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41화 (42/72)

41화

백호(白狐) (6)

이준은 순간적으로 어안이 벙벙해졌다.

‘괜찮다고?’

[선배님.]

[응?]

[저 머리 감고 싶어요.]

[어, 어어. 기다려.]

[선배님.]

[응?]

[손이 너무 불편하네요. 여기 밥 좀 떠 주시겠어요?]

[어, 그래. 내가…… 아니다, 차라리 먹여 줄까?]

[그렇게 해 주시면 좋죠.]

[선배님.]

[으응?]

[죄송한데, 이거 다음 페이지를 좀 넘겨 주시겠어요?]

[차기작 준비하는 거야?]

[아뇨. 그냥 들어온 시나리오 읽는 중인데, 아시다시피…….]

[내가 읽어 줄까?]

[그리해 주시려고요? 그럼 미리 인사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선배님.]

[선배님…….]

지난 며칠 동안 저로 인해 다친 구승효 곁에 머물던 이준은 팔자에도 없이 승효를 보살폈었다.

주로 그가 한 일은, 자신 때문에 다친 승효의 오른팔을 대신해서 대본을 읽어 주는 것부터 시작하여, 얼굴 씻겨 주기, 밥 먹여 주기, 대신 문자 보내 주기, 전화 받아 주기 등등의 사소한 일.

하지만 그런 행동들은 벌어졌던 이준과 승효 사이를 다시 메우는데 한몫했고, 이준의 마음속에서 구승효라는 녀석에 대한 호감도가 다시금 차오르려던 상황이었다.

[선배님.]

[으응.]

[제가 선배님의 얼굴을 잡을 수 없으니, 고개를 더 들어 주세요.]

[이, 이렇게?]

[아뇨. 조금만 더.]

[그럼…… 이렇게?]

[네. 적당하네요.]

영기 주입 의식 때는 또 어떠했던가.

그 의식을 행할 때마다 불만을 은근히 드러내던 이준은 승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라는 대로 움직이곤 했었다.

그런데…… 뭐?

‘멀쩡하다고?’

이준은 휙휙, 팔을 돌리는 승효를 가만히 바라봤다.

“구승효 씨가 내 매니저도 아닌데 굳이 날 돌볼 이유는 없지 않겠어?”라는 말은 입 안에만 맴돌 뿐 나오지 않았다.

“구 배우님, 완쾌하신 거예요?”

이준이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황당해하고 있을 때, 내내 이준의 눈치를 보던 태경이 활짝 웃으며 외쳤다.

“네.”

“정말 다행이에요! 안 그래도 고 팀장님이 구 배우님 차기작 때문이라도 빨리 나아야 한다고 걱정하시던데. 정말 잘됐어요!”

정말 잘됐기는.

함박웃음을 짓는 태경과는 달리 이준은 미간을 좁히며 승효를 노려보았다.

전에 없던 배신감이 차올라 승효의 반듯한 얼굴이 오늘따라 더 미워 보인다.

‘날 돌보겠다고?’

이준은 코웃음 쳤다. 그러며 태경과 눈의 대화를 주고받는 승효에게 입을 열었다.

“호의를 베풀어 주겠다는 승효 씨 성의는 고맙지만, 굳이 돌봐 주진 않아도 될 것 같아.”

승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이시죠?”

이준은 태경을 힐끔댔다.

“어차피 내일모레부터 스케줄이 있어서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올 거야. 그러니 승효 씨 힘 빌리기보단 내가 알아서 할게. 굳이 필요하다면 현장 스태프들한테 도와 달라고 부탁하지 뭐.”

“…….”

“참. 태경아. 그 일정이 정확히 어떻게 된댔지? 나 하루 한 번은 꼭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게 조정은 되는 거지?”

“아, 배우님…….”

“그리고 팔 하나 정도는 깁스하고 있어도 되겠지? 어차피 얼굴만 클로즈업할 거 아니야. 만약에 팔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감독님한테…….”

“배우님!”

한동안 움직일 수 없는 오른팔을 사용해야 할 일이라면 대역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말하려던 이준이 제 말을 끊어 버리는 태경을 보고 멈칫했다.

‘응?’

태경이 제 외침에 의아해하는 이준을 보고 우물쭈물거리자 이준은 피식 웃었다.

“왜 그래?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무슨 일 있어?”

안 그래도 이준이 병원 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길부터 이상할 정도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던 태경이 식은땀마저 흘렸다.

본능적으로 수상함을 감추지 못한 이준이 묻자 태경이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어요.”

* * *

[단독] 톱스타 C, 설마 했던 후배 폭행?

연예인의 인권 등을 위해 실시간 검색어가 사라진 지금, 그래도 연예 기사의 순위는 남아 있었다.

현재 시각 오후 4시 21분.

푸르른 3월의 연예계에서 돌연 급상승한 기사의 제목은 아니나 다를까 타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자극적이었다.

“배, 배우님.”

검은 눈으로 태블릿 속의 기사 제목을 내려다보는 이준을, 태경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준은 그런 태경에게 손을 들어 올린 후 손가락을 뻗어 기사 제목을 클릭했다.

‘……!’

그러자 놀랍게도, 마치 이준이 누군가를 폭행하는 것처럼 손을 크게 들어 올리는 장면이 찍힌 사진이 떡하니 존재했다.

이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제왕의 자리에 있는 C의 오만함은 어디까지인가.

연예계 최고 인기 스타 중 한 명이라 불리는 C는 일찍이 아이돌로 데뷔하여 정상을 찍고, 배우로 전직해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 주연으로 등장한 남성 배우이다.

……(중략)……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

설령 C가 대중들의 지지를 받으며 높은 인기를 구가한다 할지라도, 인성이 바르지 못하면 수년에 걸쳐 쌓아 둔 그의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 될 것이다.

A는 이제 막 데뷔한 신인으로, C에게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연예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다.

A의 말 한 번에 C의 지위가 흔들릴 만큼 파급력에 격차가 있는 상황에서, A의 폭행 사실을 C가 알릴 수 있을까?

언제까지 우리는,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선배가 후배를 폭행하는 이 사회를 견뎌야 하는 것일까?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 싶다.

불과 한 시간 전쯤 올라온 기사 내용에 이준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설을 겨우 삼켰다.

이 기사 속 C는 이준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고, A는 연분홍색 머리를 감싸며 이준을 올려다보고 있던 명우가 틀림없었다.

‘내가 후배 폭행범이라고?’

기사 속 사진은 꽤나 놀라웠다.

대체 어떻게 이런 사진을 찍은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사진 속 이준은 무려 조명우를 위협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물론 적절한 모자이크를 사용하기는 했으나, 그 모자이크 아래 친히 누가 봐도 ‘차휘’임이 분명한 드라마 실루엣을 덧붙여 놓았고 명우 역시 에서 유행시킨 특유의 포즈를 실루엣으로 만들어 붙여 두었으니까.

“어떻게 된 거야.”

이준의 음성이 낮아지자 한숨을 푹 내쉬던 태경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박 작가님 스튜디오에 기자가 있었던 것 같아요.”

“…….”

“아까 배우님께서 그 남성분 때문에 부상 입은 후 찍은 사진처럼 보이고요.”

이준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태경은 서둘러 말했다.

“무, 물론 조명우 씨 쪽에서 이 기사를 보고 공식적으로 항의하는 성명문을 올렸는데…… 아무래도 사진 속 상황이 워낙…….”

태경이 말을 줄였다.

이준은 다시 한번 사진 속 제 모습을 응시했다.

얼굴이 가려진 상태이기는 하나, 확실히 기사의 사진 속 이준은 꼭 명우를 폭행하듯 그를 벽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근육질 남자에게 밀려 벽으로 물러난 이준에게 다가오던 조명우가 떠올랐다.

이준이 그의 부축을 받으며,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살짝 밀쳤던 장면이 아마 이 사진의 시초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CCTV는 없었어?”

낮아진 이준의 물음에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곤란하군.’

상황을 보아하니 이미 이 기사로부터 시작된 파생 기사들이 하나둘씩 생겨난 듯하다.

1위 밑 남은 네 개 기사들 모두 ‘후배 폭행범, C 배우!’와 유사한 타이틀을 달고 있자 이준은 코웃음을 쳤다.

“정후 형…… 대표님은 뭐라고 하셨지?”

“그, 그게.”

태경이 말을 머뭇거렸다.

“일단…… 정말 CCTV가 없는 건지 확인해 보신다고 하셨어요.”

“진짜로 없다면?”

“……그럼 굳이 나서는 것도 좋은 상황은 아니니, 차라리 결백한 증거를 찾을 때까진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

“하,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이 기사가 시초가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론이 모두 배우님 잘못으로 몰아가는 건 아니니까요!”

태경은 어디서 준비했는지 여분의 태블릿을 꺼내어 커뮤니티 반응을 보여 주었다.

“여기 보이시죠? ‘이런 연예 기사는 함부로 믿어서는 안 돼!’라든가, ‘고작 사진 하나잖아. 합성일 줄 모르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야.’ 라든가, ‘C가 차휘라고 밝혀진 건 없으니 루머 글 자제요.’라는 댓글도 있어요!”

이준은 친히 댓글 하나하나를 가리키는 태경의 모습에 실소를 삼켰다.

‘하지만 ‘좋아요’를 더 받은 댓글들은 하나같이 날이 서 있는데?’

이준은 ‘찝찝한 건 어쩔 수 없네.’라든가 ‘그렇게 오랫동안 연예계에서 지냈는데 구설수 하나 없는 건 말이 안 되지. 드디어 터질 게 터졌군.’이라는 등의 댓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논란의 시초가 된 기사를 작성한 기자의 이름을 들여다봤다.

[굿모닝스타=백수호 기자]

백수호라.

‘망했군.’

이준은 코웃음 쳤다.

백수호라면, 연예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파파라치성 사진을 올리고 기자를 작성하는 것으로 유명한 ‘굿모닝스타’라는 연예 잡지의 기자이다.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숱한 기자 중 팬은 물론이거니와 연예인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몇 안 되는 기자 중 한 명인 백수호의 이름에, 이준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곧 자신과 태경이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승효를 응시했다.

승효는 이준과 시선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이준은 그러한 승효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신세 좀 져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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