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삼충(三蟲) (16)
[선배님은 일단 시상 준비에 신경 쓰십시오. 정 이세현 씨 일이 신경 쓰이신다면, 이세현 씨의 매니저에게 연락을 넣어서 어떻게 해서든 이세현 씨가 눈을 뜨고 있도록 만드십시오. 선배님 말씀대로 오늘 이세현 씨가 잠을 자지 않는 것이 관건이니 말입니다.]
쾅―.
이준은 거칠게 대기실의 문을 닫았다.
이준이 대기실을 비웠던 것도 충분히 놀라웠는데, 돌연 다시 나타난 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이자 스태프들은 꽤나 당황한 듯했다.
‘제기랄!’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의 반응을 뒤늦게 발견하곤 순간 멈칫한 이준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빙긋 웃었고, 그제야 스태프들은 안심하며 자신의 일에 매진했다.
‘이거…… 무지하게 기분 나쁘네.’
명백한 선 긋기에 화가 났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대체 그 녀석이 왜 거기 나타난 거야?’
물론 삼충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준 것은 충분히 고맙고 감사한 일이나, 구승효의 말에 입도 벙끗하지 못했기에 불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왜긴. 본군이 그 녀석을 불렀다.》
그러자 양랑이 말했다.
대기실 의자 앞에 앉은 이준이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며 물었다.
‘양랑 네가?’
《그래.》
‘왜!’
《왜냐고?》
양랑은 코웃음 쳤다.
《그때 주인은 정말로 ‘먹혀’ 버릴 뻔했다. 당시 본군이 그 녀석을 부르지 않았다면, 주인은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거다.》
“쓸데없는 짓이었어.”라는 말이 차올랐지만, 뱉어 내진 못했다.
이준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틀렸다는 게 아니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말했잖아. 구해 준 건 확실히 고맙고 감사하다고. 하지만…… 하지만, 세현이 일은 내 문제라고.’
비생에 점령당한 세현을 떠올리며 이준이 바득 이를 갈았다.
‘세현이가 왜 삼충에게 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본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어. 그런데 구승효는 그걸 혼자 처리하려 들잖아. 백지장도 맞들면 나은 거 아니었어? 왜 내가 방해라도 될 것처럼 말하는 거지?’
《하지만 주인, 저 녀석 말도 일리가 있다.》
양랑은 이준을 달랬다.
‘무슨 소리야.’
《주인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오래 있으면 버거워하지 않느냐.》
‘그건!’
《심지어 곧 시상이라는 걸 해야 하지.》
‘…….’
《그렇다면 많은 사람의 앞에 서야 하는데, 그 녀석이 영기를 주인에게 나눠 줄지언정 주인이 버틸 수 있겠나? 예전이면 몰라, ‘지금’의 주인으로선 무리다.》
“시끄러워!”
“네?”
버럭 외치는 이준의 음성에 분주하게 움직이던 차휘 팀의 스태프들이 다시 행동을 멈추었다.
이준은 하하, 웃으며 “연기 연습.” 하고 미소 지었다.
어찌나 화사한 눈웃음인지 어리둥절해하던 스태프들은 곧 수긍하며 다시 다른 일에 집중했다.
‘돌아 버리겠네.’
이러한 무력감은 난생처음이다.
《기분이 나빠 보이는군.》
대기실 의자에 앉아 스태프들이 해 주는 메이크업을 받으며 눈을 감고 있던 이준에게 양랑이 말했다.
이준은 속으로 대꾸했다.
‘좋진 않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현이 일인데 나설 수가 없다니.
이준이 입술을 살짝 깨물자 그의 메이크업을 담당하는 현주가 “오빠, 입술 여세요.” 하고 속삭였다.
양랑이 말했다.
《이 모든 건 주인이 과거의 힘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뚱냥이. 누가 그걸 모르나? 그래서 기분이 나쁘다는 거잖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무력해서.
누군가에게 힘을 빌려야만 하는 사실이 허무해서.
《흥미롭군.》
양랑은 얼굴을 굳히는 이준에게 중얼거렸다.
《한때는 본군에게 영기를 줘도 끄떡없었던 주인이, 그 영기를 버리지 못해 한탄하던 주인이, 이제야 후회하다니.》
‘…….’
《왜. 다시 ‘정식 견자’가 되고 싶어?》
비소를 흘리는 양랑의 말에 일언반구도 할 수가 없었다.
‘후회……라.’
16년 전의 사건 이후 당시 모든 일에 환멸을 느껴 견자 훈련과 집안에 대한 책무를 내던진 사람은 확실히 차이준, 자신이었다.
그래. 먼저 포기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냉정한 시선으로 보면 구승효의 말이 틀린 게 없어.’
많은 사람이 모이는 시상식에는 이준의 영기가 특히나 약해지고, 영력을 사용하기가 버거워진다.
특히 그런 상황에서 이준이 세현을 돕겠다며 나선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짐이 될 뿐 아니라 그를 방해할 확률이 높지.
세현을 생각하면 구승효의 말을 따라야 했다.
게다가 양랑이 이준을 돕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았던가.
[언제까지나 산군의 도움만 받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숨이 나왔다.
“참, 태경아. 아까 내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지?”
굳어 있던 이준이 불현듯 든 생각에 태경을 찾았다.
“맞다, 안 그래도 배우님께 말씀드리려 했어요. 이세현 씨는 2부 중간쯤 있을 초대 가수석에 설 예정이래요!”
“2부 중간?”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배우님은 1부 끝에 무대에 오르실 테니 곧이네요. 어쨌든 지금 준비가 한창이라 그때까지는 눈을 붙일 시간도 없을 거니 걱정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건 다행이네.
“세현이한테는 말 안 했지?”
“옙! 배우님이 당부하신 대로 이세현 씨에게는 배우님이 연락하셨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세현 씨가 오늘 평소와는 달리 조금 예민해 보인다더라고요. 짜증도 엄청 내고, 스태프들한테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기도 하고…….”
“…….”
“혹시 말이에요. 이상한 소문이 돌았던 직후 다시 서는 무대라 긴장한 게 아닐까요?”
이준은 걱정하는 태경에게 흐리게 웃었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다.
“태경아, 나 부탁이 하나 있어.”
“말씀하세요!”
“내가 시상을 하고 올 동안 태경이 네가 세현이 대기실 근처를 살피면서 그 녀석한테 무슨 일이 없는지 좀 봐 줄 수 있어?”
이준은 놀라는 태경에게 설명했다.
“오늘은 어떻게든 꼭 만나야 하는데 세현이가 자꾸만 날 안 보려고 하네.”
저를 향해 분노의 눈길을 보내던 세현을 떠올리며 이준이 말하자 태경은 외쳤다.
“그런 거라면 염려 마세요, 배우님! 배우님이 시상하고 돌아오실 때까지 제가 이세현 씨를 감시하겠습니다!”
“어머, 태경 씨. 오빠 말은 감시라기보단…… 아니네, 감시 맞나?”
“맞지. 태경 씨 감시 잘해야겠어. 오빠한테 한 소리 안 들으려면.”
이준의 의상과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선희와 현주가 호호 웃으며 말하자, 태경이 얼굴을 붉혔다.
“그럼 저흰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태경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대기실을 나섰다.
이준은 정면을 응시했다.
‘…….’
거울 속의 그는 짙은 블랙 슈트에, 안에는 화이트 셔츠, 그리고 레드와 블랙이 적절하게 섞인 나비 보타이로 포인트를 준 의상을 입고 있었다.
얼마 전 공격당한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멀쩡한 얼굴이다.
똑똑.
짧은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준이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달칵 문이 열렸다.
“다행히 계시는군요.”
왠지 모르게 안심하는 그 말투에 이준은 코웃음 쳤다.
“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대기실 앞에 내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나? 당연히 여기 있지.”
승효의 의견에 동의하기는 하나, 화난 낌새를 감출 수 없었던 이준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승효는 그러한 이준의 반응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물론 그건 사실이지만, 선배님이 안에 계실지는 확신할 수가 없어서요.”
“설마 내가 약속을 어기기라도 한다는 거야?”
이준의 날카로운 반응에 대기실 문 앞에 서 있던 남자의 눈이 반달처럼 변했다.
‘재수 없는 녀석.’
목구멍까지 반발심이 튀어나왔지만 이준은 곧 체념하며 대답했다.
“걱정 마. 그쪽 말대로 할 테니까.”
“믿어도 되는 겁니까.”
자극하는 거야, 뭐야.
“나도 주제 파악은 해. 애써 위험한 짓은 하지 않는다고.”
승효가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고만 있는 이준에게 빙긋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금 이따 동편 비상계단에서 뵙죠.”
“동편 비상계단?”
“오늘 치 영기는 안 드렸잖습니까.”
“…….”
“이세현 씨 일을 처리하기 전에 선배님께 영기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그거 엄청나게 고맙네.
이준은 입술을 씰룩거리며 정면 거울을 응시하다 눈을 감아 버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이준은 다시 눈을 떴다.
거울 속에 비친 오른쪽 귀의 귀걸이가 오늘따라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 * *
“지금부터 선배님이 하실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입술과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승효가 말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이준과는 달리, 평정을 되찾은 그는 영롱한 보랏빛으로 물든 귀걸이를 만지작대던 이준을 내려다봤다.
“집으로 돌아가세요.”
이준이 냉정하게 말하며 몸을 돌리려던 승효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잠깐만, 승효 씨.”
“……?”
“혹시 모르니까, 나도 여기서 대기하고 있는 건 어때?”
승효의 미간이 좁아졌다.
“방금 승효 씨한테 영기도 받았고, 버틸 만한 것 같아. 그러니…….”
“선배님.”
이준은 더 말을 하지도 않겠다는 듯, 자신을 부른 뒤 눈빛만 쏘아 대고 있는 승효를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하라는 대로 하면 되잖아.”
툴툴거리는 이준을 보고 빙긋 웃던 승효는 비상계단을 나서기 전 이준에게 말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걱정 마세요.”
응?
“이세현 씨가 선배님에게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나쁜 일은 없을 거고요. 그러니 저를 믿어 주십시오.”
저를 달래듯 말하는 구승효의 표정이 어쩐지 씁쓸하게 느껴졌으나, 이준은 말을 마치자마자 비상계단을 나서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못 믿는 게 아니야.’
한참 후, 비상계단을 나서던 이준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생각했다.
‘양랑.’
《응.》
‘……주역이 아닌 기분이 바로 이런 걸까?’
차이준의 인생에 있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적은 없었다.
언제나 그는 사건의 중심이었고, 해결사였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관망하는 상황이 되어 버리니 기분이 그리 좋지 않다.
《주인이 이 세계에서 ‘주역’이 되려면 더 강해져야 해. 하니 그 입술 박치기를 쉬지 않고 해서라도 예전의 영기를 찾아야 하고.》
‘교양 없이 입술 박치기가 뭐냐, 그건 그냥 주입 의식이라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태경과 함께 퇴근할걸, 하고 후회하던 이준이 터덜터덜 걷다 뚝 멈추었다.
“휘…… 형.”
이준의 정면에 음침한 얼굴로 제 이름을 부르는 세현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