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남굴(南窟) (5)
“매니저와 개인 스태프들을 동반 못 한다고요?”
두 눈을 크게 뜨는 이준의 물음에 TVX 예능국 소속 박민종 PD가 웃으며 대답했다.
“차휘 씨, 계약서 조항 기억 안 나세요? 거기엔 분명히 이렇게 적혀 있었죠. ‘이번 촬영 기간 출연자들의 개인 스태프들은 동행이 불가하며, 출연자들은 촬영 기간 모든 일을 개인적으로 행한다.’라고. 아, 여기서 모든 일이란 메이크업이나 헤어, 코디 같은 걸 의미해요.”
“아…….”
“하하하. 차휘 씨가 진작 도장을 찍었기에 망정이지, 사실 걱정했다니까요? 설마 이 조항 때문에 거절하면 어쩌나 하고요. 아무래도 배우들은 이미지가 중요하잖아요. 오히려 시청자들한테는 이게 흥미로운 포인트죠. 코디 없는 차휘 씨의 일상 사복 차림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니까요!”
당시, 그를 향해 눈을 반짝이던 박민종 PD는 전례 없는 좋은 아이템이라며 흡족해했다.
“……빠. 휘 오빠!”
이준은 얼마 전 한 번 더 미팅을 가졌던 박 PD와의 대화를 상기하다 고개를 들었다.
제 방에서 넋을 놓고 배낭과 캐리어를 바라보고 있던 이준의 앞에 그의 코디네이터인 선희와 매니저 태경이 서 있었다.
“너희, 언제 왔…….”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준은 다짜고짜 털썩 앉으며 묻는 태경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가?”
태경은 온 세상의 근심을 다 끌어안은 사람처럼 말했다.
“저희 없이 처음 홀로 움직이시는 거잖아요. 정 걱정되시면, 제가 어떻게 해서든 배우님 따라갈게요.”
“오빠, 저도요! 현주도 같은 마음일 거예요!”
태경은 물론 선희까지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자 이준은 헛웃음이 났다.
“괜찮아.”
그는 손을 저었다.
“내가 뭐 사지를 가는 것도 아니고 고작 며칠 집을 떠나는 건데 뭐. 왜 그렇게 불안해해?”
“하지만…….”
“걱정 마. 내 일상복차림 꽤 괜찮은 편이라고. 거기다 헤어나 메이크업도 알아서 할 테니 염려할 필요 없어.”
“어…….”
“괜찮은…… 편이요?”
뭐.
아니야?
이준은 움찔하는 두 남녀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다 벌떡 일어났다.
“가자. 다들 기다리겠어.”
TVX 방송국이 야심차게 준비하는 신작 예능 <함께 가자!>는 호화 캐스팅으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무려 현 20대와 30대 배우 중 가장 인기 있는 두 톱스타의 동반 캐스팅에 성공한 것이다.
특히나 구승효와 차휘는 예능이라고는 담을 쌓고 살았던 이들이었기에, <함께 가자!>의 소식이 간간이 흘러나올 때마다 언론과 팬들로 하여금 폭발적인 반응이 나왔다.
총 5일간 벌어지는 두 톱스타의 산골 마을 체험기&거주기를 담을 <함께 가자!>는 구승효와 차휘가 충북 단양의 한 마을로 가서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고 점점 적응하는 과정을 담을 예정이었다.
촬영 후반부에는 두 호스트를 깜짝 놀라게 해 줄 게스트까지 초빙할 계획이라 하여, 과연 이 대박 예능에 참여할 게스트가 누가 될지 유추하고 있다고.
그리고 현재.
“윽.”
<함께 가자!>의 첫 촬영지는 놀랍게도 메인 촬영 장소인 충북 단양 영춘면의 마을이 아닌, 서울시 강남구 청연동에 자리 잡은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사옥 뒤편의 주차장이었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촬영 스태프들을 지나 촬영 장소가 있는 단양의 마을까지 갈 승합차로 향하려던 이준은 저를 보고 놀라는 정후를 향해 인상을 썼다.
“왜.”
“흐음.”
“형?”
정후는 이준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그를 끌어당겼다.
“준이 너, 설마 그렇게 입고 촬영 시작할 거야?”
“……뭐?”
“설마 그 상태로 촬영할 거냐고!”
정후는 이준을 발견하고 몹시 당황한 눈치였는데, 이준은 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괜찮지 않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아니, 스태프 대동 금지는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첫 촬영부터 이런 모습을 오픈하면 어떡하냐?”
“무슨 소리야.”
“애들이 코디 안 해 줬어? 집에 있다 온 거 아니야?”
이준은 도통 알 수 없는 정후의 발언에 인상을 썼다.
정후는 그런 이준을 어이없이 내려다보더니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네가 이런 녀석이라는 걸 다들 알 때도 됐지.”
“대체 뭐라는 거야.”
《모르겠나? 이 대표는 주인의 패션 센스가 꽝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그간 부를 때도 제대로 나타나지 않다, 돌연 하암 하품을 하며 출현한 양랑이 슬그머니 다가와선 중얼댔다.
‘내 패션 센스가 어디가 어때서.’
이준은 슬그머니 고개를 내렸다.
초봄에서 완연한 봄으로 들어선 4월 중순.
아직 반팔을 입기에는 쌀쌀한 날씨고, 그렇다고 산골 마을에서 트렌치코트만 입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해서 자주 입는 연보라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그 위에 갈색 트렌치코트를 걸쳤던 건데―.
‘이게 문제라고?’
이준은 “선희는 붙였어야 했어. 어떻게 해서든 붙였어야 했다고.”를 중얼대고 있는 정후를 지나 승합차에 짐을 싣고 있는 승효에게 다가갔다.
“승효 씨.”
구승효가 뒤를 돌아봤다.
“오셨습니까.”
이준보다 한발 앞서 집을 나섰던 승효는 검은 슬랙스에 베이지색 맨투맨을 입은 상태였다.
“산군도 오셨어요.”
승효는 느릿하게 이준의 뒤를 따르는 양랑에게도 인사를 했다.
이준은 “그래.” 하고 짧게 대답하는 양랑의 말을 무시하고선 승효에게 입을 열었다.
“촬영 들어가면 가급적 양랑은 모른 척해. 음, 아무래도 촬영 기간인 닷새 동안은 말을 안 거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승효 씨도 알고 있겠지만, 산골 마을에는 비생들이 많아. 보통은 하급이니 문제는 없겠지.”
“…….”
“내 생각엔 이번 촬영에선 그 녀석들과 엮이지 않는 게 중요할 것 같아.”
“네.”
“그리고 또, 혹시나 해서 내가 알아봤는데 강주 말로는 단양 쪽엔 특히 비생이 많을 거래. 단단히 준비하는 게 좋겠…….”
쉬지 않고 말하던 이준의 눈이 동그래졌다.
“왜 웃어?”
그러자 승효가 품속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냈다.
“선배님과 제 생각이 일치한 것 같아서요.”
승효가 기다렸다는 듯 이준에게 황색 종이를 내밀자 이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괴황지?”
“왠지 필요할 듯해서 챙겨 왔습니다.”
이제야 그의 말이 이해됐다.
충북 단양의 산골 마을은 비생에 노출되어 있을 거니 주의를 요구해야 한다던 이준의 말처럼, 승효 역시 산골 마을에서의 촬영을 경계한 것이다.
“선배님 말씀대로 촬영지에 비생들이 많다면, 그 녀석들이 선배님의 연습 상대가 될 수도 있겠군요.”
이준은 더없이 상큼한 미소를 짓는 승효를 황망하게 응시했다.
그러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승효 씨. 보기보다 혹독한 선생이네. 그런 곳에 가서까지 날 훈련하려고?”
승효는 어깨를 으쓱였다.
“기회는 있으면 잡아야 하는 법이니까요. 더 많은 비생을 상대할수록 선배님의 부적술은 향상될 겁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닌지라 이준은 굳이 핀잔을 걸진 않았다.
“잘됐어요.”
곧 시작될 촬영을 위해 <함께 가자!>의 스태프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촬영 슛이 들어가기 전이라 승합차 근처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이준은 작게 중얼거리는 승효의 목소리에 그를 올려다봤다.
“같이 촬영하는 거 말입니다. 만일 선배님이 승낙해 주지 않았다면, 매일 몰래 촬영장을 나와 선배님을 뵈러 서울까지 가야 했을 뻔했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순간 승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이준이 어리둥절해하자, 승효가 오른쪽 검지를 들어 그의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
곧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챈 이준의 귀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이봐, 구승…….”
“두 사람, 여기 있었네요!”
저를 놀리려는 것이 분명한 승효에게 이준이 불만 어린 의사를 전달하려 할 때.
무전기를 든 박 PD가 이준과 승효의 앞에 나타났다.
“곧 있으면 슛 들어갈 건데, 단양까지 누가 운전할 거지? 차휘 씨? 아님, 승효 씨?”
이준은 너무도 당연하게 저를 먼저 응시하는 박 PD를 보고 내심 당황했다.
박 PD는 씩 웃으며 이준에게 차 키를 넘겼다.
“차휘 씨 운전 잘하죠?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드라마에서 카 레이서이지 않았나? 나 그거 되게 재미있게 봤었는데!”
졸지에 키를 건네받은 이준은 잠시 머리를 굴리다 입을 열려 했다.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선배님은 내비 봐 주세요.”
하지만 그 전에 승효가 먼저 이준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던 키를 빼앗았다.
“승효 씨가 하게?”
“네. 차휘 선배님은 어젯밤 늦게까지 잠을 설치셨대요. 아무래도 오랜만의 예능이라 긴장을 많이 하신 모양입니다.”
“차휘 씨, 정말이에요?”
이준은 머쓱하게 웃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걸 보는 바람에 운전을 못 한다고 하는 것보단, 잠을 설쳤다는 편이 낫지.’
대답 않는 이준의 반응을 긍정으로 느낀 건지, 박 PD는 이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요. 그냥…… 그냥 있는 그대로의 ‘차휘’ 모습을 보여 주면 되는 거니까. 그런 진정성에 우리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도, 틀림없이 차휘 씨한테 빠져들 거고요!”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5분 뒤 슛 들어갈 테니 다들 준비해 줘요!”
이준과 승효를 번갈아 응시하던 박 PD는 곧 주변을 향해 크게 외치며 그들의 곁에서 떠나갔다.
다시금 승효와 둘만 남게 된 이준은 트렁크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향하려는 승효에게 입을 열었다.
“고마워.”
앞으로 나아가던 승효가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 미소에, 이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저거 진짜…….’
심장에 안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