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69화 (70/72)

69화

금섬(金蟾) (6)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기에 앞서, 먼저 달빛창의 청취자분들께 인사 한번 해 주시지요.”

DJ인 윤혜석의 제안에 살짝 고개를 끄덕인 이준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달빛창 청취자 여러분. 차휘입니다.”

낮게 울리는 이준의 음성이 마이크 속으로 들어가자 모니터의 댓글 수가 늘어났다.

“이야, 이거 반응이 아주 뜨겁네요. 근래 저희가 모신 초대 손님 중 가장 핫한 반응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TOKD 어워드 이후론 차휘 씨를 방송을 통해선 처음 뵙는 것 같은데, 그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TOKD면 3월인데, 벌써 7월 중순이네요. 제가 그렇게 얼굴을 안 비췄나요?”

“하하. 물론 기사를 통해 뵐 수는 있었지만 공식 스케쥴로 나오신 건 오늘이 처음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군요. 조금 더 노력해야겠어요. 참, 제가 어떻게 지냈냐고 물으셨죠.”

이준은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들을 한 번씩 바라본 이후 입을 열었다.

“아직 정식 촬영에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청취자 여러분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차휘 씨의 평범한 하루요? 특히 차휘 씨는 SNS도 잘 하지 않는 편이어서 저뿐 아니라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이 자리를 통해 간략히 어떤 나날을 보내고 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음, 글쎄요.”

이준은 고뇌하듯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 후 다시 말했다.

“여러분들과 비슷해요. 집에서 게임을 한다든가, 아니면 영화나 드라마를 본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여행을 간다든가 하는 일이죠.”

“하하, 집이라고 하시니 갑자기 생각나네요. 얼마 전, 차휘 씨의 일상 모습이 브이로그를 통해 방송된 적이 있죠?”

눈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윤혜석을 보고 이준은 멈칫했다.

윤혜석은 말을 이었다.

“심지어 본인의 브이로그도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동료 배우 구승효 씨의 브이로그였던가요?”

2주 전의 일이다.

[승효 씨! 거기 있어? 방금 스쿨 다녀왔는데, 채 선생님이 나보고 승효 씨보다 더 몸놀림이 가볍다고…… 아.]

곧 있으면 크랭크인 할 드라마 <역린> 촬영을 위해 이준과 승효는 액션 수업을 듣고 있었다.

물론 일국의 왕 역할이기에 호위 무사인 승효보단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검을 잡고 훈련하던 이준은 땀을 뻘뻘 흘리며 승효의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었다.

[어…… 어서 오세요, 선배. 이왕 이렇게 된 거, 합류하실래요?]

하지만 놀랍게도 승효는 방 안에서 팬들을 위한 라이브 방송을 진행 중이었고, 그 덕에 방문을 연 채 얼어붙은 이준의 모습이 카메라에 선명하게 찍혔다.

‘어색해 미치는 줄 알았지.’

이준과 승효의 동거와 관련한 소식은 승효가 클레몽 엔터로 이적하면서 시작된 뜬 소문 중 하나였지만,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승효가 본인의 집에서 방송 중이었던 라이브 도중 돌연 등장한 이준의 모습은 마침 생방송이었기에 선명하게 찍혀 버렸고, 결국 둘은 서로가 룸메이트 사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아예 ‘절친’ 컨셉으로 가는 게 좋겠어. 그럼 너희도 대놓고 지낼 수 있을 거 아니야. 곧 같은 작품 들어가니 차라리 잘됐네. 그 핑계를 대면 되겠어.]

그에 클레몽 엔터의 이정후 대표는 이러한 반응을 보였는데, 그는 이미 제 앞에서 온갖 애정 행각을 선보이던 이준과 승효에 백기를 든 상황이었다.

이준은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윤혜석을 향해 입술을 움직였다.

“부끄럽네요. 하필 그런 모습이 라이브로 방송되는 바람에 소속사에서 한 소리를 들었죠. 이미지에 맞지 않게 너무 방방거린 건 아니냐면서요.”

“하하하. 확실히 차휘 씨의 들뜬 모습은 의외이긴 했죠. 그거 아세요? 그날 구승효 씨의 방송 이후로 두 분의 액션 코치님이 누군지 검색어까지 올랐던 거?”

“그랬습니까?”

“듣자 하니 오는 8월에 두 분이 공동 주연을 맡은 드라마가 크랭크인 한다고 했죠? 두 분이 열심히 준비 중인 것 같아 기대가 크다는 평이 많네요. 이 자리를 빌려 간략하게 드라마 홍보도 한 번 하시는 게 어떠세요?”

홍보를 목표로 보이는 라디오에 출연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회를 주니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준은 웃으며 곧 촬영에 들어갈 <역린>에 대한 줄거리를 언급했다.

“쉽지 않은 연기가 되겠네요. 구승효 씨와의 호흡이 중요할 것 같고요.”

“그러니 열심히 해야죠. 안 그래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호흡 노력하신다고 하니 또 생각났는데, 얼마 전엔 두 분이 낚시 여행도 다녀오셨다고요?”

이준은 깜짝 놀랐다.

“그건 또 어떻게 아신 거예요?”

“후후, 다 아는 방법이 있죠. 어쨌든 이런 두 분의 우정에 우리 달빛창의 청취자분들도 그렇고, 다른 팬분들도 그렇고 아주 관심이 많습니다. 아! 여기, 훈훈한 두 남자의 우정에 대한 추억을 두 분만 간직하지 마시고 간혹 SNS에도 제발 올려 달라는 댓글도 있네요. 차휘 씨?”

이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고려해 보겠습니다.”

“자, 고려해 보시겠답니다. 그럼 이쯤에서 노래 하나 듣고 올게요. 고미인의 <깊어 가는 우리 사이>!”

* * *

[오늘 출연 너무 감사드려요. 다음에 또 출연해 주실 수 있죠? 저희 달빛창은 차휘 씨를 언제나 환영합니다! 물론 승효 씨도요!]

두 시간가량 이어지던 생방송이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준을 향해 인사를 건네던 ‘달빛창’의 DJ 윤혜석은 다음 출연 때는 룸메이트도 함께 데려오라며 그에게 고급 한우를 선물했다.

‘지치네.’

한우 세트를 들고 라디오 부스를 나오는 길.

이준은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좁혔다.

《저 인간, 냄새가 나.》

《가까이 가지 마! 그 녀석이잖아.》

《그 녀석?》

《왜, 산군을 인질로 잡고 있다는 그 극악무도한 견자 녀석!》

《흐익. 그게 저 녀석이야?》

고작 라디오 생방송 스케줄을 하나 소화했을 뿐인데, 이렇게 진이 빠지는 까닭은 하필이면 라디오 부스가 방송국 앞 야외에 있었고, 어떻게 알았는지 몰려든 비생들이 유리로 된 창문에 붙어 쑥덕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히 누가 누구의 인질로 있다는 게냐? 하찮은 것들. 당장 꺼지지 못할까!》

《으악!》

《도망쳐!》

그런 하급 비생들의 말이 신경 쓰였는지, 양랑이 크게 으르렁대자 힘없는 비생들은 부리나케 꽁무니를 빼기는 했지만.

방송국 내 지하 주차장으로 향하기 위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던 이준은 비생들이 무어라 중얼대든, 양랑이 그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것보다 주인.》

‘응.’

《네가 웬일로 그리 꺼리던 라디오 방송을 하나 했더니…… 설마 그걸 얻기 위해서였냐?》

양랑은 이준의 손에 들려 있는 한우 세트를 힐끔대며 중얼댔다.

이준은 피식 웃었다.

‘출연만 하면 준다는데, 그럼 받아야지.’

《하지만 넌 소고기는 싫어하잖아.》

‘내가 먹을 게 아니니 괜찮아.’

《……》

‘왜?’

《아니. 구가 녀석의 팔자도 꽤 괜찮다 싶어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신부가 상등의 고기를 가져다 바치니, 팔자가 좋은 편이지.》

‘이봐. 정정해. 굳이 따지자면 신부가 아니라 신랑이지!’

《그걸 누가 믿나. 매일 밤 그 녀석 밑에서 앵앵거리는 게 누……!》

“<축(逐)>.”

이준은 나지막한 그의 중얼거림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양랑을 인지하며 흥 콧방귀를 뀌었다.

꼭 매를 벌어요.

모처럼 즐거웠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확실히, 그가 들고 있는 한우 세트는 승효의 입 안으로 들어갈 예정이기는 했다.

[……씨. 승효 씨?]

[아…… 선배.]

[왜 그래? 아까부터 계속 졸던데, 차라리 그냥 집에 들어갈까?]

[……죄송합니다. 요즘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아서…….]

[액션 연습이 너무 과도하게 해서 그래. 하필 역할이 역할인지라 나보다 과하잖아. 안 되겠다. 들어가자, 데이트고 뭐고 오늘은 끝이야.]

[하지만……]

[하지만은 무슨. 어차피 매일 붙어 있는데 체력 소모하면서까지 데이트할 이유는 없어. 가자.]

곧 있으면 다가올 <역린> 크랭크인을 앞두고 승효는 액션 수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왕좌에 앉아 타인을 호령하는 폭군 역할인 이준과는 달리, 그런 이준의 곁을 보필하며 그를 지키는 척 행동하는 가짜 호위 무사를 수행하기 위해서다.

그뿐인가.

‘매일같이 나한테 영기를 빼앗기니 체력이 남아나지 않겠지.’

액션 수업도 모자라 오전에는 이준에게 영기를 주고, 밤에는 뜨거운 짓을 일삼으니 간단한 데이트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요즘엔 곧 있으면 제작 발표회를 가질 예능 <함께 가자!>의 홍보로 열을 올리고 있지 않았던가.

‘내 사람 내가 챙기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이준은 고급 한우 세트를 더욱 소중하게 부여잡으며 정면을 응시했다.

‘뭐, 공짜긴 하지만.’

가끔은 성의가 중요한 거라고.

드르륵.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하 작가님?”

이준은 엘리베이터 안에 존재하는 선객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드라마 <역린>의 메인 작가인 최재선 작가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어왔던 보조 작가였다.

“여기서 뵙네요. 라디오국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이준이 살갑게 말을 걸자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하 작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작업실 가시는 길이세요? 제가 그 방향인데 모셔다드릴까요?”

“…….”

“작가님?”

대답 없는 하 작가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이준이 그녀가 꽁꽁 감싼 채 들고 있는 뭔가를 발견했다.

“그건 뭐…….”

“비켜요!”

이준이 의아해하며 손짓하려 들자, 번쩍 고개를 든 하 작가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이준을 밀쳤다.

‘윽.’

그녀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돌연 밀려나게 된 이준이 비틀거리는 사이, 하 작가는 이미 엘리베이터 밖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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