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남굴(南窟) (9)
‘명계?’
이준은 눈앞에 놓인 커다란 팻말을 향해 저도 모르게 다가갔다.
“선배님!” 하고 곁에 있던 승효가 그를 불렀으나 이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명……계.’
또 다른 말로는, 저승.
사람이 죽으면 간다는 영혼의 세계를 일컫는 그 단어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이준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선배님.”
어느새 이준의 곁으로 다가온 승효가 그를 불렀다.
“비가 그쳤습니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 내리던 빗방울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승효 씨.”
이준이 입을 열었다.
“승효 씨 생각엔 여기가 아까 그 장소 같아?”
코웃음이 나왔다.
‘그 번개 때문이야.’
조금 전, 이준이 동나리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내리쳤던 번개 이후로 주변 환경이 바뀌었다.
이준, 그리고 승효와 함께 동나리를 찾던 박민종 PD를 포함한 수색팀원들은 온데간데없다.
바로 그 번개가 내리친 시점 이후로, 이준과 승효는 현실 세계와는 다른 곳으로 와 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들은 적이 있어. 대한민국 어딘가에…… 저승으로 향하는 입구가 있다고.”
그것이 이곳일 줄 누가 알았겠냐고.
이준은 뒤를 돌아보았다.
분명 번개가 치기 전까지만 할지라도 존재했던 산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그들의 앞에 놓인 길은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저 동굴로 향하는 길만이 유일했다.
그것도 ‘명계’의 입구임이 분명한 팻말이 박혀 있는 저 길.
“돌아갈 수 있을까?”
이준이 중얼거리자 누군가 대답했다.
“소용없을 거다.”
이준은 아주 선명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익숙했는데, 홱 고개를 돌린 순간 더욱 당황했다.
“양랑?”
이준은 동나리를 찾기 위해 승효로부터 영기를 받아 양랑을 현신화 한 상태였으므로 적지 않은 영기를 소모했다.
하여 지금쯤 그의 몸은 사라져야 하건만, 어찌 된 셈인지 현재 양랑은 평소보다― 아니, 평소 이상으로 강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다.
거대한 몸짓으로 부르르, 몸을 털던 양랑이 적색 눈동자로 이준을 내려다보았다.
“너희가 명계의 문을 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일지니……. 이는 곧 명주(冥主)께서 너희를 부르셨다는 뜻이다.”
뭐?
“하니 명주를 뵙지 않고서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순 없겠지.”
언제나 스스로를 ‘본군’으로 칭하며 두려울 것 없이 행동하던 양랑은 웬일인지 사뭇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말이 머릿속이 아닌 귓속으로 선명하게 흘러들어 온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라고 있던 이준은 짧게 말하고선 동굴로 걸어가는 양랑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명주라면…….”
“명계의 주인을 말하는 걸 겁니다.”
승효는 긴장하는 이준에게 말했다.
“우리도 가 보죠.”
“명심해라. 명계에는 죽은 자들의 영혼은 물론이거니와 너희가 ‘비생’이라 부르는 요괴들이 득실거린다.”
명계의 입구인 동굴에 들어선 이준과 승효를 향해 양랑은 경고했다.
“지상에서는 마음껏 쓸 수 있던 너희의 영기 역시, 이곳에서는 멋대로 쓸 수 없을 거야.”
“그렇다면 어떻게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까?”
승효의 물음에 양랑이 뚝 걸음을 멈추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흑호의 얼굴을 보고도 태연하게 서 있던 승효에게 양랑은 코웃음을 쳤다.
“다행히 본군은 명계에서 지위가 낮지 않다. 인간 둘 정도를 변장시키는 건 일도 아니지.”
“변장?”
“그래. 주인, 넌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본군 같은 위대한 산군을 모시게 되었으니 말이다.”
“모시는 건 너 아니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굳이 이 시점에서 이준이 양랑을 자극할 필요는 없었다.
“……이게 뭐야.”
얼마 뒤, 양랑이 뿜어낸 영기를 고스란히 받게 된 이준과 승효가 입고 있던 옷이 변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흑색 도포에 흑립까지 쓰게 된 이준이 인상을 쓰며 양랑을 응시하자 양랑이 물었다.
“마음에 드느냐?”
“마음에 들 리 없…….”
“네.”
밝은 계열의 의복을 좋아하는 이준과는 달리, 승효는 제 차림이 무척이나 흡족한 모양이었다.
이준은 입을 삐죽였다.
“하긴. 그러고 보니 구가 네 녀석은 이런 옷을 자주 입는 듯했지. 마음에 든다면, 지상으로 올라가서도 입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마.”
“감사합니다, 산군.”
“그리고 주인 너는…….”
승효와 대화를 주고받은 양랑이 저를 바라보자 이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는 뭐, 오늘따라 핏기도 없는 것이 지금 입은 옷과 아주 잘 어울린다.”
이봐. 그거 칭찬이야?
이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양랑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명계로의 길을 힐끔대며 말했다.
“지금부터 주인과 구가 녀석은 본군의 차사가 된다. 명계에 입성하여 명주를 만나기 전까지는, 너희들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돼. 알겠느냐?”
양랑은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가리키며 몇 번이고 이준과 승효에게 경고했다.
승효는 물론 이준까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르릉대며 숨을 흘린 양랑은 다시 앞서갔다.
이준은 과거 손각시를 잡을 때보다 더 저승사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승효를 한 번 바라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
‘뜬금없이 이게 무슨 일이야.’
그는 분명 실종된 제작진을 찾으려고 했을 뿐인데.
‘이상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군.’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폭우가 내리기 시작한 것부터, 제작진이 실종됐던 것, 그리고 신계를 보았던 것까지…….
‘신계?’
[신계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 인간의 눈앞에 나타나곤 하죠.]
하필이면 마을의 이름이 신계라는 점과, 이준이 오늘 새벽 두 눈으로 금색 깃털의 닭을 본 것이 신경 쓰인다.
둥! 둥! 둥!
굳은 얼굴로 그간의 일을 떠올리며 양랑과 승효의 뒤를 따르던 이준은 동굴의 끝, 오색빛깔로 된 결계를 지나자마자 들려오는 북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어 펼쳐진 장면은 이준의 입을 벌어지게 했다.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망천(忘川)의 물, 바로 망천수지요! 명석(冥石) 백 개면 사실 수 있습니다요!”
“백룡의 비늘, 신록의 뿔, 인어의 눈물, 해태의 이빨! 없는 게 없는 만호 상점으로 오세요!”
“어이, 거기. 네놈은 동악신의 부하가 아니냐? 그러고 보니 내 한때 동악신에게 적지 않은 빚을 졌지. 잘 됐군, 오늘 원 없이 갚아 주마!”
“화첩이요! 둘이 보면 셋이 되는 화끈하고 뜨거운 화첩이요!”
맙소사.
명계의 결계를 지나자 시야로 들어온 장면에 눈을 뗄 수 없다.
이준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그것도 그럴 것이 현재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기가 막혔다.
투명한 결계 너머의 하늘은 푸르다 못해 붉었다.
달은 두 개가 떠 있었으며, 놀랍게도 태양 역시 달과 달 사이에 존재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있는 세상 아래엔 마치 조선이나 고려 시대에서나 볼 법한 저잣거리의 풍경이 있었다.
현재 이준과 승효, 그리고 양랑이 걸어가고 있는 거대한 대로에는 양옆으로 저 멀리 보이는 대궐 앞까지 노점이 줄지어 선 상태였는데, 그 노점에서 파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진귀했다.
‘여긴 지옥이라기보다는…….’
그냥 정말, 지상 아래의 세계 같잖아.
[명계가 정말 존재하냐고? 글쎄다, 기록에는 남아 있지만 그것이 실존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기록일 뿐이고, 실제로 명계를 경험한 뒤 살아 돌아온 자들은…… 없으니까.]
16년 전, 부모님을 잃고 그들을 찾으러 가겠다며 외치는 이준에게 태모는 말했었다.
[하지만 비생이 존재하는 한, 명계가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지. 그러나 꿈도 꾸지 마라. 명계는 인간 중에서는 오직 죽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죽지 않은 인간이 명계에 들어선다면, 그자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니까.]
‘영감님. 명계는 정말 존재하는군요.’
그렇다면 혹시…….
[준아.]
스윽.
“그런데 명주께서 대체 왜 너희들을 부르려 한 거지?”
상념에 잠겨 있던 이준은 돌연 말을 거는 양랑을 응시했다.
양랑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코를 찡그리며 중얼댔다.
“명계는 산 자에게는 열리지 않아. 한데 본군이 보기에 너희는 명주의 의도로 그곳에 들어섰지. 이는 분명 명주께서 일부러 너희를 부르셨다는 건데, 어째서…….”
“아랑?”
그 순간.
말을 잇던 양랑이 몸을 움찔거렸다.
“아랑! 너 아랑 맞지?”
이준과 승효, 그리고 양랑이 명계에 입성한 순간부터 그들의 앞에 나타난 푸른색 불꽃을 따라 멀리 보이는 명주의 궁전으로 움직이던 양랑이 돌연 들려온 목소리에 행동을 멈추었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다 사색이 됐다.
“헉! 빌어먹을!”
양랑은 왼편의 한 노점에서 걸어 나오는 웬 여성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고는 천천히 뒤따라오던 이준과 승효를 바라봤다.
“주인. 큰일 났다.”
“큰일?”
양랑이 파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난 안내를 못 할 것 같으니, 이 불꽃을 따라 저기 보이는 금색 문을 통과해라. 그 문을 통과하면 명주께서 안내인을 붙여 줄 거다.”
“산군, 왜 그러십니까?”
“답할 시간도 없어. 본군은 잠깐 피해야겠으니, 볼 일이 다 끝나면 본군을 부르도록 해!”
“산군!”
“어디 가는 거야, 양랑!”
이준과 승효를 자신의 차사로 위장시켰던 양랑이 돌연 꽁무니를 빼며 오른편 샛길로 사라지자, 기다란 곰방대를 들고 있던 적색 의복의 여인이 소리 질렀다.
“아랑, 이 망할 개자식! 거기 안 서? 아랑!”
이준은 자신과 승효의 앞을 가로질러 양랑을 쫓아가는 여인의 뒤를 황당하게 바라봤다.
뭐야.
“일단…… 가야겠지?”
한참이나 양랑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이준이 뒤늦게 정신을 차려 승효에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은 곧 두 사람 앞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는 불꽃을 따라 다시 움직이려 했다.
그때였다.
“이 공자는 어디서 온 누구시길래, 이리도 훤칠하신가?”
이번에는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이준과 승효의 앞에 웬 꽃잎이 흩날렸다.
놀라 눈을 감았다 뜬 이준과 승효의 앞에 검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한 여인이 나타났다.
“풍채가 좋고 눈빛이 그윽하신 게 오늘 밤 소녀의 낭군이 되실 분으로 적합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