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완은 덩그러니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밤도 늦었으니 이제 자도 될지, 어떤 방을 쓰면 될지 권수혁에게 물어야 할 게 많았다.
하지만 권수혁은 백도운과 전미남을 내보낸 뒤부터 줄곧 통화 중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먼저 샤워까지 하고 나왔는데도 그랬다. 업무 얘기를 나누는 건지 표정도, 어조도 자못 심각해서 섣불리 끼어들 수가 없었다.
불현듯 제 손목을 내려다봤다. 샤워할 때도 얼얼하더라니, 권수혁에게 잡혔던 부위에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권수혁은 통화하는 중간중간 주완을 돌아봤다. 무슨 말이라도 하려나 싶어 빤히 보면 다시 눈을 돌리고 통화를 이어 가는 식이었다.
나직한 한숨을 쉰 주완은 앞쪽에 놓여 있는 책자들을 펼쳐 봤다. 홍콩과 마카오의 유명한 관광지들이 소개돼 있었다. 물론 온통 영어라 뭐라고 적힌 건지 알 순 없었다. 그나마 사진이 많아서 그런대로 볼만했다.
그 책자마저 다 봤을 땐 호텔 자체 편람도 들쳐 봤다. 호텔 내 편의 시설과 제공 가능한 서비스, 룸서비스 메뉴 등이 적혀 있었다.
그즈음 책자 한 귀퉁이에 그림자가 일었다. 동시에 익숙한 향기도 풍겨 왔다. 의아해서 고개를 들자, 어느새 다가온 권수혁이 주완에게서 룸서비스 안내서를 가져갔다. 이어 내선 전화의 수화기를 들고 특정 번호를 눌렀다. 금세 통화가 연결됐는지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평소 톤보다 더 낮은 목소리에 괜히 더 집중하게 됐다. 단어 하나하나가 명료하고 깔끔하게 귀에 감겼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권수혁은 들고 있던 안내서를 테이블에 툭 던지고 소파에 앉았다. 셔츠의 단추를 풀면서 등을 소파 깊숙이 기댔다. 그러다 주완의 빤한 시선을 느끼곤 왜, 했다.
주완은 숨기지 않고 내내 깃들었던 의문을 제기했다.
“내가 옆에 두고 자야 하는 베개 역할인가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딱히 도망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못 미더우면 다른 사람들한테 감시하게 했어도 충분했을 거예요. 보다시피 그 사람들 때려눕히고 도망갈 수 있을 만큼 힘이든, 체력이든 좋은 상태가 아니니까. 한 명 정도면 모르겠지만.”
권수혁은 돌연 웃음이 터지려는 걸 가까스로 삼켰다. 한 명 정도라면 또 모른다는 얘기가 너무 같잖게 들렸다.
주완의 말대로 주완이 도망칠 걸 염려해서 홍콩까지 데려온 거라면 오히려 집에 묶어 두고 감시인을 붙이는 게 훨씬 효율적일 터였다. 문제는 애초에 그런 계산이 없었다는 데 있었다. 주완을 왜 동행시켰는지, 꼭 그래야만 하는 건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권수혁은 그러니까, 하면서 주완의 의문을 더 분명히 했다.
“네가 왜 여기까지 따라와야 했던 건지, 그게 궁금한 건가?”
“…혼자 생각해 봤는데요. 혹시 수혈이 필요한 상황에 대비하려는 건가요?”
주완이 어느 정도 확신을 품고 되물었다. 백도운과 주완 자신의 홍콩행에 그 외의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권수혁은 특별히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그저 주완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새카만 눈동자를 느릿하게 굴리면서 주완의 의중을 살피는 듯했다.
권수혁이 아주 위중해지면 주완 자신의 피를 남김없이 뽑아 그에게 수혈할지도 몰랐다. 비인간적이지만, 제 처지를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물론 그렇대도 어쩔 수 없다. 그 대가로 제한적인 자유나마 얻은 셈이니까.
대답을 기다리는 주완은 시종 덤덤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그 단단한 무표정을 허물어 보고 싶지 않을까.
순간이지만, 권수혁의 얼굴에 얄궂은 미소가 번졌다. 늘 굳어 있던 입술이 얕은 호선을 그린다.
“그렇다면?”
“…….”
주완은 테이블 어딘가를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고 싶은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함부로 참견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주완 자신이 만류해 봤자 권수혁은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백도운으로부터 전해 들었던 얘기가 못내 마음에 걸려서, 자신을 학대하듯 살아왔다던 권수혁이 자꾸 신경 쓰여서 끝내 입을 열었다.
“수혈이 필요할 정도면 크게 다치는 거잖아요. 목숨이 위험할 만큼.”
“짐승 입에 스스로 손을 넣은 사람이 할 말인가?”
“적어도 그건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어요.”
권수혁에게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명백한 조소였다.
“우습네. 애초에 그런 건전한 이유였으면 그 병원에서 널 데려올 필요도 없었겠지.”
그건 그랬다. 권수혁이 정의로운 사유로 피를 흘리는 거라면 병원에서 치료받아도 될 일이었다. 그럼 주완 자신도 지금 이곳에 있지 못했겠지만.
잠시 말이 없던 주완은 곧 그래도, 하며 당부했다.
“…다치지 마세요.”
“왜. 막상 피를 뽑히려니 무서워? 하루라도 더 연명하고 싶어졌나?”
“아뇨. 필요하면 얼마든지 날 써도 좋아요. 그게 병원을 나오는 조건이었으니까. 그거랑은 별개로….”
주완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동그랗고 맑은 두 눈에 권수혁이 오롯이 비쳤다.
“그냥 그쪽이 안 다쳤으면 좋겠어요.”
순간 권수혁의 낯이 멍해졌다. 입가에 자리 잡았던 비웃음도 일시에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헛웃음이 터졌다. 얼마든지 저를 써도 좋다니.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어이가 없었다.
“너, 확실히 정상은 아니네. 나사 빠진 소릴 자주 하는 게.”
그렇게 핀잔하면서도 권수혁의 기분은 썩 나빠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 짙게 고인 웃음도 쉽사리 사그라지지 않았다.
주완은 그런 권수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눈빛으로 그를 빤히 봤다. 흡사 관찰당하는 듯한 기분에 권수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뭘 그렇게 봐?”
“그렇게… 웃을 줄도 아네요?”
주완이 얼떨떨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권수혁은 허를 찔린 것처럼 멈칫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주완이 먼저 문가로 고개를 돌렸다. 권수혁도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찾아온 이가 누구인지 아는 건지 스스럼없이 문을 열었다. 그곳으로 한 호텔 직원이 트롤리를 밀며 들어왔다.
권수혁과 직원은 짧은 대화를 나눴다. 객실 안에 테이블이 많아 어디에 음식을 차리면 될지 묻고 답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직원은 트롤리에서 각종 트레이를 꺼내 소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못해도 메뉴가 대여섯 개는 될 성싶었다. 금색 병 위에 스페이스 문양이 새겨진 샴페인도 한쪽에 자리 잡았다. 세팅을 모두 끝낸 직원은 들어왔을 때처럼 극진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트레이에서 기분 좋은 냄새가 풍겼다. 권수혁은 얼른 먹지 않고 멀뚱멀뚱 앉아서 테이블 위만 내려다보던 주완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손수 덮개들을 거둬 냈다. 두툼한 스테이크부터 머드 크랩을 이용한 해산물 요리, 파스타, 샌드위치, 볶음밥, 각종 사테와 국물 요리까지 다양한 산해진미가 펼쳐졌다.
“먹어.”
권수혁은 여전히 꼼짝하지 않는 주완에게 명령하며 글라스에 샴페인을 따랐다. 곧 공기 중에 향긋한 냄새가 더해졌다.
특별히 배가 고팠던 건 아닌데, 속이 꿈틀거리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주완은 잘 먹을게요, 하곤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겉이 단단해 보이던 스테이크는 거짓말처럼 매끄럽게 썰렸다. 자른 단면에 육즙이 뿜어져 나오며 자르르한 윤기가 돌았다. 소스도 없이 고기 한 점을 슬며시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속살은 그대로 녹을 것처럼 부드러운데, 시어링돼 바삭바삭한 겉면의 식감 때문에 고소함과 동시에 쫄깃한 식감마저 느껴지는 듯했다.
주완은 홀린 것처럼 마저 한 점 크게 썰어 입에 넣었다. 금세 볼이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두 눈을 온전히 스테이크에 고정한 채 오물오물하는 모습에 샴페인을 마시던 권수혁의 시선이 주완에게 고정됐다.
찰나의 주시가 아니었다. 그 뒤로도 권수혁은 간간이 샴페인을 들이켜며 주완의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주완과 마찬가지로 식사를 걸러 허기질 텐데도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낯은 전에 없이 풀어져 있었다. 일견 여유롭고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먹잇감을 토실토실 살찌우는 데 재미라도 붙인 것처럼.
주완은 침실과 연결된 발코니에 서서 멀거니 전망을 구경했다. 밤이 깊어도 꺼지지 않는 불빛의 향연에 이래서 백만 불짜리 야경이라는 찬사를 받는 걸까 싶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잠들기가 아쉬운 기분이었다.
주완처럼 황홀경에 취한 사람들은 집이나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강변을 거닐었다. 사진이나 영상을 찍고, 일행과 아무 데나 앉아서 대화를 나누며 웃었다. 그처럼 작은 행복을 누리는 소박한 삶이 부러웠는데, 지금은 주완 자신도 그들과 같은 풍경에 섞여 있었다. 물론 최고급 객실이나 비싼 음식, 무엇 하나 평범하다고 할 순 없지만.
문득 등 뒤쪽에서 불거진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 막 샤워를 마친 권수혁이 침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물기가 어려 더 짙어진 듯한 흑발에 절로 눈이 갔다. 곧이어 시선이 마주쳤다.
뭐 할 말이라도 있느냐는 눈빛을 하는 권수혁에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다시 눈길을 밤을 머금은 바다 위로 던졌다. 하늘과 수평선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유유히 떠다니는 페리와 관광선, 경쟁하듯 높게 뻗은 마천루들의 불빛이 까마득한 어둠을 밝히면서 특유의 운치를 자아냈다. 잠들 생각을 하니 계속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한참 만에야 문을 닫고 침실로 들어섰다. 그즈음 권수혁은 먼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주완을 배려한 것인지 오른쪽으로 완전히 치우친 채였다. 벽을 향해 몸을 돌린 데다 맨몸으로 자는 습관 때문에 넓고 단단한 등이 바로 보였다. 번번이 이유 모를 안도감이 들었다.
주완의 시선을 눈치챘을까. 권수혁이 불쑥 입을 열었다.
“자, 그만.”
잠기운이라곤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였다. 그래서인지 그럴 리 없는데도 권수혁이 부러 자 버리지 않고 주완 자신을 기다려 준 것만 같았다. 어서 자라는 퉁명스러운 명령조차 잘 자라는 인사처럼 들렸다.
얼른 침대 위로 올라갔다. 권수혁이 불편할까, 매트리스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왼쪽 가장자리에 완전히 붙어 누웠다. 그 탓에 가운데 공간이 휑하니 남았다. 침대가 유독 큰 탓에 여백도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집에선 재규어가 그곳을 차지해 티가 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
한참 높다란 천장을 올려다보던 주완이 별안간 권수혁 쪽으로 돌아누웠다. 혹시 또 여느 때처럼 악몽에 시달리더라도 눈을 떴을 때 바로 그가 보이도록. 왜인지 그러면 마음이 금세 진정될 것 같았다.
“잘 자요.”
주완의 인사에도 권수혁은 묵묵부답이었다. 무뚝뚝한 그의 등을 보다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습관처럼 몸이 작게 웅크려졌다. 포근한 침구에 완전히 파묻혀 있으려니 금세 가물가물하면서 잠기운이 몰려들었다. 몸도, 마음도 평온했다.
이 모든 게 깨면 사라져 버릴 허망한 꿈이라도, 찰나에 그칠 단꿈이어도 좋을 것 같았다.
“주완 씨, 그만 일어나요.”
익숙한 목소리에 움찔하며 깼다. 잠깐 눈만 감았었다고 생각했다. 아직 잠들지 않은 거라고. 매일같이 반복되던 악몽을 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튼이 확 젖혀지면서 눈가로 쏟아지는 햇볕은 허상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백도운은 눈가를 가리고 한참 꾸물거리는 주완에게 다가와 그를 파묻다시피 한 이불부터 거둬 냈다. 좀 더 자고 싶은지, 연신 베개에 고개를 비비적거려 대는 그의 어깨를 잡고 가볍게 흔들기도 했다.
“얼른요.”
마지못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덕인지, 의외로 잠기운은 금세 달아났다. 갑작스러웠던 비행과 여행의 여파도 딱히 없었다. 몸도, 머리도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천천히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훑어봤다. 높은 천장과 넓은 침실, 커다란 창,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미소 짓고 있는 백도운의 얼굴이 순차적으로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하룻밤 꿈이 아니었나 보다.
백도운은 자신을 빤히 보기만 하는 주완의 팔을 당겨 기어이 일으켰다.
“아침 먹어야죠. 주완 씨 깨길 기다리다가 아사할 뻔했네.”
“…아.”
“잘 잤어요?”
“네.”
백도운은 침대 밑으로 들어가 버린 주완의 슬리퍼까지 친히 꺼내 주었다. 고맙습니다, 하던 주완은 무심결에 옆자리를 살폈다. 권수혁은 그곳에 없었다. 분명히 함께 잠들었는데, 베개나 이불도 비교적 단정하게 정돈돼 있었다. 언제 일어나서 나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수혁이라면 아침 일찍 나갔대요.”
백도운이 주완의 궁금증을 능히 파악하고 귀띔해 주었다. 그러곤 주완을 팔을 붙들어 욕실로 데리고 갔다.
“일단 씻고 나와요.”
“네.”
정해진 일정이 있겠거니 짐작하며 순순히 시키는 대로 했다. 권수혁이 먼저 사용했을 욕실에는 그 특유의 향기가 가득했다.
넓은 욕실을 천천히 둘러보던 주완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조금 놀랐다. 어젯밤 너무 많이 먹어서일까. 얼굴이 약간 부은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살이 붙은 건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병원에서 갓 나왔을 때와 비교하면 혈색도 그렇고, 훨씬 사람다웠다.
샤워 부스로 들어가 간단히 씻었다. 비치된 젤에서 권수혁의 향기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같은 향을 쓰더라도 사람마다 체취가 달라 온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익숙한 계열이라 그런지 금세 몸이 누그러졌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제거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응접실에서 백도운과 대화 중이던 전미남과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꾸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백도운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혀를 찼다.
“뭐야, 그 삭막한 인사는.”
“갈아입을 옷, 드리겠습니다.”
전미남이 얼른 일어나 가방에서 옷을 꺼내다 주었다. 백도운은 주완이 그 옷을 받아들기도 전에 그를 끌어다 제 옆에 앉혔다. 그러곤 보고 있던 여행책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우리 오늘 어디에 가 볼까요?”
“네…?”
“놀라긴 왜 놀라요. 모처럼 홍콩까지 왔는데, 호텔에만 틀어박혀 있을 순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여기 놀러 온 게 아니지 않나요?”
“놀러 온 게 아니면 뭐, 일하러 왔어요? 주완 씨가 여기서 무슨 일을 하게.”
놀리듯 되묻는 백도운을 멀뚱히 봤다. 아리송한 눈빛은 곧 전미남에게도 날아가 꽂혔다. 그 역시 확신이 없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아잇, 시간 아깝게 자꾸 멍 때릴 거예요? 옷부터 갈아입어요, 얼른.”
백도운은 주완을 다시 침실로 밀어 넣었다. 아예 문까지 닫아 버린다. 전미남은 별다른 말 없이 소파로 되돌아와 앉는 그를 진득이 응시했다. 묻고 싶은 게 있는 듯했다.
백도운이 재차 여행책을 대강 넘겨 보면서 입을 뗐다.
“수혁이가 주완 씨를 여기까지 데려온 게, 그저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서인 거 같아요?”
“아니라면 왜….”
전미남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그쵸. 그게 아니면 왜 이런 번잡한 짓을 벌였을까, 그 권수혁이.”
백도운이 여행책에서 눈을 떼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전미남은 도무지 그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했다. 이렇게나 둔하다.
“생각해 봐요. 그런 계산이었으면 차라리 한국에서 미리 피를 뽑아 오는 게 훨씬 간단하잖아. 동물 피로 속이든 어쨌든, 들여올 방법 찾는 거야 권수혁 전문이고. 오히려 그편이 없는 여권 만드는 것보다 훨씬 수월했을걸?”
“아….”
전미남에게서 나직한 탄성이 터졌다. 뜻밖의 깨달음에 놀란 기색이었다.
“왜인지 권수혁, 그놈도 지가 무슨 오류를 범했는지 모르는 것 같아요. 아니면 모르는 척하고 있거나.”
백도운이 노래라도 부르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그 낯빛이 꽤 즐거워 보이기도, 짓궂어 보이기도 했다. 억측일 수 있겠지만, 그의 짐작대로라면 최근 권수혁이 보였던 이상 행보가 모두 설명되긴 했다. 물론 전미남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
잠시 어떤 생각에 잠겼던 전미남이 나직이 탄식했다. 삽시에 그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왜요? 뭐 문제 있어요?”
“그게… 사실 오늘 새벽에 대표님께 박주완 씨 병실에서 찾았던 카메라 메모리 카드를 전해 드렸습니다.”
순간이지만, 백도운의 얼굴이 멍해졌다. 이내 그는 소파에 등을 툭 기대며 픽 웃었다.
“돌풍이 불겠는데? 어쩌면 해일일지도 모르고요.”
어느 쪽이든 그렇게 실실거릴 일은 아니지 싶었다.
***
카지노는 매끈한 대리석 바닥과 황금색 벽지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천장에 달린 화려한 샹들리에가 노란 불빛을 밝히며 일확천금을 노리는 이리들을 유인했다.
하지만 막상 그 안은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수십 대의 슬롯머신들은 제각각의 소음을 발산했고, 국정이 다양한 도박꾼들은 쉼 없이 저마다의 언어로 환호하거나 욕설을 지껄였다. 사방에 꽉 들어찬 담배 연기로 숨쉬기도 쉽지 않았다. 시야 역시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뿌옇기만 했다.
그 가운데 종일 구석의 슬롯머신을 떠나지 않는 사내가 있었다. 흰자위는 진즉 노랗게 변했고, 실핏줄까지 터졌다. 그런 꼴로도 담배를 뻑뻑 피우며 줄곧 슬롯머신의 실린더만 노려본다. 레버를 당기는 손짓은 지극히 기계적이었다. 딱히 재미도, 흥미도 없었다. 그저 한 자리에서 계속 돈을 헌납했으니, 슬슬 돌려받을 때가 됐다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뭉그적거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번번이 돈만 날렸다. 어쩌다 한 번씩 따게 돼도 본인의 기대나 잃은 것에 비하면 푼돈이었다. 슬슬 교환해 온 칩도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끝내 사내의 조급증이 폭발했다.
“니미, 씨발! 이거 사기 아냐?”
애꿎은 기계를 내려치며 벌컥 짜증을 낸다. 주위에서는 그에게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카지노에 있다 보면 그런 사람쯤은 숱하게 보기 때문이었다.
혼자 씩씩거리던 사내는 결국 바닥에 떨어진 칩을 도로 주워서 신중히 기계에 넣었다. 두 눈은 다시 실린더 안에서 빠르게 돌아가는 그림에 고정됐다. 어찌 보면 아둔하고 지나치게 맹목적이었지만, 실상 현실을 벗어나는 데 그보다 좋은 수단은 없었다.
언제쯤 공략하는 게 좋을까. 타이밍을 엿보며 숨죽인 그때, 뒤에서 불쑥 누군가의 손이 뻗어져 와 사내의 손을 감쌌다. 그러곤 그대로 레버를 당겨 버렸다. 결과야 볼 것도 없었다. 눈가가 꿈틀거렸다.
“이런 씨발, 어떤 개새끼가…!”
기어이 씨근덕거리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방해꾼을 두드려 패서라도 쌓인 화를 풀어야 할 듯했다.
“…헉!”
그러나 사내는 제 등 뒤의 남자를 보고 얼어붙었다. 씩씩거리던 숨까지 거짓말처럼 말려 들어갔다. 그도 그럴 게, 그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이가 다름 아닌 권수혁이었기 때문이다. 저승사자를 만난 것처럼 오금이 저렸다.
“대, 대표님….”
“소란 피우지 말고 조용히 따라와.”
권수혁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스산하게 귓전에 울렸다. 사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권수혁의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듯 돌아섰다. 이어 그의 수하들이 사내를 양쪽에서 제압했다.
사내는 억지로 끌려가면서 필사적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누구에게든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았다. 카지노를 지키는 가드에게 부탁하면 도와줄까.
그 생각이 읽혔을까, 권수혁의 수하 중 하나가 사내의 급소를 가격했다. 순식간에 온몸에서 힘이 죽 빠지면서 사지가 늘어졌다. 수하들은 그런 사내를 짐짝처럼 취급했다.
입구를 지키던 가드들이 수상쩍은 낌새를 인지하고 일단 일행을 막아섰다.
“실례지만 무슨 일이시죠, 손님?”
“일행인데, 술에 만취한 것 같습니다.”
“도와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저희 손으로도 충분해서.”
가드들은 축 늘어진 사내를 힐금 봤다. 하필 끼니도 거르고 술과 담배에 찌들어 슬롯머신에만 매달린 탓에 그에게선 짙은 알코올 냄새가 났다. 가드들은 잠시 시선을 주고받더니 별다른 제지 없이 일행을 보내 주었다. 기실 그들에게 돈을 쓰지 않을 고객은 보호 대상이 아니었다. 카지노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책임을 질 필요도, 그런 일에 얽힐 의지도 없었다.
사내는 그 즉시 차에 태워져 어디론가 옮겨졌다. 차는 특급 호텔과 카지노가 즐비한 코타이 스트립을 벗어나 한참을 내달렸다. 이윽고 멈춰 선 곳은 마카오 외곽 지역에 자리한, 한적한 공터였다. 늦은 밤이기도 하지만, 평소에도 인적이라곤 없을 듯한 장소였다. 인가의 불빛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즈음 정신을 차린 사내는 맨땅으로 끌려 나오자마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싹싹 빌었다.
“대, 대표님! 살려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된 건지 소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무, 물건도 아직 다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남아 있는 걸 어디에 보관했는지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다 돌려드리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그러니까 제발 목숨만은….”
“처리하지 못한 거지, 처리하지 않은 게 아닐 텐데?”
사내가 바로 태국과의 대규모 마약 거래를 주도했다가 돈과 상품을 모두 가로채 잠적한, 그 브로커였다. 이제까지 그와 한두 번 일했던 게 아니었다. 권수혁이 배신자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련하게 순간적인 욕심에 일을 쳤다.
문제는 그 대량의 물건을 한꺼번에 정리할 수 없었다는 거였다. 일종의 장물 처리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고액의 상품을 전부 매입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고, 암시장의 거물들조차 괜히 얽히기 부담스럽다며 손사래를 쳤다. 조금씩 나눠 팔기도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거래 당사자들이 모두 혈안이 돼서 저를 찾는 판국에,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 위험을 자초할 순 없었다. 그러잖아도 홍콩 암시장에 판로를 개척하러 갔다가 누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소식만 접했다. 자칫 잘못하면 덜미를 잡힐 터라, 그 뒤로 계속 숨어 지내던 참이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제발.”
사내가 거의 울먹이면서 매달렸다. 권수혁은 지극히 무감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봤다. 싸늘한 눈빛에선 도무지 협상의 여지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 뒤통수를 쳤으면 다시 잡히지 말았어야지.”
사내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턱이 딱딱거리며 부딪치기 시작했다. 권수혁의 수하들이 사내의 어깨와 머리를 잡아 눌렀다. 살아 나갈 수 없다. 반드시 죽는다. 까마득한 절망과 공포에 사내가 과호흡으로 식식댔다.
“데려가서 조용히 정리해.”
이어진 권수혁의 지시에 그의 수하들이 꾸벅하며 네, 했다. 사내는 남은 힘을 쥐어짜 펄떡거렸다.
“힉! 대, 대표님! 살려 주십시오!”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러나 권수혁은 다시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차에 올랐다. 그의 차가 금세 공터를 떠났다.
남은 수하들은 사내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그를 꽁꽁 묶어 트렁크에 밀어 넣었다. 문을 닫자, 사내가 머리로 트렁크를 들이박으며 살기 위해 발악했다. 안타깝게도 그 기척을 들어 줄 사람이 없었다.
사내를 실은 차는 곧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는 죽은 듯한 고요만이 도사릴 뿐이었다.
***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시야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더니, 눈을 감아도 어지럼증은 여전했다. 완전히 기진맥진해서 겨우 숨만 쉬는 형국이었다. 오래 걸어서인지 발도 아프고 화끈거렸다. 기실, 10년 사이 그렇게 오래 걸어 본 적이 없었다.
너무 피곤해서 입맛도 달아났다. 저녁을 걸렀는데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몸이 완전히 까라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일 엄두가 안 났다. 체력이 이렇게까지 바닥났을 줄은 몰랐다.
찬찬히 일과를 되짚어 보니 까마득한 기분마저 들었다. 내일 당장 똑같이 다시 하라면 도저히 못 할 것 같았다.
전미남, 백도운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자마자 ‘오션 파크’라는 곳에 갔다. 테마파크답게 어린아이들과 학생들이 많았다. 백도운이라고 특별히 놀이기구나 동물 구경을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곳과 안 어울리는 건 전미남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그곳을 첫 목적지로 삼았던 건 몸은 이미 성인이어도 기억과 경험은 열여덟 살에 멈춰 있는 주완을 배려한 까닭인 듯했다.
그곳에서 심히 덜컹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산 하나를 넘었다. 동그란 호박 모양의 케이블카는 바닥을 제외한 공간 대부분이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경관을 만끽하라는 뜻이겠지만, 아찔한 높이 때문에 내내 기둥만 쳐다봤다. 정점에 올랐을 땐 밑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개미만 해 보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바다와 인접한 탓에 바람이 쉬지 않고 불었다. 그 여파로 작은 케이블카는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세 사람의 반응은 각기 달랐다. 백도운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환호했고, 전미남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무릎에 올려놓았던 두 주먹을 꾹 쥐었다. 주완은 이렇다 할 표정 변화 없이, 다만 가운데 기둥을 슬그머니 붙들었을 따름이다.
주완이 남다른 흥미를 보인 곳은 아쿠아리움이었다. 넓은 수조 안을 유유히 헤엄치는 각양각색 해양 생물들의 향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찬란하게 반짝이는 비늘과 유연하게 움직이는 지느러미에 흠뻑 취해 대형 수족관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러자니 깊은 심해에 들어간 듯해, 마음이 차분해졌다.
꽤 오랫동안 오션 파크에 머물면서 돌고래 쇼도 보고, 동물원까지 구경했다. 그런 후 스탠리로 이동해 늦은 점심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스탠리 마켓을 둘러봤다. 천천히 해변을 거닐며 낙조를 감상하기도 했다.
같은 일정을 소화한 백도운과 전미남은 멀쩡한 걸 봐서, 주완 자신이 문제인 듯했다. 아무래도 조금씩이나마 운동해야 할 성싶었다. 사지가 저릿저릿한 게, 자칫 몸살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머지않아 전미남이 침실로 들어왔다. 갈아입을 옷을 침대 위에 내려놓은 그는 우려 어린 눈빛으로 주완의 의사를 재확인했다.
“정말 저녁 식사를 거를 겁니까.”
“네. 오늘은 그냥 자고 싶어서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아, 저….”
바로 돌아나가려던 전미남이 의문스레 돌아봤다. 주완은 그새 상체를 일으키고 앉아 있었다. 동그란 두 눈이 제법 초조하게 전미남을 응시해 온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뭔가를 물을까 말까, 머뭇거렸다.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그 사람은… 오늘 안 돌아오나요?”
“대표님 말입니까?”
“네.”
“업무차 마카오에 머물고 계십니다. 돌아오시려면 이틀에서 사흘 정도는 걸릴 겁니다.”
주완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에는 별반 변화가 없었지만, 왜인지 좀 실망한 듯했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이내 주완은 느릿느릿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카락이 완전히 마르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런 데 연연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지금 당장 쉬지 않으면 골병이 나서 내일은 일어나지도 못할 것 같았다. 금세 침구에 완전히 파묻혔다.
“주무실 겁니까?”
“네. 오늘따라 좀 피곤해서요.”
“백 선생님 페이스를 따라가기가 쉽진 않죠. 그럼 푹 쉬십시오.”
“미남 씨도 잘 자요.”
인사를 건네는 주완의 목소리가 반쯤 잠겨 있었다. 전미남은 손수 커튼을 치고, 침실의 조명도 어둡게 조절해 주었다. 그러곤 마지막까지 주완의 모습을 살피다 문을 닫고 나갔다. 미미하던 그의 기척이 곧 잦아들었다.
사위가 고요해지면서 몸도 한결 더 누그러졌다. 살갗에 닿는 침구의 감촉은 여전히 보드랍고 편안했다. 금방이라도 숙면에 들 수 있을 듯했다.
한동안 미동 없이 잠을 청하던 주완이 불쑥 몸을 꿈지럭거렸다. 꼼짝하지 않던 다리도 이래저래 움직이면서 몇 번씩 자세를 바꿨다.
너무 피곤했다. 발바닥은 여전히 화끈거리고, 퉁퉁 부은 두 다리도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따뜻한 물로 샤워한 직후라 온몸도 노곤하게 풀어진 상태였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다시 뜰 엄두도 안 났다. 거기에 새로 갈아 보송보송하고 포근한 침구까지. 숙면의 조건은 완벽하게 갖추어졌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그것만으로도 끙끙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몸은 곳곳이 다 저리고 힘든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지난밤과 달라진 거라곤 권수혁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타인과 침대를 공유하지 않아도 되니, 조심할 것도 딱히 없고 오히려 편해야 하는 거 아닌가.
혹시나 해서 늘 그랬던 것처럼 침대 가장자리로 가서 몸을 잔뜩 웅크려 봤다. 그러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잠기운은 자꾸 달아나고, 가슴이 불안정하게 쿵쿵 뛰었다. 잠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당최 어째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응? 주완 씨, 어제 일찍 잤다더니 어떻게 된 거예요?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백도운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손에는 또 문제의 여행책을 든 채였다. 전미남은 우유가 담긴 유리컵을 주완 앞에 놔 주면서 슬쩍 그의 안색을 살폈다. 도운의 말마따나 주완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듯한 몰골이었다. 눈가도 떼꾼하고, 피부도 좀 까칠해 보였다. 머리카락에선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데,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룸서비스로 시킨 아침 식사에도 영 관심이 없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전미남이 은근히 걱정하자, 그제야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잠이 좀 안 왔어요.”
“그래요? 어제 종일 돌아다녀서 피곤하지 않았어요? 난 완전 꿀잠 잤는데?”
“피곤하긴 했는데, 뭔가… 익숙하지 않아서요.”
주완은 드레싱도 뿌리지 않은 샐러드를 대충 찍어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것을 씹어 삼키는 턱의 움직임이 지극히 기계적이었다. 밋밋한 표정으로 추측건대,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백도운과 전미남은 서로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백도운이 먼저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주완이 왜 그러는 건지 짐작하기 어려운 건 전미남도 마찬가지였다.
전미남은 각종 샌드위치가 담긴 그릇을 주완에게 내밀었다. 주완은 고맙다는 인사 대신 묵례하듯 고개를 까딱하더니 아무거나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곤 그것을 양껏 입에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두 볼이 볼록해져선 무념무상으로 우물우물 씹는다. 아마 샌드위치의 주재료가 뭐냐고 물어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것 같았다.
“흠… 갑자기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은근히 그런 데 영향받는 사람 많다던데. 근데 또 첫날엔 잘 잤잖아요?”
“아무래도 안심이 안 돼서 그런가 봐요.”
“안심? 무슨 안심이요?”
“병원에서도 종종 그랬거든요. 잠들면 원치 않는 악몽에 시달리니까, 나중에는 자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입원 내내 불면증을 앓았어요. 어쩌다 겨우 눈을 붙여도 한두 시간 후에 깨기 일쑤였고요. 수면제를 먹으면 그때뿐이어서….”
“저런. 힘들었겠네.”
“그런데 거길 나오고부터는 거짓말처럼 잠이 잘 오더라고요. 그저께는 처음으로 악몽도 안 꾸고 푹 잤어요. 옆에 누가 있다는 게, 저도 모르게 안심이 됐나 봐요.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그 사람 등을 보고 있으면 악몽을 꾸다 깨도 마음이 금방 편해져요.”
다시금 백도운과 전미남의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전미남은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고, 백도운은 씩 묘한 미소를 지었다.
“주완 씨 혹시 그 얘기, 수혁이한테도 했어요?”
“무슨 얘기요?”
“방금 주완 씨가 했던 말이요. 수혁이 등을 보고 있으면 저절로 안심되더라, 뭐 그런 거?”
주완은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그러자 백도운의 미소가 한결 더 짙어졌다.
“큰일 날 뻔했네.”
“…네? 하면 안 되는 말이었나요?”
“아뇨. 그건 아니고. 수혁이 놈 표정이 어땠을지 궁금하네. 아까워라. 신경 쓸 거 없어요. 무사하면 됐지, 뭐.”
백도운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곤 과일을 권했다. 무슨 얘기인지 내심 궁금했지만, 주완도 더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저 포크로 예쁘게 깎인 과일을 찍어 입 속에 밀어 넣을 따름이었다.
여전히 감흥 없이 저작질 하는 주완을 보며, 백도운이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 오늘은 마카오에 가 볼까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완의 고개가 백도운을 향했다. 정말이냐고 묻는 듯, 기대 어린 눈망울에 백도운의 웃음이 짙어졌다.
***
장진우는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되도록 창가 멀리 구석에, 등을 진 채였다. 당분간은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나온 뒤로 줄곧 카지노만 전전하며 지냈다. 그 덕에 시간의 흐름에도 무뎌지고, 현실에서도 완전히 도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뭔가에 골몰하지 않으면 금세 두려움과 막막함이 엄습했다. 그대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런 문제들은 전부 미뤄 두고만 싶었다.
그저 막연하게 어떻게든 될 거라고 낙관했다. 마카오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도시지만, 그것도 대개 주말에 한정됐다. 특급 호텔들이 즐비한 코타이 스트립과 관광지가 몰려 있는 중심지를 벗어나면 그마저 드물었다. 그중에서도 콜로안 섬은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라, 이방인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어쩌다 그곳까지 찾아 들어온 사람들도 금세 흥미를 잃고 사진 몇 장만 건져 나가곤 했다.
그런 곳에 정착해도 나쁘지 않을 터였다. 어느 나라든 외곽 지역은 의료 서비스의 공급이 수요보다 부족하기 마련이니까. 의사가 절실하다면 장진우 자신의 출신지나 배경도 크게 문제 삼지 않을 듯했다.
홍콩의 암흑가에서 주로 활동하는 조직과 손잡는 것도 생각해 봤다. 그럭저럭 괜찮을 성싶었다. 그들 대부분은 아프거나 다쳐도 병원을 찾기 어려운 처지라, 저와 같은 의사를 반길 것 같았다. 더구나 그들 뒤에 숨어 지내면 누구도 장진우 자신을 쉽게 찾지 못할 거였다. 경찰이든, 우형석이든.
문득 창밖을 내다봤다. 개미 떼처럼 몰려든 관광객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향해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이름난 명소는 물론, 상가 건물, 평범한 길, 표지판, 풀 한 포기에까지, 이국적인 풍경들을 사진으로 남긴다. 더러 무엇 하나라도 놓칠 수 없다는 고집마저 엿보였다.
장진우는 사진 찍기에 여념 없는 사람들을 심드렁하게 헤아렸다. 즐거워하는 면면들을 훑는 시선이 자못 냉소적이었다. 하여간 시끄러워서, 소음 공해가 따로 없다. 관광객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건 주말이 코앞이라는 뜻이었다. 슬슬 그곳을 떠야 할 듯했다.
다시 고개를 돌리려다 불현듯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설마 하면서도 그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많은 인파에 떠밀리듯 걸어가던 이가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을 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놀라서 저절로 두 눈이 홉떠졌다. 헤벌어진 입술에선 신음처럼 꿈같은 이름이 새어 나왔다.
“…박주완?”
똑똑히 보고도 당최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의 광경을 부정하려는 듯 고개가 연신 내저어졌다.
하지만 그 뒤로 얼마가 더 지나도,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주완은 시야에 맺혀 사라지지 않았다. 장진우가 기억하던 마지막 모습과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약간 살이 붙어 혈색도 좋아졌고, 앙상한 느낌도 거의 사라진 데다, 표정까지 밝아졌다. 환자복이 아닌 일상복 역시 본래 그의 것인 양 잘 어울렸다. 그래도 유난히 느릿한 걸음걸이나 특유의 무덤덤해 보이는 낯빛은 전과 같았다.
주완과 동행 중인 남자들의 정체는 미지수였다. 주완이 왜 지금, 이곳에 온 건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건, 그 모든 게 김제국과 주완을 거래했던 자와 관련됐으리란 점이었다.
뭘 어쩌려는 생각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주완을 찾긴 했지만, 그를 다시 손에 넣고 난 뒤의 계획은 따로 세우지 않았다. 그런데도 장진우는 앞뒤 잴 것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세나도 광장은 여느 때보다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길을 지날 때마다 으레 행인들과 어깨가 부딪칠 정도였다. 그런데도 주완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로지 그에게만 온 감각을 집중한 채 맹목적으로 쫓았기 때문이다.
주완과 동행한 사내 하나가 삼엄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유달리 큰 덩치나, 무더운 날씨에도 굴하지 않는 검은 정장, 새카만 선글라스 등의 외관이 가드인가 싶었다. 혹은 어느 조직의 일원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아직 그쪽에선 장진우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장진우는 자신이 왜 그렇게 숨어서 주완을 따라가고 있는지, 주완과 만나 뭘 어쩌려는 건지도 모른 채 계속 뒤를 밟았다. 쫓는 입장인데도 쫓기는 것처럼 심장이 정신없이 요동쳤다.
“아, 정말 덥네.”
백도운에게서 짜증 어린 탄식이 터졌다. 살갗에 닿는 공기는 선선했지만, 햇빛은 따가울 만큼 작열했다. 가까운 홍콩과는 날씨가 천양지차였다. 주완도 지쳐서인지, 간밤에 잠을 못 이뤄서인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손등으로 간간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티셔츠를 팔랑거려 작은 바람이나마 일으켜 볼 따름이었다. 백도운이 그에게 휴대용 선풍기를 들려 주었다. 그러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 오겠다며 근처 가게로 들어갔다.
선풍기의 바람마저 미지근했다. 아쉬운 대로 후끈거리는 얼굴을 식히다가 그 더위에도 한사코 정장을 고집하는 전미남에게 불쑥 선풍기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사위를 샅샅이 둘러보며 경계하던 전미남이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려 왔다. 괜찮다고 사양하듯 손까지 들었다. 그럼에도 주완은 꿋꿋이 그에게 바람을 쐬어 주다가 한참 만에야 제 상기된 제 얼굴로 다시 선풍기를 돌렸다.
마카오는 홍콩보다 더 이국적인 분위기였다. 오랜 기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탓에 건물들은 대부분 유럽풍이었고, 바닥마저 보도블록이 아닌 색색의 타일들로 꾸며져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도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풍부한 일조량 덕인지 도시 전체가 한층 더 선명해 보였다. 그림을 보는 것처럼 눈이 즐거웠다.
유명 유적지까지 가는 길은 크고 작은 상점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상인들은 가게 밖까지 나와서 적극적으로 호객에 임했다. 그곳에서 발길이 붙들린 사람들로 인해 통행에 거듭 정체 현상이 빚어졌다.
그런데도 그 속에 섞여 있는 게 마냥 싫지 않았다. 도리어 유명 관광지에 온 게 실감 났다. 덥고, 피곤하고, 과한 햇볕에 살갗이 따갑기까지 했지만, 기분도 자꾸 들떴다. 시름없이 관광을 즐기는 사람들 틈에 주완 자신도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으면서도 못내 좋았다.
“아이스크림이 그새 녹네. 자, 육포도 사 왔어요.”
곧 돌아온 백도운이 아이스크림과 육포를 주완에게 떠안겼다. 그의 말대로 컵 안 아이스크림의 표면이 벌써 흐물흐물해졌다. 조금이라도 더 방치했다간 물이 돼서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별수 없이 나란히 앉아 급한 아이스크림부터 퍼먹었다. 전미남은 같이 먹자는 백도운의 권유를 한사코 거절했다. 습관인지 계속 주변을 향한 경계도 늦추지 않았다.
“재미없는 사람.”
백도운은 쯧쯧 혀를 차며 그의 몫인 아이스크림까지 모두 먹어 치웠다.
육포는 생각보다 촉촉했다. 마치 말린 고기가 아니라, 석쇠에 구운 양념 고기를 먹는 기분이었다. 달짝지근한 양념이 깊이 배 씹으면 씹을수록 감칠맛이 났고, 육질도 질기기보다 쫀득쫀득했다. 숯불에 구워서인지 특유의 향도 그윽하게 풍겼다.
당을 채우고 나니 기운이 났다. 먹은 걸 정리하던 백도운이 살금살금 일어나더니, 전미남의 목덜미에 차갑게 언 생수를 툭 댔다. 그러자 전미남이 화들짝 놀랐다. 찰나나마 혼비백산한 낯빛에 백도운이 대놓고 박장대소했다. 멋쩍어하던 전미남은 그가 실실거리며 건네는 생수를 순순히 받아 잠자코 목을 축였다. 큼직한 목울대가 시원스럽게 너울거렸다. 단숨에 병이 텅 비었다.
“대충 볼 건 다 봤으니까 점심 먹고 호텔로 가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주완과 전미남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도운이 바로 여행책을 꺼내 미리 접어 뒀던 페이지를 펼쳤다. 유명 음식점들을 소개해 놓은 페이지였다.
“음, 꽤 머네. 택시 타고 가야겠다.”
세 사람은 광장 맞은편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는 느릿느릿 세나도 광장을 벗어나 큰 도로로 들어섰다. 그곳까지 나오니 차량이 거의 없었다. 창문을 내리자,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 들어왔다. 덕택에 진득거리던 몸이 금세 상쾌해졌다.
한참을 달려 한적한 마을 입구로 들어선다. 표지판에 간혹 ‘콜로안’, ‘학사 비치’라는 지명이 표시됐다. 머지않아 택시는 어느 현지 레스토랑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점심때가 살짝 지났는데도 차들이 많았다. 언뜻 보니 안쪽 테이블은 물론, 바깥 테이블에도 자리가 없는 듯했다. 이름을 적어 놓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저기예요. 매캐니즈 음식 전문점. 평가가 좋더라고요.”
백도운은 얼른 차에서 내려 카운터로 향했다. 다행히 두 팀만 기다리면 자리가 날 것 같았다. 기다리면서 그 식당이 어떤 음식을 파는 곳인지, 얼마나 유명한지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마카오에서 살던 포르투갈인들이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식재료로 고국의 요리를 해 먹던 데서 유래한 요리들이라고 했다. 그 까닭에 광둥식 요리법과 포르투갈식 요리법이 결합한 듯한 특징을 지녔다나.
식당의 손님들은 관광객보다 현지인 위주인 듯했다. 단골인지, 점원들과 시시덕거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평일일 텐데도 누구 하나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느긋하게 식사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함께 웃는다. 그 여유가 신기하고, 부러웠다.
이윽고 세 사람의 차례가 돌아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인테리어나 소품, 식탁, 의자, 식탁보, 식기 등 무엇 하나 예사로운 게 없었다. 정말 포르투갈에 온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한 직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백도운은 전미남과 주완의 기호를 확인하곤 알아서 음식을 주문했다.
거기까지는 일사천리였으나, 주문 후 한참이 지나도록 음식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직원들이 종종 와서 물과 식전 빵, 올리브를 차례대로 놓아 주고 갈 뿐이었다.
올리브를 입에 넣고 가만가만 굴리면서 조금씩 으깨 먹었다. 향긋하면서 짭조름한 맛에 식욕이 돋았다. 주문한 메뉴는 수많던 올리브가 바닥을 드러냈을 즈음 서빙되기 시작했다. 조개 크림 찜과 두툼한 갈빗살구이, 애저 바비큐, 커리 크랩 등이었다. 입을 다물지 못했던 건 메뉴 하나하나의 사이즈가 족히 2인분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맛있겠다. 자, 얼른 먹어요.”
“…잘 먹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메뉴 하나하나를 음미했다. 처음 먹어 보는 음식들이라 지레 긴장하게 됐는데, 거짓말처럼 입에 잘 맞았다. 분명히 처음 먹어 보는 맛인데,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소스를 덜어 밥에 비벼 먹자, 정말 끝도 없이 들어갔다.
“와, 뭐가 이래? 주완 씨, 어때요? 맛있죠?”
끊임없이 감탄하며 동의를 구하는 백도운에게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곤 마저 식사하려다 문득 전미남을 응시했다. 그는 식당에 들어와서도 내내 주변을 살피며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있었다. 그를 따라 주위를 둘러봤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왜 안 드세요, 하려는데 전미남이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완과 백도운의 눈길이 대번에 그에게 꽂혀 들었다.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의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도 우뚝 선 그를 힐금거렸다. 종원원들도 용건이 있나 싶은지 눈을 맞추며 다가올 듯 말 듯 했다.
“미남 씨, 왜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음?”
전미남은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백도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배 아픈가, 했다. 그러다 금방 관심을 거두고 다시 식사에나 집중했다. 주완은 말없이 전미남의 뒤꽁무니를 쫓다가 의아하게 벽면의 화장실 안내판을 봤다. 화장실은 그가 나간 출입구의 반대편에 있었다.
적어도 급한 볼일 때문에 그렇게 나간 건 아닌 모양이었다.
“뭐 해요, 주완 씨. 음식 다 식겠네. 맛있을 때 많이 먹어요.”
“…아, 네.”
알겠다고 하면서도 주완은 계속 출입구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시종 주위를 경계하던 전미남이 퍽 신경 쓰인 탓이었다.
권수혁이 일어난 건 한낮이나 돼서였다. 동이 틀 때까지 잠들지 못하다가 술을 마시고 겨우 눈을 붙였다. 그리고 여전한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신음하며 눈을 떴을 땐 전신은 물론, 시트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막혔던 숨이 터져 나오며 짙은 현기증이 몰려왔다. 꽤 오래 잤는데도 머리는 개운하지 않고 지끈거리기만 했다.
짜증스레 상체를 확 일으키고 앉았다.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흐드득 무릎으로 떨어졌다. 급격한 기상에 뇌압이 곤두박질치는 듯했다. 어지럼증이 짙어지며 눈앞이 빙글 돌았다. 아무리 관자놀이를 지압해도 두통은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기어이 신경질적으로 탁상 위 전화기를 내리쳤다. 거칠게 뽑혀 나온 전화기가 바닥을 나동그라졌다.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심상찮은 기척에 응접실에서 대기하던 수하들이 달려 들어왔다. 권수혁은 상체를 숙인 채 거푸 거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권수혁이 그렇게 저기압일 땐 섣불리 나서 봤자 좋은 꼴을 못 본다. 수하들이 한참 머뭇거리며 서로 눈치만 살핀 이유였다.
권수혁이 이불을 홱 걷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수하 중 하나가 얼른 다가와 그의 어깨에 가운을 걸쳐 주었다. 행여 제 손길이 스쳐 불쾌함을 가중시킬까, 한없이 조심스럽고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권수혁은 숨죽인 수하들 곁을 유유히 지나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남겨진 수하들이 일사불란하게 침실을 정리했다. 바닥에 떨어진 전화기도 아예 정리해서 한쪽으로 안 보이게 치워 뒀다.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머리 위에서 차디찬 물줄기가 쏟아져 가운까지 흠뻑 적셨다. 피부가 급격히 얼어붙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얽히고설켰던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며칠 전까지는 비교적 괜찮았다. 악몽을 꾸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았지만, 일어났을 때 지금처럼 기분이 더럽진 않았다. 잠자리가 바뀐 탓일까? 아니, 그렇다기엔 홍콩에서 보낸 하룻밤은 괜찮았다. 늘 지척에서 체온을 나눴던 재규어가 없었던 건 그때도 마찬가지고.
두 손으로 물에 젖은 얼굴을 쓸어 올리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날카로운 두 눈이 애꿎은 벽을 노려보며 어떤 가설을 맹렬히 추적했다. 홍콩과 마카오, 두 곳의 잠자리에서 달라진 점이라곤 딱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것’ 때문이라고? 아니, 설마 그러려고. 믿기지 않았다. 믿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을 거듭하느라 느릿느릿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문 앞에서 대기하던 수하가 얼른 갈아입을 옷을 건네주었다. 그 참에 권수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흠칫했다.
권수혁은 그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묵묵히 옷을 걸치며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자꾸 뭔가를 부정하려는 듯 고개를 젓다가 한 번씩 픽 웃기도 했다. 그러곤 또다시 깊은 상념에 잠겼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재차 고개를 저었다. 응접실로 나갈 즈음엔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일념에 미간마저 잔뜩 찌푸려졌다.
“식사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럼 커피라도….”
권수혁은 성가신 것처럼 고개를 젓더니, 직접 미니바로 가서 생수 하나를 꺼내 마셨다. 목울대를 일렁이며 금세 병 하나를 비운다. 그 덕에 의식은 전보다 더 또렷해졌지만, 머릿속에 움텄던 의문까지 덩달아 짙어졌다.
아니, 그래도. 도대체, 그럴 리가.
확신과 부정이 뇌리에서 몇 번이고 엎치락뒤치락했다. 냉수로 샤워한 게 무색하게 다시 속이 시끄러워지는 듯했다.
“대표님. 어제 입으셨던 옷을 세탁하려고 하는데, 주머니에 이런 게….”
다시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애써 부정하는데, 한 수하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눈만 굴려 그가 내미는 물건을 힐긋 봤다. 메모리 카드였다.
그러고 보니 홍콩을 떠나기 전, 전미남에게서 전해 받았던 거였다. 그 뒤로 쭉 일을 보느라,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미처 확인해 보지 못했다. 다만 주완이 입원했던 병실에 몰카가 설치돼 있었고, 그 안에서 찾아온 거라는 귀띔을 받았다.
권수혁의 수하는 묵묵부답인 그에게 어떻게 할까요, 했다. 오래지 않아 권수혁이 소파 테이블 위에 놓인 노트북을 턱짓했다.
“확인하게 켜 봐.”
장진우는 주완 일행이 들어간 레스토랑 앞을 서성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지켜봐도 되겠지만, 슬슬 점심때가 지나가고 있어서 미행을 들킬 염려가 컸다. 오히려 주차된 차 사이에 몸을 감추고 멀리서나마 지켜보는 게 안전할 듯했다.
주완 일행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고 한참이 지났다.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은 걸까. 그 주변에 마땅한 카페나 음식점이 없어, 그들이 다시 나올 때까지 내처 기다릴 수밖에 없을 듯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택시를 그냥 보내지 말 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그보다 주완이 맞긴 한 걸까. 외관으로 보나 행동거지로 보나 그가 틀림없는데, 못 본 사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주완이 사라지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토록 멀쩡해질 수 있는 건지.
주완과 함께 다니는 사내들은 위험해 보이긴 했지만, 실제로 주완을 대하는 태도는 그렇게 강압적이지 않았다. 그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주완의 낯빛도 여느 때보다 밝아졌다. 당최 무슨 관계인 건지, 왜 그들이 마카오를 관광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가게 쪽을 주시하다가 심장이 내려앉았다. 주완이 불쑥 출입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밖을 내다본 까닭이었다. 들킨 걸까.
장진우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확 숙였다. 가슴이 격렬히 쿵쾅거렸다.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목덜미가 식은땀에 축축해졌다.
어떻게 한담. 눈알을 굴리며 치열하게 대처 방안을 고민할 때였다.
의미 없이 바닥을 봤다가 멈칫했다. 제 그림자가 거대한 그림자에 먹혀 버린 탓이었다. 고개가 녹슨 기계처럼 느리게 돌아갔다. 숨조차 허투루 쉴 수 없었다. 입을 벌렸다간 기어이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머지않아 시야가 등 뒤쪽에 고정됐다. 두 눈이 저절로 크게 벌어졌다.
“우리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장진우의 퇴로를 차단한 채 그리 묻는 건 주완과 함께 다니던 덩치 큰 남자, 전미남이었다.
메모리 카드가 인식되면서 폴더 하나가 나타났다. 그 안에는 여러 동영상 파일이 저장돼 있었다. 파일명은 해당 영상이 찍힌 날짜인 듯했다. 비교적 최근이었다.
“재생할까요?”
노트북을 켠 수하가 권수혁을 돌아봤다. 권수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쪽에 나란히 선 다른 수하들을 응시했다. 전미남을 포함해, 늘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수발하는 최측근들이었다. 권수혁을 배신한 이들의 말로가 어땠는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특별히 비밀에 부칠 일 같은 건 없었다. 메모리 카드 속에 찍힌 게 무엇이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권수혁은 손을 들어 일단 멈추라고 지시했다. 그 메모리 카드는 주완의 병실에 설치된 몰카에서 얻은 물건이었다. 그건 곧 주완의 사생활이 거기에 고스란히 녹화돼 있으리란 것을 뜻했다.
물론 그 안에 어떤 모습이 담겼건, 그로 인해 주완이 어떤 수치를 느끼건 알 바 아니었다. 분명히 그럴 텐데, 이유를 알 수 없게 꺼림칙했다.
결국 권수혁은 수하들에게 문가를 턱짓했다. 뜻밖의 지시에 수하들이 영문 모르는 표정으로 서로 긴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 사내의 지휘 아래 조용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나직이 닫혔다. 권수혁은 손수 영상을 재생하고, 소파 깊숙이 등을 파묻었다. 긴 다리를 꼬고 앉아서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까만 화면을 지그시 노려봤다.
노트북의 기계음이 커지면서 영상이 시작됐다. 환자복을 입은 주완이 오도카니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하얀 벽에 등을 기댄 채였다. 몇 분이 흐르도록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그래서 영상이 멈춘 건가 싶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러닝 타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주완이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아무것도 없는 맞은편 벽 앞으로 가더니, 오른손을 제 얼굴 쪽으로 가져갔다. 이어 그 손으로 벽에 뭔가를 죽죽 써 나갔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린 게 없는데, 벽 위에 ‘박주완’이라는 이름이 적혔다.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 것 같았다.
머지않아 어두침침하던 병실이 조금 훤해졌다. 누군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주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제 이름을 쓰는 것에만 열중했다.
그러자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와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의사인가, 짐작해 볼 즈음이었다. 남자가 거칠게 주완을 일으켰다. 기운이 없는 건지, 주완은 그의 손길에 맥없이 나부꼈다. 두 사람 사이에 몇 마디 말이 오가더니, 곧 주완이 침대 위로 내쳐졌다.
남자는 바로 주완을 짓누르며 그의 바지를 벗겼다. 고무줄 바지와 속옷이 단숨에 발목까지 끌려 내려갔다. 고개는 완전히 베개에 파묻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듯했다. 그대로 두었다간 질식사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불을 꽉 말아 쥔 주완의 두 손이 하얗게 질려 부들부들 떨렸다. 괴로워 보였다.
남자는 개의치 않고 제 욕망을 채우기에만 급급했다.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남자가 짐승처럼 포효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반항도 거의 하지 못하고 그저 그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때려 가며 마음껏 음욕을 푼다. 처음부터 끝까지 콘돔이나 젤 따위가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그 탓에 정액들은 남김없이 주완의 몸속에 뿜어졌다. 여린 살이 찢긴 건지, 접합 부위에서 은근한 피마저 비쳤다.
일방적인 폭식을 마친 남자가 흐트러진 옷을 추슬렀다. 주완의 바지도 대충 끌어 올려 주곤 잘했다는 듯 그의 머리를 토닥거렸다. 그러도록 주완은 버려진 마네킹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몹쓸 짓을 당하는 데 인이 박인 것 같았다. 비단 한두 번에 걸쳐 그런 짓을 벌인 건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다.
남자가 좁은 병실을 빠져나갈 때까지 주완은 꼼짝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나서야 꾸무럭거렸을 따름이었다. 그마저도 겨우 벽 쪽을 향해 돌아누운 것뿐이었다.
흘러내린 이불을 끌어당기는 주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 미약하고도 맥없는 움직임이 아프도록 눈에 박혔다. 그런 꼴로 잠들어선 새벽이면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났을 거였다. 그러곤 사방이 흰 벽으로 둘러싸인, 악몽보다 더한 현실을 마주한 채 지독한 절망에 몸을 떨었을 터였다. 그렇게 1년, 3년, 5년, 어쩌면 10년 내내.
아무것도 없는 하얀 벽을 보고 누워서 몸을 잔뜩 구긴 주완의 모습이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단지 그것만 봐도 그가 눈을 뜨자마자 권수혁 자신을 보고 안심했다는 이유를,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외출할 때나 잠잘 때마다 고집스럽게 인사를 건넸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누구도 자신을 인격체로 대우해 주지 않는 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살아 있음을 부정당하는 기분은 아니었을까.
화면 속 주완은 이미 죽은 사람처럼 미동이라곤 없이,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막막히 기다리는 듯했다. 고요히 그 모습을 들여다보던 권수혁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바로 메모리 카드를 빼내 버렸다. 모니터 가득 비치던 영상이 그대로 멈추더니, 곧 에러 메시지가 떴다. 권수혁은 제법 뜨거워진 메모리 카드를 꽉 말아 쥐었다. 날 선 눈길만은 애꿎은 노트북 화면에 고정한 채였다.
특별히 어떤 생각을 품었던 건 아니었다.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불쾌했다. 전에 없이 짜증이 났다. 속에서 돌연 화염이 일어, 새카맣게 피어오른 연기가 핏줄을 타고 퍼져서 머릿속까지 가득 채워 버린 느낌이었다. 도통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권수혁의 손아귀에서 작은 메모리 카드가 형체 없이 부수어졌다. 얼마나 힘이 들어갔는지, 주먹 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다시 손을 폈을 때, 메모리 카드는 거의 가루가 돼 있었다. 그것을 스스럼없이 물이 담긴 유리컵에 들이부었다. 그러곤 부유물이 둥둥 떠다니는 유리컵을 들어 노트북 위에서 천천히 뒤집었다. 그대로 쏟아져 내린 물이 자판 사이사이와 통풍구 사이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메인보드가 나갔는지, 모니터가 까맣게 암전됐다. 그곳에 얼음장처럼 서늘해진 권수혁의 낯이 걸렸다. 그는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가로 걸어갔다. 벌컥 문을 열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수하들이 일제히 꾸벅했다.
“지금 당장 중앙 정신 병원 의료진 자료, 모두 찾아서 보내라고 해.”
“네?”
느닷없는 지시에 수하들이 하나같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딱딱히 굳은 권수혁의 얼굴을 마주하곤 다시 푹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권수혁의 낯빛은 평소와 같으면서도 달랐다. 보통 때도 감정이랄 게 엿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의 그는 모든 걸 초월한 것 같았다. 격분하다 못해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라고 할까. 이럴 땐 결코 그를 거슬러선 안 됐다.
“이름, 나이, 출신지, 배경, 거주지, 그리고 현재 위치까지 전부.”
흡사 이를 가는 것처럼 덧붙인다. 아닌 게 아니라, 한껏 억눌린 숨결이 언제라도 폭발할 것처럼 거칠고 불안정했다. 기어이 무슨 사달이 날 것 같았다.
장진우는 전미남을 마주한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언제부터 미행을 들킨 건지, 눈앞의 사내는 누군지, 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머리는 쉼 없이 비상하게 돌아갔지만, 마땅히 대꾸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의외로 전미남은 덩치나 험악한 인상에 비해 단정한 말투를 구사했다. 목소리도 굵긴 했지만, 차분한 편이었다. 그런데 선입견 탓인지, 혹은 그가 뿜어내는 특유의 분위기 탓인지 전혀 신사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 얽혔다간 험한 일을 당하게 될 거라고, 본능이 계속 경고음을 울렸다. 얕게 생각해 봐도 그들 일행을 쫓아왔다는 걸 굳이 들켜 좋을 게 없을 듯했다.
그런 생각마저 읽힌 걸까. 전미남은 한마디 덧붙이며 묵묵부답인 장진우를 압박했다.
“광장에서부터 따라온 걸 알고 있습니다.”
“글쎄요. 전 선생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장진우는 부러 생글 웃어 보였다. 다행히 목소리도 경직되지 않고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남에게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철저히 꾸며진 낯을 내보이는 덴 이미 도가 텄다.
전미남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니, 눈매가 비치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선글라스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는 게 맞다. 기왕 거짓으로 둘러댄 김에 확실하게 그의 의심을 떨쳐 보기로 했다.
“상황이 이래서 좀 그렇긴 합니다만, 이런 데서 한국 분을 만나니까 반갑네요. 웬만한 관광객분들은 잘 모르는 곳이라고 들었거든요. 주로 현지인들이 찾는 식당이라, 여행책에도 잘 안 실린다나요? 저도 얼마 전까지 마카오를 순 도박의 도시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이 안쪽까지 들어와 볼 일이 있어야죠. 그런데 이렇게 한적하고 여유로운 마을이 있을 줄이야… 그동안 마카오에 오면 카지노에서 시간만 때우다 가기 일쑤였는데, 영 헛짓한 것 같네요. 아, 오늘은 카지노에서 돈만 날리고 있기 따분해서 기분 전환 삼아 광장에 갔었는데. 선생님도 거기 계셨나 보네요? 혼자 다니면서 한국 분들 정말 많이 뵀거든요. 어떤 분은 사진 촬영을 부탁하셔서 흔쾌히 찍어 드렸는데, 이 식당을 소개해 주시더라고요. 택시 기사님도 잘 알고 계셔서, 믿고 먹을 만하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교롭게 선생님하고 동선이 겹친 것 같네요. 실례지만, 선생님은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
“아, 제가 초면에 너무 앞서갔군요. 전 이런 사람입니다.”
장진우는 서둘러 지갑을 꺼냈다. 그러곤 그 안에서 명함 한 장을 집어 전미남에게 건넸다. 장진우 본인의 것은 아니었다. 어젯밤 카지노에서 바카라를 함께했던 한국인 사업가에게서 받은 명함이었다. 버리지 않아 천만다행이었다.
전미남은 내민 명함을 빤히 보기만 할 뿐, 얼른 받아들지 않았다. 선글라스 때문에 눈동자의 움직임을 파악할 순 없었지만, 거기 적힌 상호라든가 이름 따위를 다 훑었을 터였다. 행여 그가 명함에 명시된 연락처로 확인 전화를 걸진 않을까 내심 조마조마했다. 그럴 경우 둘러댈 만한 변명을 급조하며 초조하게 전미남의 반응을 살폈다.
하늘이 도운 걸까. 때마침 전미남의 핸드폰이 울렸다. 장진우는 멈칫하는 그에게 자신은 개의치 말고 어서 받아 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전미남은 얼마쯤 더 버티다가 마지못해 돌아서며 전화를 받았다. 업무와 관련된 통화인지 네, 하는 어조가 유독 깍듯했다.
전미남이 불시에 돌아볼까, 핸드폰을 들고 주변 사진을 찍는 척했다. 다행히 전미남은 바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깊은 날숨이 터져 나왔다. 저도 모르는 새 맺혔던 식은땀까지 주르륵 흘렀다.
다른 곳으로 몸을 숨긴 채 주완 일행의 동태를 감시했다. 전미남이 식당으로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이 밖으로 나왔다. 급히 돌아갈 모양이었다.
바로 따라나서면 또 전미남에게 발각될 우려가 커서 진득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주완의 눈에 띌지도 몰라 선글라스까지 꺼내 꼈다.
곧 택시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주완 일행은 해당 차량에 올라 바삐 식당을 떠났다. 택시의 뒤꽁무니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무렵에야 몸을 움직였다. 타이밍 좋게 식사를 마치고 나와 막 영업을 재개하려던 택시를 발견했다. 얼른 그 차에 올라탔다. 택시 기사는 뜻밖의 요행을 반가워하며 어디로 가면 되는지 물었다. 장진우는 섣불리 목적지를 밝히지 않고 잠시 고민에 잠겼다.
다시 주완을 쫓는 건 너무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었다. 이미 전미남에게 의심을 받고 있고, 얼굴까지 보였다. 우연히라도 다시 그와 마주친다면 그땐 지금처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주완을 되찾으려는 일념은 장진우 자신조차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맹목적이었다. 따지고 보면 제 불행은 주완이 사라진 직후부터 시작됐다. 수십 년간 인내하며 쌓았던 탑은 허망하게 무너졌고, 모든 게 엉망이 됐다. 장진우 자신은 부모에게조차 형편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혔고, 부모는 불타 죽었으며, 다시 돌아갈 집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주완을 돌려받아야 했다. 원래 장진우, 제 것이었으니까. 모두가 버린 걸 제가 발견해 고이 주워 뒀다. 그걸 김제국이 멋대로 빼돌려 감춰 버렸다.
주완을 다시 손에 넣는 듯 모든 걸 원래대로 돌이킬 순 없을 터였다. 그래도 장진우, 제 삶은 거기서부터 차츰 본래의 궤도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일단 주완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오기만 한다면.
다시금 어디로 가면 되느냐고 묻는 기사에게 주완 일행의 택시가 사라진 방향을 가리켜 보였다. 해당 차량의 번호를 일러 주며 무사히 따라붙는다면 요금은 얼마든 지불하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택시 기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가속 페달을 질끈 밟았다.
“왜 갑자기 그런 거예요? 모처럼 맛있었는데, 다 먹지도 못했네.”
택시 안에서 기어이 백도운의 불평이 터졌다. 잠깐 자리를 비웠던 전미남은 식당으로 돌아오자마자 당장 일어나자고 일행을 재촉했다. 웬 전화 한 통을 받은 직후였다. 전미남은 그게 누구와의 통화였는지, 왜 그렇게 서두르는지 일절 설명해 주지 않았다.
“급히 처리할 일이 생겼습니다. 못다 한 식사는 호텔에서 마저 하시죠.”
무슨 일이냐 물어도 번번이 그렇게 대꾸하는 게 전부였다. 보나 마나 권수혁의 호출이 있었을 거였다. 그렇게 부를 거면 옆에 붙여 놓지를 말든가. 백도운은 자리에 없는 권수혁을 향해 연신 툴툴거렸다.
“박주완 씨도 많이 피곤해 보이니까요.”
끝없는 볼멘소리에 덧붙여 변명한다. 그제야 백도운의 시선이 차창에서 옆에 앉은 주완에게 옮겨졌다.
전미남의 말대로 주완은 꽤 지쳐 보였다. 간밤에 잠을 설친 까닭일까. 10년 만에 세상에 나온 그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도, 경험하게 해 주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 욕심에 무리하게 데리고 다닌 게 화근이 된 건지 몰랐다.
“주완 씨, 많이 안 좋아요?”
주완은 금세 걱정하는 백도운에게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거짓말이 아니라, 지난밤 숙면하지 못했던 건 백도운이 짐작하는 바와는 다른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권수혁을 만나면 명확한 원인을 알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막연히 기대하고 있었다.
택시는 곧 특급 호텔들이 즐비한 코타이 스트립으로 진입했다. 아직 해가 중천이라, 라스베이거스만큼이나 눈부시다는 야경은 구경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호텔들의 화려한 외관과 규모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어둠이 내리고 조명이 켜지면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만 해도 지레 들뜨는 기분이었다.
항구에서, 또 공항에서 쉬지 않고 들어오는 셔틀버스가 수많은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덕분에 로비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호텔 직원들은 그 같은 상황이 익숙한지, 당황한 기색 없이 고객들을 맞이했다. 팀마다 전담자들이 붙어 짐도 옮겨 주고, 리셉션 데스크까지 친히 안내해 주었다.
주완 일행도 그 무리에 섞여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수백, 수천 개의 크리스털로 이뤄진 분수가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 앞에 서서 사진이나 영상 따위를 찍고 있었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따라 조명이 달라지면서 시원스레 물줄기가 쏟아졌다. 백도운은 넋 놓고 보는 주완에게 그 분수가 해당 호텔의 상징이며, 30분 간격으로 쇼를 진행하는데 오로지 그걸 보기 위해서 찾아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귀띔해 주었다.
쇼가 끝날 때까지 보고 있다가, 전미남을 따라 이동했다. 다이아몬드 분수를 기준으로 오른쪽은 카지노가, 왼쪽으로는 리셉션 데스크와 객실 전용 엘리베이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카지노는 주로 밤에 이용한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이른 시간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그저 한 자리에 서서 호텔 내부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멍해졌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문득 정신을 차린 건 전미남이 한 사내를 향해 손을 들어 보였을 즈음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 하나가 성큼성큼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세 사람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주완은 저도 모르게 덩달아 꾸벅했다.
“일단 두 분은 객실에 계십시오.”
사내와 짧은 대화를 나눈 전미남이 두 사람에게 당부했다. 사내에게도 두 사람을 객실까지 잘 데려다주라고 지시했다.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이었다. 주완은 알았다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백도운은 여기까지 와서도 방에 박혀 있어야 하는 거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전미남은 별다른 대꾸 없이 묵례하더니, 곧장 로비를 가로질러 어딘가로 사라져 버릴 따름이었다.
“아니, 무슨 호텔 투어 하러 왔냐고.”
백도운은 끝까지 구시렁거리다 마지못해 사내를 따라갔다. 사내는 두 사람을 안쪽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 일반 객실용과 별도로 운영하는, 스위트 객실 전용인 듯했다. 덕분에 소음 공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세 사람은 곧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리더기에 카드 키를 대자, 알아서 층수에 불이 들어왔다. 내내 뚱해 있던 백도운은 층마다 적힌 편의 시설을 확인하더니 수영장 있네, 했다.
“여기 수영장 시설이 꽤 괜찮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밤에 주완 씨 상태 괜찮으면 같이 수영이나 해요. 내일 해도 상관없고.”
“네.”
수영은커녕 물에 뜨는 법조차 몰랐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나마 백도운의 기분이 풀리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사내는 앞장서서 복도를 죽 걸어가다가 한 객실 앞에 멈춰 섰다. 이번에도 문들이 띄엄띄엄한 게, 객실이 꽤 넓을 듯했다.
“여깁니다.”
사내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 한쪽으로 물러섰다. 가장 먼저 파노라마 형태의 큰 창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 맞은편의 금색 외관과 새파란 하늘이 강렬한 대비를 이뤘다. 그 앞쪽의 응접실에는 긴 소파와 원형의 데이 베드, 소파 테이블 등이 놓여 있었다. 침실에는 커다란 킹사이즈 침대와 고풍스러운 책상이 자리했다.
백도운은 주름 하나 없는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주완 씨도 누워요, 하면서 제 옆자리를 토닥거리기도 했다. 주완은 잠자코 그에게 가서 침대 가장자리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거짓말처럼 권수혁의 향취가 언뜻 풍기는 듯했다. 백도운이 구시렁거리지 않는 걸 보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 전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필요하면 부르십시오.”
사내는 깍듯하게 인사하더니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백도운은 얼결에 또 일어나서 꾸벅하는 주완의 팔을 잡아당겼다.
“에이, 주완 씨. 그러고 있지 말고 누우라니까.”
“아, 저 잠깐. 손 좀 씻고요.”
어렵사리 백도운의 손길을 물리치고 욕실로 들어갔다. 먹을 땐 몰랐는데, 손에 알게 모르게 음식 냄새가 밴 듯했다. 반투명한 문을 열자, 물기라곤 없이 말끔히 정돈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이어 편안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틀림없이 권수혁의 향기였다. 향 자체는 부드럽고 달콤한 계열이 아니었지만, 이제 그 특유의 서늘함에 완전히 익숙해진 듯했다. 덕택에 낯선 분위기에 평소보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금세 누그러졌다. 그리웠던 대상을 만난 것처럼 가슴까지 덩달아 뭉클해졌다.
권수혁은 바에 홀로 앉아 있었다. 태국 거래처에 물건을 무사히 회수했음을 알리자 그쪽에서 바로 담당자를 보내겠다고 연락해 왔다. 그렇게 소개받은 담당자에게서 30여 분쯤 늦을 거란 연락을 받았다. 상호 신뢰가 기반인 거래에서 시간 약속만큼 중요한 게 없었다. 그 때문에 평소였다면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자리를 떴을 터였다.
하지만 권수혁은 오늘따라 묵묵히 잔만 기울였다. 시종 어떤 상념에 젖은 채였다. 주완의 영상을 본 이래, 찝찝함과 불쾌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휘둘릴 건 아니었다. 이 바닥에서 지내다 보면 그보다 훨씬 비인간적인 일도 부지기수로 벌어지곤 하니까. 권수혁 자신조차도 온갖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대체 왜.
얼마 전 김제국을 처리할 때만 해도 지금처럼 화가 나진 않았다. 그저 그가 성가셨을 뿐이었다. 전미남을 통해 주완을 정신 병원에 입원시킨 게 그의 친모란 것과 그 전부터 주완의 삶이 결코 평탄지 않았다는 걸 들었을 때도 지금처럼 부아가 치밀진 않았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권수혁 자신도 저가 뭘 원하는지, 어떻게 하면 작금의 분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을지 몰랐다.
잔을 쥔 손에 부쩍 힘이 들어갔다. 그로 인해 잔 표면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결국 잔이 산산이 조각 나서 손을 다치게 될 터였다.
때맞춰 한 수하가 권수혁에게 다가와 꾸벅했다. 애꿎은 잔만 노려보던 권수혁이 눈동자를 굴려 그를 일별했다.
“뭐야.”
“대표님께서 말씀하셨던 자료가 도착했습니다. 중앙 정신 병원 소속 인력들의 신상 정봅니다.”
수하에게서 태블릿을 낚아챘다. 그러곤 막 전송된 자료들을 눈으로 죽 훑어 내렸다. 첨부된 사진들도 꼼꼼히 살폈다.
해당 문서에는 이사장부터 경비까지, 병원 내 모든 인력의 프로필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최근 화재 사고로 사망했다는 장철민의 근황을 확인한 뒤 스크롤을 내렸다. 뒤이어 나타난, 김제국을 포함한 정신과 전문의들의 생김새는 영상 속 인물과 달랐다. 흰 가운이 의사인 것 같았는데, 억측이었을까.
마저 스크롤을 내리다가 멈칫했다. 곧 나타난 사진 한 장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틀림없었다. 영상 속에서 주완을 겁탈했던 그 남자였다.
온기 없는 눈동자가 옆으로 굴렀다. 장진우. 해당 페이지에는 그가 병원 이사장인 장철민의 외동아들이라는 점과 그의 학력, 전공, 그가 연관됐던 의료 사고까지 꼼꼼히 기술됐다. 권수혁은 그 모든 정보를 건너뛰고 가장 마지막 칸에 주목했다.
장진우의 마지막 행적이 확인된 건 공항이었다. 제 부모가 사고를 당했던 날, 그는 쫓기듯 출국해 마카오로 향했다.
MACAO. 몇 번을 봐도 변함이 없었다. 장진우가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게 아니라면, 이번만큼은 하늘이 권수혁 자신의 수고를 덜어 준 셈이었다.
권수혁은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지금 당장 수하들을 풀어 마카오의 모든 호텔을 샅샅이 뒤지면 장진우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바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던 건, 속에서 펄펄 끓는 분노가 여전히 저 자신도 불가해했기 때문이다.
권수혁 자신에게 악의적으로 훼방을 놓거나, 자신을 배신하지만 않으면 되도록 살생하지 않는다. 그런다고 지옥에 떨어질 운명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스스로 정한 최소한의 철칙이었다. 제 분노와 복수가 정당화되려면 적어도 제 손에 아무 죄 없이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은 없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왠지, 이번만큼은 그 철칙을 어기게 될 것 같았다.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장진우를 향해 끝없는 살의가 치솟았다.
그때였다. 으레 홍콩에 머물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전미남이 바 안으로 들어섰다. 그에게 오라는 지시를 내린 적은 없으니, 다른 수하들이 긴히 연락한 모양이었다.
문제는 전미남이 동행 없이 혼자였다는 점이었다.
“대표님.”
전미남이 가까이 다가와 꾸벅했다. 권수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혼자야?”
“박주완 씨와 백 선생님은 우선 객실로 모셨습니다. 전 따로 보고드릴 게 있어서.”
“뭔데?”
“세나도 광장에서부터 저희 뒤를 밟는 자가 있었습니다. 직접 가서 확인했을 땐 수상한 점이 없었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미행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수상한 점이 없다? 확실해?”
전미남은 장진우가 보여 줬던 명함상의 이름과 소속 따위를 전하려 했다.
그런데 그 찰나, 태블릿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뜬 사진에 시선이 붙박인다. 일란성 쌍둥이가 아니라면 일행을 쫓아왔던 그 남자임이 분명했다. 권수혁이 왜 그의 사진과 정보를 확인하고 있었던 건지, 주완의 영상을 보지 않은 전미남으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불안한 예감이 가슴 언저리를 서늘하게 꿰뚫고 지나갔다. 권수혁은 한참 대답이 없는 전미남을 의아하게 주시했다.
“바로 이자였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권수혁의 눈길이 즉시 태블릿으로 날아가 꽂혔다. 여전히 그 화면에는 장진우의 정보가 표시되고 있었다.
장진우는 오랜 기간 주완을 범하며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에만 급급했던 짐승이었다. 그랬던 그가 모처럼 바깥세상으로 나온 주완을 발견했고, 몰래 미행했다. 단순히 만나서 잘 지내는지 안부나 물으려던 건 아니었을 터였다.
일련의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애꿎은 태블릿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권수혁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남과 수하들을 양옆으로 밀치며 황급히 바를 빠져나갔다.
경황없는 권수혁의 모습에 당황한 것도 잠시, 전미남도 다급히 그를 따랐다. 심장이 격하게 요동친 건 비단 그가 뛰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완은 두 손을 깨끗이 씻고, 내친김에 양치까지 했다. 다소 텁텁하던 입 안이 금세 상쾌해졌다. 그새 탄 건지, 얼굴이 곳곳이 화끈거리고 따끔따끔했다. 피부를 식힐 겸 찬물을 끼얹어 가며 세수했다. 금세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렇게 조금조금 씻을 바에는 차라리 샤워하는 게 더 간편하겠지만,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는 건 백도운에게 실례일 것 같았다.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밖으로 나갔다. 곧장 백도운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주완을 보며 씩 웃는 게, 뭔가 재밌는 일이라도 생각난 듯했다.
“주완 씨, 카지노 구경하러 안 갈래요?”
“음… 글쎄요.”
“왜요? 안 궁금해요? 어른이니까 누릴 수 있는 건 누려야죠.”
“전 조금 쉬고 싶어서요.”
“진짜? 그럼 어쩔 수 없죠.”
백도운은 얼른 이불 한쪽을 들쳤다. 그러곤 거기 와서 누우라는 듯 재차 침구를 토닥거렸다. 꼭 어린아이나 짐승을 다루는 것 같다고 할까. 어째 그럴 때마다 스스럼없이 따르게 됐다. 이번에도 주완은 얌전히 백도운이 만들어 준 자리에 누웠다. 그러곤 제 베개와 이불 정돈에 여념 없는 그에게 카지노, 하고 운을 뗐다.
“선생님이라도 다녀오세요. 심심하시잖아요.”
“흠. 그럴까? 피곤하다는 사람 억지로 끌고 다닐 수도 없고, 여기까지 와서 그냥 있으려니 아쉽긴 한데… 그럼 살짝만 둘러보고 올 테니까 한숨 자고 있을래요? 곧 미남 씨랑 수혁이도 오긴 할 거예요.”
“네.”
“혹시 모르니까 문은 꼭 잠그고 있어요. 수혁이나 미남 씨 아니면 절대 문 열어 주지 말고. 호텔 직원이라고 해도 안 돼요.”
“설마 무슨 일이 있으려고요.”
“권수혁, 그게 적이 많은 인간이라 안심할 수 있어야죠.”
“알겠어요.”
백도운은 누차 확답을 받고야 몸을 일으켰다. 바로 객실을 나서려던 그가 고개를 빠끔 들고 자신을 보는 주완에게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주완도 그를 안심시키려 머리를 끄덕끄덕했다. 옅게 웃은 백도운이 벽 너머로 사라지고, 곧 문이 열리고 닫히는 기척이 들렸다. 사위는 금세 고요해졌다.
안락한 침구가 기분 좋게 몸을 휘감아 왔다. 그대로라면 제대로 푹 잘 수 있을 듯했다. 옆으로 빙글 돌아누워서 폭신한 베개에 고개를 가만가만 비비적거렸다. 포근한 감촉에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잠기운도 솔솔 몰려들었다.
다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 올리며 몸을 웅크리려던 찰나, 발끝에 뭔가가 툭 걸렸다. 가뭇해지려던 의식이 돌연 또렷해졌다. 이불을 들고 발에 차이는 물건을 확인했다. 웬 지갑이 그곳에 떨어져 있었다. 생김새가 눈에 익었다. 곧 식당에서 백도운이 그 지갑을 꺼내 음식값을 치렀던 게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가 침대에 누웠을 때 옷에서 떨어진 모양이었다.
“…어쩌지.”
곤란한 표정으로 지갑을 빤히 봤다. 백도운은 카지노를 둘러보고 오겠다고 했다. 카지노에선 돈이 필수일 테니, 결국 그도 다시 지갑을 가지러 와야 할 거였다.
그럴 바에야 주완 자신이 직접 가져다주는 게 덜 수고로울 듯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마자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가니 복도에 서 있던 사내가 뒤를 돌아봤다. 조금 전 주완과 백도운을 객실까지 안내해 줬던 그 사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생님이 방에 지갑을 두고 가셨는데… 제가 가져다드려도 될까요?”
허락을 구하는, 한없이 조심스러운 말투에 사내의 낯빛이 아리송해졌다. 꼭 어딘가에 감금된 사람이 잠시간의 외출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미남에게선 두 사람을 방까지 안내하고 보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어디로도 나가지 못하게 감시하라는 뉘앙스는 아니었으므로, 사내는 흔쾌히 주완의 청을 승낙했다.
“그러시죠. 같이 가 드릴까요?”
“아뇨. 저 혼자 얼른 다녀올게요.”
주완은 꾸벅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대신하곤 서둘러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려갔다. 사내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던 건 그가 복도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을 즈음이었다.
사내는 두 번째 진동음이 끝나기 전에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발신자는 전미남이었다. 네, 하고 대꾸하기 무섭게 전미남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사내의 낯이 희게 질렸다. 갑자기 백도운과 주완이 객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잘 감시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탓이었다.
사내는 철렁한 표정으로 텅 빈 복도를 내다봤다. 그러다 이를 질끈 물며 주완을 쫓아 긴 복도를 내달렸다.
“하악… 하악….”
막 코너를 돌아 엘리베이터가 보이는 자리에 섰을 때, 구겨졌던 낯이 허망하게 탁 풀렸다. 이미 주완을 삼킨 엘리베이터는 로비를 향해 추락하듯 내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