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48화 (49/72)

48화

백호(白狐) (13)

이준은 승효를 바라봤다.

제 눈에 비친 구승효의 눈빛이 미세하게나마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가게 안의 조명으로 인해 반짝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이준은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승효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승효 씨도 짐작하다시피, 난 생각보다 사교적이지 못해.”

짧게 숨을 뱉어 내던 이준은 중얼거렸다.

“물론 어릴 적부터 데뷔해서 인맥 정도는 있고, 대충 업계 사람이나 팬들을 대하는 방법은 터득했지만…… 승효 씨도 알잖아. 우리가 남들과는 다르다는 거.”

이준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타인과 그 세계를 공유할 수 없다는 점은, 엄청난 외로움을 동반한다.

지금까지의 이준은 그러한 모든 상황을 홀로 견뎌 왔다.

‘보여도 보이지 않는 척, 나와는 무관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런 일들이 일상이 되어 버려서인지 누군가와 같은 시선을 공유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살짝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던 이준은 고개를 들어 다시 승효를 바라봤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동지가 생겼지.”

이준의 말에 승효가 멈칫했다. 이준은 웃었다.

“승효 씨는 나와 같은 걸 볼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 단순한 ‘협력자’만은 아니지. 굳이 따지자면…… ‘전우’ 정도랄까.”

승효가 고심하듯 얼굴을 구기며 중얼대는 이준을 보고 풉 웃음을 터트렸다.

“전우요?”

“왜. 그거면 안 돼?”

승효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우는 너무 투박한 느낌이군요.”

“그, 그래?”

“파트너는 어떻습니까.”

“파트너?”

승효의 제안에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분명 며칠 전과는 다르게 느껴져, “왜 하필 영어야.” 하고 말하려던 이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괜찮네. 그럼 파트너인 걸로.”

승효가 눈꼬리를 휘었다.

부드럽게 물들어 가는 그의 미소를 지켜보던 이준 역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우리 화해한 거지?”

“그런 셈이죠.”

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긴 숨을 흘렸다.

“후우. 진짜 미치는 줄 알았네.”

“왜요?”

왜냐고?

“승효 씨는 안 답답했어? 아니, 그것보다 사람이 어떻게 그러냐?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그렇지, 이틀 동안 말 한마디 안 하고!”

“대답은 했던 것 같은데.”

“단답식의 답변은 대답이 아니야.”

이준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하자 승효가 말없이 웃었다.

“선배님은 제가 말을 하지 않으니 답답하셨던 겁니까?”

그걸 말이라고.

“당연하지. 겨우 얻게 된 전…… 파트너인데, 사이가 나빠지면 곤란하잖아. 게다가!”

이준은 연신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승효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말 안 했어?”

“네?”

“<역린> 제안 말이야. 내가 아까 미팅에서 승효 씨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승효가 아아, 하고 낮게 탄성을 터트렸다. 이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심 섭섭했어. 살짝 언질이라도 줬으면 그렇게 놀라진 않았을 텐데.”

승효가 눈을 반으로 접었다.

“워낙 갑자기 정해진 일이라서요.”

“이미 오래전에 계획하고선 날 놀래 주려 했던 건 아니고?”

승효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이준은 콧소리를 흘리며 그를 바라보다 손을 저었다.

“됐어. 뭐 중요한 건 아니니까.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긴 하네.”

“잘된 일이요?”

“승효 씨랑 같이 촬영 들어가면 우리 의식 때문에 일부러 시간 내서 서로를 만날 필요도 없을 거 아니야.”

“그러네요. 그 점을 생각하면 다행이군요.”

“그래, 다행이야.”

이준은 중얼거렸다.

“선배님.”

말없이 물을 마시는 이준을 힐긋대던 승효가 입을 열었다.

“그날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그날? 아…….

순간적으로 어떤 날을 가리키는지 의아해하던 이준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말을 끝까지 들으라니까.’

이준은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승효에게 전후사를 설명하기 위해 품을 뒤적였다.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시초는 이것 때문이었어.”

이준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넣어 둔 ‘무언가’를 승효의 앞에 내밀었다.

“이건…….”

그리고 이준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무언가’를 내려다본 승효의 미간이 좁아졌다.

* * *

“많이 기다렸지? 생각보다 오래 걸…… 어라? 이준이는요?”

차영이 샌드위치를 들고 밖으로 나오다 홀로 있는 승효를 발견했다.

바텐더석에 앉아 있던 승효의 눈동자가 차영을 향했다.

“선배님은 잠깐 화장실에 가셨습니다.”

“어머, 그래요?”

빙긋 웃던 차영이 승효에게 다가와 샌드위치가 담긴 플레이트를 내밀었다.

“드세요.”

“선배님 것 아닙니까?”

“보시다시피 많으니까요. 구승효 씨가 몇 개 먹어도 걔는 모를 거예요.”

“…….”

“그나저나 공기가 달라졌네요. 두 사람, 화해했나 봐요?”

주위를 둘러보던 차영이 미소와 함께 말하자 승효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참, 여긴 내 친구 윤차영. 어릴 적부터 못 볼 거 다 본 사이야. 편하게 대해.]

‘METEO’라는 이름의 바 안으로 들어올 때 소개받았던 차영에게선 왠지 모를 익숙한 느낌이 났다.

낯을 가린다던 이준이 허물없이 그녀를 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승효는 갈색 눈으로 차영을 응시했다.

어느새 칵테일 스테이션으로 들어온 차영이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구승효 씨는 술 할 줄 알아요?”

“네. 하지만 오늘 마시기는 힘들 것 같네요. 돌아갈 때 운전을 해야 해서요.”

“아아, 그렇지, 참. 그럼 논 알콜 칵테일은 어때요?”

승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효는 “기다려요.” 하고 짧게 말한 차영이 제조를 시작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도 차영을 향한 경계의 태세를 거두지 않았다.

달각대는 칵테일 제조 소리가 고요한 바 안을 울렸다.

이준은 돌아오지 않았고, 차영과 남게 된 승효의 눈이 점점 가라앉고 있을 때.

“그렇게 날 세울 거 없어요.”

차영이 말했다.

승효가 무슨 뜻이냐는 듯 그녀를 응시하자 차영이 엷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우린 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거든.”

“……!”

티가 났던 걸까.

속내를 들킨 승효가 미간을 꿈틀거렸다. 후후 웃던 차영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게다가, 내가 아무리 좋다고 말해도 눈 하나 깜짝할 녀석이 아니라서. 물론 전혀 눈치도 못 채겠지만요.”

어쩐지 씁쓸함이 감도는 차영의 발언에 속이 쓰려 왔다. 승효는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 소리를 냈다.

“이곳에 자주 오십니까?”

“누구? 이준이요?”

승효는 말없이 얼굴을 주억였다. 차영은 웃었다.

“안 그래도 공짜인 물을 이렇게 분위기 좋은 곳에서 마실 수 있는데, 안 오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

“그나저나 이준이한테 구승효 씨가 보통 존재는 아니긴 한가 보네요.”

“무슨 뜻이죠?”

차영은 말했다.

“제 가게에 자기가 아는 사람을 데려온 적이 없어요, 이준이는. 적어도 이곳은, 그 녀석한테 있어 세상과 철저하게 분리된 공간이거든요. 위로받을 수 있다는 표현이면 맞으려나? 자, 여기요.”

차영이 어느새 제조를 마친 논 알코올 칵테일을 그에게 내밀었다.

승효는 은은한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는 칵테일을 내려다보았다.

“참. 그것보다 축하가 늦었네요.”

“……?”

“두 사람 혼인 의식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강주에게 들으니 ‘미관상’ 좋았다고 하던데. 승효 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순간적으로 차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 승효의 눈이 차가워졌다.

어떻게 ‘혼인 의식’에 대해 알고 있냐는 눈빛이다. 차영은 휘휘 손을 저었다.

“오해 말아요. 나도 ‘그 세계’와 아예 무관한 존재가 아니니 하는 말이니까.”

“그 말씀은…….”

“한때 견자 후보생이었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보통 삶을 살고 있지만.”

《꼬마 미녀는 본군의 선대 주인이자 현 주인의 아버지인 ‘큰주인’의 제자였다.》

“제자요?”

《그래. 하지만 그 사건 이후로 모든 걸 놓아 버렸지. 주인과 꼬마 미녀의 죽이 잘 맞는 건, 아마 그 때문일 수도 있겠군. 두 사람은 같은 아픔을 공유하니까.》

“…….”

《너희 견자계에서는 실로 안타까운 인재야. 만일 버텨 냈더라면 꼬마 미녀는 분명 훌륭한 견자가 되었을 거다.》

확신하는 양랑의 말이 귀를 울렸다.

“‘버텨 냈더라면’이 무슨 뜻입니까.”

《뭐, 그런 거지. 후보생들은 수련 과정 도중 한 번의 위기를 겪지 않느냐. 꼬마 미녀는 안타깝게도 극복하진 못했다.》

낮게 읊조리는 양랑의 음성에 승효의 눈이 차영을 향했다.

차영이 놀란 눈으로 승효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차영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까지 하자 의아함을 느낀 승효가 물었다.

차영은 물었다.

“구승효 씨, 설마 ‘양랑’의 말이 들리는 거예요?”

승효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 보이기도 하고요?”

“잘못됐습니까?”

당황해하는 차영의 태도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차분하게 대답하는 승효를 보고 헛웃음을 삼킨 차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두 사람이 운명은 운명이다 싶어서요.”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차영이 알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쾅―.

그때였다.

“승효 씨!”

화장실을 다녀온다던 이준이 왠지 기쁜 얼굴로 나타났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네?”

“그 사람이랑 드디어 연락이 됐어!”

이준의 눈이 번뜩였다.

“이 지긋지긋한 연극을 끝낼 때가 왔군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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