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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이라면 악연-37화 (38/72)

37화

백호(白狐) (2)

“많이 기다렸지?”

세숫대야와 수건을 든 채 성큼성큼 거실로 걸어간 이준이 승효의 앞 테이블에 물건을 내려놓으며 생긋 웃었다.

이준의 명대로 그가 돌아올 때까지 소파에 앉아 있던 승효가 미소 짓는 이준을 올려다봤다.

“선배님.”

“응?”

“꼭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 이제 씻겨 줄게!” 하고 팔을 걷어붙이려던 이준이 승효의 말에 그를 응시했다.

승효가 말을 이었다.

“물론 선배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절 돌봐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건 사실이지만, 다행히 전 두 팔 모두 다친 것도 아니고 한 팔로 충분히 얼굴 정도는 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잠깐, 잠깐.”

이준이 제 호의를 거절하려는 승효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승효가 말을 멈추자 이준은 입을 열었다.

“승효 씨.”

“예.”

“승효 씨는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어?”

승효의 연갈색 눈동자가 의아함에 물들었다. 이준은 하아, 숨을 내쉬려 했다.

《구가 녀석. 모든 걸 뚫어보는 척하더니 너도 생각보다 둔하구나. 본군이 말해 주마. 주인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면…….》

“<함(咸)>!”

쓸데없이 끼어들려 하기는.

이준은 그르릉대며 승효에게 말하려던 양랑의 입을 막았다.

우우웅.

양랑이 불쾌하다는 듯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이준은 모르는 척했다.

그러며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승효를 빤히 주시했다.

주춤하던 이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마워서 그래, 고마워서.”

체념한 듯한 이준의 말에 승효가 눈을 크게 떴다.

뭘 그리 놀라.

이준은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날 말이야. 내가…… 조금 심했잖아.”

그날이라면 사흘 전, TOKD 시상식이 열리던 날을 의미한다.

이준은 저를 빤히 바라보는 승효의 눈길이 따갑다고 생각했다.

흠흠.

헛기침을 속으로 삼키던 그는 말했다.

“당시 승효 씨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까칠하게 굴었어.”

“…….”

“인정할게. 그때 난 아무것도 못 하는 날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아. 옛날의 일이…… 생각났거든.”

이준이 쓰게 웃자 승효의 눈이 가라앉았다.

이준은 갑자기 침울해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휘휘 허공으로 손을 휘저었다.

“여하튼 내 태도가 옳지 못했음에도, 승효 씨는 날 도와줬지. 강주가 그러더라.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응당 도움에 보답해야 한다고. 그러니 이런 것 정도는 하게 해 줄래? 세현이 일도 신세 졌잖아.”

“…….”

“그리고 여러 번 있을 일도 아니야. 오늘 아니면 받을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차휘’가 씻겨 주는 건 흔하지 않단 말이지.”

이준이 중얼거리자 승효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으응?’

제 시야로 들어온 승효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습이 왠지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해서 이준은 순간 놀라 그를 응시했다.

“알겠습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던 승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마음대로 하세요.”

“……!”

스륵, 뜨고 있던 눈까지 내리감는 승효를 보자니 괜스레 기뻐졌다.

이준은 씩 웃으며 반쯤 걷었던 소매를 팔꿈치까지 올렸다.

뚝. 뚝.

그러고는 들고 있던 수건을 뜨끈한 물에 담갔다 다시 올리며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승효를 내려다봤다.

차이준이 구승효라는 녀석과 같은 지붕 아래 지낸 지 벌써 일주일을 훌쩍 넘겼다.

고작 일주일 사이 그들 사이에선 별일이 다 일어났지만, 가장 큰 일은 아무래도 1년 뒤의 ‘귀영 의식’을 대비하기 위해 영기를 받는 일이었다.

‘흐음.’

하루 한 번.

도톰한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순간 강렬한 기운이 상대에서 제 안으로 전해지는 그 저릿한 감각은 매일, 매번 겪어도 낯설기만 하다.

뜨겁게 원했다가도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보면 벌떡 일어나기 바빴기에 승효의 얼굴을 제대로 응시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나 마찬가지.

촉촉하게 젖은 수건으로 승효의 얼굴을 닦으려던 이준의 행동이 뚝 멈추었다.

이준의 검은 눈 안으로 들어온 구승효의 얼굴은 TV나 화보, 글고 스크린을 통해 보아 왔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래.

‘분명 다르지 않은데…….’

이준은 세심하게 그를 응시했다.

손을 대면 베일 것처럼 날렵한 코와 붉고 탐스러운 입술은 물론,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그 위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눈까지.

감은 눈꺼풀 아래에 이슬이 맺힌 속눈썹이 유난히 길다.

이준은 무심코 들고 있던 수건으로 승효의 뺨을 닦았다.

‘여기에 점이 하나 있네…….’

승효의 왼쪽 눈 아래에는 작지만 예쁜 점이 하나 존재했다.

그의 옅은 눈동자 색과 아주 잘 매치되는 점이라서 구승효의 트레이드마크라 불렸던 것이 기억난다.

‘왠지……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으로 인해 승효의 체취가 느껴지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댔다.

그러자 그 소리에 놀란 승효가 다시 눈을 떴다.

‘헉.’

허공에서 승효의 연갈색 눈동자와 부딪히자 이준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선배님?”

따뜻한 수건을 들고선 제 얼굴을 닦으려던 이준이 파리하게 질린 표정을 짓고 있자, 승효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어, 그, 그게!”

― Rrrr. Rrrr.

‘……!’

천만다행이다.

이준은 던지듯 승효에게 수건을 건네고선 벌떡 일어났다.

“전화 좀!”

승효는 얼떨결에 축축한 수건을 받아 들었다. 이준은 의아해하는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식탁 쪽에 놓아둔 제 핸드폰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고는 전화의 발신인을 보기 위해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봤다.

‘어?’

이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 * *

“어서 와……. 형.”

주저하던 이준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핏기 없는 얼굴로 저를 반기는 세현이 보였다.

선명하던 세현의 입술이 말라붙어 있는 모습을 보자니 속이 쓰라렸다. 잠시 멈칫한 이준은 곧 마음을 다잡으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이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빙긋 웃던 세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생각보다 좋아. 몇 주 전보다 훨씬 가볍기도 하고. 지금 당장 일어나서 러닝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야.”

씨익 웃으며 말하는 세현의 얼굴은 확실히 M사의 대기실에서 마주쳤을 때보단 생기가 넘쳐 보였다.

‘삼충은 확실히 없어진 것 같군.’

이준은 세현의 몸을 장악하던 비생의 기운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마음 같아서는 행여나 남아 있을 잔흔을 살피고 싶었으나, 이런 일은 은밀히 활동하는 전국 견자 협회에서 하는 일이다.

‘강주가 처리한다 했으니까.’

그들을 믿을 수밖에.

“휘 형.”

이준이 말 못 할 생각을 품으며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자 세현이 그를 불렀다.

“그날…… 형이 기절한 날 발견했었다며?”

“아.”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세현은 말했다.

“요즘 일이 잘 안 풀려서 상태가 안 좋았는데, 하필 시상식 날 그렇게 될 줄은 몰랐네. 형이 아니었다면 시상식에 더 큰 피해를 입힐 뻔했어.”

“프로로서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네.” 하고 중얼대는 세현을 지켜보던 이준은 문득 든 생각에 입을 열었다.

“세현아. 내가 물어볼 게 있는데…….”

“응, 말해, 형.”

“그때 말이야. 많이…… 힘들었니?”

이준의 말에 세현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형이 날 어떻게 돕겠다는 거야? 형은 날…… 날 버렸잖아!]

삼충에 씐 세현은 이준을 향해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세현의 ‘버렸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금세 알아차렸다.

과거, 6인조 남성 아이돌 그룹 ‘미스틱’의 해체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다.

당시 이준은 자신의 탈퇴를 공식화하기 전까지 일 년이나 그 사실을 멤버들에게조차 공표하지 않았고, 후일 단체 콘서트가 끝나던 날 어렵게 말을 꺼냈었다.

물론 이준의 탈퇴 이후 ‘미스틱’의 해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이 주된 원인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는 그의 탈퇴를 진작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입을 다물었던 세현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돌아갔었다.

‘그때 그 말을 믿는 게 아니었어.’

세현은 탈퇴 이후 해체까지 이어진 그룹을 보고 자책하는 이준에게 자신은 괜찮다고 말을 했었으나, 삼충에 의해 본심을 털어놓은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

고개를 푹 숙이며 입술을 꾹 짓누르는 이준의 모습에 세현이 팔을 뻗었다.

그의 손이 제 옷자락을 스치자 멈칫한 이준이 세현을 바라봤다.

“그땐 어쩔 수 없었잖아. 상황이 그렇게 된 거. 형 잘못이 아니었어.”

“하지만…….”

“근래 내가 힘들었던 건, 해체 때문이 아니라 작곡이 힘들어서 그래. 그러니 내가 아직도 그날의 일을 염두에 둘 거라고 생각 안 했으면 좋겠어.”

“…….”

다정한 세현의 말에 이준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세현 씨.”

그때였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저도 여쭐 것이 있습니다.”

이준과 세현의 대화를 한 걸음 물러난 뒤에서 지켜보던 구승효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병실 안에 있는 짙은 캡 모자와 검은 선글라스의 남자를 의아하게 흘긋거리던 세현이 승효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 나서기로 했잖아!”라는 눈으로 이준이 승효를 응시했지만, 승효는 개의치 않고 다시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근래, 수상한 사람이 이세현 씨한테 접근한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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