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More And More 01. (6/16)

만성적으로 고인 소독약 냄새, 쉴 새 없이 실려 오고 나가던 환자들, 귀는 물론 머릿속 깊은 곳까지 너울너울 울려 퍼지던 구급차의 사이렌, 다급히 누군가를 찾는 고성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의료진들. 그 소란스럽고 번잡한 곳에 동생이 홀로 누워 있었다.

깡마른 몸에서 성한 구석을 찾기가 어려웠다. 핏기 없는 얼굴에는 눈물과 콧물, 구토로 인한 토사물과 타액 따위가 말라붙어 있었다. 살려 달라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매달리던 사지는 완전히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그런 동생의 몸 위로 하얀 천이 덮였다. 그럴 리 없다고, 오진일 거라고. 연방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사망을 선고하던 의사의 입이라도 틀어막고 싶었지만, 너무 큰 충격에 몸이 굳어 아무것도 없었다.

까마득한 암흑이 찾아왔다. 눈을 뜨고 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 귀도 물 먹은 것처럼 먹먹해졌다.

불시에 뭔가가 쿵 하고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커다란 쇳덩이 따위가 흉골을 부수며 떨어져 심장을 터트려 버린 듯한 통증에 제대로 서 있기도 버거웠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아 어지러웠다.

어떻게 병원을 빠져나왔는지, 어떻게 동생만 내버려 두고 떠났던 건지 알 수가 없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피가 들끓다 못해 끈적끈적해져서 뇌를 녹일 것 같았다. 남은 건 맹목뿐이었다.

그저 오해라는 한마디가 간절했다. 적어도 사람이라면 미안해하거나 하다못해 민망해하기라도 할 거라고. 착각이었다.

‘똥개 새끼가 아무거나 주워 먹고 뒈진 걸 나더러 어쩌라고. 거둬 준 은혜도 모르는 새끼.’

가슴에 박혀 든 커다란 쇳덩이. 그건 일종의 폭탄이었다. 증오와 배신감을 기폭제 삼아 상대를 산산이 부숴 버리고, 어쩌면 그 자신마저 파괴해 버릴.

급격히 벌어진 시야에 코앞까지 다가온 손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아채 뒤로 꺾었다. 이어서 상체를 벌떡 일으켜 단숨에 상대의 몸 위로 타고 올라갔다.

“…으읏.”

덜컥 목이 졸리자, 주완에게서 야트막한 신음이 터졌다. 권수혁에게 붙들린 그의 손목이 하염없이 베개에 파묻혀 들어갔다.

권수혁은 제 아래 깔린 주완을 매섭게 노려봤다.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넓고 탄탄한 어깨가 거듭 들썩거렸다. 땀에 흥건하게 젖은 가슴도 크게 너울댔다.

“하아, 하아….”

너무 급격하게 깨어난 탓일까. 뒤늦게 짙은 현기증이 몰려왔다. 미간을 찌푸리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핥으며 주르륵 흘러내리는 감각엔 낮게 앓는 소리마저 샜다. 주완의 목을 누르던 손을 떼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또 악몽을 꾸는 것 같아서, 깨워 주는 게 좋겠다고….”

사과하는 주완에게 푹 쓰러졌다. 그로 인해 피할 새 없이 땀에 젖은 권수혁의 몸이 주완과 완전히 밀착돼 겹쳐졌다. 동시에 후끈한 열기와 특유의 체취가 와락 밀려들었다.

“어….”

주완은 나직한 탄성만 터트렸을 뿐, 그대로 깔려 꼼짝하지 않았다. 아니,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는 게 맞았다. 권수혁은 한눈에 봐도 크고 두툼한 몸이긴 했지만, 힘까지 빼 버리니 너무 무거워서 빠져나올 엄두가 안 났다.

그새 잠에서 깬 재규어가 완전히 포개어진 두 사람을 빤히 구경했다. 그 꼴이 마냥 낯설고 신기한지 고개까지 갸웃거린다.

그러도록 권수혁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여전히 거친 그의 숨소리와 미약하게 앓는 소리가 주완의 귓가에서 연신 터졌다. 숨을 쉴 때마다 거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꺼지는 탄탄한 가슴도 얇은 옷 위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뜨겁다 싶을 만큼 따뜻한 체온, 한층 짙어진 향기.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뭔가 모르게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훈훈한 기운이 가슴 안쪽에 슬며시 고여 드는 듯했다. 악몽에서 막 깨어났던 순간, 권수혁의 등을 보고 느꼈던 안도와 유사한 감각이었다. 그동안 내심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던 걸까.

“역시 안심이 되네요.”

주완이 멀거니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권수혁이 움찔하며 겹쳤던 몸을 홱 떼어 냈다. 그러곤 침대에 걸터앉아 아직도 뒤엉킨 듯한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그나마 호흡이 좀 진정된 건지 등은 전처럼 힘겹게 들썩이지는 않았다.

확실히 넓고 탄탄해 보이는 등이었다. 그 등을 말없이 보던 주완이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권수혁에게 졸렸던 목도 뒤늦게 매만져 봤다. 손가락이 닿았던 자리가 얼얼했다.

그즈음 권수혁은 이미 침대에서 벗어나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려는지 곧장 문가로 가서 문을 연 그는 잠시 뒤를 돌아봤다. 재규어를 쓰다듬고 있던 주완과 시선이 엉겼다.

“그런 건….”

“…네?”

“수컷의 침대에서 함부로 지껄일 말이 아닐 텐데.”

주완의 낯빛이 멍해졌다. 그에게서 눈을 떼고 밖으로 나왔다. 다리를 끌다시피 움직여 소파로 가선 그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막연히 허공을 바라보다가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악몽에 시달릴 때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전신에 근육통이 찾아오곤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정도가 덜했다. 손끝이 묘하게 간질간질한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완이 오고 난 뒤로 계속 이상한 변화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

“그래서? 기어이 장진우를 놓쳤다?”

“면목 없습니다, 형님.”

무릎 꿇고 보고하던 사내가 고개를 푹 숙였다. 우형석에게서 어이없는 듯한 웃음이 터졌다.

“이것들은 당최 사룟값도 제대로 못 하고….”

비릿하게 중얼거리던 우형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제 앞에 고개를 조아린 사내를 내려다보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다른 수하가 눈치껏 골프채를 건넸다. 골프 자체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그저 그것만큼 짐승을 훈육하기에 적당한 회초리를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 놈들이 네 다리가 성해서 뭐 해? 빨빨거리고 돌아다니기나 하지.”

“죄, 죄송합니다.”

키우는 짐승이 실수했을 땐 그 자리에서 혼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깨닫고 다시는 그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또 그래야만, 다음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명령을 이행하려 들기 마련이었다.

“그깟 의사 나부랭이 하날 못 잡아?”

“죄송합니다, 형님. 이번에만 용서해 주시면….”

“용서하고 말 게 어디 있어. 잘못했으면 맞아야지.”

우형석은 골프채를 이리저리 고쳐 잡다가 불시에 홱 휘둘렀다. 퍽, 하고 격한 마찰음이 났다.

“…크학!”

거구의 사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너무 힘껏 내려친 탓에 골프채가 손에서 미끄러져 저만치 튕겨 나갔다. 그 헤드에 붉은 피가 선명히 묻어 있었다.

어마어마한 충격에 쓰러진 사내는 부들부들 사지를 떨었다. 두 눈도 완전히 까뒤집어졌다. 머지않아 그의 머리에서 붉은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이런. 머리를 쳐 버렸네.”

우형석은 실수했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히죽거렸다. 머지않아 움찔거리던 사내의 입에서 새하얀 거품이 새어 나왔다.

싹 낯을 굳히고 치워, 했다. 대기 중이던 수하 몇몇이 일사불란하게 쓰러진 사내를 밖으로 옮겼다. 남은 수하들은 걸레와 소독용 티슈로 꼼꼼하게 바닥을 훔쳤다.

다시 자리에 앉은 우형석은 느긋하게 대마초를 꺼내 물었다. 손수 그에게 불을 붙여 준 최측근 수하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형님, 추가로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뭐야, 또.”

“애들이 장진우를 잡으러 중앙 정신 병원에 갔다가 수상한 놈을 봤다고 합니다.”

“…수상한 놈?”

우형석은 바로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네. 덩치가 산만 한 놈이었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답니다. 그 병원 사람들을 족쳐 보니까, 박주완에 관해서 물었다던데요. 박주완이 입원했던 병실도 확인하고 갔다고 합니다.”

“박주완에 관해서?”

“네.”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형석 자신 외에 박주완을 찾는 사람이 또 있다는 건가.

“그런데?”

“네?”

“그런데 그런 놈을 그냥 보냈어?”

“아… 죄송합니다. 미처 거기까지는….”

우형석의 수하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사실 병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전해 듣긴 했지만, 차마 거기까지 보고할 엄두가 안 났다. 괜스레 기름만 들이붓게 될 터였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쓸모없기는.”

우형석은 쯧 혀를 차곤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다. 박주완을 찾는 자가 대체 누구일까. 우형석 자신뿐 아니라 그에게도 남아 있는 피붙이는 없다고 들었다. 수사 기관에서 냄새를 맡은 거라면 그렇게 혈혈단신으로 다녀갔을 리도 없고.

혹시 박주완을 사 갔다는 자일까? 예상대로 김제국과 그 거래를 중계했던 딜러까지 제거한 게 그자의 소행이라면 병원에 찾아온 목적도 남은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일지 몰랐다. 그게 아니고서야 순전히 제 목숨의 연장 수단으로 박주완을 데려가 놓고, 굳이 그의 병원 생활이 어땠는지를 파고 다닐 이유가 없었다.

그러한 추측대로라면 박주완은 아직 어딘가에 살아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미 쓰임을 다해 죽었다면 이렇게나 급급하게 관련자들을 저리할 필요가 없었다. 아직은 박주완이 필요해서 추적의 고리를 미리 끊어 놓는 것으로 보는 게 훨씬 합당했다. 어찌 됐건 빠르고 거침없는 놈임에는 분명했다.

새삼 언제가 될지 모르는 만남이 기대됐다.

“박주완… 대체 어떤 놈 뒤에 숨어 있는 거야?”

우형석의 입가에 설핏 흥미로운 웃음이 번졌다. 재미있는 숨바꼭질이 시작될 것 같았다.

***

집 안으로 들어선 전미남은 주방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인기척에 의아해했다. 권수혁이 챙겨 주지 않으면 그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던 재규어는 벌써 식사를 마치고 바닥에 늘어져 있었다. 배가 불러 나른한지, 앞발에 고개를 괸 채 전미남을 한 번 거들떠보고 만다.

이내 주방 쪽으로 돌아서다 멈칫했다. 그곳 식탁에 권수혁과 주완이 마주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즉석 볶음밥을 먹는 듯했다.

“대표님.”

일단 권수혁의 등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권수혁은 대꾸 없이 신문만 읽을 뿐이었다. 주완 쪽을 보자 바로 눈이 마주쳤다. 가볍게 묵례하는 그에게 덩달아 고개를 꾸벅했다.

“미남 씨, 혹시 밥 안 먹었으면….”

주완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여차하면 제 몫이라도 덜어 줄 기세였다. 그러자 권수혁이 신문에서 눈을 떼더니 그런 주완을 한 번, 그리고 전미남을 한 번 돌아봤다. 전미남은 잠시 당황했다가 서둘러 손을 저었다.

“아, 저는 먹고 왔습니다.”

“아.”

그릇을 가지러 가려던 주완이 다시 자리에 앉아 밥을 퍼먹었다. 권수혁은 그가 양 볼이 팽팽해지도록 음식을 잔뜩 밀어 넣고 우물우물 씹는 모습을 대놓고 관망했다. 무감한 얼굴을 보면 별로 맛있게 느끼지도 않는 것 같은데, 먹기는 또 열심히 먹는다. 그저 살을 찌우기 위해서였다. 그래 봤자 본래 쓰임대로 이용당하기만 할 텐데도 그랬다.

전미남은 머리가 하얘져 두 사람을 멀뚱히 지켜봤다. 권수혁의 집인데도 그가 식탁에 앉아 식사하는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물론 그도 사람이니까 당연히 밥을 먹고, 잠을 잔다. 그런데도 푸석푸석해 보이는 볶음밥을 군소리 없이 다 비우고, 주완을 관찰하기까지 하는 게 꼭 다른 사람 같았다. 전미남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머지않아 권수혁은 보던 신문을 접어 그대로 식탁에 두곤 거실로 나갔다. 주완이 기다렸다는 듯 그 신문을 제 앞으로 끌어갔다. 그 역시 놀라운 변화였다.

당황해 굳었던 것도 잠시, 전미남은 곧 외투를 벗고 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러곤 주완과 수혁이 비운 그릇들을 챙겨 싱크대로 향했다. 신문을 보던 주완이 얼른 그를 만류했다.

“제가 치울게요.”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설거지라고 해 봤자 그릇 두 개에 수저 한 세트, 물컵 두 개, 볶음용 프라이팬 하나가 전부였다. 전미남은 여전히 그에겐 턱없이 작아 보이는 싱크대에서 빠르게 설거지를 마쳤다. 말끔히 씻긴 그릇마다 반짝반짝 윤이 났다. 싱크대에 남은 물기까지 깨끗이 닦고, 행주를 빨아 물기 하나 없이 꽉 짰다. 소소한 집안일 하나에도 절도가 넘쳤다.

그즈음 재규어가 몸을 일으켜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주방 내부를 들여다봤다.

“수남아.”

재규어를 발견한 주완이 제 무릎을 탁탁 치며 놈을 불렀다. 하지만 놈은 고개를 홱 돌리고 다시 거실로 돌아가 버렸다. 그 모습을 멀거니 보던 주완이 전미남을 돌아봤다.

“수남이가 자기 이름을 싫어하는 것 같아요.”

“백 선생님께서 멋대로 붙이신 이름이니까요.”

“그럼 그게 진짜 이름이 아닌 건가요?”

“그렇다기보다 이름이 딱히 없는 녀석입니다. 백 선생님께서 같이 사는데, 이름 정도는 지어 줘야 하지 않겠냐면서 그런 이름을 붙이신 거고요. 저 녀석은 처음부터 싫어하는 눈치였는데, 이름이 촌스러워야 장수한다면서 꿋꿋이 부르셨습니다.”

“…아.”

확실히, 이제까지 권수혁이 재규어를 ‘수남이’라고 부르는 걸 본 적은 없다. 그래도 굳이 정정하지 않은 걸 보면 암묵적으로 동의한 거라고 쳐도 무방하지 않을까.

거실로 돌아간 재규어는 권수혁의 무릎에 턱을 얹고 그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권수혁은 두 손으로 놈의 털을 쓰다듬어 주면서 모처럼 여유를 부렸다. 상의는 여전히 편한 니트 차림에, 머리카락 역시 세팅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 내려온 상태였다. 만약 그가 휴일을 보낸다면 딱 그런 모습일 듯한, 편안한 분위기였다.

“대표님. 그 녀석, 좀 씻겨야 할 것 같습니다.”

재규어의 털에는 아직 윤기가 돌았다. 단지 홍콩 출장이 며칠이나 소요될지 알 수 없었다. 놈에게 먹이를 먹이고, 놈의 배설물을 치워 주는 일 정도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된다. 그러나 놈이 가장 싫어하는 목욕을 감당할 만한 사람은 아무래도 없어 보였다.

권수혁은 저를 빤히 보는 재규어와 눈을 맞추면서 놈의 머리를 가만가만 매만졌다. 그러다 손을 뒤로 길게 뻗어 놈의 탄탄하고 매끄러운 등 라인을 보듬듯이 쓸어 주었다. 이어 놈의 엉덩이를 탁, 탁 가볍게 두드리자 놈이 알아서 욕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전미남도 익숙한 것처럼 잠자코 그 뒤를 따라갔다. 그 모든 광경을 놀라운 눈초리로 지켜보던 주완이 홀린 듯 동행했다. 거실에 홀로 남은 권수혁은 전미남의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주완의 동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다.

“저도 도와도 되나요?”

주완이 욕실로 들어가려던 전미남에게 주저하며 물었다. 전미남은 그런 주완과 어느새 욕실로 들어가 자리 잡은 재규어를 차례로 번갈아 봤다. 며칠 새 재규어가 주완을 잘 따르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 싶었다. 전미남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주완의 바짓단을 무릎 위까지 올려 접어 주었다. 그러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욕실 문을 활짝 열어 주는 것으로 허락을 대신했다.

주완이 욕실로 들어서자, 얌전히 앉아 있던 재규어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의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그 탓에 놈의 꼬리가 맨다리에 살짝살짝 스쳐 간지러웠다. 장난 아닌 장난에 주완의 입가가 풀어졌다.

“좀 잡아 주시겠습니까?”

“아, 네. 이렇게 잡으면 되나요?”

전미남의 요청에 주완이 어정쩡하게 재규어의 몸통을 잡았다. 그러자 샤워기를 잡아 내리던 전미남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내 그는 주완 뒤편의 욕조를 눈짓했다.

“그 욕조에 걸터앉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주완은 시키는 대로 욕조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재규어가 알아서 주완에게 다가와 그의 무릎에 제 고개를 턱 올려놓았다. 주완은 기분 좋은 얼굴로 놈의 얼굴을 조물조물 매만졌다. 아직 다 아물지 않은 팔의 상처를 까맣게 잊은 것처럼 스스럼없는 행동이었다.

늘 욕실에만 들어오면 예민해지던 재규어가 오늘만큼은 갸르릉 소리를 내며 꼬리까지 살짝 부풀렸다. 그 모습을 의외롭게 보던 전미남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세찬 물소리에 재규어가 동그란 귀를 팔랑거렸다. 큰 몸이 쭈뼛 긴장하는 것도 느껴졌다. 전미남은 바지가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릎 꿇고 앉아서 놈의 털을 찬찬히 적셨다. 곧 놈의 온몸이 물기를 머금으면서 주완의 옷까지 축축해졌지만, 주완 역시 그런 덴 연연하지 않았다.

익숙한 손길로 재규어의 몸을 충분히 적신 전미남이 전용 샴푸와 갖가지 목욕용품을 꺼내 왔다. 손에 일정량의 샴푸를 덜어 내서 재규어의 몸에 삭삭 문지르자 하얀 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미남이 재규어의 몸 곳곳을 마사지하듯 긁어 주자, 재규어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재차 갸르릉거렸다. 주완도 놈의 머리와 얼굴, 목 언저리를 슬그머니 문질러 봤다. 어느새 얼굴에는 즐거운 표정이 걸렸다. 얼결에 그런 주완을 발견한 전미남은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렸다.

“이걸로 이빨을 닦아 주면 되는 건가요?”

한차례 샴푸를 마치고 거품을 씻어 내려던 때쯤이었다. 주완이 목욕 도구 하나를 손에 들었다. 오래 사용한 것처럼 잔뜩 해진 솔이었다. 실제로는 한 달도 되지 않은 물건이었지만, 재규어의 날카로운 이빨을 닦아 주다 보면 금세 그런 꼴이 됐다.

전미남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완이 재규어의 턱을 받쳐 놈의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렸다. 이어 가늘어진 눈을 떠 자신을 보는 재규어의 주둥이를 톡톡 건드렸다.

“자, 아 해 봐.”

주완의 요구에도 재규어는 꼼짝하지 않았다. 그저 샛노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주완을 볼 뿐이었다. 놈을 양치질시키는 것만큼 버거운 일도 없었다. 덩치가 커진 후로는 한 번도 순순히 응하지 않아서 억지로 하려다 애꿎은 솔만 버렸다. 전미남은 한참 재규어에게 먹히지도 않을 요청을 반복하는 주완을 보다가 자신이 대신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주완의 손가락이 쑥 제 입 안으로 파고들자, 재규어가 반사적으로 주둥이를 벌렸다. 순간 전미남은 하려던 일을 잊고 멍하니 그 상황을 바라봤다. 주완은 본격적으로 재규어의 아랫니를 눌러 잡고서 놈의 입 속으로 솔을 집어넣었다. 그러곤 안쪽의 어금니부터 크고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꼼꼼하게 닦아 나갔다.

재규어는 치약 특유의 향에 움찔움찔하면서도 차마 입을 닫지 못했다. 언젠가 거침없이 제 입 속으로 들어와 목에 걸렸던 뼛조각을 빼 줬던 손의 체취를 기억하는 것처럼 그랬다.

솔질을 끝낸 주완은 재규어의 입을 깨끗이 헹궈 주곤 잘 참았다는 듯 콧잔등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곤 전미남이 큰 수건을 꺼내는 사이, 욕실에 가득 찬 습기를 빼려 살짝 문을 열었다. 그 찰나였다.

“…엇, 잠깐!”

재규어가 바르르 몸을 털어 사방으로 물방울을 튕겨 냈다. 그러곤 주완이 멈칫하는 틈에 자리를 박차고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한 번 잡아 볼 틈도 없이 재빠르게 내닫는다.

서둘러 수건을 받아 놈을 쫓아갔다. 놈이 지나간 통로에는 긴 물줄기가 이어졌다. 그 흔적을 따라 거실에 이르렀을 때, 재규어는 권수혁 앞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때맞춰 권수혁이 고개를 돌리며 멀뚱히 선 주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여느 때보다 너그러워진 분위기에, 하마터면 제 손을 내밀 뻔했다. 주완은 한 박자 늦게 아, 하며 들고 있던 수건을 건넸다.

권수혁은 큰 수건을 양손으로 잡고 그것으로 재규어를 폭 감싸듯 해서 놈의 몸을 세심하게 닦아 주었다. 재규어는 그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뒤척이지도 않고 잠잠히 있었다.

뭔가 모르게 노곤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재규어를 목욕시키느라 몸을 움직인 탓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순종하는 짐승을 보살펴 주는 권수혁의 모습이 전에 없이 친절하고 부드러워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없이 포근해졌다.

“나 왔어.”

이윽고 현관문이 열리더니, 백도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때마침 욕실에서 나오던 전미남이 꾸벅 인사했다. 백도운은 그에게 싱긋 웃어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곤 통로 끝에 서서 묵례하는 주완에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주완 씨, 잘 있었어요?”

평온을 만끽하던 재규어가 두 귀를 파닥파닥 털며 백도운을 봤다. 집 안 곳곳에서 풍기는 샴푸 냄새에 백도운이 놈에게도 달갑게 말을 걸었다.

“어? 수남이 목욕했나 보네?”

제 이름에 반응하듯 재규어가 바로 귀를 눕히며 콧잔등을 일그러뜨렸다.

“또 그런다, 좋으면서.”

백도운은 실실거리며 가지고 온 캐리어를 한쪽 벽에 세워 두고 비어 있던 소파에 앉았다. 제 영역을 침범당한 재규어가 으르렁거리며 그를 노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씩 웃었다. 주완과 눈이 마주쳤을 땐 와서 앉으라는 듯 옆자리를 탁탁 두드려 보이기도 했다.

주완은 고분고분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권수혁과 재규어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주완을 쫓아 일제히 눈동자를 굴렸다.

“대표님. 여기, 말씀하셨던 것들입니다.”

그즈음 전미남이 다가와 웬 서류 봉투를 건넸다. 권수혁은 그 안에서 여권과 서류를 꺼내 확인했다. 백도운이 캐리어를 들고 나타난 것도 그렇고, 여권도 그렇고 여행이라도 가려는 모양이었다.

주완은 단순한 호기심에 넌지시 물었다.

“어디 가나요?”

“뭐야, 아직 못 들었어요?”

백도운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쳤다. 그러다 설명을 구하듯 권수혁을 봤다. 말없이 준비된 서류만 살피던 권수혁이 간단히 대답했다.

“홍콩에 간다.”

“아, 그럼… 다녀오세요?”

확신이 없어 말꼬리가 올라갔다. 지금 당장 출발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인사하는 게 뜬금없기는 했다. 하지만 달리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역시 이상했는지, 세 사람이 동시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완을 주목해 왔다.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권수혁은 내내 살펴보던 여권과 서류를 불쑥 주완에게 건넸다.

“확인해 봐.”

“이게… 뭔데요?”

“네 거야.”

이어진 설명에도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리송한 얼굴로 여권을 열어 봤다. 찍지도 않은 제 사진이 버젓이 붙어 있었다. 함께 받은 서류는 항공권인 것 같았다. 탑승자 이름에도 분명하게 제 영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목적지는 예고한 대로 홍콩이었다.

***

주완은 제 손에 들린 여권을 보고 또 봤다. 실제 여권도 그렇게 생긴 건지, 그런 걸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 온 건지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물어봤자 대답해 주지 않겠지만.

전미남은 순식간에 챙긴 캐리어를 현관 쪽으로 끌고 왔다.

“하나 주세요.”

“아닙니다. 더 챙길 거 없는지 확인하고 내려오세요.”

주완의 도움을 사양한 그는 그 큰 가방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즈음 재규어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마치 배웅이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스니커즈를 신던 주완은 뭔가가 등을 툭 건드리는 느낌에 바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재규어가 등 뒤로 와서 서 있었다. 바로 몸을 돌려선 놈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권수혁의 수하들이 놈을 잘 돌봐 주겠지만, 한동안 못 볼 거라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쓰였다.

“갔다 올게, 수남아.”

재규어에게 아쉬운 작별 인사를 전했다. 누군가에게 그런 인사를 해 본 게 언제였는지, 워낙 까마득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라면 제 이름이 불리자마자 쌩하니 돌아섰을 재규어가 이번만큼은 가만히 주완의 손길을 받았다.

주완은 권수혁이 현관으로 나올 때까지 재규어와 눈높이를 맞추고 앉아 놈의 얼굴을 조물조물 매만졌다. 알아듣지도 못할 재규어에게 빨리 올게, 밥 잘 먹고 있어, 집 잘 지키고, 따위의 당부를 거푸 전한다. 그러다 제 얼굴에 그늘이 지자 고개를 들고 권수혁을 올려다봤다.

“아….”

권수혁이 자신을 빤히 보는 게 통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얼른 일어나 옆으로 비켜섰다. 그런데도 권수혁은 조금 더 주완을 지그시 보다가 구두를 신었다. 어느새 일어나 제 다리에 고개를 툭 부딪쳐 오는 재규어의 머리에서부터 등까지를 죽 쓸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 잘 다녀오겠다는 말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간다. 망부석처럼 곧 닫히는 현관문만 보고 선 재규어가 못내 안쓰러웠다. 결국 또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놈이 성가셔할 때까지 놈을 만지작거리다가 백도운에게 끌려 나갔다.

집 밖에는 차 세 대가 대기 중이었다. 권수혁의 수하들이 일사불란하게 짐을 실었다. 그동안 전미남은 권수혁에게 뒷좌석 문을 열어 주고 운전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백도운이 냉큼 조수석을 차지하면서 주완은 졸지에 권수혁의 옆자리에 탑승하게 됐다.

짐 싣기를 마친 수하들이 차 옆에 일렬로 서서 극진히 고개를 숙였다. 전미남은 바로 브레이크를 풀고 서서히 출발했다. 그러자 차 뒤꽁무니를 향해 인사하던 수하들이 얼른 뒤쪽 차에 올라 엄호하듯 따라왔다. 그 일련의 상황만 보더라도 권수혁이 단순한 무역업자가 아니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주완은 차창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권수혁의 집에 온 후, 딱 두 번째 맞은 외출이었다. 흔하디흔한 풍경조차 흥미로운 자극일 수밖에 없었다.

권수혁은 차가 평소보다 느리게 움직인다는 걸 인지하고도 빨리 가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지극히 일상적인 광경까지 눈에 담기 바쁜 주완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꼭 문명과 동떨어진 곳에서 살아온 순수한 존재가 낯선 세상에 발을 들인 듯한 모습이었다. 별것 아닌 것조차 신기해하고, 궁금해하니 꼭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같아서 자꾸 눈이 갔다. 주완에게서 시선을 물리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그 때문이었다. 애써 그렇게 믿었다.

탑승 게이트 근처에서 대기 중인 여객기들을 하염없이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뭔가가 주완의 다리 뒤쪽에 와서 부딪쳤다. 고개를 돌려 보니,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듯한 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장아장 걷다가 기어이 주완 자신에게 돌진해 넘어진 듯했다.

“…아, 미안. 안 다쳤어?”

얼른 아이를 일으켰다. 혹시 먼지라도 묻었을까 다리와 엉덩이도 가볍게 털어 주었다. 다행히 아이는 울지 않았다. 맑은 눈동자로 주완을 빤히 볼 뿐이었다. 아이의 엄마가 얼른 달려와 죄송해요, 했다.

“괜찮습니다. 아, 잠시만….”

양해를 구하고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러곤 공항으로 오는 차 안에서 백도운에게 받았던 사탕을 꺼내 아이 엄마에게 보였다.

“저기, 이거 줘도 될까요?”

“어머, 그럼요. 시우야. 형한테 고맙습니다, 하고 받자.”

제 엄마의 흔쾌한 수락에도 아이는 소매를 문 채 사탕과 주완을 멀뚱히 번갈아 보기만 했다. 주완은 혹시 자신의 표정이 무서운 걸까 싶어 손을 물리려 했다.

그때, 뒤에서 누가 주완에게 어깨동무하면서 불쑥 끼어들었다. 백도운이었다.

“애기야, 이거 안 먹고 싶어? 진짜 맛있는 건데? 애기 싫으면 아저씨가 다 먹어 버릴까?”

백도운이 사탕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입을 벌리자, 아이가 까르르 웃으며 사탕을 가져갔다. 아이 엄마는 감사합니다, 하고 재차 인사하더니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아이가 두 사람에게 연신 작은 손을 흔들었다. 덩달아 손을 흔들어 주던 주완의 얼굴에 모처럼 환한 웃음이 번졌다. 그 모습에 백도운의 입가에도 깊은 호선이 자리 잡았다.

“주완 씨, 슬슬 탑승할 건가 봐요. 가요.”

“아, 네.”

서둘러 백도운을 따라가려던 주완은 전처럼 볼이 따가운 느낌에 옆을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앉아 있던 권수혁과 적나라하게 시선이 얽혔다. 그가 언제부터 그렇게 주완 자신을 본 건지,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눈싸움하듯 한참 주완을 노려보던 권수혁이 벌떡 일어나 게이트로 걸어갔다. 일행이 따라오건 말건 혼자 움직인다. 주완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른 일행들과 함께 뒤늦게 항공기에 탑승했을 따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어서 오십시오.”

친절한 인사를 건네며 티켓을 확인한 승무원이 친히 자리까지 안내해 주었다. 항공권에 찍힌 좌석 번호에 맞춰 앉다 보니 또다시 권수혁의 옆자리였다.

“주완 씨, 불편할 것 같으면 내가 자리 바꿔 줄까요?”

맞은편 자리에 혼자 앉으려던 백도운이 주완을 배려해 물었다. 주완은 아, 하며 창가 자리에 앉은 권수혁을 돌아봤다. 권수혁은 백도운과 나란히 앉기가 싫은 건지 말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백도운보다 주완 자신을 덜 불편해한다면 굳이 바꿔야 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주완은 품에 안고 있던 신문을 앞쪽 공간에 잘 꽂아 놓고 그중 하나를 골라 읽기 시작했다. 출입구 앞에 놓여 있던 걸 죄 한 부씩 챙겨 온 참이었다. 눈동자만 굴려 그 모습을 살피던 권수혁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가가 알게 모르게 누그러진 건 욕심껏 신문을 쟁인 주완의 모습이 꼭 다람쥐 같았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출입문과 모든 짐칸이 닫혔다. 이어 곧 이륙하겠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홍콩까지는 4시간이 조금 덜 걸리는 모양이었다. 좁은 통로를 돌아다니며 막바지 체크를 하던 승무원들이 각자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동안 천천히 움직이던 비행기가 활주로 앞에 우뚝 섰다. 거대한 엔진이 빠르게 돌며 커다란 소음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항공기가 활주로를 내달리면서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뒤로 확 젖혀졌다. 시간당 8, 900㎞ 속도로 날아간다더니, 과연 그 속력이 체감됐다.

사실 비행기를 타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린 시절 막연히 상상했을 땐 그저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난생처음 겪는 생경한 감각에 어째야 할 줄을 모르겠다. 기체가 이륙한 순간, 밑이 돌연 허전해지는 느낌에 주완의 두 주먹이 꾹 힘 있게 쥐어졌다. 고개도 은근히 숙였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 그러니까 겁먹지 말고 긴장 풀어.”

그때, 머리맡에서 권수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착각인가 싶어 고개를 들고 권수혁을 봤지만,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그사이, 비행기가 적정 고도에 이르면서 안전띠 표시등이 꺼졌다. 벨트를 푼 승무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승객들도 기내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거나 화장실에 다녀오는 등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런데도 주완은 미약한 어지럼증에 꼼짝하지 않고 굳어 있었다. 양쪽 귀가 물먹은 것처럼 먹먹해서,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인식됐다. 멀미라도 하는 걸까? 그게 아니면 너무 급격한 변화에 몸이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몰랐다.

차라리 자는 게 나을 것 같아 스르륵 두 눈을 감았다. 그래도 어지럼증과 귀의 먹먹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잠시 후 예민해진 귓가에 뭔가가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동시에 기내 분위기가 조금씩 어수선해졌다. 기내식을 제공할 시간인지 승무원들이 바쁘게 기내를 오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메뉴에 관한 주문을 받는 말소리나 음식 냄새도 여릿하게 풍겨 왔다.

하지만 주완은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잠을 청했다. 차츰 사위의 기척이 멀어지면서 몸이 늘어졌다. 서서히 잠기운도 몰려들었다. 의식이 넘어갈 듯 말 듯 하던 순간, 툭 하고 뭔가에 머리가 닿으면서 자세가 좀 더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따뜻한 체온과 익숙한 향기도 전해졌다.

구태여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쓰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의식이 아득해지면서 그럴 수 없었다는 게 맞다. 주완은 슬쩍 그 온기에 기대 고개를 비비적거리며 깊은 수면에 들었다.

한참을 곤히 잤던 것 같다. 어렴풋이 깬 건 곧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기내 방송이 흘러나올 즈음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제 몸에 어느새 담요가 덮여 있다는 것도, 자신이 머리를 기대고 있던 게 다름 아닌 권수혁의 어깨였다는 것도. 권수혁이라고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신경 쓰지 않고 경제지를 읽고 있었다. 주완은 얼떨떨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길이 돌아올까, 차마 고개는 떼지 않은 채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권수혁이 문득 주완 쪽을 살피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엉겼다. 하지만 권수혁은 그때조차 인제 그만 떨어지라거나 머리를 치우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고요히 오가는 눈길 속에 속 깊은 곳이 속절없이 간지러워졌다.

입국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다른 나라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공기부터 사뭇 달랐다. 주변의 소음마저 무시할 수 없이 귀를 껄끄럽게 했다. 낯선 언어들의 조합이 생경한 까닭이었다.

세계적인 허브 공항이라더니, 과연 밤을 잊은 듯했다. 꽤 늦은 시간인데도 내부에는 여행 중인 인파로 북적북적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세계 각국의 언어를 쏟아 내다 보니 정신이 다 몽롱해졌다. 안내 표지판에 간간이 보이는 한국어가 도리어 낯설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쪽입니다.”

“아, 네.”

전미남이 넋 놓은 주완을 챙겼다. 백도운과 권수혁은 티격태격하면서 먼저 출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전미남을 따라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는데, 곳곳에서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동양권에서 동양인의 출현을 낯설어할 리 없으니, 뭇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아마 전미남일 거였다.

전미남과 주완이 권수혁과 합류하자마자 주변의 이목이 더 적나라하게 집중됐다. 선글라스를 쓴 문짝만 한 사내와 그에 못지않게 장신인 남자가 검은 정장을 입고 공항을 누비는 모습이 심상찮을 법했다. 그들의 수행원들도 한 덩치씩 하거나 험악한 인상에, 모두 맞춘 듯한 검은 정장을 입고 있어 예사롭지 않은 풍경을 완성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는 소리에 돌아볼 때마다 시선을 회피하기 일쑤였다. 아무래도 권수혁 일행을 보고 말로만 듣던 일본의 야쿠자라든가, 중국의 삼합회 따위를 떠올린 것 같았다. 확실히, 일반 관광객처럼 보이진 않았다. 앞서 입국 심사가 유독 더디고 까다로웠던 것도 그 여파이지 않을까.

출입구 밖에는 롤스로이스 리무진이 대기 중이었다. 그 크기에 놀라 눈을 떼지 못했는데, 백도운과 권수혁이 대수롭지 않게 그 차에 올라탔다. 전미남은 어리둥절한 주완에게 열린 문을 잡아 주며 권했다.

“타시죠.”

“어… 네.”

너무 진귀한 경험이라, 거듭 두리번거리며 차 안을 살폈다. 내부가 워낙 넓고 호화로워서 얼떨떨하기만 했다. 바깥의 사람들도 강력한 존재감에 연방 리무진을 힐금거렸다. 곧 리무진은 모두의 관심 아래 서서히 공항을 빠져나갔다.

한쪽에는 노랗거나 빨간 이층 버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이미 탑승한 승객들은 사진을 찍는 데 여념 없었다. 여행을 앞둔 사람들의 설레고 들뜬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한 관광객은 제 앞을 지나가는 리무진을 향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저도 모르게 덩달아 손을 흔들다가 백도운의 질문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주완 씨, 계속 자는 것 같던데. 많이 피곤해요?”

“아뇨. 제가 비행기 타는 게 처음이라… 갑자기 몽롱해져서요.”

“아, 처음이었구나? 혹시 숨이 잘 안 쉬어진다거나 맥박이 빨리 뛰거나 그랬어요?”

“아니요.”

“그럼 현기증이 나거나 구토, 두통 증상은요?”

“머리가 좀 어지럽고 귀가 먹먹하긴 했는데, 참을 만했어요.”

“흐음… 참을 만했다… 처음이라 그럴 수도 있는데, 항공병일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까 갈 때도 불편하면 꼭 말해 줘요.”

“네.”

“배는 안 고프고? 기내식도 못 먹었잖아요.”

“별로요.”

“권수혁, 너는?”

“…….”

물끄러미 권수혁을 봤다. 권수혁은 백도운을 빤히 응시할 뿐, 주어진 질문엔 대꾸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배가 고프지 않냐고 묻는 건 정황상 그 역시 기내식을 먹지 않았기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당시에 입맛이 없어서였을 수도 있고, 정말 배가 안 고팠을 수도 있고, 그 시간에 딴 일을 해서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주완 자신 탓일지도 몰랐다.

주완 자신이 잠들었던 게 기내식 서비스 전이었고, 권수혁의 어깨에 기댄 상태로 깨자마자 비행기가 착륙했다. 어떻게 봐도 식사할 틈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중간에 한 번도 뒤척이지 않고 통잠을 잤던 걸 보면 권수혁은 비행 내내 화장실조차 가지 않았던 듯했다.

“…상관없어. 아침은 든든히 먹었으니까.”

권수혁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지나가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가 아침으로 푸석푸석한 즉석 볶음밥을 먹었다는 건 전미남과 주완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백도운은 아침부터 삼계탕이라도 먹었느냐고 되물을 따름이었다.

전미남은 식사를 거른 두 사람을 위해 미니바에서 음료수를 꺼냈다. 열대 과일을 착즙해 만든 주스였다. 유리컵 세 개에 얼음을 담고 주스를 따라 맞은편에 앉은 주완에게 먼저 건넸다. 주완은 바로 그것을 옆자리에 앉은 권수혁에게 전했다.

“드세요.”

권수혁은 코앞으로 밀려든 컵을 멀뚱히 보다가 나직한 한숨을 뱉으며 잠자코 받아들었다. 먼저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켜던 백도운이 컵 너머로 야유 어린 눈길을 보내왔다. 권수혁이 그런 그를 마뜩잖게 노려봤지만, 전미남과 주완은 그 기 싸움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전미남은 손질돼 있던 열대 과일을 마저 꺼내 주완에게 내밀고, 주완은 그중에서 용과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을 따름이었다. 먼저 맛본 주스 때문에 달콤함은 거의 느낄 수 없었지만, 상큼한 과즙이 입 안을 시원하게 적셔 주었다.

“맛있어요.”

“주완 씨 나도, 아.”

백도운이 서슴없이 입을 벌렸다. 주완 역시 아무렇지 않게 과일을 집어 그에게 먹여 주었다. 전미남은 더 먹으라며 다른 과일들도 재차 권했다.

주완은 색다른 과일의 맛과 향에 빠져, 권수혁이 자신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제대로 숙성된 망고와 별 모양의 스타 프루트까지 하나하나 입에 넣고 신중하게 음미했다. 단순히 맛있다기보다는 신기했다.

“와, 화려하네. 이래서 홍콩, 홍콩 하나 봐?”

백도운의 감탄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새 리무진은 도심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도로 위에는 수많은 차가 늘어섰고, 길 위에도 사람들로 발 디딜 데가 없어 보였다. 사위가 어두워서 크고 작은 간판들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한층 더 도드라졌다. 이층 버스들은 줄지어 도로 위까지 점령한 간판 밑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밤을 잊은 듯 휘황찬란한 야경에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머지않아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높은 빌딩들이 나타났다. 대개 호텔이나 쇼핑몰, 어느 회사의 사옥으로 추정됐다. 더러 창마다 빨래를 내건 낡은 아파트도 눈에 들어왔다. 흡사 닭장을 연상시키는 외관에 홍콩의 살인적인 물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하철 입구에선 끊임없이 엄청난 인파가 밀려 나왔다. 따닥따닥 붙은 가게마다 뭘 취급하는지 유심히 들여다보게 됐다. 모든 게 그저 낯설고 색달랐다. 가로수나 조경수마저 이국적인 정취를 가득 풍겼다.

“다 왔습니다.”

한참 길거리 구경에 빠져 있는데, 전미남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이어 리무진이 서서히 속력을 줄이며 어느 호텔 앞에 멈춰 섰다. 한눈에 봐도 규모가 크고 고급스러운 호텔이었다. 대기하던 도어맨들이 다가와 친히 문을 열어 주고, 정중하게 일행을 맞이했다.

안내를 받아 로비로 들어섰다. 널찍한 로비는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인종과 출신지는 물론, 호텔을 방문한 목적마저 제각기 다를 터였다.

일행은 별도의 라운지에서 간단히 체크인을 마쳤다. 그러곤 담당 직원과 함께 객실로 올라갔다. 담당 직원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곧 묵게 될 객실에 관해 한참 설명했다. 어쩐지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객실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탁 트인 전경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객실 전면의 큰 통창은 빅토리아 항구의 눈부신 야경을 여과 없이 담아냈다. 대형 TV와 그랜드 피아노, 소파가 놓인 응접실에서도, 널찍한 욕조가 있는 욕실에서도, 메인 룸과 연결된 넓은 테라스를 통해서도 언제든 빅토리아 항구를 조망할 수 있었다.

담당 직원은 뿌듯한 표정으로 객실의 모든 시설을 일일이 자랑했다. 주완은 백도운에게 이끌려 해당 직원을 따라다니면서 그 모든 설명을 들어야 했다. 백도운의 통역에 의하면 객실 자체에 인피니티 수영장과 헬스장, 자쿠지 시설이 포함돼 있단다. 방의 개수만 무려 5개에 달하는 듯했다. 또 해당 객실은 총 200평 규모로, 홍콩에서 가장 넓은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이며, 하룻밤 숙박비만 1,500만 원을 호가한다고 했다. 그 금액도, 시설의 호화스러움도 도무지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나도 여기서 잘까? 방도 많은데.”

호화로운 객실을 모두 둘러본 백도운이 장난 삼아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권수혁은 대놓고 정색하며 그를 노려봤다.

“알았다, 알았어. 간다, 가.”

백도운은 치사한 새끼, 하고 꿍얼거리며 먼저 객실 밖으로 나갔다. 전미남도 때맞춰 도착한 캐리어를 한쪽에 잘 놓아 주곤 꾸벅 인사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대표님.”

권수혁은 대답 대신 고개만 까딱였다. 그동안 창 너머 야경을 넋 놓고 보던 주완이 서둘러 백도운과 전미남을 따라갔다.

그런데 주완이 막 객실을 나서려던 찰나, 권수혁이 대뜸 그의 팔을 잡아챘다.

느닷없는 전개에 전미남과 백도운, 그리고 당사자인 주완의 시선이 일제히 권수혁에게 날아가 꽂혔다. 권수혁은 그 의문 어린 눈빛들에 아랑곳하지 않고 주완을 홱 끌어당겼다. 새카만 눈동자 가득 어안이 벙벙해진 주완의 얼굴이 들어찼다.

“넌 이쪽이야.”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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