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처 미팅을 마치고 출근하느라 사무실에는 평소보다 늦게 도착했다. 차가 정문 앞에 멈춰 서자, 입구에서 대기하던 사내 하나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상주 비서 노릇을 하는 사내였다. 손수 뒷좌석의 문을 열어 준 그는 일단 권수혁을 향해 극진히 인사했다.
보통 때는 그가 이렇게까지 나와서 권수혁을 마중하는 일이 없다. 어지간히 급한 용무가 생긴 게 아니라면. 권수혁은 자못 찜찜하게 미간을 구긴 채 사내를 응시했다. 뭐야, 하자 사내가 두 손으로 제 핸드폰을 내밀었다.
“전 실장님이십니다.”
“전 실장?”
주거래 품목이 품목이다 보니 미팅 중에는 의사 결정권자는 물론 모든 수행원의 핸드폰을 꺼 두는 게 원칙이었다. 전미남이 권수혁 자신이 아닌 상주 비서를 통해 연락한 것도 그 사실을 염두에 뒀기 때문일 터였다.
문제는 전미남을 일부러 백도운과 주완 곁에 붙여 두었다는 점에 있었다. 그가 다급히 연락해 올 만한 일이 뭘까.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불쾌한 감정이 번졌다.
핸드폰을 낚아채서 제 귀에 가져다 댔다. 그러곤 내내 대기했을 전미남에게 지시했다.
“말해.”
이어지는 보고를 듣기만 했다. 어떤 대꾸도 없었다. 머지않아 미간의 주름이 점점 깊어지고, 얼굴에서도 핏기랄 게 완전히 가셨다. 턱에는 발끈 힘이 들어갔다.
곁에서 그 극명한 변화를 지켜보던 수행원들이 영문을 모르고 아리송한 눈빛만 주고받았다. 권수혁은 좀처럼 감정적 동요가 없는 사람이라, 대번에 그를 흔드는 소식이 대체 무엇일지 궁금할 수밖에.
“…뭐라고?”
전미남이 농담 따위를 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에게서 믿기 어려운 소식이 전해졌다. 늦지 않게 데리러 가겠다고 했는데. 기대 어린 눈빛으로 기다리겠다던 주완이 덜컥 괴한들에게 납치됐다니.
전미남은 면목 없는 어투로 절망적인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걸 몇 번이고 인지시켜 주었다. 주완이 사라진 게 틀림없다고, 거기에는 어떤 착오도 존재할 리 없다고.
권수혁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종국에는 애꿎은 핸드폰을 바닥으로 내던져 버렸다. 핸드폰의 화면이 쩍 갈라졌다.
수하들이 당황한 사이, 권수혁은 다짜고짜 운전석으로 향했다. 그러곤 운전석의 사내를 끄집어내고 자신이 거기에 앉았다.
“대, 대표님?”
권수혁의 돌발적인 행동에 그의 수하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권수혁은 어디로 갈 건지, 무슨 일인지 알려 주지도 않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곧장 다시 도로로 미끄러져 나간 차가 풀 가속하며 달려 나갔다.
신호까지 무시하면서 질주하는 모습이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었다. 권수혁의 차가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모습을 넋 놓고 보던 그의 수하들은 황급히 다른 차를 타고 그의 뒤를 쫓아갔다.
“…으윽.”
작게 신음하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목덜미에서부터 뒤통수 전체가 뻐근하게 울려서 질끈 눈이 감겼다. 한참 숨을 고르다가 다시 눈을 떴다. 시야는 어두컴컴할 따름이었다. 눈이 가려진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묶인 팔과 다리를 꼼짝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고개만 돌아갔는데, 배와 가슴이 땅에 맞닿은 상태라 주변을 면밀하게 살피기가 녹록지 않았다.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어 봤다. 아침에 권수혁의 차를 타고 백도운의 집으로 갔다. 백도운이 밤사이 응급실에 다녀왔대서 그의 병문안도 할 겸, 하루를 같이 보내기 위해서였다. 권수혁과 인사를 나누고 전미남과 함께 백도운의 집으로 들어갔다. 전미남은 바로 장을 보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고, 백도운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세탁소에서 세탁물 배달을 와서….
그 이후의 상황은 물 흐르듯 이어지지 않고 띄엄띄엄 장면들로 떠올랐다. 정체 모를 괴한들의 습격과 의식을 잃은 백도운, 그를 구하려 냅다 달려들었던 것까지.
아무리 주위를 살펴도 백도운의 집 같지는 않았다. 권수혁의 집이나 병원도 아닌 듯했다. 보이는 거라곤 없지만, 냄새나 공기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의식이 끊긴 직후 이곳으로 끌려온 걸까? 백도운도? 그렇다면 백도운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혼자 남겨진 재규어가 놀라지 않았을까. 뒤늦게 집에 들어온 전미남도. 의문과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다시금 힘껏 고개를 비틀어 봤다. 차가운 바닥이 볼에 닿았다. 시멘트 바닥은 아니었고, 나무도 아니었다. 일반 장판 같았다. 바깥 공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봐서 실내인 건 분명했다. 그렇다고 창고는 아니었다.
숨소리를 줄이고 인기척을 감지해 봤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백도운조차도. 가슴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괴한들이 백도운의 집에 쳐들어왔던 게 백도운을 해치기 위해서라면. 그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조금 먼 곳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기척과 함께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문이 닫히고 여러 목소리가 간간이 섞여 들렸다. 최소 두 사람 이상이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대화 내용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점점 커지는 음성으로 그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몸이 저절로 긴장됐다.
“…없습니다.”
실내에서 신발을 신었을 리도 없고 기껏해야 슬리퍼일 텐데,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느껴졌다. 그만큼 온 신경이 날을 세웠다.
머지않아 문 앞에서 인기척이 멎었다. 닫힌 문을 열기 위한, 찰나의 공백임이 분명했다. 여지없이 문손잡이 덜컥 잡혀 내려가더니 문이 벌어졌다. 바깥의 조명이 방 안까지 들어오면서 주변이 조금 밝아진 듯했다.
“그래서, 잔챙이를 잡아 왔다고?”
어이없어하는 누군가의 핀잔에 지레 몸이 굳었다. 주완 자신이 아는 음성이었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해쳐 놓고 실실거리던 바로 그 목소리, 우형석이었다.
‘애들하고 내기했어. 그러니까 좀 알려 줘 봐. 사람 새끼래, 개새끼래?’
호흡이 가빠졌다. 뻣뻣하게 굳은 몸이 의지와 무관하게 부들부들 떨렸다. 눈이 가려졌는데도 우형석이 저를 까마득하게 내려다보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뭐야, 이거야? 이게 잔챙이가 맞긴 해? 어디 써먹지도 못할 것 같은데. 씨발, 이 새끼 무서워서 발발 떠는 거 봐라.”
우형석이 저열하게 키득거리며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곤 주완에게 뒤집어씌워졌던 복면을 확 벗겼다. 방 안으로 들이친 빛에 주완의 낯이 오롯이 드러났다. 피할 수 없이 두 사람의 시선이 딱 마주친다.
1초, 2초, 그리고 3초.
“……!”
“…….”
비로소 주완을 인식한 우형석이 그대로 놀라 굳는다. 너무 의외라,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던 전개라 사고 회로가 잠시 정지된 것 같았다.
주완은 어금니를 꽉 물고 우형석을 노려봤다. 곧 그도 놀란 기색을 감추고 서서히 입술을 늘어뜨렸다. 그동안 주완을 찾는다고 이리저리 동분서주했는데, 주완이 알아서 제 손에 굴러들어 왔다. 여우 사냥을 하러 갔던 수하들이 얼결에 범을 잡아 온 셈이었다.
“이게 누구야?”
우형석의 두 눈에 환희에 가까운 이채가 번뜩였다.
현관문이 엄청난 광음을 내며 덜컹거렸다. 침실에서 백도운을 돌보던 전미남이 얼른 현관으로 가서 닫힌 문을 열었다. 서서히 벌어지는 문틈으로 권수혁이 보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는 고개를 들고 전미남을 직시했다. 전미남이 푹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백도운은 상처를 입은 채 의식이 없고, 주완은 끝내 납치당하고 말았다. 명백히 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무력감과 패배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박주완 씨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빡 소리와 함께 전미남의 고개가 돌아갔다. 엄청난 힘에 휘청거렸던 전미남이 곧 다시 똑바로 섰다. 그러곤 얼마든지 더 맞겠다는 듯 두 팔을 등허리에 얹었다.
“면목 없습니다.”
권수혁의 구둣발이 전미남의 정강이를 가격했다. 이번만큼은 전미남도 버티지 못하고 한쪽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았다. 형언 못 할 통증에 반듯한 이마 위로 굵직한 핏대가 팽팽하게 솟아올랐다. 그런데도 그는 한사코 입을 다물며 신음을 삼켰다.
납치당할 뻔했던 백도운을 구하면서 생긴 이마의 상처에서 피가 흘러 짙은 눈썹을 축축하게 적셨다. 그뿐 아니라 턱에도, 팔꿈치에도, 무릎에도 선혈이 낭자한 상처가 보였다. 셔츠와 바지는 너덜너덜하게 찢기고, 싯누런 흙먼지로 얼룩져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증명해 주는 듯했다. 그런 꼴로 제 상처는 조금도 돌보지 않은 게 분명했다.
권수혁은 까마득한 한숨을 쉬며 짜증스럽게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전미남을 탓하며 벌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주완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머릿속이 온통 그 일념뿐이었다.
구둣발째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소파에 늘어진 재규어가 슬쩍 눈동자만 굴려 권수혁을 봤다. 그러다 이내 그 눈길마저 바닥 어딘가에 시무룩하게 던져 놓는다. 꼬리는 늘어뜨리고 두 귀도 다 쳐져서 꼭 실의에 빠진 듯했다. 놈의 주둥이에 피가 선명하게 말라붙은 걸 보면 놈도 주완이 납치되는 걸 본 모양이었다.
주완을 데려간 자는 누구일까. 대체 무슨 목적으로. 짐작 가는 데가 너무 많아서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권수혁 자신을 노리는 세력은 언제든, 어디에든 존재해 왔다. 다만 그들 중 누군가가 권수혁 자신에게서 어떤 이득을 취하려 주완을 대신 납치했고, 또 그러기 위해서 백도운의 집으로 들이닥쳤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권수혁 자신이 주완을 향한 감정을 깨달은 건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주변에서 그 사실을 안 것도 끄나풀이 있단들 이렇게 빨리 행동을 취하기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전미남의 사전 보고대로라면 백도운도 함께 납치될 뻔했다가 가까스로 구조됐다고 하니, 처음부터 목표는 백도운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의 이름을 빌려 사는 권수혁 자신이거나. 만약 그렇다면 권수혁 자신 때문에 주완이 험한 일을 당한 셈이었다. 주먹이 꽉 쥐어졌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와 상실감에 이가 갈렸다.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이토록 망연한 감정은 동생을 잃었을 때 외에는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전미남은 그런 권수혁에게 새로운 사실을 언급했다.
“대표님. 그들 중에 눈에 익은 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누구?”
“중앙 정신 병원에서 한 번 만났던 잡니다. 그곳 간호조무사 얘기로는 박주완 씨의 이부동생이 박주완 씨를 찾으려고 종종 그 무리를 병원에 보낸다고 했습니다.”
“그럼 이 일의 배후가 박주완의 동생이다?”
“백 선생님을 모시고 집에 돌아와 보니, 현관에 시신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마 놈들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저 녀석에게 물어뜯겨서 얼굴은 식별할 순 없었지만….”
권수혁의 시선이 잠시나마 소파 위 재규어에게 꽂혔다. 놈의 주둥이가 붉은 피로 물든 이유를 짐작게 하는 대목이었다. 놈도 주완을 지키려 달려들었는데, 끝내 주완이 제 눈앞에 사라지자 의기소침해진 듯했다.
들어올 때 현관에서 아무런 핏자국도 발견하지 못했다. 전미남이 시신을 비롯해 미리 뒤처리를 해 둔 터였다.
전미남은 권수혁에게 웬 핸드폰을 건넸다.
“그 시신에서 찾은 물건입니다.”
“신분증은?”
“신분증은 따로 없었고, 핸드폰 사용 내역을 뒤져서 신원을 조사 중입니다.”
보고 중에 전미남의 주머니 안쪽에서 진동이 울렸다. 권수혁은 얼른 받아 보라는 것처럼 그의 주머니를 고갯짓했다. 전미남이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다. 회사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신원 확인을 마친 것 같았다.
전미남이 다른 수하와 짧은 통화를 하는 동안, 권수혁은 고요히 그의 핸드폰만 직시했다. 이윽고 통화가 끝났다.
“신원 확인됐다고 합니다. 이름은 강병식, 스물네 살입니다. 가출 후 소년원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여러 사채업자 밑에서 일했고, 1년 전부터 우형석의 조직으로 들어간 자라고 합니다.”
우형석. 그의 등장으로 가장 원치 않았던 추론이 사실화됐다. 우형석이 무슨 목적으로 백도운을 납치하려고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전부터 주완을 찾아다녔던 그가 기어이 주완을 손에 넣게 됐다는 사실에 아찔해졌다.
어떻게 해야 주완을 무사히 돌려받을 수 있을지. 애가 타서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기도 버거웠다. 돌연 권수혁 자신을 지탱하는 중심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버젓이 숨을 쉬고 있는데도 폐부가 짓이겨진 것처럼 갑갑하기만 했다.
“…박주완.”
신음하듯 주완을 불렀다.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공허함과 상실감만 가중될 뿐이었다.
“나가 있어.”
“…네?”
“나가 있으라고.”
우형석이 주완에게 두 눈을 고정한 채 재차 지시했다. 평소라면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한다며 짜증부터 냈을 텐데, 그의 입가에는 기이할 만큼 짙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백도운을 놓쳤으니 틀림없이 깨지리라고 생각했던 그의 수하로서는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 나갔던 다른 사내의 말마따나 주완이 정말 우형석이 그토록 찾던 그의 이부형제인가 싶었다.
우형석은 미적거리는 제 수하를 싸늘하게 돌아봤다.
“이 새끼가 근데, 귀가 먹었나.”
“아, 죄송합니다.”
우형석의 수하는 얼른 꾸벅하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우형석의 눈길이 다시 주완을 향했다. 어쩌다 그가 이곳까지 굴러들어 온 건지는 모른다. 그저 백도운을 잡으러 갔던 수하들이 그와 함께 있던 주완을 대신 데려왔다고 하니, 이제까지 주완이 숨어 지낼 수 있게 보살펴 줬던 게 바로 그 백도운이었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어떤 목적으로 백도운이 주완을 보호하고 있었는지, 그가 김제국과 주완을 직접 거래한 당사자인지 알 수 없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주완을 손에 넣었으니, 백도운을 놓친 것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우형석은 자신에게서 단 한 순간도 눈을 돌리지 않는 주완의 멱살을 잡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목이 조이는 상황에도 주완은 미간만 찌푸릴 뿐 함부로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사지는 다 결박당해서,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됐는데도 눈빛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항상 그랬다. 아무리 괴롭혀도 결코 상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깟 게 몇 번을 덤벼도 이길 수 없으리란 걸 뻔히 알면서 자꾸 저항하려 들었다.
“난 네 그 눈깔이 정말 싫어. 볼 때마다 확 파 버리고 싶다니까?”
괜한 으름장을 놓는 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을 하찮게 보던 그 눈빛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1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 때문일까. 아니면 그 긴 세월을 정신 병원에 갇혀 있었던 까닭일까. 그 특유의 반감 가득한 눈빛만은 변함이 없는데, 주완이 뿜어내는 에너지라고 할지 분위기 같은 게 사뭇 달라진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뭔가 좀 변했지? 박주완.”
주완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돌려 봤다. 주완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나한테 손대지 마.”
픽 웃으며 잡고 있던 얼굴을 확 떠밀 듯 놓아주었다. 의지할 곳 없던 주완이 다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를 등지고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러곤 다시 일어나려고 부단히 꿈틀거리는 주완을 물에 빠진 개미 보듯 관망했다.
“내가 너 찾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좀 난감했어야 말이지. 그 여자가 널 어디에 처박아 뒀는지 알 수가 없잖아. 겨우겨우 병원으로 찾아갔더니, 이미 팔려 갔다질 않나.”
주완은 문득 임 변호사의 얘기를 떠올렸다. 그는 친부의 유산 상속 문제를 논의하려 주완을 찾았고, 우형석과 먼저 연락이 닿았다고 했다. 우형석이 갑자기 주완 자신을 찾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때쯤부터였을 거였다.
“왜. 이제 내 아버지 몫까지 채 가려고?”
우형석이 히죽 웃었다.
“그래도 우리가 피를 나눈 형젠데, 콩 한 쪽도 나누는 게 도리잖아? 너무 억울해하지 마. 내가 너한테 좋은 일도 많이 했으니까. 거기에 대가를 치른다, 생각하라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틈만 나면 널 주물럭거리던 남자랑 그것마저 질투해서 널 정신 병원에 처넣은 여자가 어떻게 됐는지 안 궁금하냐고.”
“…….”
“그 남잔 뒈졌어. 결국 그 여자한테 칼을 맞았지. 내가 조금 도왔고. 난 그 남자가 죽으면 그 여자도 으레 따라 죽을 줄 알았거든? 워낙 끔찍하게 집착했잖아? 그런데 아니더라고. 오히려 자기는 억울하다면서 방방 뛰더라. 그 모습을 박주완, 너도 봤어야 하는 건데.”
놀랍지도 않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물리적인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역전되기 마련이라, 언젠가는 우형석이 제 아버지를 죽일 것 같았다. 그 막연하던 추측이 현실화됐을 뿐이었다. 다만 그가 그런 패륜 아닌 패륜까지 저지르고도 멀쩡히 자유를 누리는 게 유감이었다.
“줄곧 생각했어. 내 삶을 이따위로 조져 놓은 부모들을 이 세상에서 없애 버리면 묵은 체증이 가시지 않을까. 하루하루 좆같기만 하던 기분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개운해지지 않을까. 그런데 막상 두 연놈을 다 치웠는데도 영 개운치가 않은 거야. 대체 뭐가 문제지? 왜 이런 걸까? 늘 고민했지. 그러다 해답을 찾았어. 그 변호사인가 뭔가 하는 영감이 대뜸 10년도 전에 사라졌던 박주완, 네 존재를 기억나게 하는 바람에. 날 언짢게 했던 사람 중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놈이 하나 있더라고. 처리된 거로 착각하고 있던 존재가, 하나.”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네 과거는 사라지지 않아.”
“당연히 사라지지 않지. 하지만 그 순간을 공유했던 놈들이 내 눈앞에서 영원히 꺼지는 것만으로도 그때를 되새길 일은 아주 많이 줄어들 거야. 안 그래?”
기가 막혔다. 우형석은 여전히 제 모든 악행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려고만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우형석의 짓궂은 행동이 낯선 사람을 향한 어린아이 특유의 경계심이 강하게 작용한 거라고 여겼다. 자신의 안전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자꾸 벽을 쌓다 보니 본의 아니게 방어 기질이 폭력적으로 표출된 거라고.
하지만 실상은 제 안에 쌓인 울분과 분노를 표출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처음에는 물건이었다가 점차 나무, 벌레, 잉어, 새, 강아지, 그리고 종국에는 주완을 포함한 사람에게까지. 우형석은 본인이 그토록 증오하는 부모와 하등 다를 게 없었다.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까지 그들을 쏙 빼닮았다.
“착각도 정도껏 하지 그래?”
“착각?”
“네 불행이 네 모든 악행의 면죄부가 되진 않아. 네가 불행했다고 다른 사람까지 불행하게 만들 권리는 없다고.”
“네놈이 알 리가 없지. 나랑 달리 손찌검 한번 안 당하고 사랑만 듬뿍 받았잖아? 우리 아버지가 널 좀 예뻐했냐고.”
“…징그러워.”
주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줄곧 냉소적인 미소를 유지하던 우형석의 낯빛이 살짝 일그러졌다. 주완은 경멸 가득한 눈으로 그를 쏘아봤다.
“그만 찡찡거려. 이것도 네 탓이다, 저것도 네 탓이다, 아직도 어린애야? 언제까지 남 탓하면서 애꿎은 사람들 괴롭히고 떼쓸 건데? 넌 예전하고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인간인 척, 스스로 수십 년 전 상처만 파고 또 파면서 끊임없이 투정 부리는 거잖아. 지긋지긋한 자기 연민에서 좀 벗어날 순 없어? 불쌍해 보이긴커녕 징그럽고 추하다고.”
우형석이 어이없다는 듯 가늘게 웃었다.
“…뒈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네.”
“이제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거야. 그게 뭐든 앞으로 네가 원하는 건 하나도 넘겨주지 않을 거라고. 넌 계속 그따위로 살아. 난 끝까지 악착같이 버텨서, 네가 망가지는 걸 똑똑히 다 볼 거니까. 이다음에 그 애를 다시 만나면 네 최후가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했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줄 거야.”
당돌한 발언에 피식하던 것도 잠시, 돌연 우형석의 낯이 굳었다. 다음 순간, 우형석은 덜컥 주완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졸랐다. 숨통이 짓눌리는 상황에도 주완은 가까스로 두 눈을 떠 우형석을 노려봤다. 고작 그런 위협에 꺾일 수 없었다.
우형석은 주완의 목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꽉 쥐면서 이를 갈았다.
“잘도. 상황 봐 가면서 까불어야지? 지금은 그딴 허세를 부릴 때가 아닐 텐데?”
팔다리가 단단히 묶인 탓에 쏟아지는 폭력에 대책 없이 노출됐다. 자칫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삶을 향한 의지와 미련 때문에라도 몸을 뒤틀며 덧없이 저항하거나 살려 달라고 애원할 법했다.
하지만 주완은 아득해지려는 의식의 끈을 붙들며 꾸역꾸역 버텼다. 몸속 공기가 턱없이 부족해지면서 눈꺼풀이 경련하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위기를 감지한 심장이 혈액을 더 빨리 돌리려 요란하게 박동했다. 윗니에 물린 입술이 찢겨 붉은 피가 흘렀다. 그에 반해 점점 하얗게 질리는 주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우형석은 짜릿한 희열에 도취했다. 두 눈은 절로 부릅떠지고 입가에는 광기 어린 미소가 걸렸다.
“안 죽을 거라며? 응? 그럼 당장 도망쳐 봐. 어떻게 빠져나갈 건데?”
있는 대로 비아냥거리며 주완의 울대뼈를 찌그러뜨릴 것처럼 강하게 옥죈다. 그로 인한 고통이 더해지며 주완의 전신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두 눈도 질끈 감겼다. 숨이 달리면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격해지고, 생리적인 눈물이 터져 눈가를 적셨다. 그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던 우형석의 낯에는 전에 없던 환희가 깃들었다.
그때였다. 우형석의 재킷 안쪽에서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우형석은 최면에서 깨어난 것처럼 움찔했다. 이내 주완의 목에서 그의 손이 풀려나갔다.
“콜록… 콜록… 하아… 하.”
주완의 얼굴이 삽시에 달아올랐다. 급격히 숨통이 트이면서 사레에 들린 것처럼 쉼 없이 된 기침을 했다. 피 역시 빠르게 돌면서 여릿한 현기증을 촉발했다. 전화를 받느라 등을 돌리고 선 우형석의 모습조차 어지럽게 너울거렸다.
“내가 우형석인데.”
우형석이 경계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주변이 꽤 고요해서 통화 상대의 음성도 언뜻언뜻 새어 나왔다. 남자인 듯했지만, 정확히 어떤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주완은 고개를 바닥에 대고 쌕쌕거리며 눈만 들어 우형석을 주시했다. 한동안 상대의 얘기만 경청하던 우형석이 슬쩍 고개를 돌려 주완을 내려다봤다. 곧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요?”
어떤 흥미로운 제안이라도 받은 것처럼 실실거린다. 뭔가 모르게 꺼림칙했다. 묶인 두 손이 꽉 주먹 쥐어졌다. 속에서 울컥 치솟는 구역감을 애써 누르며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으음.”
백도운에게서 나지막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미간도 한 번 움찔하더니 눈꺼풀 안쪽이 너울거렸다. 독한 마취약의 성분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아으으….”
깨질 듯한 머리를 움켜쥔 채 눈을 떴다. 익숙한 풍경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들어왔다. 의아한 기색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틀림없이 괴한들에게 납치돼 어딘지 모를 곳에서 깨어나거나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천장, 벽지, 방 곳곳에 놓여 있는 가구들과 몸에 감기는 침구에 감촉까지 모두 제집의 그것과 일치했다.
“일어나셨습니까.”
느닷없이 불거진 목소리에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침대 옆에 앉은 전미남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표정이랄 게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백도운을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의 상태도 평소와 사뭇 달랐다. 늘 단정하던 옷도 엉망이었고 이마와 턱, 목 주변에는 거친 표면에 쓸리고 긁힌 듯한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침잠된 두 눈에서도 실망과 원망, 자책감 따위가 엿보였다. 모두 전미남 자신을 향해 벼려진 감정들이었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목덜미를 훑고 내려갔다. 백도운은 어금니를 꽉 물고 까라지는 상체를 부득불 일으키고 앉았다. 그러곤 습관처럼 자신을 부축하는 전미남을 빤히 보면서 입을 뗐다. 늘 확신이 가득했던 그의 목소리가 머뭇거리며 흘러나왔다.
“…주완 씨는요?”
“놈들한테 잡혀갔습니다.”
“놈들이라뇨?”
“여기에 들이닥쳤던 놈들 말입니다. 그 배후에 우형석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형석? 그게 누구죠?”
“박주완 씨의 이부형젭니다.”
“……!”
백도운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주완의 이부동생이 어느 정도의 악인인지, 주완에게서 직접 들어 잘 알고 있다. 주완이 견뎌 온 삶이 너무 암울하고 안타까워서, 다시는 그 구렁텅이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가능하다면 제힘이 닿는 데까지 과거의 악연들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고, 지지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주완의 신변이 우형석에게 넘어갔다니. 이게 다 백도운 자신 때문이었다.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고도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수혁이는, 지금 어딨어요?”
“조금 전까지 이곳에 계시다가 일단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거기 가 봐야겠어요.”
“그럼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전미남이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났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도 초조해서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차의 시동을 걸 듯한 그의 손을 붙잡았다. 상황이 긴박하다는 것도 알고, 전미남을 지배하는 무력함과 죄책감을 백도운 자신도 고스란히 느끼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의 자기 학대에 모르는 척 동조해 줄 순 없었다.
전미남의 범상치 않은 몰골만 보고도 백도운 자신이 무사한 까닭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백도운은 제 머리를 감싸느라 다 까졌을 전미남의 손등을 보면서 긴 한숨을 쉬었다.
“치료는, 하고 가요.”
두 사람이 권수혁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혔고, 하도 지압해서 관자놀이 부근이 빨갛다 못해 시퍼레지려고 했다. 시선은 바닥 어딘가에 고정돼 있었지만, 실상 그 눈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재규어는 현관문이 열리는 기척에 목을 길게 빼고 반응을 보이다가, 이내 거실로 들어온 이가 주완이 아님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고개를 앞발에 툭 떨어뜨렸다. 누군가가 챙겨 줬을 고깃덩어리는 이빨이나 발톱 자국 하나 없는 온전한 상태도 뒹굴고 있을 따름이었다.
“권수혁.”
“…….”
권수혁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주먹을 더 꽉 움켜쥘 뿐이었다. 손등에 도드라진 핏줄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그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그는 당장 우형석을 찾아가 그의 본거지를 초토화했을 거였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건 오로지 주완 때문이었다. 주완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어서. 권수혁의 도발에 행여 상대가 주완에게 해라도 가한다면. 우형석과 주완의 사이가 결코 좋았던 게 아니라 더 걱정됐다.
애써 권수혁을 위로하지는 않았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어쭙잖은 위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주완을 무탈하게 돌려받을 방법이었다.
뾰족한 수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상대가 어떤 미끼에 반응할지, 주완을 얻고도 다른 미끼에 관심을 보이긴 할지 확신이 없었다. ‘우형석’이라는 미지수가 모든 방법에 제약을 걸었다.
세 사람이 아무런 대화 없이 고민만 거듭하고 있을 무렵, 집 밖에서 대기하던 수하 한 명이 안으로 들었다. 그는 권수혁 대신 전미남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더니, 낮은 목소리로 어떤 소식을 전했다. 전미남이 지체 없이 권수혁에게 다가갔다.
“대표님, 조중만이란 자가 연락을 해 왔습니다.”
“…….”
“받아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제야 권수혁이 비스듬히 전미남을 응시했다. 전미남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제 손에 들린 핸드폰만 거푸 극진히 건넸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여간한 일로 통화를 권하는 건 아닐 터였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낚아챘다.
“말씀하시죠.”
- 아, 백 대표? 나는 조중만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 바쁘다더니 통성명도 여유도 없습니까? 앞으로 잘 지내 보자고 전화했는데, 이거야 원. 섭섭합니다?
조중만이 들으란 듯이 껄껄거렸다. 대체 무슨 용건이기에 그렇게 거드름을 피우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핸드폰을 쥔 권수혁의 손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별다른 용건이 없으면….”
- 어이쿠, 생각보다 성격이 급하시네. 그럼 바로 용건부터 말씀드리죠. 다른 게 아니라, 내 아는 동생 놈이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똥개 한 마리를 주운 모양입니다. 듣자 하니 백 대표가 거둬 키우던 개라던데요? 엄연히 주인이 있으니 돌려주기는 해야 할 텐데….
조중만이 재차 웃으며 뒷말에 여운을 남겼다. 그가 언급한 ‘똥개’는 보나 마나 주완일 터였다. 그렇다면 ‘아는 동생’이 우형석이란 뜻인데, 대체 그는 조중만과 무슨 사이인 건지.
조중만과는 이렇다 할 마찰이 없었지만, 사업상 경쟁 관계였다. 적어도 조중만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가 우형석에게 백도운을 납치해 달라고 사주한 것인지도 모른다. 실상 백도운은 명의만 빌려줬을 뿐, 백무 상사의 실질적인 경영자가 권수혁이라는 걸 미처 모른 상태로 일을 벌였을 테고, 그 과정에서 애꿎은 주완이 잡혀간 듯했다.
우형석과 주완의 관계, 또 주완과 권수혁의 관계를 모르는 조중만으로선 월척을 기대했다가 잔챙이를 잡은 꼴이었다. 그래서 주완을 제거하느니 차라리 그의 몸값을 작게나마 요구하기로 작심한 모양이었다.
그 거래가 성사된다면 권수혁으로선 이득이었다. 아니, 주완을 무사히 돌려받을 수 있다면 무엇을 내준들 아깝지 않았다.
- 내일쯤, 시간 괜찮으시려나? 똥개는 키워 본 적이 없어서, 어디 한 군데 상하지 않게 보내 드리려면 최대한 빨리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만나서 천천히 통성명도 하고, 사업에 관해서 깊은 대화도 나누고요. 백 대표가 석 달 전 싱가포르 총포사와 맺었다던 계약서나 같이 보면서 말입니다.
“그러죠.”
- 오? 내가 헛소문을 접했나 보네요. 백 대표, 인정사정없는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그래도 제 식구는 살뜰히 챙기시는 게 의욉니다?
“긴말 필요 없습니다. 시간, 장소 정해서 통보하세요. 그리고 거래 물품에 약간의 하자라도 생겼을 땐 날 만나기로 한 걸 후회하게 될 겁니다.”
권수혁은 일방적으로 경고하고 전화를 끊었다. 조바심을 내거나 미련을 보이면 조중만 쪽에서도 주완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을 쥔 권수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반드시 주완을 작은 흠집 하나 없이 돌려받겠다고. 그리고 권수혁 자신이게 이 같은 상실감과 초조함을 맛보게 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 주겠다고. 거듭 다짐하며 어금니를 물었다.
“뭐래? 그쪽에서 주완 씨 데리고 있대? 그런 짓 한 이유가 뭔데? 주완 씬 멀쩡하대?”
통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백도운이 쉼 없이 질문을 쏟아 냈다. 전미남도 그와 함께 절실하게 권수혁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즈음 축 늘어져 있던 재규어가 불쑥 몸을 일으키더니 침실과 욕실, 그리고 부엌을 차례대로 오갔다. 세 사람은 그런 재규어를 눈으로 좇을 따름이었다. 이내 어디에도 주완이 없음을 확인한 놈이 잠잠한 현관 앞까지 걸어갔다. 이어 그 앞에 엉덩이를 내리고 앉는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 없는 주완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주완이 사라진 것뿐인데, 그 하나만 없을 뿐인데 권수혁도, 전미남도, 백도운도, 그리고 재규어마저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모두에게 주완의 존재가 어느새, 시나브로, 그렇게나 커져 버렸다.
***
차창으로 촘촘한 가로수가 빠르게 지나갔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이유 없이 시선이 머물렀다. 몸은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 있건만, 마음만은 다시 병원에 갇힌 듯했다.
우형석에게 붙잡힌 이후로 줄곧 권수혁과 전미남, 백도운을 생각했다. 그 집에 혼자 남겨져 혼란스러웠을 재규어도 자꾸 마음에 얹혔다. 우형석의 수하들이 백도운이나 재규어에게 해를 가한 건 아닌지, 뒤늦게 상황을 알았을 권수혁과 전미남은 또 얼마나 경황이 없었을지. 모두 밥은 먹었을까. 잠은 제대로 잤나. 주완 자신을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럴 수 없으리란 걸 알아서 자꾸 애가 닳았다.
‘잘 놀고 있어. 늦지 않게 데리러 올 테니까.’
‘네, 기다릴게요.’
그 작은 약속조차 지키지 못했다. 권수혁과 함께 집에 돌아가면 꼭 제 마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과욕이었을까. 주완 자신이 너무 욕심을 내서 이런 일이 생긴 건가. 끝도 없이 자괴감이 몰려왔다.
“다 왔습니다, 형님.”
상념에 빠진 사이, 차가 멈춰 섰다. 내내 눈을 감고 있던 우형석이 먼저 문을 열고 내렸다. 그러곤 얼른 따라 내리지 않는 주완의 멱살을 잡아 억지로 끌어냈다.
주완이 제 옷깃을 움켜쥔 우형석의 손을 홱 떨쳐 냈다. 우형석의 바로 손을 들었다. 금방이라도 반항하는 주완의 때려 응징할 기세였다. 그의 수하들이 습관적으로 긴장하며 험악한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하지만 우형석은 허공에 들린 손을 한 번 꽉 주먹 쥐었다가 펴며 도로 내렸다. 딱히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저 순간의 화로 조금 후에 맛볼 즐거움을 망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걸어.”
우형석은 우악스럽게 주완의 등을 떠밀었다.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생김새의 건물이 시야에 들어찼다. 흰 외벽, 네모반듯한 창과 촘촘한 창살, 그리고 그곳에 고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까지. 자연스럽게 지난 10년을 갇혀 지냈던 정신 병원이 떠올랐다. 다만 그곳은 일반 병원이 아닌 ‘치료 감호소’라는 게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여긴 왜….”
“여기로 이감됐다더라고.”
“누가.”
“박주완, 너도 한 번쯤 보고 싶었을 사람.”
우형석은 전의 그 묘한 미소를 지으며 재차 주완을 거칠게 밀었다. 왜인지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누차 걸음에 제동이 걸렸다. 우형석은 제 성미대로 주완의 옷깃을 막무가내로 그러쥐고 안으로 데려갔다.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고 면회실로 이동했다. 2평 남짓한 면회실에는 창문조차 없었고, 테이블과 의자 4개가 전부였다. 우형석은 그중 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주완은 그 옆에 앉지 않고 뒤쪽으로 물러나 서 있었다. 갇힌 공기가 퀴퀴하고 갑갑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밖이 조금 어수선해지더니, 한 중년 여성이 교도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면회실로 들어왔다. 주완과 우형석, 두 사람의 어머니였다.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몰골이 몰라보게 초췌해졌다.
어머니는 기력이 없는지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멀거니 떠진 두 눈은 탁하기 그지없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보는 것 같지 않았다.
우형석 역시 제 맞은편에 앉은 어머니를 간단히 일별했다. 아픈 어머니를 향한 애틋함 따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쩌다 이렇게 됐죠?”
“담당 교도관 말로는 수감 초기부터 이상 행동을 보였다고 합니다. 밤마다 죽은 남편이 찾아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면서 난동을 피우고, 벽에서 벌레가 기어 나와 자신의 몸을 갉아 먹는다고 자해를 했다나 봐요. 처음 교도소 측에서는 일시적인 착란 증세라고 판단했던 모양인데, 갈수록 상태가 나빠져서 결국 이쪽으로 이감 조치됐습니다. 지금은 약물 치료를 받고 있어서 안정을 되찾은 상태고요.”
치료라는 말이 무색하게, 어머니는 도무지 산 사람 같지 않았다. 공허한 눈동자나 낯빛 어디에서도 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역시 정신 병원에서 숱하게 봤던 모습이었다. 얼마 전까지 주완 자신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였다.
교도관들은 말씀 나누라며 한쪽으로 물러났다. 우형석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변해 버린 어머니를 보는 그의 입술이 알게 모르게 샐쭉거렸다.
주완은 그 자리, 그대로 서서 어머니를 살펴봤다. 그 곱던 피부가 말도 못 하게 상해 있었다. 긴 소매 바깥으로 살짝 드러난 손에는 할퀴고, 후벼 판 듯한 상처들이 즐비했다. 소매 안쪽의 상태는 대체 어떻다는 건지.
퀭한 두 눈은 시종 테이블 어딘가만 주시하고 있었다. 실로 그녀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어 주완이나 우형석을 보지 않았다.
“날 보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우형석이 먼저 말꼬를 텄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형석이 가느다랗게 휘파람을 불어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등을 의자에 잔뜩 기대고 삐뚜름하게 앉은 탓에 자세가 한없이 불량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모자가 아니라, 채무자와 채권자 혹은 원수 간이라 생각했을 터였다.
어머니는 상처투성이인 두 손을 연신 꼼지락거렸다. 메마르고 부르튼 입술을 거푸 머금었다가 뱉으며 한참을 머뭇거린다. 그 모습이 자못 가엾어 보였지만, 우형석의 두 눈에는 적개심만 가득했다.
주완도 덤덤하게 그 광경을 마주했다. 어머니는 그 자신의 죄로 처벌받고 있을 뿐이었다. 안타깝다거나 측은하다는 감정을 그녀에게 소모하는 건 낭비였다.
어머니는 한참 만에야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입술이 너무 건조한 나머지 입을 떼자마자 찢어져 몽글몽글 피가 맺혔다.
“형석아, 아가….”
우형석이 과장된 몸짓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더니 어머니에게 저를 가리켜 보인다.
“나요? 난 또, 누굴 그렇게 간드러지게 부르나 했네. 하던 대로 해요. 왜 이래, 갑자기?”
“엄마한테 이러지 마. 잘못했어. 엄마가, 엄마가 다 잘못했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다 엄마 잘못이야. 엄마가 그러면 안 됐던 건데. 이제라도 사과할게. 응?”
“됐어요. 이런다고 판사가 감형이라도 시켜 준대? 왜 안 하던 짓을 해.”
“대체 어떻게 하면 되겠어? 어떻게 해야 네 화가 풀리겠냐고.”
어머니는 답답하다는 듯이, 억울해 죽겠다는 것처럼 주먹을 꽉 쥐었다.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마저 그렁그렁했다.
늦은 사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은 이미 벌어졌고, 다시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이제 그만 용서하라는 애원마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란 걸, 가해자들은 모른다.
“안 돼요. 어떻게 해도 안 되니까, 괜히 기 쓰지 마요. 지금 이렇게 사과한다고 그 일들이 없던 게 되나? 당신이 이제 와서 뉘우친들 내 조진 인생이 다시 시작되냐고. 하여간 뻔뻔하기로는 당할 사람이 없지. 누릴 만큼 누렸으면 이제 정산해야지. 그게 뭐가 그렇게 억울한데?”
“형석아….”
“씨발. 개명이라도 해야겠네. 자꾸 그 입에 내 이름 담지 마요. 귀 썩을 것 같으니까.”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너 제대로 못 돌봤던 거? 그건 어쩔 수 없었잖아. 나도 고생 많이 했어. 이 한 몸 부서져라 일해서 너 먹이고, 입히고… 너 하나만큼은 결손 없이 잘 키워 보려고….”
어머니를 화를 냈다가 애원하고 다시 호소하기를 반복했다. 어떻게든 우형석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는 절박함에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쉬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두서없이 뱉어 내던 어머니가 불현듯 우형석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오직 우형석만 보며 매달리느라 미처 그곳에 서 있던 주완을 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너무 놀라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마저 훤히 보일 정도였다.
오만 감정이 교차했다.
하지만 꼬박 10년 만에 마주한 어머니에겐 애절함이나 그리움은 물론 분노, 서운함, 배신감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서 슬펐다. 천륜으로 이어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인데도 이제는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됐다는 게. 길 위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에도 그처럼 무감하지는 않을 듯했다.
한 번쯤은 평범한 어머니가 돼 줄 수 없었을까. 설사 사랑하지 않았던 남자에게서, 어떤 대가를 바라고 낳은 아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몸을 열 달이나 빌려 태어난 생명에게 아주 조금만 애정을 줄 순 없었나. 믿을 사람이라곤 자신뿐이었던 어린 자식을 딱 한 번만 보호해 줄 수는, 정말 그럴 수는 없었던 걸까.
“주, 주완아….”
주완을 부르는 어머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가득 채운 눈물이 기어이 뺨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언제든 어머니를 다시 만나면 그동안의 울분을 다 쏟아 내리라고 다짐하고 또 했다. 그녀로 인해 병원에 갇혔고, 10년을 허무하게 보냈다. 자칫 그대로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던 삶이었다.
그런데 막상 어머니를 마주하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즈음 문가에 물러나 있던 교도관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시간 다 됐습니다. 못 나누신 얘기는 다음 기회에 하시고, 그만 돌아가 주시죠.”
주완에게 고정돼 있던 어머니의 눈길이 우형석과 주완, 그리고 면회가 끝났음을 알리는 교도관 사이를 어지럽게 오갔다. 다른 교도관이 마저 다가와 어머니의 팔을 하나씩 붙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어머니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앙상해진 사지를 비틀며 발악했다.
“저 애도, 저 애도 내 아들이에요! 내 보호자라고요! 그렇지, 주완아? 엄마 좀 풀어 줘! 엄만 미치지 않았어! 그건 정당방위였으니까, 난 아무 죄도 없다고! 네가 엄마 좀 도와줘. 응? 주완아, 내 아들! 안 들려요? 저 애도 내 아들이라고!”
어머니는 온몸으로 버티면서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교도관들이 난색을 보이며 주완을 응시했다.
늘 생각했다. 손가락을 물어뜯어 제 이름을 몇 번이나 상기하고, 세상으로 다시 나오기 위해 몸까지 내주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어머니나 우형석과 한 가족인 채로 남지 않겠다고. 그들과 이어진 악연의 고리를 반드시 끊어 내겠다고.
주완은 테이블에 딱 붙어서 어떻게든 버티려는 어머니를 똑똑히 보며 대답했다. 언젠가 계부에게 무참히 유린당하던 저를 철저히 외면했던 그녀가 그랬듯, 무감한 표정과 어투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악을 쓰며 울부짖을 듯했던 그녀는 자신을 부정하는 주완에게 거한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눈물을 줄줄 쏟으면서 헤벌어진 입술을 바르르 떨 뿐이었다. 그 후 그녀는 뿌리가 다 잘려 나간 나무처럼 더 버티지 못하고 교도관들에게 끌려 나갔다. 면회실 문이 굳게 닫혔을 때, 주완은 지긋지긋한 악연 하나가 끊겨 나갔음을 실감했다.
슬프지 않았다. 가슴이 아프지도 않았다. 다만 그게 유일무이했던 관계의 최후라는 사실이 조금은 씁쓸하고 허무했을 따름이었다. 어머니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했던 건지, 또 주완 자신은 무엇 때문에 그런 고난을 겪어야 했는지. 결국에는 모든 게 무위로 돌아갔다. 어머니가 그토록 탐했던 것들은 다 망가지고 부서졌다. 탐욕의 흔한 말로였다. 생각할수록 입 안이 썼다. 그리고 돌연 외로워졌다. 이제 정말 혼자가 된 것 같았다.
홀로 어머니를 향한 복잡한 감정을 하나하나 매듭짓고 있는데, 우형석이 별안간 낄낄거렸다. 비어져 나올 듯 말 듯 하던 웃음은 치료 감호소를 벗어나자마자 왁자하게 터졌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눈꼬리에 눈물까지 맺혔다.
“그 여자 낯짝 봤어? 거의 뭐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표정이던데? 이럴 줄 알았으면 동영상이라도 찍어 둘걸. 다시 못 볼 거라고 생각하니까 좀 아쉽네. 그 여자 만나면 박주완 넌 뭐라고 지껄일지 내심 궁금했는데, 조곤조곤 사람 먹이는 재주가 있네?”
“이제 너 하나 남았어.”
“…뭐?”
“네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죗값을 받았잖아. 너라고 예외가 되면 안 되지.”
우형석은 픽 쪼개더니 덜컥 주완의 목을 움켜잡았다. 돌발적인 상황에 그의 수하들이 적잖이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곳이 경찰서는 아니라지만, 엄연히 사법 기관이 선고한 형을 집행하는 교정 기관이었다. 남들의 시선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형석은 거리낌이 없었다. 손끝에 힘을 줘서 주완의 숨통을 더 바짝 조인다.
“더 해 봐.”
“…윽.”
“응? 더 지껄여 보라고.”
순식간에 낯을 굳히고 주완을 몰아붙인다. 주완은 움츠러들기는커녕 그런 우형석의 팔을 두 손으로 꽉 쥐며 버텼다. 어느 한쪽이 부러져야 끝날 듯한 대치였다.
“형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결국 우형석의 수하가 그를 만류하고 나섰다.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사방에 설치된 CCTV를 번갈아 보기도 했다.
우형석은 주완의 목을 움켜쥔 채 그를 제 차까지 끌고 갔다. 그러곤 수하가 열어 준 뒷좌석 문 안으로 그를 확 밀쳐 집어넣었다. 갑자기 숨통이 트이면서 참았던 숨이 엉망으로 터져 나왔다. 주완은 얼얼한 목을 부여잡은 채 쉼 없이 기침했다. 금세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도 하얘졌다.
그러는 사이 차량은 문을 닫고 우형석의 집으로 출발했다.
한참 만에야 진정된 주완은 쓰게 미간을 구기며 비통 섞인 날숨을 뱉었다. 우형석과는 만나지 말았어야 할 인연이 아닐까. 어린 시절, 뜻하지 않게 서로 얽혀서 두 사람 모두 그 전보다 불행해졌다는 점 때문에라도.
“하여간 박주완, 넌 네 주제를 너무 몰라. 예나 지금이나 뭘 믿고 그렇게 기고만장한지. 그래 봤자 명만 재촉할 뿐이야. 오래 살고 싶으면 살살 길 줄도 알아야지.”
“남 탓하는 건 여전하네. 약자만 골라 괴롭히면서.”
“약한 게 잘못이니까. 약해 빠진 주제에, 강해지려고 하지 않는 게 죄라고.”
“너야말로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 없어. 여전히 비열하고 찌질해.”
“…근데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우형석이 손을 내질러 주완의 얼굴을 창문 쪽으로 확 떠밀쳤다. 그 바람에 머리를 창문에 격하게 부딪쳤다. 골 전체가 왕왕 울렸다.
“진짜 죽고 싶냐?”
“…못 죽이잖아.”
“뭐가 어째?”
“나한테 또 기생하려는 거잖아, 너.”
주완은 눈살과 콧잔등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우형석을 노려봤다. 우형석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하, 했다. 하지만 전처럼 주완의 목을 조르지는 못했다. 주완이 추가로 상속받은 유산 때문이든, 그의 몸값 때문이든 확실히 당장은 그를 죽일 수 없었다.
우형석은 순순히 손을 물리는 듯하더니 곧장 칼을 꺼내 주완의 뺨에 가져다 댔다.
“죽이진 못해도 아가리를 찢어 놓을 순 있지. 그 정도로는 잘 안 뒈지거든. 그러니까 다치기 싫으면 그만 까불고 닥치라고.”
주완의 피부가 베이지 않을 만큼만 그의 뺨을 압박하던 우형석은 칼을 집어넣지 않고 이리저리 돌리면서 실실댔다.
혐오스러웠다. 더는 우형석과 한 공간에서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와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역겨웠다. 그리고 이제 미약한 존재가 아닌데도 여전히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제 무력함에 넌더리가 났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형석에게 잡혀 짐짝처럼 끌려갔다. 버티려고 하면 우형석은 더 거칠게 주완을 휘둘렀다. 그 탓에 머리부터 팔꿈치, 손, 무릎, 등, 발까지 부딪치고 찍히지 않는 곳이 없었다. 방바닥에 내던져졌을 땐 깨질 것처럼 욱신거리는 몸을 작게 웅크렸다.
“고작 이 정도로 빌빌거리면서 센 척은.”
“…결국 넌 외톨이가 될 거야.”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우형석이 같잖다는 듯 혀를 찼다.
“뭐가 어째?”
“너 혼자, 외롭고 비참하게 죽을 거라고.”
“넌 뭐 다르고? 피붙이 하나 안 남은 건 너나 나나 피차 마찬가지 아냐? 아니면 나 모르게 새끼라도 까 놨어? 어디 믿을 구석이라도 있냐고. 설마 백도운인가 뭔가 그놈?”
“…….”
“궁금하더라고. 어떤 새끼가 너처럼 쓸모도 없는 놈을 돈까지 주고 사 갔을까 싶어서. 김준오라는 의사 놈하고 거래했다는 걸 보면 네 장기라도 필요했나 본데, 네가 이렇게 어디 한 곳 떼이지도 않고 멀쩡히 살아 있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혹시 그쪽인가? 박주완, 너 자지도 후릴 줄 알잖아. 죽은 내 아버지란 작자도 그렇고, 네가 갇혀 있던 정신 병원에도 한 놈 있었다며? 네 후장 핥고 싶어서 발정 난 개새끼가. 백도운도 그런 거야? 그 새끼한테 날마다 뒤 대 주면서 붙어살던 거냐고?”
주완은 제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잔뜩 비아냥거리는 우형석에게 주먹을 갈겼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격에 우형석의 얼굴이 확 돌아갔다. 뼈와 뼈가 부딪친 건지 뻑 하는 마찰음마저 울렸다. 꽉 말아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붉어진 피부는 벌써 붓는 듯했다.
그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주완이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그 사람을 모욕하지 마. 네 더러운 입에 올릴 이름 아니야!”
우형석은 얼얼한 턱을 문지르며 다시 주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낯빛에는 분노와 짜증, 그리고 당혹감이 묻어났다.
주완의 어깨를 불시에 확 걷어찼다. 주완의 몸이 뒤로 젖혀지면서 그의 뒤통수가 여지없이 벽과 충돌했다. 머리 전체가 띵하게 울리는 감각에 나직이 신음하며 바르작거렸다. 우형석은 재차 그의 어깨를 밟아 일어나지 못하게 고정했다.
그 와중에도 주완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경멸 어린 눈빛으로 우형석을 노려봤다.
“뭔데, 너….”
우형석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그처럼 독기 오른 주완의 모습을 보는 건 꼬박 10년 만이었다. 그 10년 동안 주완이 정신 병원에 감금돼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본래 그는 제 분을 이기지 못해 칼이나 주먹을 휘두르는 성정과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상대의 도발을 무시했으면 무시했지, 웬만해서는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이려 들지 않았다.
못 본 새 성격이 달라진 걸까. 아니면 백도운이 그만큼 소중하다는 건가.
놀란 눈으로 주완과 대치하고 있는데, 대뜸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무런 대꾸가 없자 문밖의 수하가 들어가겠습니다, 한다. 그러곤 문을 열고 들어와 꾸벅 인사하더니 핸드폰을 건넸다. 긴한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조중만 사장입니다.”
앞서 조중만에게 백도운은 놓쳤지만, 그의 식구 한 명을 잡아 왔다고 보고했다. 우선 조중만의 반응을 보고 향후 거취를 정하기 위해서였다. 주완을 확보한 것만으로도 조중만과의 거래는 파투 나도 상관없었다. 다만 그가 주완을 흔적 없이 없애라고 한다면 그에게서도 사례금을 받게 될 테니,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네, 납니다.”
앞선 기대에 젖어 조중만의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지시는 전혀 뜻밖이었다. 주완을 대가로 백도운과 거래하기로 했으니, 그를 흠집 없이 잘 데려오라니. 대체 주완이 백도운이란 자에게 어떤 존재이기에, 조중만의 뻔한 수작에도 호락호락 응하는 걸까. 뭔가 모르게 꺼림칙했다.
당장 주완을 사무실로 데려오라는 조중만에게 건성으로 대답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바로 가죠.”
통화를 마친 우형석은 핸드폰을 제 수하에게 휙 던졌다. 그러곤 여전히 저를 향해 씩씩거리는 주완을 돌아봤다.
아무래도 주완이 백도운과의 거래에서만큼은 꽤 좋은 패가 될 것 같았다. 그런 그를 고작 계약서 한 장에 돌려줄 수야 없었다. 백도운이 그를 대가로 어디까지 내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더구나 아직 주완의 손을 빌려야 할 문제도, 서로 풀어야 할 회포도 남아 있었다.
어쩌면 백도운은 거래에 응하는 척하면서 조중만을 무력으로 제압할 작정인지도 몰랐다. 오히려 그쪽이 악명 자자한 위인의 처세다웠다. 그가 대체 무슨 속셈인 건지 먼저 확인해 봐야 했다.
피식 웃은 우형석은 주완을 남겨 놓고 방에서 나갔다. 그러곤 으레 저를 따르려던 사내에게 단단히 일렀다.
“넌 여기나 잘 지키고 있어. 저 새끼 없어지면 그날도 너도 담가 버릴 테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겠습니다, 형님.”
사내가 사뭇 비장하게 대답했다. 우형석이 거느린 수하 중에서 가장 믿음직한 자라지만, 그 하나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우형석은 몇몇 수하들을 더 제집 안팎에 배치해 놓고야 차에 올랐다. 그 ‘백도운’을 만날 생각에 제법 흥분됐다.
조중만은 양손의 검지를 연신 부딪치며 내처 시계만 봤다. 백도운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한참 초침만 좇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었다. 그러곤 창가의 블라인드를 들쳐 바깥쪽을 내다봤다.
이윽고 사무실로 접근하는 두 대의 차가 눈에 띄었다. 차들이 정차하고, 조수석에서 내린 사내가 뒷좌석의 문을 열어 줬다. 거기에서 한 남자가 내려 건물을 올려다봤다.
조중만은 서둘러 블라인드를 내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소용없게도 인터폰이 울리자마자 지레 어깨를 움찔했다. 긴장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건만, 소문이 워낙 안 좋은 상대라 저도 모르게 자꾸 위축됐다. 기세에서 밀리면 상대에게 말리기 십상이었다. 재차 마음을 다잡았다.
“무슨 일이야?”
- 대표님, 백도운 씨가 도착했습니다.
“안으로 모셔.”
응답을 마치고 헛기침해서 목을 가다듬었다. 어깨도 부러 넓게 펴며 느긋함을 가장했다.
머지않아 이쪽입니다, 하는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곧 문이 열리고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따라 한 곱상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조중만의 예상과 달리 그리 다부진 체격은 아니었다. 훤칠하고 늘씬한 데다 피부까지 새하얘서 엘리트적인 분위기를 풍길 따름이었다. 소문 속 ‘백도운’은 말만 경영자지, 조폭에 가까운 이미지였는데, 실제의 그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하긴, 본업은 의사라고 했던가.
물론 백도운의 얼굴이라면 진작 확인했다. 다만 사진이 하나같이 오래된 것들이라, 현재 모습은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저도 모르게 그의 이미지를 바꾸고, 잔뜩 부풀려 상상한 모양이었다. 흐린 기억을 되짚어 보면 사진 속 인물과 눈앞의 남자는 동일인이 맞았다.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먼저 악수를 청했다. 조중만에게 내민 손끝이 티 없이 깨끗했다. 정체 모를 위화감이 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도운입니다.”
차분한 목소리도 지난밤 통화했던 그 백도운이 맞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악수를 기다리는 남자의 두 눈에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행동도, 말투도 어색한 부분 없이 자연스러웠다. 적어도 그가 타인을 연기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조중만에게 악수를 청한 남자는 다름 아닌 백도운,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우형석은 뒷좌석에 깊숙이 기대어 앉아 백도운에 관해 생각했다. 그와 주완이 대체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다. 주완을 돌려받는 대가로 흔쾌히 손해를 감수하려는 백도운의 선택으로 보나, 그를 조금 욕보였기로서니 화를 내며 달려들던 주완의 행동으로 보나 두 사람을 단순한 공생 관계로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 짧은 시간에 돈독한 신뢰를 쌓은 것도 아닐 테고.
단편적인 정황들을 머릿속에서나마 이리저리 끼워 맞춰 봤다. 의문은 금세 풀릴 듯 풀리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정이 하나 떠올랐지만, 설마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즈음 운전석의 수하가 연신 룸미러를 힐긋거리며 보고했다.
“형님, 뒤차가 계속 따라오는데요?”
고개를 돌려 뒤쪽을 확인했다. 수하의 말대로 검은 세단 한 대가 유유히 쫓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우연히 진행 방향이 같을 뿐인 건지, 정말 미행 아닌 미행을 하는 건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계속 가.”
우형석의 지시에 수하는 전과 다름없이 차를 몰았다. 머지않아 큰 도로가 나타났다. 그 앞에 잠시 정차해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렸다. 뒤따르던 검은 세단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운전석의 수하는 뒤차가 못내 신경 쓰이는 눈치였다. 룸미러를 연신 힐금거리던 그가 별안간 두 눈을 홉떴다. 아직도 적색 등에 불이 들어와 있고, 정지선 위에는 우형석의 차가 버젓이 정차해 있는데도 검은 세단이 계속 달려왔기 때문이다. 속력을 낮추긴커녕 오히려 더 가속하는 것 같았다.
놀란 수하가 어어, 하자 우형석도 다시 뒤를 돌아봤다. 곧 그도 뒤차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검은 세단은 흡사 그의 차를 덮칠 기세로 매섭게 돌진해 왔다. 충돌한다. 뇌리에 위험 경보가 울린 찰나, 기어이 검은 세단과 우형석의 차가 격하게 부딪치며 폭발음 같은 충돌 소음을 냈다.
순식간에 차체가 종잇장처럼 구겨지면서 우형석의 몸이 앞으로 확 떠밀렸다. 삽시에 차 안에는 비명과 고성이 터졌다. 유리가 깨지면서 그 파편이 좌석 위로 후드득 쏟아지고, 내장재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사방에서 팽팽하게 터져 오른 에어백이 머리와 가슴을 강타했다. 돌지 않는 타이어가 노면에 마구 마모되는 소음이 귀청을 찢을 것처럼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한바탕 소요가 지나고, 겨우 몸을 추스른 우형석은 재빨리 사태를 파악했다. 머리가 터졌는지 뜨끈한 피가 얼굴 옆면을 타고 줄줄 흘렀지만, 그딴 데 연연할 틈이 없었다.
곧 그의 시야에 제 차 후미에 틀어박힌 검은 세단이 들어왔다. 선팅이 짙어 탑승자의 실루엣밖에 확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일 거였다.
상대 차량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사고의 충격으로 그쪽의 탑승자들도 기절하거나 다쳤을지 몰랐다. 전방 주시 태만이나 운전 미숙으로 인한 사고일까. 자살하려는 게 아니고서야 일부러 사고를 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은근히 움트는 불쾌한 예감을 애써 누르고 상대의 기색을 예의 주시할 때였다. 불쑥 검은 세단의 바퀴가 공회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찌그러진 우형석의 차가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검은 세단의 운전자가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명백한 고의였다.
어두컴컴한 우형석의 방에 덩그러니 남겨진 주완은 손을 거푸 주먹 쥐었다가 펴 보았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시큰거림이 가시지 않았다. 뼈 주위의 붓기도 여전한 걸 보니 근육이나 인대 쪽에 기어이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어떻게 해도 욱신거리는 손을 무릎 위에 가만히 얹어 놓았다. 고작 한 대 쳤기로서니 이런 꼴이 되다니, 볼썽사나웠다.
사실 손이 아픈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설사 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같은 상황이라면 몇 번이고 우형석에게 달려들었을 터였다. 우형석이 지칭한 게 백도운이든, 권수혁이든 그들을 함부로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전처럼 소중한 존재들이 다치고, 사라지는 걸 무력하게 지켜보긴 싫다. 어떻게 해야 그들을 보호해 줄 수 있을 만큼 강해질 수 있을지.
우형석에게 잡혀 온 지 고작 사흘이 지났다. 그런데도 체감은 3년 남짓이 된 것 같았다. 병원을 나온 뒤로 하루하루가 아쉽기만 했는데, 너무 즐겁고 행복했던 나머지 1분 1초가 이렇게 더디게 흐른다는 걸 그새 잊었나 보다.
무심한 시간을 그저 견디는 것에는 인이 박였다. 그런데도 전에 없이 괴롭고 초조한 건 그리움 때문이었다. 권수혁, 백도운, 전미남, 그리고 재규어까지. 다들 주완 자신을 걱정하고 있으리란 생각에 자꾸 속이 탔다. 어쩌면 다시는 그들을 만날 수 없으리란 이른 절망에 피가 말랐다.
주완 자신이 다치고 위험해지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단지 권수혁의 약점이 되기는 싫었다. 그의 또 다른 상처로 남고 싶지 않다.
‘늦지 않게 데리러 올 테니까.’
권수혁의 마지막 인사는 고요하던 주완의 안에 큰 파동을 일으켰다. 이제까지 그 누구도 해 주지 않았던, 가장 절실했던 한마디였기 때문이다.
돌연 울컥했다. 오랜 시간, 적막하고 아득한 심연에 잠겨 있던 감정의 샘이 일상의 침강을 틈타 치솟는 느낌. 무릎을 가슴까지 끌어당겨 안았다. 그 위에 이마를 애절하게 비비적거렸다. 그럴수록 새삼 혼자라는 게 실감 났다.
“…보고 싶어.”
딱 한 번만 더 재규어를 꽉 끌어안고 싶었다. 단 1분 만이라도 권수혁을 다시 만나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어딘가에서 주완 자신을 굽어보고 계신다면 부디 그 기회를 주시길. 절실히 기도하며 질끈 눈을 감았다.
순간, 쾅 하는 소음이 울렸다. 잇따라 문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흐억!”
“누구냐! 으악!”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음이 계속 들렸다. 사람의 비명과 뭔가를 때리고 부수는 소리가 거푸 어지럽게 뒤섞였다. 고개를 들고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가슴이 쿵쾅쿵쾅 기묘하게 요동쳤다.
나가 봐야 할까. 어쩌면 지금이 도망칠 절호의 기회일지 몰랐다.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시선은 한결같이 문에 고정돼 있었다.
그때였다. 귀에 익은 짐승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주춤주춤 문가로 향하던 걸음이 우뚝 멎는다. 심장의 박동은 더 맹렬해졌다.
“저, 저리 가! 저리… 그으아악…!”
단말마의 비명이 터졌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그와 함께 밖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완이 예의 주시하던 문 바로 너머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주완은 그대로 얼어붙어서 서서히 내려가는 문손잡이를 주시했다. 입술이 살짝 벌어졌지만, 섣불리 어떤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극도의 긴장으로 침조차 삼키기 버거웠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확 벌어졌다. 주완이 미처 침입자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크고 검은 그림자가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맥없이 뒤로 넘어졌다. 두 팔에 가득 들어차는 양감도, 털의 감촉도, 체온까지도, 하다못해 어깨를 누르는 앞발의 무게까지도 익숙했다. 반사적으로 질끈 감았던 눈을 얼떨떨하게 떠 올렸다. 곧장 시야를 가득 채우는 재규어의 모습에 주완의 얼굴이 푸근하게 풀어졌다.
“수남아.”
재규어의 이름을 부르자 절로 목이 멨다. 재규어는 주완의 부름에 응하듯 그의 얼굴에 제 얼굴을 사정없이 문질러 댔다. 주완 역시 두 팔로 재규어를 꼭 품어 안았다. 꿈이 아니었다. 속이 속절없이 뭉클해졌다.
재규어를 먼저 들여보내 놓고 뒷정리를 하던 전미남은 뒤늦게 숨을 돌리며 격하게 재회하는 둘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풍문에는 의사 면허도 가지고 있다던데, 그런 분이 왜 이 험한 데 몸담고 계시는지 궁금하네요. 단지 가업이라섭니까? 의사 정도면 고고하게 존경받으면서 잘 먹고 잘살 수 있을 텐데요. 가업이야 바지 사장을 앉혀도 되는 일이고. 숨만 쉬어도 알아서 돈 벌어다 주겠다, 액받이 노릇도 해 주겠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나한테 관심이 많으시네요?”
“워낙 배경이 화려하고 희귀해서 말이죠.”
백도운은 대수롭지 않게 픽 웃었다.
“합법적으로 사람한테 칼을 댈 수 있거든요, 의사는. 필요하면 그 자리에서 사망 진단서도 뗄 수 있고.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것 같더라고요.”
대놓고 협박하거나 힘을 과시하지 않는다. 싱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해도 허세나 허풍을 떠는 것 같지 않았다. 그에 관한 안 좋은 소문들을 너무 많이 접해서 지레 사리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즈음 백도운이 재킷 소매를 걷어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조중만의 집무실에 도착한 지도 벌써 30분이나 지났다. 그동안 주완에 관한 얘기는 일절 나누지 않았다.
만약 주완이 조중만의 수중에 있다면 지금처럼 시간을 끌 이유가 없을 터였다. 조중만으로서도 싱가포르 총포사와의 계약을 한시라도 빨리 가로채고 싶을 테니까.
“설마 이렇게 친목이나 다지려고 날 만나잔 게 아니었을 텐데요? 피차 바쁜데, 뜬구름 잡기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거래하기 전에 상품의 상태부터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게 이쪽의 기본 원칙이고 관례니까, 당연히 응해 주시겠죠?”
“그야 물론입니다.”
조중만은 흔쾌히 답하면서도 슬그머니 백도운의 시선을 피했다. 예상대로 당장 주완을 보여 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조중만은 바짝바짝 타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벽에 걸린 시계를 힐금댔다. 소매를 들춰 손목시계를 확인하지 않는 건 불안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수작이었다. 아닌 척하면서 초조하게 시침을 좇는다. 그런 강중만을 슬쩍 떠봤다.
“무슨 문제라도?”
“아니요. 그럴 리가요.”
조중만이 고개를 저으며 딱 잘랐다. 그러면서도 주완을 불러들이려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주완이 우형석의 본거지에 잡혀 있거나 우형석과 함께 이리로 오고 있다면 전미남이나 권수혁이 반드시 그를 구해 낼 터였다. 그건 결국 주완을 이곳에서 만나게 될 일은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더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백도운은 곧 미련 없이 일어났다. 조중만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만 가 봐야겠습니다.”
“잠깐! 백 대표, 당신 똥개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겁니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해 보시죠. 대신 그 이후부터 벌어질 일들도 감당하셔야 할 겁니다.”
백도운은 재차 싱긋 웃어 보이곤 등을 돌렸다. 그대로 조중만의 집무실을 빠져나오려는데, 등 뒤에서 쩔꺼덕 장전되는 소리가 들렸다. 잇따라 조중만이 멈춰, 했다.
백도운에게서 긴 날숨이 터져 나왔다. 그는 곧 조중만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조중만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위화감이 들었던 건 그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총구마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기를 다루는 게 어설퍼 보였다.
“갈 땐 가더라도 위임 계약서는 놓고 가시지.”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요?”
“뭐야? 이 애송이가, 죽고 싶어? 내가 네놈 하나 어쩌지 못할 것 같아?”
“전부터 누누이 말했잖습니까.”
머리에 총구가 겨눠진 상황에도 백도운은 여유를 부렸다. 그 점이 조중만을 더 조마조마하게 했다. 손끝에 걸린 방아쇠가 긴장으로 반쯤 당겨졌다.
그때 집무실 문이 벌컥 열어젖혀졌다. 지레 놀란 조중만이 짜증스럽게 호통쳤다.
“누가 들어오랬어!”
잔뜩 일그러졌던 조중만의 얼굴이 탁 펴졌다. 백도운은 여전히 그를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팔을 쭉 뻗어 조중만에게 콜트를 겨눴다. 비서가 잠잠했던 걸 보면 이미 바깥은 완전히 소탕된 모양이었다.
아무리 상황을 유리하게 해석해 보려 해도 절망적일 뿐이었다. 조중만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그의 몸은 벌집이 되고 말 거였다.
백도운은 한 사내에게서 콜트를 가져가더니 직접 손에 잡았다. 그러곤 바로 방아쇠를 당겨 천장의 형광등을 날려 버렸다. 탕, 소리에 조중만이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두 팔로 제 머리를 감쌌다. 유리 파편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그 위로 쏟아졌다.
“나를 적으로 돌리는 건 조 사장님 자윱니다. 뒤늦게 후회하는 것까지도요. 분명히 말해 두지만, 이게 마지막 경고가 될 겁니다.”
백도운이 웃음기라곤 없는, 서늘한 얼굴로 선언했다. 그 순간만큼은 권수혁의 대리인이 아닌, 악명 높은 백무 상사 대표 그 자체 같았다.
끼기기긱. 서로 다른 차체가 엇갈리면서 고막을 찢을 듯한 쇳소리가 났다. 마찰한 부위에선 섬광마저 일었다. 대책 없이 밀리던 우형석의 차가 가드레일에 끼이면서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우형석의 차를 완전히 찌그러뜨릴 기세로 밀어붙이던 세단 쪽에서는 여전히 바퀴가 헛도는 소리가 들렸다. 기어이 끝을 볼 작정인 듯했다.
“씨발… 저 새낀 뭐야, 대체!”
왈칵 짜증을 내며 뒤를 돌아봤다. 그것만으로도 지독한 어지럼증이 몰려들었다. 충돌 당시 차체에 격하게 부딪혔던 머리가 꽤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밀어도 가드레일에 걸린 차가 꿈쩍하지 않자, 검은 세단이 서서히 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우뚝 멈춰 섰다. 상향등을 번뜩이며 숨을 고르던 세단의 바퀴가 돌연 빠르게 회전했다. 그대로 돌진해서 뒷좌석을 납작하게 뭉개 버릴 것 같았다.
우형석의 수하가 불안한 눈빛으로 룸미러를 보며 히익, 숨을 삼켰다.
“어, 어떻게 할까요, 형님!”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이 병신 새끼야! 밟아!”
우형석의 수하는 시키는 대로 액셀을 질끈 밟았다. 그러자 가드레일에 끼인 범퍼에서 스파크가 일면서 또다시 거센 쇳소리가 났다. 심하게 구겨진 차체도 가속되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파들파들 흔들렸다.
우형석의 차가 더디게 가드레일에서 벗어나는 사이, 뒤쪽으로 물러났던 세단이 빠르게 질주해 왔다.
“형님! 옵니다!”
“씨발, 밟아! 밟으라고!”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느리게 후진하던 우형석의 차는 세단과 충돌하기 직전, 간신히 방향을 틀어 도로 위로 미끄러졌다. 찰나나마 뒤쪽 범퍼를 찍히면서 차체가 크게 휘돌았지만, 가까스로 방향을 다잡고 신호도 무시한 채 달려 나간다.
들이받힌 범퍼가 한쪽만 떨어진 건지, 가속할수록 노면에 끌리는 소음도 점점 커졌다. 하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문제의 세단이 투우장의 소처럼 우형석의 차 뒤꽁무니를 집요하게 따라온 까닭이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달려들면 공격하는 저도 무사하지 못하리란 걸 뻔히 알 터였다. 그런데도 앞뒤 가리지 않고 몰아붙이니, 웬만한 원한이 아니고서는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대체 누구일까. 우형석 자신을 죽이지 못해 안달 난 자는.
우형석의 차는 인근의 고속 도로로 접어들었다. 검은 세단은 이번에도 그를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액셀을 풀로 밟아도 세단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다시금 뒤를 들이받히고 말았다. 그로 인해 우형석의 몸이 앞쪽으로 확 쏠렸다. 순간적으로 핸들이 크게 꺾이면서 차가 큰 원을 그리고 미끄러졌다. 뒤따르던 차들이 가까스로 충돌을 피하며 쨍한 경적을 울리고 지나갔다. 시시각각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 심장이 살갗을 뚫고 나올 것처럼 어지럽게 쿵쾅거렸다.
정신을 차린 운전석의 수하는 다시 핸들을 잡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진행 방향 반대쪽으로 돌아가 있던 차머리가 비로소 본래의 궤도를 되찾았다. 세단이 기다렸다는 듯 추격해 왔다.
“저 개새끼가….”
연신 뒤를 돌아보며 욕설을 지껄이던 우형석이 다짜고짜 운전석의 수하를 끌어냈다. 금방이라도 제 차를 덮칠 듯 말 듯 하는 세단의 도발에 부아가 치밀었다. 계속 꼴사납게 도망치느니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나을 성싶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자리를 바꾸려는 우형석의 돌발 행동에 운전석의 수하는 도리어 핸들을 더 꽉 움켜쥐었다.
“형님, 왜 이러십니까?”
“나와, 새끼야!”
“위험합니다!”
“씨발, 나오라고!”
우형석은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것 같았다. 질주 중인 차 안에서 자리를 바꾸는 것 자체도 어불성설이었지만, 흥분한 그에게 운전을 맡기는 것 또한 자살 행위였다. 자칫하면 차가 전복되는 큰 사고로 이어질 게 뻔했다.
운전석의 수하는 생존 본능을 발휘해 꾸역꾸역 버티면서 브레이크를 밟았다. 급정거로 인해 차체가 또다시 앞으로 크게 쏠렸다. 안전띠를 매지 않았던 우형석의 몸도 앞 좌석 사이로 튕겨 나갔다. 뒤따라오던 세단조차 그 같은 상황을 예기치 못했는지, 간신히 충돌을 피하며 옆으로 비켜 갔다.
가속으로 예민해진 핸들을 급격히 꺾은 탓에 검은 세단도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넓은 도로를 속수무책으로 가로질러 끝내 중앙 분리대에 처박힌다. 그러고도 정차하지 못해서 차체 옆면이 죽 긁혀 나갔다. 충격이 제법 컸는지 세단 쪽에서도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과열된 엔진 소음만 간간이 들려올 따름이었다.
우형석은 그 틈에 운전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안전띠도 매지 않은 채 핸들을 틀었다. 찢긴 이마에서 재차 피가 흘러 시야를 방해할 정도였지만, 그런 데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전방에서 고요히 숨을 고르고 있는 세단을 노려봤다. 그렇게 겁 모르고 달려들수록 우형석의 구미만 자극할 뿐이었다. 우형석은 히죽 입꼬리를 올리며 힘껏 액셀을 밟았다. 그의 차가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그 속도 그대로 달려들었다간 우형석 본인의 안전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우형석은 곧장 세단을 향해 돌진했다. 최후를 예감한 그의 수하들이 일제히 눈을 질끈 감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우형석만은 큰 소리로 웃으며 액셀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흥분으로 확장된 시야에 세단의 운전석이 가득 들어찼을 무렵, 거한 엔진 소음과 함께 세단의 바퀴가 맹렬하게 휘돌았다. 이어서 세단이 빠르게 후진해서 달려오던 우형석의 차를 피했다. 두 차체가 재차 살짝 얽힌 찰나, 세단의 운전자가 핸들을 강하게 오른쪽으로 틀면서 우형석의 차가 같은 방향으로 떠밀려 회전했다. 타이어 마모 소음과 쇳소리가 쉼 없이 울려 퍼졌다.
빙글빙글 헛돌던 차는 곧 쿵 하는 소리를 내며 어딘가에 처박혔다. 잇따라 차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이번만큼은 우형석도 격통 어린 신음을 참지 못했다. 핸들과 부딪친 흉부에서 묵직한 통증이 올라왔다.
“…크윽.”
우형석은 눈살을 찌푸리며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차는 반쯤 뜯겨 나간 가드레일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오른쪽 앞바퀴는 이미 도로 밖 벼랑으로 미끄러져 나갔고, 도로 위에 얹힌 건 남은 세 바퀴뿐이었다. 여차하면 10m 아래 맨땅으로 처박힐 신세였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다급히 사이드 미러를 봤다.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검은 세단은 어느새 우형석의 차 뒤편에 와 있었다. 폴대로 당구공을 쳐 내듯 차를 들이받아 벼랑으로 밀어 버릴 모양이었다.
순순히 당해 줄 수 없었다. 우형석은 핸들을 최대한 오른쪽으로 틀고 급격한 후진을 시도했다. 뜻대로만 된다면 앞바퀴를 다시 도로 위로 올릴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 순간, 먼 곳에서 굉음이 들리더니 두 대의 세단이 더 나타났다. 문제의 세단과 차종도 같고, 차창까지 온통 새까맣게 선팅된 모습이 한패인 게 분명했다.
두 대의 차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우형석의 차 양옆으로 바짝 붙었다. 벼랑으로 몰린 앞쪽을 제외하고 완전히 포위된 셈이었다.
멍청히 있다간 개죽음을 당할 판이었다. 어떻게 위기를 벗어날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뒤쪽의 세단이 우형석의 차로 맹렬히 돌진해 왔다.
쾅 소리와 함께 차가 크게 꿀렁이며 좀 더 벼랑으로 밀려났다. 순식간에 앞바퀴 모두가 허공으로 떠밀리면서 차체가 갸우뚱했다. 우형석은 숨을 삼키며 서서히 핸들에서 손을 뗐다. 그의 수하들도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희게 질렸을 따름이었다. 숨이라도 허투루 쉬었다가는 가늘게 흔들리는 차가 기어이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그 와중에 핸드폰 벨 소리가 사납게 울렸다. 발신자는 보나 마나 조중만일 거였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당최 핸드폰이 어디에 떨어진 건지도 모르겠고,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 황천길을 밟을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단 한 번도 달가운 적 없던 경찰차 사이렌이 귓전에 닿았다. 천국의 종소리가 그와 같을까. 달갑게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경광등을 번쩍이며 달려오는 경찰차 서너 대가 보였다. 누군가의 난폭 운전 신고를 받고 출동한 듯했다.
한 번 더 우형석의 차를 들이받을 심산인지 뒤로 물러나던 검은 세단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대로 경찰에 붙잡힌다면 가해자는 그쪽이 될 게 뻔했다. 처음부터 고의적인 접촉 사고를 낸 것도 그쪽이니까. 더구나 이번 일만 처벌받으면 다행이지, 여죄까지 탈탈 털릴 여지도 없지 않았다.
같은 계산을 했는지 검은 세단이 차를 돌렸다. 우형석의 차를 양쪽에서 압박하던 두 대의 차도 덩달아 방향을 틀더니 곧장 현장을 벗어났다. 아직 남아 있던 검은 세단이 우형석의 차를 조금 지나쳐서 잠시 정차했다. 그러곤 대뜸 운전석의 차창을 내렸다.
“뭐….”
“…….”
피할 새 없이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짙은 눈썹, 그 아래 깊이 자리한 날카로운 눈매가 한 마리 흑표범을 연상케 했다. 고요한 얼굴 곳곳에 굵직한 핏대가 일어서 아직 다 풀리지 않은 분노가 엿보였다. 굳게 다물린 그의 입 안에서 이 갈리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이 자가 백도운인가? 멍하던 뇌리에 파문이 일었다. 의문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틀림없이 백도운이다. 그가 아닌 다른 누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의 세단은 경찰차가 코앞까지 들이닥쳤을 즈음에야 창문을 닫고 출발했다. 그리고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형석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 눈빛은 대체. 저를 향한 적나라한 살의가 느껴졌다. 굳이 얼굴을 보였던 건 언젠가 기필코 죽이겠다는 선전 포고나 다름없었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불시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내달렸다.
“하하… 아하하하하하하!”
뒤늦게 도착한 경찰이 운전석의 창문을 두드렸다. 괜찮으시냐, 창문 좀 내려 보시라, 잇단 요구에도 우형석은 미친 듯이 웃어 젖혔을 따름이었다.
백도운은 허겁지겁 집 안으로 들어섰다. 조중만의 사무실에서 돌아오던 길에 전미남으로부터 무사히 주완을 데려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욕실 앞에 갈아입을 옷을 내려놓던 전미남이었다. 그 뒤쪽에서 재규어가 닫힌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백도운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안절부절못한다.
“주완 씨는요?”
“씻고 있습니다.”
전미남은 현관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곤 백도운이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구두를 반대로 돌려 가지런히 정리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왜요? 나 걱정했어요?”
“내내 몸 상태가 안 좋으셨으니까요.”
“뭐, 나쁘지 않았어요. 오랜만에 총 쏘니까 신나더라고.”
전미남의 고개가 벌떡 들렸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백도운을 수행하는 사내들에게 총기를 들려 보내긴 했다. 그런데 실제로 쏘기까지 했다니, 적잖이 놀란 기색이었다. 백도운의 입가에 비죽 얄궂은 웃음이 번졌다.
“놀라긴. 살짝 겁만 줬어요. 아무도 안 다쳤고. 그럼 된 거 아닌가?”
백도운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재규어에게 다가갔다. 수남이도 잘 다녀왔어, 하며 살갑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전미남은 깊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백도운의 곁을 지나칠 땐 눈동자를 굴려 정말 다친 곳이 없는지 샅샅이 살폈다.
그 시선을 눈치챈 백도운이 픽 웃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낼 줄 모르는 사람이 미미하게나마 반응을 보이는 게 즐거웠다. 묘한 정복욕이 생겨서, 조금 더 확실하고 분명한 반응도 이끌어 내고 싶어졌다. 아마 초반에 주완을 대하는 권수혁의 마음도 비슷했을 터였다. 지금이야 다르겠지만.
그즈음 욕실의 물소리가 멎었다. 내내 그 앞을 서성이던 재규어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닫힌 문을 바라봤다. 머지않아 문손잡이가 내려가며 문이 열렸다. 벌어진 문틈으로 후덥지근한 수증기가 확 뿜어져 나왔다.
“주완 씨!”
“선생님.”
“괜찮아요? 어디 다친 곳은 없어요? 어디 한번 봐요.”
백도운이 얼른 주완을 밖으로 끌어냈다. 주완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민망해하지 않았다. 그의 팔을 잡고 이쪽저쪽으로 돌려 보면서 꼼꼼하게 확인했다.
“목에 이거 뭐야? 어쩌다가 이랬어요?”
“아, 별거 아니에요.”
주완이 슬그머니 손자국 일색인 목을 가렸다. 그 손조차 부어올라 있었다. 팔목과 발목에도 케이블 타이로 결박되면서 긁히고 쓸린 상처가 보였다. 무릎을 비롯한 몸 곳곳에도 크고 작은 피멍이 든 상태였다. 백도운은 그 꼴로도 괜찮다며 저를 안심시키는 주완을 와락 끌어안았다.
“뭐가 별거 아니야. 이렇게 다쳐 놓고.”
“…죄송해요.”
“주완 씨가 사과할 일이에요?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미안해요, 나 때문에.”
주완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은 백도운의 잘못도 아니었다. 더구나 드물게 흐트러진 그의 모습이나 그에게서 풍기는 바람 냄새로 그 역시 전미남과 재규어처럼 주완 자신을 찾으려 동분서주했다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몸도 다 낫지 않았을 거였다. 주완으로서는 백도운과 전미남, 그리고 재규어가 우형석에게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무사해 줘서 고마울 뿐이었다.
주완은 전미남이 준비해 준 옷을 입고 도운에게 이끌려 침실로 들어갔다. 재규어가 으레 그 뒤를 따라왔다.
백도운은 주완을 침대에 앉혀 놓고 대뜸 그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주완이 긴가민가하며 슬쩍 제 손을 그 위에 얹었다. 백도운은 씩 웃으며 눈에 띄게 부은 주완의 손에 살살 약을 발라 주었다. 그러는 동안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다.
“일단 내일까지만 지켜보고, 붓기가 안 가라앉으면 같이 사진 찍으러 가요.”
“네.”
뒤에서 두 사람을 잠자코 관망하던 재규어가 불쑥 몸을 일으키더니 주완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주완이 놈의 볼을 간질이듯 살살 긁어 주자, 놈의 두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꼬리도 느른하게 저어졌다.
이윽고 전미남이 싱싱한 고기를 꺼내 와 침실 문 앞에 내려놓았다. 주완이 없는 동안 먹이를 먹는 둥 마는 둥 했다고 했다. 주완은 제 곁에 딱 붙어 있으려는 재규어의 엉덩이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수남아, 얼른 가서 밥 먹어.”
재규어는 주완에게 등 떠밀려서야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터벅터벅 먹이를 향해 다가가던 놈은 불쑥 멈춰 서더니 주완을 돌아봤다. 꼭 주완이 잘 있는 걸 확인하려는 듯했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고기를 뜯어 먹는 동안에도 한 번씩 고개를 들고 주완을 빤히 보기도 했다. 놈에게도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치료를 마친 주완은 먹이를 먹는 재규어 옆에 딱 붙어 앉았다. 예전이었다면 으르렁거리며 경계했을 재규어가 슬그머니 꼬리를 주완에게 얹어 놓고 식사에 열중했다. 그만큼 배가 고팠던 건지, 힐금힐금 주완을 확인하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살며시 제 곁을 내주는 놈이 고맙고 대견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별안간 현관문 밖이 시끌시끌했다. 재규어를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던 주완의 어깨가 지레 움찔했다. 먹이 먹는 데 집중하던 재규어도 고개를 들고 소란스러운 현관을 내다봤다. 곧 도어 록의 비밀번호가 입력되고 잠금장치가 풀렸다. 이어 문손잡이를 잡아 내리는 손길에 여유가 없었다.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주완은 멍하니 문을 열고 들어오는 권수혁을 응시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런 주완을 마주하던 권수혁이 구두도 벗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재규어가 불쑥 몸을 일으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권수혁은 놈을 쓰다듬어 줄 여유도 없이, 주완에게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
“…….”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들썩이는 권수혁을 빤히 보다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시선만은 그의 얼굴에 고정한 채였다. 또다시 속에서 뭉클한 기운이 치솟았다. 괜히 울컥해서 입술을 꼭 물었다. 손끝이 속절없이 저릿저릿했다. 주먹을 꽉 쥐어 봐도 소용이 없었다. 온몸의 세포가 아리도록 조여졌다. 더는 견디기가 버거웠다.
주완은 권수혁에게 달려들어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에 제 이마를 짙게 문지르기도 했다. 그때까지도 넋을 빼고 서 있던 권수혁이 얼떨떨하게 손을 뻗어 주완의 허리와 등을 힘껏 조여 안았다. 주완의 뜨끈한 목에 그의 고개가 완전히 파묻혔다. 그리웠던 서로의 체취가 담뿍 풍겼다. 괴로울 만큼 속이 저렸다. 목 안쪽도 먹먹해져 왔다.
그럴수록 더 필사적으로 서로를 끌어당겼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권수혁은 한참 만에야 주완을 놓아주었다. 그제야 주완도 권수혁의 품에 파묻혔던 고개를 들었다. 숨 쉬기가 곤란했던지 두 뺨이 은근한 홍조를 띠며 달아올라 있었다. 숨결도 조금은 가쁜 듯했다. 물기 어린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엉망으로 쓸려 삐죽삐죽 솟은 상태였다.
그런 꼴로 권수혁을 살피는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동그란 눈동자가 천천히 구르면서 권수혁의 이마, 눈썹, 눈, 코, 입을 꼼꼼히 들여다본다. 내내 그리던 그 모습이 맞는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신중한 눈빛이었다.
“안 다쳤어요?”
“너야말로….”
권수혁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멈칫했다. 주완의 흰 목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을 발견한 직후였다. 덜컥 주완의 얼굴을 붙들고 목의 상흔을 세밀하게 살펴봤다.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두 눈에도 새빨간 분기가 어렸다.
주완이 그런 권수혁의 손을 제 손으로 꼭 감싸 잡았다.
“보고 싶었어요.”
권수혁에게서 까마득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내 그는 주완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어기적거리며 두 사람을 따라가려던 재규어는 덜컥 백도운에게 붙들렸다. 그 직후, 침실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성가신 백도운을 떨쳐 내려던 재규어는 매정히 닫힌 침실 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놈과 마찬가지로 전미남도 갑작스러운 전개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였다.
백도운은 문전 박대 당한 게 제 탓인 양 눈가를 씰룩거리며 으르렁대는 재규어를 장난스럽게 주물럭거렸다. 양 볼을 쭉쭉 당길 때마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여지없이 드러났지만, 주완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스스럼이 없었다.
“그나저나 오늘 밤은 어디에서 자야 하나?”
백도운이 누구든 들으란 듯이 푸념했다. 하지만 전미남은 못 들은 것처럼 일절 반응하지 않았다.
“그 미친놈이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모르는데, 맘 편히 집에 갈 수도 없고.”
“…….”
“이런 부탁 염치없지만, 오늘만 미남 씨 집에서 신세 지면 안 될까요?”
가증스럽게 눈썹을 늘어뜨린 채 전미남을 본다. 전미남은 꿋꿋이 철벽을 쳤다.
“거절하겠습니다.”
“와, 매정하다. 어떻게 생각해 보지도 않고 단칼에 거절할 수 있어요?”
“하루 이틀 안에 정리될 일이 아닙니다.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머무르시려면 차라리 호텔 쪽이 더 편하고 안전할 겁니다. 예약이라면 제가 대신 해 드리겠습니다.”
“미남 씨 집은 안 어지를게요. 우리 사이에 비싸게 굴지 말고….”
“안 됩니다.”
또다시 딱 잘라 사절한다. 백도운은 그런 전미남을 마뜩잖게 보다가 재규어를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사하게 이러기예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백도운이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전미남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웬만한 옹벽도 그처럼 단단하진 않을 듯했다.
백도운은 긴 한숨을 뱉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요. 쓸데없는 도발 같은 것도 안 할게요. 그럼 됐죠?”
“…….”
“아, 호텔에서 토끼까지 받아 줄 리가 없잖아요!”
“그게 문제라면 제가 데려가서 돌보겠습니다.”
“수남이는 어쩌고요? 얘 그냥 여기 두게?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줄 알고. 미쳤어요?”
전미남의 눈동자가 백도운이 턱짓한 침실 쪽을 향했다가 금세 반대편으로 굴러갔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그의 두 귀가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백도운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면 뭐, 미남 씨가 토끼랑 수남이를 둘 다 보겠다고요? 내 토끼가 털 하나 다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집주인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쳐들어가려는 이유가 어디까지나 토끼 때문인 것처럼 강조에 강조를 더한다. 전미남은 미간까지 구겨 가며 생각에 잠겼다. 권수혁의 집으로 데려온 내내 재규어를 피해 소파 구석에 숨어 나오지도 않는 토끼가 신경 쓰이지 않을 리 없었다.
전미남은 곧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다.
“약속하신 것들, 꼭 지키셔야 합니다.”
“알았다니까.”
백도운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소파 앞에 납작 엎드렸다. 그러곤 그 밑에서 웅크린 채 떨고 있던 토끼를 조심히 끄집어냈다. 전미남이 녀석에게 달려들려는 재규어를 단단히 붙잡아 두었다.
“가죠.”
백도운은 오늘따라 더 사랑스러운 토끼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면서 흔쾌히 앞장섰다. 전미남은 왜 자신이 집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자꾸만 버티려는 재규어를 어르고 달래 그 뒤를 따랐다.
닫힌 문 위로 떠밀린 주완의 두 눈이 반사적으로 질끈 감겼다. 서서히 눈꺼풀을 들자, 코앞까지 밀려온 권수혁의 얼굴이 보였다. 이어 콧날이 서로 스치고, 인중 위에 그의 입술이 폭 내려앉았다. 윗입술이 그의 입술 사이로 살짝 빨려 들어갔다. 거친 몸짓에 비해 한없이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권수혁은 주완의 윗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가 놓으며 가까이에서 그의 얼굴을 직시했다. 주완의 턱을 붙든 그의 손가락이 부드러운 뺨을 가만가만 어루만졌다. 더듬더듬 눈동자를 들어 권수혁과 시선을 맞추던 주완이 먼저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곤 슬쩍 발뒤꿈치를 들며 먼저 권수혁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딪쳤다.
권수혁이 고개를 비틀면서 곧장 떠밀려 와 주완을 도로 문에 바짝 밀어붙였다. 그의 턱을 꾹 짓누르며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입술 새로 미지근한 제 혀를 뭉텅 비집어 넣는다. 입술이 뜨겁게 벌어지며 달짝지근한 살덩이가 밀려들었다. 주완은 고개까지 살짝 젖힌 채 막무가내로 밀려드는 권수혁의 혀를 삼켰다. 구석에 짜부라져 버린 제 혀도 찔끔찔끔 움직여 권수혁의 혀 겉면을 할짝거리기도 했다.
권수혁이 그 감질나는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주완의 혀를 막무가내로 짓이겼다. 숨통이 짓눌릴 만큼 몰아붙였다가 쪽 흡착해 당기고, 다시 사정없이 문질러 짓뭉갰다. 금세 입 안 가득 타액이 고이면서 젖은 마찰음이 났다. 호흡하기가 불편했지만, 싫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게, 샅샅이 침범해 줬으면 했다.
주완은 두 손으로 권수혁의 팔과 셔츠를 붙들었다. 권수혁이 은근히 매달려 오는 그의 허리를 감싸 당기며 그의 다리 사이로 제 무릎을 꾹 밀어 넣었다. 여지없이 허벅지에 주완의 작은 엉덩이가 얹혔다.
“…읏.”
돌 같은 허벅지와 사타구니가 짙게 엉기면서 주완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알게 모르게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키스에만 열중하던 권수혁이 두 눈을 서서히 떠 올려 그런 주완을 주시했다. 숨이 달린 주완의 두 귀와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불안하게, 혹은 초조하게 권수혁을 담아내는 두 눈에는 어느새 여릿한 물기마저 고였다.
머릿속에 여릿한 현기증이 돌았다. 권수혁은 그를 당기던 뭔가가 뚝 끊긴 것처럼 다시 주완을 덮쳤다. 그러자 주완이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할 말 있어요.”
“나중에….”
재차 달려드는데, 이번에는 살짝 고개를 돌려 피한다. 거듭 제동이 걸리자, 권수혁이 호흡을 억누르며 주완의 두 눈을 직시했다. 주완이 눈동자가 머뭇머뭇 굴러와 권수혁을 비쳤다.
“지금, 해야 돼요. 또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좋아해요.”
“…….”
“처음에는 동질감이었고, 그다음은 묘한 연대감이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당신한테 머무는 내 눈길에, 당신에 관해서라면 사소한 거 하나까지 궁금한 내 마음에, 계속 곁에 있고 싶은 내 욕심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게 됐어요. 그래서 너무 혼란스러웠는데… 당신이 날 안아 주는 게 좋아요. 키스할 때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아무래도 내가 많이 좋아하는 것 같….”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권수혁의 얼굴이 떠밀려 왔다. 주저하며 달싹여지던 주완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폭 부드럽게 감싸였다. 짧은 입맞춤 후 천천히 고개를 뗀 권수혁이 주완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왜인지 그가 그렇게 애틋하게 누군가를 본 적은 없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서로의 조심스러운 숨결이 간질간질하게 뺨에 퍼졌다. 보이지 않는 뭔가가 끊길 듯 말 듯 했다.
그러다 주완이 먼저 다급히 입술을 겹쳤다. 권수혁은 기껍게 그 서툰 키스를 받아들이면서 그를 불쑥 안아 올렸다. 권수혁의 얼굴을 붙잡고 있던 주완이 두 팔을 길게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침대로 가면서 서로의 입술을 감미롭게 머금고, 혀를 핥았다. 경계심 많은 물고기가 입질하듯 촉, 촉 하는 소리가 났다.
권수혁은 침대 위에 주완을 눕혔다. 그러곤 거푸 그와 키스하면서 제 타이와 셔츠 단추를 풀었다. 살냄새가 짙어지자 주완의 몸이 은근히 더 긴장되는 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당돌하게 권수혁의 얼굴을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권수혁은 주완의 도톰한 아랫입술과 혀를 동시에 머금어 쪽 빨아 당겼다가 놓아준 후 허리를 세웠다. 그러곤 어깨에 걸려 있던 셔츠를 확 벗어젖혔다.
긴 목에서부터 어깨, 두툼한 가슴, 잘록한 허리로 이어지는 선이 완연히 드러났다. 적당한 부피와 완벽한 모양새로 빚어진 근육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윤곽을 자랑하며 꿈틀거렸다. 주완의 목울대가 미세하게 너울거렸다. 권수혁은 픽 웃으면서 제 몸을 멍하니 관망하는 그를 핀잔했다.
“하룻강아지도 너처럼 겁이 없진 않을 거야.”
그 미소가 더없이 근사했다. 주완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제게 다가오는 권수혁을 끌어당겼다. 몸을 지탱해 주는 매트리스가 그의 체중만큼 눌려 들어갔다. 권수혁은 주완의 귓가에 쪽, 쪽 입을 맞추면서 그의 티셔츠를 말아 올렸다. 긴 손가락이 옆구리, 배, 가슴을 차례로 쓸며 올라왔다. 갓 목욕한 탓에 수분을 머금은 피부의 감촉이 더 짙게 손가락 안쪽에 맞닿아 왔다. 주완은 입술을 꽉 물고 조마조마하게 어떤 순간을 기다렸다. 머지않아 권수혁의 손가락이 유두를 가볍게 짓이겼다. 주완은 두 눈이 질끈 감으며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기도 했다.
권수혁은 작고 부드러운 살점을 지분거리면서 급격히 뜨끈해지는 주완의 귓등을 진득이 핥았다. 주완이 끙 소리를 내며 바르작거렸다. 입술로 잘근잘근 그의 귓바퀴를 머금으면서도 엄지로 작은 살점이 폭 파묻힐 때까지 짓궂게 문질러 눌렀다. 주완의 무릎이 알게 모르게 발끈거리며 권수혁의 허리를 조여 왔다.
“…으읏.”
고개를 비틀어 은근히 날을 세우는 턱선에 입을 맞췄다. 그대로 점점이 입술을 붙이며 목으로 내려와 얇은 살갗을 한 번 흡착했다.
“…아읏!”
기분 좋게 달뜨던 주완의 호흡이 일순 확 말려 들어갔다. 참다 참다 터트리던 신음도 전과 달리 날카로웠다. 멈칫한 권수혁이 팔을 뻗어 침대 옆 스탠드를 켰다. 은은한 스탠드 불빛에 단순한 명암이라기에는 억지스러울 만큼 선명한 얼룩이 보였다. 손자국이었다.
권수혁은 얼떨떨한 눈으로 주완의 목을 보면서 울혈이 진 부위를 매만졌다. 흥분에 잠식됐던 뇌리에 우형석의 낯이 떠올랐다. 어금니가 꽉 물렸다. 눈동자도 날카롭게 벼려졌다.
주완이 두 손을 뻗어 권수혁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그제야 권수혁이 눈을 맞춰 왔다.
“나만 봐 주세요. 나만 생각해요, 지금은.”
권수혁에게서 나직한 한숨이 터졌다. 이내 그는 고개를 숙여 주완의 이마에 꾹 입술을 눌렀다. 이어 눈썹에도, 눈꺼풀에도 감미롭게 입술을 내려앉힌다. 주완의 손을 끌어당겨 언젠가 재규어의 이빨에 긁힌 자리에도 입을 맞추면서 나직이 다짐했다.
“다시는 나 외에 누구도 네 몸에 어떤 흔적도 못 남기게 할 거야.”
주완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곤 옅게 웃었다. 그 입꼬리에 연이어 입술을 붙이면서 티셔츠를 마저 끌어 올렸다. 주완이 슬쩍 고개를 들어 옷 벗기는 걸 도왔다. 목깃에 쓸린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솟았다.
권수혁은 손수 그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쓸어 넘겨 주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주완의 빗장뼈 중앙부를 가만히 누르면서 불거진 목울대를 덥석 머금었다. 혀로 복숭아 씨앗에 나붙은 과육을 발라내듯 울대뼈를 촘촘히 머금고 쪽쪽 빨아 당겼다. 그러는 동안 목 아래쪽을 지그시 누르던 손은 느긋하게 미끄러져 주완의 가슴과 복부를 쓸어내렸다. 예민한 부위에서 촉발되는 찌릿한 자극과 점점 사타구니로 다가가는 손길에 주완의 어깨가 거푸 들떴다.
권수혁의 손이 주완의 바지 안으로 들어갔다. 그대로 진득이 주완의 중심부를 쓸고 들어가 말랑한 성기와 허벅지 안쪽을 잇달아 매만지며 손을 내렸다. 그 손등에 걸린 바지와 속옷이 덩달아 끌려 내려왔다. 주완의 무릎과 그 뒤쪽 오금까지 간질이듯 쓸어내리던 권수혁이 자연스럽게 하의를 벗기고 주완의 발목을 붙들었다.
권수혁은 혀를 내밀어 주완의 목에서부터 배꼽까지 천천히 핥고 내려왔다. 발목을 쥔 채 느른하게 복사뼈를 마사지하던 손도 종아리 뒤쪽에서 시작해 오금을 지나 허벅지, 그리고 엉덩이까지 간질이듯 쓸고 올라왔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은밀하면서 농염한 손길에 주완의 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대놓고 성기를 자극한 것도 아닌데, 중심부로 맹렬하게 열이 몰렸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옆구리를 따라 올라오던 권수혁이 뜨끈해진 혀로 주완의 유두를 짓눌렀다.
“읏…!”
아슬아슬한 기류에 애꿎은 침대 시트만 움켜쥐던 주완의 상체가 발끈 들떴다. 권수혁은 그런 주완의 반응을 눈에 담으며 입술을 조여 작은 살점을 빠듯하게 조였다. 그러자 주완이 질끈 눈을 감으면서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쪽 소리를 내며 흡착했을 땐 무릎이 움찔거리고, 두 발이 거푸 미끄러졌다. 이를 꽉 물고 있어도 대책 없이 신음이 샜다.
“하읏… 읏… 아으으.”
권수혁은 작은 유두를 혀로 비비적거려 편편하게 눌렀다가 재차 쪽 빨아 당겼다. 주완이 조금이라도 그 느낌에 적응할 즈음에는 단단한 이로 말캉한 살점을 잘근거려 자극했다. 간질간질하면서도 저릿한 감각이 전신으로 솟구쳐 나갔다. 가랑이 안쪽으로 뭉텅뭉텅 열이 뭉치면서 성기가 점점 더 딱딱해졌다.
권수혁이 보란 듯이 혀를 내더니 가슴골을 가로질러 갔다. 그대로 반대편 유두를 오목해지도록 혀끝으로 꾹 짓눌렀다. 그를 당기는 주완이 손길이 한결 절박해졌다. 권수혁은 그런 주완의 반응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면서 아직 부드러운 살점을 혀로 진득하게 짓뭉갰다가 쪽, 쪽 힘주어 빨아 당겼다. 안쪽으로 폭 파묻혀 들어갔던 작은 살점이 뾰족하게 머리를 세우며 부드러운 혀와 점막에 문질러졌다.
“읏, 아, 하읏….”
주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일반적인 섹스에선 보통이지만, 그에게는 전에 없이 길 전희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사지를 바르작거린다.
권수혁은 제 타액을 뒤집어쓴 채 단단해진 두 유두를 엄지로 가만가만 굴리면서 주완의 목을 핥고 올라갔다. 그대로 말캉한 귓불을 머금어 당겼다가 놓곤 귓바퀴를 덧그리듯 핥아 나갔다. 귓구멍 안으로 혀끝을 밀어 넣자, 주완의 복부가 권수혁의 복부와 절로 맞닿을 정도로 들썩거렸다.
개의치 않고 귀 안쪽을 지분거리면서 그의 허벅지에 대고 제 하반신을 가만가만 비벼 댔다. 이윽고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딱딱하고 거대한 살덩이가 툭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권수혁이 밑을 비벼 댈 때마다 이미 발기할 대로 발기한 그의 성기가 연한 살갗에 짙게 문질러졌다. 그러면서 주완의 음낭까지 덩달아 진득하게 쓸렸다.
젖은 귓가에 퍼지는 권수혁의 숨소리가 장황해졌다. 그의 어깨와 등도 가쁘게 들썩거렸다. 허벅지 안쪽을 문지르는 행위도 점점 더 깊고 맹렬해졌다. 어떻게 봐도 그는 제 페이스를 애써 누르며 주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으읏, 그, 그냥….”
몰려드는 자극들에 끙끙거리던 주완이 겁도 없이 권수혁을 제게 끌어당겼다. 돌처럼 단단해진 허벅지와 엉덩이, 어느 쪽도 손가락에 눌려 들어가지 않았다. 지레 놀라 멈칫했다. 그제야 제 처지를 깨달았다. 거하게 부풀어 오른 권수혁의 몸에 형체도 없이 짜부라질 것 같았다.
권수혁은 어줍게 저를 끌어당기던 주완의 손을 잡아 그 위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러곤 눈만 치켜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의 의사를 재확인했다.
“…그냥?”
주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권수혁에게서 옅은 한숨이 터졌다. 반면에 입꼬리는 살짝 비틀려 올라갔다.
다음 순간, 권수혁에 의해 하체가 발랑 뒤집혔다. 무릎이 가슴과 맞닿으며 허리가 급격히 반으로 접혔다. 그로 인해 얼굴로 새빨갛게 피가 몰렸다. 고개를 들고 아래쪽 상황을 살피는 주완의 낯에 짙은 당혹감이 퍼졌다.
“앗… 왜, 그….”
권수혁은 훤히 드러난 주완의 구멍을 가만가만 쓰다듬어 봤다. 그러자 주완의 두 다리에 발끈 힘이 들어갔다. 제 다리 사이로 아래쪽을 주시하는 주완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 눈을 똑똑히 보다가 그의 엉덩이 골에 서서히 고개를 파묻었다. 뒤늦게 그 행위의 목적을 눈치챈 주완이 재게 고개를 저었다.
“흣, 안 돼, 응… 읏, 아읏!”
예민한 곳이 미지근하게 젖어 드는 감각에 도리질하던 주완의 고개가 뒤로 확 젖혀졌다. 권수혁은 팔 하나로 그의 두 다리를 짓누르고 종아리를 붙들어 제압하곤 훤히 드러난 구멍을 거푸 진득하게 핥아 올렸다. 구멍 주변의 주름이 반지르르하게 젖으면서 한결 촘촘해졌다. 낯선 자극에 움찔움찔하는 구멍 안으로 혀끝을 밀어 넣었다.
“하지… 읏, 하지 마, 으읏, 세요… 하으, 읏….”
주완이 생경한 감각에 놀라 허둥거렸다. 구멍이 부드럽고 농밀하게 후벼지며 질척대는 느낌과 날렵한 콧날이 연방 회음부를 닿아 문질러지는 미묘한 자극에 자꾸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권수혁은 과실을 머금듯 거리낌 없이 주완의 구멍을 핥고 흡착하며 그의 성기를 위아래로 살살 쓸었다.
“응, 읏… 하으… 응….”
주완의 허리가 연신 비틀렸다. 발갛게 익은 그의 귀는 연신 침대에 쓸려 짜부라졌다. 귓가에 퍼지는 달뜬 신음이 도무지 제 것 같지가 않았다.
금세 구멍 주변이 이완되면서 부드럽고 녹녹해졌다. 권수혁은 쪽 소리를 내며 가볍게 입을 맞추고 그대로 회음을 핥고 올라와 주완의 성기에도 재차 입술을 붙였다. 발기한 주완의 성기가 은근한 기대감에 잘게 떨렸다.
그 기대에 응하듯 주완의 성기를 끝까지 가늘게 핥아 올렸다. 주완의 무릎이 부들부들하며 서로 맞붙으려 했다.
“아… 앗….”
권수혁은 발갛게 익은 귀두를 머금으며 주완의 얼굴을 응시했다. 두 뺨이 다 상기돼선 초조하게 권수혁을 살핀다. 그의 눈을 똑똑히 보면서 엉덩이 골 사이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주완의 눈살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타액에 젖어 반질거리는 구멍을 문지르다가 그 안으로 파고들어 가자, 질끈 눈을 감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마치 어떤 인내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인지하고 미리 각오하는 것 같았다.
부러 쪽, 쪽 소리 내서 힘주어 귀두를 빨다가 입을 벌려 성기 전체를 머금었다. 성기가 입천장을 긁으며 목구멍까지 밀려들었다. 목과 입술을 동시에 조이면서 고개를 움직여 정성껏 성기를 빨았다. 구멍도 꾹꾹 들쑤시다가 한 번씩 휘돌려 가며 착실히 넓혔다. 감미롭게 감겨 오는 내벽을 비비고 누르면서 입에 문 성기를 더 달게 흡착했다.
“하읏, 읏… 아읏… 그, 앗….”
주완의 몸이 전기라도 오른 것처럼 파들파들 떨렸다. 턱도, 어깨도, 팔꿈치도, 어깨도 쉴 새 없이 짓쳐 드는 자극에 거듭 날을 세웠다. 주완은 그토록 막막하고 끝없이 치닫는 쾌감을 어떻게 감내해야 할지 혼란스러워 쩔쩔맸다.
권수혁은 손을 살살 돌리면서 주완의 구멍을 넓히다가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조금 여유로워졌던 내벽이 타이트해졌다. 끈기 있게 내밀한 속살을 후비고 매만지면서 긴장한 주완을 다독이듯 엄지로 연신 음낭과 회음을 쓰다듬었다. 고개를 내려 쾌감에 충실해 흔들리는 그의 성기도 훑어 주었다.
“…하아읏!”
얼마나 지났을까. 주완의 몸이 거하게 펄떡거렸다. 곳곳에서 뻗쳐오르는 쾌감에 녹아 들썩거리던 가슴도 부풀어 오른 그대로 굳었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주완은 잔뜩 이지러진 얼굴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더불어 몸까지 슬그머니 움츠렸다.
권수혁은 여전히 그의 얼굴에 눈길을 둔 채 조금 전 그 지점을 꾸욱 밀어 올려 봤다. 여지없이 주완의 하반신이 흠칫했다. 아, 하고 까마득한 탄성마저 터져 나온다. 다급해진 주완이 반쯤 상체를 일으켜 권수혁의 손을 붙들었다.
소용없게도 권수혁은 박혀 있던 제 손을 움직여서 특정 부위를 부러 짓이기고 문질러 댔다. 주완이 사지를 버둥거리며 자지러졌다.
“아읏! 읏, 하읏… 하으윽… 아, 읏, 안, 윽….”
“…하아, 더는 무리야.”
권수혁이 다급하게 주완의 구멍에서 손을 빼냈다. 그러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제 성기를 그곳에 가져다 댔다. 허전함에 움찔거리던 구멍이 성기를 물면서 그 끝에 맺혔던 쿠퍼 액을 꼴깍 삼켰다. 얕게 맞물린 부위가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했다.
권수혁은 숨을 크게 들이켜며 주완을 봤다. 주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권수혁은 그와 눈을 맞추면서 허리를 꾹 찍어 올렸다. 성기가 꾸역꾸역 좁은 구멍을 벌리고 들어가면서 주완의 마른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두 눈이 저절로 꾹 감기고, 입술마저 굳게 다물렸다.
“아으으… 으윽.”
“…읏.”
넓힌다고 넓혔는데도 주완의 안이 너무 비좁게 느껴졌다. 최대치로 벌어진 내벽이 버겁게 꿈틀거리며 권수혁의 성기를 쥐어짰다. 골이 깊어진 복근이 한 차례 너울거렸다. 잠시 그렇게 숨을 고르다가 주완의 엉덩이 한쪽을 꽉 움켜쥐고 벌리면서 반쯤 먹혔던 성기를 퍽 쳐올렸다.
단숨에 성기 전체가 처박히며 권수혁의 복부와 주완의 볼기가 강하게 충돌했다. 내벽이 빈틈없이 들어차면서 배가 부풀어 올랐다. 아무리 숨을 크게 들이시고 내쉬어도 편해지지 않았다. 두 눈을 뜨는 것조차 버거웠다.
잠시 내벽의 감미로운 조임을 만끽하던 권수혁이 주완의 턱을 잡아 저를 보도록 고정했다. 그러곤 멈춰 있던 밑을 서서히 치대면서 속살을 맛봤다. 가까스로 권수혁을 올려다보던 주완이 다시금 눈을 질끈 감았다.
“흐읏, 읏… 아읏, 윽….”
“하아, 하….”
거친 숨소리만 내던 권수혁의 매끈한 이마 위로 핏대가 일어섰다. 그는 좀처럼 해갈되지 않는 갈증에 긴 한숨을 쉬더니, 주완의 두 다리를 들어 제 어깨 위에 얹었다. 그러곤 제 상체를 주완 쪽으로 완전히 기울여 밀착의 정도를 더했다. 그로 인해 권수혁의 성기가 누구도 닿은 적 없던 깊은 곳까지 밀려들어 갔다. 배 속이 꽉 들어차면서 폐부가 짓눌렸다. 주완은 새빨개진 얼굴로 도리질하며 괴로워했다.
“흐으읏… 너무… 깊, 아읏.”
그런 주완을 달래듯 그의 목과 턱, 뺨에 쪽쪽 입을 맞추면서 허리를 비틀어 삽입의 방향을 바꿨다. 그러곤 꽉 물려 있던 성기를 느긋하면서도 아득하게 들쑤셨다. 울퉁불퉁한 성기 겉면이 민감한 지점을 지그시 긁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짜부라진 주완의 몸이 움찔움찔 튀었다.
권수혁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제 하복부를 주완에게 딱 붙였다. 이어 직전까지 여유롭게 움직이던 허리를 깊고 빠르게 치대서 무르익은 주완의 배 속 점막을 엉망으로 쑤석이기 시작했다. 두툼한 성기가 뿌리 끝만 남기고 빨려 나갔다가 단숨에 처박히면서 살끼리 부딪쳐 철퍽철퍽 마찰음을 냈다. 배 속이 허전해지기 무섭게 뜨겁게 들쑤셔지고, 재차 저릿저릿하게 쓸렸다가 오금이 저릴 만큼 강하게 들어차는 감각에 주완이 정신을 못 차리고 어지럽게 신음했다.
“아윽! 흣! 아으읏, 읏, 하으읏…!”
“하아, 읏, 크읏, 윽… 하….”
맹렬한 요의에 성기가 터질 것처럼 아릿아릿했다. 어떻게든 참아 보려 온몸을 웅크리자, 내벽이 덩달아 수축하며 권수혁의 성기를 오물거렸다. 권수혁의 이가 빠득 갈렸다. 숨이 달리고, 시야가 혼탁해졌다.
다음 순간, 권수혁이 복근이 불쑥 젖어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짓눌려 마구 쓸리던 주완의 성기가 돌연 사정해 버린 탓이었다.
“하으읏…! 아읏…!”
주완에게서 짙은 신음이 터졌다. 그의 몸은 저릿저릿하게 퍼지는 여운을 견디지 못하고 벌벌거렸다. 권수혁이 그런 주완의 어깨와 뺨에 연신 입을 맞춰 다독여 주었다.
그러면서도 아래에선 지레 축 늘어지려는 주완의 몸을 다잡고 제 음낭이 다 뭉개질 정도로 거칠게 구멍을 찍어 올렸다. 아플 만큼 저릿저릿하게 온몸을 울리는 쾌감에 주완이 지독하게 앓으며 허물어졌다.
“아윽, 응, 하읏, 읏, 응, 으응… 아앗!”
“…하, 읏, 으읏, 크으윽!”
권수혁이 불시에 주완의 양쪽 볼기를 꽉 움켜쥐면서 추락하듯 제 하체를 던졌다. 그로 인해 더없이 깊게 박힌 살덩이가 주완의 배 속에서 하얗게 폭발했다. 한껏 달궈진 몸속에 질척한 정액이 왈칵 끼얹어지자 주완의 몸이 가늘게 흔들렸다.
권수혁은 이를 악물고 잠시 숨을 고르다가 재차 밑을 치대서 남은 정액까지 모두 뿜어냈다. 삽시에 땀에 젖은 그의 몸이 주완을 덮었다. 바글바글 끓던 머릿속이 일순 차분해지며 여릿한 현기증이 돌았다. 주완은 나직이 앓으며 권수혁의 손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의 눈가에 어린 게 눈물인지, 땀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권수혁은 고개 숙여 주완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젖은 속눈썹 사이로 저를 보는 주완의 입술에 연이어 입술을 포갰다. 주완이 물기 어린 숨을 삼키며 그를 꼭 끌어당겼다. 처음이었다. 관계 후 처참한 기분이 들지 않았던 건. 단순히 더러운 욕구의 배출구가 아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에 속이 충만해진 것도.
권수혁은 어리광부리듯 제 목에 연신 고개를 비비적거리는 주완을 꽉 안아 주었다. 한 번의 절정을 맛보고도 몸의 열기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한 갈증을 호소하며 뻔뻔하게 갈급증을 호소할 뿐이었다. 한층 짙어진 주완의 체취로 인해 얄팍하던 인내심도 금세 바닥을 보였다.
주완이 그런 권수혁의 입술에 쪼듯이 입을 맞췄다. 그러곤 겨우 흥분을 억누르던 권수혁을 무심히도 휘저었다.
“더 안아 주세요.”
땀에 젖은 등 위로 권수혁의 무게가 겹쳐졌다. 권수혁에게 안겨 꼼짝할 수 없었다. 권수혁은 희게 드러난 주완의 목덜미에 연신 입을 맞추면서 허리를 움직였다. 주완의 봉긋한 볼기가 납작해져선 거듭 헤집어졌다. 침대 매트리스가 미미하게 흔들리면서 어지럼증까지 몰려들었다.
함께 침대에 누운 뒤로 얼마나 지난 건지, 그사이 몇 번이나 사정한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성은 끊긴 지 오래고,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몸은 스치기만 해도 저릿할 만큼 무르익었다.
“아으읏….”
권수혁이 귓바퀴를 잘근거리며 더 묵직하고 깊게 허리를 찍어 올렸다. 주완에게서 절로 끙끙거리는 소리가 흘렀다. 엎드린 자세 때문에 가슴과 배가 눌리면서 호흡이 영 신통치 않았다. 아무리 숨을 양껏 들이켜도 속이 갑갑했다. 어쩌면 배 속을 꽉 채우며 거푸 밀려드는 권수혁의 성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과도한 열에 뇌리가 녹기라도 한 것처럼 멍해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권수혁은 힘들어하는 주완을 달래듯 그의 배를 차분하게 쓸어 주다가 그의 어깨에 점점이 입을 맞추며 그의 상체를 살며시 들췄다. 그러자 다소 풀린 눈으로 뒤를 돌아보던 주완이 눈치껏 두 팔을 세워 상체를 지탱한다.
자세를 바꾸는 도중에 권수혁의 성기가 반쯤 비어져 나왔다. 덩달아 주완의 구멍이 느릿하게 꿈질거리며 안에 가득 찼던 정액을 뱉어 냈다. 희뿌연 점액이 주완의 허벅지를 되직이 핥으며 흘러내렸다.
“아앗… 잠, 아읏… 읏, 아윽!”
참기 어려운 광경에 밀려 나왔던 성기를 확 짓쳐 넣었다. 퉁퉁 부어오른 입구가 권수혁의 다소 힘겹게 삼켰다. 부드러운 내벽이 꼭 그의 성기 모양대로 다져지기라도 한 것처럼 빈틈없이 맞물렸다. 가능하다면 내내 그렇게 머물러 있고 싶었다.
제 아랫입술을 핥으며 촘촘하고 감미로운 조임을 느끼던 권수혁이 주완의 허리를 붙든 채 빠르게 밑을 치댔다. 귀두만 남겨 놓고 쭉 빼냈다가 단번에 뿌리 끝까지 박아 넣는 낙폭 큰 삽입에 여린 구멍이 마구 휩쓸렸다. 오므라들라치면 벌어지고, 벌어지면 안쪽의 점막을 빨아 당기며 말려드는 탓에 끊임없는 자극이 촉발됐다.
“응, 읏, 아, 하읏, 읏…!”
“하아, 읏, 윽, 하…!”
성기 전체를 푹푹 찔러 넣어 속살을 마음껏 폭식했다. 안을 채웠던 정액이 성기 겉면에 들러붙어 불투명한 거품을 만들었다. 일부는 구멍 주변에 하얗게 들러붙었다가 허벅지를 따라 뚝, 뚝 떨어졌다.
“아, 더는… 더, 흣, 으응, 앗….”
부들부들 떨리던 주완의 두 팔이 맥없이 풀썩 꺾였다. 그러면서 주완의 고개가 도로 베개에 파묻혔다. 권수혁은 그의 허리를 붙잡은 채 허리 짓에 박차를 가했다. 땀이 맺힌 주완의 등골을 짙게 핥으며 올라가 이미 제 잇자국으로 얼룩덜룩한 목덜미를 욕심껏 잘근거렸다. 주완이 연신 고개를 바르작거리며 끙끙거렸다. 뜨끈뜨끈한 귓바퀴까지 야금거리면서 밑을 치대다가 별안간 맞물린 부위를 비틀어 특정 부근을 강하게 꿰뚫었다.
“아윽, 하으읏!”
“읏… 크으윽…!”
권수혁의 몸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르면서 그에게서 짐승의 포효 같은 신음이 쏟아졌다. 그 아래 엉덩이만 들쳐진 채 축 늘어져 있던 주완도 베개에 이마를 비비적거리며 무시무시한 쾌감에 떨었다. 너무 뜨겁게 달아올랐던 터라, 사정 직후 온몸에 잔 소름이 돋아났다. 턱도 덜덜 떨렸다.
권수혁은 주완의 귓바퀴를 연신 야금거리면서 사정을 마친 제 성기로 주완의 배 속을 얕게 휘저었다. 나른하면서도 제법 감미로운 감각에 가쁘게 쌕쌕거리던 주완의 숨소리가 달짝지근해졌다. 그의 어깨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두 귀가 서로 부드럽게 쓸리고, 잇따라 뺨과 뺨이 맞닿았다. 그대로 주완 위에 온전히 몸을 겹친 채 그의 호흡과 체온을 느꼈다. 맥없이 숨만 쉬는 주완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이고 토닥거려 주기도 했다.
주완의 두 눈이 가물가물했다. 배 속 가득 끼얹어진 정액 때문에 배가 고프지 않았다. 목이 마르긴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었다. 중노동을 한 것처럼 노곤해져서, 그냥 그렇게 잠들고만 싶었다.
그런데 덜컥 몸이 홀가분해졌다. 동시에 등에 온전히 밀착됐던 권수혁의 체온도 확 떨어져 나갔다. 스르륵 감겼던 주완의 두 눈이 도로 벌어졌다. 놀라서 상체까지 반쯤 일으킨 채 문가로 향하는 권수혁을 봤다.
“…어디 가요?”
밤새 신음하느라 볼품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헛기침해서 목을 가다듬어 봤지만, 별반 효과는 없었다. 권수혁은 그런 주완을 보다가 별다른 대꾸 없이 밖으로 나갔다.
주완이 얼른 상체를 세우고 앉았다. 바로 권수혁을 따라 나가려다 멈칫했다.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엉덩이 안쪽에서부터 지끈한 통증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그 탓인지 두 무릎이 맥없이 후들거려서, 일어서 볼 엄두가 안 났다.
그대로 권수혁이 나가 문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관계 후 버려지는 콘돔처럼, 덩그러니 남겨지는 덴 익숙했다.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취급받는 걸 서운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서럽고 참담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권수혁이 돌아오지 않으니 쓸쓸하고 외로웠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존재가 된 것 같아 속이 저며지는 듯했다.
“…….”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주완은 느릿느릿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러곤 발밑까지 쓸려 내려갔던 이불을 목 끝까지 덮고 등 돌려 누웠다. 저절로 몸이 작게 웅크려졌다. 그 같은 일은 다신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
불현듯 들려온 권수혁의 목소리에 멈칫하며 뒤를 돌아봤다. 기척도 없이 돌아온 그가 손에 뭔가를 든 채 주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완은 그를 의아하게 볼 뿐, 얼른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권수혁이 침대에 걸터앉더니, 친히 그의 등을 떠받쳐 앉혀 주었다. 아무렇게나 나뒹굴던 베개를 단단히 허리에 받쳐 주기도 했다.
얼떨떨해하는 주완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바싹 메마른 입술을 톡 건드린다. 이어 잠시 내려 뒀던 동그란 물체를 집어 들었다. 사위가 어두워 확신할 수 없었지만, 특유의 크기나 향긋한 냄새가 사과인 것 같았다.
권수혁은 칼을 꺼내 사과를 얇게 잘라 냈다. 그러곤 슬라이스 된 조각 하나를 주완의 입 가까이 가져다 댔다.
“…왜.”
“벌써 탈진하면 곤란해.”
뜻밖의 대답에 주완이 멍해졌다. 권수혁은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사과 조각을 밀어 넣었다. 달콤하고 향긋한 과즙이 혀에 닿았다. 주완은 입술을 옴짝대 애매하게 물려 있던 사과를 완전히 입에 머금었다. 아삭아삭 소리가 내며 부서지는 과육에 건조해졌던 입 안이 상쾌해졌다. 메말랐던 입술도 조금이나마 혈색을 되찾았다.
권수혁은 재차 사과를 잘라 내서 주완에게 건넸다. 이번에는 주완도 잠자코 그가 주는 사과를 받아먹었다. 반나절 가까이 침대에만 잡혀 있었으니, 갈증은 느끼는 것도 당연했다. 금세 사과가 반쪽으로, 또 반의반 쪽으로 줄어들었다.
“왜 다 날 줘요? 목, 안 말라요?”
고분고분 입을 축이던 주완이 권수혁에게도 먹으라며 에둘러 권했다. 그러자 권수혁이 칼과 반쯤 남은 사과를 침대 옆 탁상에 내려놨다. 뭘 하려는 건가 의아해하는 것도 잠시, 덜컥 그에게 얼굴을 붙들렸다. 말캉한 혀가 입술 사이를 뜨겁게 가르고 들어오더니, 사과 향 가득한 입 안 점막을 점령해 나갔다.
달콤한 주완의 혀에 권수혁의 혀가 막무가내로 얽혀들면서 몸이 서서히 뒤로 떠밀렸다. 침대 위로 풀썩 쓰러져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집요하고 절박하게 제 입술을 빠는 권수혁을 올려다봤다.
헛된 믿음이 배신으로 돌아오는 순간의 아픔을 잘 안다. 이제 섣불리 누군가를 믿거나 의지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건 스스로 이를 갈며 되새긴 다짐이 아니라. 재생할 수 없을 만큼 치명상을 입어 버린 몸과 마음이 만든 일종의 방어벽이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또다시 맹목적인 믿음이 생기려 했다. 이번에도 상처받는다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걸 뻔히 알면서도.
머뭇거리며 두 팔을 들어 권수혁의 목을 끌어안았다. 권수혁은 그보다 더 단단하게 주완의 허리와 등을 감싸 당겼다. 그가 너무 좋아서 자포자기하게 됐다. 그에게라면 엉망으로 휩쓸려도, 망가져 버려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