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64화 (65/72)

64화

금섬(金蟾) (1)

이준은, 긴장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숨 하나 흘리지 않는 침착하고 태연한 상태였으나 사실은 등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내리는 중이다.

‘처음도 아니잖아.’

그래.

명백히 따지고 보면 승효와의 입맞춤이 처음이었던 것은 아니다.

열린 입술의 틈으로 타인의 것이 들어오고, 그것을 열렬히 반기며 뜨거운 감정을 교환한 것은 결코 오늘이 처음이었던 것이 아니다.

혀끝을 오가는 짜릿한 전율에 현기증을 느낀 것도 처음은 아니었으며, 슬쩍 뜬 눈으로 보이는 상대의 모습에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던 것도 처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것은, 드디어 이준이 ‘자각’을 해 버렸기 때문이다.

‘좋아…… 한다라.’

이준은 제 곁에 누군가가 함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를 이해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 여긴 적도 없었고, 그런 사람이 존재할 거라 여기지도 않았으니까.

‘구승효한테 끌린 건…… 본능이었던 건가.’

그런 의미에서 승효는 특별했다.

그는 이준이 보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이준이 느끼는 감정 역시 공유할 수 있었다.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행동 하나하나가 뇌리에 박혀 자꾸만 눈이 갔으며, 어느새 그의 말에 은근슬쩍 즐거워하는 저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니, 인정할 수밖에.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저를 대하는 구승효의 태도다.

떨리는 마음으로 겨우 속내를 드러낸 이준을 향해 승효는 아무렇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아니. 오히려―.

[있다 한들, 없애 버리면 되겠네요.]

‘너무…… 적극적이지 않았나?’

잠깐. 그렇다면 설마 구승효도 나를…….

툭.

‘……!’

덜 말린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열려 있는 방문 밖으로 샤워기 호스 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샤워부터 하고.]

이성을 이겨 버린 본능은 눈 깜짝할 사이에 커다란 방 안을 강한 열기로 휘몰아 넣었다.

편히 입고 있던 티셔츠가 가슴 밑부분까지 말려 올라간 것을 깨달은 이준은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는 승효를 저지한 후 말했다.

승효의 갈색 눈동자가 살짝 일렁이자 그를 밀어낸 이준은 몸을 일으켰고,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쏴아아―.

그리고 지금.

이준은 전에 없이 긴장하고 있는 중이다.

‘차이준. 고작 이런 일에 긴장하지 마. 별거 아니잖아? 감정을 지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평범한 일이라고.’

두근대던 심장이 안정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준은 스스로를 향해 되뇌고 또 되뇌었다.

《개탄할 일이로다. 결국 주인도 욕망에 백기를 든 거군.》

이준이 샤워를 끝낸 후 승효 차례가 되어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홀로 방 안에 남아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자신을 제어하며 말하고 또 말하던 이준은 곁에서 들려온 코웃음 소리에 흠칫 놀랐다.

《내가 지켜봤던 그간의 주인은 무척이나 금욕적인 사내였는데 말이지. 오죽하면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걱정한 적도 있었다고.》

이준에게 넘치는 영기 때문인지, 양랑은 그의 곁에 현신한 상태에서 웃음을 터트렸다.

양랑의 붉은 눈이 이준에게 꽂히자 숨이 컥 막혔다.

《얼마 전까지 한낱 애새끼에 불과했던 우리 주인도 말이지, 할 때는 하는……》

“<축(逐)>.”

클클대던 양랑이 이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게 누가 쓸데없는 말을 하래.’

이준은 한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양랑에게 코웃음 치다, 갑자기 드리워진 그림자에 번쩍 얼굴을 들었다.

‘……!’

그러자 샤워를 마친 승효가 그의 앞에 서서는 이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준의 검은 눈동자가 승효의 눈에서 아래로, 그리고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매끈한 목부터 시작하여 탄탄한 가슴 근육, 그리고 수건으로 가린 아래까지.

‘지, 진정…… 진정해.’

시선을 옮길 때마다 귀가 떨어져 나갈 만큼 쿵쾅대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명색이 로맨스 황제라 불리는 본인인데도, 자신이 연기를 할 때와 실제 상황을 겪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있는 건가.

이준은 “방금 양랑 목소리를 들었는데…….” 하고 중얼거리는 승효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쫓아냈어.”

“쫓아냈다고요?”

“응.”

“……수고를 덜었군요.”

놀란 표정을 짓던 승효가 피식 웃으며 속삭이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른다.

올 것이 오는 건가.

이준은 말을 끝낸 이후 슬며시 고개를 숙여 제게 다가오는 승효를 바라보다 입술을 열었다.

“잠깐.”

입술과 입술 사이의 거리가 10센티도 채 되지 않게 되었을 때.

승효의 숨결을 코끝으로 느끼던 이준이 손을 뻗어 그를 저지했다.

손바닥에 닿는 승효의 근육을 느끼며 흠칫 놀라던 이준에게 승효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십니까?”

고요하던 승효의 눈에도 불꽃이 이는 것이 보였다.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하던 이준은 곧 이성을 붙잡았다.

“나 아직 못 들었어.”

“예?”

“너, 나 좋아해?”

감정을 대함에 있어선 돌려 말하기는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다.

이미 ‘인정’해 버린 이상 이준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하여 제게 다가오려는 승효를 저지하며 묻고, 차분하게 그의 답변을 기다렸다.

승효는 가라앉은 이준의 검은 눈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뭐?’

이준은 크게 놀랐다.

“안 좋아해?”

아니, 좋아하지도 않는데 키스를 하고 섹스까지 하려 한다고?

침대에 걸터앉아 승효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던 이준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럼 나 혼자 생 쇼를 한 거 아냐!’

기대에 차 있던 이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는 것을 지켜보던 승효는 할 말을 잃어버린 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뭐 하는 거야.”

짐짓 화가 난 이준이 서늘한 목소리를 흘리자, 승효가 이준의 발등에 손을 뻗더니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너……!”

“단순히 좋아한다는 말로는, 선배를 향한 제 마음을 표현하긴 어렵군요.”

이준은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승효는 다시 고개를 들어 이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생긋 웃으며 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선배.”

“으, 응.”

이준이 얼떨결에 답하자 승효는 말했다.

“전 선배를 숭배합니다.”

* * *

숭배(崇拜).

숭배란 과연 무엇일까.

인터넷을 열어 검색을 해 보면 숭배에 대한 사전적 의미가 나온다.

첫째로, 우러러 공경한다는 뜻.

‘그렇다면 구승효가 날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공경한다는 건가?’

뭐, 그거라면 이해가 간다.

이준은 연예인의 연예인, ‘차휘’ 였으니까.

주로 10·20대 남자 연예인들의 롤모델이기도 하고 여자 연예인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한 자신의 위용을 이준은 익히 들어 왔다.

‘그런데 그게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그렇다면 두 번째 의미는 무엇일까.

숭배는 또한 종교적 대상을 우러러 신앙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잠깐. 그렇다면 구승효는 나를 신으로 생각하는 거야, 뭐야?’

아니. 절대로 그럴 리는 없다.

구승효가 차이준을 신으로 공경한다면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입술을 들이밀진 않겠지.

결과적으로 승효의 대답은 미묘했다.

미묘하다 못해 오히려 이준을 더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듣기, 좋았지.’

사전적 의미는 뒤로한 채, 그 말을 들었을 때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으니까.

좋아한다는 말 이상의 말을 들어 버린 것 같았으니까.

저도 모르게 “나도!”라고 외쳐 버릴 뻔했으니까.

“차이준…… 이 줏대라곤 없는 놈.”

오늘따라 선선하다 못해 춥기까지 한 새벽녘의 봄바람을 맞으며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있던 이준은 중얼거렸다.

“그 말에 훌러덩 넘어갈 건 또 뭐야.”

제가 생각해도 너무 쉬웠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이준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이제 더는 기억 나지 않는 유년 시절에도 그랬지만, 16년 전의 사고를 겪고 난 이후 이준은 쉽사리 타인에게 마음을 주지 못했다.

저로 인해 누군가 피해를 보는 것이 싫었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였고, 누구도 그를 이해해 줄 거라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구승효를 대하는 스스로의 반응이 낯설기만 하다.

‘낯설어도…… 너무 낯설군.’

불과 몇 년 전, 아니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구승효는 이준에게 있어서 그의 자리를 위협하는 ‘이물질’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지.

어느새 승효를 떠올리면 이렇게 기분이 이상해지고, 두근거리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의 서울은 검푸르다.

이준은 그런 하늘만큼이나 검어야 했던 자신의 오른쪽 귀걸이가 보랏빛을 넘어 붉게 넘실거린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코웃음을 쳤다.

‘영기를 모아 놓은 게 아니라, 정기를 모아 놓은 셈이네.’

고현 차씨 집안을 위해 영기를 모으는 용도로 사용했던 이 귀걸이는 어느새 승효로부터 정기를 빨아들이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준은 슬쩍 고개를 돌려 커튼이 쳐져 있는 침실 안을 힐끔댔다.

커튼 사이로 승효가 잠들어 있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복잡할 건 없어.’

누군가에 대해 이리 진지한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만일 함께하고픈 사람이 생긴다면 지금도, 앞으로도 아마 구승효가 유일할 것이다.

그러니.

‘도전을 해 봐도 괜찮겠지.’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앗아 주마.]

몸을 섞고 난 뒤의 감각이 생각 이상으로 개운하다 못해, 힘이 넘친다 여기던 이준의 귀에 불현듯 잊고 지낸 음성이 들렸다.

그놈의 것이다.

후련한 미소를 짓고 있던 이준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준은 서늘한 눈으로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서울의 새벽 거리를 내려다보더니 천천히 태양이 떠오르자 몸을 돌렸다.

“……!”

발코니의 문을 다시 열고 침실 안으로 들어간 이준의 눈이 동그래진 것은,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잠들어 있던 승효가 두 눈을 뜬 채 그를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언제 일어났어?”

침대로 다가온 이준의 물음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 위에 이불을 덮고 있던 승효가 대답했다.

“조금 전에요.”

“그래?”

이준이 씩 웃으며 승효의 곁으로 다가가 털썩 앉았다.

그러자 승효가 허리를 덮고 있던 이불을 목 근처까지 들어 올렸다.

이준은 저를 경계하는 듯한 승효의 행동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 먹힌 건 난데 왜 승효 씨가 겁먹은 얼굴이야?”

승효는 싱글대는 이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도망가실 줄…… 알았습니다.”

뭐?

“내가 왜?”

생각지도 못한 말에 이준이 의아해하자 승효는 주저했다.

‘어지간히 내 마음에 자신이 없는 건가.’

이준은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나, 승효 씨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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