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형석은 꼬박 하루 만에 경찰서에서 풀려났다. 그의 인적 사항을 조회해 본 형사는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간밤에 도로에서 벌어졌던 사고를 폭력 조직 간의 흔하디흔한 알력 다툼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추후 더 면밀하게 조사하겠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쯤일지 알 수 없었다. 정말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사가 있는지조차.
더구나 우형석 자신도 피차 경찰 조사가 길어져 이로울 게 없는 처지였다. 상대도 그걸 알고 일을 벌였을 공산이 컸다. 어쩌면 경찰 쪽에도 굵직한 줄을 대고 있을지도 몰랐다.
“민중의 지팡이는 지랄.”
구시렁거리며 경찰서를 나서는데, 경적이 울렸다. 무심결에 그쪽을 보자, 웬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낯선 외관에 가까이 가지 않고 멀리서 지켜보는데, 뒷좌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그 너머로 조중만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의 사무실로 가던 길에 사고를 당했었다.
우형석은 입술을 길게 찢어 씩 웃고는 해당 차량의 뒷좌석으로 들어가 앉았다. 조중만의 낯빛은 썩 개운치가 않아 보였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에요? 내 걱정에 친히 데리러 온 건 아닐 테고.”
“…놈한테 당해 버렸어.”
조중만이 이를 갈며 씨근덕거렸다.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백도운을 직접 상대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다.
경찰서에 머무는 동안 나름대로 자초지종을 파악해 봤다. 우형석은 대뜸 나타나 자신을 죽일 듯이 몰아붙였던 그 남자를 백도운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다는 건 조중만이 만난 사람은 그를 대신할 누군가였다는 의미다.
하지만 사전에 백도운에 관한 조사를 마쳤다. 그때 본 사진 속 인물은 검은 세단의 운전자와 전혀 닮지 않았다. 조중만도 우형석 자신보다 철저하게 백도운의 뒷조사를 했을 테니, 사진 속 인물과 다른 사람이 나타났다면 한눈에 알아봤을 거였다.
결과적으로 조중만의 사무실로 찾아온 건 사진 속 그 백도운이 맞을 터였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인가, 검은 세단의 운전자는.
“백도운, 그놈이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리 없어. 저를 건드렸으니 이제 역으로 날 치려고 들겠지. 망할, 놈이 고작 똥개 한 마리 때문에 거래에 응했을 때 더 의심하고 신중했어야 했는데….”
조중만은 못내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배포로 무슨 사업을 하겠다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자네가 데리고 있는 그 똥개의 처리는 어쩌면 좋겠나? 그놈을 어떻게 이용해야….”
“이제 없습니다.”
“뭐, 뭐야?”
“아랫놈들한테 맡겨 놨는데, 아무도 전화를 안 받더라고요. 아마 사장님하고 내가 백도운한테 신나게 당하고 있을 때, 그쪽 놈들이 빼내 갔지 싶습니다.”
“이봐! 당신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흥분하지 마세요, 아직 안 끝났으니까.”
“끝까지 허풍인가?”
“아뇨. 오히려 놈들이 그렇게까지 움직여 준 덕택에 알 것 같더라고요.”
“알 것 같다니, 뭘?”
“사전에 알아봤던 ‘그 백도운’이 사장님 앞에 나타났던 거죠?”
“대체 무슨 소린지….”
“사장님은 그놈이 정말 우리가 아는 백도운이라고 생각하세요?”
조중만이 눈살을 찌푸렸다. 질문의 저의를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우형석은 부연하지 않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조중만은 곰곰이 뇌리를 되짚어 백도운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어떻게 봐도 그는 한 조직을 이끄는 우두머리, 내지는 사업가 같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에 알아본 것처럼 의사가 더 잘 어울렸다. 악수할 때도 은은한 소독약 냄새가 풍겼더랬다.
“그림자였던 겁니다.”
“그림자?”
“의사라는 직업이 좀 빡셉니까. 의대에 입학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란 말이죠. 모르긴 몰라도 제대로 의사 노릇 하려면 10년은 병원에 틀어박혀 지내야 한다던데, 백도운은 무사히 의사 면허를 땄고. 백장훈의 사후부터 지금까지 백무 상사엔 경영 공백도 없었다면서요. 이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네 말은….”
“실세가 따로 있을 겁니다, 분명히. 사장님이 익히 접했다던 소문의 진짜 주인공이요.”
“대체 그게 누군가?”
“그건 저도 모르죠.”
우형석이 어깨를 으쓱했다. 조중만은 허탈해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우형석의 추측대로 백도운의 이름을 빌려 쓰는 실세가 따로 있다면 모든 의문이 해소되기는 했다.
더불어 또 다른, 새로운 의문이 불거졌다. 돈 귀신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백장훈이 제 피붙이도 아닌 자에게 전 재산을 덜컥 맡겼다는 점에서. 숨겨 둔 자식이라도 되는 건가.
어쨌거나 우형석의 예상이 맞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두려웠다. 그쪽은 조중만 자신의 정체를 이미 파악했는데, 정작 자신은 그쪽을 전혀 모른다. 갈피도 전혀 못 잡고 있다.
그런 조중만의 염려를 눈치챘는지, 우형석이 씩 웃으면서 덧붙였다.
“하지만 그자를 우리 앞에 불러낼 방법은 알 것 같네요.”
“그래? 어떻게?”
“간단합니다. 그자가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는 물건을 하나, 가지고 있거든요.”
이제 조중만의 목적이나 그에게서 받아 낼 사례금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설욕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제 손으로 진짜 백도운을 쓰러뜨리면 더없이 짜릿할 것 같았다.
우형석은 그의 눈빛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벼랑 끝에서 포악한 야수를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단순히 저를 도발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분노했을까. 아니, 그보다는 자신의 영역이나 소유물을 침범당해 눈이 돌아갔다고 보는 게 더 합당할 듯했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그자는 반드시 올 겁니다.”
우형석이 히죽 웃으며 확신했다. 진짜 백도운이 주완을 끔찍하게 생각한다면, 과거 김제국이 보내왔던 선물에는 어떻게 반응할지 내심 기대됐다. 주완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는 일은 그를 처리한 후에 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
전미남이 권수혁의 집에 도착한 것은 오후 3시 무렵이었다. 평소처럼 아침 일찍 출발하려고 했지만, 백도운이 눈치가 없다며 타박하는 바람에 권수혁의 호출이 있을 때까지 잠자코 대기하기로 했다.
그러다 사무실의 다른 수하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조중만 측에서 다시 만나길 원한다고 했다. 이미 주완을 무사히 구출한 마당에 뭘 믿고 그렇게 기세등등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조중만이 근거 없이 허풍을 떨 만한 위인은 아니라 못내 찜찜했다.
권수혁에게 보고할 겸, 그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왔다. 집 안 풍경은 전미남이 그곳을 떠났을 때와 비교해서 달라진 게 없었다. 굳게 닫힌 침실 문도 한동안 열릴 기미가 없었다.
백도운은 연신 침실 쪽을 힐금거리며 안절부절못하는 전미남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 좀 쳐다봐요. 그런다고 문이 열려?”
“…….”
이어진 타박에 전미남이 머쓱하게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나서서 권수혁을 깨워야 할지, 내처 기다려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홀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돌연 침실 문이 열렸다. 그곳으로 기다려 마지않았던 권수혁이 걸어 나왔다.
우려와 달리 권수혁은 전혀 고단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도록 앓았던 체증이 싹 가신 것처럼 개운해 보였다.
“주완 씬 무사해?”
백도운이 실실거리며 짓궂게 말을 걸었다. 권수혁은 그의 질문을 깨끗이 무시했다. 눈을 뜨자마자 전미남의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던 재규어는 집에 돌아와서 백도운에게 깔려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백도운은 토끼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재규어를 구속하고 있었지만, 전미남이 보기에는 놈을 귀여워하다 못해 괴롭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가셔 죽겠다는 듯 으르렁거리던 재규어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백도운이 다시 잡아 보기도 전에 소파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대로 총총 침실 쪽으로 향하다가 고개를 들고 권수혁을 올려다본다. 권수혁도 잠시 놈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뿐, 재규어는 평소처럼 아양을 떨지도 않고 냉큼 침실로 걸어갔다. 살짝 열려 있던 문을 머리로 밀고 들어간다. 백도운도 굳이 놈을 쫓아가지는 않았다.
권수혁은 주방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왔다. 그것으로 마른 목을 축이면서 익숙하게 소파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방해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조중만이 또 연락해 왔습니다.”
“연락?”
“재거래를 원한다고 합니다.”
“무슨 염치로?”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쪽에서 박주완 씨의 병실 영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권수혁의 미간에 돌연 깊은 주름이 잡혔다. 대수롭지 않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백도운은 아리송한 표정이 됐다.
“확실해?”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그 병원을 찾았던 날, 그쪽에서도 똑같이 사람을 보냈었으니까요. 그 영상을 누가 촬영했고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저희 손에 들어왔던 걸 보면 박주완 씨와 법률상 가족 관계인 우형석도 같은 영상을 받아 봤을지 모릅니다.”
“놈들이 그 영상으로 뭘 어쩌겠다는 건데요?”
백도운이 얕은 인내심을 드러냈다. 권수혁도 날 서린 눈빛으로 전미남을 주시했다. 전미남은 작게 한숨 쉬며 어렵사리 대답했다.
“거래에 응하지 않을 경우 언론에든, 인터넷에든 유포하겠답니다. 해당 영상을 근거로 중앙 정신 병원 관계자들의 비리, 만행이 뉴스화될 가능성이 크니까요.”
권수혁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주먹은 하얗게 질려 부르르 떨렸다.
우형석이라면 그저 협박에 그치지 않고 얼마든지 그 일을 실행에 옮길 거였다. 그 후에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너무도 뻔했다.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한 사건에서도 어느 한쪽만 비난하지 않는다. 피해자에게조차 왜 가만히 있었는지, 왜 벗어나려고 더 노력하지 않았는지, 그렇게라도 살아남는 게 최선이었는지 따지면서 잘잘못을 가리려 한다. 가벼운 호기심으로 피해자의 신상을 캐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주완에게 그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의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좁아져 버리고 말 거였다. 그가 다시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도록 내버려 둘 순 없다. 더구나 조중만과 우형석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서 영 떨떠름했던 참이었다. 권수혁 자신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야 했다. 그래야 누구도 다시는 그처럼 무모하게 저를 도발하지 않을 터였다.
결심을 굳힌 권수혁이 대뜸 백도운을 바라봤다.
“백도운,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침대가 너울거리는 느낌에 주완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렸다.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동이 틀 무렵까지는 의식이 있었는데.
몸을 움직이려다 끙 소리를 내며 체념했다.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온몸이 물에 퉁퉁 부은 것도 같고, 누군가에게 흠씬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리기도 했다.
돌연 뭔가가 꾹 허리를 짓누르는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곧장 재규어가 시야를 꽉 채우고 들어왔다.
“아… 수남이 왔구나?”
목소리가 볼품없이 갈라졌다. 낯설었는지 재규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그란 두 귀를 팔랑거리기도 했다. 이불 밖으로 손을 빼내 놈의 얼굴을 꼭 끌어안았다. 두툼한 목을 살살 긁어 주자, 놈의 샛노란 눈동자가 실눈처럼 가늘어졌다. 골골거리는 소리가 나른하게 귀에 감겼다. 짐승 특유의 높은 체온과 보드라운 털의 감촉이 너무 좋아서 슬며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제 어디서 잤어? 밖에 없는 것 같던데… 선생님이 돌봐 주셨어?”
재규어가 알아들을 리도, 대답할 리도 없는데 연신 질문을 던졌다. 재규어는 그런 주완에게 연신 제 얼굴을 들이댔다. 지난밤과는 달라진 주완의 기색에 원인을 찾으려는 것 같았다. 주완은 그게 단순히 놈의 애정 표현인 줄 알고 연신 제 볼을 재규어에게 비비적거렸다.
머지않아 침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백도운이 안으로 들어왔다.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주완 씨, 잘 잤어요?”
“아, 선생님.”
주완이 얼른 상체를 일으키고 앉았다. 잔뜩 흐트러진 침구라든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가지, 주완의 흰 피부 곳곳에 남은 키스 마크 따위가 간밤의 일을 증명하는 듯했다. 하지만 주완은 조금도 민망해하지 않았다.
백도운도 어색해하는 법 없이 씩 웃으면서 침대 한쪽에 걸터앉았다. 재규어는 주완에게 바짝 몸뚱이를 붙이고 앉아선 지난밤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그를 조용히 노려볼 따름이었다.
백도운은 기민하게 눈동자를 굴려 주완의 몸을 훑었다. 목 주변은 말할 것도 없고, 빗장뼈와 가슴 주변이 온통 얼룩덜룩했다. 귀밑 살은 얼마나 잘근거렸는지 퍼런 멍까지 들었다. 밤새 섹스인 척하는 영역 표시를 당한 것 같았다.
백도운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따가울 듯한 주완의 피부를 살피며 나직이 한숨을 뱉었다. 이어 주완에게 불쑥 제 손을 내밀었다.
“손 좀 줘 볼래요?”
“손이요?”
“얼른.”
주완이 별다른 의심 없이 백도운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러자 백도운이 주머니에서 웬 주사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바늘 위에 덮인 캡을 빼내고, 빠르고 능숙한 손길로 실린더 가득 어떤 약을 채웠다. 피스톤을 눌러 공기를 빼자, 투명한 주사약 일부가 바늘 끝에 맺혔다. 주완은 잠자코 제 팔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약이에요?”
“영양제요. 주완 씨 체력이 못 버틸 것 같아서.”
백도운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알코올 솜을 주완의 팔에 문질렀다. 이어 아프지 않게 바늘을 폭 찔러 넣었다. 주사약이 몸 안으로 들어오면서 약간 몽롱한 느낌이 들었다. 착각일 거였다. 주완과 더불어 재규어가 샛노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주완의 몸에서 빠져나오는 바늘을 빤히 주시했다.
“됐다.”
백도운이 알코올 솜으로 주사 부위를 꾹 눌러 주었다. 직접 지혈하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손이 팔에 닿기도 전에 맥없이 툭 떨어졌다. 덩달아 머리가 핑 돌면서 눈앞이 아찔해졌다.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흔들었다. 소용없게도 바로 앞에 앉은 백도운의 얼굴조차 온전히 보이지 않고 너울너울 흩어졌다.
“선생님… 왜, 이거, 좀… 어지러워요.”
질끈 눈을 한 번 감았을 뿐인데, 사지에서 힘이 쭉 빨려 나갔다. 그대로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다. 백도운은 그런 주완을 똑바로 눕혀 주고, 베개도 끌어당겨 그의 머리 아래 잘 괴어 주었다.
재규어가 느닷없이 잠들어 버린 주완을 보고 어리둥절해 우왕좌왕했다. 그러다 곧 새근거리는 주완의 숨소리를 듣곤 얌전해졌다. 이내 놈은 주완 옆에 바짝 제 몸뚱이를 붙이고 앞발에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푹 자요. 좋은 꿈 꾸고.”
백도운이 이불을 잘 여며 주면서 작게 속삭였다. 주완이 아무런 걱정 없이 쉴 수 있기를,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땐 그를 괴롭혔던 악연들과 악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를.
조용히 침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새 옷을 갈아입은 권수혁의 시선이 곧바로 백도운에게 꽂혀 들었다. 부탁한 일을 잘 마쳤는지 추궁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백도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완의 몸을 닦아 줄 스팀 타월을 준비하러 욕실로 향했다. 그제야 권수혁도 재킷을 걸쳤다. 집을 나서려던 참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침실 쪽을 돌아봤다.
주완이 푹 자다가 깨어날 때까지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을 심산이었다. 그 과정을 주완은 모르게 하고 싶었다. 그래야 거리낌 없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테니까. 다시는 그가 악몽에 시달리거나 불안에 떠는 일이 없길 바란다. 권수혁 자신이 반드시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재차 다짐하듯 입술을 굳게 다물며 망설임 없이 집을 나섰다.
권수혁은 자신의 수하 대부분을 집 주변과 회사에 대기시키고, 나머지 정예 인원만 이끈 채 조중만을 만나러 갔다. 짙게 선팅된 동종 차량 일곱 대가 줄지어 이동하자, 길 위의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왔다.
차 안에는 줄곧 전운이 감돌았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권수혁 역시 잠잠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거나, 치기 어린 투쟁심을 불태우는 건 아니었다. 그저 속을 차분히 가라앉혀 힘을 응축할 따름이었다.
이제까지의 싸움은 주로 응징에 가까웠다. 누구든 제 것을 탐내거나, 저를 속이면 가차 없이 보복했다. 가능한 한 잔인하게 선례를 만들어 놔야 다시는 함부로 덤비려 들지 않았다. 이번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단지 ‘응징’보다는 ‘보호’에 더 큰 비중을 뒀을 뿐이었다. 주완을 건드리는 자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쉬지 않고 달리던 차는 금세 도심 외곽으로 벗어났다. 해가 저물기 시작할 즈음에는 버려진 창고 앞 공터에 다다랐다. 전미남이 차를 세우자, 뒤따르던 차들도 일제히 정차했다. 전미남은 룸미러로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권수혁을 주시했다.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전미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권수혁이 덜컥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러곤 최소한의 엄호도 받지 않고 먼저 차에서 내렸다. 전미남을 비롯한 수하들이 서둘러 하차해 그의 주위를 빙 에워쌌다.
바깥의 기척을 느꼈는지, 창고 문이 열리더니 한 무리의 사내들이 걸어 나왔다. 하나같이 손에는 각목과 배트, 장도리 따위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조중만이나 우형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숨지 말고 나와.”
권수혁이 낮은 목소리로 요구했다. 모래 섞인 바람이 그의 음성을 실어 날랐다. 짙은 석양에 그의 얼굴도, 넓은 공터도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얼마가 더 지나도록 기다리는 인물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양 진영의 사내들만 서로 기 싸움하듯 팽팽히 맞설 뿐이었다.
“나와!”
이번에는 공터 전체에 메아리가 칠 정도로 쩌렁쩌렁하게 포효했다. 대치하던 사내들조차 지레 놀라 움찔할 정도였다.
권수혁의 매끈한 이마와 턱에 어느새 굵은 핏대가 일어섰다. 맞은편을 노려보는 눈동자는 칼날처럼 예리하게 벼려졌다. 얼굴에서도, 입술에서도 핏기가 싹 가신다. 격앙될수록 되레 피가 식는 것 같았다.
너울너울 메아리치던 권수혁의 목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었을 무렵, 적막을 깨는 엔진 소음이 들려왔다. 등 뒤쪽이었다.
불시에 네 대의 승합차가 나타나더니, 그 안에서 시커먼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약속한 것처럼 순식간에 권수혁 일행을 포위했다.
권수혁은 당황하지 않고 잠자코 더 기다렸다. 머지않아 사내들 사이에서 살집 있는 중년 남자와 우형석이 걸어 나왔다. 권수혁을 마주한 우형석이 히죽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 곁에 선 중년 남자가 바로 조중만인 듯했다.
“진짜 다른 놈이 왔잖아? 네가 그 백도운인가?”
“…….”
“네놈이 백무 상사의 실질적인 책임자인지 묻는 거다.”
“그딴 게 뭐가 중요하지? 어차피 네 유일한 관심거리는 이 계약서일 텐데.”
권수혁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그러곤 그것을 보란 듯이 구겼다. 조중만의 얼굴이 덩달아 일그러졌다. 권수혁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지포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뭐 하는 거야!”
불길한 예감에 조중만이 버럭 소리쳤다. 곧 그가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됐다. 권수혁은 스스럼없이 지포라이터를 켰다. 작은 불꽃이 계약서 끄트머리에서 일렁이더니, 금세 종이를 까맣게 그을렸다. 이어 계약서는 말려 볼 틈도 없이 무서운 속도로 타들어 갔다.
느긋하게 서류를 태우던 권수혁이 불어오는 바람에 남은 것들을 날렸다. 타다 만 계약서가 조중만의 발치에 떨어졌다. 조중만이 서둘러 불꽃을 밟아 껐지만, 이미 서류의 내용을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조중만이 빠득 이를 갈았다.
“…잘도.”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우형석이 픽 웃었다.
“박주완의 영상이 유포돼도 상관없나 보지?”
“그럴 일은 없어.”
권수혁이 단정하며 우형석을 직시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우형석의 두 눈에는 정체 모를 희열이 가득했지만, 권수혁의 눈빛에는 살기만 등등했다. 착각처럼 주변의 공기가 확 조여드는 것 같았다. 권수혁은 입술을 거의 떼지 않고 중얼거렸다.
“오늘은 절대 널 살려 보내지 않을 거니까.”
우형석이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기대했던 것보다 멍청하네. 내가 설마 뒷일도 생각 안 했을까. 나만 끝장내면 그만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것도 상관없어.”
권수혁은 우형석의 말을 도중에 뚝 끊으며 단언했다. 우형석의 말대로 그가 만일을 대비해 주완의 영상을 빼돌렸다면 당장 그를 제거하는 건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달라질 건 없었다. 주완의 삶에서 우형석을 제거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최우선 목표는 동일했다.
“네놈과 관련된 모든 걸 없애 버릴 테니까. 널 기억하는 놈들, 너와 결탁했던 자들, 네 손끝이 닿았던 모든 것들을 이 세상에서 다 지울 거라고.”
“하? 신이야, 뭐야? 한낱 인간이 무슨 수로?”
“못할 것 같나?”
권수혁이 비릿하게 되물었다. 시종 실실거리던 우형석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며 그를 도발했다. 권수혁이 그의 두 눈을 똑똑히 마주하며 재킷을 벗어 던졌다. 그게 어떤 신호라도 되는 양, 전미남을 비롯한 그의 수하들이 사위를 경계하며 서서히 흩어졌다. 사냥을 시작하려는 맹수들처럼 고요하고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모르겠다면 납득시켜 주지.”
권수혁의 주먹이 순식간에 공기를 갈랐다. 우형석이 한발 먼저 물러나지 않았다면 돌 같은 주먹은 기어이 그의 면상 한가운데 꽂혔을 터였다. 살짝 비켜 나간 주먹에도 우형석의 머리카락이 날렸다. 그 정도로 흠씬 힘이 실렸다면 균형이 흐트러질 만도 한데, 권수혁은 바로 바닥을 내차며 달려들었다. 그러곤 우형석이 미처 피할 틈도 없이 덜컥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마치 그 잠깐 사이에 상대의 행동반경을 계산한 것처럼 빠르고 정확했다.
단숨에 권수혁의 코앞까지 끌려갔다. 버틸 새도 없었다. 어, 하는 순간 왼쪽 얼굴에서 격한 통증이 울렸다. 목이 꺾이지 않은 게 신기할 만큼 고개가 완전히 돌아갔다. 뇌가 뿌리째 흔들리는 충격에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가까스로 휘청거리는 두 다리로 버티고 섰다.
우형석은 침인지, 피인지 알 수 없는 액체를 손등으로 쓱 문질러 닦고 픽 웃었다. 그러다 불시에 바닥을 내차며 권수혁에게 달려들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양 진영의 사내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엉겼다. 전미남도 서둘러 뒤로 물러나는 조중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제 앞을 가로막는 사내들도 한 손에 날려 버렸다.
권수혁이 팔을 들어 우형석의 주먹을 가뿐히 막았다. 곧이어 옆구리로 치고 들어오는 반대편 주먹도 손바닥으로 완전히 감싸 붙잡았다. 그러자 우형석이 바로 몸을 빙글 돌려 발차기를 시도했다. 방어하려 우형석의 손을 놓은 순간, 그가 팔꿈치를 쳐들어 권수혁의 턱을 가격했다. 그 바람에 균형이 약간 흔들리면서 뒷걸음쳤다. 얼얼한 턱을 쓸며 우형석을 노려봤다. 우형석은 얼른 덤비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어떤 면에서 우형석은 짓궂은 장난을 즐기는 아이 같았다. 제 목숨을 위협받으면서도,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 자체에 기이한 희열을 느끼는 듯했다. 누군가의 불행이 그의 양식이 됐다. 악마의 현신이 그와 다를지. 신에게 양심이 있다면 그를 세상에 내보낸 데 조금은 가책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삽시에 내달아 우형석의 목을 왈칵 틀어잡았다. 우형석은 미처 예기치 못했던 속도에 당황하며 얼른 권수혁의 손을 떨쳐 내려고 했지만, 완력이 무지막지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팔을 쳐 내면 쳐 낼수록 꽉 붙들린 제 목도 함께 부러질 것 같았다.
권수혁은 손가락이 하얘지도록 우형석의 목을 옥죄었다. 끝내 그의 손끝이 얇은 살갗을 파고들면서 붉은 피가 몽글몽글 새어 나왔다. 버둥거리던 우형석의 입가에는 타액이 들끓다 못해 게거품이 맺혔다. 그런 그를 무심하게 주시하는 권수혁의 눈빛은 인정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싸늘했다. 그대로 그가 우형석의 숨통을 끊어 놓은들 하등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젠장… 뭐야, 이 새끼….”
빠득 이를 갈던 우형석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뻗어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러곤 그것을 홱 내둘렀다. 날카로운 통증이 권수혁의 손등을 스쳤다. 그 바람에 우형석의 목에서 그의 손이 풀려나갔다.
우형석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권수혁의 복부를 힘껏 걷어찼다. 권수혁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권수혁은 금세 피범벅이 된 제 오른손을 일별했다. 꽤 깊은 상처가 아플 텐데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우형석은 제 목을 부여잡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숨통이 너무 바짝 조여졌던 나머지 기침까지 마구 터져 나왔다. 여유를 부렸다간 다음을 장담할 수 없었다. 차라리 빨리 해치우는 편이 훨씬 승산 있어 보였다. 우형석은 권수혁의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지 생각하며 피로 물든 나이프를 꽉 움켜쥐었다.
피를 보고도 권수혁은 동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우형석에게 정정당당한 결투를 기대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남의 뒤나 핥아 주며 기생하는 인자들은 대개 치졸하고 비겁하기 마련이었다.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마당에 매너 따위를 기대하는 것도 우습긴 했다.
권수혁은 상처 입은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손등을 흥건하게 적신 선혈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스며들었지만, 늘 죽음에 한 발 걸친 채 살아온 그에겐 대수롭지 않았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대체 박주완은 왜 사 간 거야? 그 새낀 변변찮아서 어디 써먹을 데도 없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어서 말이지.”
우형석에게서 주완이 언급되자 권수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우형석은 그 극명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히죽 웃었다.
“설마 네놈도 그쪽이야? 예전에 우리 꼰대가 그 새끼만 보면 발정 난 개처럼 사족을 못 썼거든. 듣자니까 그 새끼, 병원에서 의사란 놈한테 졸라 따먹힌 모양이던데. 너도 그럴 목적으로 박주완을 데려간 거야? 그렇게 궁했어? 호모라 그런가?”
“다 했나?”
권수혁은 콧잔등을 일그러뜨리면서도 대놓고 흥분하지 않았다. 그저 우형석을 찢어발길 기세로 노려보면서 낮게 으르렁거릴 따름이었다. 우형석은 여전히 묘한 미소를 짓다가 불시에 바닥을 내차며 달려들었다.
세차게 내지른 주먹을 단번에 붙들렸다. 이어 정강이를 내차려던 다리도 저지당했다. 그 찰나를 이용해 왼손에 쥔 나이프를 내리찍었다.
칼끝이 정확히, 완벽하게 꽂혀 들어갔다. 우형석의 입꼬리가 히죽 들쳐졌다. 고통에 이지러졌을 권수혁의 낯을 기대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이 멍해지고 말았다. 칼날이 분명히 권수혁의 어깨에 꽂혀 들었는데도, 그래서 그의 셔츠가 붉게 물들고 있었는데도 권수혁이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고 우형석을 응시해 온 탓이었다. 마치 통증이란 걸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인간 같았다.
“유언치고는 가소롭군.”
권수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에 이채가 번뜩였다. 흠칫한 우형석은 나이프를 비틀어 버릴 작정으로 손에 힘을 줬지만, 권수혁에게 그 손목마저 붙잡히고 말았다. 권수혁은 그의 손목을 서서히 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버티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손목이 한계치까지 젖혀지면서 뻐근한 감각이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위험하다는 예감이 든 순간, 손목에서 우지끈하는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
우형석의 눈앞에서 그의 손목이 완전히 뒤로 꺾였다. 형언할 수 없는 격통 때문인지, 눈앞의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우형석은 그저 눈만 홉뜰 따름이었다. 권수혁은 숨만 겨우 들이켤 뿐, 비명조차 터트리지 못하는 그의 손가락마저 꽉 움켜쥐어 박살 냈다.
“크흑! 크아아아악!”
관절 마디마디에서 터져 나오는 통증에 우형석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의 이마와 목에 일제히 굵직한 핏대가 일어섰다. 목부터 얼굴 전체가 붉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크게 벌어진 눈꺼풀에서 기어이 눈알이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권수혁은 붙잡고 있던 우형석의 팔을 확 떠밀었다. 그러자 우형석이 크게 휘청거리며 그대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권수혁에게 잡혔던 왼쪽 팔은 온전한 모양새를 유지하지 못하고 맥없이 덜렁거렸다. 괴상하게 꺾인 손가락들도 부들부들 떨리기만 했다.
우형석은 제 망가진 팔을 반대편 손으로 꽉 붙들고 의식을 끊어 놓을 듯한 격통에 씩씩거렸다. 머지않아 그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자 권수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거리낌 없이 제 어깻죽지에서 우형석의 나이프를 빼냈다. 그러자 베인 부위에서 붉은 피가 콸콸 솟구쳤다. 얼마쯤은 그의 얼굴로도 튀었다. 그의 셔츠는 본연의 색이 무엇이었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흥건하게 물들었다. 그런데도 권수혁에게선 조급증이랄 걸 일절 엿볼 수 없었다.
권수혁은 뽑아낸 나이프를 바닥에 툭 내던졌다. 우형석이 오른손을 뻗어 나이프를 주워 들려던 참에는 발로 그것을 툭 차서 저만치 치워 버렸다. 그러곤 재차 그의 멱살을 잡아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땅에 닿아 있던 뒤꿈치가 위태롭게 들리자, 우형석이 권수혁의 얼굴을 떠밀며 발악했다. 권수혁의 눈동자를 찌를 셈으로 손가락을 뻗기도 했다. 권수혁이 입을 벌려 제 입술을 짓이기던 우형석의 엄지를 물었다. 순간 우형석은 어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살갗에 파릇하게 소름이 돋았다.
“이 미친 새끼… 아아악!”
우형석은 엄지가 생으로 물어뜯기는 통증에 있는 대로 악다구니를 써 댔다. 얼굴이 삽시에 붉게 달아오르면서 목의 상처에서 울컥울컥 붉은 피가 쏟아졌다. 권수혁은 충격적인 통증에 발버둥 치는 우형석을 바닥에 내던졌다. 우형석은 피가 철철 나는 제 오른손을 움켜쥐고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권수혁은 제 입에 담긴 손가락 일부를 퉤 뱉고 손등으로 더러워진 입가를 닦았다. 그러곤 죽겠다고 소리치는 우형석에게 다가갔다. 곧 그의 그림자가 우형석을 뒤덮었다. 사신을 마주쳐도 그렇게 막막하진 않을 듯했다. 우형석은 난생처음 당면한 공포에 부들부들 떨었다.
한편 전미남은 몸을 확 숙여 각목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사내의 어깨로 들쳐 올렸다. 달려오던 속도 때문에 사내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를 바닥으로 가차 없이 내리꽂았다. 등부터 추락한 사내가 척추를 뻐근하게 울리는 통증에 바르작거렸다. 그가 휘둘렀던 각목은 그 주변에서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전미남은 다시 각목을 들려는 사내의 손목을 콱 힘주어 밟았다. 그러자 사내의 손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크아아아아악!”
격하게 고통을 호소하는 사내의 머리를 걷어찼다. 사내의 고개가 뒤로 홱 돌아갔다. 이어서 그의 눈동자가 흰자위를 보며 돌아가더니 그대로 까무룩 의식을 놓았다.
전미남은 그 직후, 제 뒤를 노리던 쇠 파이프를 한 발 차로 피했다. 그러곤 순간적으로 상체가 무너진 사내의 머리채를 잡아 제 무릎으로 그 면상을 찍어 올렸다. 코가 무너진 사내의 양쪽 콧구멍에서 코피가 왈칵 터져 나왔다. 앞으로 맥없이 고꾸라지려던 그의 뒷덜미를 잡아채 뒤로 확 당겼다. 척추가 반대편으로 꺾이는 충격에 사내가 악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금방 달려드는 사내들을 치운 전미남은 계속 뒷걸음치는 조중만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모든 원흉은 그였다. 그가 권수혁의 몫을 탐내지 않았다면 주완이 우형석과 재회할 일은 없었을 거였다. 그전에 권수혁이 먼저 우형석을 찾아내 제거했을 테니까. 그랬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도 않았을 터였다. 인간의 욕심은 늘 화를 부른다.
“젠장! 뭣들 하는 거야! 제대로 싸우라고!”
전미남의 접근으로 생명의 위기를 느낀 조중만은 제 주변을 둘러싼 사내들의 등을 마구 떠밀었다. 겁을 집어먹은 그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곳곳에서 뼈가 부러지고, 살과 피가 튀고, 끔찍한 비명이 난무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어둠이 깔리면서 서로를 분간하기도 어려워졌다.
“망할, 싸워! 다 죽여 버리라고!”
조중만에게 떠밀린 두 사내가 동시에 전미남에게 달려들었다. 전미남은 그들이 휘두르는 각목과 배트를 양손으로 하나씩 잡아챘다. 손바닥에 묵직한 충격이 가해졌지만, 전혀 주춤하는 기색 없이 잡은 각목과 배트를 빼앗아 멀찌감치 내던졌다. 그러곤 빈손으로 달려드는 사내들의 목을 붙잡아 두 사람의 머리를 서로 맞부딪쳤다. 뻑 하는 마찰음과 함께 사내들의 몸이 축 늘어졌다.
전미남은 의식을 잃은 사내들을 툭 내려놓고 다시 조중만을 향해 다가갔다. 몰릴 대로 몰린 조중만이 다급하게 재킷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이내 그의 손에 콜트가 잡혀 나왔다. 그 총구가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려서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성큼성큼 조중만과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똑똑히 콜트를 봤을 텐데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멈춰!”
조중만이 꽥 소리를 질렀다. 전미남은 그의 경고를 무시했다. 주춤주춤 물러나던 조중만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자 희게 질렸다. 다급히 우형석 쪽을 바라봤지만, 그 역시 권수혁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의 수하들이나 조중만이 고용한 용역들도 각자 치열하게 싸우느라 조중만에게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였다.
“씨발, 더 오면 쏜다! 거기 멈…!”
최후의 경고에도 전미남은 오히려 땅을 박차게 빠르게 달려왔다. 그러곤 순식간에 콜트를 쥔 조중만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조중만은 이를 악물고 버티며 콜트를 내주지 않으려 몸부림쳤다. 순간, 그의 손가락이 얼결에 방아쇠를 당겼다.
탕. 명료한 총성이 넓은 공터에 왕왕 울려 퍼졌다. 한데 뒤엉켰던 사내들이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총성이 울린 방향을 주시했다. 잠시 멍해졌던 전미남은 서둘러 조중만의 손목을 꺾어 그의 손에서 콜트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떨어진 콜트는 멀찌감치 걷어찼다.
단숨에 조중만을 제압한 전미남은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으려 팔을 당겼다. 하지만 끝내 최후의 일격을 가하진 못했다. 불현듯 등 뒤에서 불거진 소란 때문이었다.
“대표님!”
얼떨떨하게 고개를 돌렸다. 제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기만을 바라면서. 그러나 곧 전미남의 시야에는 눈먼 총탄을 맞고 비틀거리다 끝내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권수혁의 모습이 선명하게 각인됐다.
***
“…….”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손을 들어 눈가를 문질러 봤지만, 소용없었다. 시야를 뒤덮은 어둠은 가시지 않았다. 다만 주변의 공기나 향기, 몸에 닿는 침구의 감촉이 익숙해서 그곳이 권수혁의 침실이란 걸 깨달았다. 의식이 없는 사이, 밤이 깊은 모양이었다.
제법 긴 시간을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동안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도 머릿속은 개운하지 않고 멍하기만 했다. 막 잠에서 깬 탓인지 느리게 움직이던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당연한 신체 반응인데도 기분이 이상했다.
두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어떻게 잠들었는지를 되짚어 봤다. 꼬박 하루 남짓 권수혁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전에 없이 충만한 시간이었다.
그러다 전미남과 백도운이 집으로 찾아왔다. 권수혁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을 나갔다. 그 직후, 재규어가 안으로 들어왔다. 놈을 꼭 끌어안고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어 주는 사이, 밖에선 두런두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어떤 얘기가 오가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머지않아 백도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곤 대뜸 영양제라며 주사를 한 대 놔 주었다. 바로 정신이 몽롱해지더니 눈앞이 흐려졌다. 그다음의 기억이 없었다.
벌떡 상체를 일으키고 앉았다. 급격한 자세 변경에 눈앞이 핑 돌았다. 다들 밖에 있는 건가. 방 안은 물론 밖에서도 별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서 의아했다.
무심코 침대 밖으로 나가려다 주춤했다. 정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어야 할 몸이 묘하게 상쾌했다. 따로 씻었던 기억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이불을 슬쩍 걷고 보니, 나체였던 몸에 어느새 옷이 입혀져 있었다. 살갗도 보송보송한 게, 누군가 몸을 닦아 주고 옷도 입혀 준 것 같았다. 백도운이 돌봐 준 걸까.
주완의 작은 기척에 옆에 꼭 붙어 잠들었던 재규어가 등 근육을 씰룩이며 뒤척이더니 불쑥 샛노란 눈을 떴다. 주완은 일어나자마자 고개를 들이미는 놈의 귀에서부터 턱까지를 죽 쓰다듬어 주었다. 재규어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아예 주완의 어깨에 제 고개를 괬다. 그러면서 완연하게 드러난 목덜미를 살살 매만져 주는데, 밖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권수혁은 아니었다. 들이치는 인영이나 향기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어? 주완 씨.”
백도운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주완이 벌써 깼을 줄은 몰랐던 듯했다. 이내 불을 켠 그는 침대로 다가와 걸터앉았다. 그러곤 재규어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다. 재규어가 그 손을 피해 슬쩍 고개를 내빼자, 싱긋 웃으며 놈의 두 볼을 잡고 쭉 잡아당겼다. 재규어는 이리저리 고개를 비틀며 성가셔했지만, 몸을 움직여 피하지는 않았다.
한참 만에야 재규어에게서 짓궂은 손길을 거둔 백도운이 주완을 보며 눈을 접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눈웃음이었다.
“잘 잤어요?”
“네. 그런데….”
주완은 어떤 설명을 구하듯 백도운을 빤히 주시했다. 날이 서 있진 않지만, 제법 고집스러운 눈빛이었다. 왜 자신에게 수면제 성분을 주사한 건지, 어째서 권수혁과 전미남은 보이지 않는지 궁금한 눈초리였다.
“수혁이라면 나갔어요.”
“일하러 간 건가요?”
“뭐, 그런 셈이죠.”
“미남 씨는요?”
“그 사람도 당연히 같이 갔죠. 둘이 항상 붙어 다니잖아요.”
“…….”
주완은 지긋한 시선을 물리지 않았다. 백도운이 픽 웃으며 눈썹을 늘어뜨렸다.
“그렇게 보지 마요. 그 이상은 비밀로 하기로 했으니까.”
“…선생님.”
“주완 씨가 알게 되면 권수혁, 그게 날 가만히 두겠어요?”
“그 사람 일인데, 제가 모르고 싶지 않아요.”
주완의 손에 이불자락이 은근히 말려 들어갔다. 백도운의 눈길이 꾹 쥐어진 그의 두 주먹에 내려앉는다. 주완은 그리고, 하며 말을 이었다.
“저, 웬만큼은 알아요. 미남 씨는 그 사람 하는 일이 무역업이라고 했지만, 정말 그뿐이라면 응급 수혈에 대비해야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 사람 몸에 남은 흉터들도 그렇고… 그런 부분까지 포함해서 그 사람이 좋은 거고,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받아들이기로 한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려 주세요.”
주완은 조금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표정은 또 처음이라, 백도운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 포기. 솔직히 주완 씨 말이 맞지, 뭐. 애인 사이에 비밀 같은 게 있으면 안 되잖아요?”
백도운이 지레 백기를 들었다. 권수혁도 그에게 주완을 맡기면서 비밀이 온전히 지켜지리라곤 기대하지 않았을 터였다.
“일단 밥부터 먹어요. 속이 든든해야 기다리지.”
백도운은 주완의 손을 잡아 그를 침대 밖으로 끌어냈다. 그대로 침실을 벗어나 주방으로 향하면서 귀띔한다.
“수혁인 누굴 좀 만나러 갔어요.”
“혹시 위험한 일인가요?”
“음, 좀 그렇죠. 수혁이보다는 그 상대방 쪽에.”
백도운이 대뜸 고개를 돌려 주완을 봤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의 얼굴에 확신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수혁이 놈, 괴물이거든요.”
전미남은 그 자리에 완전히 얼어붙었다. 수하 몇몇이 서둘러 권수혁에게 달려갔다. 무릎 꿇고 앉은 권수혁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피범벅 된 왼쪽 가슴을 움켜잡고 있었다.
“대…!”
당장 권수혁에게 가 보려던 전미남은 꺼림칙한 직감에 홱 고개를 돌렸다. 시야에 난데없이 휘둘러진 각목이 보였다.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 간신히 옆으로 고개를 내뺐지만, 그대로 내리쳐진 각목은 그의 허벅지를 후려쳤다.
뻑, 소리가 났다. 각목이든 뼈든 어느 한쪽은 부러져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양쪽 모두 멀쩡했다. 각목에 박혀 있던 못이 전미남의 허벅지를 뚫고 들어간 탓이었다.
조중만은 지레 놀라 각목에서 손을 뗐다. 전미남은 격렬한 통증이 올라오는 허벅지를 내려다보다가 고정돼 버린 각목을 단박에 홱 빼냈다. 못이 뽑혀 나간 자리에서 줄줄 피가 흘렀다. 조중만의 낯이 더 희게 질렸다.
“…….”
전미남은 다시 고개를 들고 조중만을 직시했다. 무기를 모두 잃은 조중만은 계속해서 뒷걸음질 쳤다.
주완을 납치했던 일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체념했어야 했다. 단 하루의 유예 시간 동안에라도 살 방법을 궁리했어야. 어차피 언젠가는 권수혁에게 잡혀 대가를 치르겠지만, 1분 1초라도 더 생존하고자 했다면 이처럼 무모한 싸움을 걸지는 말았어야 했다. 인간의 욕심은 늘 제 명줄을 위태롭게 한다.
전미남은 거대한 전차처럼 묵직하면서도 위압적인 걸음으로 조중만에게 다가갔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조중만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서 어깨 너머 어딘가로 날아갔다. 순간, 뭔가가 붕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이어 퍽 소리와 함께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이 작렬했다.
잠시 주춤하며 비틀거렸다. 머릿속이 급격히 어지러워졌다. 동시에 등줄기가 서늘해지며 식은땀이 솟구쳤다. 통증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건 뇌가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 듯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시야가 유리 파편처럼 깨지고 흩어져 제대로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곧 얼굴 옆면을 따라 뜨거운 뭔가가 흘러내렸다. 기어이 머리가 터진 모양이었다. 전미남은 우두커니 섰을 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하… 하하.”
조중만이 비로소 안도한 듯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전미남에게 쇠 파이프를 휘둘렀을 사내가 그를 봤다. 눈이 마주치자 조중만이 어서 끝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쇠 파이프를 번쩍 치켜들었다.
다시금 쇠 파이프가 공기를 매섭게 가르며 날아들었다. 전미남의 뒷덜미를 향해서였다. 직격한다면 제아무리 장사라도 무사할 수 없을 터였다.
순간 전미남이 팔을 들어 쇠 파이프를 막아 냈다. 그러곤 사내가 당황하는 사이, 반대편 손으로 쇠 파이프를 꽉 말아 쥐었다. 사내는 그에게 붙들린 쇠 파이프를 빼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끝내 두 손이 텅 비고 말았다.
전미남은 빼앗은 쇠 파이프로 사내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사내가 악 소리를 내며 제 다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그런 사내의 어깨를 걷어차 바닥에 눕혔다. 미약한 뇌진탕에 끙끙대는 사내의 얼굴로 쇠 파이프를 내리찍었다. 일거에 코가 내려앉으면서 격통과 호흡 곤란에 바르작거리던 사내는, 연이어 날아든 쇠 파이프에 움찔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그의 얼굴 역시 무자비한 완력을 견디지 못하고 완전히 함몰됐다.
응징을 마친 전미남이 서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쇠 파이프를 막아 낸 팔도, 거기에 맞은 머리도 심각한 상태였지만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정한 얼굴빛에도 일말의 변화가 없었다.
쇠 파이프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본 조중만은 완전히 등을 돌리고 허둥지둥 달아났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나자빠졌다. 미남이 던진 쇠 파이프가 정확하게 그의 다리를 친 까닭이었다.
“으으….”
욱신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다시 일어나려던 조중만이 전미남의 그림자에 삼켜졌다. 조중만은 히익 숨을 삼키며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전미남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얼굴이 한 손에 잡혔다. 덜컥 시야가 가려지자 조중만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살려… 줘.”
“죽어.”
전미남이 손을 조이면서 조중만의 얼굴이 종이처럼 구겨졌다. 처음에는 공포로 얼어붙었던 조중만도 호흡이 곤란해지자 살기 위해 바르작거렸다. 비명도 지르고, 가쁘게 숨도 빨아들였다. 금세 그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달아올랐다. 금반지가 가득하던 손가락도 서서히 오그라들었다.
본능적으로 최후를 예감한 조중만은 전미남을 향해 발길질과 주먹질을 서슴지 않았다. 눈먼 주먹에 마구 난타당하는 상황에도 전미남은 꿋꿋했다. 도리어 손끝에 더 바짝 힘을 줘서 조중만의 숨통을 조였다.
“…학!”
조중만에게서 마지막 날숨이 허망하게 터져 나왔다. 그 직후, 전미남을 밀어 내던 그의 두 팔이 툭 떨어졌다. 전미남은 무심하게 그의 머리를 꺾어 확실히 처리하고, 곧장 일어서서 권수혁에게 달려갔다.
조중만의 난사에 쓰러졌던 건 비단 권수혁만이 아니었다. 그와 뒤엉겨 있던 우형석도 불시에 날아든 총탄을 피하지 못했다. 총을 맞은 건 무릎 쪽이었다. 치고받느라 흙먼지로 더럽혀진 바지가 축축이 젖어 들었다. 너덜너덜해진 다리를 질질 끌며 자리에서 일어난 우형석은 분을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쳤다.
“씨발! 병신 같은 새끼! 어디에 총질을… 악!”
상상을 초월하는 통증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두 다리로 버티고 서는 것조차 무리였다. 온몸이 삽시에 땀에 젖었다. 땀방울이 자꾸 눈 안으로 흘러들어 시야를 혼탁하게 했다. 우형석은 손등으로 흐려지는 눈가를 닦으며 권수혁 쪽을 주시했다. 사방에서 달려온 권수혁의 수하들이 그의 주변을 빙 에워싸고 있었다.
죽은 건가.
우형석이 설핏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을 즈음이었다. 권수혁이 바닥의 꽉 움켜쥐더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의 수하들이 일어나지 말라며 만류했지만, 듣지 않고 벌떡 상체를 일으킨다. 그 바람에 왼쪽 어깻죽지의 상처에서 붉은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전미남이 수하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권수혁을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권수혁은 그마저 거부하며 비틀비틀 스스로 일어났다.
권수혁이 불안정한 걸음으로 한사코 우형석에게 향하자, 그를 에워쌌던 수하들이 서서히 길을 트고 물러났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상처에서 여지없이 붉은 피가 주르륵 쏟아졌지만, 권수혁의 눈빛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우형석은 제게 다가오는 그를 보며 연신 히죽거렸다.
“…피차 끝은 봐야지.”
권수혁이 우형석을 고요히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나른한 어조였지만, 분위기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우형석은 혀를 내밀어 제 마른 아랫입술을 핥았다. 목에서 자꾸 피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흥분돼서 좋았다. 그의 수하들도 하나둘 몸을 추슬러 그의 옆에 늘어섰다. 부러진 각목과 피로 낭자한 연장을 꽉 움켜쥔 채였다. 어느 한쪽이 멸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싸움이었다.
권수혁이 먼저 달려들었다. 그를 보호하려 그의 수하들까지 덩달아 움직이면서 금세 양 진영이 엉망으로 뒤섞였다. 권수혁은 빠르게 우형석과의 거리를 좁히면서 주먹을 날렸다. 우형석이 고개를 숙여 가까스로 그의 일격을 피했다. 총격을 당한 다리에 순간적으로 체중이 실리면서 날카로운 통증이 올라왔다. 제 몸인데, 온전히 제 것 같지가 않았다.
“…크악, 씹!”
권수혁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을 거였다. 그런데도 그는 바로 몸을 돌려 덜렁거리는 우형석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이미 마디마디가 부러졌던 팔에서 아찔한 격통이 뻗쳤다. 당장 쇼크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으아아아악!”
우형석에게서 짜증 어린 비명이 터졌다. 그는 제 멱살을 잡아 확 끌어당기는 권수혁의 어깨 상처에 손가락을 콱 쑤셔 넣었다. 그제야 권수혁이 멈칫하며 빠득 이를 갈았다. 이마에도 굵은 핏대가 일어섰다.
지독한 고통에 가쁜 숨을 삼키면서도 권수혁은 우형석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옷깃을 더 꽉 비틀어 잡으면서 그의 숨통마저 조일 뿐이었다. 금세 피부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목이 조여지면서 우형석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개샛….”
우형석은 이를 악물고 권수혁의 총상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생살이 젖은 마찰음을 내며 엉망으로 후벼지자, 권수혁이 그를 확 떨쳐 냈다. 그러곤 욱신거리는 상처 부위를 움켜쥐고 가쁜 숨을 내뱉었다.
“…크윽.”
바닥에 나동그라진 우형석은 고통에 신음하다가도 그런 권수혁을 보며 낄낄거렸다. 그러다 가까운 곳에 떨어진 쇠 파이프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의 손이 막 쇠 파이프에 닿으려던 찰나, 몸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권수혁이 그의 발목을 잡아당긴 탓이었다.
권수혁은 제게서 벗어나려는 우형석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켰다. 우형석이 서둘러 두 팔을 뒤로 뻗어 그의 손을 떨치려 했지만, 셔츠 자락이 늘어지면서 속수무책이었다. 버둥거리던 우형석의 뒤꿈치가 서서히 땅에서 떨어졌다. 우형석은 멀쩡한 다리나마 내차 권수혁을 치려 했지만, 위력이 떨어지면서 무위에 그쳤다.
“컥… 씨발, 이거 안 놔?”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목만 더 조여 왔다. 권수혁은 우형석이 컥컥거리는 소리를 낼 때까지 팔을 들고 버티다가 불시에 그 팔을 바닥으로 휘둘렀다. 힘이 빠져 있던 우형석의 몸이 대책 없이 내동댕이쳐졌다. 머리부터 땅에 들이박힌 우형석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바르작거렸다.
어깨를 큼직하게 들썩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권수혁은 우형석이 노리던 쇠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바닥에 엎어져 꼼짝하지 못하는 우형석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우형석의 눈동자만이 다가오는 권수혁에게 고정됐다. 기이하던 웃음은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핏발 선 눈에 쇠 파이프를 들어 올리는 권수혁의 상이 비쳤다.
권수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쇠 파이프를 내리쳤다. 쉼 없이 뭔가가 부러지고 터지는 소리가 났다. 우형석은 짐승처럼 울부짖을 뿐, 명확한 소리를 내진 못했다. 땅에 처박힐 때 어딘가 잘못됐는지 턱조차 쉬이 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권수혁은 인정사정없이, 철저하게 우형석을 부쉈다. 우형석은 경련하듯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눈동자가 흰자위를 보이며 뒤로 넘어갔다. 그런데도 권수혁은 멈추지 않았다. 한낱 고기를 다지는 것처럼 가차 없었다.
우형석의 수하들을 모두 처단한 뒤 문제의 USB를 확보한 전미남은 그런 권수혁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수하들도 완전히 눈이 돌아간 듯한 그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우형석의 몸이 반사적인 경련조차 하지 않게 됐을 즈음에야 가격이 멎었다. 권수혁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쇠 파이프로 우형석의 얼굴을 돌렸다. 우형석의 멀거니 떠진 두 눈은 부옇게 흐려진 상태였다. 입에는 피거품이 맺혀 있었다. 드문드문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게 숨이 떨어지지는 않은 듯했다.
“오늘 이후로 박주완은 널 완전히 잊을 거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니까.”
의식도 없는 우형석에게 똑똑히 전한다. 주완뿐 아니라 모두가 그를 기억해 주지 않을 터였다. 그 없이도 세상은 별 탈 없이 잘만 흘러갈 테고, 주완마저 그를 비롯한 과거를 훌훌 털고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살아갈 거였다. 태어나고 자라는 동안 그랬듯 죽어서도 영원히 혼자가 되는 것. 부모의 무관심과 학대 속에 망가졌던 우형석에게 그보다 잔인한 형벌은 없을 것 같았다.
다시금 쇠 파이프를 높게 쳐든 권수혁이 그것으로 우형석의 머리를 내리쳤다. 우형석의 머리가 맥없이 돌아가며 그의 몸이 완전히 늘어졌다. 그 옆으로 쇠 파이프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대표님.”
전미남이 한달음에 달려와 권수혁을 부축했다. 피를 많이 흘린 탓에 이번만큼은 권수혁도 그의 손길을 사양하지 않았다.
완전한 어둠이 내린 공터에는 짙은 피 냄새를 날리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피곤한지 고개를 뒤로 젖힌 권수혁이 노곤하게 중얼거렸다.
“…돌아가자.”
집으로. 주완이 기다리는 곳으로.
쾅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크게 요동쳤다. 주완의 시선이 대번에 소리를 쫓아 날아갔다. 동물의 육감으로 뭔가를 인지한 재규어가 한달음에 현관으로 달려갔다. 주완도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갔다.
막상 현관문 앞에 도착했을 때, 밖은 쥐 죽은 듯 잠잠했다. 다만 착각처럼 언뜻언뜻 숨소리 같은 게 들리는 것 같았다. 확인해 봐야 했다. 주저하듯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내렸다. 잠금장치가 스스럼없이 풀렸다.
현관문이 슬쩍 벌어지자마자, 심상치 않은 풍경이 시야에 들어찼다. 전미남이 드물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지독한 피비린내가 났다. 심장이 쿵쾅쿵쾅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주완은 황급히 현관문을 크게 젖혔다. 그러자 전미남의 부축을 받으며 축 늘어진 권수혁의 모습이 시야를 꽉 채우고 들어왔다. 그의 몸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의식조차 온전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할 말이 너무 많았다. 묻고 싶은 질문도 산더미였다. 할 말이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목이 메서 어떤 말도 섣불리 뱉을 수가 없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주완이 곁에 온 걸 알아차린 걸까. 권수혁이 힘없이 눈을 떠서 그를 바라봤다. 주완은 그의 얼굴로 서서히 손을 뻗었다. 손끝이 대책 없이 바들바들 떨렸다. 간신히 권수혁의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줬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뺨도 연이어 훑어 내렸다.
“기다렸어요.”
“…그래.”
권수혁이 설핏 웃어 보였다. 전미남의 부축을 마다하며 주완에게 한 걸음 다가선다. 그러다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엉겁결에 권수혁을 끌어안았던 주완도 버티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그와 겹쳐 쓰러졌다.
주완은 그새 의식을 잃은 권수혁의 얼굴을 황망히 들여다보다가 고개 숙여 그의 가슴에 귀를 대 봤다. 아직 심장이 뛰고 있었다. 미약하나마 숨소리도 이어졌다. 울 것 같은 얼굴로 권수혁의 이마에 제 뺨을 비비적거렸다. 행여 잃을까, 더없이 절박하게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부디 제 간절한 마음이 그에게 닿기를 바랄 뿐이었다.
“…완 씨.”
“…….”
“주완 씨!”
“…네?”
멍하니 의식 없는 권수혁을 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야 가득 백도운이 심각한 얼굴이 들어찼다. 백도운은 넋이 나간 주완의 손목을 잡아 그를 침대 위로 끌어당겼다. 그러곤 권수혁의 총상 위 거즈에 그의 두 손을 겹쳐 올렸다.
“잠깐이면 되니까 여길 좀 압박해 줘요.”
백도운의 목소리에선 평상시의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늘 생글거리던 얼굴도 잔뜩 굳어서 땀범벅이었다. 그만큼 상황이 위급하다는 방증이었다.
주완은 잠자코 백도운이 시키는 대로 거즈를 눌러 권수혁의 상처 부위를 압박했다. 환부에서 꿈질꿈질 피가 새어 나왔다. 권수혁이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렇더라도 지혈을 멈출 순 없어서, 주완은 차라리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밖으로 나갔던 백도운이 서너 개의 혈액 백과 수혈 도구를 챙겨 왔다. 이전부터 짬짬이 권수혁에게서 채혈해 놓은 것들이었다. 백도운은 유려한 손길로 권수혁의 팔에 바늘을 꽂았다. 조절기를 열자 혈액이 투명한 관을 따라 빠르게 흘러들었다. 그러다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게 느껴졌는지, 백도운이 혈액 백을 쥐어짜다시피 했다.
권수혁의 안색은 여전히 파리했다. 백도운은 다시 침대로 올라와 주완이 누르던 거즈 위로 압박 붕대를 칭칭 둘러 감았다. 이어서 어깻죽지의 상처도 마저 지혈했다. 주완도 곁에서 권수혁의 몸을 붙잡아 주며 그를 도왔다.
“잠깐만 지켜봐 줘요. 지혈 안 되는 것 같으면 나한테 바로 말해 주고.”
“네.”
응급 처치를 마친 백도운은 권수혁을 주완에게 맡겨 놓고 전미남을 돌아봤다. 그는 침실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백도운이 성큼성큼 다가가 그의 팔을 확 잡아끌었지만,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고개도 시종 푹 숙이고 있었다.
백도운이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왜, 이러고 죽게?”
“…….”
“자기 학대 그만 해요. 이런다고 누가 좋아하는데?”
“그래요, 미남 씨. 얼른 치료받으세요. 그러다 더 심해지면 어떡해요.”
보다 못한 주완도 전미남을 설득했다. 그런데도 그는 좀처럼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백도운이 별안간 붙잡고 전미남의 팔을 툭 놓았다. 순순히 물러난 건 아니었다. 다짜고짜 전미남의 어깨를 떠밀고 무릎으로 가슴팍을 누르면서 그를 뒤로 홱 쓰러뜨렸다. 그러곤 바지 버클을 덥석 잡아챘다.
전미남이 서둘러 말리려 했지만, 백도운은 막무가내였다. 백도운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도운은 기어이 전미남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그가 바로 바지를 끌어 내리려 하자, 전미남이 다급히 그의 손을 붙들었다.
“알았습니다. 알았으니까….”
전미남이 백기를 들고 난 뒤에야 백도운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따라오라는 듯 침실 밖을 고갯짓했다. 전미남은 별수 없이 바지를 추스르고 그 뒤를 따라갔다.
전미남을 주방으로 데려간 백도운은 대뜸 그를 식탁 쪽으로 몰아세웠다.
“벗어요.”
“선생님….”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외할 때예요? 얼른 벗으라고.”
백도운은 주저하는 전미남의 손을 치우고 직접 그의 바지를 벗겼다. 바지가 유난히 흠뻑 젖어 있더라니, 짐작대로 전미남의 허벅지에 좁고 깊은 상처가 보였다. 날카로운 못 따위에 찍힌 듯했다. 준비한 주사기와 약을 꺼냈다.
“돌아서요.”
지시하는 백도운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냉랭했다. 타협의 여지가 없을 듯했다. 전미남은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백도운이 막무가내로 전미남의 브리프를 잡아 끌어 내렸다. 놀란 전미남이 덥석 그의 손을 붙잡았지만, 백도운은 그 손마저 홱 떨쳐 냈다. 그러곤 주사기로 약물을 빨아들였다.
“세 대 맞을 거예요. 움직이지 말아요.”
알코올 솜을 탄탄한 엉덩이에 문지른 후 망설임 없이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다. 피스톤을 꾹 누르자 실린더 안의 약물이 쭉 빨려 들어갔다. 예고한 대로 면역 글로불린과 항생제, 진통제 순이었다. 날붙이에 자주 다치는 권수혁과 그의 수하들로 인해 파상풍에 대비한 약물은 백도운에게 상비약 수준이 됐다.
마지막 주사를 놓은 백도운은 다시 미남을 돌려세웠다. 그러곤 그를 떠밀어 식탁 위에 앉혔다. 허벅지 상처에 소독약을 들이부으면서 전미남의 얼굴을 주시했다. 정확히는 그의 눈동자의 움직임을 살피는 거였다. 출혈량이 상당했다. 뭔가에 가격당한 거라면 뇌출혈이나 뇌부종이 올 가능성이 컸다. 당장은 멀쩡해 보여도 언제 쓰러질지 몰랐다.
“병원 가자마자 CT부터 찍어 보는 게 좋겠어요.”
여전히 그의 목소리에선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노기마저 띠고 있었다. 우형석을 응징하러 나섰을 때 이렇게 되리란 걸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일이라고, 빈번하다고 지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제 몸을 소홀히 다루는 권수혁과 전미남, 그리고 그의 수하들에게 화가 났다.
가장 위급한 사람들의 응급 처치를 마치고 나니 두 다리에서 힘이 풀렸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이제 그들을 병원으로 옮겨 상태를 더 면밀하게 파악하고, 필요하면 수술까지 해야 했다. 쉴 틈이 없었다. 백도운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지압하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선배, 나야. 수술실 좀 빌려줘.”
무슨 일이냐고 묻는 상대방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그저 도착해서 설명하겠다며, 구급차를 보내 달라 요청할 따름이었다.
“…응, 고마워. 기다릴게.”
통화를 마치자마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힘에 부쳐서였다.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할 것 같았다. 당최 권수혁이 돌아온 이후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백도운은 지레 지쳐 까라지려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거실로 향했다. 그곳은 흡사 전쟁 지역의 의료 막사를 연상케 했다. 백도운이 위급한 사람만 돌보고, 나머지는 직접 제 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진통제가 턱없이 부족했다.
피 냄새를 맡은 재규어는 근처 방에 갇혀 있었다. 흥분해서인지, 혼란스러워서인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백도운이 요청했던 구급차들은 10분 만에 도착했다. 백도운은 권수혁을 비롯해 의식 없는 환자들 위주로 구급차에 태웠다. 나머지 환자들은 직접 운전해 뒤따라오기로 했다.
주완이 구급차에 타려던 백도운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선생님, 저도 같이 갈게요.”
“수술 들어가면 오래 걸릴 거예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줄 테니까 주완 씬 집에서….”
“혹시 제 피가 필요할지도 모르잖아요.”
주완은 백도운의 말을 끊으며 매달렸다. 아닌 게 아니라 권수혁의 현재 상태만 보더라도 대량의 수혈이 필요했다. 미리 채혈해 뒀던 피는 이미 응급 처치에 모두 소진해 버렸기 때문이다. 병원에 RH-AB형의 피가 얼마나 준비돼 있을지 미지수였다. 공개적으로 피를 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백도운은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주완 씨 피는 쓰고 싶지 않아요. 수혁이도 원치 않을 거고.”
주완은 전과 달리 건강해졌지만, 그를 처음 데려왔던 목적대로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권수혁도 의식이 있었다면 그것만은 피하려 들었을 거였다.
하지만 주완도 선선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도운의 손을 제 두 손으로 꼭 붙들며 애원했다.
“절 써 주세요. 뭐든 할게요. 계속 수혁 씨 옆에 있어 주고 싶어요. 다시는 수혁 씨, 혼자 두고 싶지 않아요.”
백도운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무른 사람이 아닌데. 타요, 얼른.”
백도운이 긴 한숨을 쉬며 구급차를 고갯짓했다. 주완은 고개를 꾸벅하곤 얼른 구급차에 올랐다. 네 대의 구급차는 사이렌도 울리지 않고 빠르게 밤길을 내달렸다.
주완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상처투성이인 권수혁의 손을 꼭 감싸 잡았다. 주완의 체온을 느낀 건지 권수혁의 손가락이 간헐적으로 움찔거리며 살짝살짝 부딪혀 왔다. 부디 무사하기를. 아무 일 없이 깨어날 수 있기를.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께 기도하고 또 했다.
***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짙은 소독약 냄새가 났다. 병원인가. 주변이 워낙 고요해서 가습기 소리가 장황하게 들렸다. 눈을 뜨려는데, 눈꺼풀이 잘 벌어지지 않았다. 손을 들어 눈가를 쓸면 그나마 수월할 것 같았지만, 두 팔은 쇳덩이를 단 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누가 온몸을 꼭꼭 묶어 놓기라도 한 걸까.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까딱할 수가 없어서 갑갑했다.
“…으.”
“어? 일어났나? 이봐요! 정신이 좀 들어요?”
누군가가 침대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가 낯설었다. 누구지? 아무리 뇌리를 되짚어 봐도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정체 모를 남자는 계속 우형석에게 정신 차리라고 소리쳤다. 때아닌 소음 공해에 우형석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남자가 자꾸 침대를 건드려서 어지럼증까지 촉발됐다. 고작 눈 하나를 뜨려 부단히 애썼다. 서서히 눈꺼풀이 벌어졌다.
하지만 들이치는 빛이 너무 밝아서 도로 질끈 눈을 감았다. 눈알은 물론 시신경까지 아릿아릿했다. 실상 주변은 그렇게 환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우형석 자신이 너무 오래 어둠에 묻혀 있었을 뿐인지도.
“드디어 일어났네. 괜찮아요? 여기가 어딘지 아시겠습니까?”
조금 전 그 남자가 안도하며 물었다. 우형석은 다시 절치부심해 두 눈을 떠 올렸다. 여전한 눈부심에 불편했지만, 이번에는 눈살을 찌푸려 가며 꾸역꾸역 버텼다. 하얗게 번졌던 시야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으며 주변 풍경을 담아냈다. 흰 천장과 벽, 침상, 커튼, 그리고 링거까지. 예상대로 병원인 듯했다.
우형석은 눈동자를 굴려 조금 전 자신을 부르던 남자를 찾았다. 머지않아 침상 옆에 바짝 붙어 선 남자가 보였다. 역시 모르는 사람이었다.
“우형석 씨?”
“…으?”
정확히 제 이름을 언급하는 남자에게 누구냐고 물으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목구멍에 걸려 언어로 구현되지 못했다. 너무 오랜만에 말하려다 보니 혀가 굳기라도 한 건가. 우형석은 얼굴이 붉어지도록 목에 힘을 주고 어떤 얘기든 구사해 보려 했다. 소용없게도 턱이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고작 입 하나를 떼는 일에 온 힘을 쥐어짰다. 사지도 바짝 굳어 부들부들 떨렸다. 대체 우형석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부릅떠진 두 눈에서 눈동자가 굴러떨어질 듯했다. 남자는 당황해서, 혹은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있는 힘을 쥐어짜며 버둥거리는 우형석을 만류했다.
“진정하세요. 갑자기 움직이면 위험합니다.”
“아으으… 으으?”
우형석은 계속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아직도 그의 뜻은 언어로 정제되지 않았다. 지켜보던 남자는 곤란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불쑥 자신의 지갑을 꺼내 우형석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그곳에는 남자의 신분증이 들어 있었다.
“저는 인천 서부 경찰서 강력반 박종현이라고 합니다. 일주일 전 발생한 구 물류 창고 살인 사건 및 방화 사건을 조사 중입니다. 우형석 씨는 유일한 사건 관계자여서요, 일단은.”
당장 우형석이 해당 사건의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속단하지 않겠다는 것 같았지만, 두 눈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박 형사는 우선 우형석의 의식이 없던 동안의 일들을 대략 설명해 주었다.
“일주일 전 새벽 4시 반경 119구급대에 신고가 접수됐습니다. 버려진 물류 창고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죠. 현장에 출동했을 땐 창고뿐 아니라 10대도 넘는 차들이 전소돼 있었고, 여러 구의 시체도 발견됐습니다. 거의 뼈만 남은 상태라 사인을 밝혀내기가 어려웠습니다만, 화재로 인한 질식사는 아니라더군요. 시신마다 크고 작은 골절이 보였고, 현장에서 총기를 비롯한 쇠 파이프와 칼 등의 연장도 심심찮게 찾을 수 있었거든요. 혹시 죽은 조중만 씨와 무슨 원한 관계라도 있었습니까?”
“읍! 으우우!”
“네?”
“으으읍! 으우, 우!”
박 형사의 추정에는 권수혁의 존재가 완전히 배제돼 있었다. 이대로 뒀다간 자칫 우형석 자신과 조중만이 이권 다툼 끝에 서로를 해친 것으로 수사가 진행될지 몰랐다. 정정해야 했다. 목이 터지라고 ‘백도운’이란 이름을 외쳤다.
그러나 박 형사에게는 불분명한 괴성으로 들릴 따름이었다.
“나 원 참, 이래서야 어떻게 수사하라는 건지. 말도 못 해, 손도 못 써….”
박 형사는 혼잣말로 불평하며 신경질적으로 귓등을 긁었다. 까마득한 한숨을 쉬기도 했다.
왜인지 말을 할 수 없게 됐다는 건 우형석도 이미 인지한 바였다. 무슨 수를 써도 턱이 전혀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손까지 못 쓰다니?
“…으으.”
우형석은 기를 쓰며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권수혁에 의해 팔을 못 쓰게 됐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부서진 팔이 미처 다 완쾌되지 않아서, 그래서 잠시 불편한 것뿐일 터였다. 그래야만 했다.
일주일간 침대에 누워 있었던 탓일까. 허리가 너무 뻐근하고, 침대와 맞닿은 몸 뒤쪽이 꼭 짓무른 것처럼 욱신거렸다. 앉아 있으려는 심산으로 벌떡 상체를 들쳤다.
“……?”
어찌 된 영문인지 사지의 어느 곳도 옴짝거려지지 않았다. 꼭 죽은 몸에 영혼만 깃든 것처럼, 의식만 또렷했다. 너무 오래 잠들어 있어서, 의식을 되찾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근육에 미처 힘이 안 들어가는 건 아닐까. 그렇게 애써 낙관하려 했지만, 숨소리만 가빠질 뿐이었다. 몸은 여전히 침상에 딱 붙어 있었다. 침상조차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우우!”
박 형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선 일어나려 끊임없이 바르작거리는, 실제로는 미동도 없는 우형석을 착잡하게 내려다봤다.
“어차피 곧 알게 되실 테지만, 의사 말로는 우형석 씨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더라고요. 척추가 부러질 때 신경을 다쳐서 목 아래로는 전혀 쓸 수 없을 거랍니다. 둔기로 인한 전신 골절 상탭니다. 손상 정도가 심각해요. 온몸의 뼈가 가루가 된 거나 마찬가지라서요. 말씀을 못 하시는 건 턱의 화상 때문이고요. 추후 성형으로 재건한다고 해도 언어 능력은 영구적으로 소실될 가능성이 크다는데… 답답하네요, 저희도. 사건 해결을 위해서라도 우형석 씨가 꼭 쾌차하셔야 할 텐데요.”
“…으우? 으으! 우으으!”
우형석은 자신의 처지를 부정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물론 그조차 녹아 붙어 버린 입 안에 갇혀 제대로 새어 나가지 못했다. 악몽일 거였다.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개꿈이었다.
우형석은 온몸에 힘을 바짝 주고 발악해 댔다. 핏기 없던 그의 얼굴이 재차 빨갛게 상기되면서 이마와 턱, 목에 팽팽하게 핏대가 일어섰다. 그러나 온 힘을 쥐어짜도 가는 새끼손가락 하나 마음껏 움직여 볼 수 없었다. 제 몸이 제 몸이 아니었다.
“우형석 씨, 흥분 가라앉히세요. 충격이실 거 알지만,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우으아아아아! 으우! 우으아아! 우으으우!”
우형석은 진정될 기미 없이 사납게 울부짖었다. 목이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소리를 내고 말겠다고. 보다 못한 박 형사가 호출 벨을 눌렀다. 곧 의료진이 병실로 달려왔다. 그들은 익숙한 몸짓으로 잔뜩 흥분한 우형석의 사지를 잡아 눌렀다.
“우형석 환자, 진정하세요!”
“우으으! 으우우우!”
“숨 쉬세요! 숨 쉬셔야 해요.”
“아우우! 우아우!”
“안 되겠어.”
의사가 간호사에게 무언의 눈짓을 보냈다. 간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떤 약물을 꺼내 우형석에게 주사했다. 진정제였다. 직접 투여로 약물이 빠르게 몸속으로 퍼져 나갔다. 게거품을 물며 있는 대로 발악하던 우형석의 공격성이 눈에 띄게 잦아들었다.
‘오늘 이후로 박주완은 널 완전히 잊을 거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머릿속도 덩달아 아득해지는 가운데, 새삼스레 권수혁의 마지막 한마디가 떠올랐다. 우형석 자신이 이대로 죽든, 병신처럼 살아남든 시간은 무심히 흐를 것이고, 계절도 어김없이 바뀔 것이며,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흘러갈 거였다. 주완 역시 그 속에서 저란 존재는 까맣게 잊은 채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상처받지 않았다는 듯 뻔뻔하게 미래를 살아가겠지. 싫다. 자신은 끝없이 불행한데, 주완만 사랑받고 행복한 건 결코 보고 싶지 않은 그림이었다.
신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면 제게 이렇게까지 가혹할 수 있는 건지. 원망스러웠다. 어린 시절, 우형석 자신을 그따위로 방치했던 게 미안해서라도 이래선 안 되는 거 아닌가. 한 번이라도 신이 우형석 제 편이었던 적이 있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새카만 절망이 아가리를 쩍 벌리고 단숨에 우형석을 집어삼킨다. 차라리 모든 게 꿈이길 바라며 까무룩 의식을 놓았다.
나직한 발걸음 소리에 권수혁의 눈꺼풀 안쪽이 너울거렸다. 이내 그는 서서히 두 눈을 떠 올렸다. 처음에는 부옇던 시야가 점점 선명해지면서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그런데도 머리가 몽롱해서 잠에서 깬 건지, 여전히 꿈속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곤한 숨을 들이켜며 기척이 느껴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 벌어진 침실 문을 머리로 밀며 들어오던 재규어와 눈이 마주쳤다. 놈은 우뚝 서서 샛노란 눈동자로 권수혁을 빤히 올려다봤다. 주둥이에는 담요 한 장이 물려 있었다.
한동안 재규어를 마주 보던 권수혁이 눈동자를 아래쪽으로 굴렸다. 그러자 침대에 엎드려 잠든 주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재규어는 마저 타박타박 걸어와선 고개를 침대 위로 쭉 내뺐다. 권수혁은 픽 마른 웃음을 터트리며 거대한 고양이처럼 구는 재규어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었다. 보드라운 털의 감촉이, 뜨끈한 체온이 꿈이 아님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고분고분 그의 손길을 받던 재규어는 기분이 좋은 듯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얼마나 의식이 없었던 건지, 손의 감각이 이상했다. 다시 시선이 잠든 주완에게 향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걱정했을까. 걱정했겠지. 짠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재규어가 뒤로 물러나더니 내내 물고 있던 담요를 주완의 등 뒤쪽에 툭 떨어뜨렸다. 나름대로 주완에게 덮어 주려는 것 같은데, 쉽지가 않은 듯했다. 자꾸만 주완의 등을 타고 미끄러지는 담요를 앞발로 툭툭 건드리다가 기어이 주완을 툭 치고 말았다.
선잠이 들었던 주완이 어깨를 움찔하더니 곧 손가락을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으음.”
권수혁은 느릿느릿 고개를 드는 주완을 말없이 지켜봤다. 주완은 자신이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다. 멍하니 제 이마를 기댔던 권수혁의 손을 보다가 홀로 부산한 재규어를 돌아본다. 재규어는 아직도 담요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 재규어가 대견했는지 팔을 뻗어 놈을 꼭 감싸 안았다. 재규어는 슬쩍 고개를 들어 주완의 어깨에 제 고개를 턱 얹었다. 이제는 몸에 익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주완이 놈의 등을 살살 쓸어 주자, 또다시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바닥에 닿은 꼬리를 느릿하게 살랑거린다. 동그란 두 귀도 여지없이 늘어뜨렸다.
“수남아, 수혁 씨가 언제 일어날까?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주완은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재규어의 머리에 연신 제 볼을 비비적거렸다. 그가 멈칫한 건 대뜸 등 뒤에서 뻗어진 손이 그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렸기 때문이다. 주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내내 그를 지켜보고 있던 권수혁과 시선이 맞닿았다. 주완에게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어.”
주완이 제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그대로 굳자, 권수혁이 주완의 뒷머리를 감싸 서서히 그를 제 품으로 이끌었다. 주완은 버티지 않고 홀린 듯 그에게 끌려갔다. 권수혁의 어깨에 주완의 이마가 툭 닿았다. 귓가에 선명하게 그의 곤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박주완.”
“…걱정했어요. 계속 잠만 자서. 혹시 못 일어날까 봐. 너무 무서웠어요.”
권수혁은 두서없이 그간 느낀 두려움을 토로하는 주완에게 쉿, 했다. 숨도 쉬지 못한 채 빠르게 격앙되던 주완이 비로소 진정됐다.
“미안.”
나직이 속삭이며 주완의 머리에 쪽 입을 맞췄다. 주완은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권수혁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그의 탄탄한 가슴이 함께 오르락내리락했다. 그 생명력은 맞닿아 있는 주완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체온도 마찬가지였다. 일정하게 울리는 심장 박동이 평온하게 귀에 감겼다. 크게 다치긴 했지만, 이렇게 살아서 돌아와 줬다. 더는 바랄 게 없었다.
주완은 두 팔을 뻗어 권수혁의 목을 끌어안으려 했다. 기꺼이 주완을 끌어안으려던 권수혁이 돌연 멈칫하며 그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 주완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을 때, 권수혁의 시선은 그의 팔 안쪽에 고정돼 있었다. 주완도 같은 곳을 바라봤다. 시간이 지나 조금은 흐릿해졌지만, 팔 안쪽에 주삿바늘에 의한 멍이 남아 있었다. 기어이 수혈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서.
권수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주완의 손목을 더 꽉 움켜쥐고 그를 채근한다.
“이거 뭐야? 너 대체 무슨 짓을….”
“밥, 많이 먹었어요.”
“…뭐?”
“한 끼도 안 거르고 과일도, 채소도, 고기도 골고루 먹었어요. 이왕이면 수혁 씨한테 건강한 피 주고 싶어서. 난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수혁 씨가 위험해지면 뭐든 다 줄 거라고요. 그러니까 그게 싫으면 이 몸, 함부로 다루지 마세요. 다시는 다치지 말아요. 또 그러면 그땐 정말 화낼….”
주완의 경고 아닌 경고는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권수혁이 덜컥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어 뒷말을 삼켜 버린 까닭이었다. 그리웠던 감각에 두 사람의 미간이 짙게 찌푸려졌다. 조심스럽게 서로를 당기는 손길이 더없이 애틋했다.
맞닿은 입술 새로 조금씩 교환되는 숨결이 가늘게 떨렸다. 메말랐던 권수혁의 혀가 주완의 혀와 살짝살짝 엉기면서 점차 젖어 들어갔다. 촉, 촉 소리를 내며 서로의 입술을 빠는데 얌전히 지켜보던 재규어가 침대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곤 다짜고짜 제 주둥이를 들이댔다. 주완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달착지근한 날숨이 권수혁의 인중에서 간지럽게 흩어졌다.
권수혁은 사랑스러운 두 생명체를 모두 끌어안았다. 재규어는 영 불편한지 버둥거리며 그의 품을 벗어나려 했지만, 주완까지 놈을 얼싸안는 통에 탈출에 실패했다.
주완은 일정한 권수혁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재규어의 부드러운 털에 파묻혀 두 눈을 폭 감았다. 충만했다. 그렇게 흐르는 1분 1초조차 아쉬울 만큼. 이제 더는 조바심을 내지 않아도 되는데, 앞으로도 늘 그렇게 행복할 텐데, 매 순간순간이 안타까웠다.
권수혁은 어느 한 찰나도 놓치기 싫은 것처럼 바르작거리는 주완을 꼭 품어 안아 주며 그의 살갗에 연신 콧날을 문질렀다. 그리웠던 체취를 맡으니 마음이 더없이 뭉클해졌다. 한낱 저 같은 쓰레기가 그라는 사치를 누려도 되는 건지.
평생 죽는 걸 두려워해 본 적은 없다. 동생을 잃은 순간부터, 그토록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한 그때부터 제 미래를 포기했다. 단 한 번도, 차마 행복을 꿈꾸지 않았다.
그런데 주완을 만나고, 그를 지켜보고, 그를 마음에 품기 시작하면서 내일이 궁금해졌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그의 모습을 곁에서 쭉 살펴봐 주고 싶어졌다.
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매 순간순간 안도한다. 지금껏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백도운은 식탁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의료 가방을 앞에 펼쳐만 놓은 채 팔에 턱을 괴고 누군가를 관망했다. 그의 지긋한 시선이 닿은 곳에선 머리에 붕대를 감고, 한쪽 팔에는 깁스를 한 전미남이 한창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원한 콩나물국 냄새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밥솥에서도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무심코 냉장고 쪽으로 돌아서던 전미남은 저를 빤히 보는 백도운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내 얕은 한숨을 쉬며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계속 그렇게 감시하듯 보니 못내 신경이 쓰였다.
“밖에서 쉬고 계시죠. 식사가 준비되면 부르겠습니다.”
“나 개의치 말고 하던 거 해요.”
그렇게 빤히 보면서 모르는 척하라니. 전미남은 나직이 한숨 쉬고 냉장고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꺼내 다시 조리대로 향했다. 백도운이 다시 집요하게 그의 움직임을 살폈다. 아주 약간이긴 했지만, 다친 다리가 아직 불편해 보였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권수혁은 수술실로, 전미남은 영상 촬영실로 이동했다. 권수혁의 경우 그나마 총탄이 몸을 통과한 데다 위험한 부위를 건드리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 어깻죽지의 자상도 깊긴 했지만, 근육만 손상됐을 뿐 힘줄이나 인대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었다. 수술 후 괴물 같은 회복력을 보이며 많이 호전됐다지만, 당분간은 운신하기가 어려울 거였다.
전미남은 CT 촬영 결과 미세 두부 골절과 뇌출혈 소견을 보였다. 출혈이 더 늘어난다면 수술이 불가피했다. 다행히 고였던 혈액이 서서히 흡수되면서 수술대에 오르는 것만은 겨우 면했다. 그렇더라도 한동안 어지럼증을 호소하게 될 터였다. 안정을 찾을 때까지 과격한 신체 활동도 전부 금지됐다. 정작 그는 그저 푹 쉬라는 당부를 무시하고 식사 준비나 하고 있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냄비 앞으로 걸어갔다. 콩나물국이 보글보글 먹음직스럽게 끓었다. 두부를 부칠 요량으로 프라이팬을 꺼내던 전미남이 불 앞을 어슬렁거리는 백도운을 의문스럽게 주시했다.
“이거 맛봐도 되죠?”
백도운은 허락을 구하면서도 진작 숟가락을 꺼내 국을 한 숟가락 떠 올렸다. 그러곤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 식히면서 조잘거렸다.
“난 음식 잘하는 사람 보면 장가가고 싶더라.”
전미남은 백도운의 얘기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두부나 썰었다. 그의 손에서 두부가 일정한 크기와 모양새로 잘려 나왔다. 그사이 백도운이 충분히 식힌 국물을 호로록 들이켰다. 기대했던 대로 개운하고 뒷맛까지 깔끔했다. 전미남의 시선이 은근히 그의 볼에 꽂혔다.
“와, 맛있어. 미남 씨, 진짜 나한테 장가 안 올래요?”
샐쭉 웃으면서 뜬금없는 농담을 던진다. 나름대로 극찬한 걸 텐데, 전미남에겐 그저 놀리는 것 같기만 했다.
“…비켜 주시겠습니까. 두부를 부쳐야 해서.”
“너무하네. 청혼을 두부로 거절하다니.”
이번에도 전미남은 듣지 못한 것처럼 불을 켜고 그 위에 프라이팬을 얹었다. 기름도 넉넉하게 두른다. 옆에서 지켜보던 백도운이 대뜸 손을 뻗어 기껏 켠 불을 껐다. 그러곤 의아하게 보는 전미남의 팔을 잡아당겼다.
“두부는 나중에 부치고 소독부터 하죠.”
“일단 식사 준비부터 마치고….”
“그러면 또 음식 식는다고 밥부터 먹잘 거잖아요. 미남 씨도 이제 자기 몸 좀 챙겨요. 지금 이게 얼마나 어이없는 짓인 줄은 알아요? 누가 누굴 챙겨, 똑같은 환자면서.”
이어진 핀잔에 전미남이 더 대거리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백도운은 그를 식탁 앞에 세웠다. 의료 가방에서 장갑을 꺼내 낄 땐 꼼짝하지 않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뭐 해요? 벗어요.”
“그건 좀….”
“이미 엉덩이도 봤는데, 새삼스럽게 뭘 내외해요?”
“…….”
“바지가 상처 부위까지 안 걷어지잖아요. 미남 씨 허벅지 두꺼워서. 아니면 뭐, 또 내가 벗겨요?”
백도운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전미남이 황급히 제가 하겠습니다, 하며 버클을 풀었다. 하지만 지퍼까지 내리고도 허리춤을 계속 쥐고 있었다. 백도운이 대수롭지 않게 그의 손을 툭 쳤다. 그제야 바지가 미끄러져 무릎에 걸렸다.
무릎을 꿇고 앉아 허벅지의 상처를 빤히 들여다봤다. 상처 부위는 좁아도 깊이는 꽤 깊어서, 꾸준히 소독하면서 덧나지 않게 관리해야 했다. 상처 주변의 붓기도 완전히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신중한 백도운의 시선에 전미남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의 귓가가 은근히 붉어졌다. 상처에서 눈을 뗀 백도운의 낯빛이 별안간 얄궂어졌다.
“오늘은 브리프가 아니네?”
“빨리하시죠, 소독.”
삽시에 전미남의 귀는 물론 목까지 빨개졌다. 백도운은 픽 웃고는 핀셋으로 솜을 집어 약을 충분히 묻혔다. 그러곤 그것으로 미남의 상처를 꼼꼼하게 소독했다. 흘러내리는 약물을 솜으로 누차 닦아 냈는데도 기어이 한 줄기가 도르륵 무릎까지 미끄러졌다. 백도운의 눈동자가 느릿하게 그 움직임을 쫓아 내려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끝났다는 얘기가 없자, 백미남이 오랜 공백에 의문을 느끼며 백도운을 내려다봤다. 백도운이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싱긋 웃었다. 그새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표정이 걸려 있었다.
“미남 씨, 오늘도 늠름한걸요?”
“그런 말씀은 그만둬 주십시오.”
“왜요? 내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 줄 알고?”
“…….”
“야하게 들렸어요? 그냥 부러워서 한 말이에요. 미남 씨 몸,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잖아.”
“성희롱으로 들립니다.”
전미남이 서둘러 바지를 추슬렀다. 백도운은 실실 웃으면서 뒷정리를 했다. 그러면서 모르는 것도 아니었네, 하고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전미남은 서둘러 다시 조리대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봐도 그의 귓등이 터질 것처럼 새빨갰다. 그렇게 솔직한 반응을 보이니 자꾸 더 놀리고 싶어질 수밖에.
“또 도망가는 거예요?”
“…국이 끓습니다.”
변명조차 전미남답게 어줍어서 그만 웃음이 터졌다. 전미남이 버퍼링 걸린 기계처럼 어색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백도운의 웃음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그렇게 가벼운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웃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주완이 없던 시기에는 그저 삭막했던 공간이었다.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나지도,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도, 종일 햇볕이 들지도 않았다.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느껴졌던 적도 없었다. 그저 날이 저물고, 또다시 해가 뜨니 움직일 따름이었다.
한 사람이 순식간에 모든 걸 바꿀 순 없다. 하지만 누군가의 온기는 서서히, 시나브로 퍼져 어느 순간 돌아보면 많은 게 달라져 있다. 앞으로도 그렇게 은은하게 변해 갈 터였다. 내일은 또 어떨지 기대되기 시작했다.
***
이선용에게서 연락이 온 건 두 달 남짓이 지난 어느 봄날이었다. 그는 전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그와는 연이 없는 우형석에 관해서였다.
법적으로 우형석의 유일한 연고자인 주완을 찾아 몇몇 사람들이 다녀갔다고 했다. 우형석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통보하기 위해서였다. 주완이 정신 병원에 강제 입원한 후부터 행적이 묘연해, 그의 출생지 주소까지 찾아가 본 모양이었다.
우형석이 죽었다. 지긋지긋하던 그가 돌연 세상에서 사라졌다. 자살이란다. 기쁘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했을 따름이었다.
늘 우형석과의 인연이 끊어지기만을 바랐다. 그가 불행하기를, 본인의 죗값을 톡톡히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제 오랜 염원이 실현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우형석 스스로 삶을 놓을 줄은.
순수하게 궁금했다. 남을 탓해 제 잘못을 감추고, 부모를 향한 원망으로 평생 폭력을 정당화하며 살아왔던 우형석이 왜 갑자기 자신을 해친 건지. 어떤 절망이 자기밖에 모르던 그를 극한으로 몰고 간 건지.
정체 모를 허망함이 몰려왔다. 이게 바로 홀가분하다는 기분일까. 모르겠다. 이상하게 가슴이 싸했다. 꼭 덧나고 곪은 상처를 치료하려 그 주변의 생살까지 덩달아 도려낸 느낌이었다. 숨이 끊어지던 순간에는 우형석도 참회했을까. 그랬다면 그가 양산해 온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작은 위안이나마 됐겠지만,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 씁쓸해졌다.
“도착했습니다.”
이선용에게 연락처를 남겼다던 형사를 만나러 온 참이었다. 그 길에는 전미남은 물론, 권수혁과 백도운까지 동행했다. 어쩌면 혼란스러울지도 모를 주완을 염려한 까닭이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권수혁이 불쑥 주완의 손을 잡았다. 주완은 제 손을 꼭 감싸는 권수혁의 손을 보다가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내처 전방만 주시하던 권수혁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춰 왔다. 왜인지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가 그랬어.”
“네? 수혁 씨가 뭘….”
“이제라도 우형석을 네 삶에서 제거하려고. 신이 없으니 나라도 놈을 단죄하고 싶었어. 놈이 널 괴롭혔던 걸 후회하게, 그리고 다시는 널 건드리지 못하게.”
주완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근래 권수혁이 크게 다쳤던 건 업무적인 마찰 때문인 줄 알았다. 주완 자신이 그와 함께 살기 전부터 수혈할 피가 부족할 만큼 위태로운 생활을 했다고 하기에.
설마 주완 자신의 사적인 복수를 위해 그토록 무모한 싸움에 응했을 줄은 몰랐다. 그도 그럴 게, 권수혁을 비롯한 모두가 주완에겐 철저히 숨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주완 자신의 일로 손을 더럽히고, 끝내 다치기까지 한 걸 알면 주완은 괜한 죄책감에 시달릴 게 분명했다. 권수혁의 계획을 미리 알았다면 틀림없이 그만두라고 만류했을 터였다.
하지만 악은 회유하거나 무시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외면할수록 더 존재감을 드러내기 마련이었다. 교정될 수 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악해지지도 않았을 거였다. 회생 불가의 악인은 공익을 위해서라도 철저히 격리해야 한다.
우형석은 권수혁의 손에서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 뿐이지, 그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권수혁의 방식이었다. 이제껏 별다른 죄책감은 없었다. 그런데도 주완의 붙잡는 권수혁의 손에 전에 없던 초조함이 서렸다.
“무서우면 도망쳐. 그 형사한테 가서 다….”
주완이 불쑥 권수혁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가볍게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주완은 얼떨떨한 얼굴이 된 권수혁을 지그시 들여다봤다. 손을 돌려 그의 손을 제대로 맞잡기도 했다.
“…수혁 씨가 아니었으면 언젠가는 내가 했을지도 몰라요. 고마워요. 그리고 나 때문에 그런 험한 일 하게 해서 미안해요.”
권수혁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담담하게 웃어 보였다.
“다녀올게요.”
주완은 누구도 대동하지 않은 채 혼자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외딴곳에 자리한 카페인 데다 평일의 이른 시간이라, 박 형사를 알아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박 형사는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주완을 발견하곤 몸을 일으키며 꾸벅했다.
“박주완 씨?”
“네. 제가 박주완입니다.”
“연락드렸던 인천 서부 경찰서 형사, 박종현입니다.”
박 형사가 스스럼없이 악수를 권했다. 악수 자체가 어색했던지라, 슬쩍 그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앉으세요.”
“네.”
“연락받고 놀라셨죠?”
“…네.”
박 형사는 우선 주완과 우형석의 관계에 관해 간단히 질문했다. 두 사람이 아버지가 다른 형제이고, 어느 정도 성장한 상태에서 만났으며, 주완이 정신 병원에 입원한 뒤로 전혀 교류가 없었다는 점에서 둘의 사이를 대강이나마 짐작한 듯했다.
“어떻게, 치료는 다 마치신 겁니까?”
“네.”
박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근 우형석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조직 간의 흔한 알력 다툼 과정에서 대형 화재 사고가 발생했고, 우형석은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로 발견됐다고 했다.
하지만 생명만 겨우 부지했을 뿐, 말도 할 수 없는 불구가 됐다는 거였다. 병원에서 보호자 없이 치료를 받다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스스로 호흡을 중단했다고. 그전까지 현실을 부정하며 발작하기 일쑤여서, 진정제에 의존해 하루하루를 버텼다고 했다.
의지도, 자유도 박탈당한 채 우형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도 속박된 삶은 죽음만 못하다는 걸 깨닫지 않았을까. 주완이 버텨 왔던 10년에 비하면, 죽은 주완의 여자 친구가 겪었던 고통에 비하면 한없이 짧고 가벼운 형벌이었지만, 그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맛보기엔 충분했을 터였다.
시종 감정적 동요 없이 잠잠히 경청하던 주완은 딱 하나만 확인했다.
“시신은….”
“사망 당시 박주완 씨와도 연락이 닿지 않아서, 불가피하게 무연고자로 처리했습니다. 우형석 씨 주변인 중에선 시신 인도를 원하는 분이 없었거든요. 지금이라도 요청하시면 유골을 인도해 드릴 겁니다. 우형석 씨 유산도 상속받으실 수 있으실 텐데.”
“아뇨. 괜찮습니다.”
일거에 거절했다. 박 형사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인과 유가족의 관계는 타인이 함부로 속단할 수 없었다. 때로는 남보다, 원수보다 못한 게 핏줄이기도 했다. 죽은 우형석의 가족사만 보더라도 무덤덤한 주완의 반응이 낯설지언정 이상하지는 않았다.
“혹시 더 묻고 싶은 건 없으십니까?”
“유골이 안치된 곳은 양평하고 거리가 먼가요?”
“양평이요?”
뜬금없는 질문에 박 형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썹을 들었다. 우형석에게 납치됐을 때, 우형석은 주완에게 신나서 제 생부의 최후에 관해 떠들어 댔다. 어머니가 그를 어떻게 해쳤고, 자신이 뭘 도왔는지. 그 죄를 어머니에게 어떤 식으로 뒤집어씌웠는지까지. 아버지의 시선은 양평 어딘가에 묻었다고 했다. 문득문득 지독했던 과거가 떠오르면 그곳으로 가서 생부의 묘를 몇 번이고 다시 파헤친다는 말도 지껄였다.
부모로 인해 끔찍했던 유년기를 보냈고,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해 어그러진 삶을 살았다. 죽어서까지 그 지긋지긋한 악연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곳과 멀리 떨어진 곳이라면 어디라도 괜찮습니다.”
그건 반쪽짜리 핏줄을 향한 처음이자 마지막 배려였다.
말을 마친 주완은 조용히 묵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미련 없이 카페를 나섰다. 밖에서 기다리던 권수혁이 주완을 말없이 끌어안아 주었다. 비로소 과거의 그늘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우형석을 용서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 당장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죽음과 그 사실마저 잊을 만큼 기나긴 시간이 지난 뒤에는 케케묵었던 감정도 흐려져 있을 터였다. 우형석의 존재와 그가 저지른 악행까지 새로운 일상과 다채롭게 쌓여 가는 감정 속에 묻혀 하나, 둘 잊힐 테고.
공연히 씁쓸해졌다. 아주 완벽하고 깨끗하게, 그래서 우형석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를 지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어서.
세상에서 제 존재가 완전히 지워지는 일. 그러고도 무심하게 하루하루가 흘러가는 것. 모진 폭력만큼이나 무관심을 두려워했던 그에게 그보다 가혹한 단죄는 없을 듯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권수혁도, 주완도 아무 말이 없었다. 주완은 생각이 많아 보였고, 권수혁은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전미남마저 운전하느라 내내 전방만 주시하고 있어, 백도운으로선 따분하게 창밖만 내다봐야 했다.
오랜 침묵을 견디지 못한 백도운이 불쑥 뒷좌석을 돌아봤다.
“주완 씨, 할아버님께서 주완 씨한테 남겨 주셨다는 게 뭔지 확인해 봤어요?”
“아뇨. 아직.”
“왜? 뭔지 안 궁금해요?”
“궁금하긴 한데, 확인해 볼 여유가 없었어요.”
백도운은 그럴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몇 달간은 그야말로 격정의 나날이었대도 무리가 아니었다. 백도운 본인조차도 정신이 없었는데, 주완인들 오죽했을까 싶었다.
이내 백도운이 입꼬리를 들치며 씩 웃었다.
“내친김에 오늘은 어때요? 모처럼 나왔는데.”
“오늘요?”
“응, 오늘. 차일피일 미룰 일도 아니잖아요. 금고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큰 기대는 안 해요.”
“그래도 금곤데, 뭐든 소중한 게 들어 있겠죠. 열쇠는, 가지고 있어요?”
“네, 늘 가지고 다녀요. 할아버지가 남겨 주신 거라, 꼭 부적 같아서.”
주완이 펜던트 삼아 목에 걸고 있던 열쇠를 꺼내 만지작거렸다. 권수혁이 손을 뻗어 그런 주완의 뒷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자연스럽게 주완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그렇게 해.”
따뜻하고 온화한 눈길이 주완에게 내려앉았다. 오직 주완만 받을 수 있는 눈빛일 터였다. 괜스레 귓등의 솜털이 일어섰다. 주완은 다시 열쇠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룸미러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전미남이 알아서 은행 쪽으로 차를 돌렸다.
“이겁니다. 천천히 확인해 보시고, 필요한 게 있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담당 행원이 극진히 인사한 후 밖으로 나갔다. 주완에게는 30cm 폭의 작은 금고 하나가 남겨졌다.
작게 심호흡하고 열쇠를 꽂아 넣었다. 달칵 소리를 내며 금고가 열렸다. 그 안에는 몇 개의 낡은 봉투가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청실홍실로 수놓아진 작은 복주머니였다.
끈을 풀고 안의 내용물을 확인해 봤다. 돌 반지로 추정되는 작은 금반지 몇 개가 손바닥 위로 쏟아졌다. 주완의 첫 생일에 선물 받은 것들인 듯했다. 하나도 버리지 않고, 허투루 쓰지도 않고 고스란히 모아 두셨다. 꼭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주완 자신의 탄생을 축하하고, 앞날을 축복해 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주완은 각종 권리서와 땅문서가 든 봉투들을 치우고, 가장 아래쪽에서 웬 가죽 수첩 하나를 꺼내 들었다. 세월의 흔적으로 겉면이 상당히 해진 상태였다. 주름진 커버를 넘기자, 그 안쪽 면에 새겨진 할아버지의 존함이 보였다. 살며시 그 이름을 매만져 보다가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넘겼다.
뒷장에는 할아버지와 그 품에 안긴 갓난쟁이의 사진이 부착돼 있었다. 그 아래 느닷없이 손자를 얻게 된 황망한 마음과 걱정, 그리고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빼곡히도 적혔다. 그 이후로도 조금씩 성장해 가는 주완의 사진과 당시 할아버지의 심경이 일기처럼 상세하고 생생하게 기술됐다.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써 내려간 글귀에는 어린 손자를 향한 애틋한 마음과 염려가 가득했다. 낡은 수첩은 일종의 육아 일기였다.
가장 마지막 장에 이르자, 빛바랜 사진 두 장이 후드득 떨어졌다. 허리를 숙여 떨어진 사진을 집어 들었다. 보기 드문 흑백 사진이었다.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 품에는 웬 아이 하나가 안겨 있었다. 아기였던 주완과 비슷하긴 했지만, 분명히 주완은 아니었다. 주완과 비교하면 할아버지를 좀 더 빼닮은 느낌. 아버지일까.
또 다른 사진에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사내가 찍혀 있었다. 대학에 입학할 즈음 촬영한 사진인 것 같았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아버지임이 틀림없었다. 왜인지 가슴이 먹먹하게 아려 왔다.
주완은 할아버지의 일기장과 아버지의 사진을 꼭 품어 안았다. 권수혁이 그런 주완을 재차 감싸 안았다. 그의 어깨에 고개를 비비적거리며, 주완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보물이었네요.”
***
식사를 마친 후 주완과 백도운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재규어 역시 그 밑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꼬리로 주완을 툭, 툭 건드리며 나름의 여유를 즐겼다. 눈길만은 백도운이 연신 쓰다듬고 있던 토끼에게 고정한 채였다. 주방에서는 간간이 전미남이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극히 평화로운 저녁 풍경이었다.
잠시 침실로 들어갔던 권수혁이 거실을 지나쳐 욕실 쪽으로 향했다. 백도운의 옆에서 토끼를 살짝살짝 만져 보던 주완은 그런 권수혁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덩달아 권수혁을 일별한 백도운이 도로 토끼를 보면서 말을 걸었다.
“권수혁, 씻으려고?”
“뜬금없이 웬 상관이야?”
“조심하라고, 새끼야. 상처 덧나면 나만 고생이니까.”
권수혁은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백도운의 간섭이 못내 성가신 모양이었다.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는다. 백도운 역시 개의치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경고했어. 덧나기만 해 봐. 그땐 내가 너 죽인다!”
아예 빈말은 아니었다. 그동안 권수혁과 전미남을 치료하느라 얼마나 애먹었는지 모른다. 두 사람 모두 절대 안정하라는 말을 무시한 탓이었다. 그래도 전미남은 집안일을 하는 수준에 그쳤는데, 권수혁은 섹스를 참지 못해서 사달이 났다. 툭 하면 봉합 부위가 터지고, 겨우 아물었던 상처가 덧났다. 주완이 말려도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치료 명분으로 회사도 가지 않고 내내 그와 붙어 있었으니,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불 보듯 뻔했다.
권수혁 본인이 자초한 고생이니 불쌍할 건 없지만, 그로 인해 백도운 자신까지 봉합과 치료를 반복해야 하니 짜증이 날 따름이었다.
이윽고 욕실에서 본격적인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한참 그쪽을 예의 주시하던 주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침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얇은 반소매 티셔츠와 통이 넓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그가 거실을 지나 욕실 쪽으로 걸어가자, 지켜보던 재규어가 얼른 몸을 일으켜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한편 욕조에 들어가 앉아 있던 권수혁은 느닷없이 문 열리는 기척에 문가를 응시했다. 그곳으로 주완과 재규어가 잇따라 들어왔다.
“왜?”
“씻는 거 도와줄게요.”
다친 후로 종종 주완의 도움을 받아 몸을 닦고 머리를 감았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권수혁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주완이 욕조에 슬쩍 걸터앉았다. 그가 그쪽에 기대고 앉으라는 듯 다리를 벌리면서 흰 허벅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여기에 기대요.”
권수혁은 순순히 몸을 돌리고 앉아 주완의 허벅지 위로 고개를 젖혔다. 주완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어깨 상처에 방수 드레싱 밴드를 붙였다. 이제 정말 거의 나았다지만, 백도운의 경고도 그렇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이제 보니 백도운 스파이였네.”
권수혁이 픽 웃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가라앉은 목소리라든가, 나른하게 늘어지는 어조가 자못 매혹적이었다. 젖어서 더 짙어진 눈썹과 선명하게 드러난 얼굴선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주완의 목울대가 가볍게 너울거렸다. 영문 모를 초조함에 괜스레 제 도톰한 아랫입술을 삼켰다. 그러곤 시선을 권수혁의 얼굴에 고정한 채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적당하게 수온을 조절하고, 권수혁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흠뻑 적신 후 샴푸 할 때까지 지긋한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양껏 거품을 내서 두피를 시원하게 마사지해 줬다. 귓가와 뒷덜미까지 느른하게 어루만졌다. 권수혁의 얼굴이 편안하게 풀어지며 음, 하고 기분 좋은 신음을 냈다.
다음 순간 촉, 하는 소리를 내며 두 입술이 가볍게 부딪쳤다. 권수혁이 감고 있던 두 눈을 떴다. 멍한 주완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
느닷없이 입맞춤을 당한 사람보다 본인이 더 놀란 표정이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것도 잠시, 권수혁이 몸을 비틀어 돌아앉았다. 그러곤 주완의 손목을 잡아 그를 제게 끌어당겼다.
“잠….”
만류하던 주완의 목소리가 다소 격하게 맞물려 온 권수혁의 입술에 막혔다. 미처 잠그지 못한 샤워기가 이리저리 물을 흩뿌렸다. 온기 가득한 욕실에 때아닌 장대비가 쏟아졌다.
온몸이 속절없이 젖어 드는 상황에도 키스를 이어 갔다. 뜨끈한 숨을 교환하며 빠끔빠끔 입술을 머금어 당겼다. 두 입술이 맞물리고 떨어질 때마다 촉, 촉 젖은 마찰음이 샜다. 애정을 갈구하듯, 애정을 확인하듯 서로를 탐하는 몸짓이 제법 애틋했다. 아쉽게 물러나자마자 재차 쪽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랬다.
권수혁은 자신을 갈망하는 주완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의 눈썹, 눈두덩, 콧등, 인중과 턱에 차근차근 입술을 눌렀다. 행여 바스러질까, 한없이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주완의 얼굴이 기분 좋게 풀어졌다. 권수혁의 입꼬리도 호선을 그렸다.
짙은 암흑뿐이던 삶에 한 줄기 빛이자 단비였다. 권수혁이 주완에게, 주완이 권수혁에게 그랬다. 운명처럼 찾아온 빛을 쫓아서 여기까지 왔다. 속절없이 그 빗물에 젖었다. 사랑이란 그렇게나 맹목적이고 무자비했다.
주완은 권수혁의 손에 제 뺨을 비볐다. 그러곤 맑은 두 눈 가득 그를 담은 채 고백했다.
“날 남김없이 삼켜 주세요.”
제 모든 걸 걸겠다는 순정. 저를 온전히 받아들여 달라는 애원.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된 괴이쩍고 돌발적인 고백에 권수혁이 픽 웃었다. 이내 그는 주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눌렀다가 떼며 당부했다.
“후회하지 마.”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뭔가가 확 달려드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앞발로 욕조를 딛고 선 재규어가 제 주둥이를 주완의 입가에 들이댔다. 전에도 한 번 그래서 우연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권수혁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 같았다.
주완은 재규어의 얼굴을 붙잡곤 손가락을 꼬물거려 놈의 양 볼을 주무르면서 놈의 주둥이에도 가볍게 입술을 맞댔다. 그러자 놈이 까끌까끌한 혀를 내밀어 주완의 입술 전체와 뺨을 마구 핥았다. 간지러워서 웃음이 터졌다.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어도 소중한 가족이 생겼다. 더없이 충만하게 사랑받고 있다. 사랑하고 있다. 더는 바랄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