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남굴(南窟) (7)
<선배님은, 곁에 계셔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이 됩니다.>
“스톱, 스톱!”
모니터링 중이던 박민종 PD가 카메라를 들여다보더니 주변을 둘러싸던 제작진에게 말했다.
“여기. 여기 이 장면 말이야. 이 장면 진짜 괜찮지 않아?”
그러자 이번 프로그램의 조연출을 맡고 있던 함지호 AD가 카메라 쪽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안 그래도 선배한테 말하려 했어요. 그 장면은 살리는 게 나을 것 같다고.”
“그렇지?”
“승효 씨랑 차휘 씨 케미 하나 믿고 시작한 프로그램이긴 한데, 생각보다 둘이 붙어 있는 씬이 괜찮네요. 윤 작가는 어떻게 생각해요?”
“저야 동의하죠. 솔직히 전 박 PD님 제안에 좀 긴가민가했는데, 오늘 두 사람을 한 프레임에 넣고 보니 눈이 즐겁더라고요. 게다가 기사는 그냥 언플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두 사람이 꽤 친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어디 친하다 뿐이겠어? 아까 둘이 밥 먹을 때 봤지?”
박민종 PD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차휘 씨가 승효 씨한테 한 행동들은 내가 다 설레더라니까?”
“밥풀이요?”
“승효 씨 입에 묻은 밥풀을 떼어 주는 게 아주 스스럼이 없던데.”
“그러게요. 전 그것보다 승효 씨가 밥을 푸다 데였을 때, 깜짝 놀라 달려오던 모습 보고 놀랐다니까요.”
“확실히. 후, 후 불어 주는 모습이 엄청 자상했죠.”
“그것보다 이부자리 챙길 때 차휘 씨도 엄청 다정하던데요.”
“자긴 얇은 이불로도 괜찮다고 승효 씨한테 두 개 더 챙겨 준 거요? 그러다 돌아서선 오돌오돌 떠는 것도 은근 귀여웠죠.”
“나 좀 설렜잖아. 괜히 로황이라 부리는 게 아니네.”
온몸을 파르르 떨며 눈을 반짝이는 박 PD의 말에 주변의 연출진들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박 PD는 “그럼 말하러 가자고!” 하고 외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저녁 식사 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준과 승효에게 다가갔다.
“네?”
그리고 현재.
이준은 생각지도 못한 박 PD의 말에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뭘…… 하라고요?”
박민종 PD는 당황해 말까지 더듬는 이준을 보고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오히려 평상에 누워 있던 이준이 벌떡 일어나자 그 앞에 앉으며 씩 웃었다.
“차휘 씨도 알다시피, 우리 프로그램이 힐링&관찰 예능이잖아요?”
“네…….”
“그런데 아까 두 사람이 저녁 식사 준비하고, 또 먹는 장면을 보니까 내 마음이 막 몽글몽글 한 거야!”
몽글몽글?
‘대체 어디가?’
이준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박 PD는 말을 이었다.
“특히 차휘 씨가 우리 승효 씨한테 한 행동 보고 괜히 근질거려 가지고 나까지 참을 수 없는 거 있지?”
[저기, 승효 씨. 아까부터 영 거슬렸는데, 아무래도 말해야겠어.]
[네?]
[승효 씨 입가에 뭐 묻었어.]
[아…….]
[아니, 거기 말고. 조금 더 위.]
[여기요?]
[흠, 그대로 있어 봐.]
[…….]
[됐네. 이제 괜찮아.]
당시 이준은 그저 승효의 얼굴에 묻은 밥풀을 떼어 줬을 뿐이다.
이준은 오늘따라 환하게 빛나는 별처럼 히죽 웃고 있는 박 PD를 바라봤다.
박 PD는 눈에 힘까지 주며 말했다.
“그러니 말이지, 남은 기간엔 신계 마을 생활을 하는 것도 시청자들한테 보여 주고, 또 두 사람이 가급적이면 붙어서 지내는 컨셉으로 가고 싶거든요?”
“……네.”
“왜, 차휘 씨도 알다시피 요즘 브로맨스가 유행이잖아. 듣자 하니 이번 드라마도 그런 유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된 거, 우리 프로그램도 그런 식으로 가 보자고!”
이준은 의지를 다지는 박 PD의 발언에 헛웃음을 삼켰다.
‘여성팬이나 커플팬을 만들려는 속셈이군.’
물론 곧 있으면 크랭크인을 할 이준과 승효의 드라마는 확실히 두 남자 주연이 투톱을 형성하는 작품이지만, 애석하게도 두 주연 간의 러브 라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비틀린 애정과 증오 정도는 존재하지만.’
이준은 “어때? 괜찮지?” 하고 눈을 빛내는 박 PD에게 냉정한 말을 전하려 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하지만 그보다 먼저 대꾸한 사람은 바로 승효였다.
“승효 씨는 찬성이야?”
“프로그램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컨셉을 잡아야죠. 어렵지 않습니다.”
“하하, 그래? 그거 다행이네! 사실 브로맨스 컨셉은 꽤 위험해서 거절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그럼 내일부터 그런 식으로 촬영해 보자고! 오늘분 촬영은 아까 컷으로 마무리 지었으니, 두 사람 다 푹 쉬도록 해요.”
승효로부터 만족스러운 답변을 이끌어 낸 박민종 PD는 벌떡 일어나더니 평상에서 벗어나 연출진 쪽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꺄악!”, “정말요?” 등등의 말들이 들려왔다.
이준은 왁자지껄한 연출진 무리 쪽을 힐끔거리다 승효를 황당하게 바라봤다.
“왜 그랬어?”
이준이 묻자 승효가 그를 응시했다.
밤하늘 아래로 보이는 승효의 연갈색 눈동자가 시야로 들어온다. 이준은 불만에 찬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다 우리 사이 들키면 어쩌려고?”
승효는 걱정을 담은 이준의 물음에 눈꼬리를 휘었다.
“오히려 대놓고 붙어 있는 게 위험성이 적지 않을까요.”
승효는 말했다.
“안 그래도 보는 눈이 많아서 선배님이랑 ‘의식’을 치르려면 고생을 해야 하는데, 차라리 아예 붙어 있는 편이 더 편할지도 모릅니다.”
“…….”
“게다가 박 PD 저 사람, 한번 마음먹은 일은 끝까지 추진하는 사람이에요. 아마 선배님이 싫다고 하셨으면 조작을 해서라도 그런 장면을 만들었을 겁니다.”
이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도 되는 거야?”
승효는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안 되는 일이니 차라리 대놓고 떠본 거겠죠. 뒤탈 안 나게 처음부터 그런 컨셉으로 가 달라고 말이죠.”
“…….”
“게다가 우리 쪽도, 짜깁기를 당할 바엔 대충 장면을 만들어 주는 편이 편집하기 쉬울 테니 서로서로 나쁠 건 없습니다. 하니 선배님도 너무 어렵게 생각 마세요. 그냥 저 사람들이 원하는 장면을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되니까.”
이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승효에게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난처해졌다.
‘너야 연기겠지.’
돌연 심장이 뛰었다.
쿵쿵, 일정한 리듬으로 뛰던 심장이 구승효를 바라보고 있자니 더욱 크게 들썩였다.
‘커플 연기라니…….’
일상생활을 그대로 보여 주면 된다 해서 가볍게 생각했는데, 이 프로그램의 참여는 아무래도 제 발등을 찧은 짓이 분명하다.
‘버틸 수…… 있으려나?’
이준은 숨을 삼켰다.
“못 버텨!”
이준은 벌떡 일어났다.
잠자리가 바뀌었던 까닭인지, 아니면 밤새도록 떠나지 않는 ‘누군가’에 대한 생각 때문인지.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드르렁― 드르렁―.》
정확히는 제 곁에서 형체도 보이지 않은 채 코를 골고 있는 양랑 때문이려나.
‘돌아 버리겠군.’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주룩주룩 비까지 내려 아직 컴컴하기 그지없는 충북 단양 신계 마을의 가장 높은 언덕에 있는 집에서 눈을 뜨게 된 이준은 결국 방을 나섰다.
끼익.
오늘 촬영은 오전 7시쯤부터 개시될 예정이었기에 제작진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준과 승효가 머무는 집과 100M 정도 떨어진 집 하나와 신계 마을 마을회관 근처의 집 하나를 빌려 지내는 상태였다.
‘동요하지 마, 차이준. 별거 아니잖아.’
연기야.
여태껏 그랬던 대로, 연기를 하면 돼.
‘연기를…… 제길.’
할 수 있겠냐고.
어젯밤부터 도통 사라지지 않는 승효의 모습에 심장의 뜀박질 횟수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방문을 열고 나와 차디찬 새벽 공기를 맞은 이준은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망할.’
근래 이준은 때아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일로 인해 밤잠을 줄곧 설치는 중이다.
푸드덕.
그때였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 여기던 그의 귀에 무언가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이준의 눈동자가 큼지막해졌다.
‘저건…….’
축축한 기운이 가득한 마당의 담장 위에 웬 반짝거리는 것이 있었다.
눈을 비비며 다시 보니, 태양처럼 빛나는 금색 깃털을 지닌 무언가가 보였다.
꼬끼오!
그리고 그것이, 붉은 벼슬을 지닌 닭임을 알아차린 것은 조금 후의 일.
[우리 신계(神鷄) 마을은 말이지요, 하늘의 닭이 크게 울부짖어 생긴 마을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상징도 바로 금색 닭이지요!]
이준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신계?’
크게 울음소리를 낸 금색 깃털의 닭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를 어딘가로 인도하기 위해 기다리는 눈치였다.
이준은 그런 닭을 쫓기 위해 제대로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닭이 서 있던 담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끼이익.
“어라? 차휘 씨?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슬슬 동이 틀 무렵이 됐는지, 제작진이 닫혀 있던 파란 대문을 열고 나타났다.
문소리에 놀란 이준이 다시 담장 쪽을 응시했을 땐, 이미 금색의 닭은 사라지고 없었다.
쏴아아―.
<함께 가자!>의 촬영 이튿날.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촬영은 계속됐다.
이준과 승효는 신계 마을 장 이장의 소개로 마을 회관에 모인 어르신들과 만남을 가졌다.
“색시는 우리 신랑이랑 언제 결혼한 겨?”
이준의 등장에 소녀처럼 꺅꺅 소리를 지르던 황씨 할머니부터 시작하여, 다른 어르신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옥수수와 감자, 그리고 고구마 등을 얻어 숙소로 돌아갈 때였다.
“예?”
이준은 갑자기 제 옷깃을 잡아끄는 한 할머니의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알록달록한 몸빼 바지에, 회색 재킷을 입은 할머니가 분홍색 모자를 쓴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을 회관에 이런 할머니가 있었던가?’
“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이준의 질문을 받은 분홍 모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혀 봐. 색시랑 신랑, 둘이 언제 결혼한 겨?”
잠시 당황한 건 사실이지만 이준은 곧 싱긋 웃었다. 영업용 미소다.
“하하, 할머니. 저 남잔데요. 색시가 아니라요. 그리고 아무하고도 결혼 안 했어요.”
“그럼 아까 그 총각이랑 결혼한 게 아녀?”
“네.”
“그려? 이상허구먼. 분명 두 사람은 함께할 팔잔디…….”
“차휘 씨! 안 가세요?”
아.
“할머니, 죄송하지만 다른……!”
이미 숙소로 돌아간 승효와는 달리, 멀리서 저를 부르는 제작진의 말이 들리자 이준은 자신을 붙잡은 할머니에게 양해를 구하려 했다.
하지만 분명 조금 전까지 그의 앞에 있던 분홍 모자 할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렸고, 의아함을 느끼던 그는 곧 한 번 더 외치는 제작진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 이준이 저를 기다리느라 늦은 제작진과 함께 숙소로 도착할 때였다.
“어떡해. 이를 어떡하면 좋죠?”
“경찰엔 신고했어?”
“오늘 새벽에 폭우 쏟아진 거 기억하시죠? 그 때문이기도 하고, 지금도 비가 그치질 않아서 바로 접근하기가 힘들대요.”
“일단…… 계속 연락해 봐.”
대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분위기가 사뭇 무거웠다.
“왜 그래?”
먼저 출발했던 승효 역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던 터라, 이준이 그런 승효에게 다가가 묻자, 뒤늦게 이준을 발견한 승효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부터 제작진 한 명이 연락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