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59화 (60/72)

59화

남굴(南窟) (8)

“걱정 마슈. 우리도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으니 곧 소식이 있을 거유.”

걸걸한 목소리의 남자가 굳은 안색의 박 PD를 위로했다.

박 PD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왠지 힘이 없어 보였다.

[내일 촬영을 위해 어젯밤 답사를 나갔던 제작진 한 명이 새벽에 내린 폭우로 고립이 된 모양이에요. 동이 틀 때까진 연락이 됐는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라고 하는군요.]

신계 마을에서의 촬영 둘째 날.

오후 4시를 넘겼을 때, 돌연 촬영이 중단됐다.

촬영 사흘째 때 수행할 프로그램 속 코너를 위해 사전 답사에 나섰던 한 스태프가 무려 12시간이 넘게 연락이 되지 않고 있어서다.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헬기를 보내서라도 사람을 찾아야죠! 정말로 오늘 새벽 산사태랑 관련이라도 있으면 어쩌려…… 이봐요? 젠장, 끊겼어!”

어두운 얼굴의 박 PD와 함께 주변의 제작진들은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이준과 승효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제작진들을 응시하다 서로를 바라봤다.

“승효 씨.”

“네.”

“혹시 나랑 같은 생각이야?”

그러자 승효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이곳, 신계 마을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여긴…… 요기가 너무 강해요.”

“그렇지? 내가 시골을 그리 많이 가 본 건 아니지만, 하급 비생들도 너무 많이 봤어. 어제 괴황지를 몇 장이나 썼는지 몰라.”

“다른 이상한 점은 못 느끼셨습니까?”

이상한 점?

곰곰이 생각하던 이준이 아,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나 오늘 아침에 이상한 걸 봤어.”

“이상한 거요?”

이준은 곧 새벽에 자신이 목격했던 금색 닭에 대해 알려 주었다.

“신계……. 정말로 신계였습니까?”

나지막하게 중얼대던 승효가 묻자 이준은 대꾸했다.

“확실하진 않아. 나도 기록에서 어렴풋이 본 것뿐이고, 이 마을 이름이 신계라고 해서 의심한 거니까.”

“…….”

“그렇다고 신계가 제작진을 납치했다고는 확신할 수는 없어. 보통 닭은 액을 막아 주는 존재잖아. 게다가 이 마을의 하급 비생들은 시끄럽긴 해도 인간들과 어울려 살아온 것 같았고.”

지금은 이준이 보호진을 만들어 결계를 잔뜩 쳐 놓았기에, 숙소 안에 있던 하급 비생들이 죄다 쫓겨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태가 아니었더라도 하급 비생들이 이준 일행에게 달려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말투만 무시무시하지, 인간에 대한 악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신계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인간의 눈앞에 나타나곤 하죠.”

승효의 중얼거림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다시 승효를 불렀다.

“승효 씨.”

“그렇게 하죠.”

이준이 다음 말을 잇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승효가 대꾸하자 이준은 피식 웃었다.

‘이젠 굳이 길게 설명 안 해도 되는 사이라 이건가.’

그는 한 번 더 승효와 눈빛을 주고받은 후 밖으로 나가 초조하게 핸드폰을 붙들고 있는 박 PD에게로 다가갔다.

“PD님.”

“어, 소식 있…… 아, 차휘 씨. 승효 씨.”

흠칫 놀라던 박 PD는 혹시나 다른 소식이 있을까 멈칫하다 실망한 눈치였다.

“나리 씨 일에 차도가 있나요?”

이준이 묻자 박 PD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어떻게 된 건지 연락도 안 되네요. 배터리가 나간 걸까?”

“경찰은 뭐래요?”

박 PD는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지원을 보내 주기는 할 건데, 지금 당장은 힘들다는군요. 산사태 때문에 길이 막혀서 몇 시간은 더 걸릴 것 같다면서……. 이런 일엔 시간이 중요하니, 계속 연락을 취하면서 수색 작업을 시작할 거면 먼저 해도 좋다고 하더군요.”

“…….”

“미안해요. 갑자기 이렇게 돼서. 이거 촬영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이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촬영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요. 그것보다, 수색 작업을 시작할 생각이십니까?”

박 PD가 말했다.

“경찰 말대로 빠른 수색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정말 찾기 어려울 수 있으니, 급한 대로 우리라도 나리 씨를 찾아 나서야 할 것 같아요.”

“…….”

“참, 두 사람은 여기서 잠깐 대기해 줘요. 우리가 금방 나리 씨를…….”

“그러지 말고, 저희도 같이 수색에 참여할게요.”

박 PD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승효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말씀이 맞습니다. 사람이 우선이지, 촬영이 우선이 아니니까요. 마냥 대기하고 있을 바엔 도움이 되는 게 낫죠.”

“두 사람의 성의는 고맙지만 출연자들한테 그런 일까지…….”

“PD님.”

이준이 나섰다.

“인명 피해는 막아야죠. 어제 산사태 때문에 안 그래도 수색이 어려울 텐데, 한 손 거들고 싶습니다.”

“그럼 우리는 서쪽으로 갈 테니, 지호 너네는 동쪽으로 가 봐. 계속 무전 치는 거 잊지 말고!”

오후 5시.

비를 담은 먹구름에 가려진 해로 인해 고민하던 제작팀이 결정을 내렸다.

현재 실종된 동나리 AD의 수색 작업을 개시한 것이다.

촬영을 중단한 채 수색에 나선 무리는 총 세 무리였다. 먼저 마을을 둘러싼 산을 중심으로 수색을 하기로 한 서쪽 무리와 파란 대문의 숙소를 지키며 다른 관계자들과 연락을 취하기로 한 숙소 팀, 마지막으로 마을 주민들과 함께 전반적으로 마을을 돌아보기로 한 동쪽 무리가 그들이었다.

이준은 승효와 함께 박 PD가 이끄는 서쪽 무리에 속해 있었다.

“비도 오고, 땅도 미끄러우니 다들 조심해요! 나리 씨 보면 바로 무전 하고!”

비옷을 입고 수색을 시작한 박 PD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준은 승효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기 전, 제 뒤를 따르고 있을 양랑을 불렀다.

“양랑.”

《말해라, 주인.》

조금 전, 승효로부터 영기를 받았던 상태라 그런지 이준의 귀걸이는 보랏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제 앞에 현신한 양랑에게 명했다.

“혹시 모르니 PD님이랑 다른 팀원들 신변 좀 보호해 줘.”

《그럼 주인은 누가 지킨단 말이냐?》

“나한텐 승효 씨가 있잖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던 이준은 “뭐?” 하고 한 번 더 되묻는 양랑의 반응에 흠칫 놀랐다.

‘이런.’

너무 자연스러운 말에 뒤늦은 당혹감이 일었다.

괜히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던 이준이 승효 쪽을 힐끔대자, 승효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준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그러니까 내 말은…….”

“알고 있습니다.”

승효는 우비 속에서 엷은 미소를 지은 후 앞서갔다.

‘뭐, 뭘 알고 있는 건데?’

이준은 당황했지만 더는 말할 수 없었다.

* * *

“동쪽 마을 팀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그쪽에선 나리 씨를 못 찾겠대요!”

두 시간 뒤.

숙소 뒤편의 산길로 동나리 AD를 찾아 헤매던 이준의 귀에 무전을 받은 제작진의 외침이 들렸다.

수색팀의 마음이 더 급해졌다.

“동나리 씨! 어디 있어요?”

“나리 선배! 선배님!”

“나리야! 들리면 말해, 나리야!”

어느새 컴컴해진 주변에는 빛이라곤 존재하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쏟아져 온몸이 축축해진 지 오래.

“동나리 씨! 동나……!”

플래시를 든 채 비를 뚫고 나아가던 이준은 제 손목을 덥석 잡아채는 누군가의 손길에 비틀거렸다.

“요기가 느껴집니다.”

이준은 저를 잡아끄는 승효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양랑.”

《그래. 나도 느껴진다. 11시 방향이야.》

이준은 1시 쪽을 수색 중인 제작팀원들 쪽을 바라보다 승효와 함께 몸을 옮겼다.

“동나리 씨!”

“나리 씨, 소리 들립니까?”

“나……!”

요기가 느껴지는 11시 쪽으로 올라가던 이준과 승효, 그리고 양랑은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투두두두.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이 조금 더 거세졌다.

이준은 쉬지 않고 흐르는 비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검은 형체에 움찔했다.

“봤어?”

“네.”

《봤다.》

“무전기는?”

“제가 들고 있습니다.”

“그럼 얼른 불러. 동나리 씨가 여기 있다고.”

이준의 말에 승효가 1시 쪽을 수색하던 제작팀을 불렀다.

“정말이야? 승효 씨, 진짜 나리 씨를 찾았어?”

허겁지겁 달려온 박 PD와 그 일행이 플래시를 쏟으며 외치자 이준은 동굴로 보이는 구멍 앞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검은 형체를 가리켰다.

“동나리 씨가 맞습니까?”

“맞지! 현석아, 빨리 애들한테 연락해! 나리 찾았…….”

스륵.

몇 시간 동안의 수색 끝에 드디어 실종자를 찾아낸 박 PD는 기쁨에 겨워 그녀에게 다가가려다 갑자기 앞으로 쓰러졌다.

사락. 투드득.

연이어 박 PD와 함께 움직였던 수색팀원들이 차례로 쓰러지자 이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요기다! 그것도 아주 강한 요기야!》

갑작스러운 상황을 인지한 양랑이 크게 외쳤다.

뚝. 뚝. 뚜욱―.

요란스레 내리던 비가, 돌연 자욱해진 안개와 섞이며 어느 시점 이후로 멈추기 시작했다.

이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

그의 오른편에 서 있던 승효의 손이 잡히자, 이준은 있는 힘껏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승효를 향해 속삭였다.

“튀어야 할까?”

승효가 그런 이준을 바라보며 쓰고 있던 우비의 후드를 벗으려던 순간이다.

번쩍!

두 남자의 발 앞에 돌연 번개가 치더니―.

놀라 눈을 감았다 뜬 이준과 승효의 눈에, 분명 1초 전까지만 하더라도 존재하지 않던 커다란 팻말이 나타났다.

<삶과 죽음의 경계, 명계(冥界)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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