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63화 (64/72)

63화

남굴(南窟) (12)

“배우님, 정신이 드세요?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태경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이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경……이?”

“하아, 배우님!”

태경은 이준을 끌어안았다.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느껴져 이준은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다고요! 한동안 안 깨어나셔서 어찌나 염려했는지……. 몸은 좀 어떠세요? 움직일 만하세요? 정말 괜찮으신 거죠?”

태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리치고 또 소리쳤다.

‘어……떻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서울에 있어야 할 태경이 제 앞에 있는 건지, 또 어째서 그는 이리도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건지.

[혹시 온달 동굴이라고 들어 보셨어요? 배우님과 구 배우님, 그리고 박 PD님과 동 AD님이 발견되신 곳은 온달 동굴로부터 300M 정도 떨어진 산길이었대요. 관계자분들 말씀으로는 동굴 주변에 그런 길이 있는지도 몰랐다는데…… 어쩌다 그런 곳까지 가시게 된 건지 기억, 안 나세요?]

충북 단양의 온달 동굴 근처는 유명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었다.

정해진 출입구 외의 길은 존재하지 않건만, 어떻게 근처까지 가게 됐냐며 어리둥절해하는 태경과 다른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당신들이 지옥이라 알고 있는 세계의 맛을 보고 왔지 뭡니까.’

이준은 비 오는 산골짜기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네 명의 남녀를 발견하고 기함하는 줄 알았다며 숨을 토해 내는 태경을 달래느라 한동안 곤욕을 치러야 했다.

“자자, 해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은 촬영은 다 끝내야죠! 오늘 게스트들도 오기로 했으니 다들 힘냅시다!”

총 5일간 예정되었던 <함께 가자!>의 촬영이 조금 지체됐다.

이틀째 발생했던 AD의 실종 사건과 출연진과 주요 제작진이 수색을 나섰다가 몇 시간 동안 의식을 잃었던 사건이 겹쳤기 때문이다.

덕분에 하루 더 신계 마을에서 묵어가게 된 이준 일행은 그들을 찾아온 두 명의 게스트, 출신의 조명우와 그룹 ‘미스틱’ 출신의 이세현이 합류하면서 점차 활기를 띠었다.

“다들 고생 많았어요! 이거 생각 이상으로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올 것 같네!”

그리고 촬영 마지막 날인 6일째 오후 4시.

신계 마을에서의 촬영이 드디어 끝이 났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아. 내가 영험한 기운이 좀 있는데, 우리 프로그램에 귀신이 한 번 나타난 것 같단 말이지?”

“귀신이요? 에이, PD님. 이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요.”

“왜. 촬영 둘째 날 기억 안 나? 그때 갑자기 동 AD가 실종돼서 사람들이 다 동 AD 찾고 난리 났었잖아. 그런데 알고 보니 동 AD는 실종된 적도 없었고, 오히려 우리랑 연락도 됐었다고 했었지. 이야, 다시 얘기만 해도 섬뜩하네. 어떻게 한쪽은 연락을 받았다고 하고 한쪽은 연락을 못 받았던 거지?”

“그냥 혼선이겠죠. 신계 마을이 워낙 산골짜기에 있어서…… 귀신이랑 거리가 멀다니까요?”

“하하, 귀신을 안 믿는 건 이해가 가지만, 어쨌든 소름 끼친 건 사실이잖아. 기이한 일이 일어난 걸 보면 틀림없이 좋은 징조라고!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차휘 씨?”

“…….”

“차휘 씨?”

“아……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박민종 PD와 함께 마지막 촬영에 대한 모니터링을 하던 중 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이준이 정신을 차려 박 PD를 응시하자 그가 웃으며 “우리 프로그램 대박 난다고 말하고 있었죠!”라고 외쳤다.

이준은 옅게 미소 지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완성본이 기대되네요.”

“제발회는 아마 7월 말쯤 열릴 거예요. 그 전에 회식 문제로 연락 한 번 드릴 테니 외면하지 마요!”

박 PD를 비롯하여 다른 제작진들 역시 저마다 마지막 말을 던지며 이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에게 일일이 화답한 이후 태경이 기다리고 있는 밴으로 걸어간 이준은 자신이 다가오자 열리는 문을 응시했다.

“…….”

밴 안에는 이미 선객이 존재했다. 이준은 승효의 연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잠시 한숨을 내쉬더니 곧 밴 안으로 올라탔다.

“출발하자. 피곤해.”

* * *

신계 마을에서의 둘째 날 이후, 이준은 거의 대부분의 상황에서 넋이 나가 있었다.

다행히 이준은 빼어난 연기자였고 자신의 본심 따위는 충분히 숨길 수 있었기에, 태연한 척, 첫날 카메라 앞에서 보여 준 대로 행동하기는 했다.

그러나 아마 이준을 잘 아는 이가 있었다면 긴장한 그의 모습을 충분히 눈치챘을 거다.

하면 어째서 그리도 혼을 빼고 지냈던 거냐고?

[그대가 찾는 이들은 명계엔 존재하지 않아.]

명계의 주인이라는 자는 말했다.

[잊지 말거라. 그는 생각보다 가까이에 존재한다.]

이준에게 믿기 힘든 대답을 해주었을 뿐 아니라, 충격적인 발언까지 건넸다.

이준은 고개를 아래로 내려 제 손에 들려 있는 것을 응시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원형으로 된 작은 거울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게 뭐냐?》

“……!”

어느새 이준에게 다가온 양랑이 툭 말을 던지자 이준이 입을 열었다.

“노느라 직무 태만한 뚱냥이에게는 알려 주고 싶지 않네.”

《며, 몇 번을 말해? 본군은 논 것이 아니라 천적을 피해 도망친 거라니까?》

양랑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지만 이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양랑은 다시 말했다.

《한데…… 이상하군. 그건, 주인의 것이 아닌걸?》

“맞아. 명계의 것이야. 정확히는 명주의 것.”

《아아, 난 또. 어쩐지, 익숙하다 생각했…… 뭐? 누구 거라고?》

[그것은 진경(眞鏡)이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쓸모가 없겠지만, 후일 그대가 그를 인도하는 데 도움을 줄 터. 사용법은 때가 되면 자연스레 알게 될 터이니 그것을 요긴하게 쓰길 바란다.]

기함하는 양랑을 보고도 이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만일 이게 없었다면…… 그곳으로 갔던 게 모두 꿈이라 생각했었을지도 모르겠군.’

기이하다 못해 무서운 꿈이었다.

명계의 입구였던 온달 동굴과 멀지 않았기에, 이준은 생각지도 못한 세상에 발을 디뎠다 밖으로 나왔다.

현실로 돌아온 지금, 그곳에서의 일을 증명해 주는 것은 손위의 거울이 유일했다.

《명주께서 주인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그것도 명계의 거울을?》

이준은 “믿을 수 없어!” 하고 외치고 있는 양랑의 말을 무시한 뒤 일어났다.

《어디 가!》

양랑이 외쳤지만 이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엿새 간의 촬영을 끝낸 이후 돌아온 집은 포근하기는커녕 웬일인지 갑갑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도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총 두 가지 이유일 터.

죽은 영혼들이 머물러야 할 명계에 이준의 가족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승효를 의미심장하게 거론하던 명주의 말 때문이다.

‘참고 있다가는 병 나지.’

결심한 이준은 어느덧 도착한 승효의 방문을 향해 팔을 뻗었다.

똑똑.

“승효 씨, 있어?”

곧 달칵 문이 열렸다.

“선배님.”

짧은 촬영이었지만 체력 소모가 심했던 터라 승효 역시 피곤한 얼굴이었다.

“들어가도 돼?”

이준이 묻자 승효는 잠시 주저하더니 곧 몸을 비켜섰다.

이준은 그런 승효의 곁을 지나치더니 승효의 침대에 털썩 앉았다.

“다들 갔어?”

이준이 언급한 ‘다들’이 태경과 고수월 팀장 등의 매니저들과 스태프들을 의미한다는 걸 알아차린 승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었지, 이번 촬영. 셋째 날에 명우 씨나 세현이가 안 와 줬다면 분량을 뽑아낼 수 있었을지 모르겠어.”

이준이 쿡쿡 웃으며 중얼거렸지만 승효는 대꾸하지 않았다.

한동안 이준은 신계 마을에서의 촬영에 대해 언급했고 승효도 간간이 대답하며 그에게 반응해 주었다.

[본주가 보기에는 그대 곁의 사내는 이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거늘.]

“승효 씨.”

이준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춘 채 다시금 입을 열었다.

승효의 이준을 향했다.

“승효 씨도 그놈…… 그자에게 빚이 있어?”

여태껏 풀리지 않은 의문이 하나 있었다.

어째서 구승효는, 현월 구가는 특별히 이득 될 것도 없는 고현 차가를 돕는 것인가.

가주의 영기까지 내어 주며 어째서 고현 차가와 함께 행동하려는 것인가.

‘만일 그놈에게 원한이 있다면, 구승효의 행동도 납득이 돼.’

이 말도 안 되는 남자 간의 혼인 의식에 찬성한 건지, 매일 아침마다 체력을 소모해 가며 이준에게 영기를 주입했던 건지, 이준을 지켜야 한다며 줄곧 말했던 건지, 전부.

의뭉스럽기만 하던 승효의 모든 행위에 목적이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 오히려 후련해질 것 같았다.

하여 승효의 방문을 두드리며 말을 꺼냈던 거다.

그에게도 ‘목적’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래.

분명, 그래야 했는데…….

‘왜 이리 섭섭한 거지?’

이준은 승효의 행동들이 납득간다는 사실에 후련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아쉽다 못해 서글퍼지기까지 하자 깜짝 놀랐다.

대체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가― 생각하던 이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차이준. 너……!’

화가 나기도 하고, 짜증이 치밀어 오르기도 해서 승효에게 “정말로 날 이용한 거였어?”라는 말이 흘러나오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어째서 대답하지 않는 승효를 보고 이리도 실망한 건지 깨달아 버린 자신의 마음에 이준은 크게 당황했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차이준 너……. 너 진짜!’

이준의 얼굴이 돌연 파리하게 질려 갔다.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독히 원망스럽던 승효의 얼굴을 더 이상 두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멍하니 보고 있다간…….’

두근두근두근두근―!

의식하기 시작한 지 오래.

아닐 거라, 부정했던 것도 오래.

하지만 결국엔…….

‘맙소사.’

이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홱 몸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승효가 이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어딜 가시려고요.”

이준의 변화를 느낀 건지, 아니면 본능적이었던 건지 승효가 낮게 물었다.

이준은 그의 시선을 회피하며 중얼거렸다.

“어, 어어, 나는……!”

횡설수설하던 이준을 승효가 끌어당기자 그의 숨결이 코앞에서 느껴졌다.

쿵쿵쿵쿵!

그의 심장은 이제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이준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도톰한 승효의 입술이 오늘따라 불그스름한 것이, 매우 탐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선배.”

승효가 무려 ‘선배님’이라는 호칭에서 ‘님’자를 뗐다.

이준은 침을 꼴깍 삼켰다.

쿵쿵쿵쿵쿵!

귀가 먹먹해지려는 것을 느끼던 이준은 파르르 눈꺼풀을 떨더니 곧 중얼거렸다.

“저기…… 승효 씨.”

“듣고 있습니다.”

이준은 대답하는 승효를 올려다보며 가까스로 남은 말을 뱉어 냈다.

“우리 계약에 말이야……. 사, 상대를…… 좋아하면, 안 되는 조항이 있었던가?”

윽!

그러자 승효가 이준의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제 몸이 더 승효와 가까워지자 이준은 현기증이 났다.

승효는 인상을 쓰고 있는 이준을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제 기억으로는 없었습니다.”

“어, 없었어?”

“네. 하지만…….”

승효가 멈칫하는 이준을 향해 말했다.

“있다 한들, 없애 버리면 되겠네요.”

이준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답변을 마친 승효가 곧바로 이준의 벌어진 입술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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