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남아.”
현관문을 열자마자 통로에 버티고 선 재규어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두 팔을 벌렸다. 그러나 놈은 얼른 다가오지 않고 낯선 상대를 대하듯 주완을 빤히 볼 뿐이었다. 제 이름을 불러 언짢아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샛노란 눈동자는 어떤 감정도 없이 주완을 고요히 담아내기만 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재규어가 다가오지 않자, 괜스레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떨어져 있는 동안 저를 까맣게 잊은 걸까. 오랫동안 함께했던 것도 아니고, 반드시 저를 기억해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녀석을 무척 그리워했던 만큼 낙담도 컸다.
재규어는 꼬리만 느릿하게 흔들며 멀뚱멀뚱 주완 일행을 바라봤다. 주완의 등 뒤에 선 권수혁에게도 냉큼 다가오지 않았다.
“수남이가 왜 저러죠?”
주완이 걱정 어린 얼굴로 권수혁을 돌아봤다. 권수혁은 그런 주완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 눈길을 재규어에게 던졌다. 놈은 여전히 다가오지도, 그렇다고 어디론가 가 버리지도 않았다. 새삼 저를 혼자 놓고 갔다고 삐진 건 아닌 듯했다. 그랬다면 이미 휙 고개를 돌리고 사라졌을 테고, 혼자 집에 남겨지는 건 어렸을 때부터 익숙해졌을 테니까.
동물의 육감은 모름지기 인간보다 민감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재규어라면 주완의 분위기가 며칠 전과 사뭇 달라졌다는 걸 분명히 인지했을 터였다. 이를테면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손짓이, 눈빛이 몰라보게 살랑거린다는 점에서. 외양은 전과 같은데, 분위기가 전혀 다르니 긴가민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걱정할 거 없어. 그러다 말 테니까.”
권수혁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곤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권수혁에 제 곁으로 다가오자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그를 보던 재규어가 그의 다리에 제 얼굴을 가만히 비비더니 이내 그 주변을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꼬리로 그의 다리를 연신 간질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권수혁 역시 익숙한 것처럼 녀석의 머리에서부터 등줄기를 죽 이어서 쓸어 주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권수혁의 다정한 손길을 얌전히 만끽하던 재규어가 번뜩 두 눈을 떴다. 그러곤 아직도 현관에 머물러 있는 주완을 빤히 주시했다.
주완은 그런 녀석을 향해 재차 손을 뻗더니, 두 손을 가볍게 오므렸다가 폈다. 어린 아기를 부르듯 손이 작고 부드럽게 오므라졌다가 펴지길 반복하자, 재규어가 동그란 두 귀를 팔랑거리며 그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수남아, 이리 와.”
다시금 재규어를 부르자, 녀석이 고개를 들고 권수혁을 올려다봤다. 권수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느릿느릿 현관으로 걸어온다. 한 발을 뗄 때마다 양옆으로 유연하게 흔들리는 몸의 실루엣이 여전히 우아했다.
주완은 어느새 제 앞까지 걸어온 재규어의 목을 망설임 없이 꼭 끌어안았다.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뜨거운 체온이 품 안 가득 밀려들어 왔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털도 기분 좋게 감겨 왔다.
느닷없는 포옹에 움찔하던 재규어가 금세 잠잠해졌다. 주완의 체취나 무게가 익숙한지, 서서히 경계를 허물며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앉았다. 앞발도 얌전히 모은 채였다. 주완이 제 뺨을 놈의 얼굴에 비비적거렸을 땐 두 귀마저 슬쩍 늘어뜨려졌다. 바닥에 닿아 있던 꼬리는 파도치듯 이따금 양옆으로 출렁거렸다.
“잘 있었어?”
주완은 재규어가 알아듣지도 못할 질문을 계속 던지며 놈의 얼굴을 조물조물 매만졌다. 며칠간 전미남을 대신해 놈을 돌봤을 권수혁의 수하들은 그 무모한 애정 표현에 기함했다. 주완이 재규어의 볼을 매만질 때마다 녀석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슬쩍슬쩍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 이빨과 발톱으로 찢어 놓은 쿠션만 몇 개인지 몰랐다. 어쩌다 눈만 마주쳐도 으르렁대기 일쑤였다.
그토록 예민하고 포악하던 짐승이 지금은 한 마리 고양이가 된 것처럼 가르릉거리는 꼴이라니, 기가 막혔다. 권수혁이야 어릴 때부터 따르던 주인이니 논외라 쳐도, 놈이 주완을 저보다 높은 서열이라 생각하진 않을 텐데 그렇게 얌전을 떠는 게 의아할 따름이었다.
“보고 싶었어.”
주완이 한참 만에야 물러나며 재규어의 턱밑을 슬슬 긁어 주었다. 입가에는 짙은 웃음마저 번졌다. 재규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둘을 지켜보던 사내들도 아리송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눈앞의 남자가 마지못해 사는 것 같던, 그 메마른 병자와 동일인인가 싶어서였다. 그만큼이나 극적인 변화였다.
“이제 쉴 거니까 그만 가 봐.”
권수혁이 셔츠 단추를 풀면서 지시했다. 그러자 전미남을 비롯한 수하들이 일제히 꾸벅 고개를 숙였다.
“네. 내일 뵙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대표님.”
주완은 눈치껏 한쪽으로 비켜섰다. 수하들을 먼저 내보낸 전미남이 그런 주완을 향해 묵례했다. 주완도 덩달아 인사를 건넸다.
곧 전미남마저 밖으로 나가고, 현관문이 자동으로 닫혔다. 밖에서 느껴지던 사내들의 기척도 점점 옅어지다가 완전히 잦아들었다. 돌연 집안이 휑해진 느낌이었다.
주완은 제 운동화와 권수혁의 구두를 나란히 돌려놓고 재규어와 함께 거실로 향했다. 그즈음 반나체 상태의 권수혁이 욕실로 향하면서 잠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씻게요?”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권수혁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그대로 주완을 스쳐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금세 안에서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렸다.
주완은 멈췄던 걸음을 다시 떼서 거실 소파 앞으로 갔다. 긴 날숨을 뱉으며 앉자마자, 재규어가 등 뒤로 파고들었다. 완전히 밀어 내려는 건 아닌지, 주완이 소파 끄트머리까지 몰리자 더는 꿈틀거리지 않았다. 그저 꼬리로 주완을 툭, 툭 쳐 댈 뿐이었다. 여독에 지친 몸을 재규어의 따끈따끈한 체온에 흠씬 기댔다.
재규어가 호흡할 때마다 놈의 거대한 몸도 큼직하게 일렁였다. 그 움직임이 주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누그러졌다. 일정한 진동이 편안하고 느긋해서, 그대로 잠들 수도 있을 듯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욕실 문이 열리더니, 물기 어린 발소리가 거실 쪽으로 이어졌다. 권수혁은 평소처럼 가운만 대충 걸치고 거실 쪽으로 다가왔다. 흠뻑 젖은 흑발의 물기조차 제대로 제거하지 않은 채였다.
그 특유의 향기가 가까워지자, 주완이 뒤로 넘겼던 몸을 서서히 앞으로 끌어왔다. 그 바람에 소파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다.
권수혁은 대뜸 소파를 타고 내려와 바닥에 주저앉는 주완을 빤히 봤다. 어처구니없는지 얕게 피식한다. 그러다 그런 저를 뚫을 듯이 보던 주완에게 들고 있던 수건을 던져 주었다.
“씻어.”
“네.”
주완은 순순히 수건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수혁의 곁을 지나 욕실로 들어설 때까지 등 뒤에 빤한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물론 착각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문을 완전히 닫을 때까지 전에 없이 긴장됐다.
아직 물방울이 뚝, 뚝 떨어지는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딱 적당한 온도의 물줄기가 뻐근했던 온몸을 빠르게 적셔 나갔다. 그저 비행기와 차를 연이어 탄 것뿐인데도 완전히 지쳐 버렸다. 제 체력이 그렇게까지 바닥인 건지, 원래 여행이란 게 그렇게 힘든 건지 모르겠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참 온수로 뭉친 근육을 풀었다.
오랜 샤워를 마친 뒤에는 바로 머리를 말렸다. 온몸이 노곤해져서, 금방이라도 잠들 수 있을 듯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을 마쳐야 할 듯했다.
한참 드라이기 바람 아래 머리카락을 털던 주완이 문득 주춤했다. 귓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다 보니 자연스레 마카오 호텔에서 일이 상기됐다. 제 귓가를 부드럽게 주무르고, 희게 드러난 목까지 어루만져 보던 권수혁의 손길이.
“…….”
제 손으로 더듬더듬 그 부위를 쓰다듬어 봤다. 하지만 권수혁의 손길이 닿았을 때와는 달리 아무런 감상도 들지 않았다. 두근거리기는커녕 간지럽지도 않다. 단순히 제 손길과 타인의 손길 차이인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우형석의 친부나 장진우가 처음 손을 댔을 땐 놀라고 당혹스럽기만 했지,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느낌은 받지 못했다.
뿌옇게 변해 버린 거울을 손으로 문질러 닦았다. 그러곤 슬쩍 옆으로 돌아서서 제 목을 비춰 봤다. 멍이 들었을까 싶게 그 부근만 눌러도 욱신거리던 목덜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만 권수혁이 잘근거리기만 했던 울대뼈 주위조차 울긋불긋한 게, 제대로 물어뜯겼던 목덜미의 상태는 보지 않고도 뻔히 짐작이 갔다. 필시 시퍼런 울혈이 들었을 터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줄곧 한 가지 생각에 골몰했다. 권수혁은 주완 자신을 다른 누군가로 착각하지도, 사리 분별이 불가능한 만큼 뭔가에 취해 있지도 않았다. 단순히 육욕을 해소할 작정이라면 굳이 주완 자신이 상대일 필욘 없다고도 했고.
그렇다면 남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계산해도, 아무리 고쳐 생각해 봐도 도출되는 답이 한결같았다.
실제로 권수혁의 태도 역시 눈에 띄게 달라졌다. 본래도 틈틈이 주완을 관찰하곤 했는데, 이제는 더 대놓고, 집요하게 그만 봤다. 오죽하면 지독한 감기로 말이 없던 백도운마저 ‘주완 씨 볼에 구멍 뚫리겠다.’라고 한마디 했을까.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권수혁의 키스를 받아들였던 그때처럼 가슴이 또 콩닥콩닥 뛰었다. 제멋대로 달아오르려는 뺨을 문질러 열기를 식혔다. 그러곤 가운을 잘 여미고 밖으로 나왔다.
권수혁은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완이 나타나자, 그와 재규어의 시선이 동시에 꽂혀 들었다.
“세면대에 빠진 줄 알았네.”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권수혁이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주완에게 성큼성큼 걸어와 손목을 그러쥔다. 힘을 준 건 아니라, 아프지 않았다.
“그만 자야겠어.”
주완의 두 눈을 똑똑히 보며 고지한 권수혁이 그대로 주완을 이끌고 침실로 향했다. 주완도 버티지 않고 고분고분 그를 따랐다.
침대 앞에 이르러 권수혁이 제 가운을 벗었다. 조물주가 정성껏 빚은 듯한 몸이 가릴 것 없이 드러났다. 전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몸 곳곳의 흉터에 절로 시선이 갔다.
하지만 그도 잠시뿐이었다.
“으앗.”
불현듯 권수혁이 멀뚱히 선 주완을 번쩍 안아 들었다. 몸이 너무 가뿐히 들려서 저도 모르게 비명이 터졌다. 갈 곳 없는 두 손이 권수혁의 어깨를 짚었다. 그 참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맞물렸다.
권수혁은 계속 눈을 맞추며 서서히 침대 위로 올라갔다. 주완을 내려놓는 순간에는 아기를 다루는 것처럼 공을 들였다. 자연스럽게 권수혁이 주완의 몸 위를 차지한 꼴이 됐다. 슬프도록 익숙한 구도에 잠시나마 멍해졌던 주완의 낯이 경직됐다. 어깨도 움찔하며 굳었다. 만류하고자 입을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사이 권수혁의 얼굴이 서서히 다가왔다. 주완의 두 눈이 지레 질끈 감겼다. 권수혁은 그런 주완을 보며 움직임을 멈췄다가 다시 고개를 내려 그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동시에 주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잘 자라.”
여느 때보다 차분한 음성에 귓가의 솜털이 곤두섰다. 권수혁은 그대로 굳은 주완의 옆쪽으로 몸을 눕히며 이불자락을 끌어당겼다. 크고 부드러운 이불이 두 사람의 몸을 포근하게 감쌌다.
주완이 슬그머니 돌아눕자, 뒤에서 권수혁의 팔이 뻗어져 그의 가슴과 복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주완의 뒤통수에 자연스럽게 그의 얼굴이 닿았다. 등도 권수혁의 두툼한 가슴에 완전히 밀착됐다. 권수혁의 호흡과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닿을 정도였다.
바짝 긴장한 게 무색하게도, 권수혁은 금세 고른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 나른한 숨결이 여지없이 주완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뒤늦게 두 사람을 쫓아 침실로 들어온 재규어는 가뿐하게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다 늘 자신의 눕던 자리가 사라지고, 두 사람이 틈 없이 붙어 있자 샛노란 눈동자로 권수혁을 빤히 봤다.
놈의 따가운 눈총 탓일까. 두 눈을 감고 잠을 청하던 권수혁이 도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내 두 사람 사이에 처음 만났던 날처럼 팽팽한 기류가 흘렀다.
“수남아, 여기 와서 자.”
두 사람이 대치를 끝낸 건 주완이 제 앞쪽 자리를 탁, 탁 두드린 직후였다. 재규어는 아쉽게 입맛을 다시며 주완이 토닥거린 곳에 엎드렸다. 꼬리만은 고집스럽게 주완의 허리에 휘감은 채였다.
주완은 이불 사이로 겨우겨우 팔을 빼내 제 곁에 꼭 들러붙은 재규어의 목을 끌어안았다. 머지않아 권수혁에게서 다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등을 온전히 품어 준 탄탄한 가슴과 체온, 그리고 팔 안에 가득 들어찬 짐승의 뜨겁고도 포근한 기운. 그 둘에게 둘러싸인 지금, 더없이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금세 잠기운도 몰려드는 듯했다. 가물가물해지는 눈꺼풀을 그대로 스르륵 닫았다. 그렇게까지 마음을 놓고 잠들어 본 적이 언제였을까 싶을 정도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으음….”
두 눈이 거부감 없이 벌어졌다. 서서히 높은 천장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들어왔다. 뭔가가 자꾸 허벅지를 툭툭 건드리는 것 같더니, 먼저 일어난 재규어가 제 꼬리를 팔랑거리며 주완을 건드리고 있었다. 주완은 이불에 푹 파묻힌 채로 고개만 움직여 재규어를 빤히 올려다봤다.
밑에서 보니 고양잇과 포유류답게 입매가 동그랗게 말려 있는 게, 제법 귀여웠다. 슬쩍 손을 뻗어 재규어의 주둥이를 만지작거렸다. 간지러운지 재규어가 혀를 내밀어 제 주둥이를 핥았다. 성가신 손을 떨쳐 내려는 거였겠지만, 주완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놈의 수염까지 만지작거렸다. 이리저리 고개를 내빼며 피하던 놈이 기어이 침대 아래로 폴짝 뛰어 내려갔다.
닫힌 문 앞에 선 재규어가 뒤를 돌아봤다. 문을 열라는 것 같았다.
“나갈 거야?”
재규어는 다시 문을 제 앞발로 툭 건드릴 따름이었다. 열어 주려고 무심코 옆자리를 짚었다가 멈칫했다. 밤새 권수혁이 누워 잠들었을 자리였다. 그곳에는 미약한 온기만이 남아 있었다. 새삼 제 몸을 옥죄듯 끌어안았던 팔의 힘과 체온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귓가가 간질간질 달아올랐다. 그러다 재규어가 다시금 문을 치면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른 침대에서 나와 문을 열었다. 재규어가 얼른 문틈을 비집고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 침실 밖으로 나오자,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풍겼다. 주방을 들여다보니, 언제 왔는지 전미남이 앞치마를 두른 채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재규어가 뛰어나오는 기척 때문일까. 때맞춰 뒤돌아보던 전미남이 주완을 발견하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주완도 작게 묵례했다.
“오셨어요.”
“식사 준비 거의 끝났습니다. 준비하시죠.”
“아, 네.”
전미남은 다시 돌아서서 조리에 집중했다. 불에 얹어진 냄비에서 맹렬하게 보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칼칼한 냄새가 김치찌개인 듯했다. 내내 고요하던 속이 꼬르륵거렸다. 오랜만에 한식을 먹을 생각에 허기가 몰려왔다.
주완은 다시 걸음을 옮겨 거실로 갔다. 권수혁은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주완의 빤한 시선을 귀신같이 알아채곤 바로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춰 온다. 전에는 그를 보는 게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젠 좀 어색했다. 괜스레 손가락을 조몰락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요?”
“그래.”
“나도요. 오늘은 악몽도 안 꿨어요.”
“…다행이네.”
권수혁의 입가가 약간 누그러진 듯했다. 워낙 미미한 변화라 착각일 수도 있었다. 출근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그의 모습은 아침부터 완벽했다. 그래서 주완 자신의 꼴은 어떨지 괜히 신경 쓰였다. 살짝 뻗친 머리카락을 연신 손으로 쓸어내렸다.
“좀 씻고 올게요.”
권수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했다. 그의 올곧은 눈길 속에 욕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한참 들여다봤다. 비단 머리카락이 뻗치고, 얼굴이 좀 부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제 낯에 난생처음 보는 표정이 걸려 있었다. 무슨 감정이라고 단언할 순 없지만, 묘하게 상기된 것만은 분명했다. 그게 너무 낯설어서, 괜스레 얼굴을 몇 번씩 문질러 봤다. 그러자 가슴까지 은근히 빨리 뛰기 시작했다.
서둘러 찬물을 끼얹어 세수했다. 얼굴은 차분해졌지만, 가슴이 불안정하게 콩닥거리는 것만큼은 잦아들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다시 거실로 갔다. 재규어는 권수혁의 발치에 배를 깔고 엎드려 다가오는 주완에게 주목했다. 그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서 놈의 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여전히 손바닥에 감기는 털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우울할 때도 재규어가 곁에 있으면 금세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불현듯 귓불에 권수혁의 손이 톡 와 닿았다.
“…아.”
놀라서 고개를 들자, 곧장 지긋한 권수혁의 눈빛을 마주하게 됐다. 그는 어느새 주완 쪽으로 상체를 기울여서 그의 젖은 뒷머리와 여릿한 물기가 어린 귀를 살짝살짝 만지작거렸다. 잠잠해졌던 심장이 또다시 요란하게 뛰었다. 권수혁의 손끝이 닿는 곳마다 파르르 열이 도는 듯했다. 기분 좋은 주완의 손길이 멎자, 재규어가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주완은 저도 모르게 놈을 꼭 붙들고 목을 움츠렸다. 입술도 꼭 닫았다. 그러지 않으면 앓는 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즈음, 부엌에서 전미남이 걸어 나왔다. 동시에 권수혁의 손이 거짓말처럼 떨어져 나갔다.
“대표님, 식사 준비 다 됐습니다.”
이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다. 권수혁이 거의 항상 아침 식사를 걸러 온 까닭이었다. 생각해 보면 집 안에 음식 냄새가 풍긴 것도 주완이 오고부터였다.
주완은 슬쩍 고개를 들고 권수혁을 봤다. 권수혁이 그를 향해 주방 쪽을 턱짓했다.
“가 봐.”
그러는 본인은 딱히 식사할 의향이 없는 듯했다. 전미남은 바로 몸을 돌려 주방으로 돌아갔다. 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주완이 권수혁을 보며 권했다.
“같이 먹어요.”
“…….”
“아침, 거르면 안 좋대요.”
권수혁은 말없이 주완을 응시했다. 주완이 먼저 주방으로 가다가 확인하듯 돌아봤을 땐 작게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식탁에는 전미남이 손수 만든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를 비롯한 밑반찬이 골고루 차려져 있었다. 반찬 가게에서 사 온 듯했지만, 덕분에 밥상이 풍성해졌다. 주완과 권수혁이 식탁에 마주 앉았을 즈음, 전미남은 고깃덩어리를 챙겨 와 재규어에게 툭 놓아 주었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킨 재규어가 고깃덩어리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전미남은 그런 재규어를 꼼꼼히 살피면서 그새 살이 빠지진 않았는지, 어디에 상처라도 생긴 건 아닌지 살폈다. 다행히 그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배를 채우려던 재규어가 시선을 의식하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전미남은 순순히 놈에게서 등을 돌려 다시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어 싱크대에 슬쩍 걸쳐 두었다. 한술 뜨려던 주완이 그에게도 식사를 권했다.
“미남 씨도 앉으세요. 난 서서 먹어도 괜찮아요.”
“아닙니다, 저는 먹고 왔습니다.”
반쯤 엉덩이를 뗐던 주완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거절하는 사람에게 거듭 권하는 것도 부담스러울 테고, 권수혁이 숟가락을 든 채 주완을 뚫을 것처럼 주시해 왔기 때문이다.
잠자코 밥을 떠 입에 넣었다. 얼큰하고 시원하게 입 안을 적시는 김치찌개의 맛이 일품이었다. 한 입만 먹었을 뿐인데도 본디 그렇게까지 맛있는 음식이었나 싶게 식욕이 돌았다.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온 주완으로선 거기에 ‘향수병’이라는 천연 조미료가 섞였다는 걸 알 턱이 없었다.
주완이 군말 없이, 볼이 잔뜩 부풀어 오를 정도로 밥을 양껏 넣고 열심히 오물거렸다. 권수혁은 식사도 멈춘 채 그 모습을 감상했다. 그의 눈빛이 포근해졌다는 걸 주완도, 전미남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미남은 잊지 않고 권수혁에게 오늘의 예정 일과를 보고했다.
“대표님, 오늘은 운동을 좀 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권수혁은 여전히 주완에게 눈을 둔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식사에 열중하던 주완이 문득 전미남 쪽을 봤다. 수동의 의미가 분명한 ‘운동’을 누구에게 시키겠다는 건지 궁금했던 탓이었다. 전미남이 그 눈길의 의미를 능히 짐작하며 거실을 내다봤다. 그곳에선 재규어가 한창 고기를 찢어 먹고 있었다.
“원래 야생에서 생활하던 녀석이니까요. 저 녀석에겐 이 집도 너무 좁습니다. 더구나 사방이 막혀 있기도 하고요. 어렸을 때부터 실내 생활에 익숙해져 있긴 하지만, 본능이란 것도 무시할 수 없어서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을 겁니다. 게다가 운동량이 적으면 근육도 퇴화하기 마련이라, 주기적으로 운동을 시켜 줘야 합니다.”
“그럼 밖에 나가나요?”
“네.”
얌전히 듣던 주완이 물끄러미 권수혁을 응시했다. 권수혁은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따라가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어이없다는 투로 대꾸한다. 그러곤 다시 밥을 뜨려다 말고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앞으론 일일이 허락 같은 거 구하지 마.”
일일이 대답해 주기 귀찮다는 뜻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주완이 그렇게 하나하나 허락을 구하는 게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사육당하는 것이 몸에 배서, 사소한 행동조차 으레 승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완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단순히 그를 언젠가 먹어 없앨 먹잇감으로 생각한다면 그딴 게 거슬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걸 주완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멍하니 권수혁을 봤다. 동정일까. 아니면 이제부터라도 주완 자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해 주겠다는 의미일까. 어느 쪽이든 권수혁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 같았다.
주완은 일회용 숟가락의 끝을 물고 작게 웅얼거렸다.
“고맙습니다.”
권수혁은 달싹거리는 주완의 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한참 만에야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식사 후에는 곧장 나갈 준비를 했다. 사실 전과 비교하면 꽤 늦은 시간이었다. 권수혁이 외투를 걸치며 현관으로 향하자, 고기를 다 먹어 치운 재규어가 터덜터덜 그 뒤를 따랐다. 주완도 밥을 반쯤 먹다 말고 현관 쪽으로 나가 봤다. 바로 구두를 신고 나가려는 권수혁의 등 뒤에 느지막이 인사를 건넸다. 별다른 대꾸는 기대하지 않았다.
“다녀오세요.”
“…….”
그런데 권수혁이 나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봤다. 그러곤 뚜벅뚜벅 주완 쪽으로 다가오더니, 덜컥 그의 뒤통수를 감싸 제게 힘껏 끌어당겼다. 얼결에 권수혁의 어깨에 이마를 부딪치며 폭 안기고 말았다. 권수혁 특유의 향기가 담뿍 풍겼다.
재규어의 샛노란 눈동자가 엉겨 붙은 두 사람에게 완전히 고정됐다. 이제껏 본 적 없던 행위라 아리송한 모양이었다. 권수혁은 더 이상의 스킨십 없이 주완을 놓아주었다. 그러곤 한동안 놀란 듯한 주완의 얼굴을 지그시 보다가 돌아섰다. 적잖이 놀란 전미남은 뒤늦게 권수혁을 향해 고개를 꾸벅했다.
곧 현관문이 닫혔다. 주완은 닫힌 현관문을 넋 놓고 보면서 제 귓가를 만지작거릴 따름이었다. 전미남에게 느닷없이 권수혁과의 포옹을 목격당한 일에 관해선 무안해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어쩌면 그의 의식에 전미남의 존재가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주완은 얼마가 더 지난 후에야 여전히 자신을 뚫어지게 올려다보는 재규어의 머리를 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방으로 돌아갔다.
권수혁에게 안겼을 때, 숨결처럼 작은 속삭임이 귓전에 닿은 듯했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라고 하는 것 같았다. 시기나 상황이 주완 자신의 인사에 화답해 준 모양새라, 괜스레 가슴이 설렜다. 귓가가 또 속절없이 달아올랐다.
재규어는 뒷좌석에 가까스로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주완은 놈의 꼬리나 다리가 문틈에 끼지 않도록 주의해서 문을 닫아 주곤 조수석에 올랐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네.”
전미남은 바로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였다. 괜히 뒷좌석의 재규어가 걱정돼 힐금힐금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재규어는 그렇게 이동하는 게 제법 익숙한지 슬쩍 고개를 들고 창밖이나 구경할 따름이었다. 놈의 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었지만, 몸을 뒤척이거나 예민하게 굴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만의 외출에 신이 났는지, 꼬리를 쉬지 않고 움직여 댔다.
차는 빠르게 도로를 질주해 나갔다. 주완의 시선은 주로 창밖에 고정돼 있었지만, 처음 외출했을 때처럼 사소한 광경 하나하나에 고개까지 돌려 가며 크게 반응하진 않았다. 이제 그에게도 평범한 일상이 돼 가고 있는 셈이었다.
평일 10시가 갓 넘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길 위는 한적하기만 했다. 신호에도 걸리지 않고 매끄럽게 달리던 차가 어느 고속 도로로 접어들었다. 높은 방음벽에 시야가 가리자, 슬쩍 뒷좌석을 돌아봤다. 볼 거라곤 자웅을 겨루듯 질주하는 차량뿐인데도 재규어는 그 모습마저 마냥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놈의 눈에는 그저 뜀박질을 잘하고, 제각기 생김새가 다른 짐승들로 보일까. 꼭 호기심 많은 아이나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수남이 운동을 어디에서 시키는 거예요? 사람들이 보면 곤란할 텐데….”
재규어는 반려동물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조련사가 아닌 한, 개인적으로 재규어를 돌보고 키울 순 없을 거였다. 허가 없이 맹수를 국내로 들여오는 것 또한 불법일 테고. 행여 재규어가 사람들 눈에 띄면 곤란해지지 않을까.
인적이 드문 곳에 놈을 몰래 풀어놓고 뛰어놀게 한들 안전할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 근방을 지나던 사람과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고, 누군가 산에서 맹수가 내려왔다며 신고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우려하는 주완과 달리, 전미남은 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런 문제라면 전혀 걱정할 거 없습니다.”
“…….”
자세한 설명은 해 주지 않았다.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걸까. 내심 궁금했지만, 더 묻지는 못했다. 전미남이 시종 전방과 사이드미러만 주시하며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그는 먼저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평소에도 과묵한 성격인 것과는 무관해 보였다. 운전이 미숙하긴커녕 능숙한 편인데,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며 한눈을 팔지 않는다. 정말이지 성실한 남자였다.
주완은 뒷좌석 쪽으로 몸을 기울여 재규어의 털을 슬슬 쓰다듬었다. 창밖 구경에 여념 없던 재규어가 바로 고개를 돌려 왔다. 주둥이로 주완의 손을 툭, 툭 건드리기도 했다.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좁은 차 안에 그렇게 웅크리고 있기가 여간 버겁지 않을 터였다. 드넓은 초원을 거처 삼아 뛰고 뒹굴며 살아야 할 생명이 좁디좁은 도시에 갇혀 버렸다. 공연히 놈이 가엾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산한 고속 도로에서 적정 속도를 지키며 달리던 차가 한 출구로 빠져나왔다. 그러곤 바로 좁고 굽이진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차창 밖에는 낙엽마저 떨어뜨리고 앙상해진 나무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추수를 마치고 텅 빈 논밭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첩첩이 쌓인 산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점점 길폭이 줄어들더니, 더는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지점이 나왔다. 전미남은 당황한 기색 없이 차를 멈추고, 시동도 껐다.
“다 왔습니다.”
주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내렸다. 그러곤 잡초와 바싹 마른 수풀이 우거진, 휑한 공간을 둘러봤다. 주완이 밟은 땅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널찍한 야지의 일부였다. 야트막한 산들의 능선들이 병풍처럼 그곳을 둘러싸고 있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갈 수도 없고, 누가 다녀간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약초꾼이나 심마니가 굳이 야산을 타고 내려오지 않는다면 재규어를 목격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전미남의 부연 설명이 그 생각에 확신을 심어 주었다.
“저 녀석과 함께 살게 되면서 대표님께서 직접 찾아보고 사들이신 땅입니다. 이 평지와 저 산들까지 전부요. 개발 제한 구역이라 부동산업자들도 눈독을 들이지 않는 곳이고, 관리인이 주기적으로 둘러보면서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습니다.”
전미남은 바로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재규어는 기다렸다는 듯 뛰어내려 강한 발로 땅을 힘껏 박차고 달려 나갔다. 놈이 빠를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집에서 보여 줬던 여유로움이나 느긋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칠 줄도 모르고 넓은 야지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물을 만난 물고기 같았다.
누렇게 마른 수풀 때문에 재규어의 황금빛 털이 보호색처럼 보여, 열심히 놈의 움직임을 좇지 않으면 금세 놓쳐 버리기 일쑤였다. 재규어는 야산 어귀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뛰어나왔다가 이내 반대편으로 내달리면서 오랜만에 주어진 자유를 만끽했다. 즐거워 보였다.
“수남이가 기분이 좋은가 봐요.”
“네. 오랜만이니까요.”
“어렸을 때가 생각나요. 지금은 지역명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살던 곳도 이랬거든요. 장이 5일에 한 번씩만 열렸는데, 거기까지 가려면 차를 타고 한참을 나가야 하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어요. 가지고 놀 장난감도 변변치 않아서 수남이처럼 이런 야지를 놀이터 삼아 놀곤 했는데.”
주완은 어렴풋한 회상에 잠겼다. 전미남은 아무런 대꾸 없이 그의 말을 경청할 따름이었다. 주완 자신이 살았던 동네와 할아버지의 한옥, 어린 시절에 꽤 말썽을 피웠던 제 모습 등을 차례차례 그려본다. 이제는 기억마저 흐릿해져 사라지려 한다는 게 서글퍼졌다.
한동안 상념에 젖어 있던 주완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재규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는데, 놈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는 걸까.
“수남이가 안 보여요. 어디로 간 거죠?”
“곧 돌아올 겁니다.”
전미남이 손목시계를 보며 확신했다. 곧 그 말을 증명하듯 재규어가 산어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 떨어진 거리라 정확히 파악할 순 없었지만, 그새 입에 뭔가를 물고 있는 것 같았다.
놈은 달려 나갈 때도 그랬듯 튼튼한 다리로 빠르게 땅을 내차며 달려왔다. 그때마다 놈의 주둥이에서 잿빛의 뭔가가 털썩털썩 맥없이 흔들렸다. 바람에 놈의 황금빛 털이 찬란하게 날렸다. 커다란 앞발로 쿵, 쿵 바닥을 내리찧으면 땅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뭉클하고 감동스러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재규어가 주완 앞에서 서서히 속력을 늦췄다. 무심코 안아 주려고 손을 뻗다가 주춤했다. 그런 주완에게 재규어는 물고 있던 것을 툭 내려놓았다. 물끄러미 그것의 정체를 파악한 주완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전미남을 돌아봤다. 전미남도 이제까지 보인 적 없던 재규어의 돌발 행동에 꽤 놀란 표정이었다.
재규어가 주완에게 가져다준 것은 야생 토끼였다. 큰 움직임은 없었지만, 작고 몽실몽실한 몸이 가늘게 일렁이는 걸 보니 다행히 숨은 붙어 있는 상태였다. 주완은 얼떨떨하게 재규어를 응시했다.
“이거… 나, 주는 거야?”
재규어는 한껏 기세등등해져선 주완을 올려다봤다. 마치 구애하려는 암컷에게 살찐 먹잇감을 물어다 주고 마냥 뿌듯해진 수컷처럼.
주완은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눈에 담았다. 겨울을 준비하며 누렇게 마른 풀과 나무들은 손만 대도 형체 없이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그 어디에서도 생동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모진 겨울을 견디고 나면 고요하게 숨죽였던 풀에도, 나무에도, 그것들에 삶을 의지해 살아가는 곤충이나 동물들도 다시 깨어나 생기를 머금게 될 터였다. 그때가 오면 산과 들을 놀이터 삼아 놀던 어린 시절에, 똑똑 따서 입 속으로 밀어 넣었던 진달래꽃도 지천에 흐드러질 테고. 아무 곳에나 드러누워 있자면 잔잔하고 달콤한 자장가가 돼 주었던 개울의 물 흐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쉽게 상상됐다. 지금 당장은 느낄 수 없어도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뇌리에 오랜 추억을 덧입혀 주는 공간이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완연한 봄이 올 때까지 권수혁의 곁에 머무는 게 허락된다면, 그래서 재규어와 함께 또다시 이곳을 찾을 기회가 온다면 그땐 직접 느끼고 볼 수 있을 거였다. 익숙한 흙냄새와 마른 나뭇잎 냄새가 가득해, 저절로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던 야지를 뒤로하고 돌아오던 길에 대책 없이 속이 부풀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었다.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네?”
“그것 말입니다.”
주완이 한참 이런저런 단상에 젖어 있을 무렵, 내내 묵묵하던 전미남이 입을 뗐다. 그제야 주완은 제 무릎에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는 토끼를 내려다봤다.
녀석은 솜털 같은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바들바들 떨었다. 그건 결코 차 안이 춥기 때문은 아닐 거였다. 본디 겁이 많고 경계심이 강한 짐승이었다. 더구나 마음만 먹으면 저를 한입에 꿀꺽 삼킬 재규어와 한 공간에 있다는 게, 그리고 제 서식지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게 두려울 거였다.
주완은 쉼 없이 몸을 떠는 토끼를 가만가만 어루만져 주었다.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어요. 다쳤잖아요.”
토끼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물린 목에서 피가 흘러 주변의 털까지 흠뻑 젖은 상태였다. 녀석을 그냥 풀어 줬다간 포식자들이 피 냄새를 맡고 몰려올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밤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무사히 잘 숨더라도 상처가 덧나 목숨이 위태로워질 가능성도 컸다. 무력한 처지의 비참함과 고통은 몸소 겪어 잘 안다.
그러니 녀석의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돌봐 주고 싶었다. 행여 포식자가 나타났을 때 피하지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일이 없도록. 재규어가 주완 자신에게 선물하고자 사냥한 생명이니, 잘 살려서 돌려보내는 것도 제 몫이었다.
“어? 수남이 왔네?”
문을 연 백도운이 문틈으로 쓱 들어오는 재규어를 쫓아 고개를 돌리면서 인사를 건넸다. 재규어는 그런 그를 무시하듯 도도히 스쳐 지나갈 따름이었다.
백도운도 개의치 않고 아직 밖에 서 있던 주완과 전미남에게 흔쾌히 들어와요, 했다. 재규어가 온 바닥에 발자국을 내며 더럽히는 상황에도 생글거린다. 적어도 그곳을 청소할 사람이 자신은 아니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에 반해 재규어가 백도운의 집 곳곳을 관찰하며 왕성하게 활보할수록 전미남의 낯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기어이 뭔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을 땐 얼른 그쪽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적당히 앉아요. 집이 좀 정신없어요.”
백도운이 거실의 소파를 가리켰다. 그의 집을 처음 방문한 주완은 적잖이 당황했다. 말끔하고 단정한 평소 이미지와 달리, 백도운의 집은 도저히 사람이 사는 곳이라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먼지 한 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깨끗하게 정돈된 권수혁의 집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언제 벗어 둔 건지 모를 옷가지들이 소파 곳곳에 널려 있었고, 때 지난 일간지와 잡지 등이 아무렇게나 펼쳐져 나뒹굴었다. 편의점 봉투와 과자 봉지, 빈 맥주 캔 따위도 어지럽게 굴러다녀서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난감할 정도였다.
“자, 사양하지 말고 앉으라니까?”
백도운은 속도 모르고 멀뚱히 선 주완의 등을 떠밀었다. 그때 재규어가 훌쩍 소파 위로 뛰어올라 그 위를 몽땅 차지했다. 제 주변에 널린 백도운의 물건들을 주둥이나 발로 툭툭 쳐서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 바람에 앉을 곳이 마땅찮게 된 백도운과 주완은 그냥 카펫이 깔린 바닥에 앉았다. 그사이 전미남은 외투를 벗어 의자에 잘 걸쳐 두곤 두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곤 눈에 띄는 물건들부터 하나, 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백도운 그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았다. 내버려 두라는 빈말조차 건네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요, 한다. 누군가를 부리는 데 익숙한 것 같았다. 본디 권수혁이 하는 일을 그가 물려받을 뻔했다니,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걸까.
“그건 또 뭐예요?”
백도운은 주완이 내내 소중히 품고 있던 토끼를 고갯짓했다. 그러자 주완이 제 팔을 조금 더 느슨하게 풀어 녀석의 귀를 보여 주었다.
“토끼요.”
“설마 토끼인 걸 모를까 봐. 웬 녀석이에요?”
“수남이가 잡아 줬어요.”
“수남이가요?”
주완에게서 토끼를 넘겨받아 녀석의 상처를 살피던 백도운이 의아한 표정으로 재규어를 봤다. 두 사람의 뒤에서 군림하듯 앉아 있던 재규어가 기세등등하게 턱을 쳐들었다. 반려묘들이 주인에게 호감을 표현할 때 곤충이나 쥐 따위를 잡아다 준다는 얘기는 언뜻 들어 봤지만, 토끼라니. 덩치만큼 통이 큰 건가? 어쩌면 단순한 호의 표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백도운은 피식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며 재규어를 타일렀다.
“수남이 너 그러면 안 돼. 네 형한테 혼난다?”
그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재규어는 입을 쩍 벌리고 하품했다. 이어 긴 혀로 제 콧등을 핥으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샛노란 눈동자만은 백도운에게 넘어간 토끼에게 고정돼 있었다. 주완이 저가 손수 잡아다 준 먹이를 그에게 건넨 게 못내 거슬리는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댔다.
주완은 손을 뻗어 토끼의 작은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토끼는 여전히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상처를 꼼꼼히 살피던 백도운이 그 지저분한 집에서 잘도 의료 상자를 찾아냈다. 그러곤 그 안에서 핀셋과 소독약을 꺼냈다. 솜에 소독약을 덜어 토끼의 찢어진 목덜미에 살살 발랐다. 연이어 봉합용 바늘과 실로 벌어진 살갗을 꿰맸다.
응급 처치를 마친 백도운은 마취도 없이 치료의 고통을 견딘 토끼를 대견한 듯 토닥거렸다.
“아팠을 텐데, 잘 참았어.”
“어때요, 선생님?”
“상처가 그렇게 깊은 건 아니라서 생명에 지장이 가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내가 수의사는 아니라 장담할 순 없지만, 일주일 정도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다행이다.”
주완이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여전히 웅크린 채 꿈쩍하지 않는 토끼를 다독여 주려 손을 뻗었다. 순간, 토끼가 뒷다리를 바지런히 움직이더니 폴짝폴짝 소파 아래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워낙 잽싸서 막아볼 틈도 없었다.
주완은 얼른 바닥에 엎드려 소파 밑을 살펴봤다. 그때까지도 느긋이 엎드려 있던 재규어가 돌연 몸을 일으켜 소파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러더니 소파 밑으로 숨어 버린 토끼를 향해 제 앞발을 휙휙 휘둘렀다. 토끼는 엉덩이만 바깥쪽으로 내놓고 고개는 구석에 완전히 파묻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녀석에게까지 제 앞발이 닿지 않자 재규어가 잔뜩 이를 세우고 으르렁거렸다.
“수남아, 하지 마. 무서워하잖아.”
주완은 소파가 들썩거릴 만큼 막무가내로 파고드는 재규어를 끌어냈다. 그러나 아무리 힘껏 안아 당겨도 놈은 꿈쩍하지 않았다. 주완이 놈의 몸을 짓누르듯 올라가 두 손으로 샛노란 눈을 턱 막은 후에야, 그로 인해 토끼가 더는 보이지 않게 된 다음에야 좀 잠잠해졌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몸부림쳐 떨쳐 내고 응징했을 텐데, 금세 흥분을 가라앉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켜보던 백도운이 실실거렸다.
“아무래도 주완 씨한테 짐승 길들이는 재주가 있나 보네요? 사육사 해도 잘하겠어.”
“네?”
“농담이지만, 반은 진담이니까 나중에 생각해 봐요. 그리고 토끼는 아무래도 여기에 두고 가는 게 좋겠어요. 안 그러면 저 녀석, 최소한 수남이한테 압사라도 당할 것 같거든. 상처도 일정하게 소독해 줘야 하고요.”
백도운이 소파 아래로 제 팔을 밀어 넣으며 당부했다. 주완은 재규어가 다시 달려들지 못하도록 녀석을 깔아뭉개듯 붙잡아 그를 도왔다. 한참 낑낑대던 백도운이 잡았다, 하더니 먼지 범벅이 된 토끼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확실히 그 녀석을 권수혁의 집으로 데려갔다간 무사를 장담할 수 없을 듯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선생님.”
“응. 나도 혼자 외로웠는데, 잘됐네.”
백도운은 토끼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재규어가 고개를 홱 쳐들며 그를 경계하듯 노려봤다. 백도운이 치사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알았어, 안 잡아먹을게. 안 먹는다니까?”
백도운이 영 못 미더웠는지 재규어는 그가 토끼를 데려다 놓으러 침실로 들어갈 때까지 고개를 쭉 내빼고 예의주시했다. 주완은 그러지 마, 하고 놈을 달래며 놈의 달아오른 목덜미를 가만가만 매만져 주었다.
곧 다시 밖으로 나온 백도운은 주방으로 가서 주스를 꺼내 왔다. 그러곤 주스 병의 뚜껑까지 손수 열어 주완에게 건넸다.
“그나저나 어디 갔다가 오는 길이에요?”
“수남이 운동시키러요.”
“아, 하긴. 수남이 저 녀석이 토끼를 사냥할 만한 곳이라곤 거기밖에 없긴 하죠. 지루했죠? 나도 한 번 따라가 본 적 있는데, 주변에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아뇨, 좋았어요.”
“좋았다고요? 에이, 거짓말.”
“정말이에요. 모처럼 탁 트인 데 가서 제대로 바람도 쐤고, 어릴 때 생각도 좀 나더라고요.”
“어릴 때요?”
“아… 말씀드렸는지 모르겠는데, 여덟 살이 되기 전까지 시골에서 할아버지랑 살았거든요. 그래서 오늘 갔던 곳이 익숙하기도 하고, 편안해서 좋았어요. 잠깐이나마 예전에 살았던 곳에 다녀온 기분이어서.”
백도운은 주스를 들이켜며 주완의 낯빛을 살폈다. 옛일을 회상하는 건지, 단순히 오늘 다녀온 곳에 관한 감상을 얘기하는 건지 못내 씁쓸한 기색이 감돌았다. 연신 주스 병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서도 어떤 망설임 같은 게 느껴졌다. 그런 한편 두 눈에는 전에 없던 생기가 돌았다. 어린 시절을 잠시 떠올렸다는 것만으로도.
모르긴 몰라도 길지 않은 주완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예외 없이 그때일 거였다. 그인들 그곳이, 그때가, 왜 그립지 않을까.
“다시 가 보고 싶지 않아요?”
“어디를요?”
“고향이라고 해야 하나? 주완 씨가 살았다던 곳이요.”
“거기가 어딘지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데요, 뭘.”
“그것뿐이에요?”
“네?”
“단순히 거기가 어딘지 몰라서 지레 체념하는 거냐고요.”
주완은 말없이 백도운을 빤히 마주 봤다. 그의 질문은 주완 자신이 아직은 권수혁에게 묶여 있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자유를 차단하는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외출하게 되면 전미남이 그랬던 것처럼 권수혁에게 반드시 보고해야겠다 싶었다. 그가 처음 주완 자신을 정신 병원에서 빼냈던 이유와 지금처럼 가까이 두는 이유가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그가 선사한 자유인 만큼 그에게 구속당한다 해도 불평할 수 없는 일이라 여겼다.
물론 권수혁은 앞으로 사소한 허락 같은 건 일일이 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과거의 추억이 깃든 먼 곳으로의 외출까지 그 ‘사소한’ 범주에 들어갈지 미지수였다.
“수혁이한테 말해 보지 그래요?”
“…….”
백도운의 권유에도 주완은 가타부타 대꾸 없이 입을 다물었다. 자의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권수혁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전미남과 백도운 같은 좋은 사람들도 만나게 됐고, 더 넓은 세상도 구경했고, 사람의 온기 이상으로 푸근한 위로를 건네는 재규어와도 친구가 됐다.
그런데 정작 주완 자신은 권수혁에게 아무것도 준 게 없었다. 본래의 목적이었던 혈액조차 한 방울 뽑히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으면서 또다시 뭔가를 요구한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호의든, 선의든 계속 받기만 해서야 빚진 마음만 무거워질 뿐이었다.
백도운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거푸 주완의 등을 떠밀었다.
“한번 말이라도 해 봐요. 주완 씨가 부탁하면, 수혁이는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인지 충고하는 어조나 음성이 즐거운 일을 앞둔 것처럼 둥실거렸다.
전미남이 한창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즈음, 현관문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전미남은 바로 현관으로 걸어가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그의 짐작대로 아직 권수혁이 돌아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평소 퇴근 시간에 맞춰 식사를 준비했는데, 아직 그 절반도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불안한 마음에 표정이 굳었다. 전미남이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걸어가자, 소파에 늘어져 있던 재규어가 으레 그 뒤를 터덜터덜 따라왔다.
“아, 대표님. 지금 오십니까?”
현관에서는 권수혁이 막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전미남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서둘러 감추고 평소처럼 깍듯이 인사했다. 그를 따라온 재규어도 의아한 눈초리로 권수혁을 빤히 보며 그 근처를 여유롭게 배회했다.
권수혁은 제게 들러붙어 몸을 비비적대는 재규어의 등을 살살 쓸어서 어루만져 주며, 텅 빈 통로를 물끄러미 주시했다. 이내 굽혔던 상체를 바로 하고 통로를 따라 거실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주방을 지나 침실로 향하면서도 계속 뭔가를 찾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주완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침실의 불은 꺼진 상태였다. 벌써 잠든 건가.
권수혁이 의문스럽게 침실을 응시할 즈음, 등 뒤에서 문 열리는 기척이 들렸다. 잇따라 달콤한 비누 냄새가 잔뜩 풍겨 왔다. 바로 고개를 돌렸다. 욕실에서 나오던 주완이 권수혁을 발견하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곧 그는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가볍게 털면서 권수혁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얼마쯤 떨어져 서서 고개를 가볍게 까딱했다.
“다녀오셨어요?”
건네는 인사말에 약간의 의문이 서려 있었다. 그 역시 권수혁의 이른 귀가가 의외로웠던 모양이었다.
권수혁은 대꾸하지 않고 주완을 빤히 내려다봤다. 고요하면서 집요한 그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으려니 슬슬 목 주변이 간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음, 뭐 할 말이라도….”
재규어가 다가오자, 주완이 놈을 쓰다듬어 주기 위해서 살짝 몸을 숙였다. 그에게 꽂혀 있던 권수혁의 시선이 자연스레 벌어지는 그의 앞섶으로 향했다가 얼른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권수혁은 바로 외투를 벗으며 성큼성큼 침실로 들어갔다. 왜인지 화가 난 것 같았다.
주완은 꼬리를 양옆으로 느릿하게 팔랑거리며 제 손길을 고분고분 받아들이던 재규어의 등을 다독이듯 토닥토닥해 주곤 권수혁을 쫓아 침실로 향했다.
셔츠 단추를 풀던 권수혁이 어느새 저를 따라와 문까지 꼭 닫는 주완의 행동에 멈칫했다. 여전히 그는 젖어 있었고, 달콤한 비누 냄새를 잔뜩 풍겼다. 코끝과 귀, 눈가에 붉은 기가 맴돌아서 자꾸 시선을 잡아끌었다.
하아, 깊은 한숨이 터졌다. 이건 마치 입을 쩍 벌린 포식자에게 경계심 없는 새 한 마리가 들입다 날아든 꼴이었다. 단순히 돌진한 것으로도 부족해서, 알아서 입까지 닫는다.
권수혁은 주완에게 돌아서서 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주완이 반사적으로 슬쩍 물러났다. 그렇게 긴장하고도 당장 문을 열고 나가진 않는다. 그저 권수혁의 두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볼 따름이었다.
인내심을 실험하는 걸까?
권수혁은 짧게 혀를 차더니, 거침없이 주완에게 다가갔다. 두어 걸음 더 뒤로 물러나던 주완이 벽과 부딪쳐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권수혁은 계속해서 거리를 좁혀 왔다.
주완은 구석에 몰려서도 당돌하게 권수혁을 마주 봤다. 권수혁도 지지 않고 그의 코앞까지 밀려가서 무릎을 그의 다리 사이로 꾹 밀어 넣었다. 저릿저릿한 손을 꽉 주먹 쥐어 주완의 머리 위를 때렸다. 숨결이 자못 거칠어졌다.
“…읏.”
권수혁의 손이 제 뺨을 건드리자, 주완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뻣뻣하게 버티던 몸도 권수혁의 무릎으로 살짝살짝 주저앉았다. 권수혁은 그런 주완의 반응을 눈에 아로새기며 서서히 손을 미끄러뜨렸다. 그렇게 차츰 그의 턱, 어깨, 허리를 쓸고 내려와 뒤쪽으로 손을 넣었다. 이어 작고 동그란 볼기를 꽉 한 번 움켜쥐기도 했다. 손안에 차지게 감겨 오는 살덩이의 감촉에 속에서 불꽃이 치솟는 듯했다.
주완은 권수혁의 갑작스럽고 저돌적인 스킨십에 움찔하긴 했지만,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그에게 붙들려 있었다. 두 눈은 여전히 올곧게 권수혁에게 고정한 채였다.
“부쩍 갈증이 나.”
권수혁은 탄식하듯 중얼거리더니, 고개 숙여 주완의 귓바퀴를 머금었다. 그러자 주완이 잔뜩 어깨를 굳혔다. 뜨끈한 혀를 내밀어 그의 귓구멍 사이로 진득이 밀어 넣어 봤다. 귓속이 단숨에 축축하고 간지럽게 젖어 들자, 주완의 몸이 바들바들 가늘게 떨렸다. 어째서인지 맛보면 맛볼수록 감질만 났다. 구미가 돌다 못해 눈앞이 핑 도는 느낌이었다.
권수혁은 주완을 더 바싹 당기며 날카로운 이로 말캉한 귓불을 잘근거렸다. 그에게서 터진 뜨거운 숨결이 거푸 젖은 귓속을 울렸다. 주완은 아랫입술을 물며 끙끙댔다. 온몸이 뜨거워졌다가 서늘해지길 반복했다. 권수혁에게 꽉 쥐어진 엉덩이라든가, 그의 두툼한 허벅지와 완전히 밀착된 사타구니에서도 형언할 수 없는 저릿한 감각이 간질간질하게 밀려 올라왔다. 몸을 비틀어 피할수록 더 고집스럽게 혀와 목을 핥는다.
주완은 한참 만에야 간신히 권수혁을 밀어 냈다.
“잠깐만요.”
권수혁이 그제야 고개를 들고 눈을 맞춰 왔다. 새카만 눈동자에 전에 없던 열이 들끓고 있었다. 치솟는 욕구를 참기 버거운지 턱과 이마에는 굵직한 핏대마저 일어섰다. 씨근덕대는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면목이 없었다.
“할 말이 있어요.”
권수혁은 애써 모든 사념을 물리치고 주완에게 주목했다. 소용없게도 주완이 다시 입을 떼서 말을 잇는 순간, 또다시 시선이 그의 도톰한 입술에 고정됐다.
“말해 봐.”
“전에 살았던 곳에 가 보고 싶어요.”
“전에 살았던 곳?”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죽 시골에 살았거든요. 한 번쯤, 다시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디지, 그게?”
“기억은 안 나요, 전혀.”
“…….”
주완은 곧 입을 다무는 권수혁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는 잠시 어떤 생각에 잠긴 듯했다. 역시 어려운 일일까?
포기하려는데, 권수혁이 대뜸 침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워낙 거침없는 움직임이라 얼른 따라가 봤다.
권수혁이 주방으로 들이닥쳤을 즈음, 전미남은 준비된 식사 거리를 식탁에 내려놓고 있었다. 권수혁은 무슨 일이십니까, 하는 그에게 가타부타 설명 없이 지시했다.
“박주완이 어린 시절에 살았다던 데가 어딘지 알아봐.”
“네.”
전미남은 구태여 이유를 묻지 않았다.
권수혁을 쫓아 나왔던 주완은 얼떨떨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아직 다녀와도 좋다고 허락받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그곳을 직접 찾아 주기까지 하다니, 어떻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야 할지.
고민 끝에 입을 떼려던 찰나, 식탁 위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권수혁이 선수를 쳤다.
“그리고 내일, 수저도 한 세트 더 사 와.”
주완의 몫으로 놓인 일회용 수저와 나무젓가락이 못내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전미남은 군소리 없이 알겠습니다, 했고 주완은 괜스레 제 가슴 부근을 두드렸다. 그런데도 속 깊은 곳에서 퍼지는 간질간질한 기운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
차가 멈춰 서자, 우형석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의 차는 어느 건물 앞에 정차해 있었다. 우형석도 잘 아는 곳이었다. 원래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2층짜리 낡은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제법 근사해 보이는 10층짜리 신축으로 탈바꿈했다. 모르긴 몰라도 건물주의 주머니 사정이 꽤 괜찮은 모양이었다.
“형님, 도착했습니다.”
“알아.”
뒤로 깊이 기댔던 상체를 다소 힘겹게 일으켰다. 조수석의 수하가 얼른 먼저 내려 문을 열어 주었다. 그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자 아직 아물지 않은 복부의 상처가 압박되면서 묵직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런대로 참을 만했다.
장철민이 보낸 청부업자들을 상대하다 얻은 상처였다. 막상 다쳤을 땐 되갚아 주겠다는 일념에 아픈지도 모르겠더니, 그 여파가 제법 오래갔다.
그때의 일로 자금줄마저 뚝 끊겼다. 우형석의 구역 안 가게들은 입에 풀칠하고 살기도 어렵다며 여전히 수금에 비협조적이고, 근래에는 그마저 호시탐탐 노리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자금난에 조직을 이탈하려는 놈들까지 생겼다. 이러나저러나 사람을 모으고, 견고하게 하는 건 돈뿐이었다. 그러니 이런 식의 호출조차 달가울 수밖에.
1층으로 들어서자 경비들이 우형석과 무리를 대놓고 힐금거렸다. 상부에서 미리 전달받은 바가 있는지, 그 앞을 가로막지는 않았다. 그저 그들 무리가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내빼고 유심히 볼 따름이었다. 우형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런 식의 시선마저 그를 즐겁게 했다.
무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8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긴 복도가 나타났다. 그곳을 따라가니 비서실로 연결됐다.
책상에 앉아 있던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례지만, 어떻게 오셨습니까?”
“조 대표님과 만나기로 했는데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우형석이라고 합니다.”
모든 대답은 우형석의 수하가 대신했다. 비서는 스케줄을 확인하더니, 사장의 집무실로 인터폰을 넣었다.
“들어오시랍니다.”
비서는 친히 무리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널찍한 응접실을 지나자, ‘사장실’이라는 간판을 내건 큰 양 문이 나타났다. 비서가 문을 노크했다.
곧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우형석은 수하들을 응접실에서 대기시켜 놓고 홀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지간히 급한 용무인지, 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의 사내가 문 앞까지 걸어 나와 우형석을 맞이했다.
“오랜만이네, 우 사장.”
“잘 지내셨습니까, 대표님.”
“보다시피. 어이, 여기 마실 것 좀 내오지.”
“네.”
비서가 극진히 인사한 후 문을 닫고 나갔다.
그 직후 두 사람은 근처의 소파 자리로 옮겨 앉았다. 넓은 집무실에는 경매에 부치면 집 한두 채 값 정도는 거뜬할 법한 미술품들이 널려 있었다.
책상 위에는 ‘대표 조중만’이라고 새겨진, 옥으로 깎아 만든 명판이 자리했다. 대부업을 할 때까지만 해도 온갖 벌레가 들끓고, 자장면 냄새가 빠지지 않던 비좁은 사무실이었는데. 몇 년 전 전업을 했다더니, 몰라보게 성공한 듯했다.
조중만은 우형석을 부른 목적을 밝히기 전에 관심도 없을 안부부터 물었다.
“자네, 요즘 통 얼굴이 안 보인다고 하던데. 대체 어디서 어떻게 지냈던 거야?”
“좀 자빠져 있었습니다. 난데없이 벌레 같은 것들이 꼬이는 바람에.”
“그래? 많이 다쳤나?”
“아뇨. 멀쩡합니다. 벌레들도 잘 처리했고요.”
“여전하군.”
“대표님은 사업이 나날이 번창하시는 모양입니다? 들리는 얘기론 벌어들이는 돈을 주체할 수 없어서 화장실에서도 쓰신다던데요?”
“하하하, 다들 과장이 지나쳐.”
조중만이 잔뜩 부푼 배를 들썩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즈음 노크 소리와 함께 전의 그 비서가 들어왔다. 그러곤 테이블에 커피 두 잔을 내려놓았다. 조중만은 그가 다시 나가길 기다렸다가 본론을 꺼냈다.
“일이 그렇게까지 잘 풀리는 건 아니야. 좀 될 만하면 자꾸 물꼬를 틀어막는 눈엣가시가 있어서. 새로 거래처를 뚫으려고 해도 그놈 때문에 쉽지가 않고, 기존 거래처들까지 은근슬쩍 그쪽으로 갈아타려는 것 같단 말이지.”
우형석은 옅게 웃으며 조중만을 바라봤다. 거기까지만 듣고도 그가 자신을 부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형석에 관한 세간의 평가는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쥐를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다 태운다는 옛말의 전형인 까닭이었다. 그래서 알 만한 사람들은 급한 용무가 있어도 우형석과의 거래를 피하려 들었다.
다만 정 처리해야 할 일이 까다롭고, 확실한 끝맺음을 원할 땐 그러한 후환을 감수하고라도 우형석을 부르곤 했다. 그건 곧 조중만의 ‘눈엣가시’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조중만과는 그가 사채업자일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아직 우형석이 제 조직을 꾸리기 전에, 이따금 그의 호출을 받아 채무자들에게서 돈을 받아 오곤 했다. 두 사람의 공생은 우형석의 조직이 커지고, 조중만이 무역업으로 업종을 변경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렇다고 두 사람간에 특별한 의리가 있는 건 아니었다.
조중만의 사업은 표면적으로는 무역업이지만, 따지고 보면 밀수에 가까웠다. 품종은 딱히 가리지 않았다. 온갖 폭약과 총포에서부터 미술품, 보석, 마약, 그리고 멸종 위기의 동식물까지. 수요가 있다면 사람까지도 거래하곤 했다.
밀수품의 경우 부르는 게 값이니 부를 축적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래서 여태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순항했을 테고. 지금까지 연락 한번 없다가 다급히 우형석 자신을 부른 걸 보면 당면한 문제가 제법 심각한 모양이었다.
“어떤 놈입니까? 그 눈엣가시는.”
“역시 자네는 시원시원해서 좋아. 그런데 나도 그자에 관해 아는 게 이름뿐이라서 말이야.”
“한 번도 면상을 본 적이 없단 말씀입니까?”
“면상이야 조사하면 다 나오겠지만,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어. 별다른 소문도 없고. 원하는 사람한테 원하는 물건을 정확하게 구해 준다는데, 단순히 그것 때문에 이쪽을 꽉 잡고 있는 건지 모르겠더라고? 아직 젊은 놈이란 얘기가 파다해. 그런데 제대로 얼굴을 봤다는 놈은 또 드물고. 뭐, 거슬리는 놈은 족족 제거해 버린다니,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지. 나만 놈이 거슬리겠어? 다들 섣불리 제낄 생각을 못 하는 것뿐이지.”
“그래서, 그 새끼 이름은 뭡니까?”
“백도운이라고 하네.”
“알겠습니다. 일단 따로 뒷조사 좀 해 보죠. 그리고 이번 사례는 톡톡히 받을 겁니다.”
“아무렴. 그저 제거만 잘해 줘.”
“그럼.”
우형석은 바로 일어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장철민에게 한 푼도 건지지 못해 내심 아쉬웠던 차에, 이런 의뢰가 들어오다니 운이 좋다.
“백도운이라….”
유일하게 받은 정보를 되새겨 본다.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복도를 지나는 우형석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