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40화 (41/72)

40화

백호(白狐) (5)

이준은 그 말을 뱉어 낸 명우가 크게 당황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오해?’

이준이 화장실로 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명우가 어째서 스튜디오 밖을 나오게 된 걸까― 라는 생각보다, 명우가 뱉어 낸 단어가 이상하게 신경 쓰였다.

“오해는 무슨 오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 눈으로 직접 본 게 있는데 무슨 오해!”

“오, 오빠. 그만해.”

“그만하긴 뭘 그만해? 넌 가만히 있어.”

“오빠.”

“이봐, 너 얼굴 좀 반반하고 꽤 알려졌다 해서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아나 본데, 절대 아니야. 사람 잘못 봤다고. 알아?”

“오빠!”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걸어가자 스튜디오가 있는 곳에서 불과 50미터 떨어진 장소에서 조명우는 웬 남자와 여자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무엇이 그리 화가 났는지, 발끈하며 조명우에게 소리치고 있는 근육질의 남자와 그런 남자를 말리려는 여자의 얼굴이 파리하다.

‘시비가 붙은 건가?’

그들의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벌어진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대충은 짐작이 갔다.

이준은 “이 손 못 놔? 너 진짜 안 떨어져?” 라 말하며 놀라 굳어 버린 조명우에게 다가가려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막는 여자를 지켜봤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나한테 유리하지.’

작은 행동 하나가 의외의 결과를 초래하는 이 세계에서 이준은 나름의 행동 방안을 터득했었다.

타인의 일에는 간섭하지 말자― 가 이준의 주된 모토였고, 그 철칙을 잘 지켜 가며 이준은 지금의 자리를 유지해 왔다.

그가 흔한 구설수에도 쉬이 오르내리지 않는 것은, 한마디로 몸을 사렸기 때문이다.

“놔! 너도 대체 왜 그러는 건데? 내가 뭐 못 할 말 했어? 이 자식이 너한테 집적거린 건 사실이잖아!”

“악!”

하지만 길길이 날뛰는 조명우의 상대를 보아하니, 상황이 쉽게 무마될 것 같지는 않았다.

발끈하며 자신을 말리는 여자를 뿌리친 남자로 인해 여자가 힘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후우.’

참자, 참아야…… 제길.

‘못 참겠네.’

모르는 척 곧장 스튜디오 쪽으로 향할 수도 있었다.

그래, 평소라면 틀림없이 그랬겠지.

하지만 웬일인지 이준의 다리는 쭉쭉 뻗어 나갔고, 그는 결국 소란이 일고 있는 장소에 도착했다.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누가 네 선생…… 어?”

생긋 웃으며 말을 건 이준을 향해 홱 몸을 돌리려던 근육질의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이준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 차……!”

아마도 “차휘!” 하고 외치려던 근육질의 남자가 이준과 눈이 마주치자 입을 쩍 벌렸다.

이준은 그런 그를 향해 빙긋 웃어 주고선 마찬가지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여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아…… 네, 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준의 손위로 제 손을 겹쳤다.

이준은 마침 치마를 입고 있던 여자가 일어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일으켜 준 뒤, 손을 떼고 명우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남자와 여자가 놀란 사이 명우에게 다가가 묻자 명우가 큰 눈을 글썽였다.

마치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모습에 속이 쓰렸다.

이준은 “괜찮아요.” 하고 속삭여 준 뒤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저와 눈이 마주친 근육질 남자를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일단 진정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이준이 촬영을 위해 온 이곳 스튜디오는 3층짜리 건물이다. 3층은 전체가 스튜디오였고, 그 아래의 1층과 2층은 대형 카페로 운영되고 있었다.

아마 이 두 남녀는 그런 카페를 찾은 손님들일 게 분명할 터.

괜한 소란이 일면 다른 사람들 역시 밖으로 나와 명우를 둘러쌀 것이 틀림없었다.

그 일만은 막기 위해 이준이 근육질 남자를 설득하려 들자, 근육질 남자가 미간을 좁혔다.

“차휘 씨가 나설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내가 볼일이 있는 건 저 남잡니다.”

이준이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는 남자의 발언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친구가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린 게 확실하군요. 그런데 여기서 이러고 있다가는 이 친구는 물론 선생님마저 불편한 상황을 겪게 될 게 틀림없어서요.”

“…….”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리를 바꿔서 서운했던 점을 말하는 건 어떨까요?”

이준은 스튜디오 입구 쪽을 힐끔거렸다.

“마침 제가 저쪽에서 촬영 중이었는데, 선생님과 선생님 일행분이 괜찮으시다면 스튜디오 구경도 시켜 드릴게요.”

“크흠.”

남자가 고민하듯 미간을 좁혔다. 이준은 돌처럼 굳어 있는 명우에게 손짓하며 그를 제 곁으로 부르더니 말했다.

“명우 씨. 이럴 땐 그냥 숙이는 게 나아요.”

“아…….”

“막 데뷔했는데 논란이 되는 것보단 낫잖아요. 안 그래요?”

이준의 말에 명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마음을 왜 몰라.’

상황을 보아하니 현재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어떤 일로 화가 나서 명우에게 괜한 트집을 잡는 것이 확실했다.

그렇지만 이름을 알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시비가 붙은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전자가 잃을 것이 많았다.

이준은 이해한다는 듯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명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웃으며 남자를 설득하려 했다.

“선생님. 노한 마음은 가라앉히시고 저희와 차 한잔이나 하시죠. 거기 일행분도 괜찮으시죠?”

“아…… 네. 네! 저, 저희는 좋…….”

“좋긴 뭐가 좋아!”

이준의 제안에 여자가 화답하려고 하자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가 두 눈을 번뜩였다.

“이젠 저 기생오라비 말고 차휘한테 눈이 돌아간 거야?”

……뭐?

“연예인이 자주 오는 카페라며 오자고 할 때부터 알아봐야 했어. 너, 원래부터 이럴 계획이었지?”

“오, 오빠,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언제긴! 지금 내 앞에서 그러고 있잖아!”

남자가 흥분했다.

“서, 선배님.”

뒤늦게 남자의 눈길이 자신과 이준이 아닌 여자에게 쏠린다는 것을 자각한 명우가 불안한 듯 이준을 불렀다.

이준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준 뒤 여자를 위협하려 하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일행분은 그런 뜻이 아니라―”

“당신은 좀 닥치고 있어!”

쾅!

단단히 화가 난 남자가 이준을 있는 힘껏 밀쳤다.

“차휘 선배님!”

* * *

“선배님이 다치셨다고요?”

강남구 청연동의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사옥.

이준은 벌컥 문을 열어젖히곤 헉헉 숨까지 몰아쉬고 있는 승효를 발견하고선 깜짝 놀랐다.

“승효 씨가 여긴…….”

“태경 씨, 어떻게 된 겁니까?”

당황하는 이준의 말에도 승효는 대꾸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와, 이준의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태경에게 물었다.

안 그래도 구승효를 대하는 데 있어 자연스럽지 못하던 태경이 몸을 움찔댔다.

“그, 그게, 그게…….”

“별거 아냐.”

이준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태경을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촬영하러 나갔다가 근처에서 시비가 붙었어.”

“시비요?”

구승효가 되묻자 이준은 대답했다.

“자주 있는 일이야. 특별한 건 아니니 승효 씨가 그리 호들갑 떨 필요는 없어.”

이준의 답변에 미간을 꿈틀거리던 승효가 맞느냐는 듯 태경을 응시했다.

‘말 잘해라, 태경아.’

이준은 태경에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뜨거운 시선으로 태경을 바라봤다.

동시에 이준과 승효의 열렬한 눈길을 받게 된 태경이 감당이 안 된다는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푹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전치 2주래요!”

젠장!

“한태경!”

이준이 버럭 외치자 태경은 감히 이준을 바라보지도 못하며 대꾸했다.

“죄송해요, 배우님. 하지만 구 배우님도 알고 계셔야 하잖아요. 배우님이 더 이상 구 배우님을 보살펴 드릴 수도 없고요.”

그래도!

[태경이 너, 약속해. 나도 깁스를 하긴 했지만 이건 별거 아니라고, 만약 구승효 만나면 그렇게 말해. 그 녀석이 호들갑 떠는 거 보기 싫어. 알았어?]

[하, 하지만……]

[한태경.]

[아, 알겠습니다. 배우님 말씀대로 할게요…….]

꼬리를 내려가며 힘없이 대답했던 것이 불과 30분 전이 아니었던가.

이준은 “배우님과의 약속보다 배우님이 불편해하지 않는 게 나아요!”라 외치는 태경을 보며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전치…… 2주요?”

승효가 저만큼이나 단단한 깁스를 한 이준의 오른팔을 응시하며 다가왔다.

이준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전치 2주래도 하나도 안 아파. 그냥 벽에 부딪혔던 것뿐이고, 이것도 어디까지나 보험용으로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 승효 씨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구승효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봐, 생각이 얼굴에 다 드러난다고.’

차갑게 가라앉은 구승효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제가 더 섬뜩해져, 이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하튼, 일이 이렇게 됐네.”

“…….”

“생각해 보니 태경이 말에도 일리가 있어. 나도 부상을 당해 버렸으니 더는 승효 씨를 케어해 줄 상황이 못 되네.”

“…….”

“그래서 그러는데, 승효 씨. 아무래도 한동안 각자 집에서 지내거나 아니면 도우미를 들여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

치료받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말을 건네려던 순간, 승효가 돌연 오른팔을 칭칭 감고 있던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으응?’

이준은 순식간에 붕대와 보호대를 풀고선 휙, 휙 오른팔을 돌리는 승효를 황망하게 쳐다봤다.

“전 괜찮습니다.”

“…….”

“그러니 도우미는 안 들여도 됩니다. 제가 선배님을 돌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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