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삼충(三蟲) (11)
[여, 영기는 고맙지만 난 회사까지 혼자 갈게. 데리러 오기로 한 사람이 있어서. 그, 그럼!]
불과 몇 분 전, 이준은 구승효로부터 영기를 건네받자마자 도망치듯 ‘동거 집’을 나섰다.
하필이면 공통 스케줄이 존재했던 터라 어차피 곧 다시 만날 예정이었으나, 이상하게 같은 공간 안에 함께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아, 배우님! 드디어 연락이 되셨군요! 안 그래도 계속 연락 안 될까 봐 정말 걱정했어요!
이준이 전화를 걸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외치는 태경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이준은 고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넌 왜 안 와?”
그가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자 태경이 “그, 그게…….” 하고 우물쭈물거렸다.
그때 “헉!” 하는 숨소리와 함께 태경이 핸드폰을 뺏기는 소리가 났다.
― 나다.
이준은 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정후 형?”
― 그래! 차이준, 너 인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뭐? 내가 널 속여? 배신을 해? 그러는 넌! 넌 왜 나 배신했어!
이준은 다짜고짜 윽박을 지르는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이정후 대표의 외침에 황당한 숨을 흘렸다.
“무슨 소리야?”
― 와, 이 녀석 봐라. 발뺌하네? 네가 승효 씨랑 같은 집에 산다는 거, 나도 이제 알거든?
이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정후는 씩씩댔다.
― 내가 어제 너 달랜 후에 그 얘길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내가 그렇게 사정하고 빌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승효 씨랑 언제부터 그렇게 친한 사이였어? 알고 보니 너, 승효 씨가 클레몽으로 이적하려는 거 미리 알고 있었던 거 아냐?
“형.”
― 됐고! 오늘 태경이 너 데리러 못 가. 듣자 하니 승효 씨네 팀원이 승효 씨 데리러 간 모양인데, 그 차 타고 나란히 와서, 도착하면 곧바로 대표실로 와!
“뭐?”
― 날 속인 벌이다, 인마!
이준은 버럭 외친 후 툭 전화를 끊어 버린 이정후 대표로 인해 어느덧 대기 화면으로 돌아간 핸드폰을 응시했다.
“선배님, 통화는 끝나셨습니까?”
태경을 기다리고 있던 이준을 태울 생각이었는지, 그의 주변에 멈추어 서선 한참이나 대기 중이었던 밴 안에서 구승효의 말이 들려왔다.
‘제길.’
별다른 도리가 없다.
이준은 생긋 웃고 있는 구승효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미안한데 회사까지만 신세 좀 질게.”
승효가 대답 대신 문을 열어 주자 한숨을 내쉬던 이준은 밴 안으로 몸을 실었다.
몇 분 전 맞닿았던 입술 위가 화끈거렸다.
“어서 오세요.”
넓은 밴 안에는 승효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웬 남자가 있었다.
살짝 얼굴을 끄덕이며 이준에게 인사를 하는 운전석의 남자는 은색 테의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가 소문으로 듣던 승효와 함께 온 ‘팀장’이라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케인텍의 고수월 팀장이랬던가.’
구승효의 이전 소속사인 케인텍 엔터테인먼트에서 그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던 팀원이 함께 넘어왔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다.
이준은 철저한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어 가며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이준의 응답에 픽 웃던 고수월 팀장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말했다.
“설마하니 차휘 씨를 저희 밴에 태우게 될 줄은 몰랐네요.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군요. 영광입니다.”
“하하. 앞으로 자주 신세 질 것 같아 벌써부터 죄송한데요.”
“죄송은요. 차휘 씨랑 관련된 일이라면 저희 승효가 아주…… 하여간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무심코 말하려던 고수월 팀장이 은근히 말을 돌리자 이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고 팀장이 다시 말했다.
“그나저나 차휘 씨가 승효랑 함께 살게 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제가 알기로 승효랑 차휘 씨는 아무 접점이 없었거든요.”
“아, 하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언제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질문을 던진 고수월 팀장은 룸 미러를 통해 이준의 얼굴을 힐끔댔다.
‘언제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냐고?’
차이준이 구승효의 존재를 자각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의 일이지만, 실제로 대화를 나누고 이렇게 입까지 부딪힌 사이가 된 것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하하, 별 사이 아닙니다. 그저 우린 그냥 집안에 의해 강제로 정략혼을 치른 사이예요.”라고 대꾸한다면 믿어 줄 리 만무하겠지.
이준은 옆을 힐끔거렸다.
승효는 마치 이준이 무슨 말을 할지 기대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녀석 진짜…….’
여유로운 눈빛으로 웃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괜스레 머리가 아파졌으나, 핵심을 꿰뚫는 사람의 질문을 마냥 외면하기도 힘든 노릇이다.
이준은 마치 “선배님이 어떻게 반응하시는지 두고 볼게요.”라는 얼굴을 하고 있는 승효를 노려보다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승효 씨, 고 팀장님한테 말씀 안 드렸어?”
구승효가 반응했다.
“뭘 말입니까?”
“우리 결혼한 사이라는 거 말이야.”
끼이익!
‘윽!’
능청스러운 이준의 말에 갑자기 달리던 차가 멈추었다.
급브레이크를 밟아 버린 고 팀장의 행동에 이준의 몸이 앞으로 쏠릴 뻔했으나, 승효가 팔을 뻗어 그의 앞을 막았다.
“괜찮으세요?”
하마터면 앞좌석에 머리를 찧으려던 이준의 몸을 저지한 승효가 그를 향해 말했다.
이준이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승효가 얼굴을 구기며 운전석 쪽을 바라봤다.
“형. 운전을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미, 미안해. 내가…… 내가 너무 놀라서…….”
고 팀장이 룸 미러를 통해 이준과 승효를 번갈아 응시하며 입술을 덜덜 떨었다.
‘사실을 말했다간 경을 치겠네.’
《경을 칠 정도가 아니라 주인, 네가 하직할 수도 있겠어.》
눈치 없는 양랑이 끼어들었다.
이준은 “조용히 해.” 하고 작게 속삭인 뒤 “다친 곳은 없으세요?” 하고 묻는 고 팀장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팀장님. 운전 중이신 분한테 제가 너무 위험한 농담을 했네요.”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고 팀장은 경직된 얼굴을 애써 펴더니 휘휘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마치 승효의 눈치를 살피듯.
그 모습이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이준은 말을 이었다.
“실은 승효 씨와 저는 집안끼리 아는 사이입니다. 마침 저희 집 어르신께서 빈집이 하나 생겼다고 말씀해 주셨고, 승효 씨도 소속사 이적으로 집을 옮겨야 한다고 하더군요.”
“아…….”
“그래서 먼저 제안했죠. 어차피 넓은 집이니 차라리 함께 살지 않을래? 하고요. 승효 씨 덕분에 저희 집 어르신께 바치는 월세를 아끼게 되었으니, 저는 잘된 셈이죠.”
이준은 입꼬리를 늘이며 승효를 힐긋댔다.
승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묵묵부답이 곧 긍정임을 알아차린 고 팀장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이준은 수긍하는 고 팀장의 말을 듣다 우연히 고개를 돌렸다.
‘…….’
저 멀리, 어제 보았던 건물 하나가 시야로 들어왔다.
망설이던 이준은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고 팀장님.”
“예?”
“미안하지만, 혹시 절 저 앞에서 좀 내려 줄 수 있을까요?”
* * *
“후우.”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타고난 아우라를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길쭉한 키와 다리를 쭉쭉 뻗으면서도 슬쩍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준은 목도리를 얼굴 주변에 돌돌 두르며 로비를 나섰다.
그런 그의 귀에 조금 전 들은 말이 떠오른다.
[이거…… 길이 엇갈린 모양입니다. 우리 세현이는 이미 퇴원했어요.]
[퇴원이요? 벌써?]
[네. 하지만 차휘 씨가 자길 보러 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세현이도 분명 좋아했을 겁니다. 조금 전 하신 말씀은 꼭 세현이에게 전해 드릴게요.]
이준과 승효의 ‘동거 집’에서 클레몽 엔터테인먼트가 있는 청연동으로 가는 길에는 마침 광한 종합 병원이 존재했다.
이미 한 번 들른 적이 있었던 그곳에 자신을 내려 줄 것을 요구한 이준은 곧바로 세현이 있는 병실로 향했다.
미리 약속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들여보내 주었다는 점이 무언가 이상하기는 했으나, 텅 빈 병실을 발견한 순간 쓴웃음이 났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사람을 찾으려는데 오래전, 이준과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던 세현의 가족과 부딪혔다.
‘하루도 채 되지 않아 퇴원이라니…….’
이준이 이세현의 병문안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직접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이준이 그를 방문했을 때 세현은 의식을 잃어 잠이 든 상태였기에 말을 걸 순 없었으나, 만약 세현이 의식이 있었더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까?
이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미스틱’의 멤버들에게 지우기 힘든 빚을 졌다.
어쩌면 창창했을 그들의 커리어를 망쳤을 뿐 아니라, 대중들로부터 감당하기 힘든 비난을 받게 했다.
그 모든 것에 환멸을 느껴 연예계 자체를 떠나 버린 멤버들도 있었으며, 여전히 활동 중이지만 자리를 잡는 데 고생하는 멤버들도 상당했다.
이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병원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