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31화 (32/72)

31화

삼충(三蟲) (14)

스스슥.

“모두에게…… 들려 줄 거야.”

스슥. 스스슥.

“나를 무시하던, 모두에게.”

스슥.

뚝―.

* * *

<세현아. 나야, 차휘. 이 문자 보면 연락 좀 줘>

<세현아, 통화 좀 할 수 있을까?>

<세현아. 형인데 잠깐 볼 수 없어?>

<너 지금 어디야? 상운동이지? 나랑 만날 수 없을까? 잠깐이면 돼>

《주인. 지금 하는 행동은 차인지 얼마 안 된 사람 같군.》

미간을 좁히며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이준을 향해 누군가가 말했다.

제가 생각해도 섬뜩한 구석이 있는 문자의 향연에 이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심한가?”

《아주.》

“흠.”

《그렇게 그 인간이 걱정되는 거라면 차라리 대기실을 찾아가는 편이 낫지 않나?》

“그건 그런데…….”

이준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현재 이준이 있는 곳은 서울시 마포구 상운동에 자리 잡은 한 유명 케이블 방송국의 지하 대기실.

[차휘 씨가 참석해 주신다고 하셔서 어찌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상부에서도 아주 좋아했어요. 하지만 차휘 씨. 일전에 이미 불참이라는 기사가 떠서 말인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슨 부탁이요?]

[스테이지 위로 올라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대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MC들은 물론 이곳에 오신 관객들과 시청자분들을 깜짝 놀라게 해 드리고 싶어서요!]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메인 PD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가 사심으로 이번 시상식에 참여하게 된 것은 사실이었으니, 상대의 부탁을 들어줄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곤란하게 됐네. 구승효라도 있었으면 영기나 먼저 달라고 부탁했을 텐데.”

《본군의 힘으로는 부족한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조심은 해야지.”

만일 예상했던 대로 세현에게 비생이 들러붙어 있는 거라면, 양랑이 시상식의 열기로부터 저를 지키는 것과 비생을 제거하는 것.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는 못할 테니까.

잠시 고민하던 이준은 벌떡 일어났다.

《뭘 하려고?》

양랑이 묻자 이준은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거렸다.

“생방이 시작되기 전까진 나오지 말라 했지만, 마냥 이렇게 있을 순 없잖아. 세현일 찾아야겠어.”

《결계라도 둘러 줄까?》

“됐어. 난 버틸 만하니까 양랑 너는 힘을 비축해 둬. 혹시나 비생을 만나게 된다면 바로 제압해야 할 테니.”

양랑이 “알겠다.” 하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이준은 고요한 대기실 안을 둘러보다 미리 챙겨온 트레이닝복으로 옷을 갈아입고선 버킷햇을 눌러 썼다.

머리가 망가지는 일이 있어도 일단 세현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달칵―.

이준이 <특별 대기실>이라는 문구가 적힌 방문을 열자 밖에서는 부산스러운 소리가 났다.

“3번 마이크 아직도 고장이야?”

“김상화 씨 의상 어디 있어요?”

“주차장에서 무슨 문제 있었다며? 어떻게 된 거예요?”

“초청객들이랑 방청객들이 총 몇 명이랬지, 오늘?”

앞으로 세 시간 뒤 시작될 시상식을 위해 이미 리허설은 진행 중이었고, 한 시간 뒤면 레드 카펫 역시 시작된다.

그 덕분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스태프들은 이준이 대기실 밖을 나섰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이준은 후우 숨을 내쉬고는 아마도 오늘 시상식에 등장할 게스트들의 대기실 문을 하나둘씩 지나쳤다.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일부러 초대 가수가 있는 대기실과 가까운 곳으로 배정해 달라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준의 대기실 주변에는 이세현의 대기실이 존재하지 않았다.

‘……!’

혹여나 저를 알아볼 누군가 있을까 싶어 고개를 숙이며 문들을 지나치던 이준은 한참을 걷다 뚝 멈추어 섰다.

복도의 모퉁이를 지나기가 무섭게 오늘 오전부터 보이지 않던 구승효와 연한 분홍색 머리의 한 청년이 서 있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 * *

이준이 지금까지 찾아 헤매던 이는 구승효가 아니었으나 세현을 발견하기 전 그를 만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얼른 영기를 달라고 해야겠어.’

“구……!”

저 멀리 서 있는 구승효를 부르려던 이준의 입술이 벌어지려다 뚝 멈추었다.

승효가 무어라 말하고 있는 조명우의 손을 덥석 잡고 어디론가 향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닭 쫓던 개가 되어 버린 이준이 멍하게 서 있을 때였다.

《냄새가 나는군.》

그 모습을 지켜보던 건 양랑도 마찬가지였는지, 양랑이 코를 킁킁대며 중얼거렸다.

“시, 시끄러워.”

이준이 그러한 양랑의 말에 핀잔을 주자 흐응 콧소리를 흘리던 양랑이 말했다.

《주인. 왜 그리 까칠해?》

“뭐가.”

《혹시…… 신경 쓰여?》

클클대는 양랑의 웃음소리가 귀를 가득 메웠다. 이준은 비소를 흘렸다.

“웃기는군. 내가 저 녀석을 신경 쓸 이유가 있나.”

《당연히 신경 쓰여야 정상이지.》

“어째서?”

《어째서긴. 저 녀석은 주인의 ‘부군’이잖아.》

이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양랑, 농담이라도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마. 나와 구승효는 그저 조력자 관계일 뿐이라고.”

《하하, 주인이 그렇게 우긴다면 그리 불러 주도록 하지. ‘조력자’라고.》

“우기는 게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니까?”

짜증을 담은 이준의 말에 양랑은 그저 클클 웃기만 할 뿐이었다.

‘빌어먹을.’

괜히 기분이 안 좋네.

조금 전 이준과 양랑이 목격했던 구승효와 분홍색 머리 청년의 모습은 확실히 의심쩍어 보였다.

‘오늘 아침 일찍 나간 것도 조명우 때문인가?’

보통 때라면 저와 함께 출발하겠다며 그를 귀찮게 했을 구승효가 이곳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다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다.

‘헤테로가 아닐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 오래전, 한 아이돌 연습생과 모델에서 배우로 전향하여 인기를 끌게 된 핫 스타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됐어. 알 게 뭐야.’

사실 이 업계에서 사랑을 나누는 데 있어 남녀의 구별이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며 사는 차이준에게 있어도 마찬가지.

어차피 이준과 승효는 계약에 의해 얽매인 관계가 아닌가.

제게 영기를 주기만 한다면 승효가 누구와 정을 나누든 이준이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

기묘한 감각에 휘휘 고개를 저으며 주변을 둘러보던 이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불과 50미터 정도 앞에서, 세현이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기다려!”

이준은 저를 보자마자 홱 몸을 돌리는 세현을 향해 외쳤다.

“기다리라고, 이세현!”

헉. 헉.

이준은 달렸다.

세현과의 거리는 불과 1미터 정도.

조금만 팔을 뻗으면 어딘가로 달려가는 세현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웬일인지 세현과의 거리가 좁혀지질 않아 미칠 지경이다.

‘빌어먹을!’

입 안에 내려앉은 욕설을 삼키며 이준은 마지막 남은 힘을 주어 발돋움을 했다.

“……!”

마침 퀴퀴한 냄새가 나는 창고 안으로 들어선 세현의 옷자락이 그의 손끝에 잡혔다.

쿠쿵!

이준은 가까스로 세현을 붙잡으면서 바닥을 구르려는 그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아…….’

만일 이준이 세현의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싸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그의 머리가 차가운 바닥과 닿았을 것이다.

이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 아래에서 저를 노려보고 있는 세현을 향해 말했다.

“괜찮아, 세현아?”

불이 켜지지 않은 방송국 지하 대기실의 가장 구석진 곳.

청소 도구를 모아 놓은 창고 안에서 이준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세현의 떨리는 눈밖에 없었다. 그가 묻자 세현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났다.

“왜 그래? 아파?”

“…….”

“하아, 진짜.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하고 외치려던 이준의 입이 더 이상 움직여지질 않았다.

놀란 이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세현이 그를 힘껏 밀쳤다.

‘으윽!’

이준은 당연히 세현에 의해 밀려 나왔고, 하필이면 철제 선반의 모퉁이와 부딪혀 버렸다.

등을 강타하는 강한 통증에 이준이 미간을 찌푸리자 누워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던 세현이 보였다.

“세, 세현아.”

“왜…….”

응?

“왜…… 또, 형이야?”

이준은 바드득 이를 가는 세현의 중얼거림에 멈칫했다.

“어째서, 형은……. 형은 날, 귀찮게 하는 거야?”

“세현아.”

“내가…… 내가 왜 연락을 안 했는지, 정말, 몰라?”

이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이렇게 된 건 전부 형 때문이잖아!”

크윽!

세현이 입 밖으로 뱉어 낸 그 말이 바람을 타고 와 이준의 머리를 강타했다.

강렬한 통증에 이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양랑!’

《주인, 저건 그냥 인간이 아니다.》

이준이 속으로 있는 힘껏 양랑을 부르자, 아마도 주변에 있는 것이 분명한 양랑이 말했다.

‘알아. 비생한테 씐 거지? 몇 급 같아?’

《중급…… 아니, 적어도 상급이다.》

망할.

‘요즘 왜 이리 상급의 출현이 잦은 거야?’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이준은 “다가오지 마!”를 외치고 있는 세현을 바라보면서 후우, 긴 숨을 내쉬었다.

“<화(火)>.”

화르륵!

그러고는 언령술을 사용하여 불꽃을 일으켰다.

이준의 손바닥 위에서 나온 불길에 세현이 멈칫했다. 이준은 두 눈을 내리감았다 다시 뜨며 입을 열었다.

“세현아. 진정해. 난 널 도우려는 거야.”

“도와?”

우윽.

“형이 날 어떻게 돕겠다는 거야?”

‘컥!’

“휘 형. 형은 날…… 날 버렸잖아!”

세현의 외침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켜 이준에게 달려들었다.

작은 공간 안에서 한 몸에 그 파문을 흡수하게 된 이준이 털썩 주저앉았다.

“주인, 괜찮아?” 하고 놀란 양랑이 뒤늦게 결계를 만들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뭐, 뭐야…….’

이거.

이준은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형은 날 버렸어.”

이준과 거리를 두고 있던 세현이 중얼거렸다.

겨우 고개를 든 이준이 얼핏 본 그의 눈동자 주변은 튀어나온 혈관으로 인해 붉어진 상태.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버렸다고.”

“세……현아.”

“그런데 형이 날 돕는다고?”

세현이 크큭,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너 따위의 도움은, 필요 없어!”

쿠콰쾅!

세현이 외침은 강렬한 기운으로 변해 이준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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