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30화 (31/72)

30화

삼충(三蟲) (13)

“TOKD? 이준이 너 거기엔 진작 불참하기로 하지 않았어?”

TOKD.

‘톱 오브 코리안 드라마 어워드’의 약칭으로 매년 3월 초에 열리는 시상식.

아시아 드라마에 관심이 있는 해외 팬들 역시 기대하던 시상식이었는데 이준은 작년 이곳에서 남우 주연상과 인기 스타상, 그리고 베스트 커플상 등을 휩쓸었다.

하여 올해는 이준이 수상자가 아닌 시상자로 진작 낙점되어 있었으나, 이준은 정중하게 시상식 참여를 거절했었다.

이유인즉 이러하다.

이준은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곳은 견디기 힘들어했고, 행여나 그곳에 비생이 존재하기라도 한다면 더욱 괴로워했다.

물론 양랑이 이준의 곁을 지키면서부터는 그가 사람들로부터 흘러나오는 강력한 기운을 막아 주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난 네가 시상식 갈 때마다 걱정돼 죽겠다. 시상식에 한 번 다녀오면 사흘에서 일주일은 꼬박 앓으니…….]

이준을 친동생처럼 생각하는 정후는 사람들이 몰린 곳에만 다녀오고 난 뒤엔 침대에 꼬박 누워만 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매번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 때문에 오만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지.’

방송사나 주최 측에서 상을 준다 해도 몇 년에 한 번씩 얼굴을 비추고, 기껏 얼굴을 비추면 시상식 내도록 참석하는 게 아니라 곧바로 사라지는 모습이 일쑤였으니 시상식을 보던 팬이나 주최 측에는 좋은 말을 들을 리는 없었다.

연예계 데뷔를 하면서 그러한 체질이 고쳐진 줄 알았는데, 이 빌어먹을 증상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

이준이 만나고자 하는 세현은 현재 연락이 되지 않고, 소속사를 통해 연락해도 묵묵부답이었다.

‘만일 세현이 신변에 뭔가 문제가 생긴 거라면…….’

그날, 병실에서 보았던 세현의 하얗게 뜬 얼굴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게다가 자신의 어깨 뒤에 붙어 있던 예의 종이 인형 부적 역시 신경이 쓰였다.

이준은 이미 한번 거절한 시상식에 참석하겠다 나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후에게 대답했다.

“수상도 아니고 시상인데, 평소보단 괜찮을 거야.”

“이준아.”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니까?”

“크흠.”

“대표님.”

이준이 정후를 설득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정후를 불렀다.

이준은 뒤늦게 대표실 안에 자신이 홀로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승효가 정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 걱정된다면 저도 참석하는 게 어떨까요.”

이준은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승효를 응시했다.

승효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나보단 둘이 낫지 않습니까. 어려울 땐 도와줄 수도 있고요. 안 그렇습니까, 선배님?”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한 거야?”

대표실을 나서자마자 이준이 홱 몸을 돌려 물었다.

그러자 조심스럽게 대표실 문을 닫던 승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말입니까.”

이준은 뻔뻔하게 되묻는 승효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굳이 승효 씨가 나설 필요는 없었어. 정후 형이 안 된다고 해도 다른 방법은 있었고.”

“다른 방법이요?”

“고작 시상식일 뿐이야. 소속사 통하지 않고도 내 자리 하나 정도는 만들어 줄 만큼 업계에서 내 입김은 세다고.”

“…….”

“게다가, 이 일은 내 일인데 왜 승효 씨가…….”

“하지만 저와 함께 행동하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이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구승효는 말했다.

“어차피 선배님은 시상식 참여가 목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준은 정곡을 찌르는 승효의 말을 듣고 입을 다물었다.

승효는 순식간에 말문이 막힌 이준을 내려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대표님한테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보단 둘이 낫습니다. 특히나 비생을 대할 때는 더욱이요.”

빌어먹을.

‘한마디도 안 지지.’

구승효의 언변은 생각 이상이었다.

시상식 이후의 이준에 대해 걱정하며 반대의 기미를 보이던 정후는 승효의 유창한 언변 몇 번에 얼음이 녹듯 흐물거렸다.

“하하, 우리 승효 씨가 있어 준다면 안심이지!” 하고, 마치 구승효가 이준의 보디가드라도 되겠다고 말한 것처럼 든든해하는 모습을 보자니 어이가 없어졌다.

‘시상식은 각자도생이라고, 이 사람아.’

물론 대기실을 같이 쓴다든가, 혹은 옆자리에 앉는다든가 하면 조금은 보살펴 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어차피 선배님은 시상식 참여가 목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간파당했군.’

구승효는 이준의 속내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

인정한다.

차이준이 몇 번이고 참석이나 시상을 거절해 온 시상식 참여에 대한 마음을 바꾼 까닭은 오로지 그의 오랜 친구 때문이었다.

과거, 이준과 함께 그룹 활동을 했던 세현은 무척이나 밝고 쾌활한 성격이었다.

그는 어려운 일이 닥쳐도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애썼고, 난처해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걱정 마, 형. 비록 우린 이렇게 되었지만…… 그래도 난 내 꿈을 포기하진 않을 거야. 우리, 서로 각자의 자리에서 응원해 주는 건 어때?]

이준이 그룹을 해체시킨 원흉으로 비난을 받을 때도 제 곁을 묵묵히 지키며 응원해 주었던 세현이 아니었던가.

후일 공식 해체가 결정된 이후로도, 앞으로 더 잘하자며 힘을 준 사람은 바로 그였다.

‘하지만 근래 들은 세현이 소식은 걱정스럽기만 해.’

이준이 알던 사람답지 않게 고개를 들지 않고 다닌다든가, 타인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든가, 우울한 심경을 자주 표출했다든가 하는 세현의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직접 봐야 안심을 할 텐데…… 볼 수가 없으니.’

세현이 일부러 제 연락을 피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다.

특히나 강 기자로부터 세현이 시상식의 초대 가수로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때 세현을 만나 그의 증상을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선배님을 타깃으로 잡을 확률이 높다는 소리니까요.]

등에 붙어 있던 예의 종이 인형 부적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며칠째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양랑은 “별거 아닌 일에 너무 진 빼지 마.”라며 이준이 과민 반응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 봐도 그 종이 인형 부적이 붙었을 곳이 세현의 병실 말고는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세현이를 만나야겠어.’

이준은 이를 악물며 미간을 좁혔다.

“……님. 배우님!”

우뚝 서 있던 이준은 정신을 차렸다.

언제 왔는지, 태경을 비롯한 이준의 의상 코디와 메이크업 담당이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 어느새 TOKD 시상식 당일 아침이 되었다.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내던 태경을 보고 잠시 멈칫하던 이준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것보다 나 불렀어?”

“아, 네! 이 두 개 중 어떤 색이 좋으세요?”

태경은 레드와 블랙이 적절히 배합된 나비 보타이와 짙은 보라색감의 보타이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잠시 그 보타이들을 내려다보던 이준은 제 오른손을 붙잡고 있는 양 갈래 머리의 여성을 쳐다봤다.

“선희 생각은?”

“저는 둘 다 괜찮을 것 같아요. 전체 슈트가 블랙이기도 하고, 사실 오빠가 입으면 다 괜찮거든요.”

“선희 씨 말이 맞아요. 그래서 차라리 배우님이 고르시라고…….”

이준의 셔츠 소매를 고쳐 주다 슬쩍 고개를 들어 올린 의상 코디네이터 선희가 덤덤하게 대꾸하자 태경 역시 동의했다.

“그럼 왼쪽 걸로 하지.”

이준이 레드와 블랙 계열을 가리키자 태경은 씩 웃었고 선희는 반대편 팔의 소매를 만지작댔다.

“그런데 구 배우님은 안 보이시네요? 어디 가셨어요?”

돌발이나 다름없던 구승효의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이적으로 인하여 연예계에는 그간 전혀 알지 못했던 소식들이 퍼져 나갔다.

첫째로, 구승효와 차휘가 그간의 소문들과는 달리 매우 친밀한 사이라는 거다.

둘째로, 그러한 두 사람을 알고 있던 클레몽 엔터의 이정후 대표는 두 사람을 위시한 콘텐츠 개발을 선언했다는 것.

그리고 셋째로, 구승효와 차휘는 집안끼리 알고 지낼 뿐 아니라 현재 같이 살기까지 하는 사이라는 거다.

물론 세 번째 소식에 대해서는 앞선 두 소식이 워낙 충격적이라 그저 지어낸 루머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동거하고 있었고,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클레몽 소속의 스태프는 이렇게 대놓고 이준의 집에서 구승효를 찾고 있었다.

이준은 어리둥절해하는 태경과 갑자기 행동을 멈추고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더니 그것으로 모자라 주위까지 살피는 선희를 발견했다.

그는 은근히 구승효와 마주치기를 기대하는 두 스태프의 반응에 헛웃음을 삼켰다.

‘그러게나 말이다.’

평소에는 거슬릴 만큼 눈앞에 있더니.

‘웬일로 필요할 땐 코빼기도 안 보이냐.’

이미 이준이 눈을 떴을 때 구승효는 이 집에 없었다.

이준은 제 입술만 바라보고 있는 스태프들을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몰라. 샵이라도 갔나 보지, 뭐.”

무의식적으로 화끈거리기 시작한 오른쪽 귓불을 매만지는 이준의 손길이 더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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