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53화 (54/72)

53화

남굴(南窟) (2)

“내가 미쳤지!”

터벅터벅 걸어가던 이준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거기서 ‘안 좋아한다’고 말하면 어떡하냐…….”

심지어 강주는 그런 단어는 언급하지도 않았는데!

[오라버니께선 구가의 가주님을 싫어하는 게 아니셨습니까?]

그래.

좋아하는 게 아니냐 물은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게’ 아니었냐고 물은 것이다.

“그 상황에서 좋아하네 마네 하는 소리를 해 댔으니 당연히 의심할 거 아니야…….”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무시하며 생각해 봐도, 호흡을 가라앉히며 생각해 봐도 결론은 똑같다.

이준이 한 말을 강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알아들었을 게 분명하다.

‘이제 강주의 얼굴을 어떻게 보지?’

벌떡 일어나는 그를 황망하게 응시하던 강주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현재.

도망치듯 전견협 건물을 나선 이준은 서둘러 택시를 타고 집 근처 길가에 멈춰 선 채,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이유인즉, 현재 그의 눈앞에 들어온 한 남자 때문이다.

<오늘 밤에 나와 ‘함께라면’. 언제나 든든한 ‘함께라면’과 함께해요!>

우연히 멈춰 선 곳에서 하필 ‘그 녀석’의 낯짝을 보게 될 줄이야.

지금 이준이 서 있는 곳에는 한 대형 마트가 존재했는데, 그곳의 출입구 근처 진열대 위에 TV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TV 속에는 캐주얼한 차림의 한 남자가 상큼한 미소와 그윽한 눈빛을 보내며 위와 같은 멘트를 흘려 대는 중이다.

어디 그뿐인가.

‘저 입간판은 대체 뭐야?’

실제 키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웬만한 성인 여성의 키만 한 입간판을 보며 이준은 입술을 삐죽였다.

‘대체 언제 라면 CF를 찍었대.’

그러고 보니 몇 달 전, N브랜드의 새로 나온 프리미엄 라면 CF의 모델을 다시 섭외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구승효가 입간판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면 아마도 그가 모델로 낙점된 거겠지.

[오라버니, 혹시……]

‘헉.’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강주의 음성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이준은 실제 모습도 아닌 입간판을 멀거니 바라보며 웃어 대고 있었을 거다.

‘말도 안 돼.’

그저 매일 얼굴 보는 사이니까.

이젠 나름 익숙해진 사이니까…… 지나치지 못했던 것뿐이야.

‘그래. 그런 것뿐이라고.’

갑자기 덮쳐 온 이상한 기분이 온몸을 파르르 떨던 이준이 멈추었던 발을 움직여 멀리 보이는 집을 아파트를 향해 돌아서려던 순간.

“이보게, 청년.”

이준은 갑자기 제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누군가의 손길에 홱 몸을 돌렸다.

그러자 저를 빤히 올려다보며 방긋 웃는 한 노인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놀란 흔적을 감추며 이준은 미소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제게 할 말씀이 있으세요?”

마침 이준은 선글라스와 함께 검은 슬랙스에 베이지색 목티를 입고 있었다.

하필이면 TV 속 라면 광고의 구승효가 입은 착장과 같다.

“흐으음.”

본능적으로 나온 프로 정신에 이준이 뭐라 해명할 틈도 없이, 가늘게 뜬 눈으로 이준과 이준의 뒤편으로 보이는 입간판과 TV를 번갈아 주시하던 노인이 손뼉을 쳤다.

“자네지?”

“예?”

“자네가 저기, 저 청년이잖아. 그렇지?”

이준은 껄껄 웃으며 “내 눈은 못 속이지!” 하고 외치는 노인의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노인은 주저하는 이준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동네에 TV에서 보던 양반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내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믿지 않았는데…… 정말이군. 이 동네에 산 지 벌써 60년이 되어 가지만 처음 보네!”

이준은 어색하게 웃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자네의 뒷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다 생각했어. 그거 아나? 내 자네가 나온 드라마는 나도 몇 번 본 적 있네! 우리 손녀가 자네를 아주 좋아하거든. 허허허!”

노인은 자랑스레 외치다 말없이 웃는 이준을 힐끔거렸다.

“저기…….”

“말씀하십시오, 어르신.”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은 주머니를 주섬거렸다.

“미안하네만, 나와 사진 한 번만 찍어 줄 수 있겠나?”

뭐?

“저기, 저 사진 앞에서 말이야. 우리 손녀한테 자네와 만났다는 걸 알리고 싶거든.”

이준은 조금 당황했다.

‘내가 구승효랑 닮았나?’

아니.

어딜 봐도 이준과 승효는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하지만 현재 이준은 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고, 요즘 젊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르신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오해할 만도 하다.

이준은 물끄러미 노인을 응시했다.

“안…… 되겠나?”

간절한 눈으로 저를 응시하는 노인의 모습에 입간판 속의 인물이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려던 이준의 말이 목구멍 안으로 삼켜졌다.

손녀를 떠올리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고민하던 이준은 곧 생긋 웃었다.

“잘못 찍었다고 물리시면 안 됩니다.”

* * *

“으으.”

이준은 신음을 흘렸다.

‘이렇게 될 줄이야…….’

처음에는 편하게 올라가던 입꼬리는 어느덧 잔뜩 굳어 내려올 줄 몰랐다.

안면 근육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자 마비가 올 것 같았다.

끙끙대며 거울을 들여다보는 이준을 향해 누군가 코웃음 쳤다.

《그러게, 선행은 적당히 했어야지. 가끔 보면 주인은 정도를 몰라.》

“그럼 어떡하냐. 그 할아버지를 냉정하게 거절할 수도 없고.”

《그럼 그 영감이랑만 찍으면 되지, 그다음에 나타난 다른 사람들과도 찍었잖아.》

“그건…….”

이준은 냉정하기 그지없는 양랑의 지적에 쉬이 대꾸하지 못했다.

[헉. 이거 뭐예요? 설마 팬미팅이에요?]

[저도 찍어 주세요!]

[차휘다, 차휘!]

[구승효 입간판 앞에 선 차휘라고? 이건 못 참지!]

[다들 이리 오세요! 여기서 차휘 씨 미니 팬미팅 열려요!]

어느새 선글라스를 벗은 이준이 예의 노인과 여러 장의 사진을 찍은 이후, 그와 함께 노인의 손녀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이준을 알아본 젊은 어머니 부대가 마트 앞에 나타났고 연이어 10대 소녀들부터 시작하여 지나가던 20, 30대 여성들까지 이준을 둘러쌌다.

요즘 이런저런 일로 미디어에 등장을 꺼리고 있는 ‘차휘 미니 팬미팅’이 돌연 열리게 되자 당황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준은 그들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결국엔 몰려온 팬들에게까지 끝까지 팬서비스를 하게 된 것이다.

“다시는 그 마트엔 못 가겠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준이 우연히 보고 있던 구승효가 선전하는 라면은 예의 마트에서 모두 동이 났다.

[설마 휘 오빠, 승효 오빠 라면 홍보해 주려고 이런 깜짝 이벤트 여는 거예요?]

[네?]

[대박! 그러고 보니 두 분 엄청 친하시다면서요? 그래서 그런 거구나! 그런 거라면 당연히 하나 팔아 드려야죠! 여기, 저도 이거 하나 주세요!]

[저도요!]

누군가 던진 한마디에 놀라 순간 제대로 대답을 못 했을 뿐인데, 제멋대로 해석한 반응이 돌아왔다.

졸지에 깜짝 이벤트 주최자가 되어 버린 마트 측에서도 이준에게 감사를 표하며 라면이 담긴 박스를 열 개나 줬을 정도니, 말은 다 했지.

《이 정도면…… 백 일은 넘게 먹을 수 있겠군.》

겹겹이 쌓아 놓은 라면 박스를 보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준을 향해 양랑이 중얼거렸다.

이준은 그런 양랑이 있는 쪽으로 인상을 쓴 이후,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시비 걸 거면 차라리 도와. 구승효 오기 전에 이거 다 치워야 해.”

“뭘 치우시려고요?”

“헉.”

힘없이 중얼거리던 이준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홱 몸을 돌렸다.

그러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승효가 보였다.

‘망할!’

겨우겨우 라면 박스들을 집 안으로 들이고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예기치 못하게 승효가 나타났다.

승효는 놀랍게도 외출복이 아닌 회색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스, 승효 씨, 외출한 거 아니었어?”

승효가 엷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몸이 좋지 않은 듯해서 집에서 쉬다가, 잠깐 쓰레기를 버리러 다녀왔습니다.”

“몸이? 아직도 안 좋아?”

돌연 승효의 상처가 떠올라 묻자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니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박스는…….”

“어, 어어! 이거. 이거는 그러니까…….”

이준은 황급히 라면 박스를 가리려다 멈칫하며 생긋 웃었다.

‘여기서 괜히 어색하게 굴면 상황이 더 이상해질 수 있어.’

그는 말했다.

“지나가다가 보이길래 몇 개 사 봤어. 그러고 보니 이 라면 모델이 승효 씨더라고. 이야, 언제 이런 CF를 찍은 거야? 나 깜짝 놀랐다니까?”

억지 미소를 지어 가며 이준이 외치자 승효가 이준 뒤편으로 보이는 열 개의 라면 박스를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몇 개 사 봤다고요?”

몇 개 치고…… 좀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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