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삼충(三蟲) (8)
툴툴대는 양랑을 보며 이준은 속으로 답했다.
‘당연한 일이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 ‘차휘’의 매력에 넘어오지 않는 녀석은 뭐, 거의 없는 편이지.’
《……스스로 말하고도 괜찮은 것이냐?》
‘뭐가?’
《뻔뻔한 녀석이로고. 뭐, 하긴. 그 녀석도 그런 것 같았으니. 주인의 말에 일리가 있다.》
‘그 녀석?’
《아니야, 아무것도. 그나저나 주인, 본군은 좀 피곤해서 그러는데 조금 자고 있을게.》
‘벌써 잔다고? 양랑, 너 요즘 잠이 너무 잦은 거 아니야?’
《요즘 영기가 넘쳐서인지 이상하게 노곤하군. 본군은 자야겠어. 하아암.》
고막을 울릴 듯한 양랑의 하품 소리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이준은 분홍 머리 청년에 대해 더 이상 흥미를 보이지 않는 양랑의 말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음을 깨달았다.
정말로 잠이 든 것이다.
“……님. 선배님?”
“아, 미안해요. 뭐라고 했었죠?”
양랑과의 대화로 인해 눈앞에 조명우가 있는 것을 잠시 잊었다.
이준이 웃으며 묻자, 조명우는 머리 색처럼 밝은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오늘 병원에 오신 거, 세현이 형 때문이죠?”
이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알았어요?”라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조명우는 대답했다.
“저도 세현이 형 소식 듣고 온 거거든요. 에서 세현이 형이 제 멘토였던 터라…….”
낮게 탄성을 터트리는 이준을 보며 조명우가 눈을 반짝였다.
“제가 특실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 카드를 얻었어요. 선배님만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시는 게 어떠세요? 아마 세현이 형도 정말 좋아할 거예요!”
* * *
‘피곤하네.’
결국 해가 지고 나서야 광한 종합 병원을 나선 이준은 어느새 도착한 아파트 안 엘리베이터를 멍하니 바라봤다.
[배우님, 언제 이사하신 거예요? 말이라도 해 주셨다면 이사하시는 걸 도왔을 텐데. 그럼 앞으로 여기로 모시러 오면 되는 건가요?]
이준이 어제부로 새롭게 살게 되었다는 집 주소를 가르쳐 주자 태경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응, 나 혼인이라는 걸 해서, 한동안 여기서 살게 됐어.”라든가 “어느 누구랑 동거 계약을 맺었거든.”이라는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응. 본가에서 한동안 여기서 살았으면 한다네.]
[배우님 본가에서요?]
[내가 걱정되는 모양이야. 그러니 한 1년 동안은 여기로 데리러 와 주면 돼.]
[아, 옙! 알겠습니다!]
「1층입니다.」
조금 전 태경과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하던 이준은 드르륵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봤다.
머뭇거리다 그 안으로 들어서니 놀랍게도 버튼 안에는 1층과 PH 버튼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잠시 주저하다 PH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는 움직였고, 이준은 길게 숨을 뱉어 냈다.
현재 시각, 오후 10시 33분.
‘미치겠군.’
그러고 보니 그가 구승효와 혼인 의식을 치렀던 게 불과 24시간 정도 전의 일이다.
‘좋든 싫든, 한동안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한다 이거지.’
온종일 각자의 일로 정신이 없었던 터라 잠시 잊고 지낸 현실의 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난 승효 씨와는 잘 지낼 수 없을 것 같네.]
특히나 영기를 받기 전, 구승효에게 그런 싸늘한 말을 퍼부었던 것이 자신인지라 기분이 이상해졌다.
‘됐어. 그 녀석이 껄끄러운 건 껄끄러운 거고 약속은 약속이니까.’
남자가 한번 말을 꺼낸 이상 지키지 않을 순 없지.
‘심지어 영기까지 이미 받은 상태니.’
이준은 오른쪽 귀를 매만졌다.
「펜트하우스입니다.」
어느새 도착한 일명 ‘동거 집’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작 1년 동안 함께 지낼 두 사람을 위해 보안이 철저한 아파트의 펜트하우스까지 마련해 준 고현 차씨 집안의 ‘가주님’을 떠올리며 혀를 내두르던 이준은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후우.’
그리고 막 현관문을 열기 위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 다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평소 귀가하는 것을 누구보다 좋아하던 이준이, 이렇게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꺼려진 적이 있었던가.
달칵―.
한참을 망설이던 이준은 5분 정도 머뭇거린 끝에 결국 현관문을 열었다.
‘뭐야.’
없는…… 건가?
‘괜히 긴장했…….’
“헉!”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내리깔려던 이준은 갑자기 느껴지는 어깨 위의 손길에 소리를 내질렀다.
온 신경을 정면에 쏟고 있었던 지라 등 뒤에 누군가 서 있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화들짝 놀란 이준이 뒤를 돌아보자 오늘 내내 ‘클레몽 ENT 이적’으로 화제를 모은 구승효가 이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준은 마치 저승사자처럼 어두운 눈빛에 얼굴까지 냉랭한 승효를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스, 승효 씨, 깜짝 놀랐잖아!”
구승효는 왠지 모르게 싸늘한 표정이었다.
이준은 그 차디찬 시선에 오히려 당황하면서도 내심 태연한 척 숨을 삼키고 다시 말했다.
“아니, 언제부터 뒤에 있었어? 그리고 왔으면 말부터 걸어. 그렇게 갑자기 손부터 대면 놀…….”
“선배님.”
잔뜩 긴장해 있다 승효를 마주하고 안심한 이준이 바득 이를 갈며 외치는 순간.
그의 말을 끊어 먹은 승효가 미간을 좁히며 이준에게 말했다.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구승효의 눈빛은 차갑고 서늘했다.
마치 이준이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책망하는 눈빛이었다.
그 싸늘하고 따가운 시선에 이준은 순간적으로 주눅이 들었다.
‘자, 잠깐.’
내가 왜 쫄아 있는 거냐?
괜히 불안함을 느끼던 그는 오히려 이 관계에서 갑인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 확신했다.
‘누가 누구한테 성질을 내는 거야?’
그는 바득 이를 갈더니 차갑게 그를 노려보며 외쳤다.
“잠깐만. 승효 씨, 나 아직 어제 일에 대해 화가 풀린 거 아니거든?”
구승효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준은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승효 씨는 왜 클레몽 이적에 대해서는 미리 말 안 한 거야? 그쪽은 내가 그리 우습나?”
“…….”
“이봐. 말을 꺼냈으면 내 말에도 반응을…….”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구승효가 한 번 더 물었다.
순간적으로 “지금 내 말에 반응도 안 하겠다는 거야?”라고 외치려던 이준이 멈칫했다.
처음에는 어제 일의 연장선인가 싶어 따지고 들려던 이준은 승효가 꺼내는 말이 그와는 다른 차원의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무슨 뜻이지?”
끓어오르던 노기를 가라앉힌 이준이 차분하게 되묻자, 승효는 꽉 움켜쥔 제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선배님 몸에 이런 게 붙어 있었습니다.”
시선을 승효의 손바닥 위로 응시하던 이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승효의 손바닥에는 종이 인형으로 된 작은 부적이 구겨져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각한 이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선배님.”
승효는 당황한 이준을 차갑게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여쭙겠습니다. 대체 어딜 다녀오신 거죠?”
* * *
《말도 안 돼!》
양랑은 불쾌함을 가득 담아 외쳤다.
《추적술이라니. 본군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감히 어떤 겁 없는 녀석이 본군의 주인에게 추적술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냐!》
그르릉대는 양랑의 분노가 온몸으로 전해졌다.
이준은 그러한 양랑의 외침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듣고서도 태연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미 구겨진 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종이 인형 부적을 응시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
양랑은 특급 비생이었고, 그의 요기는 이준으로부터 받는 영기로 인해 더 강해진다.
그런 양랑이 눈치채지 못한 부적이라니, 말이 되냔 말이지.
이준은 한 번 더 분노를 드러내는 양랑의 반응을 무시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승효 씨 말은…… 이 부적은 보통 부적이 아니라, 상급 견자 이상만 볼 수 있는 부적이라는 거지?”
이준의 질문에 냉정하게 테이블 위의 부적을 바라보던 구승효가 이준을 쳐다봤다.
“그런 듯합니다.”
돌아 버리겠군.
이준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승효는 말을 이었다.
“다행인 건, 선배님을 지키는 산군의 힘 덕분에 이 부적술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흥, 당연하지! 본군이 있는데 감히 누가 본군의 주인을 건드려? 본군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그건 절대 용납 못 해!》
“그런 녀석이 부적이 붙어 있는 것도 눈치 못 챘어?”
《그, 그건…… 본군이 잠깐 눈을 붙인 사이 일어난 이, 일이라 그렇다!》
“변명은 안 통해, 양랑. 근무 태만이라고.”
《크흐음!》
핀잔을 주는 이준을 보며 양랑이 몸을 푸르르 떠는 소리가 났다.
흥 코웃음 친 이준은 예의 종이 인형 부적을 내려다봤다.
‘정말 작군.’
만일 승효가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이준은 자신의 어깨에 이 불쾌한 것이 붙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를 뻔했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부적술에는 문외한이야.’
오래전, 견자 수련을 할 때부터 이준은 부적을 사용하는 훈련이 아닌 주로 언령을 사용하는 훈련을 해 왔다.
물론 부적술보다 언령술이 한 차원 높은 술법이기는 하나, 부적술이 가장 기본적인 술법임은 틀림없었다.
‘대체 누가 나한테 이런 걸 붙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