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35화 (36/72)

35화

삼충(三蟲) (18)

“형…… 휘, 형…….”

“세현아! 정신이 들……어?”

이준이 제 예명을 부르는 세현에게 다가가려다 멈칫한 것은, 만에 하나의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으윽…….”

불과 몇 초 전까지 이준에게 날을 세우던 세현의 눈동자는 어느새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그의 흰자위가 더 이상 검은색이 아닌 흰색으로 물든 걸 확인한 이준이 다시 세현에게 다가가려 할 때.

“으아아악!”

세현이 돌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선 괴성을 내질렀다.

이준은 “아파, 아파!” 하고 외쳐 대고 있는 세현의 모습을 보고 적지 않게 당황했다.

‘대체 양랑이랑 구승효는 언제 오는 거야!’

괴성을 내지르는 세현의 모습은 몹시나 아파 보였기에 이준의 마음이 급해졌다.

제기랄!

한참이나 세현에게 다가갈지 말지 망설이던 이준은 결국 거리를 두었던 세현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고, 그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세현아, 형이야. 형 알아보겠어?”

온몸을 파들파들 떨며 괴로워하던 세현이 질끈 감았던 눈을 가까스로 뜨자 이준은 외쳤다.

“내 얼굴 보여?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휘…… 형.”

“그래! 나 차휘야. 기다려. 형이, 형이 덜 아프게 해 줄게.”

이준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현에게 언령술을 사용하기 위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통증을 완화시키는 언령술. 그게…… 그게 뭐더라.’

비생이 아닌 인간에게 치유 언령술이 통할지 말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걸 해야 했다.

‘그래!’

막 떠오른 단어를 머릿속에 새기며 이준이 막 입을 열려던 순간이다.

“형…….”

으윽.

이준은 깊은숨을 뱉어 내며 언령을 흘리려던 제 손목을 덥석 잡은 세현을 바라봤다.

“나……. 나 아파서, 못 견디겠어.”

세현이 두 눈에서 피를 흘리며 이준을 향해 말했다.

“안 돼! 여기서 의식을 잃으면 안 돼. 너 그러면 죽어!”

“죽으면…… 편하지 않을까?”

뭐?

“어차피 형도, 다른 멤버들도, 모두 예전에 날…… 버렸잖아.”

이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형…… 나 말이야, 더는 아프기 싫어. 그때만큼 아프면,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아. 이제 다신, 못 견뎌!”

이준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자 세현은 벌떡 일어나더니 이준을 뒤로 밀쳤다.

쿵!

방심하고 있던 이준이 밀려나자, 세현은 곧장 난간 쪽으로 달려갔다.

“안 돼! <박(縛)>!”

다시 한번 결박 언령을 날리자 옥상의 난간을 향해 달려가던 세현의 한쪽 다리가 허공에 멈춘 채 고정됐다.

‘빌어먹을!’

이준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옥상에서 벌어지는 이 촌극을 누군가 보고 있다면 내일 아침 대서특필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겠지만, 다행히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도 8시밖에 안 됐다니!’

경신일이 끝나기까지는 한참은 더 남았다.

더불어 시상식이 끝나기까지도.

만약 모든 시상이 끝나는 시각인 9시쯤을 넘기게 된다면 그때부터 우르르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세현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강제로 세현의 몸에서 삼충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이준은 “크윽, 크아악!” 하고 결박술에 당한 채 연신 신음을 흘리고 있는 세현을 향해 다가갔다.

“이봐, 세현이 안에 든 비생. 내 말 들리나?”

그 순간 세현의 몸을 점령하고 있던 세 마리의 벌레들이 세현의 두 눈과 콧구멍으로 빠져나와 이준을 위협했다.

그 기괴한 광경에 순간 구역질이 치솟았지만 가까스로 참아 낸 이준은 크르르 소리를 흘리는 듯한 세 마리의 벌레를 응시하며 외쳤다.

“차라리 나는 어때?”

이준의 말에 세 마리 벌레들이 멈칫했다. 그는 냉정하게 말했다.

“내 몸으로 들어와. 적어도 그 몸에 있는 것보단 내 쪽이 낫지 않겠어?”

쉬익. 쉬이익!

세 마리 벌레들이 마치 이준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반응했다.

“물론 마음대로 그 몸을 떠날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이동할 몸의 당사자가 허락하면, 가능하잖아?”

이준은 빙긋 웃었다.

“그러니 나한테 와. 나는 영기도 넘쳐서 너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

이준이 오른쪽 귀의 귀걸이를 만지작대자 삼충이 꿈틀거렸다.

이준은 후우, 숨을 길게 내쉬더니 양팔을 좌우로 벌리며 소리쳤다.

“선택해. 세현이야, 나야?”

그러자 세현의 구멍이란 구멍을 오가던 벌레들이 캬아악, 괴성을 내질렀다.

《저기다!》

양랑의 외침에 승효는 닫혀 있던 옥상의 철문을 있는 힘껏 발로 밀었다.

콰쾅!

“선배님, 괜찮……!”

양랑으로부터 “주인이 위험하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준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양랑의 뒤를 쫓았다.

의상도 갈아입지 않은 채 어딘가로 뛰어가는 승효를 보고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지만, 그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그리고 도착한 M사의 옥상에서 승효는 두 명의 남자를 목격했다. 한 명은 2부의 초대 가수로서 현재 스태프들이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가며 찾고 있는 세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선……배님?”

옥상 정원의 바닥에 웅크려 꿈틀거리고 있는 검은 슈트 차림의 남자는 낯이 익었다.

승효는 이미 기절해 버렸는지 미동 않는 세현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이준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몸을 만 채 바닥을 보고 엎드려 있는 이준에게 팔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선배님, 왜 그…….”

“오지 마!”

이준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점이 느껴졌다.

승효가 멈칫하자, 그의 주변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양랑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주인!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승효는 그제야 이준의 주변으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감지했다.

‘이건…….’

승효의 갈색 눈이 살짝 떨려 왔으나, 그는 이준에게 다가가는 걸 멈추지 않았다.

“오지…… 오지 말래도!”

갈라진 음성을 흘리며 이준이 그런 승효를 향해 소리쳤다.

“제길! <획(劃)>!”

스스슥!

이준의 입에서 튀어나온 검은 연기가 커다란 글자를 이루더니 승효와 양랑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거냐, 주인!》

“오지 말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분노하는 양랑을 향해 오히려 화를 내던 이준이 숙였던 고개를 그들을 향해 들어 보였다.

‘…….’

승효는 그러한 제 시야로 들어온 이준의 눈이 불과 몇 분 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준의 동공은 평소보다 더 짙었고, 깨끗하고 맑았던 그의 흰자위는―.

“선배님. 설마 ‘받아들이신’ 겁니까?”

양랑이 제게 달려온 것과 그가 이준을 찾아 나선 건 고작 10분도 채 되지 않은 일이었는데.

그사이 벌써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생각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크큭.”

이준이 그런 승효를 바라보다 의식을 잃은 세현을 흘긋거렸다.

“미안해, 승효 씨.”

“…….”

“나서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어 버렸네. 하지만 나도 최대한 승효 씨 말에 따르려 했다고.”

승효는 자조 섞인 이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이준은 길게 숨을 뱉어 내며 말했다.

“난 괜찮을 거야.”

“…….”

“알다시피 난 양랑이라는 종속 비생도 데리고 사는 몸이라, 고작 삼충이 들어와 잠시 기생해도 충분히 멀쩡…….”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주인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정녕 모르는 거냐?》

양랑이 일갈했다.

《네 녀석은 지금 다른 이의 죄까지 모조리 짊어지게 된 거라고! 그런데도 뭐? 괜찮다고? 오늘 밤, 만약 주인이 잠깐이라도 의식을 잃는다면, 주인은 그대로 목숨을 잃게 될 거다!》

양랑의 일갈에 이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설마, 너……!》

양랑이 그런 이준을 보았는지 당황한 숨을 터트렸다.

이준은 말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방법이 이것뿐이었는걸.”

《주인!》

“큰일이 생기진 않을 거야. 일단 시간을 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방법이 있겠지. 방법이…….”

《시간을 벌면 뭐 하냐! 제기랄, 본군은 왜 이리 미련한 녀석을 주인으로 삼게 된 거지? 통하다, 원통해!》

양랑은 모든 사실을 알고도 받아들인 것이 분명한 이준을 보며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이준은 쓰디쓴 웃음을 삼켰다.

《어이, 구가의 놈. 너도 함부로 허튼수작 따위 부리지 마라. 본군도 머리를 굴려야겠으니까. 어떻게든 삼충을 주인의 몸에서 벗어나게 하는…… 너, 너 뭐 하는 거야!》

양랑을 부른 승효가 돌연 당황해하는 이준 쪽으로 다가갔다.

이준이 그어 놓은 결계를 제 손으로 부러뜨리면서, 천천히.

크윽.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결계를 쳐 둔 이준의 언령술은 꽤 강력했지만, 다행히 승효가 부술 수 있을 정도였다.

“구승효!”

순식간에 저와의 거리 사이를 좁혀 버린 승효를 보고 이준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승효는 이준의 눈과 코, 그리고 귀에서 슬금슬금 모습을 보이는 형태 없는 벌레 세 마리를 무심하게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잡으세요.”

승효가 두 팔을 이준에게 내밀자 이준이 “뭐?” 하고 되물었다.

“지금부터 전 선배님께 영기를 드릴 겁니다. 그러니 그 영기를 받아서 선배님이 스스로 삼충을 쫓아내십시오.”

“승효 씨,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대꾸하려던 이준의 손목을 승효가 덥석 잡았다.

“승효 씨!” 하고 이준이 그를 불렀으나, 승효는 강제로 이준의 손으로 자신의 팔을 잡게 만들더니, 그를 제 품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이번 영기를 받는다면 몹시 고통스러울 겁니다. 현월 구가의 영기에는 정화 작용이 있어서 선배님 몸 안에 든 삼충을 위협할 테니까요. 정화되지 않기 위해 삼충이 요기를 분출할 테니, 쉽지 않겠지요.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제 팔을 붙잡고 계십시오.”

“너!”

“모든 의식을 삼충을 박멸하는데 모아야 합니다. 눈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개의치 마시고요.”

“나는…….”

“선배님이라면 하실 수 있어요.”

모든 것이 검게 물든 이준의 눈이 크게 일렁였다.

승효는 그런 이준의 두 뺨을 잡으며 속삭였다.

“없애는 거예요, 선배님 몸속에 있는 부정한 것들을.”

그 말에 홀린 듯 승효를 응시하던 이준의 입술이 다가온 승효에 의해 가로막혔다.

흐읍―!

거친 숨결과 영롱한 기운이 두 사람을 감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