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50화 (51/72)

50화

백호(白狐) (15)

《견자라는 그럴듯한 호칭으로 스스로를 칭하던 네놈들은 예전부터 그랬다.》

불쾌한 숨소리를 흘리며 붉은 눈의 흰여우가 중얼거렸다.

《창생을 위한다는 이유로 우리를 사냥하고, 괴롭히고, 가만두지 않았지!》

뭐?

《그런데 이번에도 또다시…… 이번에도 또다시, 네놈들이 내 앞길을 막는구나!》

그르르릉―.

흰여우가 지닌 아홉 개의 꼬리가 빳빳해지더니 마치 물결처럼 휘날렸다.

기껏해야 그들의 어깨만큼 오던 여우의 몸집이 점점 불어나는 것을 발견하며 이준은 크게 놀랐다.

《불쾌한 것들. 마음에 들지 않아. 마음에…… 들지 않아!》

그드득. 드득!

이준은 여우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그의 결박 언령에 금이 가는 것을 인지했다.

“승효 씨!”

“<박(縛)>!”

이준의 외침을 알아차린 승효가 괴황지를 꺼내 결박술을 사용했다.

《크으으!》

흰여우는 날아오는 검은 연기를 피하지 못했다.

《빌어먹을 견자 놈들…….》

드득!

하지만 그러한 여우를 속박하는 건 오래가지 못했다.

《이 쳐 죽일 견자 놈드을!》

쫘아악.

‘……!’

《용서 못 한다. 용서…… 못 해!》

뚜욱―.

‘안 돼!’

이준은 흰여우 비생 백수호를 묶고 있던 자신과 승효의 술법이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목도했다.

《가만 안 둬어어!》

이윽고 잔뜩 화가 난 흰여우가 온몸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요기를 마주하고 있던 두 남자에게 뿜어내자, 이준의 눈이 큼지막해졌다.

‘제기랄!’

피하기도 어려운 방대한 요기에 이준이 황급히 결계를 펼치려 했지만.

‘……!’

그보다 먼저 승효가 이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퐈아아―.

“큭!”

백호 비생이 방출한 요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승효의 입술 사이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승효 씨!”

입술을 꽉 악물며 비틀거리는 승효의 모습에 놀란 이준이 그를 불렀다.

“양랑!”

스슥.

이준이 온 힘을 다해 양랑을 부르자, 흰여우보다 훨씬 몸집이 큰 검은 호랑이가 여우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 녀석은 내게 맡기고, 구가 녀석의 상태를 살펴라, 주인.》

양랑이 늠름하게 외치며 분노를 표하고 있는 흰여우에게 다가갔다.

흰여우 비생이자, 사람으로 둔갑할 줄 아는 백수호는 붉은 눈을 빛내며 양랑을 노려봤다.

《흑호. 네놈은 부끄럽지도 않느냐? 한때 산군이라 불리던 놈이 하찮은 인간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명령을 따르는 꼴이라니!》

《조용히 하거라, 어린 여우야. 본군은 그저 선대의 약속을 지킬 뿐이다.》

《약속? 우리와 같은 신령한 자들이 인간을 주인으로 받드는 것이 약속이라는 말 하나로 인정이 된단 말이냐! 네놈이 그러고도 당당한 산의 주인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

《본디 말이 많은 자가 실력은 형편없는 법이지. 입만 나불거리지 말고, 와라!》

양랑이 입을 크게 벌리며 으르렁대자 바드득 이 가는 소리를 내던 흰여우가 아홉 꼬리를 흩날리며 양랑에게 달려들었다.

콰쾅! 쾅! 콰콰쾅!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백수호의 원신을 드러내기 전, 결계를 펼쳐 두지 않았더라면 주변의 아파트는 모두 무너졌을 것이다.

‘제……기랄.’

이 결계는 모두 이준의 영력으로 만든 것이다.

양랑이 흰여우와 길게 싸우면 싸울수록 점점 결계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게다가―.

‘스…… 승효 씨…….’

이준은 백지장처럼 새하얀 얼굴로 제 품에 안겨 있는 승효를 내려다봤다.

그의 얼굴은 희다 못해 창백하다. 조선 땅이 존재하는 한 그의 영력은 무한할 거라더니, 고작 백호 비생이 펼친 혼신의 요기를 정통으로 맞았다고 골골대고 있었다.

“승효 씨, 정신…… 차려. 승효…… 씨.”

콜록!

그동안 계속 모아 두었던 영기들을 제 것으로 만들며, 어떻게 해서든 이 결계를 유지하려 애쓰며 이준은 의식을 잃은 듯한 승효를 깨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준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서로 맞붙으며 요기를 방출하고 있는 두 특급 비생들의 싸움은 지속됐다.

‘……티기가……. 버티기가, 힘들……어.’

식은땀이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

승효가 의식을 잃은 지금, 이준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두 비생의 싸움에서 승효를 구하는 것, 그리고 일반인들이 휘말리지 않게 결계를 쳐 두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그 어느 것 하나 지킬 수 없어진다.

이준은 입술을 꽉 짓누르며 빠져나가려는 힘을 억지로 붙들었다.

“멈추거라.”

그때였다.

이준의 귀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 음성이 바로 코앞에서 들린다는 사실에 당황한 이준이 고개를 들자, 검은 눈의 한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창백한 얼굴에 서늘한 표정.

짙은 눈썹에 밤하늘처럼 어두운 머리카락.

그리고 팔이 하나.

‘외팔이?’

[그분이 누구인지는 단번에 알아보실 겁니다.]

언젠가 들었던 그 말이 머릿속을 헤맨다.

“당……신은.”

이준이 떨리는 음성을 흘리자 검은 눈의 그가 대답했다.

“오래 기다렸구나. 이제 이곳은 내게 맡기거라.”

남자가 하얗게 질린 이준을 향해 손을 뻗었다.

* * *

“그게 무슨 소리야? 특급 비생이 가출을 했다고?”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비생은 세 종류가 있다.

가야 할 길에서 멀어진 비생과 가야 할 길을 헤매는 비생, 그리고 가야 할 길을 제대로 걷고 있는 비생.

보통 스스로가 누구였는지, 어떤 존재였는지 잊은 비생은 가야 할 길에서 멀어진 존재들이었고, 제대로 된 길을 걷는 비생은 인간이 알지 못하게, 그들과의 공생을 선택한 존재들이었다.

가장 처리하기 난감한 비생들은 바로 길을 ‘잃은’ 비생들인데, 이들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했다.

전국 견자 협회의 회원들이 이러한 비생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이유는 바로 비생이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돕는 데 있었다.

― 예. 보호자의 시선을 피해 가출을 강행한 지 벌써 반 개월이 지났다고 하더군요.

“그거…… 위험한 거 아니야?”

― 예의 비생이 특급으로 분류되어 있기는 하나, 보호자의 관리하에 있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해를 끼칠 일도 만무하고요.

“으흠.”

― 그래도 오라버니 말씀대로 혹시나 할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만일 이 비생을 본다면 바로 연락 부탁드려요. 문자로 그 비생의 인간형 모습을 첨부하겠습니다.

이준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강주와의 통화를 종료했다.

‘대체 어떤 간 큰 비생이 협회에 이름까지 등록해 놓고 가출을 강행한 거야?’

참 특이한 비생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하며 핸드폰 문자로 전송된 사진을 확인하던 이준은 화들짝 놀랐다.

‘……어?’

* * *

“그래서 백 기자와 접근했던 거군요. 선배님은 이미 백 기자가 특급 비생이라는 걸 알고 계셨던 거고요.”

승효의 말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리고, 만약 백수호가 특급 비생이라면 모든 사실이 납득이 되잖아.”

“…….”

“어째서 그날, 나와 시비가 붙은 그 남자의 몸에 종이 인형 부적이 있었던 건지. 그 남자가 왜 지나치게 화를 내었는지, 전부.”

이준은 말했다.

“여하튼 그 때문에 그날 백 기자의 호출을 거부하지 않은 거야. 백 기자의 경계를 풀려면 어떻게든 비위를 맞춰 줘야 했다고. 술은…… 한 잔에 그리될 줄 알았나. 분명히 백 기자가 수를 쓴 거야. 틀림없어.”

이준의 확신에 승효가 피식 웃었다.

열렬히 해명하던 이준이 다시 승효를 응시했다.

“하지만 승효 씨, 이번 일은 나도 좀 억울해.”

“억울하다니요?”

“분명 그때, 난 승효 씨한테 문자를 보냈다고. 나 좀 도와 달라고. 미리 말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안 그래?”

“선배님이 보내신 문자라면…… 주소 하나 불러 주고 ‘지금 당장 나와’라고 하셨던 바로 그 문자 말입니까?”

이준은 오히려 되묻는 승효의 말에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문자가 좀 짧기는 했지?”

승효는 그런 이준을 빤히 응시하더니 피식 웃어 버렸었다.

“놔, 이 자식아! 이거 안 놔?”

그리고 지금.

이준은 신경질적인 음성을 흘리는 남자를 바라봤다.

“백수호. 말이 심하구나. 이 자식이라니. 하늘 같은 낭군에게 감히 그런 험한 소리를 하는 게냐?”

“누…… 누가 네 낭군이야! 내가 언제부터…… 이 개자식아! 내 손을 어떻게 해 놓은 거야? 왜 내가 널 부축하고 있는 거, 우웁!”

“시끄럽군, 정말.”

백수호의 손은 마치 본드로 붙여 놓은 듯, 검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의 몸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는 연신 불평을 하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남자의 손과 손을 맞잡고 있었다.

이준은 “이, 이 배신자!” 하고 저를 노려보고 있는 백수호를 향해 생긋 웃었다.

“그러기에 연기자를 믿으시면 어떡합니까.”

‘굿모닝스타’의 간판 기자 백수호가, 아니 흰여우 비생 백수호가 바르르 입술을 떨었다.

이준의 시선이 그런 백수호의 곁에 서 있는 키 큰 남자에게 닿았다.

몇 시간 전, 흰여우 비생의 마지막 발악은 어느 순간 나타난 이 검은 선글라스를 낀 외팔이 남자의 등장으로 인해 완벽하게 차단됐다.

불현듯, 강주로부터 특급 비생의 가출에 대해 들었던 그날, 자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 특급 비생의 가출을 보고한 보호자가 대체 누구야?]

강주는 의문을 담아 묻는 이준에게 대답했었다.

[보호자 역시 특급 비생입니다. 오라버니께서는 혹, 삼족구 일족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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