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 상태인 어머니를 설득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때만큼은 세상의 어느 효자보다 극진하고 다정하게 그녀를 달랬다. 일은 벌어졌으니 경찰에 자수하자고. 아버지는 폭력 전과만 11범이었고, 평소 행실도 문제가 많았으니 정당방위를 주장할 수 있을 거라고. 끔찍한 가정 폭력의 산증인인 우형석 본인이 얼마든지 어머니를 돕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어머니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아니,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할 여력이 없었다. 그녀는 그날 바로 경찰에 자신의 범행을 고백했다.
어머니의 재판이 있던 날, 우형석은 모처럼 말끔하게 차려입고 법원으로 향했다. 재판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의를 입은 어머니가 보였다. 우형석을 발견한 그녀는 몇 달 새 떼꾼해진 얼굴로 옅게 웃었다. 덩달아 미소 지었다.
길고 지루한 공방전이 이어졌다. 검사 측은 그 어떤 사유도 가족을 살해할 만한 이유는 될 수 없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변호사가 나섰다.
‘존경하는 판사님, 피고의 아들을 증인으로 신청합니다.’
판사의 승인이 떨어졌다. 우형석은 앞으로 나아가 진실만 말할 것을 선언하고 증인석에 앉았다. 어머니와 그녀의 변호사는 기대한 찬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가까이 다가온 변호사가 사전에 귀띔했던 질문들을 차례차례 던졌다.
‘증인. 증인은 피해자와 어떤 관계입니까?’
‘제 친아버지입니다.’
‘그렇군요. 피고는 피해자로부터 오랜 가정 폭력에 시달렸고, 피해자의 여성 편력, 노름, 폭력 전과 등으로 큰 갈등을 겪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피고와 피해자의 친아들이라면 그 정황을 누구보다 잘 알 텐데요. 이에 동의하십니까?’
우형석은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응시했다. 그녀는 그를 다독이듯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형석은 뜸 들이지 않고 준비해 온 진술을 시작했다.
‘범죄 전과만으로 한 사람을 판가름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제 아버지가 그랬습니다. 다혈질이라 불의를 못 참으셨을 뿐, 어머니가 매도하는 것처럼 악인은 아니었습니다. 밖에선 폭력을 일삼는 추악한 범죄자였는지 몰라도 가정에는 충실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주기적으로 집에 오신 건 아니었지만, 되도록 자주 들러서 혼자 방치돼 있던 저랑 재밌게 놀아 주시기도 했고, 돈이 생기는 족족 생활비로 보내셨습니다. 집에선 단 한 번도 폭력을 행사하신 적이 없고요.’
예상 밖 증언에 변호사와 어머니의 낯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아니, 증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다른 증인들과는 얘기가 다른데요.’
변호사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어투에도 날이 서 있진 않았다. 그런데도 꼭 얘기가 다르지 않냐고 다그치는 것 같았다.
우형석의 어머니는 초점 없는 눈으로 아들을 볼 뿐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믿지 않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저으면서. 곧 자신에게 들이닥칠 불행을 예견한 것 같았다.
판사는 흥미로운 눈으로 우형석을 지켜봤다.
‘혹시 모르죠, 다른 증인들이 변호사님과 모종의 거래라도 했는지.’
‘증인, 그런 발언은 적절치 않습니다.’
‘그런가요? 솔직히 전 다른 사람들이 증언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어머니의 지인들이 우리 집에 찾아온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남의 집안 사정을 어떻게 안다고 떠드는 건지. 게다가 어머니는 제게도 유리하게 진술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변호사님도 같이 계셨으니까, 잘 아시잖아요?’
재판장이 크게 술렁였다. 피고와 피해자의 아들인 우형석은 가장 객관적일 수 없으면서도 가장 중립적인 증인이었다. 지금까지 나왔던 증언들과 그의 증언이 첨예하게 대립하긴 하지만 거짓으로 치부할 순 없었다.
검사는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라도 만난 것처럼 환한 얼굴이 됐다. 그는 즉시 증인 신문을 승인받고 우형석에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피고는 평소 어떤 사람이었나요?’
우형석은 자신의 어머니를 똑똑히 마주 봤다. 그러곤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벼르고 벼렸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오히려 돈 번다는 핑계로 밖으로 나돈 건 어머니였습니다. 해가 떨어지면 나가서 다음 날 아침에야 만취해 돌아오셨고, 어쩔 땐 며칠씩 말도 없이 집을 비우셨습니다. 열 살도 안 된 어린 아들의 끼니도 챙기지 않으셨죠. 아버지가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으셨던 건 어머니의 병적인 의부증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폰을 복제해서 검열하고, 위치를 추적하고, 아버지가 마주치는 모든 여자의 신상을 캤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사람을 시켜 몹쓸 짓도 했던 것 같고요. 아내가 그렇게까지 집착하는데, 어떤 남자가 같이 살고 싶을까요. 아버지가 너무 가엾었습니다. 암거미처럼, 언젠가 어머니가 아버지를 잡아먹지 않을까 생각했죠. 전 어머니가 무섭고 징그러웠습니다. 아버지를 닮았단 이유로 어린 아들을 성추행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거든요. 아마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도 이혼 얘기를 꺼낸 게 화근이었을 겁니다. 아버지의 도장만 찍힌 이혼 신청서를, 경찰이 발견했다고 들었는데요?’
재판장 내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피고석을 향했다. 변호사조차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어머니를 봤다. 그 눈빛에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존재를 향한 혐오가 가득했다.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우형석은 쐐기를 박고 증인석에서 물러났다. 거짓말 탐지기로 위증 여부를 가린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였다. 어머니에 관한 진술만큼은 한 치의 거짓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남편을 향한 집착으로 어린 아들을 학대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애꿎은 여자들의 납치를 사주한 것으로도 부족해서 이혼을 요구하던 ‘선량한’ 남편을 살해하기까지 한 파렴치한 여자는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물론 그녀가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변호사 측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김제국은 권수혁의 집무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구매자를 직접 만나 본 적은 없다. 그저 조건에 맞는 물건을 인계하고 돈을 받았을 뿐. 그래서 그의 이름이나 직업 따위도 알지 못했다. 그저 ‘백무 상사’라는 업체명으로 하는 일을 추측해 볼 따름이었다. 빌딩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는 걸 보면 꽤 사업 규모가 큰 듯했다.
위화감이 들었던 건 온통 남자 직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온통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더러 일반 사원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조폭을 연상시킬 정도로 체격이 좋고 인상도 험악했다. 사내 분위기도 그저 고요했다. 빌딩 안으로 들어가려면 핸드폰을 맡겨야 한다는 점도 이상했다. 경비에게 핸드폰을 압수당하기도 했다. 입구에는 법원이나 공항에서나 봤던 보안 검색기를 통과해야 했다. 그러고도 한차례 더 몸수색을 받았다. 뭔가, 들어와선 안 될 곳에 발을 들인 느낌이었다.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현장에 나가 있다는 거래자를 만나기 위해 벌써 2시간째 대기 중이었다. 사무용 책상에는 ‘대표 백도운’이라고 새겨진 명패가 놓여 있었다. 거래자의 이름이겠지 싶었다.
김제국은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맞은편 벽면에 걸린 호랑이 가죽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모조품일까. 실제로 그만한 덩치의 호랑이가 존재했다곤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 정도로 호랑이 가죽은 벽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눈알이나 발톱, 털 한 올 한 올은 조잡한 구석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느낌.
침을 꼴깍 삼키며 서서히 손을 뻗었다. 김제국의 손끝이 막 호랑이의 털에 닿으려던 찰나, 벌컥 문이 열렸다. 그곳으로 장신의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권수혁이었다. 화들짝 놀란 김제국은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 어, 저….”
너무 당황한 나머지 헛말이 나왔다. 그리고 그런 제 모습이 부끄러워 또 당황했다. 권수혁은 그런 김제국을 말없이 보다가 자신의 책상으로 갔다. 의자를 당겨 몸을 앉히곤 두 손을 엇갈려 잡은 채 다시 김제국을 주시한다.
직원 하나가 밖에서 문을 닫았다. 그러면서 집무실 안에는 권수혁과 김제국만 남겨졌다. 필요 이상으로 넓었던 공간이 돌연 비좁아진 것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압박감이 전신을 눌렀다.
한 회사의 대표라기에 최소 중년은 됐을 줄 알았다. 그러나 권수혁은 기껏해야 서른 초중반으로 보였다. 얼굴도 대역을 내세운 건가 싶게 잘생겼건만, 당최 호감이 생기진 않았다. 서늘한 인상 탓일까. 그의 고요한 눈빛을 받고 있자니 괜스레 숨이 말려 들어갔다.
더불어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직감을 정확히 뭐라고 형언할 순 없지만, 권수혁을 맞닥뜨리자마자 뭔가 잘못됐다 싶었다. 미친개를 피하려다 외딴길에서 큰 범을 마주친 기분.
권수혁의 눈동자는 마치 까만 얼음을 박아 넣은 듯했다. 감정이랄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그에게 관찰당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대놓고 남을 샅샅이 훑어보는 행동은 먹잇감을 저울질하는 포식자 같았다.
“나를 찾으셨다고.”
한참 만에야 입을 뗀다. 실제로 흐른 시간은 체감과 다를지 몰랐다.
생각보다 낮은 음성이었다. 존대를 사용하고 있지만, 전혀 존중받는 기분이 나지 않았다. 되레 기만 더 죽었을 따름이었다. 김제국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송구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게… 선생님과 거래한 물건에 하자가 좀 생겼습니다. 10년 남짓 가족이 면회 온 적도 없고, 보호자와 연락도 닿지 않아서 문제가 없을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거래하고 며칠 만에 갑자기 동생이라는 자가 찾아와서 퇴원을 요구하더라고요. 우리 병원에선 가족 동의하에는 완치되지 않은 환자라도 퇴원할 수 있게 돼 있어서….”
“난 분명 뒤탈 없는 걸 준비해 달라고 했을 텐데요?”
“네,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피치 못하게 됐으니까요. 일단 이번 한 번만 절 도와주시면 제가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물건을 구해서 이른 시일 안에 전해 드리려고….”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난 그게 소란스럽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으니까.”
권수혁은 김제국의 말을 자르며 단언했다. 그러곤 더 할 말이 남았냐는 듯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김제국이 꽉 주먹을 쥐었다. 그도 제 제안이 쉽게 먹히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권수혁이 제시한 조건은 까다로운 편이라, 말처럼 대체품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 희귀성 때문에 주완의 몸값을 평소보다 더 두둑이 챙기지 않았던가. 더구나 권수혁이 주완을 마음에 들어 하기까지 하니.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반드시 결판을 지어야 했다. 당근이 먹히지 않으면 채찍을 들 수밖에 없었다.
김제국 자신과 거래한 것부터 수상한 회사 운영까지. 권수혁에겐 비밀이 많아 보였다. 그것들이 수면에 드러나는 것보다 꺼림칙한 일이 있을까.
“제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선생님.”
김제국이 졸렬한 미소를 싹 감추고 낯을 굳혔다. 두 눈에도 독기가 서렸다.
확연한 태도 변화에 권수혁이 설핏 웃었다. 계속해 보라는 듯 흥미로운 눈길을 보내오기도 했다. 기세에 밀리면 안 된다.
“제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박주완의 동생이란 작자가 병원이든, 저든 고발할 게 분명하니까요. 그렇게 되면 저로서도 혼자 다 떠안고 죽을 순 없고, 암시장 네트워크가 탄로 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겁니다. 선생님도 수사망을 피해 가시긴 어려울 텐데, 괜히 물건 하나 욕심내다가 사업까지 망치시겠습니까?”
잠자코 듣던 권수혁이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그 동생이란 자한테 나와 거래했다고 털어놨습니까.”
“아뇨. 아직요.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박주완을 돌려주시기만 하면 아무 소란 없이, 조용히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아는 다른 사람은?”
“동료 의사가 박주완이 사라진 걸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누구와 거래했는지는 모르고요. 그나마 지금은 수습할 수 있는 단계입니다. 그러니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움직이시죠.”
김제국의 목소리가 사뭇 들떴다. 거의 다 설득했다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권수혁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박주완은 돌려줄 수 없습니다.”
“뭐라고요? 끝까지 가 보자, 이겁니까?”
김제국이 확 인상을 구겼다. 농락당했다고 여겨졌는지 얼굴도 붉으락푸르락했다.
권수혁이 상체를 앞쪽으로 기울여 왔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협이 됐다. 저도 모르게 전신이 바짝 긴장됐다.
권수혁은 대신, 하며 김제국이 혹할 만한 제안을 던졌다.
“돈을 더 드리죠. 이전 액수의 세 배를 주겠습니다. 그걸로 여길 뜨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내가 박주완을 돌려준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닐 텐데. 박주완이 입이라도 열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원하실 경우, 무사히 출국하시게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김제국의 얼굴이 탁 펴졌다.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긴가민가한 듯했다. 그렇게 해 준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김제국은 꿀꺽 침을 삼켰다. 주완을 거래하고 받은 돈이 10억이었다. 그 세 배면 절대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달리 생각하면 그 목돈을 더 주고도 주완을 고집할 만큼 그가 절실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맹목적인 인간은 셈에 둔해지기 마련이다. 조금 더 배팅해도 되지 않을까. 김제국은 떨리는 두 손을 꼭 맞잡으면서 냅다 요구했다.
“받은 돈의 열 배를 주시죠. 그러면 선생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권수혁은 놀라지 않았다. 그저 잠시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김제국의 귓가에는 거칠어진 제 숨소리만 들렸다.
이내 권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뚜벅뚜벅 김제국에게 다가갔다. 김제국은 저도 모르게 느릿느릿 뒷걸음쳤다. 소용없게도 금세 권수혁의 그림자에 먹혔다. 권수혁은 바짝 얼어붙은 그를 보면서 서늘하게 웃었다.
“…드리지. 얼마든지.”
원해던 대답을 들었건만, 어쩐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
우형석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수하가 눈치껏 달려와 불을 붙여 주었다. 그러곤 담배가 잘 타오르는 걸 확인한 뒤에 다시 물러났다. 섣불리 말을 붙이진 않았다. 언젠가 교도소 면회를 다녀온 그에게 괜찮냐고 물었다가 영문도 모른 채 얻어맞은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형석은 두 볼이 홀쭉해지도록 필터를 빨았다. 폐 속 가득 매캐한 연기가 밀려들어 왔다. 어머니의 추한 마지막을 떠올리니 실실 웃음이 났다.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가 죽길 바랐다. 그래야 어머니도 끔찍한 형벌을 받을 테니까. 그 소망을, 꼬박 27년 만에 이뤘다.
마냥 후련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영문을 모르겠다. 너무 쉽게 보낸 탓일까. 제 속을 뒤덮은 그늘은 겨우 손가락 한 마디만큼 벗겨졌을 뿐이었다. 언제쯤에나 그 케케묵은 감정들이 다 해소될지, 갑갑하고 짜증이 났다. 대체 더 어떻게 해야.
오늘따라 낙조가 붉었다. 그 아린 빛무리를 하염없이 보고 있는데, 불현듯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다. 담배를 문 채 바로 그쪽을 돌아봤다. 수하는 괜히 불똥이 튈까 몸을 사리며 얼른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어, 나야. 무슨 일이야?”
연방 고개를 조아리는 수하에게서 눈을 뗐다. 뭔가를 보고받는 모양인지 통화가 제법 길어졌다. 그사이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밤이 찾아왔다. 띄엄띄엄 선 가로등도 희미하게 점등됐다.
통화를 끝낸 수하가 재차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우형석은 피우던 담배를 던져 버리곤 그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야?”
“형님, 김제국이란 의사에 대해서 알아봤답니다.”
“그래? 말해 봐.”
“네. 지방 의대를 졸업하고, 그 지역 대학 병원에서 레지던트까지 수료했답니다. 전문의가 되고 나서는 이름난 종합 병원에서 근무했고요. 그런데 그 시기에 담당 환자한테 손을 대는 바람에 병원에서 쫓겨난 모양입니다. 업계에 소문이 나서 재취업도 힘들어졌고, 개원할 형편도 아니었다나 봅니다. 그러다 지인 소개로 전에 가셨던, 그 중앙 정신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답니다. 12년 전부터 거기 있었다니까, 박주완이 입원했을 때부터 쭉 담당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핵심만 지껄여, 핵심만. 그래서 구린 구석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우형석이 서슴없이 수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수하는 극렬한 통증에도 신음을 삼키고 죄송합니다, 했다. 보고가 이어졌다.
“전에 그 병원에서 근무했던 자 말로는, 입원 환자들이 종종 사라졌다고 합니다. 다시 돌아온 사람들도 있기는 한데, 하나같이 몸뚱이에 칼 댄 자국이 있었답니다. 의료진은 아니라 잘 모르는 것 같았지만, 장기를 떼인 것 같았다고요. 그 거래를 주선했던 게 김제국일 가능성이 큽니다. 병원에서 가장 경력이 오래되기도 했고, 환자들이 사라지는 날마다 그 작자가 경비들한테 잠시 쉬다 오라고 돈도 찔러주고 그랬다고. 뭐, 병원 근무자들은 공공연히 아는 비밀이었는데, 자기 일도 아니고 그 병원 아니면 오갈 데 없는 처지들이라 모르는 척했나 봅니다. 박주완이 사라진 날도 똑같은 수법을 썼다던데요.”
듣고 있던 우형석이 하, 하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어이가 없는 듯했다.
“그러니까 그 의사 새끼가 박주완을 날름 팔아먹었다? 그래 놓고 나한텐 박주완을 데려가려면 누구 동의가 필요하네, 마네 했던 거고? 하, 좀 배운 놈이라고 정중하게 대해 줬더니 사람을 우습게 보네.”
우형석은 돌연 왁자한 웃음을 터트렸다. 짐작하는 바대로라면, 박주완은 이미 토막토막 썰려 통나무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바탕 웃고 나니 여릿한 현기증이 돌았다. 웃음을 사그라뜨린 우형석의 이마엔 굵은 핏대가 일어서 있었다. 분기에 눈가도 붉어졌다.
“하아… 그 의사 양반, 영 못 써먹겠네?”
우형석은 저를 거스르는 것들에 자비를 베푼 적이 없다. 이번이라고 예외가 되지 않았다.
“당장 잡아 와, 그 새끼.”
주완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뒤통수가 따갑더라니, 어김없이 전미남과 눈이 마주쳤다. 전미남은 뒤늦게 눈을 피했다. 벌써 세 번째였다. 뭔가 할 말이 있나 싶어 쳐다보면 그는 지금처럼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러다 보니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었다.
괜스레 얼굴을 문지르며 다시 일간지를 들여다봤다. 뜻 모를 신조어에 한참을 막혀 있던 참이었다.
“습관이에요.”
작은 소리로 더듬더듬 기사를 읽다가 대뜸 설명했다. 또다시 전미남의 눈길이 감지됐기 때문이다. 전처럼 고개를 돌렸을 땐 의문 가득한 전미남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전처럼 모르는 척하지도, 주완의 설명이 무슨 뜻인지도 묻지 않았다.
개의치 않고 신문을 한 장 더 넘기며 중얼거렸다.
“10년 정도였어요. 그 병원에 갇혀 있던 기간이. 병실엔 침대밖에 없거든요. TV 같은 건 당연히 못 보고, 책을 읽거나 누구랑 오래 대화하는 것도 불가능했어요. 그렇게 오래 아무것도 못 하고 지내면 알던 것도 다 잊어버리고, 멍청해지더라고요. 단순한 셈이나 한글도 헷갈릴 만큼.”
“…….”
“갑자기 내 이름을 어떻게 썼었는지 가물가물해지기도 했어요. 말도 안 되죠? 근데 정말 그렇게 되더라고요.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난 그게 되게 무서웠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눈에 띄는 글씨는 닥치는 대로 읽게 돼요.”
전미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감히 이해한다는 위로를 건넬 순 없었다. 그건 오롯이 겪어 본 사람만이 느꼈을 공포고, 절망이었다. 더구나 지금 이곳이 그곳보다 나으리라고 멋대로 장담하기도 어려웠다.
머지않아 주완은 낱말 퍼즐이 실린 페이지에 다다랐다. 주어진 힌트들을 참고하면서 빈칸에 알맞은 단어를 추측해 보았다. 하지만 눈으로만 맞춰 나가려니 쉽지 않았다.
조금 더 고개를 들이밀고 집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전미남이 소리 없이 일어나더니 어느 방으로 들어갔다. 금세 돌아온 그는 신문에 코를 박을 듯한 주완에게 슬쩍 펜 하나를 건넸다. 판촉물인지, ‘원조 할머니 족발 보쌈’이란 상호가 새겨져 있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보자, 민망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건 한 칸, 한 칸 채우는 게 묘미라고….”
주완은 얼떨떨하게 볼펜을 받아 들었다.
“고맙습니다.”
10년 만에 만져 보는 펜의 감촉이 영 어색했다. 제대로 쥐어 보려고 해도 너무 힘이 들어가거나 손이 헐거워서 계속 겉도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한 번, 또 저렇게 한 번 고쳐 잡아 봤다. 오래지 않아 익숙한 감각이 돌아왔다. 주완의 입가에 알게 모르게 옅은 미소가 번졌다.
주완은 속으로만 생각했던 단어들을 꾹꾹 적어 나갔다. 빈칸이 속속 채워지기 시작했다. 미남은 드물게 밝아진 주완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살펴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소파에 늘어져 잠든 재규어가 잠꼬대처럼 꼬리를 위로 휙 쳐들었다가 철썩 내리쳤다. 그 바람에 놈의 꼬리가 몇 번이고 주완의 목덜미에 닿았다. 처음에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힐끔힐끔 돌아봤지만, 언제부터인가 그것도 적응이 돼서 그러려니 했다. 낱말 퍼즐을 완성하느라 어느새 재규어의 꼬리가 제 어깨에 감겨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 두 단어만 빼놓고 모든 빈칸이 채워졌다. 그런데 도무지 그 두 개가 떠오르지 않았다. 힌트를 몇 번씩 다시 읽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모르는 단어면 포기하기라도 할 텐데, 떠오를 듯 말 듯 해서 더 포기가 안 됐다.
저, 하며 전미남을 돌아봤다. 줄곧 주완을 보고 있던 그가 반쯤 몸을 일으켰다. 바로 지시에 따르려는, 습관화된 행동 같았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에 어그러지는 행동을 하는 사람… 이게 대체 뭘까요?”
“개새끼 말입니까?”
전미남이 스스럼없이 대꾸했다. 주완은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멀거니 그를 봤다.
전미남은 시종일관 무덤덤했다. 느닷없이 장난을 칠 법한 성격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심각할 정도로 진지해 보였다. 그러니 농담 따먹기나 하자는 게 아닐 거였다. 하지만 언론사에서 낸 문제에, 그런 게 정답일 리도 없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
“…….”
전미남은 얼빠진 주완을 보곤 제 대답이 그릇됐음을 눈치챘다. 개새끼가 아니면 뭘까. 조금 더 고민해 봤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에 어그러지게 행동하는 놈들을 칭하는 말은 무궁무진했다.
이번에도 그는 오랜 고민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마구 던졌다.
“그럼 씨발… 놈?”
“…아.”
“미친놈?”
“그….”
“…아니면 호래자식입니까?”
“…….”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전미남은 더는 떠오르는 욕설이 없는 듯했고, 주완은 성심껏 답하는 그에게 정답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듯했다. 침묵이 길어지면서 점차 아침에 단둘이 남겨졌을 때의 어색한 분위기로 회귀하는 느낌이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전미남에겐 천국의 종소리가 따로 없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한다.
“누가 왔나 봅니다!”
우렁차게 소리치기도 했다. 그 목청에 놀랐는지 재규어가 움찔하며 잠에서 깼다. 그러다 주완을 맞닥뜨리자, 불만스럽게 눈을 좁혔다.
그즈음 현관 쪽이 부산스러워졌다. 도망치다시피 한 미남과 누군가가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미남을 따라 거실로 걸어온 건 다름 아닌 백도운이었다. 주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했다. 백도운도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또 보니까 반갑네요, 주완 씨. 어젠 잘 잤어요?”
“…네, 덕분에.”
“흐음? 전혀 못 잔 얼굴인데. 밥은 먹었고?”
“네. 미남 씨가 챙겨 주셔서.”
“오, 둘이 그새 통성명했나 보네요?”
백도운이 얄궂은 눈빛으로 전미남을 돌아봤다. 전미남은 못 들은 것처럼 그가 사 온 것들을 들고 부엌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뭐 하고 있었어요?”
“아, 신문을 좀….”
“낱말 퍼즐? 되게 오랜만에 보네.”
백도운 하나로 금세 집 안 분위기가 반전됐다. 재규어는 그 떠들썩함이 싫은지 훌쩍 소파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곤 타박타박 침실로 걸어가다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뭐야. 넌 왜 사람이 오자마자 들어가? 내외하는 거야?”
백도운이 불만을 제기하자, 재규어의 귀가 뒤로 뒤집혔다. 이내 눈길은 백도운에게서 주완에게로 옮겨졌다. 두툼한 꼬리를 느릿하게 흔들며 한참을 예의주시한다. 그러다 휙 고개를 돌리고 침실로 사라졌다. 제법 도도한 몸짓이었다.
“주완 씨, 저 녀석한테 열렬히 관찰당하고 있네요?”
“관찰이요?”
“저놈이 제 주인을 닮아서 아무한테나 경계를 누그러뜨리고 그러질 않거든요. 새로운 생명체가 나타나면 기선 제압부터 하려고 들고, 한동안 유심히 관찰하다가 저 나름대로 역할이나 서열 같은 걸 정하는 모양이에요. 저 녀석이 날 ‘먹으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데 반년은 걸린 것 같은데? 예전에 저 녀석한테 섣불리 다가갔다가 손가락을 물린 사람도 있거든요.”
“아….”
“조심해요. 친해지려고 애쓰지 말라고.”
백도운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당부했다. 주완은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공포심이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어젯밤에도 마찬가지였다. 야생 재규어를 보고도, 납치당해 전혀 모르는 곳에 끌려와서도 주완은 거의 동요하지 않았다. 어딘가가 단단히 망가진 사람 같았다.
백도운은 엉성하게 펜을 잡은 주완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고작 그 정도 접촉만으로도 주완의 어깨가 굳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견딜 만할 것 같아요?”
“네. 아직 위협적인 행동은 안 해서. 저 녀석도 제가 맛없다는 것쯤은 알지 않을까요?”
“저놈 말고 권수혁이요. 그 새끼 비위 맞추는 게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라고. 하룻밤이라도 보내 봤으니까 느낌 올 거 아니에요. 어려울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나랑 같이 우리 집으로 가고.”
주완은 고민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가에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한 미소가 스쳤다.
“더한 것도 견뎠는데요, 뭘.”
백도운으로선 작게 한숨 쉬며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김제국은 정체 모를 축축한 느낌에 움찔 눈을 떴다. 의식을 차리자마자 콧속으로 비릿한 냄새가 파고들었다. 피와 비슷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어디서 맡아 봤더라. 그래, 흙. 젖은 흙냄새였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봤다. 그러나 사위가 너무 어두워, 눈에 띄는 게 없었다. 김제국은 차가운 흙바닥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지를 비틀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몸은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 상태였다. 저절로 이가 딱딱 부딪치고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권수혁의 집무실에서 그와 나눴던 대화였다. 주완의 몸값으로 10배의 금액을 제시했을 때, 그는 순순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석연찮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어서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집무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덩치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순식간에 김제국을 제압하고, 그의 시야마저 차단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도록 꽁꽁 묶여서 어딘가로 옮겨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일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기절했던 걸까. 다만 어두컴컴해진 하늘을 보고 시간이 꽤 흘렀음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도무지 긍정적인 장면이 상상되지 않았다.
“이 개애새끼….”
김제국은 고개를 흔들어 저 자신을 재우쳤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려고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온 게 아니었다. 자신은 이따위 수모를 겪어야 할 몸이 아니다. 그것도 고작 정신 나간 환자 하나 때문에.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이곳에서 벗어나면 곧장 경찰서로 달려가겠다고 다짐했다. 제 죗값을 받게 될지언정 혼자 죽을 순 없었다. 그러자면 우선 살아나가야 한다.
“젠장, 읏! 이잇!”
김제국이 흙벽에 의지해 결박된 몸을 일으키려 아등바등할 때였다. 돌연 눈이 아릴 만큼 눈부신 빛이 쏟아졌다. 저절로 두 눈이 질끈 감겼다. 빛 공해가 따로 없었다. 야간 경기장의 특수 라이트에서나 뿜어져 나올 법한 광도였다.
차마 눈을 뜰 엄두조차 못 내는 사이,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쪽인지 방향을 인지할 수가 없었다. 위험을 감지한 몸이 저절로 경직됐다.
이내 작열하던 불빛이 김제국을 살짝 비켜났다. 그제야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 수 있었다. 그러고도 한동안은 시야가 하얗게 번져, 명순응되기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서서히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을 인식하자, 덜컥 숨이 막혔다. 김제국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단숨에 파악됐다.
유난히 불편하던 몸은 팔부터 발목까지 촘촘하게 묶인 상태였다.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곤 발가락 정도였다. 그 상태로 김제국은 깊은 구덩이에 던져져 있었다. 주위는 10m는 됨직한 흙벽으로 둘러싸였다.
권수혁이 그 위에서 김제국을 까마득하게 내려다봤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 개새끼야, 미쳤어?!”
김제국은 있는 힘껏 몸을 흔들며 발악했다. 그런데 어쩐지 몸 곳곳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근원지를 찾아 더듬더듬 시선을 옮기자, 촘촘히 감긴 루프 사이로 피가 흐르는 게 보였다. 신장과 간의 위치가 유독 아팠다.
꿈일 거였다. 악몽이다. 김제국은 눈앞의 모든 상황을 부정해 보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이 씨발 새끼들아!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감히 내 몸에! 이 개새끼야! 네가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가만 안 둬! 다 죽여 버릴 거야!”
김제국이 침을 튀기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를 보는 권수혁의 표정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마치 마네킹이 서 있는 것 같았다.
“하아, 하아… 씨발, 존나 아파….”
기력이 다한 김제국은 울먹이기까지 했다. 절망적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자력으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죽기 살기로 구덩이를 빠져나가도 금방 잡히고 말 거였다.
그도 그럴 게, 주변에선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인기척은커녕 차가 지나가는 소음조차. 분명히 깊은 산속이거나 외진 지역일 거였다. 괜히 권수혁을 자극해서 저한테 유리할 게 없었다. 이럴 때일수록 유연하게 대처해야 했다.
김제국은 여러 번 심호흡해 흥분을 가라앉혔다. 더불어 기세도 한풀 꺾였다.
“대체 왜 이래, 대체 나한테 왜 이런….”
“난 뒤가 찝찝한 걸 아주 싫어해서요.”
권수혁은 대수롭지 않게, 한없이 가벼운 어조로 대답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를 어떻게 설득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분명한 건 김제국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거였다.
바짝바짝 입술이 말랐다. 사지만 자유로웠어도 납작 엎드려서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든 해 봐야 했다.
“당신이 박주완을 데려간 건 정말 아무도 모른다니까? 나만 함구하면 그만인 거잖아?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우리 조금 더 이성적으로….”
권수혁이 픽 웃었다. 거짓말처럼 주변이 더 고요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당신만 영원히 입 다물면 아주 깔끔해지겠지.”
“…말도 안 돼. 사, 살려 줘.”
목숨을 구걸하는 김제국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그는 오로지 생존 욕구에 지배되고 있었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적출 부위의 통증도, 그렇게나 좋아했던 돈도, 장진우를 휘어잡을 서랍 속 USB도, 주완을 데리러 왔던 우형석의 존재도 모두 잊었다. 여기에서 살아 나가면 경찰서로 직행하겠다던 다짐조차 새하얗게 지워졌다.
어차피 죽으면 모두 부질없었다. 지금의 심정으로는 목숨만 부지하면 이제까지의 죄를 참회하며 새사람이 될 수 있을 듯했다. 앞으로는 선하게, 남에게 봉사하며 살겠다고 온갖 신을 부르며 빌고 또 빌었다.
“참, 돈을 더 드리기로 했었지?”
권수혁이 불현듯 생각난 것처럼 중얼거렸다. 김제국은 울상이 돼서 도리질했다. 그딴 건 이제 필요 없으니 나가게만 해 달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둔중한 기계 소리에 묻혀 버렸다.
소음이 가까워질수록 땅이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렸다. 머지않아 불빛 속으로 거대한 물체가 들어섰다. 김제국은 완전히 넋이 나가서 그것을 바라봤다. 구덩이 가까이 후미를 들이민 것은 트럭이었다. 10t짜리 덤프트럭. 그 실루엣만 보고도 지레 기가 질렸다.
김제국은 끽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꺽꺽거렸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넘치는 눈물과 콧물, 타액으로 엉망이 됐다.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예감한 탓이었다. 제 삶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직접 목격하는 것. 그보다 지독한 두려움은 없을 터였다. 삶에 집착하는 인간일수록, 더.
“이, 이러지 마.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봐줘.”
트럭이 완전히 멈춰 서며, 그 반동으로 짐칸을 가득 채운 뭔가가 몇 개 굴러떨어졌다. 불빛에 반사돼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익숙한 크기와 모양새가 꼭 동전 같았다. 순간 강렬한 깨달음이 텅 빈 뇌리를 꿰뚫었다.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 살려 줘아아악!”
김제국은 제 머리를 거푸 흙바닥에 내리찧으며 절규했다. 꿈이라면, 지독한 악몽이라면 이제 그만 깰 수 있길 바라면서. 그러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김제국은 눈물에 흐려진 눈으로 절박하게 권수혁을 주시했다. 끝 간 데 없는 두려움에 오줌이 줄줄 샜다. 이빨도 거듭 부딪치며 딱딱거리는 소리를 냈다.
권수혁은 그런 김제국에게서 눈길을 거뒀다. 그러곤 한없이 무심하게 명령했다.
“부어.”
“안 돼애애애애애!”
트럭의 짐칸이 서서히 구덩이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면서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갖가지 동전이 구덩이로 콸콸 쏟아져 내렸다. 김제국은 괴성을 지르며 발악했지만, 무차별하게 쏟아져 내린 동전들은 서서히 그의 발을, 다리를, 이어 허리까지 잠식해 버렸다.
“…잘못했어, 내가 다 잘못… 으윽… 살려줘… 살려… 우우욱.”
동전은 한참 더 쏟아져 내렸다. 김제국의 신음이 들리지 않을 때까지. 남은 동전 몇 개가 짤그랑거리며 떨어졌을 때, 구덩이는 2m 깊이로 바뀌어 있었다. 덤프트럭이 유유히 물러나고 본격적인 매몰 작업이 시작됐다. 남은 부분에 콘크리트를 들이붓는다. 마지막에는 흙으로 덮어 주변과 마찬가지로 편편하게 다질 터였다.
“이 근방 아스팔트 공사는 이틀 후에 진행된다고 합니다.”
이어진 보고에 권수혁은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한참 도로를 깔고 있는 지역이었다. 밤늦게 특수차들이 오가도, 관련 소음이 들려도 의심하는 자는 없을 거였다.
이윽고 특수 조명까지 꺼지며 일대는 완전한 적막과 어둠에 휩싸였다.
“대표님 오시나 봅니다.”
전미남이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주완은 숟가락을 들다 말고 눈으로 그를 쫓았다. 이윽고 타박타박 걸어 나오는 재규어의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자, 침실을 나서던 재규어가 우뚝 서며 시선을 맞춰 왔다. 잠시 경계하듯 보더니, 이내 눈길을 거두고 현관 쪽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현관문 밖이 소란스러웠던 건 아니었다. 특별한 인기척이나 엘리베이터의 기계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미남과 재규어는 그가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기했다. 늘 같은 시간에 돌아오기 때문일까? 어쩌면 육감의 일환일지도 몰랐다.
곧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풀렸다. 이어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예상대로 권수혁이었다.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수행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돌려보낸 모양이었다. 전미남은 그를 향해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대표님 오셨습니까?”
권수혁은 그를 가볍게 일별하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도록 전미남은 굽힌 몸을 펴지 않았다. 제 주인을 빤히 올려다보던 재규어가 그와 함께 거실로 이어지는 통로를 걸어왔다. 특별히 애교를 부리진 않았다. 그저 보폭을 맞춰 나란히 걸을 따름이었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꼬리의 움직임이 자못 도도했다. 매끈한 다리를 척척 뻗을 때마다 잘록한 몸뚱이 역시 제법 우아하게 씰룩거렸다.
바로 침실로 들어가려던 권수혁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저를 빤히 보고 있던 주완과 눈이 마주친 탓이었다. 주완은 말없이 고개만 꾸벅했다. 권수혁은 별반 반응이 없었다. 그저 눈동자를 미끄러뜨려 주완의 차림새를 훑어볼 뿐이었다. 착각일까. 굳어 있던 그의 입가에 얼핏 웃음이 번진 듯했다.
“취향 한번….”
비웃음이었나 보다. 잠시 제 스웨터를 내려다보던 주완이 마침 두 사람 쪽으로 걸어오던 전미남을 응시했다. 전미남은 역시 눈동자만 굴려 주완을 마주 봤다. 묘하게 긴장된 표정으로 짐작건대, 이 ‘취향 한번 굉장한’ 스웨터가 권수혁의 옷장에서 나왔다는 걸 모르게 하는 게 좋을 듯했다.
이내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권수혁이 대뜸 가까이 다가온 탓이었다. 그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주완의 스웨터를 걷어 올렸다. 그러곤 스스럼없이 손을 주완의 맨살에 가져다 댔다.
손끝이 생각보다 훨씬 차가웠다. 주완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그의 앙상한 가슴골과 홀쭉한 복부를 쓸어 보던 권수혁이 빤히 시선을 맞춰 왔다. 이어 손을 떼고 돌아서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직 멀었나.”
그새 살이 얼마나 붙었나 확인해 본 모양이었다. 전미남은 권수혁의 느닷없는 행동에 주완보다 더 당황한 듯했다. 소리 없이 허둥지둥하더니, 얼른 수혁을 따라 침실로 들어간다. 주완은 묵묵히 스웨터를 도로 내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권수혁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바로 욕실로 향했다. 전미남이 습관처럼 그를 따랐다. 손에는 갓 빤 수건과 가운이 들려 있었다. 권수혁은 욕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그를 돌아봤다.
“이제부터 쉴 거니까 그만 가 봐.”
“네, 대표님.”
전미남은 닫힌 욕실 문에 꾸벅했다. 보통 때라면 그 길로 퇴근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러곤 아직 식탁에 앉아 있던 주완에게도 묵례했다.
“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 네. 안녕히 가세요.”
주완이 덩달아 고개를 까딱했다. 전미남은 바로 돌아서서 집을 나섰다. 문을 잠그러 뒤늦게나마 그를 따라갔던 주완은 손이 닿기도 전에 자동으로 잠기는 도어 록을 얼떨떨하게 바라봤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장치였다. 혹시나 해서 문손잡이를 내리자, 바로 잠금장치가 풀렸다. 다시 닫았을 땐 처음과 마찬가지로 도로 잠겼다. 세상과 단절돼 있던 10년간, 많은 것이 변했다.
멍하니 돌아서자, 어느새 복도 중간까지 나와 선 재규어가 보였다. 도어 록이 거푸 열리고 닫히는 기척에 와 본 듯했다.
“…어, 미안. 나 어디 안 가.”
사과하며 다가가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금세 휙 돌아서 가 버린다. 그렇게 재규어나 권수혁이 쌀쌀맞게 굴어도, 몸이 여전히 구속돼 있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하진 않았다. 전혀 걱정스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병원에 머물 때보다는 숨통이 트였다. 전미남이나 백도운은 일면식도 없는 제게 친절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일까. 전보다 하루를 버티기도 수월했다. 그래 봤자 얼마나 됐다고,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이런저런 상념에 젖은 채로 걷는데, 불현듯 욕실 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이어 다량의 습기와 특유의 서늘한 향이 짙게 풍겼다. 저벅저벅 가까워져 오는 발소리에 힐긋 돌아봤다. 다시금 온몸이 권수혁의 그림자에 잠겼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여지없이 흐트러진 상태였다. 그 때문인지 눈가에 유독 그늘이 진 듯했다. 이유도 없이 서로를 물끄러미 보다가 주완이 먼저 돌아섰다.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 식탁에 앉는다.
거의 사용할 일 없던 간이 식탁에는 즉석밥 하나와 구운 김, 캔 참치, 그리고 소포장 된 볶음김치가 놓여 있었다. 뒤늦게 부엌으로 들어와 술을 꺼내던 권수혁은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1시가 다 돼 갔다. 이제야 저녁을 챙기는 건 아닐 텐데, 야식을 먹는 주완의 얼굴에선 전혀 식욕이 느껴지지 않았다.
“음식, 다 토해서 죄송해요. 이것저것 많이 먹으려면 위 크기부터 늘려야 한다고 해서요. 되도록 비규칙적으로 폭식하는 게 좋고, 기름진 음식도 기름진 음식이지만 탄수화물이 특히 체중 불리는 데 유리하다고… 이왕 먹는 거면 밤늦게 먹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살쪄야 한다니까.”
의문 어린 시선을 인식한 주완이 기행의 이유를 설명했다. 어딘가 좀 이상하게 들리는 얘기였다. 아마 그가 어딘가에서 보고 그렇게 말하는 거라면 필시 그곳에 적힌 내용은 그와 정반대였을 터였다. 글의 주제도 ‘살찌는 방법’이 아닌 ‘살 빼는 방법’이었을 테고.
권수혁은 미간을 찌푸리고 주완의 뒤통수를 주시했다. 꼭 괴상한 생명체를 관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보통은 식음을 전폐하지 않나? 빨리 살이 쪄 봤자 본인에게 이로울 건 하나도 없을 텐데. 오히려 위험만 자초하지.
“빨리 잡아먹히고 싶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주완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표정에도 변화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마저 밥을 먹을 따름이었다. 음식을 입에 밀어 넣고, 씹고, 삼키는 일련의 동작이 상당히 기계적이었다. 음식물을 가루로 만들어 삼킬 작정인지, 턱의 움직임도 느려 터졌다. 그런 식이어선 평생을 쉬지 않고 먹어도 통통해질 것 같지 않았다.
권수혁은 고개를 젓곤 거실로 나갔다. 자신의 전용인 1인용 소파에 몸을 누그러뜨리고 앉는다. 재규어가 다가와 그의 무릎에 제 턱을 얹었다. 그러곤 주완을 고요히 노려봤다. 놈을 가만가만 쓰다듬던 권수혁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조금 떨어진 부엌에선 젓가락이 캔에 부딪히는 소리와 바삭바삭한 김이 구겨지는 소리, 컵이 식탁 위에 놓이는 마찰음, 그리고 김치가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집 안이 그처럼 고요하지 않았다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을, 지극히 일상적이고 미미한 소음이었다. 권수혁에겐 달갑지 않은 타인의 기척. 그런데도 썩 나쁘진 않았다.
식사를 마친 주완이 거실 쪽을 내다봤다. 소파에 앉은 권수혁은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휴식에 방해될까, 조용히 일어나 식탁을 정리했다. 빈 용기들도 깨끗이 씻어 엎어 놓고, 남은 것들은 텅텅 빈 냉장고 안에 잘 넣어 둔다.
주완이 두 손의 물기를 옷에 닦으면서 거실로 나왔을 즈음, 권수혁의 손에 헐겁게 들려 있던 잔이 툭 떨어졌다. 권수혁은 그새 잠이라도 든 건지 꼼짝하지 않았다. 다행히 러그가 깔려 잔이 깨지진 않았지만, 그 안에 남아 있던 술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주완은 얼른 욕실로 가서 수건을 가져왔다. 그러곤 그것으로 젖은 바닥을 대강이나마 닦았다. 잔도 집어다 식탁 위에 가져다 놨다. 재규어는 눈동자만 굴리며 그 모든 상황을 구경할 뿐이었다.
다시 거실로 돌아온 주완은 고민에 잠겼다. 권수혁을 깨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소파에서 그렇게 아침까지 잘 순 없을 거였다. 가능하다고 해도 아침에 컨디션이 좋을 리 없었다.
자꾸 주저한 건 권수혁의 반응이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그가 잠 깨우는 걸 극히 싫어한다는, 전미남의 귀띔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파에서 곯아떨어진 권수혁은 모처럼 풀어져 있었다. 역시 잠들었을 땐 인상이 확 달랐다. 옳지 않은 일인데도 저도 모르게 한참을 들여다봤던 것 같다.
불시에 재규어가 후다닥 침실로 뛰어갔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의식해서 본 권수혁의 두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잠시 후, 거실로 돌아온 재규어의 입에는 담요 하나가 물려 있었다. 놈은 그것을 주완의 발등에 탁 뱉어 놓고는 다시 권수혁의 발치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샛노란 두 눈이 주완을 직시했다. 꼭 어떤 행동을 촉구하는 듯했다.
주완은 떨어진 담요를 주워 들었다. 그러곤 그것을 가볍게 탁탁 털어 권수혁에게 덮어 주었다. 그러도록 재규어는 주완의 일거수일투족을 똑똑히 감시했다.
침대의 주인이 소파에서 쪽잠을 자는데, 객식구가 버젓이 먼저가 가서 잠을 청할 순 없었다. 주완은 얌전히 긴 소파 한쪽에 몸을 앉혔다. 재규어가 이번에는 고개까지 돌려 그를 주시했다. 눈이 마주친 김에 슬쩍 한마디 던졌다.
“영리하네? 너.”
나름의 칭찬이었지만,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재규어는 여전히 경계 가득한 시선으로 주완을 지켜볼 뿐이었다.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한낮 짐승에게 대화를 시도하는 게 저 자신이 좀 우습긴 했지만.
“굶주린 것도 아닌데, 맛없는 걸 굳이 먹을 필욘 없잖아. 영양가도 별로 없을 거야. 그러니까 가능하면 네 먹이가 아닌 쪽으로 해 줘.”
재규어는 눈가를 한 번 꿈틀거리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다소곳이 모은 제 앞발에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동그란 두 귀가 팔랑거렸다. 얼마간 자세를 바꾸려는지 몸뚱이를 큼직하게 들썩이던 놈은 머지않아 잠잠해졌다. 재규어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놈의 거대한 몸이 함께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가만가만 흔들리던 꼬리도 얌전히 바닥에 붙어 있었다. 놈도 잠든 듯했다.
주완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의미 없이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쩐지 오늘 밤은 쉽게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간 그 모든 게 허무맹랑한 꿈이었음을 깨닫게 될까 봐. 또다시 새하얀 감옥에 갇히게 될 것 같아서.
***
장진우는 김제국의 진료실 앞에 서 있었다. 깊은 새벽, 희미한 형광등 불빛만이 어두침침한 복도를 비췄다. 연신 텅 빈 통로를 내다보며 초조하게 누군가를 기다렸다.
“…왜 이렇게 굼뜬 거야.”
두 다리가 뻐근해져 올 무렵, 고요하던 복도 끝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급하게 호출받은 사람의 발소리치고는 지극히 느긋했다.
그러나 장진우는 애써 짜증을 억누르며, 뒤늦게 나타난 늙은 경비에게 꾸벅했다. 경비는 그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나이에 야간 근무도 벅찬데, 느닷없이 호출까지 당하니 영 불쾌했던 모양이었다. 오만상을 찌푸리고 터덜터덜 걸어오며 들으란 듯이 뭐가 그렇게 급해서, 하고 투덜거린다. 자다가 나온 건지 머리엔 까치집이 생기고, 뺨에는 베개 자국이 선명했다.
“다 늦게 죄송합니다. 지금 꼭 봐야 하는 서류가 있는데, 그걸 김 선생님이 가져가셔서요. 이 시간에 김 선생님께 나와 달라고 부탁드리기도 그렇고 해서… 아, 선배님껜 들어가도 좋다고 허락받았습니다.”
“네, 뭐….”
기껏 사과하는데도 입맛이나 다시며 퉁명스럽게 반응한다. 장진우는 옆으로 비켜 주며 늙은 경비의 뒤통수를 쏘아봤다. 병원이 개원할 때부터 일했다더니, 터줏대감 노릇을 하려 든다. 오늘뿐 아니라 평소에도 병원의 모든 사람을 휘두르고 훈계하려 들었다.
경비는 절단기를 손에 들고도 한참을 끙끙거렸다. 그의 기력이 약한 것도 있겠지만, 걸린 자물쇠가 유독 굵고 탄탄하기도 했다. 순순히 도와 달라고 하면 좋을 텐데, 끙끙거리며 고집스럽게 씨름한다. 보다 못한 장진우가 나섰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경비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장진우는 절단기를 넘겨받아 단숨에 자물쇠를 잘랐다. 싱긋 웃으며 절단기와 잘린 자물쇠를 경비에게 넘겼다.
“이것 좀 부탁드릴게요.”
“…김 선생한테 확실히 얘기해 둔 건 맞죠? 아침에 와서 난리 치면 피곤하다고.”
“네. 문단속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가 보시죠.”
“혼자 있어도 괜찮겠어요?”
경비는 얼른 돌아가지 않고 어슬렁거렸다. 장진우가 뭘 하는지 지켜볼 심산인 듯했다.
경비는 어정쩡하게 인사하고 다시 복도를 거슬러 갔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야 김제국의 진료실로 들어갔다. 불을 켜고 책상으로 먼저 달려들었다. 분명히 잠긴 서랍 안에 메모리 카드가 있었다. 두고두고 제 약점이 될 물건을 처리해야 했다.
우선 서랍부터 차례대로 열어 봤다. 첫 번째 서랍이 잠겨 있었다. 남은 두 개의 서랍을 꺼내 책상 위에 탈탈 털었다. 그러곤 너저분한 물건들을 더듬었다. 꽁초에, 먹다 만 과자 봉지에, 양말까지 나왔다. 곳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 천지였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고 속이 뒤집혔다.
확인을 마친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져졌다. 서로 눌어붙은 서류들도 바닥을 하얗게 뒤덮었다. 뒷일은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겨를이 없었다. 이번에 메모리 카드를 손에 넣지 않으면 김제국은 궁해질 때마다 그 속에 담긴 영상을 빌미 삼아 장진우 자신을 옥죄려 들 거였다. 아버지에게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일지 몰랐다. 잡동사니가 계속 책상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책상이 깨끗해질수록 손길은 더 다급해졌다. 이마엔 송골송골 땀까지 맺혔다.
“하아, 하아….”
하지만 서랍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멈추지 않고 책상 의자와 그 틈새, 소파까지 샅샅이 뒤졌다. 시들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꽃들이 꽂힌 화병까지 뒤집어 털어 봤다. 헛수고였다. 어디에도 원하는 건 없었다. 역시 김제국이 품에 지니고 다니는 걸까. 그에겐 자금줄이나 다름없을 테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장진우는 바로 복도로 나갔다. 그러곤 소화전을 벌컥 열어 그 안에서 소방용 렌치를 꺼내 들었다. 어떻게든 메모리 카드를 손에 넣어야 한다. 맹목에 물든 얼굴이 전에 없이 싸늘했다.
성큼성큼 김제국의 진료실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경비가 소음을 듣고 달려올세라 아예 문도 잠갔다. 그런 후 재킷을 벗고, 와이셔츠의 단추도 몇 개 풀었다. 소매도 걷어 올리는 표정이 더없이 비장했다.
이내 손이 하얗게 질리도록 렌치를 꽉 움켜쥐고 심호흡했다. 곧이어 렌치가 허공 높이 홱 들쳐졌다. 그대로 서랍을 내리치려던 찰나,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장진우는 움찔하며 시끄럽게 울려 대는 전화기를 바라봤다. 이 시간에, 의사 개인의 진료실로 전화를 걸어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적어도 환자나 그 보호자는 아닐 거였다. 김제국이 병원에 남아 있는지 확인해야 할 자라면 몰라도.
렌치를 툭 던져 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어쩌면 장기 매매 일과 관련된, 누군가의 연락일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여보세요?”
- …여보세요?
그러나 곧 들려온 음성에 몸에서 힘이 빠졌다. 탄식에 가까운 한숨도 터졌다. 다 늦게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바로 김제국의 아내였다.
장진우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저 장진웁니다.”
- 아, 장 선생. 오랜만이네요.
대꾸하는 어조에 묘한 안도감과 불안감이 공존했다. 그러고 보니 수화기 저편에서 잠들었어야 할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그런데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 혹시 거기에 우리 애들 아빠 없나요?
“선배님이요? 선배님이라면 오전에 볼일이 있다고 일찍 나가셨는데요. 특별히 목적지를 알려 주시진 않았습니다. 외출하시고 병원에는 복귀하지 않으셨고, 오늘 당직도 아니시고요.”
- 아아….
김제국의 아내가 절망 어린 탄성을 터트렸다. 그녀의 초조한 기색에서 불길한 전조가 읽혔다. 확실했다. 장진우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들치며, 걱정하는 투로 물었다.
“집에 무슨 일, 있으세요?”
잠시 뜸 들이던 김제국의 아내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 우리 애들 아빠가 이 시간까지 연락도 없이 안 들어와서요. 보통은 늦거나 집에 못 들어오게 되면 꼭 전화하는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 핸드폰은 자꾸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하고… 아까 밤에는 웬 시커먼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갔어요. 애들 아빠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다그치고, 윽박지르고… 경찰에 신고하면 애들 아빠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그러던데, 무서워요. 그 사람들, 애들 아빠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처럼 말하더라고요. 혹시 뭐 아는 거 없나요? 제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입술의 호선이 더 길고, 깊어졌다. 한눈에도 조폭 같던 우형석이 기어코 김제국의 비밀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아마 김제국이 낌새를 눈치채고 어딘가에 은신했더라도, 오래 버티긴 어려울 터였다. 그리고 기어이 잡힌다면 다시 얼굴을 볼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사람 하나, 둘 흔적 없이 파묻는 거야 조폭들에겐 일상이고, 식은 죽 먹기일 테니까. 만에 하나 김제국이 멀쩡히 돌아온다고 해도 우형석에게 밀고하면 그만이었다.
손대기 껄끄럽던 오물이 알아서 처리될 듯했다. 횡재한 기분이었다. 피식 웃음이 터졌다.
“선배는 당해도 쌉니다.”
- …네?
김제국의 아내가 잘못 들은 것처럼 허망하게 되물었다. 그녀의 불안정하던 숨소리도 뚝 멎었다.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댔거든요. 그런 파렴치한 인간은 재활용해 봤자 쓰레기라, 하루라도 빨리 처분하는 게 낫죠.”
- 자, 장 선생? 어째서 그런….
장진우는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러곤 이제 바삐 처리할 필요가 없어진 서랍을 툭툭 치면서 낮게 웃었다.
“그 인간은 개죽음을 당해도 할 말 없다고. 그러니까 사모님. 선배한테 없는 명예라도 지켜 드리고, 지금 가진 거 뺏기기 싫으면 모르는 척 주무세요. 애들은 아빠 없이도 잘 클 거야.”
***
권수혁의 눈꺼풀이 가물가물했다. 머지않아 두 눈이 거짓말처럼 말끔히 떠졌다.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인지 주위가 온통 푸르스름했다. 그 가운데 익숙한 가구들의 윤곽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소파에 기댔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 기척에 발밑에서 잠들어 있던 재규어가 몸을 뒤척였다. 권수혁은 그런 놈을 빤히 보다가 손을 뻗어 등을 진득하게 쓸어 주었다. 기분이 좋은지 재규어가 동그란 귀를 파닥거리다가 다시 쌕쌕 깊은숨을 뱉어 냈다.
그러고 보니 놈도, 권수혁 자신도 왜 침대를 두고 그곳에서 그러고 있는 걸까. 간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새벽에야 귀가해서 샤워했고, 부엌에서 늦은 밥을 먹던 주완을 관망하며 위스키를 한잔했다. 물끄러미 빈 제 손을 바라봤다. 그 뒤로는?
곰곰이 뇌리를 되짚다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수갑이 채워져 있어야 할 손목이 너무 가뿐했던 까닭이었다. 주완이 권수혁 자신보다 먼저 잠든 걸 본 기억이 없었다. 당장 그가 어쩌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했다.
피곤해서 방심하고 말았다. 권수혁 자신이 잠든 사이, 감시에서 벗어난 주완이 현관문을 열고 도망치기란 식은 죽 먹기였을 거였다. 감시하는 사람도 하나 없었으니, 망설일 이유도 없었겠지. 그 세상 다 산 것처럼 초탈한 눈빛에 속고 말았다. 어떻게 봐도 저를 해치려는 사람을 위해 포동포동해지는 데 일조하겠단 어이없는 발언에, 그만.
성큼성큼 부엌으로 먼저 가 봤다. 싱크대의 물기는 완전히 가셔 있었다. 지난밤 주완이 치워 둔 빈 용기가 그 한쪽에 차곡차곡 정리돼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곳을 나와 침실로 갔다. 침대 시트 역시 주름 하나 없이 깨끗했다. 어금니를 물며 모든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 인적을 찾았다. 어디에서도 주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꺼 놓았던 핸드폰을 낚아채 전원을 켰다. 그러곤 옷장에서 아무 외투나 꺼내 들었다. 특정 다이얼을 길게 누르자, 신호음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귀에 댄 채 거실로 나왔다. 아직 이른 새벽인데도 두 번의 신호음이 지나가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전미남이었다. 막 잠에서 깼는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잠겨 있었다.
- 네, 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 물건이 안 보여.”
권수혁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낮게 깔렸다. 전미남이 대번에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부산스러운 기척에 잠들었던 재규어도 깨어났다. 놈은 온몸을 탈탈 흔들어 잠기운을 떨치곤 제 앞을 빠르게 지나치는 권수혁의 뒤를 느긋하게 따라갔다.
잡히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벼르며 막 구두를 신으려던 찰나였다. 등 뒤에서 문 열리는 기척이 났다. 권수혁은 멈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욕실에서 나오던 주완이 현관에 서 있는 그와 재규어를 의아한 눈빛으로 봤다. 조금 전까지도 욕실에선 아무런 소리도 안 났는데.
-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곧 그리….
“아니, 됐어.”
권수혁은 주완에게 시선을 둔 채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천천히 주완에게 돌아서는 그의 낯빛이 귀신의 그것처럼 무섭게 굳어 있었다. 주완은 그런 권수혁의 얼굴과 그의 얇은 차림새와 손에 들린 외투를 차례대로 눈에 담았다. 거기에 당장이라도 나갈 기세였던 정황까지 종합해, 인사를 건네듯 태평하게 물었다.
“지금… 나가세요?”
권수혁이 홱 손을 뻗었다. 그 손에 주완의 팔이 아플 만큼 세게 쥐어졌다. 주완은 놀란 기색 없이 으스러질 듯한 제 손목과 미간을 확 구긴 채 자신을 노려보는 그를 천천히 번갈아 볼 따름이었다.
“뭐야, 너….”
권수혁은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도무지 주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혼란스러웠다.
도망가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나? 본인이 이곳까지 어떤 목적으로 팔려 왔는지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면. 행여 권수혁이나 재규어가 깨어나 탈출에 실패하고, 그로 인해 해코지를 당할까 두려웠더라도.
“세수하러 들어갔는데… 너무 안락하고 따뜻해서요. 바닥도 뜨끈뜨끈하고. 잠깐 앉아 있으려다가 깜빡 잠들었어요.”
주완의 변명인지, 해명인지 모를 발언에는 숫제 헛웃음이 날 것 같았다. 재규어는 통로를 막아선 두 사람을 힐금 올려다보다가 유유히 지나쳐 갔다. 놈도 별일이 아닌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권수혁이 잡고 있던 주완의 팔을 뿌리치듯 놓아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주완의 마른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권수혁은 정돈되지 않은 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흐트러뜨리곤 손에 든 외투마저 거칠게 집어 던졌다. 그러곤 가타부타 말도 없이 주완을 밀치고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세게 닫혔다.
“…….”
주완 자신이 화나게 만든 걸까. 주완은 바닥에 떨어진 그의 옷을 집어 들고 거실로 돌아갔다. 먼저 그곳에 가 있던 재규어는 주둥이를 쩍 벌리고 크게 하품하더니, 다시 배를 깔고 엎드려 잠을 청했다. 주완은 1인용 소파 위에 권수혁의 외투를 조심스레 걸쳐 두고 슬쩍 놈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부쩍 가까워진 그의 기척에 재규어의 감긴 눈가가 작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놈은 금세 커다란 몸을 규칙적으로 들썩이며 잠이 들었다.
규칙적이고 곤한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덩달아 마음이 누그러졌다. 조금 더 눈을 붙일 수도 있을 듯했다. 재규어를 보던 주완의 눈꺼풀이 거푸 감길 듯 말 듯 했다. 끝내 두 눈이 감기던 찰나, 고요하던 현관문 밖이 쿵쾅쿵쾅 소란스러워졌다.
지레 놀라 움찔하며 깨어났다. 그러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이 내다보이는 통로 쪽으로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pip- pip- pi- p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