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드리나무에 걸린 그네는 잔바람에도 가벼이 흔들렸다. 거기에 앉아 마을을 굽어보면 사람들이 새끼손가락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할아버지의 한옥은 마을 가장 안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저녁때가 되면 가장 먼저 연기를 피워 올리던 곳도 그곳이었다.
짙은 흙냄새가 배인 청아한 공기를 폐 속 가득 들이마시며 정신없이 뛰어놀다 보면 손이며 얼굴이 금세 시커멓게 더러워지곤 했다. 그런 꼴로 밥상머리에 슬그머니 들어가 앉아도 할아버지는 혼내긴커녕 주름진 얼굴에 더 깊은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샐쭉 따라 웃으며 숟가락을 들라치면 강릉 할머니가 손을 잡아채 수돗가로 이끌었다. 뽀득뽀득 손을 닦고, 강릉 할머니의 검사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당연하게만 여겼고, 당연하게 이어지던 일상이었다. 그 삶이 못내 잊지 못해 두고두고 그리워할 추억이 되리라곤, 지독한 악몽에 덧입혀져 그 악몽을 더 잔인하고 끔찍하게 만들어 버리리라곤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
천천히 두 눈을 떠올렸다. 먹먹하게 목이 잠겼다. 악몽을 꾼 게 아닌데도 가슴을 에는 듯했다. 너무 행복했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어서.
아직 동이 트지 않았는지 사위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가득했다. 서서히 제 감각을 되찾는 귓가에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하나는 권수혁의 것이고, 또 하나는 재규어의 것이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둘 사이에 꽉 끼어 버렸다.
조금 불편해서 살짝 몸을 뒤척였다. 곧 권수혁의 몸이 어깨에 닿았다. 깼을까 싶어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도 권수혁의 두 눈은 굳게 닫혀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게 힘겹더라니, 허리에 내둘러진 팔의 무게가 상당했다. 조심조심 제 허리에 감긴 권수혁의 팔을 풀어냈다. 그 아래쪽을 차지한 재규어의 꼬리도 마저 잡아뗐다. 그 참에 재규어가 벌떡 고개를 들며 샛노란 눈동자를 확 떠올렸다.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수남아, 더 자.”
재규어의 두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굵직한 목덜미를 토닥토닥해 주었다. 잠시 큰 몸을 꿈틀거리던 놈은 저를 찬찬히 쓰다듬어 주는 노곤한 손길에 다시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재규어가 완전히 잠든 걸 확인하고 조용히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권수혁의 얼굴이 한결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새삼스럽지만, 잘생겼다. 짙고 날렵한 눈썹도 그렇고, 깊으면서 날카로운 눈매도 인상적이었다. 우뚝 솟은 콧날과 굳게 다물린 입술, 그리고 전체적인 얼굴선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깎인 조각상 같았다. 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잘 빚어진 얼굴을,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권수혁과의 스킨십이 거북하지 않은 건 단순히 그 때문일까.
주완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구르며 인중과 그 아래쪽의 입술을 차례로 담아냈다. 차가운 인상을 완성하는 얇은 입술은 아이러니하게도 따뜻하고 포근했다. 주완은 저도 모르게 제 도톰한 아랫입술을 살며시 머금었다.
권수혁이 주완 자신을 어떤 감정으로 대하고 있는지 안다. 말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라든가 완연히 달라진 눈빛, 행동 따위가 틀림없다고 확신을 줬다. 권수혁의 애정 공세는 워낙 직접적이라 착오의 여지조차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주완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니다. 오랫동안 세상과 단절된 탓에 좀 늦되고, 뭔가를 수용하는 게 남들보다 느릴 뿐이었다. 그러니 권수혁이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이제까지 누구도 주완 자신에게 그런 걸 원했던 적이 없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그렇게 온몸으로 저를 갈구하면서 막상 손대는 건 자제하고 인내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너무 어렵고 막막했다. 권수혁이 자신과 같은 남자라거나, 자유를 되찾아 준 은인 아닌 은인이라는 사실을 떠나 그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권수혁을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권수혁이 제게 더 웃어 줬으면 좋겠다.
권수혁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상념에 빠졌던 주완은 곧 움찔하며 몸을 굳혔다. 미처 깨닫지 못한 틈에 제 손이 잠든 권수혁의 얼굴 쪽으로 뻗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재규어를 쓰다듬을 때처럼 망설임이 없었다.
주완이 얼른 제 손을 거둬 내려던 순간, 차분히 감겨 있던 권수혁의 두 눈이 천천히, 깨끗하게 떠졌다. 권수혁은 코앞까지 다가온 주완의 손을 말없이 응시했다.
“아, 일어났어요?”
“…….”
권수혁은 아무런 대꾸 없이 눈을 들어 주완을 봤다. 절반의 어둠 속에서도 그의 새카만 눈동자만은 또렷해 보였다. 길게 흘러내린 앞머리가 눈을 찌를 듯 말 듯 했다.
한 번만 만져 봐도 될까. 주완은 허공에 애매하게 뻗어졌던 제 손을 서서히 권수혁의 매끈한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러곤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짝살짝 넘겨 주었다.
권수혁은 주완의 손이 제 얼굴을 만지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마를 간질이던 주완의 손이 슬그머니 눈썹을 덧그려 볼 즈음에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두 눈마저 폭 내리감았다.
주완은 손끝의 감각에만 의존해 권수혁의 오뚝한 콧대를 따라 내려갔다. 인중을 지난 손가락이 마른 입술에 살짝 걸리자, 권수혁이 불쑥 팔을 뻗어 주완의 뒷덜미를 감싸 당겼다. 주완의 상체가 급격히 앞쪽으로 기울어지면서 그의 윗입술이 권수혁의 아랫입술과 맞닿았다. 이어 뜨거운 혀가 꾹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서로의 입술이 완전히 엇갈린 상태라, 뭉텅 밀려들어 온 혀는 주완의 혀 밑을 샅샅이 훑어 나갔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함빡 머금고, 혀끝으로 혀 밑을 갉작갉작 긁어서 자극한다. 금세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살짝살짝 부대껴 오는 혀를 쪽 빨아 당겼을 땐 주완에게서 낮게 앓는 소리가 샜다.
그러자 권수혁이 아플 만큼 세게 흡착하던 주완의 혀를 놓아주었다. 이어 질척해진 주완의 혀에 제 혀를 가만가만 감미롭게 뒤섞었다. 바짝 긴장됐던 주완의 몸이 조금씩 누그러지며 한결 편안하게 권수혁의 혀를 받아들였다. 타액도 달짝지근하게 졸여졌다.
“…하아.”
주완이 살짝 고개를 떼고 권수혁을 내려다봤다. 권수혁은 여전히 그의 목덜미를 붙들고 있었지만, 전처럼 힘으로 끌어당기지는 않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이 맞물렸다. 기어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군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전미남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주 늦지 않고서야 권수혁이 알아서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그지만, 밖에 사람이 있는데 더는 그 상태를 지속할 수 없을 듯했다. 어느 참에 깬 재규어가 샛노란 눈알을 빛내며 두 사람을 빤히 지켜보고 있기도 했다.
주완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제 목을 감싼 권수혁의 손을 붙들어 천천히 거둬 냈다. 그러자 재규어가 앞발을 세워 상체를 일으키더니 불쑥 제 주둥이를 주완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조금 전 권수혁과 주완이 제 눈앞에서 벌인 행위를 모방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주완은 전혀 의심도 없이, 그저 놈의 수염이 간지럽게 닿자 놈의 얼굴에 제 뺨을 비비적댈 따름이었다. 재규어가 다시 주둥이를 들이밀 때도 여느 때처럼 놈의 양 볼을 주물럭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재규어는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주완이 저를 쓰다듬어 주자 눈을 가늘게 뜨며 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완은 놈의 머리에서부터 등까지를 길게 쓰다듬어 주면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권수혁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대뜸?”
“여러 가지로, 정말 고마워요.”
고향에 다녀오라고 흔쾌히 허락해 준 것도, 더는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지 않도록 편안한 잠자리를 제공해 준 것도, 그리고 고작 주완 자신에게 아무도 들이지 않았던 곁을 허락해 준 것까지.
***
어린 시절 아버지나 어머니에 관한 기억은 없었다.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할아버지와 살았다. 그곳은 한적한 시골이라, 주완 또래의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있는 친구들도 부모가 맞벌이 등의 사유로 조부모에게 맡겨 놓은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래서 부모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했다. 생일이나 명절에 친구들을 만나러 오는 그들의 부모들을 볼 때면 왜 주완 자신에겐 할아버지뿐일까 종종 의문을 품긴 했지만.
할아버지만 있으면 상관없었다. 부모의 애정을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조부의 애정과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집안일을 돌봐 줬던 강릉 할머니와 최 씨 아저씨까지, 부족할 것 하나 없는 따뜻한 가족이었다. 더 바랄 것도 없었다.
눈을 뜨면 뒤뜰에 심은 꽃과 나무에 물을 주는 것부터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금세 허기가 져서 밥상머리에 앉으면 강릉 할머니에게 쫓겨나 세수를 하러 가야 했다. 고양이처럼 대충 눈과 입가만 씻고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그즈음이면 친구들이 집으로 찾아와 주완을 불렀다. 마지막 한술을 입에 넣고서 시발을 구겨 신고 신나서 달려 나갔다.
또래들과는 장난감도 없이 흙바닥에서 뛰고 뒹굴며 놀았다. 공부를 강요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웃음이 끊이지 않던 시간이었다. 하루를 보내는 게 아쉬웠고, 밤이면 다음날이 얼른 오지 않아서 애가 탔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줄 알았던 일상이었다.
과거를 떠올리며 창밖으로 지나가는 앙상한 나무들을 의미 없이 쫓았다. 머지않아 차 앞에 낡은 시골 버스 한 대가 나타났다. 버스는 새카만 매연을 뿜어내며 느릿느릿 움직였지만, 전미남은 조용히 그 뒤를 따를 뿐 추월하려 들지 않았다. 버스가 정류장도 아닌 곳에 서서 손님을 내려 주고 태울 때조차 차분히 기다렸다.
인적이 드문 시골 마을의 낡은 버스 정류장을 몇 개 지나자, 이정표마저 사라졌다. 전미남은 차의 속력을 더 낮추며 주완에게 확인해 물었다.
“조사한 바로는 이 근방입니다. 혹시 기억납니까?”
“글쎄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20년이나 지나서 기억하곤 다른 부분이 많을지도 모릅니다.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둘러보시죠.”
고개를 끄덕이고 집과 나무, 산세 등을 유의 깊게 살폈다. 기억 속 마을은 짙푸른 녹음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앙상한 나뭇가지나 휴지 중인 논밭이 낯설기만 했다. 구옥을 허물고 새로 지은 집들도 많아 좀처럼 확신이 서지 않았다.
전미남의 차는 마을 입구에 자리한 구멍가게 앞에 멈춰 섰다. 시동을 끈 전미남이 차에서 내려 가게로 향했다. 주민에게 수소문해 볼 작정인 듯했다. 가게 천장이 워낙 낮아 목을 구부정하게 굽히고 안으로 들어간다. 하지만 안에 사람이 없는지, 금세 돌아 나왔다. 그러곤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가게 주인을 찾았다.
뒤늦게 따라 내린 주완도 그 자리에서 천천히 한 바퀴 돌면서 주변의 풍경을 관찰했다. 곧 뭔가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저건….”
마을을 굽어볼 수 있을 만큼 높은 언덕이었다. 그곳에 오롯이 선 느티나무도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그 나무에 걸려 있던 그네는 온데간데없어졌지만, 그때 그 나무가 분명했다.
주완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언덕을 향해 걸어갔다. 다소 느리게 떨어지던 걸음에 조금씩, 조금씩 속도가 붙더니 이내 뛰기 시작했다. 눈길은 시종 언덕 위 느티나무에 고정된 채였다. 금세 다리가 묵직해지고, 숨도 가빠 왔지만 이까지 악물고 언덕을 올랐다. 서둘러 도착하지 않으면 금방 사라져 버릴 허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맹목적이었다.
비로소 언덕 위에 올라서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골랐다. 폐부가 찢길 것처럼 욱신거렸다. 가게 주인을 찾느라 뒤늦게 주완을 쫓아왔던 전미남도 호흡을 가다듬으며 주완의 동태를 살폈다.
주완은 더 굵고 커다래진 나무 앞으로 다가가 찬찬히 둘러봤다. 그러다 제 허리 즈음에 새겨진 글자를 발견하고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세월이 흐른 만큼 글자도 무뎌져 있었다. 그 탓에 뭐라고 새겨진 건지 정확히 읽긴 어려웠지만, 언뜻 보기엔 누군가의 이름인 것 같았다. 그런 글자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 각각이 모양도, 새겨진 높이도 다른 것으로 봐서 여러 명이 키를 재고, 그 위에 자신의 이름을 남겨 둔 듯했다. 그중에 주완 자신의 이름도 있을지는 모르겠다.
손을 뻗어 밋밋해진 글자를 만지작거렸다.
“여기예요. 여기가 맞아요.”
“확실합니까?”
“네. 여기에서 내려다보면 온 마을이 다 보였어요. 최 씨 아저씨가 마당을 쓸러 나오는 것도, 강릉 할머니가 동네 아주머니들하고 같이 음식들을 만들고 나누는 것도.”
주완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사위를 둘러봤다. 전미남의 차가 세워진 구멍가게도 보이고, 크고 작은 논두렁도 보이고, 과수원, 비닐하우스, 우사, 농기계는 물론, 개 한 마리가 마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모습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이어서 야산 하나를 병풍처럼 끼고 있는 큼직한 한옥 한 채도 시야에 담겼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조금 낡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담담하고 고즈넉한 모습이었다.
주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한옥을 내려다봤다. 금방이라도 철없는 손자를 불러들이려 할아버지가, 빗자루를 든 최 씨 아저씨가, 소쿠리를 옆에 낀 강릉 할머니가 그 대문을 열고 나와 볼 것만 같았다.
“직접 가서 보시겠습니까?”
“…네.”
주완은 고민하지 않고 쉼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은 곧바로 언덕을 내려와 위에서 보았던 한옥 쪽으로 걸어갔다. 한낮이었지만, 길가에는 사람이 없었다. 휴지기라 그럴 터였다.
전미남이 사전에 조사해 본 바로는 어린 시절, 주완이 살았다던 한옥은 그의 친조부가 사망한 직후에 매물로 나왔고, 곧 사겠다는 사람이 생겨 비싼 값에 팔렸다. 예상대로 그 매매 계약을 체결한 사람은 주완의 친모였다. 그 뒤로 계속 소유자가 변경되다가 5년 전, 지금의 주인에게 넘어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한옥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으리으리했다. 꽤 오래된 건축물인데도 담벼락 하나 허물어지지 않았고, 대문까지도 팬 곳 없이 굳건했다. 처마에는 거미줄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집주인이 사람을 시켜 꼼꼼히 관리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신기했다. 현재 집주인의 주소는 그곳으로 등록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실 한옥이 주완의 친모에 의해 매매된 이후, 그곳에 거주했던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소유권만 빈번히 등록됐다가 소멸하길 반복했을 따름이었다. 전미남으로선 현재의 집주인이 몇 년째 사 놓기만 한 집을 그리 공들여 관리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주완은 혹시나 하고 문패를 올려다봤다. 그곳에 새겨진 한자는 주완이 아는 것과 달랐다. 슬쩍 밀어 본 대문 역시 안에서 단단히 잠겨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담벼락 너머나마 힐긋거리는데, 등 뒤에서 난데없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주완보다도 먼저 그 기척을 감지한 전미남이 홱 뒤를 돌아봤다.
30대 남짓으로 보이는 사내가 두 사람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옷차림으로 보아 마을 주민인 것 같았다. 전미남은 평소처럼 정중하게 꾸벅했다.
“여기 사십니까?”
“그런데요. 댁들은 누구시죠? 누군데, 남의 집을 얼쩡거리는 겁니까?”
“아, 그럼 혹시 이 집 주인이십니까?”
“…아뇨. 그건 아니지만요.”
사내와 전미남의 대화가 길어지자, 주완도 슬쩍 뒤를 돌아봤다. 제 얼굴에 짙은 그림자를 만드는 전미남을 잔뜩 경계하던 사내가 주완을 일별했다. 금세 떨어져 나가려던 그의 시선은 다시 돌아와 완전히 붙박였다. 놀라서 멍해졌던 그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진다.
“박주완?”
“…네?”
“주완이 맞지? 맞네, 박주완. 나 모르겠어? 선용이잖아, 이선용.”
“선용이?”
“그래, 인마. 기억 안 나? 과수원집 이선용이라고. 너 이사 갈 때까지 맨날 같이 놀았잖아.”
“아!”
흐릿하던 기억 속에서 친구 한 명의 얼굴이 단박에 떠올랐다. 그때보다 젖살도 빠지고, 선도 굵어지고, 수염 자국까지 생겼지만 순한 인상만은 여전했다. 이른 봄이면 올챙이를 잡겠다며 개울가에서 손발이 퉁퉁 불 정도로 종일 같이 참방거렸고, 여름이면 발가벗고 계곡물에 뛰어들어 지칠 때까지 물장구를 쳤다. 가을에는 곤충을 잡으러 해가 떨어지도록 산으로, 들로 쏘다니곤 했다.
순간 온통 회색빛이었던 추억의 한 부분이 선명한 색감으로 되살아나는 듯했다. 얼떨떨하던 주완의 얼굴이 서서히 누그러지며 선명한 웃음을 꽃피웠다. 이선용도 금세 하얀 이를 드러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성큼 다가온 그는 주완의 두 손을 덜컥 잡고 짤짤 흔들며 반가워했다.
“야, 이 새끼야.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응? 연락 한번을 안 하고. 이사 가고 너 어떻게 지내는지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너도 통 소식이 없어서 죽은 줄 알았잖아, 인마!”
서운함을 토로하는 순진한 눈매가 은근히 젖어 들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기어이 울 것 같아서 주완은 그저 미안, 할 수밖에 없었다.
이선용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며 주완을 자신의 집으로 이끌었다. 전미남은 두 사람의 해후를 방해하지 않으려 멀리 떨어져서 따라왔다.
이선용이 미리 쪄 놓은 고구마와 옥수수, 식혜를 가져와 주완에게 대접했다. 멀찍이 서 있던 전미남까지 넉살 좋게 불러들여 손수 고구마를 쥐여 주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야? 영감님 뵈러?”
“응. 지금까지는 와 볼 수가 없었거든.”
주완은 이선용이 내미는 옥수수를 건네받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선용은 어디 갇혀 있기라도 했어, 하며 속 모르는 핀잔을 던졌다.
“일이 좀 많아서. 넌 어떻게 지냈어?”
“나야 뭐,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아버지 돌아가시고, 마을 어른들 도움으로 과수원 이어받아서 사과 농사 짓고 있지. 넌? 입에 풀칠은 하면서 사는 거야?”
“응.”
“근데 왜 피죽도 못 얻어먹는 몰골이냐? 예전에 그 기세 좋던 박주완은 다 어디 갔어?”
옥수수를 베어 물던 주완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옅게 웃었다. 고개도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아니야, 지금은 정말 잘 지내. 좋은 사람, 만났거든.”
“오? 결혼할 사람?”
이선용의 까무잡잡한 낯에 얄궂은 표정이 걸렸다.
“…그냥 계속 옆에 있었으면 싶은 사람.”
“새끼, 좋아 죽네. 나중에 기회 되면 인사나 시켜 줘라. 여기도 한번 데리고 오고.”
“응, 그럴게.”
이선용은 이렇게 만났으니 밥이라도 먹고 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부엌으로 가려던 그는 문득 뭔가를 떠올리곤 주춤했다.
“참, 그러고 보니까 그 사람 만나 봤어?”
“그 사람? 누구?”
“임 변호산가 하는 양반 말이야.”
“임 변호사?”
“뭐야. 아직 못 만났어?”
이선용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방 안 서랍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주완은 아리송한 눈빛으로 잠자코 그를 지켜봤다.
전미남의 낯빛은 딱딱하게 굳었다. 오랜만에 만난 이선용이 대뜸 ‘임 변호사’라는 사람을 만나 봤느냐고 묻는 건 그 ‘임 변호사’가 수시로 주완을 찾아왔고, 이선용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에게 그의 소식을 물었으리란 추정을 가능케 했다.
본디 변호사가 사람을 찾는 건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대체 무슨 일 때문인지, 행여 그 일에 우형석을 비롯한 혈육들이 연관된 건 아닌지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내 이선용은 어렵게 찾은 명함 한 장을 주완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그 변호사란 양반 연락처.”
“그게 누군데?”
“뭐, 나한테는 영감님 담당 변호사라고 하던데?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더라고.”
이선용이 시종 ‘영감님’이라고 지칭하는 건 주완의 할아버지였다. 조부가 살아 계셨을 때 마을 사람들 모두가 조부를 그렇게 불렀었다.
할아버지가 담당 변호사를 두었는지는 모른다. 그런 걸 알기에 당시의 주완은 너무 어렸다.
이선용에게서 건네받은 명함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거기에는 ‘임정식’이란 이름과 함께 연락처 두 개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주완은 그 연락처를 뚫어지게 보다가 일단 명함을 주머니 안에 잘 집어넣었다.
이선용은 시금치된장국을 끓여 뚝딱 점심을 차렸다. 갓 따 온 풋고추와 상추, 쌈장, 장아찌 두어 가지와 김치, 무말랭이뿐인 소박한 밥상이었다. 그런데도 주완도, 전미남도 한 공기를 금세 비웠다. 어떤 진수성찬도 그처럼 푸근하진 않을 듯했다.
식사 후에는 이선용의 안내를 받아 한옥 뒤편의 야산으로 올라갔다. 그곳에 할아버지의 무덤이 있다고 했다.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어머니 손에 이끌려 그녀의 집으로 갔고,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간 할아버지의 묘를 돌보긴커녕 한번 찾아뵙지도 못했다.
이선용은 그 뒤로 마을 주민들이 순번을 정해 조부의 묘를 관리하고 있다고 했다. 누구 하나 불평 없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마운 손길이 계속돼 왔단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야산에는 좁은 길 하나가 나 있었다. 오랜 기간, 사람들이 지나다닌 흔적이 고스란히 길로 남은 셈이었다.
그 발자취를 쫓아가니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자리가 나왔다. 볕이 가장 잘 드는 위치에 묘소가 있었다. 잡초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무덤 앞에는 비석도 하나 세워진 상태였다. 새겨진 글씨가 온통 한자뿐이라 정확한 문구는 헤아릴 순 없었지만, 할아버지의 존함인 세 글자만은 분명히 알아봤다. 주완은 깊이 새겨진 할아버지의 존함을 가만히 어루만져 보았다. 손바닥에 온기가 고여 드는 것 같았다.
이선용은 묘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갈하게 고치더니 극진히 절했다. 주완도 그를 곁눈질하며 돌아가신 할아버지께 처음으로 절을 올렸다. 전미남은 두 사람의 뒤에서 묵념하듯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
절을 마친 주완이 조부를 불러 봤다.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가슴 안쪽에서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먹먹하게 퍼졌다. 괜스레 속이 울컥하며 코끝이 속절없이 아려 왔다.
이선용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분주히 묘 주변을 돌며 자라다 만 잡초를 뽑았다. 전미남은 여전히 주완의 등 뒤에 서서 유난히 작아진 듯한 그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볼 따름이었다.
주완은 무릎걸음으로 무덤 가까이 다가가 두 팔 가득 봉분을 끌어안았다. 콧속으로 수분을 잔뜩 머금은 흙냄새가 밀려들었지만, 오히려 그 덕에 마음이 한층 편안해졌다. 스르륵 두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망울망울 젖어 들더니 금세 도르르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조부의 품처럼 따뜻한 햇볕이 그의 등을 하염없이 다독여 주고 있었다.
마을을 떠나는 길에 주완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20년 만에 찾아뵌 조부의 봉분을 끌어안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아마 만감이 교차했을 터였다. 감격스러운 한편 애달팠을 테고, 서러움이 북받치면서도 뭉클한 푸근함을 느꼈을 거였다.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주완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전미남의 눈동자가 옆으로 굴렀다. 주완이 들여다보고 있는 건 이선용에게서 건네받았던 명함이었다.
전미남은 다시 정면을 주시하면서 넌지시 주완의 의사를 확인했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네?”
“그 변호사라는 사람이요.”
“글쎄요.”
주완은 확신 없이 명함만 내려다봤다. 그곳에 적힌 글자와 숫자들이 붕 뜬 것처럼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현실감이 없는 느낌이었다.
“조금이라도 궁금하면 만나 보는 게 좋을 겁니다. 안 만나면 계속 의문만 남을 테니까요. 기회가 언제까지 열려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 변호사, 머리가 하얗게 셌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미남의 말마따나 임정식이란 변호사도 이미 나이가 지긋하다면 언제까지고 주완을 기다려 줄 수 없을 터였다. 주완은 전미남을 물끄러미 보다가 다시 명함으로 시선을 돌렸다. 작은 종이를 한참 주저하듯 만지작거렸다.
“큰 도움은 못 드려도 전화라면 대신 걸어 드릴 수 있습니다.”
주완의 입가에 소리 없이 웃음이 번졌다. 어째서인지 전미남의 그 한마디가 어떤 위로보다 든든하게 와 닿은 까닭이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권할 만큼 주완 자신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했던가 보다.
새삼 임정식에게서 전해 들을 소식이 두려웠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들려줄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모르긴 몰라도 어린 주완은 알지 못했던 속사정을 듣게 될 터였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몰랐다.
물론 그저 듣기 좋고 반가운 얘기는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몰라서 상처 입지 않는 것보단 다소 충격적이더라도 모든 걸 아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지금의 주완 자신에게 남긴 말이 뭔지 듣고 싶었다.
“그럼 미남 씨, 옆에 있어 주세요.”
주완이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전미남은 든든한 목소리로 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권수혁은 외부 미팅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차 안에서도 업무 관련 서류를 보거나 실시간 뉴스를 확인했을 텐데, 오늘만큼은 차창 너머에 막연한 시선을 던졌다.
지금쯤이면 주완이 고향에 도착했겠지 싶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옛집에도 가 보고, 운이 좋으면 죽은 조부의 묘까지 찾아뵀을 거였다. 조부와 함께 살던 시절의 주완은 어땠을까. 지금보다 더 생기가 넘쳤을까. 여느 아이들처럼 사소한 일에도 까르르 웃고, 활력 넘치게 뛰어다녔으려나.
20년이나 지난 지금, 그곳을 다시 찾은 감회가 어떨지 권수혁으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슬퍼했을까. 울진 않았는지. 쓰게 미간을 구겼다. 종일 주완을 향한 걱정과 상념으로 도통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이럴 거라면 차라리 직접 주완을 데리고 가 볼걸 그랬다.
온통 주완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언제부터 시도 때도 없이 누군가를 떠올리고 안절부절못하는 머저리가 된 건지. 그것도 남자를 상대로. 어이가 없다.
새삼 주완의 처지를 동정하지는 않았다. 권수혁 자신에게는 타인을 연민할 만큼의 여유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욕정을 해소할 길이 요원해 애먼 데 눈을 돌린 것도 아니었다. 맹세코 이제껏 단 한 번도 동성과 섹스할 마음이 들었던 적이 없다.
근원조차 불분명한 감정이었다. 워낙 돌발 행동을 자주 해서 으레 시선이 가긴 했지만, 마음이 조급해진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문득 돌아보니 그렇게 돼 있었다. 소리 없이, 기척도 없이, 시나브로 변화해 왔다.
전에 없던 갈증과 허기에 안달이 났다. 경험해 보지 않았던 미지의 존재라 자칫 탈이 날지도 몰랐다. 그렇더라도 한입에 삼켜 버리고만 싶다. 뭔가를 그렇게까지 갈망해 본 게 언제였던지 까마득했다.
“잠깐 멈춰.”
“네, 대표님.”
운전석의 사내가 영문도 모른 채 한쪽에 차를 세웠다. 정차한 곳은 초등학교에서 10m 남짓 떨어진 도로 위였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사내가 뒷좌석을 돌아보며 무슨 일이십니까, 했다.
권수혁의 눈길은 여전히 창 너머에 고정돼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니 작은 노점상이 보였다. 겨울철의 대표적인 간식인 붕어빵을 파는 곳이었다.
“가서 저것 좀 사 와.”
이어진 지시에 앞좌석의 두 사내가 서로를 마주 봤다.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해진 채였다. 군것질은커녕 식사도 자주 거르는 위인이 뜬금없이 붕어빵에 관심을 보이니 당황할 만도 했다.
그러나 권수혁은 착각이 아니라는 듯, 미적거리는 조수석의 사내를 보며 무언의 재촉을 했다. 사내가 알겠습니다, 하며 얼른 차에서 내렸다.
한참 만에야 돌아온 사내의 양팔에는 족히 서른 개는 넘어 보이는 붕어빵이 들려 있었다. 권수혁은 그가 건네는 봉투를 제 옆자리에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러곤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다시 창밖으로 내다봤다.
힐금힐금 권수혁의 기색을 살피던 사내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권수혁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번졌기 때문이다. 뭔가 기분 좋은 상상을 하는 듯했다.
주완과 전미남은 서울 근교의 한 고즈넉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삼면의 창으로 넓은 호수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었다. 평일에도 사람들이 꽤 많은 게, 주말이면 창가 자리를 엄두도 낼 수 없을 듯했다.
초조하게 시계를 힐금거렸다. 약속 시각이 임박한 까닭이었다. 어쩌면 오늘 안에 연락이 닿지 않을 줄 알았는데, 첫 시도에 임정식과 통화하게 됐다. 되도록 빨리 만나 봤으면 한다는 의사를 전하자, 그쪽에서 당장 오늘은 어떻겠냐고 물어 왔다. 그렇게 약속을 잡고 미리 와서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카페 앞 주차장에 한 대의 차가 들어왔다. 주완의 시선이 저절로 해당 차량을 쫓아 움직였다. 시동이 꺼진 차에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내렸다. 지레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이윽고 카페 문이 열리고, 종업원이 새로 온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내부를 한차례 둘러보던 노인은 자신을 빤히 보는 주완과 전미남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실례합니다. 혹시 박주완 씨?”
노인에게서 제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전미남도 덩달아 몸을 일으켜 꾸벅 인사했다. 노인 역시 두 사람에게 정중히 묵례하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제가 임정식이란 사람입니다.”
“안녕하세요, 박주완입니다.”
“그래요, 한눈에 알아보겠어요. 어릴 때 모습이 남아 있어.”
임정식은 눈을 접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어째서인지 주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악수를 마친 임정식과 주완은 곧 자리에 마주 앉았다. 전미남은 착석하지 않고 두 사람의 시중을 자처했다.
“마실 걸 주문하겠습니다.”
“아, 그럼 난 아메리카노로 부탁합니다.”
“저는 이거 한 잔 더 마실게요.”
“네, 그럼. 먼저 말씀 나누시죠.”
전미남이 자리를 뜨고, 임정식은 여전히 미소 가득한 얼굴로 주완을 요목조목 살펴봤다. 왜인지 그를 실망하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자세를 바르게 했다. 굳었던 얼굴도 애써 풀었다.
임정식이 입을 뗀 건 그러고 얼마가 더 지나서였다.
“영감님이 돌아가신 지도 벌써 스무 해가 지났네요. 당시에 박주완 씨는 장난꾸러기 꼬마였는데, 이젠 어엿한 청년이 됐군요. 그간 어디에서도 소식을 들을 수가 없어서 걱정했습니다.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저… 저를 잘 아시나요?”
“그럼요. 아마 박주완 씨는 날 모를 거예요. 영감님과는 오랜 인연이 닿아 댁에도 종종 찾아뵙곤 했지만, 박주완 씨랑은 스치듯 만난 게 전부니까요. 워낙 어렸잖아요, 그땐. 그래,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죠? 동생분하고는 연락하는 것 같지 않던데.”
“…동생이요?”
“왜, 어머니 쪽에 이부형제가 한 명 있지 않습니까? 박주완 씨를 만나러 등본상의 주소지로 먼저 찾아갔습니다. 그러다 우형석이라는 동생분하고 연락이 닿았어요. 그분께 박주완 씨 소재를 물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줄 수 없다더군요. 무슨 일이냐고 꼬치꼬치 캐묻기만 하고… 뭔가 석연치 않아서 찜찜하더라고요.”
“그 애랑은 교류 안 한 지 10년도 넘어서. 그런데 갑자기 절 왜 찾으셨는지….”
임정식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웃었다. 이어 뱉은 긴 날숨이 꼭 한숨 같았다.
“이 얘기를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영감님은 생전에 늘 박주완 씨를 염려하셨습니다. 영감님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박주완 씨를 보살펴 줄 사람이 없다면서요. 어떻게 해야 박주완 씨를 홀로 남겨 두더라도 마음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하셨죠.”
조부는 당신의 사후 주완이 겪게 될 고난을 예견했던 걸까. 어리고 천진난만한 손자를 보면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임정식은 자신의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러곤 그것을 주완에게 내밀었다.
“이걸 받아 주시겠습니까?”
“이게 뭐죠?”
“박주완 씨 친부의 유산입니다. 몇 달 전에 사망하셨죠.”
“친부라면 아버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거라곤 상상해 본 적도 없어서. 임정식은 그런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즈음 전미남이 돌아왔다. 임정식은 제 앞에 커피를 놓아 주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전미남은 주완 몫의 자몽티까지 내려놓고 물러나려 했다.
“전 차에 가 있겠습니다.”
“…아뇨.”
주완이 얼른 전미남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곤 임정식의 경계도 허물어뜨렸다.
“제가 많이 도움받고 있는 분이에요. 믿으셔도 돼요.”
임정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 커피로 입을 적신다. 곧 그는 주완이 할아버지께 들은 적 없던, 그의 아버지에 관해 털어놓았다.
“영감님께는 아드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늦은 나이에, 또 부인을 잃으면서까지 얻은 귀한 자식이었죠. 사람들은 영감님을 닮아 성품이 곧고 선했다고 그분을 기억합니다. 공부도 잘하는 수재였다고 해요. 그래서 문제가 되던 시기였죠. 시절이 하 수상해서 자식을 대학에 보냈던 부모들은 자식 걱정에 하루를 떨면서, 기도하면서 보냈습니다. 아마 영감님도 그랬을 겁니다. 아들 하나 보고 사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하루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안부 전화를 하던 아드님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하늘이 무심하게도 우려했던 일이 일어난 겁니다. 석 달이 지나고야 집으로 돌아온 아드님은 차마 형언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고 해요.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더 나은 농업 환경을 만드는 게 꿈이라던 젊은이가 하루아침에 혀가 뭉그러지고, 팔다리를 온전히 쓸 수 없는 신세가 된 거죠. 그뿐 아니라 시도 때도 없이 환청과 환각에 시달렸다고 하니, 당시에 영감님이 느꼈을 상실감은 누구도 감히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아픈 자식의 병시중을 드는 게 쉽진 않았을 텐데, 남의 손에 맡길 바에야 죽을 때까지 품 안에 두시겠다며 아드님을 줄곧 별채에 기거시키셨습니다.”
“…….”
순간 주완은 할 말을 잃었다. 너무 놀라서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아버지의 얘기를 들려준 적이 없었다. 게다가 별채와 연결된 쪽문 근처에는 얼씬도 못 하게 했다. 그 너머에 아버지가 계셨다. 고작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까맣게 몰랐다.
언제까지 그곳에서 사셨을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까지? 아니면 그 후로도? 모르겠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임정식은 착잡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당시 마을에는 영감님의 아드님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아드님과 친하게 지내기도 했고, 아드님의 심신이 불편해진 뒤로도 자주 찾아와 안부를 묻곤 했다죠. 영감님의 아드님도 그 청년과 함께 있으면 발작하지 않고 평온해져서, 영감님께서도 그와의 교류를 막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청년이 일하는 것보다 유흥에 관심 많은 한량이었단 거죠. 언젠가부터 조용하던 마을에 젊은 아가씨들이 나타났습니다. 누군가는 대학생들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어디 공단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라고 했고, 또 누군가는 유흥업계 종사자라고 하고… 이래저래 소문이 많았나 보더라고요. 여자들은 늘 두셋씩 짝을 지어서 찾아왔고, 그 청년을 만나고 갔다고 합니다. 그중에는 박주완 씨의 친모도 있었던 것 같고요. 물론 나중에 영감님과 마을 어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됐고, 문제의 청년이 마을을 떠나면서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았죠. 그러다 1년가량 지나서 박주완 씨의 친모가 영감님을 찾아왔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고서요. 한눈에도 영감님의 핏줄이란 걸 알 수 있었죠. 영감님의 아드님과 꼭 닮은 모습이었으니까요. 박주완 씨의 친모는 갓난아기를 영감님께 맡기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뒤 얼마의 돈을 받아 서울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물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거기까지 들으니 모든 정황이 파악됐다. 어째서 어머니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 두 손을 꼭 붙들고 언젠가는 주완 자신을 꼭 데려가겠다고 했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우형석만큼이라도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지 않았는지도. 주완 자신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랑해서 낳은 생명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뭘 두려워하셨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면 심신이 온전치 않은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양육권을 가져갈 확률이 높았다. 어머니가 원했던 건 핏줄 그 자체보다 함께 따라올, 할아버지의 유산이었겠지만. 그 밑에서 어린 손자가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게 될지 못내 불안하고 안타까우셨을 터였다.
“영감님은 끝까지 아드님을 곁에 두려고 했지만, 나날이 아드님의 병세가 깊어져서 결국은 요양 병원으로 보내시게 됐죠. 그게 박주완 씨가 다섯 살이었을 때의 일입니다. 영감님은 미리 당신이 사망했을 때 유산의 일부는 박주완 씨가, 그리고 그 나머지는 아드님이 상속받을 수 있게 해 두셨습니다. 영감님의 아드님이 사망하더라도 남은 유산을 유일한 혈육인 박주완 씨가 상속받을 수 있게요. 제가 박주완 씨를 뵙자고 한 건 그 때문입니다.”
임정식은 그 얘기를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주완은 조부에게서 친부에게로, 그리고 다시 자신에게로 물려 내려온 상자를 열어 봤다. 그곳에는 어느 은행 금고의 열쇠가 들어 있었다.
한참 그 열쇠를 바라보기만 했다. 손을 뻗어 만져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져서, 온갖 상념과 감정이 뒤엉켜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즈음 전미남의 핸드폰이 울렸다. 권수혁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였다. 왜 귀가가 늦어지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 전미남은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도록 아무 말이 없던 주완이 어렵사리 입을 뗐다.
“아버지는….”
“요양 병원 담당의 말로는 잠들 듯이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장례를 치러야 해서 제가 직접 시신을 인수했는데, 정말 편안해 보였습니다. 오랫동안 그 불편한 몸에 갇혀서 많이 힘드셨겠죠.”
주완은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정신 병원에 감금되지만 않았다면, 어쩌면, 아버지를 생전에 한 번이라도 뵐 수 있지 않았을까. 제 탓이 아닌데도 회한이 몰려왔다. 상자를 쥔 손에 꾹 힘이 들어갔다.
임정식이 손을 뻗어 주완의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받았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지금, 행복한가요?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상자를 조용히 닫은 주완은 담담하게 임정식을 마주했다.
“네. 행복해요. 그리고 앞으로 더 행복해질게요.”
최선을 다해서, 있는 힘껏 제 행복을 찾겠다고 다짐했다. 그제야 안심한 듯 임정식의 얼굴이 푸근하게 누그러졌다.
“다행이네요. 덕택에 나도 이제 여생을 홀가분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억날 때마다 한 번씩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 줄 수 없겠냐는 임정식의 부탁에 주완은 얼마든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임정식은 그제야 정말 마음이 놓인 것처럼 편안한 낯빛을 했다.
임정식과 헤어진 카페 앞에서 그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일방적인 배웅을 했다. 매서운 바람이 불었지만, 전미남은 서둘러 돌아가자고 주완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주완의 곁을 지킬 따름이었다.
주완은 한참 만에야 돌아섰다.
“이제 가요.”
“그러시죠.”
돌아오는 길에는 내내 상념에 젖어 있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저를 향한 할아버지의 염려와 평생 아버지를 따라다녔을 고독, 그리고 주완 자신이 태어난 배경까지. 정처 없이 흐르던 생각 끝에는 감정의 뭉텅이만 남았다.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부풀었다가 서늘해지고, 날카로운 것으로 마구 들쑤시는 것처럼 아파 왔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할아버지라고 주완 자신과 친부를 갈라놓고 싶진 않았을 거였다. 다만 아픈 아버지를 본 주완이 어린 마음에 상처라도 받을까 염려했을 뿐이었다. 환청과 환각에 시달려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다던 친부가 주완에게 상처를 입힐까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주완이 커서 성인이 되면, 아버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모를까. 부모의 정도 모르고 자란 손자에게 덜컥 짐부터 얹어 주긴 싫으셨을 터였다. 그래서 그 무게를 할아버지 혼자 견디셨던 걸 테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지만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주완 자신처럼 요양 병원에서 10년도 넘는 시간을 홀로 보내다 얼마 전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곱씹을수록 못내 속이 저렸다. 조금만 더 일찍 세상에 나왔다면, 그래서 한 번이라도 아버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었다면.
이런저런 생각을 거듭하는 사이, 차가 집 앞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도착했습니다.”
“네.”
무심코 내리려다 옆에 주차된 세단을 발견했다. 권수혁이 주로 타고 다니는 차였다. 힐금 센터패시아의 시계를 본다. 근래 권수혁의 귀가가 일러진 것 같아서였다.
현관문에 다다른 주완이 뒤따라오던 전미남에게 자리를 비켜 줬다. 도어 록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직접 열어 보시겠습니까.”
“아….”
“비밀번호 누르고 별표 누르시면 됩니다. 비밀번호는….”
“알 것 같아요.”
주완은 외출에서 돌아올 때마다 전미남이 눌렀던 번호를 하나하나 터치해 봤다. 한참 만에야 특유의 기계음을 내며 도어 록이 풀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재규어가 현관 앞까지 나와 있었다. 다녀왔어, 하며 재규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놈의 얼굴을 잡고 두 엄지로 볼을 마구 문질렀다. 성가실 텐데도 놈은 꼬리를 느릿하게 양옆으로 흔들며 고분고분 주완의 손길을 받아들일 따름이었다.
그즈음 거실 쪽에서 백도운이 걸어 나왔다.
“주완 씨, 이제 와요?”
“어, 선생님 와 계셨네요.”
“네. 권수혁 호출이요.”
백도운은 생글거리며 주완에게 반죽처럼 만져지던 재규어에게 손을 뻗었다. 재규어는 그의 손에 제 등에 닿기도 전에 홱 돌아서서 통로를 따라 걸어가 버렸다.
“하여간 쌀쌀맞다니까. 들어와요.”
백도운을 따라 거실에 도착했을 때, 권수혁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상의는 완전히 탈의한 채 팔에는 바늘을 꽂았다. 바늘과 연결된 호스가 온통 새빨갰다. 그것을 눈으로 쭉 따라가자 피로 가득 찬 혈액 백이 보였다. 잠시 수혈하는 건가 생각했지만, 그렇다기엔 혈액 백이 거치대에 걸려 있지 않았다.
권수혁과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권수혁은 곧 시선을 돌리며 바늘이 꽂힌 쪽만 거푸 주먹을 쥐었다가 풀었다가 했다. 주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힘줄이 도드라진 권수혁의 팔을 봤다. 어째서 그가 본인의 몸에서 피를 뽑고 있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만 뽑자. 이러다 터진다고, 진짜.”
백도운이 마뜩잖게 핀잔하며 권수혁의 팔에서 바늘을 빼냈다. 그러곤 두툼한 거즈를 붙여 주며 꽉 눌러, 했다. 빵빵해진 혈액 백은 준비해 온 제 의료 가방에 잘 챙겨 넣었다. 전미남이 백도운의 뒷정리를 도왔다.
그 참에 주완은 권수혁의 앞으로 가서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이어 그의 팔과 지혈용 거즈를 각각 한 손에 잡고 지그시 압박해 주었다. 권수혁은 제 팔에 온 신경을 집중한 주완은 물끄러미 볼 뿐이었다.
간질간질한 기류에 백도운이 두 눈을 야살스럽게 떴다. 그러다 그런 저를 의아하게 보는 전미남에게 현관 쪽을 고갯짓하며 부탁했다.
“난 이제 집에 갈 건데, 좀 태워다 줄래요?”
“…차, 안 가져오셨습니까?”
“아니. 너무 애썼더니 운전할 기운이 없어요.”
피를 뽑은 건 권수혁인데, 백도운이 지쳤다니 전미남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였다.
“그렇게 해. 거기서 바로 돌아가고.”
하지만 권수혁까지 등을 떠미는 판국에 별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 숙여 인사를 마친 전미남이 가시죠, 하며 앞장섰다. 백도운은 멀뚱히 자신들을 보는 주완에게 다음에 또 보자며 손을 흔들어 보이곤 총총 그를 따라갔다. 머지않아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는 기척이 났다.
사위가 급격히 고요해졌다. 피할 곳 없던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에게 붙박였다.
“…….”
“…어떻게, 된 거예요?”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것뿐이야. 전에는 늘 이렇게 해 왔으니까.”
“그래도 이런 건 내 몫이잖아요.”
주완의 눈썹이 일자가 됐다. 지금의 상황이 납득되지 않는 듯했다. 권수혁은 픽 웃으며 그의 귓불을 간질이듯 만지작거렸다.
“이젠 아니야.”
“그러면 난 이제 무슨 명분으로 여기에 있는 거죠?”
권수혁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잦아들었다. 눈빛은 한결 깊어졌다. 눈동자가 느릿하게 구르며 당돌한 주완의 모습을 가득 담아냈다. 귓불에서 턱으로 옮겨지던 손이 도톰한 아랫입술을 가만가만 건드렸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권수혁의 손이 닿은 곳에서부터 열이 올랐다. 종일 너무 많은 정보와 감정으로 어지러웠던 속에 불길이 이는 듯했다. 그대로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려 화르르 타 버릴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좀… 씻을게요.”
권수혁은 주완을 말없이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텅 빈 욕조에 물을 받으면서 옷을 벗었다. 그러곤 그 안에 들어가 앉아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 금세 온수가 들어차며 뿌연 수증기를 뿜어냈다.
조금씩 숨이 빠듯해지고,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속도 한결 차분해졌다. 하지만 심란한 마음만은 진정되지 않았다. 권수혁 때문이었다. 계속 그 곁에 주완 자신이 머물러도 되는 걸까. 지금의 심정만으로는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그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털어놓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그가 전처럼 꼭 안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의 호의에 그렇게 멋대로 의지해도 되는 건지.
주완은 현기증이 몰려들 즈음에야 욕조를 빠져나왔다. 샤워기 아래에서 달아오른 몸을 식히고, 머리도 감았다.
수건으로 몸과 머리카락의 물기를 대충 제거하고 가운을 꺼내 입으려 했다. 그런데 옷걸이가 텅 비어 있었다. 벗은 옷을 다시 걸칠까 했지만, 종일 밖으로 돌아다녔던 터라 내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건으로 주요 부위만 대충 가리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어차피 집에 있는 건 권수혁과 재규어뿐이라 거리낄 게 없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물기 어린 발소리가 났다. 그 작은 기척을 눈치챈 재규어가 통로로 걸어왔다. 예상대로 놈은 주완이 발가벗은 상태라는 데 개의치 않았다. 권수혁에게 면역이 된 듯했다. 어쩌면 놈에게는 나체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지도 몰랐다.
문제는 권수혁이었다.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마시던 그는 주완을 보자마자 술잔을 들어 올리던 자세 그대로 멈칫하며 굳었다.
“미안해요. 안에 가운이 없어서.”
주완이 태평하게 사과하며 침실로 향했다. 권수혁은 그 뽀얀 뒤태를 넋 놓고 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손에 든 잔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성큼성큼 주완을 따라간다. 그러곤 그가 막 침실에 들어섰을 즈음, 그의 팔을 잡아채 침대로 이끌었다.
“…앗.”
뒷걸음치듯 끌려가던 주완은 다리가 침대에 걸리면서 뒤로 벌러덩 드러눕고 말았다. 마구 흔들리던 시야가 진정되자마자 권수혁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발가벗은 몸 위로도 그의 체중이 십분 얹혔다.
권수혁은 당황한 주완의 낯을 지그시 내려다보면서 그의 젖은 귀와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문질렀다. 그러자 다소 멍하게 벌어져 있던 주완의 두 눈이 스르륵 내리떠지며, 점점 짙은 색을 머금었다. 거기에 비친 권수혁의 상도 보다 선명해졌다.
“나 지금 정신이 없어요.”
“그럼 아무 생각 하지 마.”
권수혁이 고개를 내려 주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댔다. 주완의 입술이 나긋하게 눌려 들어갔다. 권수혁은 망설임 가득한 주완의 윗입술을 거푸 가볍게 머금었다가 놓았다. 인중이 살짝 젖으면서 간지러운 숨결이 선명하게 내려앉았다. 이어 서서히 고개를 비틀어 살짝 벌어져 있던 주완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주완이 내리뜨고 있던 두 눈을 스르륵 감았다. 그러곤 진득하게 밀려들어 오는 권수혁의 혀를 촉 소리 내며 달게 머금었다.
거듭 말캉한 서로의 혀를 문지르고 핥았다. 쌉싸름한 알코올 향이 퍼졌다가 서서히 옅어지면서 달짝지근한 맛이 나기 시작했다. 입술이 살짝살짝 떨어질 때마다 촉, 촉 하는 젖은 마찰음이 났다. 금세 귓가와 목덜미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권수혁은 주완의 혀와 윗입술을 함께 핥아 올리곤 잠시 입술을 떼어 냈다. 그러자 주완이 폭 감겼던 눈을 떠서 그를 마주 봤다. 권수혁의 두 눈을 천천히 번갈아 보는 게, 어떤 확신이 필요한 것 같았다.
“내가 계속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건가요? 이제는 별로 쓸모도 없어졌는데, 할 줄 아는 것도 하나 없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일방적인 호의와 애정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남에게 뭔가를 받으면 으레 그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짧지 않은 생을 거쳐 몸소 습득한 이치였다. 피가 섞인 부모와 형제인들 예외가 되지 않았다. 하물며 권수혁은. 그가 선사한 자유와 행복, 평안에 관한 대가는 지불한 적이 없다. 어떻게든 갚아야 마음이 덜 불편할 텐데, 그는 이제 그딴 게 아예 필요 없다고 한다.
떠나고 싶지 않다.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도. 뻔뻔할지언정 이곳에 쭉 머물고 싶었다.
“뭘 그렇게 심란해하나 했더니.”
권수혁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다 주겠다는데, 자꾸 받아도 되는 거냐고 끄트머리만 겨우 잡고 꾸물거린다. 이 조심성 많은 생명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냥 통째로 삼켜 버리고만 싶다.
“직접 확인해 보든지.”
권수혁이 낮게 속삭였다. 찰나나마 그에게서 목이 끓는 듯한 소리가 났다.
“흐읏….”
권수혁은 더 참지 않고 주완의 목울대를 덥석 머금었다. 그러면서 다소 거친 손길로 그의 하얀 허벅지를 쓸어 올렸다. 낯선 손길에 주완의 무릎이 부들부들 떨렸다. 허벅지를 꽉 옥죄는 악력에 온몸이 긴장됐다.
급격히 뜨끈해지는 울대뼈에 연신 혀를 뭉치면서 주완의 엉덩이를 꽉 한 번 움켜쥐었다. 주완은 거푸 작게 앓으며 사지를 바르작거렸다. 파도처럼 덮쳐들어 전신을 잠식하는 자극들에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입술로 빠듯하게 조이던 울대뼈를 놓아주고 점점이 위로 올라갔다. 날이 선 턱에도 차근차근 입을 맞추다가 가쁜 숨을 토하느라 쉼 없이 달그락거리던 주완의 입술을 덮어 눌렀다. 주완이 끙 소리를 내며 힘겹게 권수혁의 혀를 받아들였다. 감미로운 점막과 혀를 거듭 농밀하게 뒤섞으면서 주완의 다리 사이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주완의 허리가 절로 비틀렸다. 겹쳐진 입술 새로 탁한 신음이 터졌다.
“…읏!”
아직 말랑말랑한 성기를 부드럽게 짓이겼다. 주완의 하반신이 움찔움찔 튀었다. 어르듯이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데도 두 무릎을 딱 붙이며 권수혁의 팔을 잡는다. 그의 몸은 다가올 쾌락을 예감하고 앞선 기대감에 파들파들 떨리는데, 얼굴만은 고통스레 찌푸려졌다. 당최 더 해 달라는 건지, 멈춰 달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긴장 풀어. 아프게 안 할 테니까.”
권수혁이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이어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완의 허벅지 위에 묵직한 살덩이가 툭 떨어졌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필시 다른 뭔가라고 착각했을 만큼 크고 단단했다.
주완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어 아래쪽을 보자, 권수혁이 그의 얼굴을 직시하며 제 성기를 주완의 성기에 덧대어 문질렀다. 이미 뻣뻣하게 발기한 권수혁의 성기에 주완의 성기가 대책 없이 쓸리고 짜부라졌다. 귀두에서 묻어나오는 프리컴에 음낭까지 반질반질 젖어 들었다.
“흐읏, 으, 읏….”
점점 강해지는 저릿함에 주완이 하반신을 펄떡거리며 권수혁을 떠밀었다. 입술은 하얗게 질리도록 윗니에 꽉 베어 물렸다. 연신 아래쪽과 권수혁을 번갈아 보는 눈동자가 몰아치는 쾌락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권수혁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바짝 힘이 들어간 어금니 쪽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났다.
서서히 주완의 성기가 곧추섰다. 권수혁의 손은 이미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프리컴으로 치덕치덕 젖었다. 두 살덩이를 버무릴수록 질척한 마찰음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급격히 열에 들떴다. 시야마저 노랗게 반전되며 어지러이 너울거렸다. 주완의 두 다리가 연신 미끄러졌다. 사타구니에서 울컥울컥 퍼지는 쾌감에 머릿속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았다.
“하아, 하….”
“하윽, 읏, 아으읏….”
발가락이 쭈뼛 펴졌다가 꽉 움츠러들길 반복했다. 시트를 쥐어뜯는 손은 새하얗게 질렸다. 권수혁이 그 손을 붙들어 당겨 입을 맞추고, 연이어 주완의 이마에도 차분히 입술을 내려앉혔다. 그의 두툼한 몸이 완전히 주완의 몸과 포개어졌다. 두 성기를 움켜쥔 손에 좀 더 압박감이 더해졌다.
주완의 하반신이 펄떡거릴 때마다 날 선 골반이 권수혁의 허벅지를 찍었다. 가슴의 작은 살점도 뾰족하게 머리를 들었다. 권수혁은 건드리기도 조심스러울 만큼 작은 유두를 살살 문질러 올리고 다시 형체 없이 짓이겼다. 위아래에서 들이치는 저릿함에 주완이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흐읏, 그, 그만….”
주완을 진정시키려는 듯 그의 이마와 미간, 뺨 등지에 거푸 입술을 내리면서 밑을 한결 빠르게 치댔다. 주완이 두 눈을 찌푸린 채 아슬아슬하게 권수혁을 바라봤다. 위태로운 눈빛이었다. 빠르게 열이 몰리는 중심부가 너무 얼얼했다. 지독한 요의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권수혁은 혀를 내밀어 주완의 목을 길게 핥아 올렸다. 주완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입술도 꾹 다물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혀끝으로 귓바퀴를 덧그리다가 예고 없이 귓구멍 안으로 혀를 뭉텅 밀어 넣었다. 귓속이 뜨겁고 축축하게 젖어 들자, 주완에게서 탄식에 가까운 신음이 터졌다.
“하으….”
금세 온몸이 땀에 미끄러워졌다. 그 여파로 체취도 짙어져 흥분을 부추겼다. 숨이 너무 달려서 머리가 울리고, 어지럼증이 돌았다. 차라리 빨리 끝을 보고 싶었다. 절박하게 권수혁에게 매달리자, 거짓말처럼 그의 등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덩달아 딱 맞붙은 하반신의 움직임에도 박차가 가해졌다.
“하아, 하, 읏….”
“하앗, 읏, 으읏. 아읏, 아!”
정신없이 앓았다. 서로의 귓가에서 가쁜 숨이 거푸 터졌다. 머릿속에서 경광등이 울리는 듯했다. 머지않아 권수혁이 추락하듯 주완에게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뜨거운 것이 왈칵 터졌다.
“으으읏…!”
“하으읏… 으윽…!”
겹쳐진 두 사람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가 참았던 숨을 토해 내면서 누그러졌다. 지독한 전율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살갗에는 소름마저 돋아났다.
권수혁은 눈을 가물가물하며 겨우 숨만 뱉는 주완의 젖은 이마에, 눈썹 위에, 뺨에 느릿하게 입을 맞춰 주었다. 숨결은 쉬이 진정되지 않고 거칠게 터져 나왔다. 한번 치솟은 열기도 머릿속을 끓이며 더 깊이 결합하고픈 욕망을 충동질했다.
하지만 권수혁은 긴 한숨을 뱉으며 주완의 얼굴을 제 어깨로 끌어당겼다. 그렇게라도 진정해 보려는 듯 그를 꼭 품어 안고 숨을 고른다. 장진우와는 달랐다. 아니, 그 누구와도 달랐다. 같을 수가 없었다.
억지로 머리를 식히던 권수혁은 돌연 제 어깨가 뜨끈하게 젖는 감각에 고개를 들고 주완을 봤다. 주완은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도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새어 나와 권수혁의 셔츠를 축축하게 적셨다. 주완의 온몸이 애처로울 만큼 바들바들 떨렸다. 어째서인지 그는 우는 것조차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혼란스러웠을 터였다. 오늘만 해도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가, 뜻밖의 소식을 접하고 착잡해졌을 테고, 또 이런저런 생각들도 결론도 없이 헤맸을 거였다. 그러다 비로소 마음이 놓여 지금껏 꾹꾹 눌러 놓기만 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진 듯했다.
“…미안해요.”
주완이 울먹이며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이 상황에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한숨이 나왔다. 우는 그를 보는데, 속 깊은 곳이 연신 저며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속절없이 깊어져만 갔다.
권수혁은 이불을 끌어당겨 주완에게 덮어 주고, 그를 이불째로 꼭 보듬어 안았다. 주완이 스스럼없이 품으로 파고들어 왔다. 그의 눈물이 잦아들길 기다리면서 토닥토닥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완에게서 전해져 오던 떨림이 멎었다. 불안정하던 숨소리도 고르게 정돈됐다. 슬쩍 얼굴을 들여다보니 어느새 쌕쌕거리며 곯아떨어졌다. 입꼬리가 옅은 호선을 그렸다.
“성미 급한 짐승이라, 오래는 못 기다린다.”
눈물이 말라붙은 주완의 뺨을 톡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얼마나 더 기다려 줄 수 있을지. 까마득한 날숨이 터져 나왔다.
너무 포근하고 안락해서 단꿈을 꾸는 줄 알았다. 전신이 따뜻한 기운에 폭 덮인 듯한 느낌. 하지만 눈을 뜨고도 그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슬쩍 몸을 움직여 봤다. 귀가 폭신한 베개에 부드럽게 뭉개졌다. 다리를 움직이자 발바닥에 잘 건조된 이불이 기분 좋게 부대꼈다. 나른한 기운에 젖어 잠시 게으름을 피운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종일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몸이 조금 묵직하다 싶더니, 이불 위로 권수혁의 팔이 단단히 둘려 있었다. 고개를 빠끔 들었다. 곧 권수혁의 얼굴이 시야를 꽉 채우고 들어왔다. 숙면 중인지 눈꺼풀 안쪽이 잠잠한 가운데, 촘촘하고 긴 속눈썹이 숨결을 따라 나풀거렸다. 고른 숨소리가 평온하게 귀에 감겼다.
한참 권수혁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꿈질꿈질 몸을 움직여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이불 덕택에 전보다 탈출하기가 한결 편했다.
침대에서 내려온 주완은 아무것도 덮지 않은 권수혁을 근심스레 바라봤다. 그가 안고 있는 이불자락을 끌어당겼다간 기어이 그를 깨우게 될 거였다. 아쉬운 대로 주변의 베개와 쿠션을 그의 몸 위에 살짝 얹어 놓았다. 아무것도 덮지 않는 것보단 나을 듯했다. 추우면 본능적으로 품 안의 이불을 덮을지도 몰랐다.
몸이 절로 바르르 떨렸다. 그도 그럴 게, 지난밤부터 내내 나체 상태였기 때문이다. 서둘러 옷을 꺼내 입었다. 무심코 속옷을 입으려다 허벅지에 하얗게 남은 사정의 흔적을 발견했다. 슬쩍 만져 봤지만, 완전히 말라붙어 잘 지워지지 않았다. 물티슈를 꺼내 살살 닦아 내고, 마저 바지를 입었다. 그러곤 권수혁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거실로 나갔다.
문가의 인기척에 거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재규어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간밤에 권수혁이 침실 문을 닫아 버리는 바람에 쫓아오지 못하고 거기서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수남아.”
몸을 낮추고 재규어를 불렀다. 샛노란 눈동자로 주완을 빤히 보던 놈이 곧장 소파에 내려와 한달음에 달려왔다.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바닥을 내차며 뛰어들 듯 안겨 드는 통에 주완이 버티지 못하고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찧는 것으로도 부족해 거의 바닥에 나자빠졌다. 그 와중에도 재규어의 얼굴을 끌어당겨 제 뺨에 마구 비비적거렸다. 재규어는 꼬리는 느릿하게 흔들면서 앞발로 주완의 어깨를 꾹꾹 짓눌러 왔다.
재규어의 애정 표현이 조금 버겁게 느껴졌을 무렵, 돌연 놈이 옆으로 홱 끌려갔다.
“……?”
순식간에 온몸을 짓누르던 체중이 사라짐에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런 주완의 시야를 채운 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재규어를 쓰다듬고 있는 권수혁의 모습이었다. 얼결에 주완에게서 그에게 끌려간 재규어는 영문도 모르고 흔쾌히 그의 손길을 만끽했다. 가만 보면 권수혁과 주완 자신을 대하는 재규어의 태도가 사뭇 달랐다. 권수혁을 보호자로 생각한다면 주완 자신은 친구, 혹은 형제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우습게 보이지 마. 안 그러면 또 기어오를 테니까.”
권수혁은 뜻밖의 충고를 건네곤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문이 닫히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다시 제게로 다가오는 재규어의 볼과 주둥이를 마구 주물럭거렸다. 그러곤 한참 만에야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했다.
재규어는 그 모습을 멀뚱히 보다가 다시 소파로 가서 배를 깔고 엎드렸다. 입을 쩍 벌리고 늘어지게 하품도 했다.
푹 자서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게 분명했다. 시계를 보니 8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그런데도 전미남이 오지 않는 건 권수혁에게 별도의 지시라도 받은 걸까. 막연하게 짐작하면서 생수를 꺼내 마셨다. 차가운 기운이 몸 곳곳으로 퍼지면서 금세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남은 생수를 들고 거실로 나오려던 주완은 식탁 위에서 뭔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종이봉투 4개에 다 식어 버린 붕어빵이 가득가득 들어 있었다. 백도운이 사 왔던 걸까? 하지만 그는 분명히 권수혁의 연락을 받고 온 거라고 했다. 방문 목적도 채혈이었으니, 오는 길에 다른 곳에 들르진 않았을 듯했다. 전미남은 종일 주완 자신과 함께 다녔고.
그렇다면 권수혁이 사 온 걸까. 평소에도 식욕이 별로 없는 사람이 갑자기 붕어빵이 생각난 것도 아닐 테고, 어마어마한 양만 봐도 누군가에게 부족하지 않게 먹이려던 것 같았다. 주완 자신을 떠올린 거라고, 멋대로 착각해도 괜찮은 건지.
고민하다가 종이봉투 하나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주완의 손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재규어가 샛노란 눈동자를 번뜩이며 종이봉투를 예의주시했다. 처음 보는 사물이라 호기심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주완은 놈이 차지한 소파 가장자리에 슬쩍 걸터앉았다. 재규어는 전처럼 주완을 밀어 내지 않고 잠자코 자리를 내주며, 다만 제 꼬리로 주완을 툭, 툭 칠 뿐이었다.
“수남이 너도 먹어 볼래? 고양이는 잡식이라고 그러던데, 이런 것도 먹어도 되나?”
주완은 식어서 딱딱해진 붕어빵을 하나 꺼내서 재규어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생김새는 생선인데, 색은 영 다르고 특유의 냄새도 없어서인지 재규어가 슬그머니 고개를 뺐다. 주완이 “안 먹을 거야?” 하며 연신 제 주둥이에 붕어빵을 가져다 대자, 못 이기는 척 베어 봤다가 바로 퉤 뱉었다. 연신 혀로 주둥이를 핥아 대는 게 취향에 안 맞는 눈치였다.
주완은 재규어가 반쯤 물었던 붕어빵을 스스럼없이 제 입에 넣었다. 겉면은 딱딱해지고 속도 차가웠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오랜만에 먹어 보는 팥은 여전히 달콤했고, 메마른 빵 부분도 오래 씹으려니 고소한 맛이 났다. 주완이 남은 꼬리를 털어 넣고 바로 하나를 더 꺼내자, 재규어가 신기한 눈초리로 그를 빤히 관찰했다.
주완이 두 개째의 붕어빵을 먹고 있을 때, 욕실 문이 열렸다. 주완은 오물오물 입 안의 것을 씹으며 통로 쪽을 주시했다. 곧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며 거실로 오는 권수혁이 눈에 들어왔다. 으레 주완과 눈을 맞추던 권수혁은 그의 손에 들린 붕어빵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뭘 먹는 거야? 버려.”
“나 주려고 산 거 아니에요?”
“…다 식었잖아.”
“내 거면 그냥 먹을래요.”
권수혁은 다 식어 빠진 붕어빵을 재차 입으로 가져가려는 주완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주완이 다시 눈을 똑똑히 맞추면서 고집을 부렸다.
“뭐라고 해도 다 먹을 거예요. 이것도, 저 안에 있는 것도.”
“그러지 말고 새로 사 줄 테니까….”
달래듯 설득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주완은 은근히 시무룩해져서는 붕어빵 봉투를 고집스럽게 움켜쥐었다. 한숨이 나왔다.
때마침 권수혁의 핸드폰이 울렸다. 권수혁은 무시하려는 것 같았지만, 주완이 얼른 핸드폰을 집어 그에게 건넸다.
“전화, 왔는데.”
권수혁은 붙잡고 있던 그의 팔을 확 잡아당기며 제 상체를 기울여 왔다.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이 주완의 입술을 꾹 짓누르고 떨어져 나갔다. 가벼운 입맞춤 후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물러나며 핸드폰을 받아 갔다. 그러곤 자연스럽게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뜬금없는 전개에 멍하니 굳은 주완은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본 재규어가 주둥이를 그를 툭 건드렸을 때야 정신을 차렸다. 손에 쥔 붕어빵 반쪽을 느릿느릿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새 귓가는 은근슬쩍 상기돼 있었다. 어째 붕어빵의 팥이 더 달아진 것만 같았다.
권수혁은 통화 내내 상대의 이야기를 듣곤 그래, 한마디만 했다. 전화는 금세 끊겼다. 그는 어느새 두 볼이 빵빵해진 주완에게 일렀다.
“준비해. 데려다줄 테니까.”
어디에, 왜 데려다주겠다는 건지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나갈 채비를 하려는 듯 침실로 들어가 버릴 따름이었다.
주완도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먹던 붕어빵과 식탁에 방치도 있던 붕어빵 모두를 잘 봉해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 먹을 요량이었다.
그런 다음 욕실로 가서 최대한 빨리 씻었다. 저로 인해 권수혁의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게 싫었다.
모든 준비를 마쳤을 즈음, 권수혁의 수하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어째서인지 전미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완은 가지, 하는 권수혁의 소매 끝을 슬쩍 붙잡았다. 권수혁이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봤다.
“어디 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괜찮으면 수남이도 데려가고 싶은데.”
가만히 듣던 권수혁이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마음대로 해.”
주완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뜨리며 한마디 덧붙인다.
“그리고 허락 같은 거 구하지 말랬잖아.”
귓가의 솜털이 파르르 일어났다. 간지러워서 괜히 목을 매만졌다. 얼결에 권수혁의 다정한 모습을 목격한 그의 수하들은 내색도 하지 못하고, 다만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뜰 뿐이었다.
재규어의 큰 몸집 때문에 권수혁과 주완은 세단에, 재규어는 차고가 높고 뒷좌석이 널찍한 RV에 나눠 타야 했다. 그렇게 이동해 도착한 곳은 백도운의 아파트였다. 전에도 야생 토끼를 맡기러 와 봐서 주변 풍경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전미남이 앞에 나와 있었다. 차가 멈추어 서자, 얼른 다가와서 문까지 열어 준다.
주완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전미남이 안쪽에 앉은 권수혁을 향해 고개를 꾸벅했다. 그동안 주완은 재규어가 차에서 내리는 걸 도왔다. 놈은 그런 식의 외출에 적응이 된 건지 고분고분 얌전히 굴었다.
“다녀오세요.”
권수혁이 떠나기 전, 상체를 굽혀 뒷좌석을 들여다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 주완을 물끄러미 보던 권수혁이 불쑥 손을 뻗었다. 주완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그를 본인에게 확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균형이 무너지면서 급격히 앞으로 쏠린 고개가 권수혁의 어깨에 툭 닿았다. 두 사람의 귀가 서로 쓸려 뭉개졌다. 덩달아 콧속으로 권수혁의 향기가 와락 밀려들었다.
권수혁은 그렇게 주완을 안고서 숨을 한 번 들이켜고야 아쉽게 그를 놓아주었다. 전미남을 비롯한 그의 수하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잘 놀고 있어. 늦지 않게 데리러 올 테니까.”
기대하지도 않았던 대답에 주완은 찰나나마 넋을 놓고 권수혁을 봤다. 그러다 문득 햇볕에 눈이 녹듯이 굳은 얼굴을 풀면서 헤실 웃었다.
“네, 기다릴게요.”
주완의 환한 웃음에 멍해졌던 것도 잠시, 권수혁의 입가에도 짙은 미소가 번졌다.
***
우형석의 침실에는 유리 파편과 실린더가 빈 주사위, 하얀 가루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헝클어진 침대조차 핏자국과 체액 따위로 얼룩덜룩했다. 우형석은 그 위에서 몸을 반쯤만 걸친 채 의식 없는 여자들과 뒤엉겨 있었다. 머릿속이 몽롱하고 숨이 가빠 와 자꾸 쌕쌕거리게 됐다. 목이 말랐다.
여자들을 쿠션 치우듯 떠밀고 비틀비틀 의자로 걸어갔다. 그러곤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아 양주 병을 집어 들었다.
그즈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무런 대꾸 없이 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양주를 들이켰다. 그러자 밖에서 들어가겠습니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곧 문이 열리고 사내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익숙하다면 익숙한 풍경에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만 꾸벅했다. 우형석은 양주 병을 앞에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쉬는데, 무슨 일이야?”
“백도운에 대해 알아 왔습니다.”
우형석이 멈칫하며 사내를 주시했다. 그러다 손가락을 까딱하곤 다시 양주를 병째 들고 목을 축였다. 약 기운에 힘이 잘 조절되지 않아 술의 절반이 턱을 타고 줄줄 흘렀다.
사내는 그에게 준비해 온 서류를 건네려다가 포기하곤 대신 거기에 적힌 백도운의 신상 정보를 읊어 주었다.
“백도운은 8년 전 사망한 백무 상사 사장, 백장훈의 외동아들입니다. 대대로 총포상이었던 백장훈이 90년대 들어 기존의 수출입 판로를 기반으로 사업 영역을 크게 확장하면서 현재는 꽤 큰 규모의 상사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백장훈은 가업을 물려받기 전까지 조직 생활을 했던 자라, 사원들도 대부분 그쪽 놈들이란 얘기가 있습니다. 기업 운영에 필요한 인재들은 대학도 보내고, 유학도 시키고 했다나 봅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기업형 조폭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공개된 회사 매출액은 그리 대단한 수준이 아닌데, 불법 거래 자금까지 더하면 웬만한 중견 기업 이상의 수익을 내는 거로 보입니다. 이 새끼들이 머리를 잘 쓴 게, 정치 자금을 비롯한 각종 로비를 꾸준히 해 와서, 고위층 유력 인사 중에서는 엮이지 않은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태 세무 조사를 제대로 받은 적도 없고, 웬만한 사건이 터져도 쉬쉬하고 넘어갔던 거죠. 공식적으로는 법망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회사를 경영 중이라, 외부에서도 굳이 건드리지 않았던 것 같고요.”
“백장훈인가 뭔가 하는 귀신한테는 관심 없으니까, 백도운에 대해서나 얘기해 봐.”
우형석이 따분한 표정으로 귓구멍을 후비적거렸다. 지금껏 설명한 백도운의 배경은 그를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경고나 마찬가지였다. 조직의 규모로 보나, 뒷배로 보나 승산이 없었다.
하지만 우형석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사내를 매섭게 노려보며 어서 보고하라고 다그칠 뿐이었다.
“백도운은 한국 대학교 의과 대학을 수석 졸업한 수재로, 동 대학의 대학 병원에서 외과 수련의, 전공의 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수년 전에 전문의 학위도 받았고요. 그런데 그 이후부터 행적이 묘연합니다. 어느 병원에도 소속되지 않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길게는 1년, 짧으면 몇 개월 단위로 진료를 본다는 겁니다.”
“회사는 어쩌고? 숨만 쉬어도 돈이 알아서 기어들어 올 텐데, 그런 가업을 놔두고 의사 나부랭이나 한다는 거야? 이상하잖아. 누굴 허수아비로 앉혀 놓은 게 아니고서야.”
“저도 그 점이 수상쩍긴 합니다.”
“알면 알수록 궁금해지네. 뭐, 직접 만나서 물어보면 되겠지.”
우형석은 양주를 내려놓고 술에 젖은 셔츠를 벗었다. 그러곤 깨진 거울 앞으로 가서 약에 찌든 제 얼굴을 비춰 봤다. 손을 들어 헝클어진 머리카락도 가볍게 매만졌다. 핏기라곤 없던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소란 피우지 말고 슬쩍 데려와 봐.”
전미남은 익숙하게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자, 솜뭉치 같은 게 현관 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전에 백도운에게 맡겼던 바로 그 야생 토끼였다. 철모르고 전미남에게 달음박질치던 녀석은 곧 주완을 따라 발을 들여놓는 재규어를 보고 움찔했다. 재규어 역시 거침없이 녀석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가까스로 재규어의 목을 끌어안아 만류했다. 전미남도 잔뜩 몸을 웅크린 토끼를 한 손으로 집어 들어 위기 상황을 모면했다.
집 안은 전과 달리 말끔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권수혁의 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책자가 정돈된 규칙이나 리모컨의 위치 따위만 보고도 전미남의 손길이 미쳤으리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새 토끼가 흘려 놓은 작고 동그란 배설물도 바로 치운다.
“엄청 깨끗해졌어요.”
“…그대로 두면 이 녀석이 어디에 어떻게 파묻혀 있는지 알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전미남의 뼈 있는 대꾸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안 그래도 숨기 바쁜 짐승인데, 더러운 집 안에서 실종되기라도 하면 굶어 죽기 십상이었다.
그때 백도운이 왜 이렇게 귀가 간지러워, 하면서 거실로 나왔다.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지 파자마 차림이었다. 입술도 메마르고, 낯빛까지 해쓱한 게 정말 단단히 몸살이 난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백도운은 주완과 재규어를 발견하자마자 달갑게 웃었다.
“어? 주완 씨 왔네요. 내 병문안 온 건가? 어이구, 우리 수남이도 와 줬구나.”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백도운의 몰골이 조금은 가엾게 느껴졌을까. 재규어는 그가 제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목을 끌어안고 볼과 볼을 비비적거려도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뺄 뿐, 평소처럼 으르렁거리진 않았다. 놈이 자꾸 물러나는 바람에 백도운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넘어졌다. 주완이 얼른 그를 부축해서 일으켜 주었다.
“선생님, 많이 아프세요?”
“그냥, 좀. 한 번씩 이래요. 독신의 자유를 누리려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할 고질병 같은 거라고 할까?”
“분명히 말하면, 영양실좁니다.”
“빡빡하게 굴긴. 결국은 같은 거라고요.”
“한밤중에 응급실까지 실려 갔다가 온 것과 자유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자유를 누린 대가가 본인에게만 악영향을 끼치면 상관없지만, 타인에게도 폐가 되니까요.”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미남 씨 되게 잔소리 심한 타입이네.”
백도운이 그만하자는 듯 손을 저었다. 모르긴 몰라도 내내 그렇게 시달린 기색이었다. 주완은 백도운이 소파로 가서 앉을 때까지 잠자코 부축해 주면서 의외로운 눈빛으로 전미남을 바라봤다. 백도운의 말마따나 그가 그만큼 말을 많이 하는 건 처음 봤다. 권수혁은 상사고, 백도운은 아니라는 점이 다른 걸까.
지난밤 백도운을 데려다주던 길에 백도운이 갑자기 쓰러진 건지, 그 이후에 문제가 생겨서 다급하게 전미남에게 도움을 청한 건지 주완으로선 알 수 없었다. 다만 응급실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차치하고 지금의 상태만 보더라도 얼마나 심각했을지 추측할 수 있었다. 의사가 영양실조라니. 의료진이라고 몸 관리를 잘하는 건 아니라던 얘기가 떠올랐다.
“진짜 괜찮으세요?”
“응. 새벽에는 헛구역질도 나고 앞이 안 보였는데, 링거 맞았더니 다 나았어요. 이제 밥 먹고, 약 먹고 좀 쉬면 멀쩡해질 거예요.”
백도운은 주완의 우려를 물리치며 응급실에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 조금 전에야 돌아왔다며 넌더리를 냈다. 주완이 별안간 손을 그의 이마에 얹었을 땐 아하하 웃으면서 열은 없어요, 했다.
그사이 주방에 들어갔던 전미남이 금세 나오더니 다짜고짜 외투를 집어 들었다. 주완과 백도운이 의아하게 그를 주시했다.
“아무래도 잠시 장을 보러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같이 갈까요?”
“아니요. 혼자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전미남은 외투를 걸치면서 성큼성큼 현관으로 향했다. 주완이 그를 배웅하러 따라갔다. 구두를 신고 나설 때까지 전미남의 당부가 이어졌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문단속 잘하고 계세요. 가급적 아무한테도 문 열어 주지 마시고요.”
“네.”
“토끼는 침실에 데려다 놨습니다.”
“수남이가 그쪽으로 못 들어가게 할게요. 문 열 때도 조심하고요.”
“부탁드리죠. 그리고….”
“선생님도 잘 지켜볼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눈치껏 먼저 대답했다. 그제야 전미남은 그럼, 하더니 문을 열고 나갔다. 현관문이 닫히면서 자동으로 도어 록도 잠겼다. 밖에서 전미남이 한 번 더 문손잡이를 내려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했다. 주완은 그의 기척이 잦아들 때까지 문 앞을 지키다가 거실로 돌아갔다.
재규어의 꼬리를 건드리며 장난치던 백도운과 눈이 마주쳤다. 주완은 몸을 반쯤 주방 쪽으로 향한 채 물었다.
“선생님, 뭐 마실 거라도….”
“아니, 됐으니까 여기 와서 앉아요.”
백도운이 눈을 접으며 제 옆자리를 토닥거렸다. 잠자코 그리로 가서 앉았다. 재규어가 곧장 몸을 일으켜 주완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놈을 열심히 쓰다듬어 주는데, 옆에서 백도운의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자 샐쭉 웃는다.
“왜요?”
“어젯밤에 수혁이랑 얘기 많이 했어요?”
“아뇨. 얘기는 많이 못 했어요.”
“아, ‘얘기는’ 많이 못 했구나.”
백도운은 그저 주완의 말을 고스란히 따라 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얄궂은 놀림을 당하는 것 같았다. 귓가가 간질간질해지면서 열이 오른 건 그 때문이었다.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던 백도운이 제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뭔가 어려운 얘기를 꺼내려는 듯했다.
“음. 나도 오지랖 넓게 간섭하고 싶진 않은데, 살짝 걱정돼서요. 마지못해서 끌려가는 건 아니죠, 주완 씨?”
“네?”
“수혁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냥 체념한 건 아니냐고요.”
주완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재규어의 얼굴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허심탄회하게 제 속내를 밝혔다.
“모르겠어요. 그냥 그 사람이 준 모든 게 좋아요. 수남이도, 미남 씨도, 선생님도…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주완 씨, 그건….”
“저도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자꾸 궁금하더라고요. 무슨 꿈을 꾸는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날 어떻게 보고 있는지…. 어쩌다 한 번씩 꽉 안아 주면 여기가 터질 것처럼 부풀거든요.”
주완이 슬그머니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백도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완은 이내 고개를 돌려 그의 두 눈을 들여다봤다. 확인을 구하는 것 같았다.
“좋아하는 거겠죠?”
“그 얘기, 수혁이한테도 말했어요?”
“…하려고요, 이제.”
주완의 얼굴에 살짝 쑥스러운 기색이 번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도운이 턱 제 입을 막았다.
“선생님, 왜 그러세요? 속이 또 안 좋으세요?”
“아니, 아니에요. 아니야.”
백도운은 서둘러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눈가를 가리면서 뭐라고 내가 설레,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때, 불현듯 인터폰이 울렸다. 전미남이 벌써 돌아왔나 싶었다가, 그라면 인터폰 호출을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완은 인터폰 앞으로 다가가 작은 화면을 들여다봤다. 작은 체구의 남자가 비쳤다. 특별히 수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응답 버튼을 눌렀다.
“누구세요?”
- 세탁소예요.
남자는 슬쩍 비닐에 싸인 세탁물을 들어 보였다. 바로 문을 열지 않고 백도운을 돌아봤다.
“선생님, 혹시 세탁물 맡기셨어요?”
“아, 셔츠 몇 개 맡기긴 했는데… 어디 보자.”
백도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비틀 주완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그의 어깨 너머로 인터폰 속 인물을 살폈다.
“세탁소 아저씨 맞네요.”
백도운은 바로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런 후 현관 쪽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앉아 계세요. 제가 대신 받아 올게요.”
“아니에요. 계산도 해야 하고, 개수 제대로 맞춰 왔는지 확인해야지.”
“그럼 제 손 잡으세요.”
“고마워요.”
백도운이 사양하지 않고 주완의 팔을 붙들었다. 두 사람이 현관 앞에 도착했을 즈음, 밖에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한 듯한 소리가 났다. 이어서 초인종이 울렸다.
“주완 씨, 수남이 좀.”
“아, 네.”
주완은 현관문 앞에서 백도운을 놓아주고, 어느새 두 사람을 뒤따라온 재규어를 통로에서 붙잡고 있었다. 행여 세탁물을 주고받다가 재규어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곤란해질 거였다.
백도운은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나가요, 하며 문손잡이를 잡아 내렸다. 벌어지는 문밖에는 예상대로 세탁소 주인이 서 있었다.
“안녕하셨어요?”
“…아, 네.”
평소라면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넸을 세탁소 주인은 뭔가 모르게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에 백도운이 묘한 위화감을 느꼈을 찰나였다. 현관문이 갑자기 더 확 젖혀지더니, 시커먼 사내들이 순식간에 백도운을 덮쳤다.
“뭐…!”
상황을 채 파악할 틈도 없었다. 두 팔을 붙들려 제압당하는 동시에 무방비 상태인 얼굴에 뭔가가 확 덮였다. 사지를 저으며 숨을 들이켜자 강력한 마취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삽시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몸 전체가 축 늘어졌다.
예기치 못한 순간, 느닷없는 납치극을 목도하게 된 주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선생님!”
“이 새낀 뭐야?”
“일단 잡아!”
주완의 손이 백도운에게 닿기도 전에 목덜미를 가격당했다. 아찔한 감각이 일거에 머리까지 내달리더니 이내 까무룩 의식이 끊겼다.
사내 중 하나가 늘어지는 주완의 머리채를 당겨 얼굴을 들쳤다. 그러곤 이 새낀 어떻게 할까요, 한다. 의심 없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행동 대장이 나직한 탄성을 터트렸다.
“어, 이 새끼? 어디서 봤는데?”
“아는 놈입니까?”
“형님이 찾으시는 그놈이랑 닮지 않았어?”
“그럴 리가요? 닮았나?”
“일단 확인해 보게 데려가.”
그때였다. 재규어가 으르렁거리며 무리에게 다가왔다. 집 안에서 뜻밖의 포식자를 마주한 사내들이 지레 흠칫했다.
“뭐, 뭐야? 표범인가?”
콧잔등을 일그러뜨리던 재규어는 단숨에 땅을 내차며 뛰어올라 주완을 짐짝처럼 붙잡고 있던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곤 입을 쩍 벌러 사내의 팔을 힘껏 물어뜯었다.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팔을 물어뜯긴 사내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씨발! 뭐 하고 있어? 당장 옮기지 않고!”
“하, 하지만…!”
“다 죽을 셈이냐? 빨리 움직여!”
남은 무리는 재규어에게 팔과 다리, 얼굴, 목까지 사정없이 물어뜯기는 제 동료를 두고 뒷걸음쳤다. 재규어는 그들을 향해 피범벅이 된 송곳니를 드러내며 씨근덕거렸다. 사내 중 하나가 세탁물에서 긴 외투를 꺼내 그것을 놈의 얼굴로 집어 던졌다. 돌연 시야가 차단되자, 재규어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야속하게도 외투는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사이 사내들은 현관문을 닫았다. 도어 록까지 잠긴 문 안에서, 재규어가 거듭 제 머리를 들이받았다. 현관문이 쾅, 쾅 소리를 내며 크게 흔들렸다.
“서둘러!”
사내들은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백도운과 주완, 세탁소 주인을 끌고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이미 대기 중이던 승합차에 세 사람을 구겨 넣고, 각기 앞뒤 차에 올라 부리나케 출발했다.
요란한 타이어 마모 소음을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량은 상가 앞에 잠시 멈춰 섰다. 그러곤 문을 열어 세탁소 주인을 뱉듯이 밀어 냈다. 세탁소 주인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때마침 근처 상가에서 나오던 전미남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 전미남은 한달음에 세탁소 주인에게 달려갔다. 의식은 있었지만, 눈의 초점이 이상했다. 약이라도 맞은 듯했다.
바로 고개를 들었다가 승합차 뒷좌석에 타고 있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두 사람 모두 미간을 찌푸렸다. 서로가 몹시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를 어디에서 봤는지 떠올릴 여유가 없었다. 전미남의 사내의 옆에 앉혀진, 익숙한 얼굴을 발견한 까닭이었다. 서늘한 감각이 목덜미를 짙게 핥으며 가슴으로 흘렀다.
“들켰다, 빨리 출발해!”
사내의 고함에 승합차는 문도 채 닫지 못한 채 황급히 내빼기 시작했다. 전미남도 서둘러 해당 차량을 쫓아갔다. 뒤꽁무니가 잡힐 듯 말 듯 했다.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려 젖혀진 차 문짝을 잡았다. 그를 떨쳐 내려는 듯, 차가 급정거를 시도했다. 그 여파로 닫히려는 문을 잡고 미끄러지다 문틀을 손과 두 발로 지탱했다.
문가의 사내가 칼을 휘둘렀다. 어렵사리 일격을 피한 뒤 그의 손목을 잡아 뒤로 꺾었다. 그러곤 그 면상에 가차 없이 주먹을 꽂아 넣었다. 사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그 찰나를 이용해 안을 들여다보자, 백도운 외에도 뒷좌석에 태워진 주완이 보였다. 그 역시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다음 순간, 운전자가 가속 페달을 밟으며 질주하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말았다. 전미남의 몸은 금방이라도 차에서 떨어질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절치부심해 다시 홱 팔을 내밀었다. 간신히 손끝에 백도운의 멱살이 잡혔다. 코를 움켜쥔 전의 그 사내가 전미남의 팔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운전자도 그를 떨어뜨릴 작정으로 속력을 줄이지 않고 코너를 돌았다. 일순 악력을 응축해 백도운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차체가 우측으로 기울면서 백도운과 전미남이 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크윽.”
반사적으로 백도운을 감싼 전미남은 바닥에 떨어진 충격을 고스란히 받았다. 그러나 신음할 새조차 없었다.
“선생님! 괜찮으십니까? 선생님!”
의식 없는 백도운을 마구 흔들었다. 백도운은 좀처럼 깨어날 기미가 없었다. 우선 그를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새 승합차는 이미 저만치 멀어진 상태였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그 뒤를 쫓아갔다. 경황없이 맹목적이었다.
그런 전미남 앞을 옆 골목에서 튀어나온 차가 가로막았다. 가까스로 정면충돌을 피하며 보닛 위로 몸을 굴렸다.
“괜찮으세요?”
소스라치게 놀란 운전자가 얼른 나와서 전미남을 걱정했다. 전미남은 대답 없이 이제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 승합차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거친 숨이 엉망으로 터져 나왔다. 끝내 주완을 납치한 차량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감출 수 없는 안타까움에 주먹이 꽉 쥐어졌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