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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이라면 악연-67화 (68/72)

67화

금섬(金蟾) (4)

“어? 태경 씨 아니야?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태경은 발을 동동 구르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사무실 안이 아닌 건물 밖 로비에서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만 있는 그의 모습이 이상했는지, 지나가던 동료가 물음을 던졌다.

“그게…….”

어떻게 솔직히 말할 수 있으랴.

[예? 안 와도 된다고요?]

[응. 내가 직접 운전해서 가려고.]

[아, 직접…… 네? 직접이요?!]

[한 시간 내로 갈 테니 느긋하게 기다려 줘. 그럼 끊는다.]

[배우님! 배우……!]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전, 당연히 이준을 데리러 가려던 태경은 생각지도 못한 전화를 받았다.

운전이라면 치를 떠는 차이준이 무려 직접 차를 몰고 사옥으로 오겠다는 말을 전한 것이다.

‘배우님한테 운전면허가 있었어?’

물론 이준의 자가엔 그의 명의로 된 스포츠카가 몇 대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용하는 이는 따로 있을 만큼 이준은 운전대를 잡지 않았었다.

‘불안해.’

비록 태경이 이준의 곁을 맴돌며 매니저 업무를 수행한 건 몇 달 되지 않았지만, 운전이라면 질색하는 그가 괜히 걱정됐다.

끼이익!

초조한 마음으로 사옥 입구 쪽을 서성이던 태경은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주차장 앞에 멈추어 선 다크그레이 색상의 차가 시야로 들어왔다.

‘설마.’

언젠가 이준의 자가에서 본 것과 비슷한 모양의 차라고 생각한 태경의 눈이 막 열리는 문밖에서 나타난 사람을 보고 큼지막해졌다.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나보다 오히려 승효 씨가 고생했지. 그리고 아깐…… 고마웠어.”

“말로만 고맙다고 하시는 거예요?”

“어?”

“선배는 언제나 그러잖아요. 말만 그러고 돌아서면 잊고. 이번엔 보답해 주지 않을래요?”

“…….”

“선배?”

“승효 씨는 어째, 갈수록 캐릭터가 바뀌는 것 같네. 왜 이렇게 능글맞…… 헉. 태, 태경이,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조수석에서 내린 승효가 이준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생글거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승효를 슬쩍 밀치며 피식 웃던 이준이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멍하니 서 있는 태경을 발견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를 보며 태경이 “배, 배우님.” 하고 어색하게 웃자 이준은 화륵 얼굴을 붉히더니 들고 있던 차 키를 승효에게 던졌다.

“나 태경이랑 먼저 올라갈 테니 승효 씬 차 대고 와. 태경아, 가자!”

태경은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 제게로 달려와 자신을 끌고 사옥으로 올라가는 이준을 힐끔거렸다.

그보다 큰 키를 지닌 이준의 귀가 선명할 정도로 붉었다.

* * *

‘하마터면 들킬 뻔했어.’

정후가 없는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대표실의 소파에 주인처럼 앉아 있던 이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태경이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어떻게 알았겠냐고.’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으랬더니, 불안해 마지않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기다릴 줄이야.

‘그렇게 내가 못 미더운 건가?’

어디 그뿐인가.

‘밖이라 밀어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들켜 버렸겠군.’

이준은 화사한 눈웃음까지 흘리며 스스럼없이 다가오던 승효를 떠올리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조심해야겠다.

‘내 생애 첫 연앤데, 초기에 스캔들 터져서 그만둘 순 없지.’

[나랑…… 정식으로 만나 볼래?]

그 말을 건넬 때 제 모습이 어땠을까.

남들 앞에선 침착하고 태연해 보이던 얼굴이 빨갛게 익었을까, 아니면 떨리는 속눈썹의 진동이 확연히 드러났을까.

속에 든 말을 겨우 뱉어 낸 이준을 보고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는 승효로 인해, 그는 전례 없는 긴장감을 느꼈다.

[저기…… 뭐라도 말해 주면 안 되나? 나 되게 초조하거든. 좋다, 싫다, 답변이라도 해 줬으면 하는데……. 무, 물론 싫다는 답변은 생각하지도 않아서 가급적 그런 대답은 하지 말아 줬으……!]

침착해야 한다―를 수도 없이 되뇌면서도 제멋대로 움직이는 입술을 막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이준의 몸이 살짝 앞으로 굽어지는가 싶더니 승효가 그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코앞까지 다가왔다.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승효와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가까워지자 눈을 크게 뜬 이준을 향해 그는 대답했다.

[그 말, 물리시면 안 됩니다.]

“큭큭.”

크크크크.

실없는 웃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고요하기 짝이 없던 대표실 안인지라, 작은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크게 울렸다.

이준은 자꾸만 씰룩거리는 입꼬리의 움직임을 막지 못했다.

‘미치겠네, 진정이 안 되는데.’

요 며칠 동안 들뜬 마음을 어떻게든 가라앉히려 애썼지만 그것이 생각 이상으로 쉽지 않다.

현재 느끼는 이 기분은 마치 오래전, 그에게 동생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큼이나 기뻤으니까.

이준은 아직 대표실로 모이지 않은 사람들을 기다리며 홀로 쿡쿡 웃다,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운전을 하라고? 내가 직접?]

[네.]

[하지만 난……]

[할 수 있습니다.]

[……!]

[선배는 이미 부적술도 배웠고, 그걸 응용할 수도 있어요. 게다가 운전 도중 비생과 맞닥뜨려도, 제가 드린 영기로 그들을 무시할 수 있고요.]

[…….]

[언제까지 남의 차를 얻어 탈 순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떨어져 있더라도, 차가 있으면 몰래 만날 수도 있지 않겠습니? 어때요. 한번 도전하지 않을래요?]

성인이 되자마자 운전면허를 따기는 했지만, 실제로 차를 몰고 다닌 적은 없다.

다행히 신분 증명용으로 들고 다니기는 했었기에 아예 무용지물은 되지 않았지만.

덕분에 간혹 드라마나 영화 촬영에 자동차 관련 씬이 있으면 항상 대역을 사용하곤 했던 이준은 승효의 제안에 큰 용기를 냈다.

‘확실히…… 이번엔 그 녀석들의 등장이 적었지.’

이준이 운전석에만 앉으면 어디서 알고 나타났는지 시야를 가로막고 소리를 질러대던 비생들이, 클레몽 사옥으로 오는 동안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영기 때문인가.’

승효가 출발 직전 건네준 영기도 영기지만, 며칠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구승효와의 접촉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

온몸에 충만하게 들어찬 영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승효를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더 강력해지는 이 기분은 상쾌하기까지 하다.

‘변화하는 거군.’

이준은 달라지고 있었다.

그것이 확실히 구승효라는 존재 덕분이었고, 좋은 영향임은 분명했다.

달칵.

“어, 왔어?”

떨리던 손이 점점 안정을 되찾을 무렵이었다.

이준은 대표실 안으로 들어오는 낯익은 얼굴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러자 긴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다가온 승효가 제 옆에 털썩 앉았다.

이준은 “주차 잘하고 왔습니다.” 하고 제게 차 키를 건네는 승효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승효 씨.”

“네.”

“우리…… 너무 가까운 거 아니야?”

현재 정후의 대표실 안에는 저와 승효, 단둘밖에 없었고 소파에 자리는 넘쳐난다.

그런데 대표실 안으로 들어온 승효는 이준의 맞은편도 아닌, 바로 옆자리에 착석했다.

이준이 짓궂은 웃음을 흘리며 묻자 승효는 오히려 눈썹을 꿈틀댔다.

“가깝다고요?”

“응. 자리 말이야. 아무리 내가 좋아도 그렇지, 조금 떨어져 앉아야 하는 거 아닌가? 너무 붙어 있으면 의심하잖아.”

차에서 내리던 저와 승효를 보고 황망한 표정을 금치 못하던 태경이 떠올랐다.

[두 분…… 어떻게 된 거예요? 그러고 보니 단양에서 돌아온 이후 더 친해지신 것 같아요.]

태경이 조심스럽게 건넸던 말이 생각났다.

이준은 승효의 옆에서 슬쩍 떨어지더니 소파의 끝으로 가서 다리를 꼬며 말했다.

“아무래도 조심은 해야겠어.”

“…….”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더욱더. 들키면 여러모로 귀찮잖아. 안 그래?”

“…….”

“아니, 그렇다고 아예 숨기자는 건 아니야. 승효 씨도 알다시피 오늘 여기 온 이유도…… 헉.”

제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승효의 연갈색 눈동자가 신경 쓰였다.

횡설수설 말을 이으려던 이준은 갑자기 홱 고개를 돌리더니 제 쪽으로 다가오는 승효를 피해 그만 소파에 드러눕고 말았다.

“승효 씨!”

누가 보면 어쩌려고!

블라인드도 쳐지지 않은 대표실 안에서 이준의 위에 올라탄 승효를 보고 그가 외쳤다.

그러자 승효가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그러니까 선배의 말은, 비밀 연애를 하자는 거군요.”

“어? 어어…….”

그럼 당연히 비밀로 해야지.

‘온 대한민국에 소문낼 일 있어?’

이준과 승효의 직업 특성상 그들의 관계가 언론에 흘러 들어간다면 난리가 날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일이 끊어질 수도 있겠지.’

물론 날이 갈수록 대중들의 생각이 개방화되고, 호의적으로 변하기는 하지만 제작사나 투자자들 입장에서는 큰 리스크를 지니고 있는 배우를 쓸 리도 만무하니까.

이준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승효를 올려다보았다.

‘비밀 연애’라는 단어에 화가 난 것 같지도,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은 승효를 향해 그는 손을 뻗으려 했다.

“얼마 전에도 말했지만, 난 이 관계를 쉽게 깨트리고 싶지 않아.”

모든 것이 처음이지만, 그만큼 소중하니까.

“그러니 승효 씨도 이건 협조를 해 줬으면 좋겠어. 어때.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이준이 달래듯 말하자 승효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듯 살짝 반응하더니, 곧 누워서 저를 올려다보는 이준에게 살며시 다가오려 했다.

“너희…….”

그때였다.

“뭐 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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