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삼충(三蟲) (10)
어제 아침 부로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정식 식구로 발표된 구승효를 두고 차휘와의 연관성에 관한 기사가 연일 쏟아지는 지금.
일개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그와 승효를 두고 별별 이야기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천 개가 넘는 댓글 대부분이 근거 없는 추측에 의한 ‘궁예짓’이지만, 가끔 의외로 진실을 파고든 댓글도 있었다.
나름 심각하게 태블릿을 응시하던 이준은 혀를 내둘렀다.
‘특히 이 Noname 4-3.1이랑 4-3.2는 꽤 놀랍네. 나름 숨긴다고 숨겼는데 어떻게 알았지?’
그가 구승효와 한 프레임 안에 서지 않으려는 건, 이준의 최측근인 클레몽의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알지 못하는 일이다.
‘앞으로 조금 더 주의해야겠어.’
마치 현장 관계자처럼 댓글을 단 Noname들의 말을 한 자, 한 자 새기던 이준은 남은 댓글도 찬찬히 읽어 갔다.
그나저나 어이가 없군.
“뭐? 내가 구승효한테 밥그릇을 빼앗길까 봐 대표한테 지시해서 왕따를 시킬 것 같아 걱정이라고?”
이준은 이를 갈았다.
“억까도 정도껏 해야지.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 녀석을 왕따 시켜!”
발 없는 말은 천 리를 간다고, ‘차휘’와 구승효를 둘러싼 억측과 루머들은 인터넷을 통해 널리 퍼져 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말들이다.
구승효가 차휘가 있는 소속사로 이적한 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차휘의 영향력에 대놓고 맞서기 위함이라든가. 차휘가 구승효를 싫어해서 괜찮은 작품이 제게로 오지 않으니 오히려 정면 승부를 하겠다든가. 혹은 차휘를 직접 안에서부터 밟아 줄 생각으로 이적을 했다든가 하는 말이다.
오로지 차휘와 구승효의 악연이라면 악연인 관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헛웃음이 났다.
‘만약 이 사람들이 나랑 구승효가 어떤 사이인지 알게 된다면…….’
이준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거 생각 이상으로 끔찍하겠군.”
이 세상에 인간이 아닌 ‘비생’이라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질 만큼― 커다란 파장이 일 것임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구승효와의 혼인 의식에 대해서는 절대로 세간에 알려져서는 안 됐다.
[선배님 몸에 이런 게 붙어 있었습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하필 추적술이 담긴 종이 인형 부적을 붙이고 돌아왔으니 구승효가 그렇게 예리한 눈으로 저를 바라봤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저나 선배님이나 공인 신분으로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에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산군의 도움 없이도, 선배님은 스스로를 지켜야 하고요.]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네.’
인정하기 싫기는 하나, 배우라는 직업 외 이준이 은밀히 행하고 있는 또 다른 ‘일’에 대해 세상이 알게 된다면, 이는 비단 이준과 승효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준과 동생들, 그리고 전국에 존재하는 견자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후우.’
평소 느끼지 못했던 무거운 책임감이 돌연 어깨를 짓누르자 이준은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그때였다.
근처에서 상쾌한 샤워 코롱 향과 동시에 구승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미 일찍이 준비를 마친 저와는 달리, 이제 막 샤워를 끝낸 승효가 하얀 티셔츠에 회색 슬랙스를 입고선 제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준은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다 했어?”
“머리만 말리면 됩니다.”
“알겠어. 나도 준비할……!”
고개를 끄덕이려던 이준은 어느새 제 앞으로 다가와 손을 뻗는 승효의 행동에 멈칫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살짝 고개를 숙인 승효가 이준을 쳐다보고 있었다.
불과 10센티도 남기지 않은 그들 사이의 거리를 두고도 흔들리지 않은 이준이 똑바로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뭐야.”
“지금인 것 같아서요.”
이준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자 승효가 다시 말했다.
“오늘 분의 영기는 받아 가셔야지 않겠습니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 승효를 응시하던 이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횟수는 하루 한 번이면 될 겁니다.]
‘빌어먹을, 하루 한 번.’
이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입을 승효 쪽으로 내밀었다.
“빨리 해. 곧 차 도착할 거, 후읍.”
마지막 말 한 단어를 내버려 두고 결국 다가오는 구승효의 숨결을 밀어내지 못한 이준은 곧 온몸으로 퍼져 가는 강력한 영기를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ㅊㅎ가 왜 우리 구 스타를 안 좋아해?]
불현듯, 조금 전 보았던 커뮤니티의 한 댓글이 생각났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마음에도 없는 입술 박치기를 해야 하는데…… 너 같으면 좋아하겠냐?
* * *
“망할.”
이준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휙휙, 저으며 욕설을 흘렸다.
한번 시작된 뜨거운 열기가 도무지 가라앉질 않는다.
특히나 ‘영기 주입 의식’을 치르고 난 뒤면 더욱이 그렇다.
검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빨개진 얼굴을 가릴 수 없다니.
이준은 한참이나 부채질을 해도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낯빛에 인상을 쓰며 중얼댔다.
“아무래도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그러자 아마도 이준의 곁을 배회하는 것이 분명한 양랑이 대꾸했다.
《그걸 이제 알아차리다니, 주군은 눈치가 없는 편이군.》
“뚱냥이. 너 말 다 했냐?”
작게 으르렁댔지만 양랑은 쿡쿡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한참이나 양랑과 실랑이를 벌이던 이준은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
확실히 구승효라는 녀석의 영기가 대단하기는 한 건지, 그에게서 영기를 주입받고 나면 온몸의 힘이 넘쳐흐른다.
“힘이 넘치는군.”
《당연한 일이다.》
“당연하다고?”
《견자가, 다른 견자로부터 영기를 받는 건 흔하지 않은 경우인데다, 그 녀석의 경우 보통보다 훨씬 밀도 높은 영기를 지니고 있어. 하니 당연히 주인이 녀석의 영기를 주입받고 나면 온몸이 끓어오를 듯 흥분되는 거지. 영기도 흘러넘치는 거고.》
“흐음.”
《단적인 예로, 주인이 녀석에게서 영기를 얻은 직후엔 본군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않았던가.》
양랑의 말은 사실이었다.
구승효로부터 영기를 주입받고 난 후 10분 동안은 양랑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어디서 어떤 포즈를 취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그가 선명했다.
물론 그 효력이 10분을 넘질 않아서 문제지만.
“하지만 이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는 모르겠어.”
《무슨 소리지?》
이준은 의아해하는 양랑의 물음에 얼굴을 굳혔다.
“영기를 받을 때마다 주체가 안 돼.”
처음 영기를 받아들였을 때는 확실히 온몸의 힘이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나면서 더욱이 그것을 갈망하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그뿐인가.
‘영기를 주고 난 후 그 녀석의 표정도 신경이 쓰이고.’
오늘 아침엔, 특히 그에게 영기를 빼앗기고 난 뒤 승효가 비틀거리던 모습을 목격했다.
이준은 오른쪽 귀의 귀걸이를 만지작대며 말했다.
“구승효는 대체 어디서 영기를 얻는 거야? 그 녀석한테 영기는 무한하기라도 한 거야? 나한테 이렇게 줘도 되는 거냐고.”
게다가 연예계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눈코 뜰 새도 없을 텐데, 견자 수련은 언제 하는 거지?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지내고 보니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구승효에게 직접 묻지 못할 질문을 쏟아 내자 양랑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가끔 보면 주인은 참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다 싶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양랑의 발언에 이준이 인상을 썼다. 양랑은 말을 이었다.
《하긴. 적어도 본군의 앞에서는 일치하니 그리 나쁜 것도 아니군.》
“뚱냥이. 알아듣게 말해.”
이준이 퉁명스레 말하자 양랑은 다시 소리를 냈다.
《본군 생각에, 주인이 그 녀석에 대해서 걱정할 것은 없다. 본디 현월 구가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그들의 영기가 마를 일은 없으니까.》
“이 땅에 존재하는 한?”
《본군도 어렴풋이 알 뿐이야. 아주 오래전, 현월 구가의 인물이 이 땅에 홀연히 나타나 규율을 어긴 비생들을 제어하기 시작했고, 그에 감명한 주인의 집안 역시 그들을 도왔다고 말이지.》
“…….”
《아마 차가의 꼬맹이는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그 사건들이 없었다면 5대 종가 중 가장 으뜸은 현월 구가였을 거다.》
양랑이 말하는 ‘차가의 꼬맹이’는 틀림없이 그 영감님을 의미한다.
클클 웃는 낯짝의 태모가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자 칫 잇소리를 흘리던 이준은 말했다.
“과거 현월 구씨 가문이 우리 가문만큼이나 강성했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런데 양랑, 네가 말한 그 사건들이라는 게 혹시 일제…….”
빠앙―.
양랑을 향한 이준의 말이 뚝 끊어졌다.
커다란 클랙슨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짙은 블랙으로 틴팅이 된 밴 한 대가 보였다.
‘태경이 차는 아닌데.’
경비가 삼엄한 이 아파트에 허가 없이 밴이 들어올 리는 없고.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선글라스를 낀 채 밴을 응시하고 있던 이준의 귓가로 드르륵 창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타세요, 선배님. 같이 가시죠.”
구승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