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68화 (69/72)

68화

금섬(金蟾) (5)

지이이잉―.

차르륵!

리모콘 조작 한 번에, 검은 블라인드가 클레몽 엔터테인먼트 이정후 대표실의 커다란 유리 창문을 뒤덮었다.

밝았던 대표실 안이 어두워지는 것은 순식간.

이준은 고요해진 대표실 안 분위기에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

“그래서.”

귀가 먹먹할 만큼 두근대는 심장에 집중하고 있을 때, 침묵을 깨트리는 소리가 났다.

이정후 대표였다.

“아까 하려던 말, 계속해 봐.”

정후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지만 침착한 것 같기도 했다.

승효는 그런 정후에게 설명하려 했다.

“대표님. 사실…….”

“잠깐만. 내가 말할게.”

하지만 이준이 손을 들어 승효를 저지했고, 승효는 입을 다물었다.

이준은 그 말에 인상을 쓰며 저를 응시하는 정후를 직시했다.

기어코 이준의 입에서 그 말을 듣겠다는 듯, 저를 쳐다보는 정후를 보며 이준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형. 나 구승효 씨랑 만나기로 했어.”

차분한 이준의 발언에 정후의 눈이 큼지막해지더니 곧 승효를 응시했다.

“승효 씨도 동의한 겁니까?”

구승효는 정후의 물음에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후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승효 씨. 혹시 가벼운 마음으로 우리 준이를 만나려는 거라면 아예 시작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준이는 조금 특…….”

“걱정 마, 형. 구승효 씨도 알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실 이준은 정후가 그들의 성별에 대해 언급할 줄 알았다.

물론 업계에서 동성 간의 연애는 생각 이상으로 흔했고, 요즘엔 사랑에 성별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지만 정후의 입장에서는 눈앞의 그들이 일종의 ‘상품’과 같았으니 그 점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할 거라 여긴 거다.

그러나 후, 숨을 뱉어 낸 후 꺼낸 정후의 말은 이준의 예상과는 달랐다.

이준은 “뭐?” 하고 놀란 표정을 짓는 정후에게 미소 지었다.

“승효 씨도 나랑 같거든.”

정후의 눈이 이번엔 튀어나올 것처럼 큼지막해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같다니? 뭐가? 뭐가 같은데?”

갈수록 흥분하는 정후를 보며 이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우리 집안이 어떤 걸 다루는지, 지금까지 무엇을 해 왔는지, 어떤 일을 가업으로 삼는지, 전부 알고 있다고. 승효 씨도.”

“……!”

정후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으며 승효를 바라봤다. 승효가 어색하게 웃었다.

이준은 말했다.

“몇 달 전에 내가 본가에 들렀던 거 기억나? 그날, 형이랑 태경이가 나 본가에 내려 줬었잖아.”

“기, 기억나.”

“사실 그때, 나 구승효 씨랑…….”

이준은 당황을 금치 못하는 정후를 보며 그간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본가에서 있었던 자신과 승효의 재회부터 시작하여, 혼인 의식, 그리고 그와 동거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까지.

[이 대표님께 우리 사이를 알리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응.]

[어째서죠? 집안사람도 아닌데 굳이 이 대표님이 우리 관계를 알 필요는 없을 텐데요.]

[……그 형은, 나한테 가족이나 마찬가지거든.]

[…….]

[난, 피치 못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족들한텐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아. 그러니 협조 좀 해 줘. 정후 형한텐, 우리 관계를 알리고 싶어.]

승효와 정식으로 만나기로 한 이상, 이준은 반드시 정후에게 그들의 관계를 알려야 했다.

비생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서는 전견협의 강주가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연예계 관련 문제에 대해서는 정후보다 믿음직한 사람이 없었다.

하여 오늘, 특별한 일정도 없는데 정후를 함께 만나러 온 것이고,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을 들켜도 크게 당황하지 않은 거다.

“자, 자자자, 잠깐. 정리 좀 하자. 정리 좀 해.”

정후는 말까지 더듬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물컵을 들어 올렸다.

쉬지 않고 물을 꼴깍꼴깍 들이마시는 그를 지켜보던 이준은 어느새 벌떡 일어난 정후의 다음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러니까…….”

식지 않는 갈증을 가까스로 해결한 정후가 탁, 물컵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이준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너랑 승효 씨가, 이미 집안끼리 허락한 혼인 관계 사이고, 두 사람은 마음까지 나누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승효 씨도 ‘볼’ 수 있다고?”

“아주 잘 보이지. 오히려 이쪽에선 나보단 선배야. 안 그래, 승효 씨?”

승효는 대답 대신 미소 지었다.

그 반응에 정후는 소파로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말도…… 말도 안 돼……. 내 배우들이…… 멀쩡하고 잘난 내 배우들이…… 사귀는 걸로도 모자라 귀신까지 본다니. 이건 꿈이야. 꿈이라고!”

이준은 넋을 놓은 정후에게 말했다.

“형. 말했잖아. 귀신이 아니라 ‘비생’이라니까.”

“비비비, 비생이고 뭐고, 다른 사람은 못 보는 걸 보는 건 맞잖아!”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정후는 홱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정분은 왜 나냐고! 끔찍이도 싫어하더니, 너, 왜 승효 씨랑 언제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거야! 배신은 네가 했네!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하, 하하.”

버럭 외치며 바드득 이까지 가는 정후에게 대꾸할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확실히 그건 사실이었으니까.

한동안 홀로 구시렁거리던 정후를 내버려 두고 그가 마음을 가다듬기까지 기다려 주기로 했다.

“너희!”

얼마나 지났을까.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중얼거리던 정후가 번쩍 얼굴을 들었다.

“너희가 뭔가를 ‘본다’는 건 둘째치고…… 사귀는 건 절대로 들켜선 안 돼.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둘이 끝까지 가는 거야. 알았어?”

비장한 각오를 다진 정후는 말을 이었다.

“그걸 약속하면 이 이정후, 내 이름을 걸고 무슨 일이 있어도 두 사람은 지켜 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맹세하듯 외치는 정후를 보며 이준과 승효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좋은 사람이라니까.

* * *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쌀쌀한 초봄에서 완연한 봄으로, 그리고 순식간에 피었다 진 벚꽃잎이 떨어져 어느덧 무더운 공기가 한반도를 뒤덮는 초여름의 길목에 섰다.

“어서 오세요, 차휘 씨!”

곧 다가올 더위를 대비하기 위해 청바지 위에 얇은 베이지색 면 티셔츠를 입고 방송국 안으로 들어선 이준은 저를 반기는 한 스태프를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다들 기다리고 계세요! 이쪽입니다.”

“고마워요.”

아마도 그를 안내하기 위해 미리 엘리베이터 앞에서 서성였을 것이 분명한 스태프의 뒤를 따르며, 그는 걸음을 움직였다.

현재 그는 M사의 라디오 프로그램인 ‘달빛 가득한 창’, 일명 달빛창의 보이는 라디오 스튜디오로 향하고 있었다.

“사실 이제야 말씀드리는 건데, 저희도 섭외 요청했을 때 반신반의했거든요.”

“반신반의요?”

“네. 차휘 씨가 워낙 바쁘신 분이니, 섭외하기 쉽지 않잖아요.”

“아.”

“그런데 이렇게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오늘 보라 반응이 시작 전부터 뜨겁던데, 전부 차휘 씨 덕분이에요!”

스튜디오로 향하는 동안 쉴 새 없이 말을 건네던 스태프를 보고 이준은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거의 십 년 만인가.’

이준은 웬만해서는 언론 노출을 꺼리는 편이었기에, 꼭 필요한 인터뷰가 아니라면 방송 출연이나 라디오 출연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TVX 특별 기획 예능 <함께 가자!>를 시작으로 근 몇 달간 꽤 왕성한 활동을 보였는데, 이번 ‘달빛 가득한 창’의 출연 역시 그 일의 연장선이었다.

“와, 진짜 실물이네!”

“어서 오세요, 차휘 씨!”

“오시는 데 불편함은 없으셨어요?”

스태프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걸어간 곳에 과연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거대한 부스가 존재했다.

이준이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아마도 ‘달빛창’의 스태프로 보이는 이들이 쪼르르 달려 나와 그를 둘러쌌다.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듯 눈을 빛내고 있는 그들을 응시하던 이준은 스태프들에게 화답했다.

“정말 실물이고, 배려해 주신 덕분에 오는 데 불편함은 없었습니다.”

“세상에. 말도 어쩜 이리 이쁘게 하시는 건지!”

“또 반했어요!”

이준은 말없이 웃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방송국 인간들은 도통 줏대라곤 없군. 이 녀석들, 예전에 구가 녀석을 초대하고 너를 한창 씹어 대던 그 사람들이 아닌가?》

‘뭐, 업계가 그런 거니까. 게다가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잖아.’

이준은 어느새 나타나 중얼대는 양랑에게 대꾸한 뒤, 그를 발견하고 걸어오고 있는 한 남자를 응시했다.

“차휘 씨, 어서 오세요.”

‘달빛창’의 메인 DJ이자, 이준을 특별 게스트로 초대한 가수 윤혜석이 악수를 청했다.

“요즘 한창 바쁘시다 들었는데 섭외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그것보다 곧 라이브가 시작될 것 같으니 일단 앉아서 얘기 더 나눌까요?”

윤혜석이 그를 자리로 안내하자, 이준은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뒤, ON-AIR 사인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청취자 여러분. ‘달빛 가득한 창’의 창 지기, 윤혜석입니다.”

스케줄을 위해 차로 이동할 때마다 간혹 듣곤 했던 라디오 속의 음성이 코앞에서 선명하게 들려왔다.

초여름의 늦은 밤과 잘 어울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은 너무나도 특별한 분을 초대 손님으로 모셨는데요,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먼저 이분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10대 때는 반짝이는 무대 위에서의 모습으로 각광 받으셨고, 20대 때는 많은 여성분의 마음을 훔치는 브라운관의 왕자로 주목받으셨으며, 농익은 30대가 된 지금은 전례 없이 활발한 활동을 보이며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계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윤혜석이 이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 ‘달빛창’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차휘 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