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연이라면 악연-71화 (72/72)

71화

금섬(金蟾) (8)

“아야야!”

면봉에 연고를 묻혀 상처 부위를 솔솔 발라 주던 승효의 손길에 이준은 미간을 좁혔다.

“아파…….” 하고 눈물을 글썽이는 이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승효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그때 왜 그리 참으신 겁니까? 이렇게 아파할 거면서.”

자신을 말린 이준이 아직도 원망스러운 건지, 승효가 불만에 찬 목소리를 흘렸다.

‘얘가 뭘 모르네.’

이준은 퉁명스러운 승효의 반응에 쯧쯧 혀를 찼다.

“연습생 시절을 안 거쳐서 모르나? 승효 씨는 아직 멀었네.”

승효가 무슨 소리냐는 듯 미간을 좁히자 이준은 설명했다.

“만약 안 참으면. 그 상황에서 사람들한테 소리라도 지르려고?”

승효가 가만히 이준을 바라봤다. 긍정의 표현이었다.

‘정말로 그러려 했다고?’

이준은 혀를 찼다.

“아서라. 행여나 승효 씨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간 SNS는 물론 각종 커뮤니티에서 이런 제목의 글만 나돌기 시작할걸? ‘진작 알아봤다, 성격 파탄자 구승효!’라고?”

“선배가 다치는 것보단 낫습니다.”

“이봐요, 구승효 씨.”

이준은 투덜대는 승효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차이준의 연인이기 이전에 일단은 대한민국에서 꽤 잘나가는 연예인이에요. 그리고 그런 널 그 자리에 앉혀 준 건 승효 씨를 지지하는 수많은 팬들이고. 그런 사람들이 너한테 실망하게 만드는 걸 내가 두고 볼 것 같아?”

승효는 이준의 따끔한 지적에 머뭇거리다 중얼거렸다.

“연예인 같네요.”

“응? 뭐가?”

승효의 눈이 이준에게 꽂혔다.

“선배, ‘진짜’ 연예인 같다고요.”

아니 그럼 여태껏 가짜인 줄 알았어?

승효는 말을 이었다.

“선배가 그렇게 팬들을 아끼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하하, 팬들은 이 몸의 양분과도 같다고. 그분들이 날 키운 거라니까? 난 그분들 덕분에 이렇게 잘 먹고 잘살고 있는 거란 말이지! 하니 당연히 아껴야지. 최고로 아낀다고?”

“…….”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나한테 최, 최고는 너야.”

서슬퍼레지던 승효의 눈이 조금 가라앉았다.

무서운 녀석.

흠칫하던 이준은 말을 이었다.

“여하튼 잘 참았어. 본인은 다쳐도, 내가 다치는 건 못 참는 우리 구승효 씨, 잘 참았다고.”

생글거리는 이준을 보고도 대꾸하지 않는 승효의 얼굴이 미묘하다.

‘화가 안 풀렸나?’

영화관에서 갑자기 몰려든 팬들로 인해 얼굴에 상처를 입은 것은 이준이었지만, 어쩐지 승효가 과한 반응을 보였다.

그 냉정한 눈빛에 승효에게 다가가려던 팬 몇몇이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난 걸 보면, 말은 다 했지.

이준은 지그시 승효를 응시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제 얼굴을 살피며 묻고 또 물었던 승효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기어코 이준의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며 그를 소파에 앉혔다.

‘상처가 깊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깊었다면 진짜 무슨 짓을 저질렀을 것 같네.’

살벌한 반응을 보이던 승효를 향해 이준은 씨익 입꼬리를 늘였다.

“승효 씨. 상으로 뭘 줄까?”

그제야 구겨졌던 승효의 얼굴이 펴졌다.

“상이요?”

은근히 기대하는 승효를 보며 이준은 대답했다.

“화가 나는데도 잘 참았잖아. 그러니 포상을 줘야지. 어때. 뭐 원하는 거라도 있어?”

이준이 고개를 들어 승효를 올려다보자 승효의 눈빛이 살짝 일렁였다.

이준은 대답 않고 자신을 내려다보기만 하는 승효를 직시하며 그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눈동자 색이 정말로 옅네.’

이렇게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을 때면 문득 깨닫는 것이, 승효의 동공 색은 정말이지 옅다.

마치 속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오묘한 기분이 들어서 시선을 뗄 수가 없을 정도다.

한없이 짙은 자신과는 무척 대조적이어서 더욱더 눈이 간달까.

“승……!”

혹시 제 말을 못 들었나 싶어 한 번 더 입을 열려던 이준이 갑자기 성큼 다가오는 승효의 접근에 뒤로 물러났다.

승효는 뒷걸음질 치는 이준을 보고 또 한 걸음 다가왔다. 이준은 놀라 뒤로 피했다.

‘윽!’

그렇게 접근하고, 물러나는 걸 반복하길 몇 번.

딱딱한 벽에 등이 닿는 것을 느낀 이준이 놀라 승효를 응시하자 승효가 벽에 손을 짚었다.

“선배.”

“어, 어?”

이준은 눈을 내리깐 채 저를 바라보고 있는 승효를 쳐다보며 어색하게 대꾸했다.

승효가 빙긋 미소 지었다.

“포상으로…… 선배를 원해도 됩니까?”

그야말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말이었다. 이준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하하 웃었다.

“스, 승효 씨. 우리 막 들어왔거든. 아직 제대로 씻지도 않았는데…….”

“괜찮아요.”

“아까 사,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땀 냄새도 날 거고…….”

“선배 냄새라면 상관없어요.”

“보, 보는 눈이…….”

“먼저 살펴봤는데, 양랑은 놀러 나간 것 같습니다. 부르기 전까진 오지 않을 거고요.”

이, 이 망할 뚱냥이 같으니.

‘꼭 필요할 때만 없어.’

당황하는 이준을 내려다보던 승효가 벽을 짚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의 턱을 붙잡았다.

‘헉.’

스윽, 올라가는 제 턱 끝의 행방에 꿀꺽 침이 삼켜졌다.

“선배.”

승효가 이준을 부르자 이준은 그의 눈을 바라봤다. 마법에 걸리듯, 그의 말과 행동에 온 신경을 집중하려던 이준은 무의식적으로 올렸던 눈꺼풀을 스르륵 내리려 했다.

그런 이준이 막 얼굴을 가까이 대는 승효의 접근을 허락하려 할 때였다.

“으아악!”

이준은 승효의 어깨 너머에 서 있던 검은 인영을 발견하고선 승효를 세게 밀쳤다.

승효가 무슨 짓이냐는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자 이준은 헉, 헉 숨을 몰아쉬며 승효의 뒤를 가리켰다.

탁.

어둡던 거실의 불이 그제야 켜졌다.

이준은 불빛 속에 나타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승효의 등 뒤에 있던 큰 키의 소년이 검은 눈으로 이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님.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 * *

[두 분 정말 잘 어울려요! 완전 찐친 그 자체예요!]

영화를 보러 왔다가 졸지에 팬미팅 겸 사인회를 하게 된 이준과 승효를 바라보며 어떤 팬이 외쳤다.

그러자 이준이 피식 웃더니 승효의 어깨 위로 제 팔을 얹으며 그를 끌어당겼다.

[겨우 찐친이라니 엄청 섭섭하네. 부부처럼은 안 보이고?]

[네?]

[우리 완전 부부 수준이라고요. 얼마나 자주 얼굴을 대고 사는지 몰라. 참, 곧 있으면 우리가 동시에 출연하는 예능도 런칭 될 건데, 아직 그 소식은 못 들으셨어?]

[안 그래도 그 예능 기다리고 있어요!]

[정말? 잘됐네! 다들 오늘 일 기억해두고, 꼭 SNS나 커뮤에 올려요. 우리 엄청 친하다고 홍보 많이 해 주고!]

대놓고 부부 사이임을 어필해 보아도 전혀 의심하지 않는 팬들을 향해 이준은 예능 홍보까지 선보였다.

과연 십 년이 넘는 연예계 생활은 괜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쯤, 능청스레 승효와의 친분까지 자랑하던 이준은 짧은 팬미팅을 마치고 승효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어 아마도 승효를 달래기 위해 그답지 않은 애교까지 부리는 이준을 보며 조금, 아주 조금 몰려든 사람들에게 받은 분노가 가라앉던 시점이었는데 말이다.

“합숙? 벌써 그 시기야?”

짐짓 놀란 음성이 이준으로부터 터져 나왔다.

이준은 방금 전까지 승효에게 집중하던 신경을 다른 사내에게 두고 있었는데, 어찌나 그 눈길에 애정이 담겨 있는지 은근한 질투가 날 정도였다.

승효는 이준이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구가의 가주님.]

고작 열일곱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건장한 소년이 승효를 향해 예를 갖추었다.

겉으로는 냉정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모든 일에 신경을 쓰는 이준과는 달리 겉모습도, 속내도 모두 의뭉스러운 소년이었다.

‘정말로 열일곱이 맞는 건가.’

이준을 꼬박꼬박 ‘형님’으로 부르고, 승효를 굳이 ‘구가의 가주님’이라고 불러 대는 고현 차가 미래의 가주는 올 11월에 있을 수학올림피아드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여름 학교에 참석하려 한다는 핑계를 대며 이준과 승효의 동거 집을 찾았다.

“강주 누님께 말씀드리니 형님의 집에서 출발하는 편이 더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누님께서 형님께 연락하신다고 했었는데…… 혹시 받지 못하신 겁니까?”

“어, 그게…….”

이준이 난처한 반응을 보이자 휘준이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너무 염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동생이라도 약조 없이는 주인도 없는 집에 마음대로 들어와 있어선 안 되는 거였는데…….”

커다란 체격을 지닌 소년이 한 떨기의 꽃처럼 가련한 표정을 짓자 이준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한 거라면 지금이라도 나가서 잘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지금 본가로 가는 건 어려울 테니 근처 호텔에서라도…….”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형이 언제 너보고 나가라고 그랬어? 안 돼. 오늘 여기서 자. 승효 씨!”

승효는 저를 부르는 이준을 응시했다.

“우리 막내, 오늘 하루 여기서 자도 되지? 어차피 이 집에 방 많잖아. 안 그래?”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긴 했으나, 승효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배의 가족은 제 가족이기도 하니 당연히 괜찮습니다.”

“그거 잘됐네! 어디 보자, 우리 휘준이가 어디서 자야 하나…….”

이준이 주위를 둘러봤다.

“형님. 만약 잘 곳이 마땅하지 않다면, 전 형님 방에서 형님과 잠을 자도 됩니다.”

태연한 휘준의 발언에 이준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저를 흘끔댔다.

근래 이준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준과 같은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어떡해야 해?”라는 눈빛으로 저를 응시하는 이준을 보며 승효는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다 티 납니다.’

승효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뱉어 내려다 말았다.

생긋 웃으며 이준에게 말하던 휘준의 눈빛이 어느덧 제게 꽂힌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휘준 군 말대로 하시죠. 휘준 군은 선배 방을 쓰고, 대신 내일 합숙 가야 하는 휘준 군은 혼자, 그리고 선배는 제 침대를 같이 쓰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네?”

“어, 그, 그래? 그래! 그게 좋겠어! 아무래도 휘준이는 컨디션 관리가 중요하니까. 고마워, 승효 씨!”

“…….”

이준은 안심했다는 듯 승효에게 고마움을 표현했지만, 휘준의 눈은 더욱 날카롭게 변했다.

자꾸만 코웃음이 나려는 것을 꾹 눌러 담은 승효는 입을 열었다.

“그럼 두 분은 마저 얘기하시죠. 전 선배 방을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면 고맙지. 휘준아, 이리 와 봐. 아니, 넌…… 어째 키가 더 큰 것 같네? 나랑 비슷한 거 아냐?”

승효는 휘준을 이끌고 소파 쪽으로 데려가는 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이준의 방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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