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29화 (30/72)

29화

삼충(三蟲) (12)

‘양랑.’

로비를 나서는 이준은 자신을 힐끔대는 시선을 느꼈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쓸 만한 부분은 아니라 여기며 걷고 있을 때.

그는 아마도 제 곁에 있을 흑생 호랑이를 호출했다.

《말해라, 주인.》

구승효로부터 영기를 받은 직후였다면, 아마 제 옆에 모습을 드러냈을 양랑의 현신을 목격했겠지만 현재는 그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이준은 여전히 걸음을 옮기며, 양랑을 향해 물었다.

‘어제 말이야. 내가 들른 병실에 누워 있던 녀석…… 기억나?’

《조금 전 갔던 그 병실의 환자를 말하는 것이냐?》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때 혹시 그 녀석 주변에…… 뭔가 있었던 것 같아?’

[선배님. 대체 누구를 만나고 오신 겁니까.]

어젯밤, 승효는 이준에게 누구를 만나고 왔는지 캐물었다.

밤새도록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봐도, 이준의 몸에 예의 종이 인형 부적이 붙었을 장소는 그 병실밖에 없었다.

이준은 세현의 병실로 들어섰을 때 숨이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 순간이 매우 찰나였기에 자신의 착각일 거라 여겼다. 그러나 승효가 종이 인형 부적을 언급하는 순간 그 느낌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확인이라도 해 보려고 했던 건데 말이지.’

오늘 다시 들른 세현의 병실은 놀라울 만큼 고요했다.

퇴원을 했기 때문인지, 어제 이준이 느낀 기분 나쁜 감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주길 원하나?》

고심하던 이준의 질문에 양랑이 대꾸했다.

‘그래. 말해 봐.’

《기억나지 않는다.》

‘아, 그래? 그런 거라면 어쩔…… 뭐?’

양랑은 이준에게 태연하게 대꾸했다.

《본군은 어제 주인이 여기 왔었다는 것도 기억이 안 나. 주인, 정말 이곳에 오기는 했던 거냐?》

이준은 황당해졌다.

그와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종속 비생은 본인이 원할 때는 이준의 모든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당연히 어제의 일도 함께 겪었어야 했건만, 종이 인형 부적 일도 그렇고 세현의 병실을 찾은 것도 기억 못 하다니.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그때 자고 있었지.’

이준은 “본군도 쉴 때는 쉬어야지!” 하고 외치고 있는 양랑의 말에 헛웃음을 삼켰다.

‘일단 세현이를 만나야 그 녀석이 괜찮은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텐데…….’

도통 내 연락은 받지를 않으니.

이준은 길게 숨을 내쉬며 택시라도 잡을 생각이었다.

“택, 어?”

깊은 생각에 빠져 어느새 자신을 힐끔거리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이준이 막 병원 로비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으려던 순간.

그의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든 이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구승효?”

차이준이 결코 작은 키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게다가 온 얼굴을 돌돌 감싼 자신과는 달리 선글라스 하나만 떡하니 쓰고 서 있는 구승효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다.

이미 같은 차를 타고 왔던 사이였으니까.

“승효 씨가 왜 여기 있어?”

이준이 그를 확 잡아끌며 놀란 소리를 뱉어 냈다.

‘나 내려 주고 먼저 사옥으로 간 거 아니었어?’

혹여나 누가 알아볼까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이준과는 달리, 태연하기 그지없는 구승효가 그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다행히 인간이 아닌 게 붙지는 않았군요.”

“뭐?”

“가시죠. 저쪽에 차가 있습니다.”

승효는 놀란 이준이 뭐라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그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잠…….”

잠깐, 하고 말하려던 이준은 곧 저와 승효를 찰칵찰칵 찍는 카메라 소리를 들었다.

‘젠장.’

아까부터 제 뒤를 졸졸 따르던 몇몇 일반인들이 기어코 구승효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를 따르기로 결심한 이준은 승효가 움직이는 쪽으로 움직였다.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기다란 네 다리가 쭉쭉 앞으로 뻗어나갔다.

“네.”

“언제부터?”

구승효가 대답 대신 그를 힐긋거리며 입꼬리를 늘였다.

[다행히 인간이 아닌 게 붙지는 않았군요.]

‘오늘도 뭐라도 붙을까 봐 여기서 기다린 거야?’

내가, 걱정돼서?

이준은 말없이 앞장서는 그를 보다 피식 웃어 버렸다.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군.’

* * *

펑!

“한번 가족은 영원한 가족! 평생 엔터 클레몽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승효 씨!”

폭죽에서 터져 나온 형형색색의 종이 가루가 꽃다발을 들고 있던 구승효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적을 발표한 지 하루 만에 소속사의 온 가족들이 모여 축하해 주는 신입이라니.

‘저러다 귀에 입이 걸리지.’

일명 ‘구승효 환영회’라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청연동의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사옥에 오게 된 이준은 한 발짝 떨어진 채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이번 환영회에는 U 매거진 강 기자도 올 예정이니까 싫어도 참석해. 알았어?]

쓸데없는 구설수에 오르는 것도 사양인데다, 정후의 협박 아닌 협박도 있었기에 하는 수 없이 참석하기는 했으나 왠지 복잡한 기분이다.

이준은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려놓으며 제게 한마디씩 건네는 소속사 직원들에게 미소 지어 주는 구승효를 응시하다 입술을 삐죽였다.

“차휘 씨는 어때요?”

그때였다.

이 상황의 관망자처럼 창가에 기대어선 물을 마시던 이준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정말로 U 매거진의 강소현 기자가 카메라맨을 대동한 채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준이 “네?”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강 기자를 내려다보자 강 기자는 짙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우리 차휘 씨는 구승효 씨랑 몇 년 전부터 알게 모르게 라이벌 구도를 형성해 왔잖아요. 그런 승효 씨랑 갑작스럽게 한솥밥을 먹게 됐으니 기분이 복잡할 것 같은데요.”

U 매거진의 강소현 기자는 정후와는 막역한 사이로, 클레몽에 호의적인 기사를 써 주기로 유명했다.

구승효의 갑작스러운 이적을 두고 많은 말이 오가는 가운데 굳이 <구승효 환영회>를 열고, 또 이준에게 접근하여 구승효에 대해 묻는 것을 보면, 정후는 이번 논란을 어떻게든 잠재우려고 하는 것이 분명했다.

‘흐응.’

마이크와 펜은 들지 않았으나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이 상황을 기사로 만들려는 강 기자의 의지가 보였다.

[요즘 차휘가 제자리 뺏길까 싶어서 구승효 견제 쩐다더라. 구승효랑은 한 프레임 안에 안 서려 한다던데?]

언젠가 보았던 댓글이 아른거려 잠시 멈칫하던 이준은 곧 눈꼬리를 반으로 접었다.

“복잡한 심경보다는, 글쎄요. 사실 되게 반가워요.”

“반갑다고요?”

놀라는 강 기자에게 이준은 미소를 지었다.

“세간엔 저와 승효 씨가 라이벌 구도다 뭐다 해서 껄끄러운 사이라 알려져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 그런 사이 아니거든요.”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말씀은…….”

“사실 말이죠.”

이준은 살짝 머리를 숙이더니 눈을 빛내고 있는 강 기자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되게 친해요.”

“정말?”

강 기자가 이준의 속삭임에 놀라 몸을 움찔댔다.

이준은 말했다.

“예전부터 승효 씨랑은 인연이 있었어요. 가족끼리도 잘 아는 사이이기도 하고. 그런데 아시다시피 업계에 말이 많잖아요. 괜히 구설수에 오르내릴까 싶어 내버려 뒀더니…… 하하, 별 얘기가 다 오가더군요.”

“하긴. 승효 씨의 이번 이적은 말이 많은 편이죠. 별 얘기가 다 떠도는 건 저도 인정해요. ‘차휘 조종설’도 있고, 승효 씨랑 계약을 맺은 건 차휘 씨라는 얘기도 있더라고요.”

콜록!

이준은 하마터면 기침을 뱉어 낼 뻔했다.

‘아니,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이준은 납득한 듯한 강 기자를 향해 하하 웃었다.

덩달아 미소 짓던 강 기자가 돌연 눈을 가늘게 뜨며 이준을 바라봤다.

“그런데 차휘 씨랑 승효 씨, 두 분 정말 친한 건 맞는 거죠?”

“우리 기자님, 설마 제 말을 의심하는 거예요?”

“저는 거짓을 전달할 수 없는 입장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부드럽게 웃는 이준에게 어깨를 으쓱이던 강 기자는 어딘가를 응시하며 다시 말했다.

“승효 씨는 어때요? 차휘 씨 말이 정말인가요?”

‘이런.’

돌연 등 뒤가 싸늘하다 했더니, 분명 조금 전까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승효가 어느새 이준의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준은 순간적으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승효를 흘긋거렸다.

‘……!’

은근히 긴장하고 있던 이준의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려 할 때.

승효의 커다란 손이 이준의 어깨에 닿았다.

구승효는 놀라는 이준의 시선을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선배님 덕분에 새 회사로 올 수 있었죠. 아마 앞으로 저희가 함께하는 모습을 자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어머! 그럼 회사 차원에서 두 분이 공동으로 출연하시는 콘텐츠를 볼 수 있다는 건가요?”

태연자약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승효를 보고 강 기자가 함박웃음과 함께 물었다.

구승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아까 대표님께 들으니, 선배님이랑 제가 나오는 콘텐츠를 따로 준비 중이라던데, 그게 확실히 정해지면 강 기자님께 귀띔해 드릴게요.”

“그렇게 해 주시면 저는 좋죠!”

강 기자에게 능청스레 대응하는 구승효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이 업계에서 살아남은 게 아닌가 싶다.

《확실히 보통이 아니라니까.》

이준의 마음과 비슷하게 양랑도 느낀 건지 낮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우리 차휘 씨가 소속사 동료랑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미스틱이 생각나네요.”

호호 웃으며 승효와 대화를 주고받던 강 기자가 두 남자의 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불쑥 말했다.

‘그러고 보니 강 기자는 미스틱의 팬이었다고 했었지.’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 제게 소개를 하면서 미스틱을 언급했던 강 기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준이 갑자기 언급된 ‘미스틱’의 발언에 살짝 얼굴이 굳어지는 모습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는지, 강 기자는 다시 말했다.

“소문에 듣기로 세현 씨가 이번 TOKD에 참석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예?”

이준이 놀란 반응을 보이자 강 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TOKD 초대 가수로 초청됐다던데…… 차휘 씨는 모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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