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62화 (63/72)

62화

남굴(南窟) (11)

화려하기 짝이 없던 궁전의 복도를 지나 펼쳐진 대전의 모습은 기괴했다.

하늘로 솟을 듯 올라 있는 높은 보좌 주변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용암이 존재했다.

이어 보좌 주변을 지키고 있는 두 명의 장수들은 4층짜리 건물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기골이 장대했는데, 마치 마귀를 연상케 할 만큼 험악한 외모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뿐인가.

“살려 줘!”

“잘못했어요!”

“죽기 싫어. 여기서 죽기 싫어!”

흐르는 용암 사이로 언뜻 보이는 팔과 다리는 인간의 것인지, 아니면 비생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까맣게 탄 상태였다.

과연 명계.

또 다른 말로는 ‘지옥’이라 불리는 이곳의 주인은 대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은 이준을 기함하게 하기 충분했다.

“뭐 하고 있지? 명주께 인사를 올리지 않고!”

이준과 승효가 보좌 위의 존재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자, 그 모습을 불만스럽게 여긴 검은 가면의 사내가 꾸중했다.

“차, 차이준이 명계의 주인을 뵙습니다.”

“구승효입니다.”

닦달에 못 이긴 이준과 승효가 차례로 인사하자 보좌 쪽에서 소리가 났다.

푸드덕!

아니, 정확히는.

‘날갯짓…… 소리.’

조금 전 보좌 위의 존재와 눈을 마주치고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던 이준은 다시금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몇 번을 보고, 다시 또 보아도 이준의 시야로 들어온 금색 깃털을 지닌 ‘무언가’는 변하지 않는다.

말도 안 돼.

‘역시 그 닭이잖아!’

이준의 눈에 비친 보좌 위의 존재, 즉 명계의 주인이라는 자는 어딜 봐도 금색 깃털을 지닌 닭이었다.

그것도 오늘 새벽, 이준이 담장 위에서 보았던 바로 그 닭!

[꼬끼오!]

머리를 울리던 닭 울음소리가 귀를 맴돈다.

이준은 마치 쿡쿡 웃기라도 하듯 푸드덕대는 금색 깃털을 지닌 닭의 행동에 괜히 긴장했다.

《하나는 놓지 못하고, 하나는 떠올리지 못하니……. 과연 재미있는 녀석들이로군.》

그때였다.

새벽녘의 이슬처럼 청아한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닭의 형태를 지닌 명계의 주인이 말을 한 것이 분명했다.

‘놓지 못하고 떠올리지 못한다고?’

이준은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는 그 말에 멍하니 보좌 쪽을 응시했다.

그러자 붉은 닭벼슬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어서 오거라, 지상의 인간들이여. 본주가 바로 그대들을 명계로 부른 명주이니라.》

금색의 닭, 그러니까 신계의 형상을 한 명계의 주인이 콕콕, 부리를 앞으로 쪼아 댔다.

이준은 커다란 보좌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신계의 모습에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제 옆의 승효에게 낮게 속삭였다.

“승효 씨. 그러니까 명계의 주인은…… 정말로 닭인 거야?”

승효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이준을 내려다봤다.

‘아니야?’

이준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보좌 쪽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흥미롭군. 그대의 눈에는 본주가 신계의 형상을 하고 있나 보지?》

작게 말했는데 그게 들렸어?

“무엄하다! 감히 명주님을 뵈며 그런 저급한 생각을 하다니!”

보좌 아래에 있던 두 명의 무장들이 이준의 몇백 배는 되어 보이는 창을 휘두르려 하자, 이준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명주가 그들을 막았다.

《괜찮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야.》

이어 날개를 파닥이던 명주가 말을 이었다.

《본주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냐 하는 것은 본주를 마주하는 자에 따라 다르다. 그대 옆의 인간에게는 본주가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대는 그대가 보았던 가장 신성한 것으로 본주를 보고 있는 거겠지. 하니 무례한 것은 아니다.》

이준은 이해한다는 듯 대답하는 명주를 힐끔대더니 고개를 들었다.

“한데 어째서…… 저희를 이곳까지 부르신 거죠?”

철컥!

“감히 명주께서 허하지 않으셨는데 먼저 입을 열다니!”

“참으로 무례한 자로다!”

이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겨우 화를 억누르던 두 장수가 다시금 얼굴을 구겼다.

어찌나 험악한지, 매일 비생을 보고 담이 커진 이준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까무러쳤겠지.

신묘한 닭은 그런 자신의 호위들을 말리고선 웃으며 이준을 내려다봤다.

《본주가 그대들을 부른 것은, 그대들에게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부탁하고 싶은 것이요?”

닭의 머리가 아래위로 흔들렸다.

닭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부리를 움직였다.

《그 전에 먼저 설명을 해야겠지.》

신계는, 아니 명주는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말을 잇기 시작했다.

《오래전, 본주에게는 훌륭한 부하가 하나 있었지. 그는 본주와 함께 명계를 호령하며 악한 것을 처벌하고 선한 것은 바른 곳으로 인도하는 자였다.》

이준은 명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가 변했다.》

명주는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본주의 명을 거역하고, 날이 갈수록 잔꾀를 부리더니…… 결국엔 본주를 배신하고 지상으로 올라갔지. 그것이 벌써 수천 년도 전의 일이다.》

이준은 예기치 못한 명주의 말에 승효를 힐끔댔다.

승효는 무슨 생각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명주의 말을 듣고 있는 듯했다.

《그간 본주는 명계의 많은 병사를 보내어 그를 다시 명계로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지상으로 올라간 그는 힘을 축적했고, 본주의 손을 벗어나 버렸지.》

‘하긴. 명계의 주인이 산 자들의 세상에서 힘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으니까.’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명계의 주인이 일부러 저와 승효를 불러,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예상이 된다.

이준은 숨을 고르는 명주를 응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지상의 인간들이 늘어나고, 그 피해를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안타깝게도 본주는 명계 밖을 나설 수가 없으니 그를 막아 줄 이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 그리고…… 너희들이 나타났다.》

명주의 검은 눈이 붉게 번뜩였다.

《본주는, 너희에게 그를 붙잡아 명계로 데려와 줄 것을 부탁하고 싶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명계에서 명주 다음으로 강력했던 한 인외 존재가 지상으로 도망을 쳤고, 명주는 그런 존재를 포획해 오기를 이준과 승효에게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말이 돼?’

이준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긴.

이준과 승효 일행이 실종자를 찾다 돌연 명계에 온 것도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실소를 삼킨 이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과 승효를 내려다보고 있는 명주를 똑바로 바라봤다.

“명주님, 실례를 무릅쓰고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실례가 되는 발언이라면 하질 마라!”

“감히 명주께 무례한 발언을 하겠다는 게냐?”

명주의 두 호위들은 아무래도 이준을 아니꼽게 보는 것이 틀림없는지, 이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지적하며 소리쳤다.

명주가 손을 들지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말하거라.》

분명히 닭의 형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인자해 보이는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이준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 속에 든 말을 쏟아냈다.

“명주님의 말씀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저희는 그저 인간일 뿐입니다.”

물론 꽤나 강력한 영기를 소유하고 있는 인간이긴 하지만.

“명주님께서 한때 신뢰하셨던 부하인데다, 어쩌면 수천 년 동안 강력한 요기를 쌓았을지도 모르는 녀석을 저희가 어떻게 만나겠습니까? 하니, 저희 말고 다른 자들을 찾아보시는 게 어떨까요.”

돌려 말하기는 했으나 한마디로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는 발언이었다.

그러자 명주가 다시금 웃었다.

《하지만 그대는 이미 그 녀석을 만난 적이 있다.》

“……네? 윽!”

명주가 강하게 날갯짓을 하자, 금빛 기운이 이준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달려든 그 기운으로 인해 뒷걸음질 치던 이준은 이마 한가운데가 강하게 쓰려 오는 것을 느꼈다.

대체 왜 이런…….

《네 이마에 새겨진 그 표식은 한때 본주의 부하였던 녀석의 것이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통증에 이를 악물던 이준은 명주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자신이 입술을 덜덜 떨고 있다는 사실도 자각하지 못한 이준이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묻자, 명주는 대답했다.

《말 그대로다. 그 녀석은 오래전, 네 이마 위에 그 표식을 심어 놓았고 그 때문이라도 너는 반드시 녀석과 다시 만날 예정이지.》

“…….”

온몸을 흐르던 피가 차갑게 굳는다.

그놈이다.

[너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이준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현재 명계의 주인이 언급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뒤늦게 알아차린 이준의 검은 눈이 냉정하게 가라앉았다.

이준은 그와 명주의 대화를 그저 지켜보고 있는 승효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라.》

“제가 눈을 뜬 곳이 명계라는 곳을 알고, 가장 먼저 찾고 싶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혹시…….”

《없다.》

명주는 단호하게 이준의 말을 끊어냈다.

이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자 명주는 다시 말을 덧붙였다.

《본주가 알고 있기로, 그대가 찾는 이들은 명계엔 존재하지 않아.》

이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죽은 자들이 인도되어 향하는 곳에, 그분들의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체…….’

《하나 방법이 없지는 않지.》

명주는 말을 이어갔다.

《그대가 찾는 이들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라도, 그대는 그를 내게 데려와야겠군.》

신계가 웃기라도 하듯 부리를 앞으로 콕콕 찧었다.

얼굴을 굳히던 이준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하,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급한 이준의 외침을 들은 명주가 흔쾌히 대답했다.

《무엇이지?》

이준은 아주 잠시 망설이다 미동 없는 승효 쪽을 흘긋거렸다.

‘내 일에 구승효를 엮이게 해선 안 돼.’

마음을 먹은 이준이 입을 열었다.

“저와 함께 온 친구는 그자의 일과는 무관합니다.”

《무관?》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부득이한 사정으로 저와 함께 명계까지 온 것이니, 부디 그자를 명계로 보내는 일에 이 친구는 엮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흐응…….》

명주는 그 말을 뱉어 낸 이후 저를 똑바로 응시하는 이준을 한동안 내려다보더니 이어 승효에게 물었다.

《그대도 동의하는가?》

승효는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일언반구도 없었다.

답답해진 이준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명주님. 이 친구는…….”

《본주가 보기에는 그대 곁의 사내는 이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거늘. 아니. 오히려 그대보다도 더 관련이 있어.》

“예?”

이준은 명주의 대답에 놀라 승효를 바라봤다.

‘관련이 있다고?’

승효는 저보다 더 딱딱해진 얼굴로 명주가 앉은 보좌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깐. 그럼 설마…….

‘구승효한테도 그 표식이라는 게 있는 거야?’

조금 전 제가 느꼈던 고통만큼이나 쓰린 통증을 승효 역시 느낀 건가?

이준은 서둘러 승효를 아래위로 훑었으나 그의 안색엔 변화가 없었다.

《시간이 됐군.》

명주가 중얼거렸다.

《잊지 말거라. 그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존재한다.》

“예?”

《하여 그대에게……, 잘…… 란다.》

잠깐.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게 무슨 뜻입니……!”

팟!

명주에게 소리치려던 이준의 눈앞에 돌연 섬광이 번쩍였다.

“……님……. ……우님!”

그 강렬한 빛으로 인해 질끈 눈꺼풀을 감았던 이준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성에 인상을 썼다.

“배우님! 괜찮으세요, 배우님?!”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눈가가 퉁퉁 부은 상태로 저를 내려보고 있는 태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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