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백호(白狐) (8)
“그래서. 겁먹은 쫄보처럼 도망쳐서 여기로 왔다는 소리야?”
유리잔 안에 물을 가득 담아 주며 건네는 차영을 보고 이준은 입술을 삐죽였다.
“쫄보는 누가 쫄보야. 그냥 놀란…… 거라고.”
퉁명스레 대답한 이준은 차영에게서 유리잔을 빼앗듯 가져와선 입술로 가져다 댔다.
“그리고 도망을 치긴 누가 도망을 쳤다고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어디까지나, 후, 후퇴라고.”
《아니, 완벽한 도망이었다. 꼬마 미녀 말이 맞아. 주인, 추했다.》
“이봐, 뚱냥이. 조용히 안 해?”
내내 피곤하다는 이유로 이준의 근처에 나타나지도 않던 양랑이 정곡을 찌르자 이준은 바득 이를 갈았다.
이준은 “양랑이 뭐라고 했어?” 하고 눈을 반짝이는 차영에게 흥 콧소리만 흘려주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
그러고는 잔잔하게 일렁이는 유리잔 속의 수면을 내려다봤다.
‘제정신이 아니군.’
작은 유리잔 속의 수면에 비친 제 모습은 평소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근래의 일로 그가 약간 수척해진 것도 사실이었으나, 가장 놀라운 것은 정신을 다른 곳에 두고 있느라 구승효가 그리 가까이 제게 접근한 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벗겨 드릴까요?]
‘굿모닝스타’ 백수호 기자의 기사들을 날짜를 막론하고 살피고 있었던 이준이 정신이 확 든 건 바로 그 말이 들려온 시점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자 승효와의 거리는 손목에서 팔꿈치만큼의 길이만큼 가까웠다.
몇 초 전까지 전혀 알 수 없었던 승효의 숨결이 무려 코앞에서 느껴졌다.
쿵쿵쿵쿵.
잠잠하던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나가…….]
이준은 외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나가라고!]
그 후 자신이 승효를 밀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워낙 자주 입술을 맞부딪히던 사이니 얼굴이 가까워진 순간 입술을 내밀었을 게 분명하다.
그랬다면 평소의 ‘영기 주입 의식’과는 달리, 틀림없이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키스를 나눴겠지.
“하아.”
끔찍하군.
이준은 긴 숨을 내쉬며 남은 물을 벌컥벌컥 마셔 댔다.
“그런데 이 기자, 진짜 악의적이긴 하네. 널 타깃으로 잡았다는 게 사실이긴 한가 봐.”
차영은 이 모든 논란의 시초인 ‘굿모닝스타’의 백수호 기자가 쓴 기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백 기자는 후속 기사나 혹은 정정 기사를 내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 덕분에 여론이 정확하게 반반으로 갈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준이 넌 왜 아무 대응을 안 하는 거야? 폭행당했다던 그 후배는 아니라고 공식 발표까지 했었다며.”
“내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손해가 크니까.”
“무슨 소리야?”
이준은 의문을 감추지 못하는 차영에게 대답했다.
“난 10대 때부터 언론이랑 척을 진 적이 없었어. 딱 한 번 논란이 될 만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가 ‘미스틱’ 해체와 관련된 일이었지.”
이준은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다행히 잘 넘어갔고, 지금까지 내 이미지는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고결’, ‘청백’, ‘정직’ 등의 이미지였어.”
“하긴. 너는 선과 악을 따지면 선 쪽에 가까웠지.”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런 사진이 찍힌 거지. 심지어 합성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계산된 각도의 사진이.”
“…….”
“사람은 저마다의 생각이 있을 테니, 내가 이 이미지를 계속 고수하는 걸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을 거고, 그 사람들이 이때다 싶어 나서게 된 거야.”
차영은 오히려 미간을 좁혔다.
“그건 나도 상황을 보니 충분히 이해하겠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쪽이든 손해가 막심할지언정 해명하는 게 나아 보여.”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괜히 나섰다가는 더 뭇매를 맞을 수 있어.”
“…….”
“그러니 증거를 찾을 때까지는 입을 닫고 있는 편이 낫다는 거지. 뭐, 아예 해명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야.”
이준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미간을 좁혔다.
“확실히 이상하기는 했어.”
그의 말에 덩달아 고심하던 차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준은 중얼거렸다.
“보통 나랑 시비가 붙은 사람들은 몇 마디 나누면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던데, 그 사람은…….”
[이젠 저 기생오라비 말고 차휘한테 눈이 돌아간 거야?]
말리려는 저에게 납득하는 것처럼 보이더니 곧 눈을 치켜뜨며 제 일행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던 근육질 남자가 떠올랐다.
지이잉―.
순간적으로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바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슬쩍 핸드폰을 확인한 이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왜 그래?”
문자의 내용을 지켜보던 이준은 차영의 부름에 고개를 들어 말했다.
“차영아, 나 가 봐야겠다.”
“뭐?”
“미안. 잠잠해지면 다시 올게.”
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종합] 겉과 속이 다른 C가 떠오르는 샛별을 교육하는 방법이란.
“친절한 척하더니……” 톱스타의 두 얼굴?
“선배님은 폭행 안 하셨습니다!……” 폭행 피해자가 쏟아 낸 눈물의 기자 회견!
톱스타 차휘, 아이돌 시절 ‘펀치킹’이 된 사연은?
꺼지지 않는 논란의 불길…… 가해자는 여전히 묵묵부답!>
안 그래도 잠잠하던 연예계에 떨어진 작은 불씨는 큰불이 되어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특히나 이번 사건의 당사자인 차휘가 하필이면 무결점의 이미지로 꼽히는 인물이었기에, 온종일 굶은 하이에나보다 더 악랄한 기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흠집을 남기려 애썼다.
주어가 없는 기사 사이에 은근히 주어를 유추할 수 있도록 과거 기사를 끌어올리는 것도 마찬가지.
“손님, 도착했습니다.”
오전과 오후를 가리지 않고, 쉬지 않고 쏟아지는 막대한 양의 연예 기사들을 내려다보던 이준은 택시에서 내렸다.
‘…….’
그가 도착한 곳은 청연동의 한 다이닝 레스토랑.
프라이빗 고객들을 위주로 운영하는 이 다이닝 레스토랑에는 저도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다.
이준은 들고 있던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낸 후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예약하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이준을 발견하고 인사를 하려던 프런트의 매니저가 이준의 얼굴을 알아보고선 눈을 크게 떴다.
“백수호로 예약한 걸로 아는데요.”
“…….”
“저기요?”
“아, 네, 네! 일행분은 벨라돈나 방에 계십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매니저가 프런트에서 나오며 말하자, 이준은 잠시 벗은 선글라스를 다시 끼고선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벨라돈나’라는 문구가 적힌 미닫이문이 보였다.
그 문 앞에서 공손히 인사한 매니저가 지나가자 잠시 멈추어 서 있던 이준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드르륵.
이준이 팔을 뻗어 문을 열자 이미 도착해 있던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방 안으로 들어선 이준을 향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차휘 씨. 기다렸어요.”
“사실 차휘 씨가 올 거라고는 기대 안 했어요. 매우 의외이긴 하네요.”
자신을 ‘굿모닝스타’의 백수호 기자라고 소개한 청년이 짙은 미소를 흘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같은 연예계 물을 먹어서인지, 아니면 본래 연예인 지망생이었는지.
백수호 기자는 상당한 미모를 자랑했고, 지금 당장 데뷔를 해도 모자랄 것이 없었다.
이준은 웃고 있는 그를 빤히 응시했다.
[요즘 많이 힘들죠? 내가 초래한 일이지만 조금 미안하기도 하네요. 국면을 전환시키길 원한다면 8시에 이 주소로 와요. 어쩌면 내가 도와줄 수 있지 않겠어요?]
몇 시간 전, 이준에게 발신자를 알 수 없는 번호로 문자가 도착했다.
물론 개인용 핸드폰에는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이준을 향한 스팸 문자가 끊이질 않았기에, 평소라면 충분히 무시할 수 있었던 문자였다. 하지만 문자의 내용이 무척이나 수상쩍었다.
이준은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수호에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백 기자님께 궁금한 점이 있어서요.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백수호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오호? 내가 궁금했다고요? 왜요. 그런 기사를 썼다고 날 협박이라도 하려고요?”
“무슨 그런 섬뜩한 소리를. 저 그렇게 야박한 사람 아닙니다. 백 기자님은 좋은 건수를 물은 거고, 저는 운이 없어서 당한 거니 딱히 제가 백 기자님을 협박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준의 말에 묘한 콧소리를 흘리던 백수호가 말했다.
“차휘 씨는 생각 이상으로 흥미로운 분이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이준은 살짝 고개를 까딱인 후 그를 바라봤다.
“그것보다 이 일을 시작하신 기자님이 저를 도와주신다니……. 진심이십니까?”
백수호가 의심하는 이준을 똑바로 쳐다봤다. 수호는 말했다.
“덕분에 고요한 연예계에 파란을 일게 하긴 했는데, 너무 길어지는 건 흥미가 없어서요. 떡밥은 내가 쥐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지, 남의 손에 들어가면 재미가 없어지죠.”
대꾸하지 않는 이준을 보며 백수호는 입꼬리를 늘였다.
“상황을 반전시킬 증거가 저한테 있어요.”
“정확히 어떤 증거죠?”
“뭐, 말 그대로. 그때 복도에서 일어난 일이 구도에 따라 다르게 보임을 증명할 사진들이죠.”
“…….”
“차휘 씨도 알겠지만, 실은 그때 일은 차휘 씨가 선의로 나선 거지 않습니까.”
“…….”
“사실도 아닌 일로 괜한 오해를 받으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이제 슬슬 해명해야죠.”
병 주고 약 주나.
백수호 기자의 말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준이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정면에 있던 백 기자의 눈꼬리 역시 휘어졌다.
“차휘 씨가 업계에서 좋은 평판을 받고 있는 걸 알아요. 그 평판을 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
“나도 양심은 있으니, 그 평판이 완전히 나락으로 가기 전 차휘 씨를 도와주고 싶어요. 그러니 차휘 씨도 날 도와주는 게 어때요?”
가만히 그를 직시하던 이준이 물었다.
“저에게 뭘 원하십니까.”
백수호는 대답했다.
“구승효 씨의 정보를 내게 넘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