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금섬(金蟾) (7)
<승효 씨. 오늘은 몇 시쯤 도착해?>
액션 스쿨이 있는 파주에서 벗어나 서울로 진입한 지 20분쯤 흘렀을 때였다.
어느덧 어둑해진 밤하늘을 바라보기 위해 창밖을 응시하던 승효는 소리를 울리며 도착한 문자를 옅은 미소를 지었다.
“누구 문자길래 그렇게 웃어?”
클레몽으로 이적한 이후 줄곧 승효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고수월 팀장이 룸미러 너머의 승효를 향해 물었다.
승효가 말없이 입꼬리만 올리자, 고 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휘군.”
“아시면서 왜 물으세요.”
“하아. 내가 정말 환장하겠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고 팀장이 투덜대자, 승효는 겨우 얼굴을 들어 정면을 바라봤다.
“환장?”
“너, 요즘 뭐라고 불리는지 알아?”
“글쎄요.”
“글쎄요― 긴 뭐가 글쎄요야! ‘차딱지’다, ‘차딱지’! 차휘 껌딱지!”
“아.”
“아? 아아?”
대수롭지 않은 듯한 승효의 대답에 고 팀장이 답답하다는 듯 외쳤다.
“인마, 승효야. 너 진짜 이러다 차휘한테 잡아먹혀. 그 녀석이 얼마나 무서운 녀석인 줄 몰라서 그래?”
고 팀장은 말을 이었다.
“자기만 돋보이려고 한창 잘나가던 그룹까지 해체하게 만든 무시무시한 녀석이라고.”
“…….”
“안 그래도 차휘가 제 자리 지키려고 널 견제한다 뭐다 말이 많았는데, 요즘 봐. 네가 차딱지가 된 이후론 그 말이 쏙 들어갔잖아. 이게 다, 차휘가 널 제 편으로 만들어서 네 몫까지 앗아가려는 속셈이라고. 오죽하면 너랑 차휘를 엮어서 커플로…….”
“……형.”
“왜!”
“더 이상의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어?”
“특히 선배의 험담이라면 더욱이요.”
승효의 칼 같은 답변에 고수월 팀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이게 다 너 잘되라고……! 으으,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고 팀장은 백기를 들었다.
“하여간 언제부터인가 제 일보다 차휘가 우선이지. 이젠 형이고 뭐고 없어.”
승효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도착한 문자에 답하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30분 정도 더 가면 집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집에 오지 말고, 오늘은 밖에서 볼까?>
<네?>
<친한 후배 중 한 명이 영화를 찍었어. 오늘 시사회를 한다는데, 혼자 가기 심심해서. 어때, 같이 갈래?>
둘러 말하기는 했으나 한마디로 데이트 신청이다.
‘눈에 훤히 보이는데.’
차이준에게 친한 연예계 후배나 선배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승효는 피식 웃고 말았다.
“또 무슨 일인데.”
그 모습을 놓칠 리 없는 고 팀장이 불만에 찬 목소리를 흘리자 승효는 대답했다.
“저, 근처 역에 좀 세워 주십시오.”
* * *
“……씨, 승효 씨! 여기야.”
휘휘, 손을 휘젓는 키 큰 남자가 승효를 발견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구두에 검은 슬랙스, 검은 티셔츠에 심지어 검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남자는 가까이서 봐도, 멀리서 봐도 ‘차휘’ 그 자체였다.
주차장에서 영화관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근처 벽에 기대어 있던 남자가 손을 흔들자 승효는 웃으며 다가가려다 말았다.
이준이 걸음을 움직이려는 승효를 향해 손을 저었기 때문이다.
― Rrrr. Rrrr.
곧 전화가 걸려 왔다.
“네.”
― 왔네! 길은 안 막혔고?
들뜬 음성이 들렸다.
“괜찮았어요. 그런데 왜 여기 나와 계세요?”
― 왜긴. 승효 씨 기다렸지.
이준은 좌우를 둘러봤다.
― 고 팀장님은? 먼저 가셨어?
그의 물음에 수월이 차마 이준과의 만남을 극도로 꺼린다고 답할 수 없었던 승효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 뭐…… 하긴. 고 팀장님은 승효 씨 혼자만 담당하시는데도 꽤 바쁘시더라. 그래서 승효 씨한테 일감이 많이 오나 봐.
승효는 작게 웃었다.
“선배는 레드 카펫에 서십니까?”
― 레드 카펫? 무슨 레드 카펫?
“친한 후배님이 시사회에 초대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 …….
한동안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얼마 뒤. 젠장, 하고 낮은 욕설을 뱉어 낸 이준이 답했다.
― 그런 이유로 불러냈던 걸 잊었어.
승효는 쿡쿡 웃었다.
“역시 거짓말이었군요.”
어쩐지 이곳 영화관으로 오는 동안 반드시 있어야 할 연예계 관계자들을 보지 못했다.
카메라맨과 기자들도 마찬가지.
승효의 말에 이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 좀 봐줘. 오죽 그 영화가 보고 싶었으면 이렇게 불렀겠어. 게다가…….
게다가?
― 양랑 그 녀석이 오늘은 집에 있단 말이야.
“산군이요?”
― 벌써 몇 번이나 쫓아냈는데 무슨 악귀도 아니고 다시 돌아와서 나만 노려보고 있으니, 뭘 할 수가 있어야지.
“오늘도 ‘쫓아내신’ 겁니까?”
이준은 혀를 내둘렀다.
― 말도 마. 요즘 이상할 정도로 날 건드린단 말이야. 하루에 몇 번을 쫓아내는지 모르겠다고.
이준은 근래 들어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의 종속비생인 양랑을 지하 세계로 쫓아내는 언령술을 사용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양랑의 불만은 늘어 갔다.
[주인! 잘 들어. 본군이 마지막으로 말한다. 한 번만 더 본군을 멋대로 쫓아내면, 아무리 주인이라도 가만두지 않을 거다!]
[가만 안 두면 어쩔 건데?]
[어쩌기는! 주인이 애원할 때까지 주인의 집에서 나가지 않을 거다!]
[그게 복수야?]
[본군의 말이 우습게 들리나 보군. 주인,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 같아 말해 주는데, 본군이 주인의 집에 주둔한다면 주인은 구가 녀석이랑 붙어 있을 수가 없을 거다.]
[……!]
[그간 주인과 구가 녀석이 하던 입맞춤 역시 할 수 없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본군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너희 두 녀석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날을 잡은 거군요.”
승효의 중얼거림에 이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 단단히 화가 났어. 풀리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안 되겠다. 가는 길에 팝콘이라도 사 가야지. 참, 그 녀석 무슨 맛 좋아했지?
“산군은 치즈 맛이라면 사족을 못 쓰십니다.”
― 하여간 뚱냥이 자식, 귀찮다니까. 참. 얼른 타자. 곧 영화 시작할 거야.
거리를 둔 채 승효와의 전화 통화를 이어가던 이준이 몸을 돌렸다.
“그런데 선배.”
― 응?
“우리 계속, 이거 붙들고 있어야 합니까?”
함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핸드폰을 거두지 않는 이준을 보며 승효가 물었다.
이준은 그를 힐끔거리더니 다시 엘리베이터 전광판을 올려다봤다.
― 영화 같지 않아?
뭐?
― 나 한 번쯤 실제로 이런 거 해 보고 싶었다고. 첩보 영화처럼 말이지.
‘그러기엔 이미 들켜 버린 것 같은데요.’
그것도 그럴 것이―.
“저기 구차 커플 아니야?”
“헉. 맞는 것 같은데요?”
“둘 다 키 엄청 크네. 웬만한 사람들은 가까이 가지도 못하겠어.”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니 더 신경 쓰이잖아. 차라리 벗으라고 말해 주고 올까 봐요.”
이미 이준과 승효의 정체는 그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순간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상태였다.
“여기서 기다려. 얼른 표 뽑아 올게.”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키오스크 쪽으로 향하는 이준의 뒷모습을, 승효는 가만히 응시했다.
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
단양에서 돌아온 승효는 이준으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준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을 자각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자신의 오랜 기대로 인한 착각일 거라 여겼다.
자신이 아는 이준은 상상 이상으로 정이 많고, 제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받은 그대로 보답하고자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승효 씨가 내 사람이 된다면…… 난 우리 앞에 어떤 미래가 드리워지든, 승효 씨와 함께할 거야.]
하지만 이준의 입 밖으로 흘러나온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멎어 버리는 줄 알았다.
승효는 이준이 억지로 씌워 준 버킷햇의 창 부분을 슬쩍 들어 올렸다.
멀리서 표를 뽑고 그에게 두 장의 표를 들어 보이는 이준이 보였다.
만약.
‘만약 당신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기다란 다리를 쭉쭉 뻗으며 제게 다가오는 이준을 향해 하고 싶었던, 그리고 해야 할 말은 입 안에 머문 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무거워진 마음에 살짝 아래로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릴 무렵이었다.
“오빠, 저 얼마 전에 오빠 보라 봤어요!”
“진짜 차휘예요? 오늘 무슨 영화 보러 오신 거예요?”
“여기 사인 좀! 사인 좀 해 주세요!”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준의 존재를 눈치챘음에도 그에게 반응하지 않던 사람들이 돌연 이준을 둘러싼 채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단체 영화 관람을 하러 온 교복을 입은 소녀들이 있다는 걸 승효는 금세 알아차렸다.
‘큰일이군.’
승효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어, 저기…….”
처음엔 여유롭게 그들과 대화를 이어 나가던 이준은 순식간에 불어난 사람들을 발견하고 짐짓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승효가 사람들의 틈 속에서 이준의 손을 잡으려 할 때였다.
“윽!”
이준이 사방에서 뻗어오는 손길에 그만 뺨을 긁혀 버렸다.
“선배!” 하고, 그 모습을 포착한 승효가 당황한 사람들을 떼어 내며 그에게 다가갔다.
“구, 구승효다!”
“차휘랑 같이 왔나 봐!”
“둘이 진짜 친하긴 한가 보네. 사진, 사진 찍어!”
인파를 파고들며 이준을 부축한 승효는 곳곳에서 들려오는 외침 따윈 전혀 개의치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봐요.”
“어…….”
승효는 이준의 오른쪽 뺨 밑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손톱자국에 얼굴을 구겼다.
“너희, 가만 안…….”
“입 다물어.”
이준은 콧등으로 내려간 선글라스를 들어 올리는 척하며 승효에게 속삭였다.
승효가 놀라 멈칫하자, 이준은 빙긋 입꼬리를 올리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그는 소싯적 수많은 사람 앞에 지어 보이던 ‘아이돌 미소’를 얼굴에 그리며, 당황한 관중들을 향해 말했다.
“하하, 여러분. 잠깐 뒤로 물러나 주시겠어요? 너무 가까이 오니 하마터면 큰 사고가 날 뻔했어. 이러다간 다 같이 다칠 것 같으니 우리 진정하자고요!”
그의 밝은 목소리에 사람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더 짙게 웃던 이준은 슬며시 일어나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승효에게 손을 내밀었다.
승효가 그 손을 잡고 일어나자 이준은 주위를 둘러보며 볼멘소리를 흘렸다.
“오랜만에 영화 한 편 보려고 승효 씨까지 불러냈는데, 여러분이 이렇게 가까이 오면 우리가 어떻게 쉴 수 있겠어요. 그러지 말고 차라리 줄을 서는 게 어때요? 나도, 그리고 승효 씨도 여기 있는 모든 분한테 사인이며 사진이며 뭐든 해 줄 테니 다들 흥분하진 말아요.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