준은 신방에 들어서기 위해 문 앞에 서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은 여전한 상태.
한참이나 주저하던 그는 결국 문을 활짝 열었고, 드르륵 밀린 문 사이로 그녀와의 신방이 눈에 들어왔다.
달콤한 향이 가득한 신방에서 그의 신부는 침대 위에 앉아 이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을 꿀꺽 삼킨 이준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옆에 앉아 손을 뻗었다.
기다란 손끝이 왜 이리도 떨리는 건지.
혼인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며 그녀의 옷고름을 풀고 있을 때였다.
“선배님.”
이준은 코앞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멈칫했다.
‘웬 선배님?’
서방님이 아니라?
이준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사랑스러운 신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선배님. 왜 이리 손이 더디십니까. 옷고름 풀기가 그리 어려우세요?”
“으악!”
헉.
이준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쿵쿵쿵쿵.
발그레한 홍조를 띠던 미인은 온데간데없이 구승효가 자신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는 꿈을 꾸자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기, 기분 나빠…….”
왜 하필이면 구승효의 꿈을 꾸게 된 거지.
꺼림칙한 느낌에 얼굴을 바르르 떨던 이준은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 미간을 좁혔다.
“여긴 어디야?”
[이전에 내가 한 말은 취소하겠어. 아무래도 난 승효 씨와는 잘 지낼 수 없을 것 같네. 난 겉과 속이 다른 사람과는 깊은 정을 못 트거든.]
낯선 방 안의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워 있었던 제 모습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연유인가 싶어 간밤의 일을 되짚어 보던 이준의 머릿속에, 구승효에게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이어…….
[하아.]
그의 입 안으로 흘러들어 오던 영기를 압축시킨 달콤한 구슬까지.
‘망할 자식.’
순진하고 착한 리트리버인 줄 알았더니 속이 시커먼 구렁이였다.
이준은 바드득 잇소리를 내며 얼굴을 구기고 있다, 곧 침대에서 벗어났다.
‘여기가 그 빌어먹을 ‘동거 집’인가 보군.’
방 안의 구조와 가구들의 배치가 낯선 걸로 보아 이곳이 앞으로 그들의 동거 장소가 될 것이 분명했다.
“……!”
뭐야, 이걸 아직도 입고 있어?
자신이 구승효에게서 영기를 받은 시점부터 몇 시간이 흐른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준은 자신이 여전히 혼인 의식 때 입었던 단령을 입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런 꿈을 꾼 거군.’
불쾌해진 그가 툴툴대며 옷을 벗으려던 순간이었다.
― Rrrr. Rrrr.
방 안 어딘가에서 익숙한 벨 소리가 들렸다.
반쯤 단령을 벗어 던진 상태이던 이준은 고개를 돌려 전화벨이 울리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곧 침대 옆 테이블 위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발견했다.
“네, 여보…….”
― 배우님! 왜 이제야 전화를 받으세요?
태경이었다.
그는 거칠게 숨까지 몰아쉬는 태경의 음성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어?”
태경은 대답했다.
― 어디 있다뿐이겠어요? 아직 소식 못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
다짜고짜 제 말만 늘어놓는 태경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이준이 인상을 쓰자 태경은 말했다.
― 대표님이 구승효 씨랑 계약했대요!
“하아, 태경아. 그게 무슨 큰일이야. 큰일이라길래 난 또 무슨 살인 사건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 뭐라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 * *
서울시 강남구 청연동에 위치한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사옥.
‘어라?’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이정후 대표의 비서 유승아는 탕비실에서 자신이 마실 커피를 들고 대표실로 걸어오다 깜짝 놀랐다.
“대표님? 거기서 뭐…… 하세요?”
승아의 눈에 들어 온 사람은 다름 아닌 클레몽의 수장 이정후 대표다.
정후는 반쯤 열린 대표실의 문 뒤에 철썩 붙어서는 꼭 누군가를 찾는 듯했는데, 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어찌나 사색인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아, 승아 씨. 그거 커피야?”
“네? 아, 네.”
“혹시 탕비실에서 오는 길에 누구 안 봤지?”
“예? 누구요?”
“누구긴.”
정후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며 대답했다.
“곧 내게 죽음의 선고를 내릴 사…… 흐이익!”
파르르 온몸을 떨며 말하던 이 대표가 잡고 있던 문을 밀치며 뒤로 넘어지자 승아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커피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대체 뭘 봤길래……!’
승아가 멈칫했다.
곧 눈부신 빛이 승아에게 쏟아졌다. 그 ‘빛’은 말했다.
“승아 씨, 미안하지만 비켜 줄래요? 나 대표님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어느새 다가온 건지, 승아의 뒤편엔 검은 슈트 차림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늘씬한 다리로 한 걸음 다가온 미남의 말에 유승아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고, “안 돼애애!” 하고 외치는 이 대표의 말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승아에게 고맙다는 듯 고개를 까딱인 ‘빛’, 이준은 피식 웃으며 바닥에 주저앉은 정후를 내려다봤다.
“대표님. 우리 얘기 좀 하죠.”
달칵―.
열려 있던 대표실의 문이 닫혔다.
쾅!
“설명 좀 해 줄래?”
“이, 이준아.”
“어떻게 형이 클레몽으로 구승효를 데려올 수가 있냐고!”
“그게 말이지…… 콜록! 어휴, 갑자기 기침이 왜…… 콜록콜록!”
“그만해. 연극인 거 티 나.”
“커컥. 어, 억울하다. 난 정말 왜 이러는지…… 콜록콜록!”
“그러니까 형의 그 태도는, 대답하기 싫다는 거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기침을 이어 가던 정후가 이준의 싸늘한 말에 흠칫 놀랐다.
정후가 헛기침을 멈추자 이준이 말했다.
이준은 얼굴을 구겼다.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군. 정후 형. 형은 나보다 구승효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어…….”
“그럼 그동안 나한테 쏟아붓던 구승효에 대한 욕들은 다 뭐지? 설마 나한테 가스라이팅이라도 한 거야?”
태경의 전화를 받자마자 클레몽 사옥으로 달려온 이준은 사옥 앞에서 많은 기자와 부딪혔다.
[이준 씨, 구승효 씨가 클레몽으로 이적한 거 알고 있었어요?]
[두 사람 이제부터 한솥밥 먹겠네요?]
[같은 배역 두고 부딪히던 라이벌 후배랑 한 지붕 밑에서 일하게 되니 기분이 어때요?]
아마도 사옥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은 클레몽과 정식 기자 회견을 약속한 것은 아니었는지, 차에서 내리는 그를 먹이 삼아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 냈다.
그런 이들에게 억지 미소를 지어 주느라 어찌나 진땀을 뺐는지.
행여나 제가 허튼소리를 할까 봐 입을 꾹 틀어막고 있었던 이준은 대표실에서 저를 보고 꽁무니를 치려는 정후를 발견했고, 지금의 이 상황으로 그를 몰아붙인 것이다.
“이, 이준아, 나는…….” 하고 이준의 추궁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고개를 푹 숙이던 정후가 홱 얼굴을 든 건 이준의 외침이 이어진 지 5분 정도가 지난 뒤였다.
“그, 그럼 어떡하냐!”
뭐?
“다른 보석도 아니고, 무려 다이아몬드가 제 발로 내 품으로 굴러들어 오겠다는데, 그럼 내쳐?”
이준이 미간을 찌푸리자 씩씩거리던 정후는 대꾸했다.
“내가 스카웃한 게 아니라고! 구승효 쪽이 먼저 우리한테 컨택한 거란 말이다!”
이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컨택이라니?”
정후는 목을 조이던 넥타이를 헐렁하게 풀고선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구승효한테서 연락이 왔어. 새로 이적할 기획사를 알아보고 있는데 혹시 클레몽은 관심이 있냐고.”
“구승효가 직접?”
“그래!”
의심스러워하는 이준에게 정우는 외쳤다.
“여하튼 처음에는 나도 거절하려 했었지! 우린 네가 있잖냐. 우리 회사에서 가장 빛나고 고귀한 우리 슈퍼스타!”
“…….”
“너하고 구승효가 얼마나 비교당하는지 뻔히 아는데 그런 위험을 무릅써? 인마, 아무리 나라도 그건 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구승효랑 계약을 했냐고? 구승효가, 요즘 가장 핫한 애들 중 하나인 그 녀석이 다른 데서 몇십 억을 준대도 꿈쩍 않더니, 너무 후려치지만 않으면 우리랑 다 맞추면서까지 계약하겠다잖아.”
“…….”
“게다가 그 녀석만 잡으면 우리도 1인 기획사 취급 안 받고 대형 기획사로 성장할 수 있잖냐. 역지사지해서 생각해 봐. 네가 나라면, 이 좋은 기회를 놓치겠어?”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더니, 정후의 태도가 딱 그 꼴이다.
“준아, 좋게 생각해 봐. 따지고 보면 너희가 라이벌이긴 하지만 한솥밥을 먹게 되면 절친한 선후배로 변할지 또 어떻게 알아?”
“형.”
“오히려 네가 이해 안 되네.”
정후의 태도가 변했다.
그는 황당해하는 이준을 몰아붙였다.
“바꿔서 생각해 봐. 차라리 둘이 붙어 지내면 오히려 좋은 콘텐츠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냐?”
“…….”
“안 그래도 자주 부딪히는 두 사람이 갑자기 친해졌다고 해 봐. 신기하잖아! 그럼 사람들이 너희 두 사람을 더 주목할 거고, 그렇게 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영향력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겠어?”
“…….”
“내가 생각하기엔 어딜 봐도 플러스 요인밖에 없는데, 네가 왜 이리 반대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준은 오히려 뻔뻔한 태도를 보이는 정후를 보고 말문을 잃었다.
이 인간을 진짜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