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백호(白狐) (7)
― 상황이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네요.
핸드폰 너머로 들려온 소리에 승효의 얼굴이 굳어졌다.
― 워낙 대형 건물이라 당연히 CCTV가 있기는 있는데, 하필이면 그 장소가 사각지대였던 모양이에요. 그 장면이 오해라고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돌아 버리는 수밖에.
“증인은 없는 겁니까?”
― 당시 시비가 붙은 일반인 연인이 있기는 한데, 여자 측은 우리랑 연락도 안 하려 하고 남자 측은 완강히 거부하고 있거든.
“이상하네요. 여자 측은 왜 연락을 하지 않으려는 거죠?”
― 글쎄요. 남자 쪽이랑 이미 얘기가 됐다거나, 아니면 남자가 할 행동들이 무서운 거겠지.
“…….”
― 빌어먹을. 대체 백 기자 그 자식이 왜 하필 거기 있었던 거냐고. 정말 미쳐 버리겠네…….
바드득 이를 가는 상대의 말에 승효는 말을 삼켰다.
― 여하튼 승효 씨. 준이한테 잠잠해질 때까진 몸을 좀 사리고 있으라고 말해 줘요. 괜한 분란 만들어서 잡힌 계약까지 문제 생기면 곤란하니까. 아, 그리고 예정되어 있던 스케줄 말고 새 스케줄은 잡지 않을 거라고도.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하도록 하죠.”
― 승효 씨한테 신세를 지네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인걸요.”
― 그런데…… 이준이는 좀 어때요?
승효의 답변에 핸드폰 너머의 정후가 매우 조심스러운 질문을 건넸다.
발코니 밖에서 통화를 하고 있던 승효의 눈이 거실 쪽으로 향했다.
― 안 좋지?
승효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곧 긍정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정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이런 일은 데뷔 후 처음 겪는 일이라 진짜 놀랐을 거예요. 그 녀석,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본인은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실은 전혀 아니거든. 내가 얼마나 온실 속 화초처럼 소중히 가꿨는데.
정후는 말했다.
― 물론 여론은 반반이라고 하지만, 준이 녀석이 쌓은 이미지가 워낙 선해서 이런 구설수에 얽힌 자체만으로도 좋지 않은 말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무슨 하이에나도 아니고, 기다렸다는 듯 물어뜯더라고.
“…….”
― 잘 버텨야 할 텐데 걱정이네요.
클레몽의 이정후 대표는 이준과 오래전부터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친히 제게 전화를 걸어 이준의 상태를 물어볼 만큼 그가 얼마나 이준을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던 승효는 “걱정 마세요. 선배님은 극복하실 겁니다.”라고 대답해 주었다.
― 이 상황에 승효 씨가 그 녀석 곁에 있어 줘서 참 고맙네. 그럼 한동안 우리 준이 잘 부탁해요.
정후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강남 스튜디오에서 터진 사건으로부터 사흘.
고작 사진 하나로 시작된 여파가 생각 이상으로 커지고 있었다.
특히나 얼마 전, 이준과 함께 그룹 활동을 했던 싱어송라이터 이세현이 병원 신세를 졌던 일까지 끄집어내면서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을 이준 탓으로 몰아가는 악성 팬 역시 활개를 쳤기에 일이 더욱 시끄러워진 탓도 있었다.
휘이잉.
승효가 서 있던 펜트하우스 발코니로 바람이 불어왔다.
어느덧 3월 중순을 훌쩍 넘긴 바람은 한결 부드러워진 상태였다.
승효는 그런 봄바람을 맞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시야로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는 이준이 보였다.
“…….”
사흘.
지난 사흘 동안 집 밖을 나선 적이 없었던 이준의 모습은 평소와는 매우 다르다.
[우리가 한 지붕 아래에 지내는 데 있어 이것 한 가지는 지켜 줬으면 해.]
[말씀하세요.]
[혼인 의식을 치렀다고 해도 승효 씨랑 내가 그리 편한 사이는 아니잖아? 그러니 내가 있을 땐 함부로 옷을 벗는다든가, 아니면 긴장의 끈을 푼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
[…….]
[어때. 이 정도는 지켜 줄 수 있지?]
이준과의 동거가 결정되었을 때, 이준은 승효에게 미리 선수를 친 적이 있었다.
승효는 그런 그의 요구에 크게 개의치 않았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여 두 사람의 동거는 커다란 펜트하우스를 정확히 둘로 나누어, 영기 주입 의식이 진행될 때 말고는 철저하게 분리된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제 눈에 보이는 저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차휘의 팬들이 봤다면 기함했겠군.’
승효는 피식 웃어 버렸다.
과거 이준은 “긴장의 끈을 풀어선 안 돼.”라던 제 말처럼,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승효의 앞에서 멀끔한 모습을 유지했다.
1년이나 함께 지내야 할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준이 이곳에 너무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만큼.
하지만 현재 소파 앞에 앉아 태블릿을 보며 오징어를 잘근잘근 씹어 먹고 있는 이준은, TV 화면이나 화보집, 그리고 시상식 등에서 보아 왔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옷소매가 펄럭거리는 기다란 박스티에 연보라색 트레이닝 반바지를 입고선, 단정하게 세팅한 머리가 아닌 헝클어진 앞머리를 그대로 내버려 둔 이준의 눈 밑은 퀭하다 못해 어둡다.
며칠을 씻지 않은 거지?
승효는 무엇을 그리 재미있게 보는지, 오징어 몸통을 씹는 둥, 마는 둥하며 태블릿에 눈을 뗄 줄 모르는 이준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귀는 활짝 열려 있었던 이준이 “으응…….” 하고 승효의 물음에 답했다.
“오늘 세수는 하셨습니까?”
“으응…….”
“안 하셨죠?”
“……으응.”
한 건지, 아니면 하지 않은 건지 알 수 없는 모호한 답변이었지만 아무래도 후자임이 틀림없었다.
이준의 곁으로 다가가자 강렬한 그의 체취가 느껴졌으니.
승효는 오른팔을 쓸 수 없어 왼팔로 태블릿을 들고 있는 이준을 지켜보며 말했다.
“샤워하시죠.”
“으응…….”
“물 받아 드릴까요?”
“으응.”
이준의 넋은 나간 것이 분명했다. 승효는 개의치 않으며 태블릿 속 무언가를 내려다보는 이준을 내버려 둔 채 욕실로 걸어갔다.
“물, 다 받았습니다.”
얼마 뒤, 승효가 다시 나타났다.
“으응, 고마워.”
여전히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이준은 대충 답했다.
“안 들어가십니까?”
“으응.”
“샤워하셔야죠.”
“으응…… 할 거야…….”
‘하기는.’
이준은 절대로 그 소파에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승효는 이준의 자리 근처에 존재하는 오징어와 각종 과자 부스러기를 바라보았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으응.”
결심한 승효가 팔을 뻗자 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검은 눈은 태블릿을 향해 있었다.
‘…….’
대체 무엇을 보기에 그 태블릿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가 싶었더니, 이준은 놀랍게도 자신을 저격한 ‘백수호’ 기자의 모든 기사들을 훑어보는 상태였다.
“백 기자가 신경 쓰이는 겁니까?”
“으응, 조금.”
이준이 대꾸하는 것을 보니 아직 완벽히 의식이 나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승효는 자신이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웠음에도 반응하지 않는 이준을 부축하고선 욕실로 향했다.
“이쪽으로.”
“으응.”
한 자, 한 자.
수많은 연예인의 비밀을 폭로하고, 개중 몇몇은 나락으로 빠트린 백 기자의 독점 기사들을 들여다보던 이준은 승효가 자신을 욕실로 데리고 간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문턱이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으응.”
“슬리퍼는 여기요.”
“……응, 고마워.”
승효가 내민 노란색 욕실화를 두 발에 끼운 이준이 욕실 안으로 완벽하게 들어섰다.
승효는 아직까지도 태블릿 속 기사에서 눈을 뗄 줄 모르는 이준을 가만히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선배님.”
“으응?”
“옷을 입고 샤워할 순 없지 않겠습니까.”
“으응, 그렇지, 뭐.”
“벗겨 드릴까요?”
“응, 그렇게 해 주면 고맙…… 뭐?”
승효의 말에 무조건 반사로 대꾸하려던 이준이 눈을 크게 떴다.
스륵.
“헉!”
그러다 들고 있던 태블릿을 그만 차가운 욕실 바닥으로 떨어트릴 뻔했다.
놀란 이준이 숨을 흘렸지만, 다행히 승효가 빠르게 몸을 숙여 그것을 잡는 바람에 태블릿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욕실에서는 태블릿 사용을 삼가는 게 좋겠습니다.”
승효는 겨우 붙잡은 태블릿을 욕실 밖으로 가져다 둔 뒤 다시 이준에게 다가왔다.
이준이 뜨끈한 수증기로 가득한 욕실 안에 우뚝 서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를 멍하니 올려보는 모습이 보였다.
승효는 말했다.
“일전에 선배님도 제가 머리 감는 걸 도와주신 적이 있었죠.”
“…….”
“이번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팔을 살짝 들어 보실래요?”
승효가 이준에게 한 걸음 다가오며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넋을 놓아 버린 사람처럼 승효의 손길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이준이 파르르 속눈썹을 떠는 것이 보였다.
“선배님?”
승효의 차디찬 손이 이준의 몸에 닿았다. 이준이 제 웃옷을 벗기려 작정한 그를 떨리는 눈으로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승효에게 있어선 그의 옷을 벗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선배님, 왼팔 먼저 안으로 집어넣어 주시겠습니까?”
보다 편하게 옷을 벗기려면 이준의 협력이 필요했던 터라, 승효가 최대한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자 바르르, 이준의 몸이 떨렸다.
“선배님?”
승효는 제 손에서 태블릿을 빼내어 간 이후로 도통 말이 없는 이준을 의아하게 내려다봤다.
그러자 윗니로 입술을 꾹 악물고 있던 이준이 겨우겨우 소리를 냈다.
“……가.”
“예?”
승효가 듣지 못해 되묻자 이준이 욕실 안 열기 때문인지,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당장 나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