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남굴(南窟) (6)
― 차휘 씨, 승효 씨. 앞에 보이는 휴게소에서 삼십 분 정도 휴식할 예정이니 안으로 들어가 주세요!
복잡한 서울 도심을 빠져나와 두 시간쯤 달렸을 때, 제작진으로부터 무전이 도착했다.
이준은 운전하는 승효 대신 “알겠습니다.”라 대답한 이후, 휴게소 안으로 차를 이끄는 승효 쪽을 힐끔거렸다.
“그럼 선배님, 전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와.”
주차를 하자마자 말하는 승효에게 대답한 이준은 화장실 쪽으로 향하는 승효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양랑.”
《그래.》
“아무래도 내가 조금 이상한 것 같지 않아?”
언제부터였을까.
이준은 한 사람의 말과 행동들에 ‘의미’라는 것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이상할 정도로 긴장하게 됐지.’
조금 전도 마찬가지.
[윽!]
승효가 주차를 하고 난 이후 이준은 오랫동안 운전을 한 그를 위해 음료나 커피를 살 생각이었다.
하여 지갑을 찾기 위해 조수석에서 내리지도 않고 주머니를 뒤적이다, 그만 지갑을 바닥으로 떨어뜨려 버렸고 그것을 줍기 위해 몸을 숙이려다 무게 중심을 잃었다.
[괜찮으십니까?]
사소한 실수로 조수석에서 차 밖의 땅 위로 무릎을 찧을 뻔했을 때, 갑자기 손이 뻗어왔다.
무심결에 그 손을 맞잡고 고개를 드니 승효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운전석에서 내리던 그가 어떻게 조수석 근처까지 다가온 건지 의심할 틈도 없이, 왠지 안도의 마음이 일었다.
그의 부축을 받고 서자 승효는 말했다.
[조심하세요. 차체가 높아 다치기 쉬워요.]
‘만약 예전의 나였다면 틀림없이 불쾌해했겠지.’
이준은 저를 붙잡던 승효의 손길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단순히 불쾌해할 정도가 아니라, 저를 붙잡은 승효의 손을 뿌리쳤을 것이 분명하다.
“굳이 안 잡아 줘도 돼.” 하고 앙칼진 반응을 보였거나 혹은 “그 정도는 나도 알아.”라는 대답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준이 뱉어 낸 답변은 어색하게 웃으며 건넨 “고마워.”라는 말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구승효의 손길이 닿아 버린 순간 온몸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디 그뿐인가.
‘……수줍어했어.’
이준은 차마 승효를 바라보지도 못한 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이 내가.
천하의 차이준이.
나지막하게, ‘고마워.’ 하고 중얼거린 것이다!
‘네가 무슨 소녀냐?’
이준은 다시 생각해 보아도 소름이 돋아나는 제 반응에 바르르 몸을 떨었다.
《흥. 주인이 어디 이상했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인…… 흠흠, 뭐,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이준에게 답하기 위해 코웃음까지 치던 양랑은 인상을 쓰는 이준을 발견하고선 말을 돌렸다.
이준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냥. 갑자기 요즘 그런 생각이 드네. 내 행동들이 꼭…….”
《꼭? 꼭 뭐?》
말을 하던 이준이 돌연 얼굴을 굳히며 입을 다물자, 양랑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준은 저 멀리, 이미 사라지고 없는 승효의 흔적을 눈으로 좇다 홱 몸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 * *
“우리 신계(神鷄) 마을은 말이지요, 하늘의 닭이 크게 울부짖어 생긴 마을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상징도 바로 금색 닭이지요! 참, 저기 저 앞에 굽어 흐르는 남한강이 보이십니까? 저 강을 넘으면 바로 그 유명한 온달 동굴이 있습니다! 과거 온달 장군이 수련을 했다는 바로 그 동굴이요!”
<함께 가자!>의 촬영 장소인 충북 단양 영춘면의 한 산골 마을, 신계 마을.
이준과 승효 일행이 신계 마을로 입성하기가 무섭게, 밀짚으로 된 커다란 챙모자에 선글라스를 낀 한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특히 우리 마을은, 단양에서도 대표적인 여행지이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온달 동굴을 중심으로 드라마 세트장이며, 각종 관광지가 들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꿋꿋이 버티고 있는 마을입지요!”
신계 마을의 이장이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마을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났다.
“모두 열세 가구가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인데다, 거주자들도 대부분 어르신들이라 방송국 여러분들이 촬영하기에는 아주 편할 겁니다.”
신계 마을 이장 장씨는 껄껄 웃으며 혹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얼마든 저에게 말해 달라며 카메라 앞에 서서는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나서는 걸 꽤 좋아하는 분이군.’
이준은 그들이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기다렸다며, 이준과 승효를 태운 차가 도착하자마자 손을 힘껏 흔들던 장 이장을 떠올렸다.
“이장님은 사투리를 거의 안 쓰시네요.”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자 그들의 숙소로 안내하겠다며 앞서가던 장 이장이 홱 고개를 돌렸다.
“하하, 충북 쪽이 수도권과 가깝지 않습니까. 사투리가 있긴 하지만 그리 심하진 않죠. 게다가 도시에서 오신 분들과 대화할 때는 표준어를 사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래 봬도, 제가 서울 쪽 대학을 나왔거든요. 유학한 티를 내긴 해야죠.”
마지막 말을 할 때는 낮게 속삭이기까지 한 장 이장의 말에 이준도 피식 웃어 버렸다.
“어르신들이 계시는 마을인데 저희 촬영 때문에 소란스러워지는 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앞서가는 장 이장과 그의 뒤를 따르던 이준의 옆에서 배낭을 메고 움직이던 승효가 묻자, 장 이장이 하하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것일랑 걱정 마십쇼. 다른 연예인들이면 어르신들도 당연히 거부하셨을 겁니다. 한데…….”
“한데?”
“사실 마을 어르신들이 차휘 씨를 엄청나게 좋아하시거든요.”
“저를요?”
“예. 저쪽, 저기 빨간 지붕 보이십니까?”
장 이장은 오름길의 왼편에 존재하는 커다란 집을 하나 가리켰다.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 이장은 말했다.
“저 지붕 아래 살고 계시는 황씨 할머니가 우리 마을에서 제일 입김이 세신데, 어느 날 갑자기 TV를 보시더니 차휘 씨를 보고 본인의 손녀사위로 삼아야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하하.”
장 이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후, 어떻게 구하신 건지 차휘 씨의 사진도 들고 와서 마을에 뿌리고 다니시고, 차휘 씨가 출연한 드라마는 아예 마을회관에서 다른 어르신들하고 모여서 1회부터 최종회까지 함께 보셨다니까요?”
“그 정도입니까?”
이준은 깜짝 놀랐다. 장 이장은 대답했다.
“그래서 이번 촬영 문제로 방송국에서 제안이 왔을 때, 황씨 할머니께서 적극 주장하셨죠. 차휘 씨 프로그램이면 무조건 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선배님, 아무래도 그 할머니 댁에 인사드리러 가 보셔야겠네요.”
승효가 웃으며 말을 덧붙이자 장 이장 역시 말했다.
“맞습니다. 시간 나면 한번 들러 주세요. 아마도 황씨 할머니, 우리 차휘 씨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실 거예요. 아, 이쪽입니다!”
장 이장은 신계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파란 대문을 가진 커다란 집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바로 저기예요. 앞으로 닷새 동안 두 분이 머무를 숙소 말이지요. 급히 준비하기는 했는데, 그래도 지낼 만할 겁니다!”
장 이장은 웃으며 굳게 닫혀 있는 대문을 힘껏 밀었다.
끼이익―.
이준은 “어서 들어오시지요.” 하고 이미 문 안으로 들어가 저와 승효, 그리고 다른 제작진들에게 손짓하는 장 이장을 응시하다 승효를 힐끔거렸다.
승효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이다, 인간!》
《웬일로 이것들이 단체로 몰려왔대?》
《먹을 거야. 잡아먹을 거야, 인간들!》
《킥킥킥킥!》
맙소사.
* * *
“양랑, 너는 여기부터 저쪽 창고 끝까지 맡아. 나는 그 반대편을 처리할게.”
《맡겨 줘.》
양랑이 대답함과 동시에 작은 바람이 일었다.
곧 “끄아악!”, “사, 산군!” 하고 소리치는 하급 비생들의 소리가 들렸다.
이준은 홱 고개를 돌렸다.
《흐익!》
《저리 가! 가라고!》
《도망쳐!》
이준의 날카로운 눈빛에 방구석에 숨어 있던 비생들이 놀라 달아나는 모습이 보인다.
‘쯧.’
그는 혀를 차며 품에 넣어 두었던 괴황지를 꺼내어 들었다.
손끝으로 괴황지 위에 결(結) 자를 새겨 넣자 괴황지에서 빠져나온 붉은 연기가 곧 주변으로 펼쳐 나가더니, 보호진을 치기 시작했다.
‘부적술을 배워 둔 게 확실히 도움이 되는군.’
언령술과는 달리 붉은색을 띠는 연기를 바라보며 이준은 안도했다.
삼충 사건 이후로 이준은 틈틈이 승효로부터 부적술을 배웠다.
능숙하게 부적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인 술법은 전개할 수 있게 됐고 덕분에 이제 집 한 채 크기에 보호진을 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해졌다.
방 구석구석, 카메라의 사각지대에 몰래 붙여 둔 부적들을 주시하던 이준은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문을 열고 나섰다.
“승효 씨, 아궁이도 지필 줄 알아요?”
“어릴 적 집에 있던 거라서요. 이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집에 아궁이가 있었다고요? 승효 씨, 도시에서 나고 자란 거 아니었어?”
방 밖으로 나가니 승효가 아궁이 앞에 앉아 밥을 안치는 중이었다.
능숙하게 밥을 짓고 음식을 하는 승효의 행동들이 신기했는지, 제작진이 그를 둘러싸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구승효의 어린 시절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
이준만큼이나, 아니, 이준 이상으로 신비주의 이미지를 고수하던 승효는 꽤 머리가 좋다는 것 말고는 과거조차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긴. 저 녀석도 결국, 보이니까.’
어쩌면 다른 사람은 그의 과거를 모르는 편이 나을 수도 있었다.
만약 승효의 과거를 끝도 없이 파고든다면 결국에 밝혀지는 것은 비생이 될 테니.
“어릴 적엔 뭐 하고 놀았어요?”
“맞아. 시골 어디에서 자랐어?”
“과거 이야기 좀 해 봐요. 시청자들도 알 수 있게. 응?”
한번 흥미를 보이기 시작한 제작진들이 카메라를 들이밀며 승효에게 말을 하자, 불을 때던 승효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이준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성큼성큼 발을 움직였다.
“기다렸지?”
그러고는 제작진을 지나쳐 승효의 옆에 털썩 앉더니 팔을 걷어붙이며 물었다.
“방 청소는 다 했어. 그럼 나 이제 뭐 하면 돼?”
그러자 이준이 오기 전까지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던 승효가, 그 누구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은 거기 앉아 계세요.”
“그냥 앉아 있으면 돼?”
“네.”
승효가 거리낌 없이 말했다.
“선배님은, 곁에 계셔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