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39화 (40/72)

39화

백호(白狐) (4)

‘흐음…….’

이준은 눈을 내리깔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입을 꾹 다물며 의자의 팔걸이에 팔을 댄 채 턱을 괴고 있는 그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마침 밝은 빛 계열의 슈트를 입고 있었던 터라 그림 속 신선도 저렇게 아름다울 리 없다며 스튜디오 내 스태프들은 작게 속삭였다.

《얼이 빠졌구나, 주인.》

이전부터 잡혀 있던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강남의 한 스튜디오에 나와 있었던 이준은 상념을 깨우는 양랑의 말에 속으로 대꾸했다.

‘양랑.’

《응.》

‘너, 내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

이준의 물음에 양랑이 “뭐?” 하고 되물었다. 이준은 지난 며칠 동안의 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너도 알다시피 난 아주 활달한 성격을 지녔지만, 놀랍게도 타인을 잘 믿지 못해.’

《…….》

‘그래서 친구가 많지 않고, 쉽게 의심하지.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말은 잘 들으려 하지도 않고, 아무리 그 말이 옳다고 할지언정, 내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면 부정부터 해 왔어. 그런데…….’

[그러니 저를 믿어 주십시오.]

저를 보던 강렬한 시선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말에 부정조차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어떠십니까. 배우고픈 마음이 드세요?]

반달처럼 곱게 접히는 그 부드러운 눈웃음에 덩달아 히죽 입꼬리를 올리려던 제 모습 또한.

‘어째서 난 그런 태도에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는 거지?’

차이준이 구승효라는 녀석과 얽히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주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심지어 이준은 승효를 꺼리고, 싫어하는 편이지 않았던가.

여태껏 그래 왔던 보통의 경우라면, 이준은 그런 승효의 모습에 더욱 반발심을 가지며 불만을 드러내야 옳았다.

하지만 현재의 그는 승효가 하자는 대로 힘껏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심지어 그렇게 싫어하던 견자 특훈까지 하겠다며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양랑. 혹시 말이야. 구승효가 비생이 아닐까?’

《뭐?》

‘어쩌면 내가 구승효한테 홀린 것일 수도 있잖아. 안 그래?’

한참이나 고민하던 이준이 엉뚱한 결론을 내자 양랑이 “헛소리!” 하고 그를 꾸짖었다.

이준은 한숨을 푹 내쉬며 겨우 세팅해 놓은 머리를 헝클어트리려다 말았다.

“차휘 씨! 오늘 각 잡았는데? 사색에 빠진 그 모습, 완전 좋아! 내가 원했던 바로 그 모습이라고!”

굳은 얼굴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이준의 상태는 다행히 그의 화보를 촬영하는 포토그래퍼에게는 가히 베스트라 불릴 만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입꼬리를 늘이던 포토그래퍼는 쉬지 않고 셔터를 눌러 댔다.

“선배님.”

세 시간가량 이어지던 작업 중 잠깐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내가 여태껏 찍은 차휘 모습 중 최고야!”라며 계속해서 이준을 찬양하던 포토그래퍼의 외침이 귀에 남아 피식거리고 있을 때, 웬 커피 하나가 이준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

“조명우입니다, 기억하세요?”

이준은 연분홍 머리색이 인상적인 청년의 얼굴을 발견하고선 탄성을 터트렸다.

조명우는 특히나 얼마 전, TOKD에서 이준으로부터 신인상까지 건네받지 않았던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하지.

“당연히 기억하죠. 명우 씨도 여기 촬영 있어요?”

이준이 반갑다는 듯 환하게 웃자 명우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 선생님이랑 개인적인 약속이 있어서 스튜디오 찾았다가, 마침 선배님께서 스튜디오에 계신다는 말씀을 들었어요. 그래서 인사드리려고요!”

박 선생이라면 방금 전까지 이준의 사진을 촬영해 준 이 스튜디오의 대표이자 포토그래퍼였다.

인맥도 있네.

이준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래요? 어쨌든 정말 반갑네요.”

“참! 이거 드세요!”

이준은 명우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보이는 커피를 내밀자 고개를 저으며 사양하려 했다.

“아, 명우 씨. 미안한데 난 커피는…….”

“선배님은 디카페인만 드신다고 들어서 디카페인으로 준비했어요! 받아…… 주실 거죠?”

이준의 커피 취향까지 미리 파악한 명우의 눈빛을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이준은 “고마워요.” 하고 명우에게서 커피를 받아 든 후 그를 힐끔댔다.

‘보기보다 싹싹한 유형인가?’

요즘 후배들은 같은 세대가 아니라면 피하기 바쁜데, 이제 막 데뷔했다는 이 조명우라는 아이돌 겸 배우는 생각보다 능글맞은 구석이 있다.

이준은 생글생글 미소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명우의 눈길을 피해 손에 들린 디카페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호로록 마시려 했다.

《하암. 주인.》

돌연 양랑이 크게 하품을 했다.

양랑은 곧 말을 이었다.

《본군은 왠지 졸음이 쏟아지는군. 좀 자야겠다.》

조금 전까지 저와 대화를 주고받던 양랑이 그르릉대며 사라졌다.

보통 이준의 화보 촬영이 있으면 양랑은 홀연히 나타나 스튜디오 안을 둘러보거나 혹은 카메라 속에 비친 이준의 모습이 우습기 그지없다며 놀리는 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노곤함을 느낀 건지, 금세 종적을 감추었다.

‘웬일이야.’

양랑의 행동이 꽤나 의외여서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준은 제 곁에서 “저도 여기 잠시 앉아 있어도 될까요?” 하고 비어 있는 옆 의자를 가리키는 명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초대받고 오긴 한 건데, 스튜디오는 왠지 긴장되는 거 있죠?”

조명에 비쳐 더욱더 반짝이는 핑크색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조명우가 배시시 웃었다.

이준은 그러한 조명우를 빤히 바라봤다.

TOKD 시상식이 열리던 그날, 구승효와 현재 그의 옆자리에 앉은 조명우가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녀석이랑 구승효랑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고?’

그 당시에도 의외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도통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이준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려던 찰나였다.

‘어?’

마치 연기처럼 나타난 구승효의 환영이 앉은 채 고개를 들고 있는 명우의 턱을 붙잡았다.

기다란 구승효의 손가락이 명우의 턱을 살짝 들자 그의 입이 벌어졌고, 승효는 그러한 명우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대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뭐 하는 거야.” 하고 불편한 듯 미간을 좁히려던 이준은 명우와 승효의 모습이 근래 매번 자신이 승효와 나누고 있는 영기 주입 의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준은 홀린 듯 그 환영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명우의 입술과 승효의 입술이 맞닿으려던 순간.

‘……!’

명우의 얼굴이 제 얼굴로 변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환영 속의 이준은 승효로부터 보랏빛으로 일렁이는 영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이준의 아랫입술을 문지르며 그의 벌어진 입 안으로 영기를 넣어주고 있는 승효는 거침이 없었다.

이준 역시 처음엔 그러한 승효의 어택에 어쩔 줄 몰라 하다, 어느 시점을 시작으로 달라지기 시작했다.

후으.

두 사람에게선 거친 숨소리도,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콧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나 마치 그 신음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준은 귀가 웽웽거리는 것을 느끼며 감았던 눈을 번쩍 뜬 자신이 구승효의 목에 팔을 두르는 것을 지켜봤다.

더―.

이준의 입술이 벌어졌다. 번들거리는 그 붉은 입술을 상대에게 맞대자, 구승효의 옅은 갈색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준은 허리를 숙인 승효의 목을 제 곁으로 힘껏 끌어당기며 아래로 내렸던 두 손으로 그의 두 뺨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승효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영기는 물론이거니와 승효의 입 안 속 체액을 모두 빨아들이려 했다.

이준의 오른쪽 귀에 걸려 있던 검은색 귀걸이는 어느새 눈부실 만큼 환한 빛을 뿜어냈다.

구승효의 왼쪽 눈 아래 점이 시야로 들어왔다.

정신없이 그 안의 모든 것을 빨아 당기던 이준이 잠깐 떨어져 나와 승효의 눈물점으로 혀를 가져다 대려던 시점.

“선배님?”

헉.

이준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어라? 여기가 많이 더운 건가? 선배님 얼굴이 붉으세요. 스태프들한테 에어컨 좀 틀어 달라고 말할까요?”

이준의 화끈거리는 열기를 자각한 명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준은 하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 나 잠깐 볼일 좀 보고 올게요.”

“예?”

이준은 벌떡 일어났다.

* * *

촤아악!

차가운 물이 얼굴에 닿자 뜨거웠던 열기가 겨우 식었다.

다시 메이크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도 망각한 채,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씻은 이준은 정면을 응시했다.

뚝. 뚝.

굵은 물방울이 턱선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

‘이 미친 자식.’

아무리 근래 기이한 상황이 연일 발생했다고 하지만, 일하러 왔으면서 한눈을 팔아?

프로 의식이 철저한 차이준이라고는 볼 수 없는 행동들이다.

이준은 굳은 얼굴로 거울 속 제 모습을 들여다보더니 왠지 모르게 도톰해 보이는 입술을 향해 손가락을 들이밀려다 뚝 멈추었다.

‘정신 차려.’

그건 어디까지나 ‘의식’일 뿐이라고.

‘별일이 다 있군.’

거의 매일같이 구승효와 함께 붙어 있다 보니 이런 이상한 일도 생긴다.

특히나 이준과 승효는 하필이면 둘 다 차기작을 알아보고 있는 ‘휴식기’가 겹쳤다.

아무리 잘나가는 배우들일지라도 휴식기엔 다른 장르의 종사자들보다 한가했고, 구승효의 팔 부상으로 그를 돌보고 있었던 터라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

‘느슨해져서는 안 돼. 구승효는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이라고.’

이준과 승효는 혼인 의식을 치른 사이이기는 했으나 이건 어디까지나 다가올 재앙을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일 뿐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 이용해야 가치 있는 사이지, 결코 마음을 털어놓고 지낼 만큼 편해서는 안 됐다.

“후우.”

드라마 속 연인들보다 더 농도 짙었던 그들의 영기 의식 환영에 얼굴을 굳히던 이준은 다시 스튜디오 안으로 돌아가기 위해 화장실을 나섰다.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오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런 이준이 막 화장실 앞 복도를 지나 스튜디오가 있는 모퉁이 쪽으로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불과 몇 분 전, 이준의 곁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던 연분홍색 머리의 청년이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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