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65화 (66/72)

65화

금섬(金蟾) (2)

승효의 얼굴에 의문이 감돌았다.

마치 할 이야기가 무엇이냐는 모습이다.

이준은 쓴웃음을 삼켰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준은 짧게 숨을 고르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우리 관계를 진전시키기에 앞서 승효 씨한테 말해 둬야 할 게 몇 가지 있어.”

“말씀하십시오.”

어느새 침대에서 바로 앉은 승효가 준비됐다는 듯 대꾸했다.

“일단, 나도 승효 씨를 좋아해.”

“……!”

“뭘 그리 놀라?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당당한 이 차이준이 같은 성별의 남자랑 살을 섞지도 않았을 거다.

이준은 순간 눈앞을 지나간 간밤의 일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승효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이준과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흘렸다.

“여하튼, 그런 의미에서 우리 계약에 중대한 차질이 생겼어.”

심각한 얼굴의 이준의 발언에 승효가 대꾸했다.

“계약상에는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상대를 좋아해선 안 된다는 조항도 없는데요.”

어젯밤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는지 승효가 묻자 이준은 웃어 버렸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난 이 계약을 수정하길 원해.”

이준은 말을 이었다.

“우린 시작부터 계약에 의해 얽매이게 된 사이고, 그로 인해 여러 제약이 존재했어. 때문에 후일 이 계약이 우리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승효는 대꾸하지 않았다.

“우리가 맺은 계약의 모든 걸 뜯어고치자는 건 아니야. 단지…… 우리의 관계에 대해 추가 사항을 넣자는 거지.”

“선배 말씀은…….”

이준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추가로 넣자는 것들 역시 별거 아니야. 예를 들자면, ‘계약 기간이 끝나더라도, 상대가 특별한 거부 의사를 표현하지 않는 한 이 계약은 유지된다.’ 라든가.”

“……!”

“그것도 아니라면, ‘계약상의 의식이 끝난 이후로도 당사자들은 언제든 상대의 동의를 구하고 자유로운 스킨십이 가능하다.’라든가.”

“선배.”

“응?”

“언제부터 그리 적극적으로 변하신 겁니까?”

이런.

‘너무 노골적이었나.’

지금까지의 이준은 승효와 계약 외의 행위는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와의 접촉은 이상할 정도로 자극적이고 짜릿해서, 함께 있으면 동화되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인정해 버렸다고.’

그럼 무서울 건 없잖아.

이준은 난생처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품게 됐다.

이 들뜬 기분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다면, 승효와의 계약도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었고 오히려 계약에만 의존하는 건 부족하게 느껴졌다.

“왜. 싫어?”

음흉한 마음을 잔뜩 품은 이준의 추가 요청 사항에 승효가 묻자, 이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승효는 슬며시 올라가는 이준의 입꼬리를 보고 픽 실소를 흘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저도 좋아서요.”

“하긴. 승효 씨는 만족스럽다 못해 아주 좋아 죽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차이준을 눕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

“하하.”

“하지만 승효 씨도 조심하는 게 좋아. 난 꽤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이준의 눈이 번뜩이자 승효가 움찔댔다. 여유롭던 그의 얼굴이 제 말에 경직되자 큭큭대던 이준은 곧 숨을 골랐다.

‘이제는 말을 할 때군.’

이준은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해야 할 또 다른 말이 있는데…….”

이준의 얼굴에서 환한 미소가 사라지자 승효 역시 긴장한 듯했다. 이준은 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 승효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 과거와 관련된 이야기야.”

* * *

“준아. 이 뱃속엔 말이야. 우리 준이의 동생이 들어 있어. 아주 사랑스럽고 귀여울 것이 분명한 네 동생이지. 이 아이는 틀림없이 너한테 큰 의미가 될 거야.”

이준의 어머니인 안조현 여사는 중학교 3학년인 열여섯의 이준을 앉혀 놓으며 다정하게 웃었다.

이준은 열 달을 가득 채운 배를 내려다보며 투덜댔다.

“엄마. 내가 무슨 다섯 살 먹은 애도 아니고, 동생이 태어나는 게 큰 의미가 될 리는 없잖아.”

“어머?”

“뭐, 확실히…… 귀엽기는 하겠지. 갓 태어난 것들은 뭐든지 예뻐 보이기 마련이니까.”

“호호, 우리 이준이,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다. 엄마는 알아. 우리 준이가 그 누구보다 이 아이를 사랑할 거라는 걸.”

“…….”

안 여사는 이준을 향해 손을 내밀며 빙긋 웃었다.

“준이 너, 만약에 이 아이가 태어나면 잘해 줄 자신 있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를 울리거나, 혹은 상처받게 해서는 안 돼. 나랑 약속해 줄 수 있니?”

이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나 열여섯이거든? 앞으로 2년 뒤면 의식도 치를 나이야. 그런 내가 곧 태어날 신생아를 설마 울리겠어?”

안 여사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럼 약속한 거다?”

“약속이고 뭐고,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안 해도 된다니까?”

“호호.”

“엄마는 얼른 기운이나 차려. 곧 출산한다는 사람 몸이 이게 뭐야? 비쩍 말라선 건강하게 애를 낳겠냐고!”

“하긴. 내가 확실히 살이 빠지긴 했어.”

“내 말이. 다른 아줌마들은 임신하면 살만 찐다는데 엄마는 대체 뭐야? 설마 아빠나 현우 삼촌이 밥도 못 먹게 하는 건 아니지?”

“어이, 차이준이. 너 다시 말해 봐. 아빠가 뭐라고? 현우가 뭐라고?”

“헉, 아, 아빠, 어, 언제 왔어?”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2월.

이준의 어머니 안 여사는 출산 준비를 위해 고현 차씨 가문에서 직접 운영하는 산부인과에 머물고 있었다.

출산이 임박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이준은 매일같이 병원 문턱을 드나들었다.

물론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어머니만 졸래졸래 쫓아다닌다고 현종으로부터 한 소리를 듣기는 했으나, 근래 이준의 기분은 행복하다 못해 들떠 있었다.

‘동생이 태어난다니.’

이준에게는 강주라는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함께 나고 자라 강주의 갓난아기 시절은 기억나지 않았다.

만약 안 여사가 정말로 아기를 낳게 된다면 그 아기의 출생부터 성장까지 모조리 지켜볼 생각이었기에, 이준은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이상하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갔다.

안 여사의 뱃속에서 열 달 동안 무럭무럭 자라난 막냇동생이 세상에 나오기로 예정되었던 바로 그날.

이준은 설렘을 가득 안고 아이가 태어났다는 문자가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병원에서의 연락은 오지 않고 있었다.

‘한번 가 볼까?’

이준은 공부에는 딱히 흥미가 없었으므로 학교를 마치자마자 곧장 어머니가 있는 병원으로 향했는데, 그날따라 무언가 이상했다.

《작은 주인. 오늘은 가지 않는 것이 어떠냐.》

매일 이준의 머리를 울려 대며 귀찮게 굴던 양랑은 그날따라 이상하게 이준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뿐인가.

“준아. 오늘은 학교를 마치더라도 병원에는 오지 말거라.”

아버지 현종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격하게 이준의 방문을 거부했다.

“우리 멋진 조카님, 오늘도 병원에 올 거야? 그런데 삼촌 생각엔 오늘은 왠지 안 왔으면 하는데…… 내일 오면 안 될까?”

이준만 보면 와락 안기에 바쁜 막내 삼촌 역시 그의 병원 방문을 꺼려 했다.

‘뭔가 이상해.’

냄새가 났다.

그것도 불쾌하기 짝이 없는 냄새가.

이준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산부인과에 가까워질수록 그 냄새는 짙어졌다.

그리고.

“――마. 안 돼! 그만하라고!”

“――요, 제발. 제발 이 아이만은―― 제발, 살―― 꺄아악!”

도착한 이준의 눈에는 누군가의 붉은 피로 뒤덮인 병원의 모습이 보였다.

* * *

솔직히 말하자면 그날의 일이 완벽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사, 살려 줘, 살려…… 살려 줘…….]

[끅, 콜록, 컥, 콜록.]

[살려…… 끄아아악!]

피로 물든 병원의 바닥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나뒹굴고 있었다.

안내데스크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이준을 향해 손을 뻗으며 살려 달라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고, 끄윽끄윽 소리를 내며 피를 토하는 사람도 있었다.

거칠게 호흡을 내쉬고 있는 사람도 있었으며, 이미 죽어 축 늘어진 사람도 있었다.

‘거……짓말.’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두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몇 시간,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핏물로 가득한 바닥 위 웅덩이를 멍하니 응시하던 이준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 끔찍한 곳에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웬일인지 발은 마치 뿌리가 박혀 버린 것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쿵쿵쿵쿵.

심장은 멈출 줄 몰랐다.

죽어 가는 사람들 틈에서 이준은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응애―.]

그때였다.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응애. 응애. 응애애―.]

곳곳에서 신음이 들려왔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울음소리는 점점 크게 다가왔다.

움직여야…… 돼.

이준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발을 움직였다. 터벅터벅. 정신없이 걸어간 이준이 우뚝 멈추어 선 곳은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던 병실.

VIP룸 606호.

[응애애애.]

이준은 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주저 없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마주했다.

죽어 버린 어머니와 아버지, 삼촌 사이에서 홀로 울고 있는, 붉은 피로 가득 물든 갓난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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