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도 좋은데, 바람이나 쐬러 갑시다!”
아침 일찍부터 백도운의 목소리가 온 집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알아서 현관문을 열고 들이닥친 그의 손에는 큼직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 담긴 건 모두 음식 재료들이었다. 근처 마트에서 장을 봐 온 모양이었다.
반겨 주는 이 하나 없는 집 안으로 척척 걸어 들어간 백도운은 주방으로 직행해 상자부터 내려놓았다. 장 볼 때부터 카트에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집어넣었더니, 옮기는 내내 팔이 뻐근했다.
한숨 돌리자마자 목 끝까지 잠그고 있던 점퍼의 지퍼를 내렸다. 벌어진 지퍼 틈새로 몽실몽실한 털 뭉치가 보였다. 백도운이 식탁 가까이 상체를 기울이자, 털 뭉치가 그 위로 톡 떨어졌다. 숨을 쉴 때마다 작은 몸이 가늘게 너울거렸다. 백도운이 손가락으로 보송보송한 이마를 살살 쓰다듬자, 느리게 꾸물거리던 털 뭉치에서 두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녀석의 정체는 다름 아닌 토끼였다.
작은 코를 앙증맞게 벌름거리던 녀석이 위협적인 존재가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식탁 위를 뽈뽈 뛰어다녔다. 그사이 백도운은 장 봐 온 것 중에서 냉장 보관이 필요한 재료를 추려 냉장고로 향했다. 그가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을 무렵, 토끼가 겁도 없이 모서리 쪽으로 달려왔다. 그대로 두면 보나 마나 바닥에 처박힐 판이라, 민첩하게 손을 뻗어 녀석을 받아 냈다.
“왜 자꾸 다이빙이야? 네가 고양이인 줄 알아?”
애정 어린 핀잔을 던지며 지레 놀란 토끼를 연신 쓰다듬어 주었다. 다시 녀석을 식탁에 내려놓을 땐 그 주위에 울타리 삼아 티슈, 생수, 컵, 통조림 따위를 둘러놓았다. 호기심 많은 토끼는 다시금 폴짝거리며 제 나름의 탐방에 나섰다.
그렇게 토끼와 노닥거리며 한참을 기다렸지만, 침실 쪽은 내리 잠잠했다. 대놓고 인기척을 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기절한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혼곤히 잠든 게 아니고서야. 물론 그조차 경계심 많은 권수혁과 재규어에겐 해당하지 않는 얘기였다.
얼마쯤 더 기다려 보던 백도운은 대뜸 권수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버젓이 침실 안에서 벨 소리가 들려왔지만, 여전히 굳게 닫힌 문은 열릴 줄 몰랐다. 긴 신호음만 떨어지던 핸드폰에서 돌연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음성 안내가 흘러나왔다. 권수혁이 손수 수신 거부를 한 게 분명했다.
호락호락 물러날 백도운이 아니었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성큼성큼 침실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닫힌 침실 문을 노크했다.
“수남이 일어났어? 문 열어 줄까?”
백도운의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찰나였다. 안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벌어지는 문틈으로 시커먼 인영이 보였다. 권수혁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서늘한 인상인데, 단잠을 방해받아서인지 표정이 저승사자도 울릴 판이었다.
“백도운,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긴. 말했잖아. 바람 쐬러 가자니까?”
“왜 갑자기….”
“이런 날씨에 집 안에만 박혀 있는 건 인생 낭비라고. 귀여운 애인한테도 하면 안 되는 짓이고. 종일 너랑만 붙어 있는 게 지겹지 않겠어?”
백도운은 갑갑하리만치 살짝만 벌어졌던 문을 크게 홱 젖혔다. 주완 곁에 엎드려 있던 재규어가 고개를 들었다.
“수남아, 좋은 아침.”
대놓고 마뜩잖아하는 권수혁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재규어는 방해꾼의 등장이 거슬렸는지 콧잔등을 일그러뜨리고 작게 으르렁거렸다. 백도운은 그조차 개의치 않고 평소처럼 놈의 볼을 주물럭거렸을 따름이었다. 그쯤 되니 재규어의 인내심이 대단한 건지, 백도운의 담력이 대단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시끌시끌한 기척에 이불 속에서 한참 꾸물거리던 주완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곤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상황을 판단하려 애썼다. 가물가물한 눈은 금방이라도 도로 감길 것 같았다. 지금 제 눈에 보이는 광경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운지 고개를 젓는다. 재규어가 그의 볼을 되직이 핥고 나서야 손으로 눈을 비벼 완전히 깨어났다.
“…선생님?”
“잘 잤어요, 주완 씨?”
백도운은 씩 웃고는 창가로 가서 단숨에 두툼한 커튼을 걷었다. 5월의 햇살이 창문을 투과해 이불 위로 쏟아졌다. 눈이 아릴 만큼 환한 빛이었지만,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날씨가 엄청 좋네요.”
“그렇죠?”
백도운은 주완을 냅다 침대 밖으로 잡아끌었다.
“어제 일기 예보 보니까, 오늘 종일 완연한 봄 날씨일 거래요. 공기 질도 좋을 거라고 하고요. 요즘 계속 비만 와서 울적했는데, 잘됐지 뭐야. 수남이 운동 못 시킨 지도 오래됐죠?”
“네.”
“그러니까 스트레스 해소가 안 돼서 애꿎은 문제집이나 찢고 그러는 거잖아요. 모처럼 날씨도 좋은데, 수남이 운동도 시킬 겸 김밥 싸서 소풍이나 가요. 재료는 내가 다 준비해 왔어요.”
백도운은 권수혁의 따가운 눈총을 무시하고 주완을 욕실로 이끌었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들떠 있어서 잠자코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자, 그럼 얼른 세수부터 하고 나와요.”
“…어, 네.”
주완을 욕실로 밀어 넣고 친히 문까지 닫아 준 백도운이 다시 주방으로 걸어왔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부른다. 사뿐사뿐한 걸음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했다.
권수혁도, 재규어도 그런 백도운을 삐딱하게 주시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못마땅한 시선이었다.
“뭐 하고 있어? 너희도 준비해.”
“뜬금없이 이러는 이유가 뭐야?”
“이상한 놈. 소풍 가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그냥 꽂히면 가는 거지.”
“그렇게 가고 싶으면 너 혼자 가든가. 쉬고 있는데 무슨 방해냔 말이야.”
“하아, 내가 대체 어디까지 코치해 줘야 해. 짐승 같은 네놈이야 평생 침대에서만 뒹굴어도 상관없겠지만, 주완 씬 한창때잖아. 제대로 계절 바뀌는 것도 느끼고, 좋은 것도 많이 보고, 맛있는 걸 잔뜩 먹어야 한다고. 그동안 손해 본 세월이 얼만데.”
권수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쯧쯧 혀를 찼다. 그러곤 그가 더 반박하지 못하도록 주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식탁 위에는 음식 재료가 잔뜩 널려 있었다. 그 양과 종류만 보면 단순한 소풍이 아니라 며칠 캠핑이라도 할 심산인가 싶었다.
백도운은 대강 사 온 것들을 정리하면서 오이 하나를 꺼내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김밥을 싸느니 마느니 해 놓고 준비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재규어에게도 수남이 밥 먹어야 하는데, 할 뿐 직접 먹이를 챙겨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밖이 급격히 소란스러워지더니, 현관문이 요란하게 열렸다가 닫혔다. 그 안으로 서둘러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전미남이었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평소와 달리 정장도 챙겨 입지 못했고, 머리카락 역시 스타일링하지 않은 상태였다.
뜻밖의 모습에 권수혁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전미남은 그 앞으로 다가와 꾸벅 인사부터 했다. 숨소리가 자못 거칠었다.
“…하아. 대표님. 무슨 일이십니까?”
“너야말로 무슨 일이야? 땀까지 흘리고.”
“네? 급한 일이 생기셨다고….”
“누가?”
“내가.”
백도운이 주방에서 걸어 나오며 불쑥 끼어들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전미남을 보곤 태평하게 왔어요, 한다. 전미남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으로 권수혁과 백도운을 번갈아 봤다. 어째 권수혁은 짜증이 난 듯했고, 백도운은 그런 그가 안 보이는 것처럼 생글거렸다.
“선생님, 급한 일이라는 게….”
“맞아요, 급한 일. 오늘을 놓치면 언제 또 이런 날씨가 찾아올지 모르니까요.”
“네?”
“미남 씨 김밥 쌀 줄 알아요? 무슨 재료 넣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다 사 왔는데.”
예상대로 본인이 직접 쌀 의향은 추호도 없었던 듯했다.
그즈음 욕실의 문이 열렸다. 재규어가 얼른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새 샤워까지 마친 주완이 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옹기종기 모인 세 사람에게 다가왔다. 뭔가 미묘한 기류에 한 사람씩 살펴보다가 전미남에게 가볍게 묵례했다. 전미남도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주완 씨는 어떤 김밥 좋아해요?”
“저는 다 잘 먹어요.”
“그래요? 그럼 시금치가 좋아요, 오이가 좋아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맛살이나 어묵 중에선?”
“그것도….”
“달걀은 두툼한 게 좋을까? 아니면 넓은 게?”
“으음….”
백도운은 똑똑히 들어 두라는 듯이 전미남을 응시하며 주완을 데리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자신이 장 봐 온 것들을 일일이 보여주면서 오늘의 계획을 전했다.
직접 도시락을 싸서 나들이 가는 건 아주 어렸을 때를 제외하곤 해 본 적이 없었다. 너무 먼 옛일이라 희석되고 미화돼서인지 그저 즐거웠던 기억뿐이었다.
“…재밌겠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옅게 웃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에게 분명히 들렸다. 백도운은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의기양양하게 권수혁을 돌아봤다. 그러자 전미남도 어떤 지시를 바라듯 그를 주시했다.
그때까지도 백도운을 불만스럽게 노려보던 권수혁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곧 돌아서는 그에게서 얕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준비해.”
주완이 원하는 일이면 당최 거절할 수가 없다. 과연 어디까지 물러터질 수 있을지, 권수혁 본인도 궁금할 지경이었다.
뒷좌석 문을 열어 주자마자 재규어가 기다렸다는 듯 훌쩍 뛰어내렸다. 놈은 촉촉하고 폭신한 흙이 발바닥에 닿자마자 거침없이 땅을 박차고 나갔다. 큼직큼직한 보폭으로 야지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놈이 바닥을 내디딜 때마다 땅 전체가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겨울의 길목에서만 해도 본연의 색을 잃고 말라가던 수풀들이 여름을 기다리며 푸른 옷을 입었다. 하얗고, 붉고, 노란 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그 주위를 나비와 벌들이 바삐 날아다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달콤한 냄새가 나서 봄인 게 실감 났다.
황금빛 털을 날리며 이곳저곳으로 내닫던 재규어가 한 번씩 우뚝 서서 뒤를 돌아보곤 했다. 권수혁이나 주완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들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에게 닿아 있다는 걸 인식하면 놈은 더 용맹하고 잽싸게 땅을 내찼다. 멀리서도 놈의 근육들이 역동하는 게 훤히 보였다.
주완이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재규어를 보며 눈을 접었다.
“잘 온 것 같아요. 저렇게 좋아하는데.”
이어 권수혁의 손을 잡고 한마디 덧붙였다.
“이렇게 좋은데.”
권수혁은 얼떨떨하게 잡힌 제 손을 보다가 주완에게 눈길을 옮겼다. 주완이 그런 권수혁을 마주 보며 입술을 늘어뜨렸다.
손을 뻗어 봄볕이 일렁이는 주완의 뺨을 매만졌다. 주완이 그 손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이토록 완연한 봄을, 훈훈하고 부드러운 바람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처음 만났던 순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병원에 갇혀 바깥세상을 꿈꿀 때조차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을지 몰랐다. 요즘 같아선 정말이지, 더할 나위가 없었다.
“자, 그럼 이쯤에 앉을까요?”
백도운이 비교적 편편한 곳을 가리켰다. 그러자 전미남이 알아서 그곳에 캠핑용 널찍한 그늘막을 만들었다. 그 아래 재규어를 위한 돗자리를 깔고 캠핑용 의자와 테이블, 그릴 따위를 준비했다.
그동안 백도운은 적당히 그늘이 드리워지는 나무를 골라 해먹 두 개를 걸었다. 인터넷에서 본 대로 단단히 매듭도 지었다. 하지만 해먹이 앉아 보자마자 내려앉는 바람에 또다시 전미남의 손을 빌려야 했다.
전미남은 집에서 준비해 온 4단 찬합을 꺼내 놓았다. 그 안에는 백도운이 주문했던 김밥과 샌드위치, 과일, 유부초밥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빈말로도 예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투박한 모양새였지만, 맛은 좋을 테니 상관없었다.
백도운은 전미남이 곁들여 먹을 국과 꼬치구이를 준비하는 틈에, 손으로 김밥을 집어 먹었다. 어느새 곁에 와서 수저를 놓던 주완의 입에도 하나 쏙 밀어 넣었다. 김밥이 어찌나 두툼한지 입이 가득 찼다. 그 탓에 씹는 내내 턱이 아팠지만, 맛만은 기대했던 대로 일품이었다.
“와, 대박인데? 미남 씨, 진짜 나한테 장가올 생각 없어요? 빈말 아니야.”
“…….”
“정말 맛있어요. 지금까지 먹어 본 김밥 중에 제일인 것 같아요.”
“과찬입니….”
전미남의 대꾸는 미처 끝맺어지지 못했다. 백도운이 먹으면서 해요, 하며 다짜고짜 김밥을 그의 입에 가져다 댔기 때문이다. 전미남은 마지못해 제 입술 위에 짓뭉개지다시피 하던 김밥을 받아먹었다.
백도운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유부초밥도 꺼내서 주완에게 건넸다.
“주완 씨. 이것도 먹어 봐요.”
“이따가 다 같이 먹어요, 선생님.”
“이런 건 하나씩 집어 먹는 게 맛있는 거라고요. 자, 어서 공범이 돼요.”
백도운이 “이미 손까지 댔잖아.” 하면서 무를 수 없게 했다. 별수 없이 넘겨받아 입가로 가져가다가 문득 권수혁을 돌아봤다. 자꾸 볼 쪽에 빤한 시선이 꽂힌 까닭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권수혁이 주완을, 보다 정확하게는 음식을 오물거리는 그의 입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비단 오늘에만 국한된 행위는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기 이전부터도 그는 그렇게 주완이 식사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곤 했다. 마치 사냥감이 살찌기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고요하고 집요한 눈빛으로.
주완은 제 몫의 유부초밥을 권수혁에게 내밀었다. 권수혁의 눈길이 주완에게서 제게 건네진 유부초밥으로 옮겨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냉큼 받아 가지 않는다.
“아, 잠깐만요.”
곧 뭔가를 떠올린 주완이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권수혁이 위생 문제로 주저하는 줄 알고 젓가락이든, 비닐장갑이든 챙겨 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곧 주완의 손이 멈칫했다. 권수혁이 유부초밥을 든 그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온 직후였다. 권수혁은 주완의 손을 조금 더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그가 들고 있던 유부초밥을 반쯤 머금었다. 주완의 손가락에 묻은 새콤달콤한 양념도 혀로 할짝거렸다. 도중에 눈을 치떠, 멍하니 자신을 보던 주완을 지그시 주시하기도 했다. 산란하는 볕에 그의 실루엣이 반짝반짝 빛났다.
뭔가 모르게 감격스러워 가늘게 몸을 떨었다. 간질간질한 기운이 권수혁에게 붙들린 손에서부터 팔을 타고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느낌. 거칠고 예민한 짐승을 기어코 길들였을 때의 성취감, 그 아름다운 짐승이 제 것이란 데서 비롯된 황홀함. 그 비슷한 감정에 속이 멋대로 부풀어 올랐다.
주완은 괜스레 목덜미를 살살 매만지며 남은 유부초밥을 망설임 없이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 전미남과 백도운은 각기 다른 반응이었다. 백도운은 연신 실실거렸고, 전미남은 민망한 광경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주완 씨, 과일도 먹어 봐요. 딸기가 끝물이라더니, 농익어서 아주 달아요.”
“감사합니다.”
백도운에게서 넘겨받으려던 딸기가 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데굴데굴 구르는 딸기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뭔가를 발견했다. 익숙한 모양새에 한참을 뚫어지게 봤다.
“어, 냉이다.”
바람결에 꽃향기 외에 향긋한 냄새가 섞여 풍겼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아서 주변이 그야말로 냉이밭이었다.
어린 시절, 봄만 되면 나물을 캐러 다니는 강릉 할머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물과 잡초를 구분하는 눈썰미가 생겼다. 어렸을 땐 강릉 할머니를 돕겠다고 아무 풀이나 뜯어서 소쿠리에 넣었다가 일만 더 늘린다며 혼나곤 했었는데.
주완은 손가락으로 냉이를 살짝살짝 만져 보면서 짙은 향수에 젖었다. 그때 백도운이 주완 옆으로 다가와 쪼그리고 앉았다.
“이게 냉이예요?”
“네. 황새냉이요.”
“황새냉이? 그냥 냉이랑은 다른 건가?”
“황새처럼 머리는 작은데, 뿌리가 길어서 그렇게 부른대요. 어떤 사람은 황새처럼 그 자태가 고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요. 일반적인 냉이는 뿌리가 조금만 두꺼워져도 질겨서 먹을 수가 없거든요. 그런데 이건 뿌리가 굵어져도 연해서 맛있다고 하셨어요.”
“오, 좋은 거네. 좀 캐 갈까요?”
백도운이 이거죠, 하면서 보란 듯이 잡초를 뜯었다. 주완은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서 진짜 황새냉이를 캤다. 그러곤 그걸 백도운에게 보여 주면서 설명했다.
“보호색을 띠고 있어서 몸을 낮추고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보여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겸손을 가르쳐 준다고 그러더라고요.”
“주완 씨, 가만 보면 완전히 애늙은이가 따로 없어요. 그래서 좋지만.”
백도운이 놀리면서도 흐뭇하게 웃었다. 주완이 암울하기 그지없던 과거를 견뎌 오면서 비뚤어지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긴 생을 먼저 살아온 어르신들에게 얼마나 많은 걸 보고, 듣고, 배웠을까. 늘 깨달음을 주는 자연에 둘러싸여서, 오로지 사랑으로 보살펴 주는 사람들 품에서 자라 모진 풍파에도 꿋꿋하게 버틴 듯했다.
백도운은 주완이 캔 황새냉이를 힐금거리며 비슷한 나물을 살살 파냈다.
“이걸로 된장국이랑 무침 같은 걸 만드는 거겠죠?”
“네. 부침개도 해 먹어요.”
“그립겠네, 고향의 맛이.”
“사실 잘 기억이 안 나요. 어렸을 땐 쓰다고 안 먹었거든요.”
주완이 냉이 뿌리에 달라붙은 흙을 탈탈 털며 중얼거렸다. 사뭇 아련하면서도 씁쓸한 어조였다.
어떻게 달래 줘야 할까 고민할 무렵, 착각처럼 땅이 울렸다. 주완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곧 그의 시야에 멀리서 달려오는 재규어가 들어왔다.
“어, 수남이 온다.”
“그러네. 근데 입에 뭘 문 거지?”
백도운이 두 눈을 찌푸렸다. 주완은 황금빛 털을 날리며 자신에게 달려오는 재규어를 향해서 두 팔을 뻗었다. 하지만 놈은 주완에게 안기지 않고 그 앞쪽에 서서히 멈춰 섰다. 놈의 주둥이에는 백도운의 말마따나 시커먼 뭔가가 물려 있었다. 족제비였다.
앞발을 나란히 모은 재규어가 늠름하게 가슴을 폈다. 턱까지 고고하게 치켜들고 어떤 반응을 기다리는 모습이 과연 기세등등해 보였다.
재규어가 물어다 준 족제비는 잠시 죽은 척을 하다가 일행이 보지 않는 틈을 타 냅다 도망쳤다. 서둘러 쫓아가려는 재규어를 붙잡았다. 곤충이나 날짐승을 사냥해 주는 게 놈 나름의 애정 표현이라는 걸 알지만, 토끼에 이어 족제비까지 데려다 키우긴 곤란했기 때문이다.
“먹은 거로 칠게. 고마워, 수남아.”
못내 아쉬워하는 재규어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놈의 뺨에 볼을 마구 비비적거리기도 했다. 재규어가 불쑥 고개를 돌려 주완의 입가에 제 주둥이를 가져다 댔다. 삐죽삐죽한 수염이 간지러웠다.
“아, 참. 이거 볼래? 황새냉이라는 건데, 여긴 사람이 안 오는 데라 그런지 엄청나게 많더라?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건데.”
주완은 백도운과 열심히 캔 냉이 하나를 집어 재규어에게 들이밀었다. 재규어가 의심 없이 코를 가져다 댔다가 특유의 향기에 놀라 목을 내뺐다. 이내 놈의 콧구멍이 거푸 일렁이더니, 호된 기침을 터트렸다. 재규어의 우스꽝스러운 반응에 일행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전미남이 준비해 준 점심을 배부르게 먹은 뒤에는 산책도 하고, 재규어와 함께 넓은 벌판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겁 없이 놈과 술래잡기를 하려다 몇 번이고 덮쳐져 넘어지기도 했다. 금세 옷이 엉망이 됐지만, 기분만은 마냥 상쾌하고 즐거웠다.
오후에는 해먹에 누워 잔잔한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했다. 그곳에서 석양까지 구경하고야 자리를 정리했다.
“수남이 재밌게 잘 놀았어?”
백도운이 차에 오른 재규어의 볼을 붙잡고 장난스럽게 흔들어 댔다. 웬일인지 재규어는 으르렁거리지 않고 쓱 고개만 뺐다. 오랜만에 마음껏 뛰어놀아서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권수혁은 운전석으로 가려다 말고 전미남과 백도운, 두 사람을 돌아봤다.
“이제 됐으니까 둘 다 바로 돌아가.”
“저녁까지 먹고 갈 건데?”
“누구 마음대로….”
“아까 나물 캐는 거 못 봤어? 시들기 전에 맛은 봐야지.”
“그럼 네 집으로 가져가서 실컷 맛보든가.”
“뭔 소리야, 엄연히 주완 씨 몫도 있는데.”
권수혁이 고개를 돌려 조수석의 주완을 봤다. 먼저 차에 탄 주완은 뒷좌석을 돌아보며 재규어와 놀아 주고 있었다. 백도운은 일방적으로 좀 이따 보자, 하고는 전미남을 끌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
“미남 씨, 냉이 요리할 줄 알아요? 아까 인터넷에서 조리법 몇 개 찾아 놓긴 했거든요.”
권수혁에게 들으란 듯이 조잘거리면서 차에 오른다. 그러곤 먼저 시동을 걸고 그곳을 떠났다.
권수혁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차에 올랐다. 재규어를 연신 쓰다듬고 있던 주완이 그의 기색을 살폈다.
“왜요?”
“아냐, 아무것도.”
주완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뜨리곤 차에 시동을 걸었다. 오는 길에도 지금처럼 직접 운전했다. 오늘만큼은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멀뚱히 앉아 있던 주완이 대뜸 고마워요, 했다. 권수혁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대뜸 뭐가?”
“내키지 않았는데, 나 때문에 여기까지 와 준 거잖아요.”
권수혁은 픽 웃으며 다시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너한테 좋은 거면 난 뭐든 상관없어.”
무심한 듯 다정한 대꾸에 주완이 권수혁의 오른손을 힐금거렸다. 그의 손은 습관처럼 센터 콘솔에 얹어져 있었다. 이따금 방향을 틀 때나 기어를 바꿀 때가 아니면 늘 그 상태였다. 손을 잡아도 되는 걸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권수혁이 여전히 전방을 주시한 채로 손만 뻗어 주완의 왼손을 잡았다. 그러곤 그보다, 하며 운을 뗐다.
“그립진 않아?”
“뭐가요?”
“그렇게나 옛 기억이 생생한데,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진 않냐고.”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잖아요.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강릉 할머니나 최 씨 아저씨는 소식도 전혀 모르니까. 예전에 살던 집도 다른 사람한테 넘어갔다고 하고…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체념해야죠. 그냥 지금처럼 종종 그때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살려고요. 그땐 그때대로, 지금은 지금대로 행복해요, 난.”
주완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밝게 웃었다. 권수혁의 손을 제 엄지로 가만가만 쓰다듬어 다독이기도 했다. 그때, 뒷자리에 앉아 있던 재규어가 슬쩍 제 앞발을 콘솔 쪽으로 뻗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의 겹쳐진 손 위로 놈의 앞발이 턱 얹어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재규어만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릴 따름이었다. 근래 들어 웃는 일이 많아졌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백도운과 함께 냉이를 다듬었다. 인터넷에 적혀 있는 대로 흐르는 물에 꼼꼼하게 씻는데도 뿌리가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았다. 그러자 백도운이 두 눈을 좁히며 인터넷 레시피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거 칫솔로 닦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리 해도 안 깨끗해지는데?”
“제 기억에도 그냥 이렇게 물에만 닦았던 것 같은데.”
“아니, 아직도 흙이 묻어 있는데?”
“…어, 칼로 살살 문질러 볼까요? 여기 보면 물에 데치라고 나오긴 하던데.”
“흠, 그렇게만 해도 흙이 안 씹히려나.”
나물 손질 하나에 심각한 토론을 거듭했다. 두 사람 모두 서툴러서 그럴 거였다. 전미남이 나서려는데, 권수혁이 그에게 눈짓해 침실로 불러들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대표님.”
“네가 따로 알아봐야 할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언젠가 주완은 권수혁에게 제 조부와 함께 살았던 곳에 다녀와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다. 그땐 일 때문에 주완과 동행하지 못했다. 전미남에게선 그곳이 어디였는지, 거기에서 누굴 만났는지,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사실에 한정된 정보만 보고받았다,
그런데도 주완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눈에 선했다. 얼마 전 조부가 남긴 금고를 확인했을 때처럼, 또 오늘 옛 추억이 깃든 뭔가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처럼 감동하고, 그리워하고, 조금은 서글퍼했을 터였다. 주완은 괜찮다고, 체념하겠다고 했지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주완의 말처럼 과거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더라도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게 덜 아플 수 있지 않을까.
“예전에 박주완을 돌봐 줬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아봐. 그리고 박주완이 살았던 한옥의 현재 소유주가 누구인지도.”
전미남은 의외로운 듯 눈썹을 들쳤다. 그러나 곧 네, 하며 묵례하는 그의 얼굴은 완연히 누그러져 있었다.
***
욕실로 씻으러 들어가던 참에 도어 록이 열렸다. 백도운이 뭔가를 놓고 갔나 생각하며 잠시 현관 쪽을 내다봤다. 예상과 달리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전미남이었다. 주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도 그럴 게, 매일 아침 찾아왔던 그가 한동안 두문불출했기 때문이다. 권수혁에게 물었을 땐 따로 지시한 일이 있다고 했다. 이제야 그 일이 끝난 걸까.
“오셨어요?”
“안녕하십니까. 잠깐 대표님을 뵈러 왔습니다.”
“아, 들어가 보세요.”
“네, 그럼.”
깍듯이 묵례한 전미남이 뚜벅뚜벅 거실로 걸어갔다. 주완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거실에는 재규어만 홀연히 남겨져 있었다. 제게 다가오는 녀석의 등을 길게 쓰다듬어 주면서 권수혁과 전미남의 기척을 쫓았다. 두 사람은 방 안에서 얘기 중이었다. 굳이 대화 장소를 거실이 아닌 침실로 한 걸 보면 긴한 이야기가 오가는 듯했다.
“…그래서, 귀국할 의사가 없다고?”
“네. 무리해서 이동할 상황이 아니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걸 팔 의향은?”
“은퇴 후 말년을 보낼 생각이라 지금까지 쭉 관리해 온 거랍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니, 그쪽에서도 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합니다.”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값을 치르겠다고 말해 봤어?”
“물론입니다. 그런데 돈이 궁한 자는 아니라서 크게 매력적인 제안은 아닌 듯합니다. 제 선에서는 설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문틈으로 언뜻 두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정확히 어떤 화제에 관해 대화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단지 막연하게, 뭔가 권수혁의 뜻대로 풀리지 않고 있다는 느낌만 들었다.
주완은 두 사람의 대화에 더 신경 쓰지 않고 소파 테이블 앞에 앉았다. 버젓이 공부방에 책상이 있는데도 습관처럼 그곳을 고집하게 됐다. 조금이라도 더 권수혁이나 재규어와 함께 있고 싶어서였다.
최근 권수혁이 다시 회사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같이 보내는 시간이 확연히 줄었다. 그래도 전에 비하면 퇴근이 무척 일러지긴 했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다.
문제집을 펼쳐 놓고 백도운이 내 준 숙제를 시작했다. 재규어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뚱한 얼굴로 그 모습을 구경할 따름이었다.
머지않아 권수혁과 전미남이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전미남의 손에 여행 가방이 들려 있었다. 사전에 지시받은 바가 있는지, 그는 바로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차곡차곡 권수혁의 짐을 꾸렸다. 급하게 출장이라도 가는 걸까.
“왜요?”
“얼마간 백도운한테 가 있어.”
권수혁은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권수혁이 주완 자신을 떼어 놓으려는 때면 안 좋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또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이게 되는 건가. 기실 그런 게 아니고서야 백도운에게 신세를 질 권수혁도 아니었다.
근심 어린 눈빛으로 권수혁을 응시했다.
“무슨 일인데요?”
“일주일에서 열흘쯤 미국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갑자기요?”
“응. 그렇게 됐어.”
“일 때문인가요?”
“응.”
“위험한 일인 건….”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해.”
권수혁이 주완의 말을 끊으며 단언했다. 주완은 입을 꾹 다물고 다시 문제집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기보다 뭔가가 못마땅한데 굳이 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주완이 그런 행동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 권수혁도 적잖이 당황했다. 순간이나마 재규어와 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찬찬히 구르며 문제를 읽어 나가던 주완의 눈동자는 시종 같은 자리에서 맴돌았다. 손에 쥔 펜도 한참 동안 움직여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다시 시도해 봐도 좀처럼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끝내 주완은 문제집을 탁 덮으며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재차 권수혁을 똑똑히 보면서 괜한 간섭일까 삼켰던 말을 꺼냈다.
“조금만 더 쉬면 안 돼요? 벌써 무리할 필요 없잖아요.”
“이번 일은 지금이 아니면 안 돼.”
“가까운 데도 아니고 미국이라면서요.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낼 순 없어요?”
“비슷하게 시도해 봤는데, 일이 잘 안 됐어. 내가 직접 가서 해결해야 할 것 같아.”
“그렇게 중요한 일이에요?”
“응. 되도록 성사됐으면 해.”
“…….”
주완은 다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더는 막을 도리도, 명분도 없었다. 곧 주완은 펼쳐 둔 문제집과 노트를 정리했다. 그러곤 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이리 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권수혁이 주완의 팔을 잡아 제게 당겼다. 그의 턱을 들춰서 제대로 얼굴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 평소에도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지금의 표정은 그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좀 달랐다.
빤히 주완을 들여다보던 권수혁이 픽 웃었다. 마뜩잖은지 주완의 눈썹이 일자로 내려왔다.
“왜 웃어요.”
“너 부루퉁한 거 처음 봐서.”
“안 부루퉁했어요.”
“그럼 지금 표정은 뭐지?”
“…그냥 좀 답답한데,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주완이 솔직하게 제 심정을 털어놓았다. 권수혁은 재차 피식 웃으며 대뜸 주완의 뺨을 눌렀다. 볼살에 눌린 입술이 저절로 뾰족 미어져 나왔다. 고개를 비튼 권수혁이 부리처럼 튀어나온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무사히 다녀올게, 하며 다짐하듯 속삭이기도 했다.
그제야 수그러든 주완이 슬쩍 눈을 내리깔고 애꿎은 권수혁의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진짜 조심해야 해요.”
“걱정하지 말라니까.”
“…올 때 마중 나갈게요.”
마지못해 웅얼거리는 주완을 품에 꼭 품어 안으며 그래, 했다. 주완도 덩달아 권수혁의 등에 두 팔을 감았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지 않길 바랄 따름이었다.
***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더듬고, 잠이 들 때까지 한참을 뒤척거려야 했지만, 어떻게든 버텨지기는 했다. 백도운과 함께 지내느라 더 수월했는지도 몰랐다. 하루 내내 일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완이 깨우지 않으면, 백도운은 결코 먼저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빨래는 세탁 바구니에 가득 쌓이다 못해 넘쳐 버렸고, 토끼는 쉼 없이 움직이며 동글동글한 똥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녔다. 재규어도 백도운의 집을 괜히 어슬렁거리다가 애꿎은 화분이나 컵 따위를 깨기 일쑤였다.
호쾌한 성격은 술로 완성된 건지, 백도운은 잠들기 전에 반드시 맥주라도 한잔했다. 덕분에 주완의 일과는 소파 주변에 널브러진 맥주 캔이나 빈 병, 먹다 남은 안주 따위를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것만 보면 주완을 백도운에게 맡긴 게 아니라, 백도운을 주완에게 맡긴 꼴이었다.
그 부분은 전혀 불만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늘 전미남이 대신해 줬던 일을 직접 처리하니 재밌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조금 거창하지만,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느리더라도 제힘으로 제 일상을 꾸린다는 것에 묘한 성취감도 느꼈다.
그래서 공부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집안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돌아서기 무섭게 어지럽혀지는 집을 치우고,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도 널고, 주문 음식이 지겹다는 백도운을 위해 식사도 준비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각종 볶음밥과 라면이 전부였지만, 백도운은 뭘 내놔도 군소리하지 않고 기껍게 먹었다. 가끔은 함께 레시피를 찾아서 낯선 요리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성공할 때보다 실패할 때가 더 많았다.
권수혁과의 영상 통화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아직 주완에게 핸드폰이 없는 관계로 통화할 때마다 백도운의 핸드폰을 빌렸다. 전화가 걸려 오는 건 대부분 백도운이 아직 잠들어 있을 즈음이었다.
처음에는 그렇게나마 권수혁을 본다는 게 좋았는데, 차츰 만질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주완 자신이 딱 그 짝이었다. 괜스레 핸드폰 테두리만 만지작거렸다.
“거긴 몇 시예요?”
- 저녁이야. 6시쯤.
“슬슬 저녁 먹어야겠네요.”
- 그래야지. 넌?
“저도 선생님 깨워서 아침 겸 점심 먹으려고요. 오늘은 달걀볶음밥이에요.”
- 너무 볶음밥만 먹는데.
“이것저것 만들어 보곤 있어요. 성공하진 못했지만….”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다 화제를 바꿨다.
“일은 어떻게, 잘 됐어요?”
- 아직 설득 중이야.
“거래자가 까다로운 사람인가 보네요.”
- 그럴 수밖에 없거든. 그 사람도 사정이 있어서.
“잘 해결됐으면 좋겠네요. 요즘 잠은 잘 자요?”
- 글쎄. 네가 없어서 쉽진 않아.
권수혁의 목소리가 약간 나른해졌다. 그를 보던 주완의 눈빛도 아련해졌다.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어요.”
솔직하게 그리움을 토로하자, 권수혁이 픽 웃었다. 언제 봐도 근사한 미소였다.
- 나도.
때마침 재규어가 주완의 어깨 너머로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주완은 두 눈을 핸드폰에 고정한 채 놈의 목을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수남아, 너도 인사해.”
재규어는 핸드폰 너머의 권수혁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불시에 혀를 내어 핸드폰 화면을 되직이 핥았다. 금세 백도운의 핸드폰이 재규어의 침으로 범벅됐다.
“앗, 안 돼! 이거 선생님 핸드폰인데….”
주완이 서둘러 손을 내뺐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다. 재규어는 주완의 속도 모르고 천진하게 그의 뺨을 할짝거렸다.
- 이럴 줄 알았으면 네 핸드폰부터 개통해 주고 오는 건데. 지금이라도 사무실에 지시해 놓을 테니까….
“아뇨. 괜찮아요. 지금은 어디 전화할 데도 없는데요, 뭘.”
- 연락은 나랑만 해도 되니까.
그다지 간지러운 표현도 아닌데, 배시시 웃음이 났다. 하지만 훈훈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돌연 뒤에서 넘어온 손이 핸드폰을 홱 빼앗아 간 탓이었다.
놀라서 돌아보자 언제 깬 건지, 백도운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화면 속 권수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이게 누구세요? 목소리는 내가 아는 그 권수혁인데, 그놈 말본새가 아니어서 내가 잘못 들었나 했네.”
- 박주완 바꿔.
“이거 봐, 이거 봐. 정색하는 거. 날마다 이렇게 꽁냥 댈 거면 하루라도 빨리 들어오기나 해. 가만히 있는 사람 염장 지르지 말고.”
저를 보자마자 싸늘해지는 권수혁을 놀리며 항의하던 백도운이 뒤늦게 핸드폰의 이상을 알아차렸다.
“뭐야, 근데. 이거 왜 이렇게 축축해? 웬 물기지? 응? 침인가? 권수남! 이거 네 짓이지?”
백도운은 자신의 핸드폰을 재규어의 코앞까지 들이밀고 따졌다. 그러자 재규어가 재차 화면을 진득이 핥았다. 백도운에게서 비명이 터졌다.
그 소리에 놀란 토끼가 후다닥 침실 쪽으로 달아났다. 그 와중에도 작은 똥을 흘려 놓는다. 백도운의 잔소리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재규어는 금세 놈을 쫓아 내달렸다. 그 과정에서 놈에게 치인 백도운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침 범벅된 핸드폰이 허공을 날아 화분에 처박혔다. 정말이지, 하루도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
“가만히 있어, 수남아.”
며칠 후에는 혼자서 재규어를 목욕시켰다. 백도운이 잠시 병원 일을 보고 오겠다며 집을 비운 까닭이었다. 권수혁과 전미남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까도 생각했지만, 두 사람의 귀국이 며칠 더 늦춰져 마냥 버틸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 재규어를 씻기는 건 처음이었다. 그걸 아는지 놈은 제법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단 하나, 털 말리는 것만 빼고.
집에서 큰 배스 타월을 챙겨 오지 않은 게 화근이었다. 일반 수건으로나마 털의 물기를 닦아 봤지만, 서너 개로는 어림도 없었다. 별수 없이 재규어를 욕실에 남겨놓고 수건을 더 가져오려던 참이었다. 놈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문을 열자마자, 재규어가 주완과 문 틈새를 비집고 뛰어나가 버렸다.
“앗, 수남아! 안 돼! 거기 서!”
황급히 재규어를 따라갔지만 헛수고였다. 놈이 거실 한가운데서 온몸을 샅샅이 터는 바람에 사방으로 물방울이 산란했다.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바닥은 물론 TV와 패브릭 소파까지 젖어 들었다.
“…하아, 이리 와.”
주완은 여분의 수건을 챙겨 와서 재규어를 끌어당겼다. 놈이 또 도망가지 못하도록 제 다리 사이에 끼워서 단단히 붙들어 놓았다. 그러곤 수건으로 놈의 몸을 마저 털어서 말려 주었다. 놈의 얼굴을 닦아 줄 땐 상체를 인사하듯 완전히 숙여서 눈매와 코, 입 그리고 수염 한 올 한 올까지 덧그리듯 훔쳐 냈다. 이어 드라이어로 놈의 털이 보송보송해지도록 샅샅이 말려 주었다. 재규어는 철없이 꼬리를 너울거리며 잠자코 주완에게 제 몸을 맡겼다.
털 말리기가 일단락된 후, 어질러진 거실을 치우려던 참이었다. 문밖에서 옅은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곧 도어 록이 열렸다. 백도운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누군가와 통화하며 들어오던 그는 거실과 주완의 꼴을 보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능히 짐작했다.
“수남이 너 또 말썽 피웠구나?”
“죄송해요, 선생님.”
“수남이가 그런 건데 주완 씨가 왜요. 수남이는 씻었고, 주완 씨도 샤워했어요?”
“네.”
“타이밍이 좋았네.”
“…타이밍이요?”
“권수혁 마중하러 가요.”
“네?”
“오는 길에 연락받았는데, 수혁이 오늘 들어온대요.”
“…아.”
반가운 소식에 주완이 멍하니 백도운을 바라봤다. 그러다 거실 청소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방에 튄 물기를 제거하는 손길에도 서두르는 느낌은 없었다. 욕실로 돌아가 뒷정리까지 싹 끝낸다.
백도운은 주완이 밤새 침대에서 뒤척거렸다는 걸 뻔히 알았다. 그가 며칠째 잠 못 드는 이유가 권수혁의 부재 때문이라는 것도. 그래서 권수혁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접하면 틀림없이 반가워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완은 평소처럼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제 할 일을 모두 마친 주완은 뚜벅뚜벅 침실로 들어갔다. 백도운과 재규어가 조용히 그 뒤를 따라가서 그가 뭘 하는지 훔쳐봤다.
주완은 제 가방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한참 옷가지들을 뒤적이는 게, 뭔가를 찾는 듯했다. 끝내 원하는 걸 발견하지 못했는지 폭 한숨을 쉰다.
“왜요, 주완 씨. 뭐 없어졌어요?”
백도운이 모르는 척 다가갔다. 주완은 이미 뒤적였던 옷가지를 다시 헤집으면서 중얼거렸다.
“뭘 입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백도운의 두 눈이 느릿하게 감겼다가 떠지길 반복했다. 그렇게 멍하니 홀로 분주한 주완을 보다가 덜컥 그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주완의 머리통에 제 볼을 마구 비비적거렸다.
“아우, 주완 씨. 너무 귀엽다. 진짜 너무 귀여워? 권수혁한테 주기 아까워요.”
“…선생님, 갑자기 왜 이러세요.”
“권수혁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분명해. 절대 말 안 해 줄 거야. 그 새끼한테 이 일은 정말 말 안 해 줄 거예요.”
백도운은 당황한 주완의 질문에도 대꾸하지 않고 혼잣말만 반복했다. 언뜻 들으면 분통을 터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달리 들으면 탄식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안 되겠다. 당장 옷 사러 가요.”
“아뇨. 그럴 필요까지는….”
“사양은 사양할게요. 내가 주완 씨 마음 다 안다고요.”
백도운이 막무가내로 주완을 잡아끌었다.
꼬박 2주 만에 권수혁을 만난다. 가슴이 멋대로 콩닥콩닥했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확신에 가까웠다.
“근데 수남이도 같이 가도 되는 건가요?”
백도운이 시키는 대로 재규어를 뒷좌석에 태우면서도 확신이 없었다. 이미 재규어도 주완에겐 가족이나 마찬가지고 어디든 함께 가고 싶지만, 그렇다고 놈을 공항에 데려가는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놈을 주차된 차 안에 남겨 둔다고 해도 사람의 이동이 워낙 많은 곳이고, 경찰들도 주기적으로 순찰하는 까닭에 눈에 띄지 말란 법이 없었다.
괜한 욕심에 재규어를 놀라게 하는 건 아닌지, 또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주는 건 아닌지 우려됐다. 백도운은 그런 주완의 근심과 의문을 명확히 해소해 주지 않고 싱긋거릴 따름이었다. 그럴 리 없으니까 타요, 하며 등까지 떠밀었다. 반쯤은 타의로 조수석에 앉았다.
“멀리 갈 거니까 안전띠 매고요.”
“잘 부탁드려요.”
“걱정하지 말아요. 내 운전 실력 잘 알면서. 자, 그럼 출발!”
백도운은 유독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도 내심 권수혁과 전미남의 귀국을 기다렸나 싶었다. 문제는 그의 기분을 따라 차체가 들썩거렸다는 점이었다. 큰 도로로 나가서도 차선을 넘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고 삐뚤삐뚤하게 내달렸다. 조수석에 탄 게 주완이 아닌 전미남이었다면 은근슬쩍 안전 바를 잡았을 터였다. 전미남이 운전할 때와는 천양지차인 승차감에 재규어가 은근히 긴장하며 사위를 두리번거렸다.
“괜찮아, 수남아. 한숨 자.”
주완은 뒤쪽으로 쭉 팔을 뻗어 재규어를 가만가만 다독여 주었다. 실상 운전자의 미숙한 운전 솜씨를 가장 적나라하게 느끼는 건 조수석의 탑승자일 텐데, 시종 평온한 낯빛이었다. 위협을 느낀 다른 차들이 사납게 경적을 울려도 마찬가지였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에 시선을 던지는 여유까지 부린다.
하루하루 권수혁이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이렇게 느닷없이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예상보다 일정이 지체되긴 했으나, 이제라도 돌아오는 걸 보면 일이 잘 풀린 걸까. 백도운이 집을 비우지 않았다면 보통 때처럼 권수혁에게 직접 결과를 묻고 들을 수 있었을 터였다. 어차피 곧 만나게 될 텐데도 그 통화 한 번을 놓친 게 못내 아쉬웠다.
슬그머니 제 옷을 내려다봤다. 백도운이 골라주는 대로 입긴 했지만, 늘 편한 후드 티셔츠 위주로 입었던 터라 셔츠가 영 어색했다. 미용실에까지 끌려가 세팅한 머리도 향기나, 감촉이나 모두 낯설었다.
“에이, 또 그런다. 예쁘다니까? 미용실에서도 다들 잘생겼다고, 꼭 배우 같다고 칭찬해 줬잖아요.”
“안 해 본 것들이라 좀 불편해서요.”
“원래 예쁘고 멋있는 건 인내가 필요한 법이에요. 그나저나 권수혁 반응 되게 궁금하네. 꼭 한몫 받아 내야지.”
정작 주완보다 백도운 본인이 더 기대에 찬 듯했다. 그즈음 주완은 힐금 센터페시아의 시계를 봤다. 출발한 지 한 시간 남짓이 지나 있었다. 예전에 전미남과 함께 공항에 갔을 땐 그렇게까지 소요되진 않았던 까닭에 의아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도로 위에 있었다. 백도운이 유독 느리게 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규정 속도와 신호를 꼬박꼬박 지키는 전미남보다 더 거침없었다.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한참 고속 도로를 달리느라 미처 몰랐는데, 급격히 낮아진 가드레일 너머 풍경이 도심지와는 사뭇 달랐다. 빠르게 지나쳐 가는 나무들도 인공적으로 심은 가로수가 아니라 종이 제각각인 자연목들이었다.
고속 도로를 빠져나오자마자 도로도 편도 1차선으로 줄어들었다. 혹시나 해서 이정표를 살피니, 인천과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지명들이 보였다.
“…선생님. 이쪽은 공항 가는 길이 아니지 않나요?”
“그런가?”
“네. 반대로 온 것 같은데… 혹시 길을 잃은 건가요?”
“글쎄요?”
백도운은 이상하리만치 여유를 부리면서 계속 운전했다. 차를 돌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 걱정하는 주완과 달리 얼굴에는 정체 모를 미소를 내건 채였다.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백도운의 차는 점점 더 외곽 지역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보이던 상업 시설이 하나둘 줄어들더니, 점차 인가도 띄엄띄엄해졌다. 이어서 넓은 논밭이 펼쳐졌다. 얕은 산맥이 그 주위에 푸른 병풍처럼 둘러 서 있었다. 그 아래에서 부지런히 밭일 중인 사람들도 보였다.
근처 마을 쪽에서 나온 시골 버스가 반대 차선으로 느릿느릿 지나갔다. 창가에 앉은 승객들은 하나같이 나이 든 노인들이었다. 버스가 나온 길로 들어서자, 낡은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거기에 적힌 정류장 이름이 꽤 눈에 익었다.
주완이 잘 아는 곳이었다. 가슴이 새삼스럽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주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헤벌렸다. 그의 시선이 으레 언덕 위에 홀로 선 느티나무에 고정됐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그곳은 할아버지의 묘지와 한옥이 있는 고향 마을임이 틀림없었다.
백도운의 차는 천천히 마을 초입의 슈퍼를 지나 할아버지의 한옥 쪽으로 향했다. 백도운은 연신 이쪽인가, 하며 확신 없어 했다. 주완이 얼른 그를 돌아봤다.
“선생님, 갑자기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주완 씨가 살았다던 데, 나도 구경해 보고 싶어서요.”
“네? 그렇지만….”
“아, 저긴가 보다. 맞죠?”
백도운이 금방 한옥을 알아봤다. 마을에 ‘한옥’이라고 할 만한 집이 거기뿐인 이유도 있었지만, 주완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막연히 그려 봤던 집의 모습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주완은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내내 권수혁을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권수혁이 귀국한다는 게 사실이 아닌지, 왜 뜬금없이 이곳에 온 건지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었다.
그 의문들은 한옥 앞 공터에 세워진 차를 보고 금세 풀렸다. 차종도, 색상도, 번호판까지도 권수혁이 평소에 타고 다니던 차와 일치했다.
“자, 도착. 내릴까요?”
권수혁의 차 옆에 비스듬히 주차를 마친 백도운이 씩 웃으며 문을 열고 내렸다. 차체를 빙 둘러 가서 뒷좌석 문도 마저 열었다. 재규어는 안전띠를 풀어 주자마자 훌쩍 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곤 사지를 쭉 늘어뜨리면서 굳은 몸을 풀었다.
주완도 얼떨떨하게 차에서 내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도무지 짐작도 안 갔다.
“수남이, 혹시 모르니까 목줄 좀 하자.”
백도운이 재규어에게 목줄을 채웠다. 놈에게는 낯선 곳이라 예기치 못한 사고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행여 놈이 마을 사람들과 마주치기라도 했다간 시끌시끌해질 거였다.
주완은 손을 뻗어 제 키만 한 돌담을 쓰다듬어 봤다. 까끌까끌한 돌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덩달아 옛 기억이 생동감 가득하게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엔 이곳에서 술래잡기도 하고 말뚝박기도 하며 놀곤 했다. 두 팔을 돌담에 대고 얼굴을 파묻고 있자면 짙은 햇빛 냄새가 풍겼다. 슬며시 벽 가까이 고개를 기울여 봤다. 여지없이 기억 속 그 냄새가 났다. 마음을 한없이 편안하게 해 주는.
그즈음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육중한 문이 밀어 젖혀지면서 낡은 경첩이 묵직한 비명을 질렀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백도운이 재규어를 이끌고 대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다 멀뚱히 보고 있는 주완을 향해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주완 씨, 빨리 와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전에 전미남과 왔을 땐 분명히 문이 잠겨 있었다. 주인도 진작 바뀌었다고 들었다. 그 주인에게 출입을 허락받기라도 한 건가. 아니라면 큰 실례였다.
“선생님, 잠깐만요.”
뒤늦게 만류해 봤지만, 백도운은 대문 안으로 쏙 들어갔다. 재규어도 주완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를 따라 타박타박 걸어갔다.
고향 친구인 선용에게서 관리인이 주기적으로 와서 집을 살피고, 청소한다는 얘기는 들었다. 혹시 그 사람이 지금 온 걸까? 그래서 문이 열린 거라면 딱 한 번, 다시 내부를 구경할 수 있을까. 가슴이 쿵쾅쿵쾅 요란스럽게 뛰기 시작했다. 마음만은 이미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왜인지 두 다리가 바닥에 붙박여 꿈쩍하지 않았다.
“주완 씨, 안 들어오고 거기서 뭐 해?”
주완이 꼼짝하지 않자, 백도운이 대문 밖으로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그제야 주완이 주춤주춤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감정과 생각이 교차했다. 한옥 내부가 어린 시절 기억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묘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활짝 열어 젖혀진 대문 안쪽으로 잘 다져진 흙바닥이 보였다. 꽃들은 옛 기억 그대로 돌담 안쪽을 따라 가지런히 피어 있었다. 할아버지가 하루가 멀다고 물을 주고, 틈틈이 들여다보며 정성을 쏟던 화단이었다.
주완은 조심스럽게 대문 안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흙바닥의 감촉이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게 발바닥에 닿아 왔다. 무엇 하나 허투루 놓치지 않고 두 눈에 다 담아 두려다 보니 걸음걸음이 평소보다 더 느릿해졌다. 작은 꽃 한 송이와 돌담을 이룬 괴석 하나, 기와 한 장, 한 장에 그의 시선이 닿았다.
거짓말처럼 모든 게 그대로였다. 놀랍게도 무엇 하나 바뀐 것이 없었다. 크고 작은 항아리가 빼곡한 장독대와 대청마루에 한쪽에 놓인 고가구, 낡아서 주완이 어렸을 때부터 비뚜름하던 부엌문까지 여전했다. 20여 년의 세월을 역행해 다시 그 자리, 그곳에 선 듯했다.
주완은 보물 창고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두 눈을 크게 뜨고 그 경이로운 광경을 둘러봤다. 넓은 대청마루를 마주하고 섰을 땐 더는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눈앞의 광경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케케묵은 기억들이 선명한 색을 입으며 되살아났다.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안방에서는 할아버지가, 그 건넌방에선 어린 주완이 생활했다. 혼자 자다가 무서운 꿈이라도 꾸면 베개를 안고, 어둠이 내린 대청마루를 내달려 할아버지의 방으로 몰래 숨어들곤 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웃으며 이불자락을 들쳐 그를 안으로 들이곤 겁에 질린 손자가 잠들 때까지 옛날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장에라도 할아버지가 안방 문을 열고 나올 것 같았다.
“안에도 한번 들어가 봐요.”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백도운이 안방에 시선을 고정하고도 주저하는 주완의 등을 떠밀었다. 남의 손에 넘어간 만큼 쉽게 올 기회가 아니었다. 이 순간을 그냥 지나치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저어됐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뭘 망설이고 있어?”
그때, 불현듯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주완의 어깨가 지레 움찔 떨렸다. 그 곁에 붙어 있던 재규어가 먼저 목소리의 주인을 마중하러 갔다. 잇따라 고개를 돌리자, 안으로 들어오는 권수혁이 보였다.
“수혁 씨.”
뒤돌아선 주완이 권수혁에게 걸어갔다. 이내 그 걸음이 뜀박질 수준으로 바뀌었다. 몸을 굽혀 재규어를 쓰다듬어 주던 권수혁이 팔을 벌려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주완도 두 팔로 그의 목을 휘감아 안았다. 서로의 귀가 쓸리면서 부드럽게 뭉개졌다. 그리웠던 체취가 콧속 가득 밀려들었다.
권수혁은 주완의 뜨끈한 목에 입술을 안착시켰다. 한 번, 두 번. 연이어 입을 맞추다가 나직이 속삭인다.
“어서 들어가 봐.”
“하지만….”
“걱정할 거 없어. 이제부터 다시 네 거니까.”
예상치 못했던 대꾸에 주완이 고개를 들고 멍하니 권수혁을 봤다. 권수혁은 그가 들은 게 모두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가서 만나 봐야 했어.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선물해 주고 싶어서.”
그럼 권수혁이 때아닌 출장을 갔던 것도 모두 이 집 때문이었을까. 집주인을 친히 설득하기 위해서.
속에서 뭔가가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기가 급격히 버거워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히 선물이라고 칭하기엔 너무도 크고 엄청난 거라서,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너무 기쁜데, 어째서인지 웃음보다는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정말 괜찮을 걸까? 이 정도로 사랑받아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권수혁을 마주 보던 주완의 두 눈이 망울망울 젖어 들었다. 예기치 못했던 반응에 권수혁이 적잖이 당황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전미남도, 백도운도 차마 나서지 못하고 지켜볼 뿐이었다.
입술까지 꾹 물고 눈물을 참던 주완이 권수혁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확연히 보였다. 이내 그의 손이 권수혁의 손 위로 겹쳐졌다.
“같이 들어가 줄래요?”
주완이 애써 웃으면서 부탁했다. 어째 그 말이 단순히 방 안으로 함께 가 달라는 얘기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권수혁은 기꺼이 그래, 하며 주완의 손을 꽉 맞잡았다. 그제야 주완의 떨림이 멎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 위로 올라섰다. 그러곤 어린 주완이 쓰던 건넛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백도운이 어느덧 재규어를 쓰다듬고 있던 전미남에게 넌지시 물었다.
“집주인, 어떻게 설득했어요? 얼마를 줘도 안 팔 거라고 했다면서요.”
“알아보니 그분도 이 근방에서 유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수중에 돈이 생기자마자 이 집을 사들인 것도 본인이 나고 자란 곳에서 말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고요. 지금은 중병에 걸려 여명이 얼마 안 남은 상태라, 그 부분을 중점으로 피력했습니다. 지금의 몸으로 귀국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테니까요.”
“그러니까 뭐라고 했냐고요. 이름도, 정체도 모르는 시커먼 남자들한테 덜컥 내 집을 팔아넘길 리가 없잖아요. 살날도 얼마 안 남은 사람이. 설마 남은 가족 들먹이면서 협박한 건 아니죠?”
“대표님께선 그런 무뢰한이 아니십니다.”
“별로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요? 겉만 좀 번지르르할 뿐이지, 조폭이랑 다를 게 뭐야.”
“…엄밀히 따지면 무역업입니다.”
“우기기는. 그렇다 치고, 빨리 말해 봐요. 어떻게 된 건데? 궁금하단 말이야.”
“박주완 씨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놨습니다. 지금의 집주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이 집을 절실히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다행히 말이 잘 통하는 분이었습니다. 박주완 씨와 그 조부님의 사진을 보여 줬더니, 흔쾌히 허락하시더라고요.”
백도운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누구라도 주완의 얘기를 들으면 그를 돕고 싶지 않을까. 주완은 집주인이 자신의 여생을 보내려 꾸준히 가꾸고 정성 들였던 집을 어떤 이보다 소중하게 다룰 사람이기도 하고. 더구나 권수혁이라면 아쉬운 것 없도록 대가도 톡톡히 치렀을 터였다.
어쨌거나 무사히 마무리돼서 다행이었다. 주완이 다시 제 삶을 찾아 가고 있는 요즘, 유일하게 마음에 걸렸던 게 바로 이 집이었다. 그가 조부의 묘를 찾을 때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이 집이 눈에 밟힐 테고, 번번이 속상해질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아, 공기 좋다. 시원해서 잠도 잘 오겠네.”
기지개를 켜던 백도운이 반응 없는 전미남을 돌아봤다. 그는 한참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는 권수혁을 기다리며 대청마루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내버려 두면 장승처럼 계속 그렇게 버틸 기세였다. 쯧쯧 맹렬하게 혀를 찼다.
“텄어요. 권수혁, 다시 안 나온다고. 그러니까 미남 씨도 어디 가서 쉬어요.”
“괜찮습니다.”
“자동 반사야? 뭘 툭하면 괜찮대. 여기 사랑방도 있던데, 같이 구경 안 갈래요?”
“사양하겠습니다.”
“아, 여기서 밤새 보초 설 거 아니면 잠자코 따라와요. 이것도 엄연히 방해라고.”
눈치가 이렇게 없어, 하고 타박하면서 전미남의 팔을 붙잡고 다짜고짜 사랑방 쪽으로 이끌었다. 전미남이 차마 그 손을 떨치지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 낯선 한옥을 둘러보던 재규어도 느릿느릿 두 사람을 따라갔다.
그리 높지 않은 담벼락 안에서, 고아하게 솟은 처마 밑을 거닐고 있자니 전혀 다른 세계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절로 걸음이 느려지고, 마음속이 차분해졌다. 양껏 들이켜도 부담스럽지 않은 청아한 공기가 몸도, 머리도, 영혼까지도 깨끗하게 정화해 주는 느낌이었다. 이 모두가 주완이 아니었다면 누려 보지 못했을 호사였다.
“이 방이 이렇게 작았네요. 어렸을 땐 너무 넓어서 무서웠는데.”
주완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어린 시절의 제 방을 훑어봤다. 창가 쪽에 앉은뱅이책상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어린 시절, 억지로 그곳에 앉아서 몸을 배배 꼬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공부하는 게 싫고, 놀고만 싶던지.
그 옆쪽의 벽장을 열자, 모서리가 하얗게 해진 책과 노트가 꽂혀 있었다. 세월의 흐름을 증명하듯 바람이 빠져 찌그러진 축구공도 보였다.
“집주인이 계속 바뀌었다고 들었는데… 아무도 이걸 안 버렸네요.”
“그러게. 꼭 진짜 주인을 기다렸던 것처럼.”
권수혁이 뒤에서부터 주완을 꼭 끌어안아 왔다. 주완의 흰 목덜미에 입술도 묻는다. 주완은 제 어깨에 감긴 그의 팔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그러다 권수혁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권수혁이 두 손으로 주완의 얼굴을 잡고 쪽 입을 맞췄다. 잠자코 입맞춤을 받은 주완이 그의 손을 제 손으로 겹쳐 잡고 연신 뺨을 비비적거렸다.
“고마워요. 이런 값진 선물을 받게 될 줄 몰랐어요. 이걸 어떻게 갚아야 할지….”
권수혁이 재차 주완을 끌어당겼다. 이번에는 입술이 더 깊게 맞물렸다. 혀끝과 윗입술을 한데 애틋하게 빨아 당기다가 서서히 놓아주었다.
“이거면 됐어.”
“이것 때문에 수혁 씨 애쓰고 있는 줄 모르고… 철없이 보고만 싶었어요.”
솔직하게 고백하자, 권수혁에게서 한숨 같은 날숨이 터졌다. 그러다 불쑥 주완에게 다가섰다. 주완이 반사적으로 물러나자 재차 거리를 좁혀오며 쪽 입을 맞췄다. 주완이 지레 움찔하며 물러나고, 권수혁은 계속 다가가면서 연거푸 촉, 촉 입술이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끝내 주완의 등 뒤에 딱딱한 벽이 와 닿았다. 물러날 곳이 없어지자, 권수혁이 덜컥 주완을 안아 들었다. 주완도 그의 얼굴을 꼭 끌어안았다.
권수혁은 그런 주완과 연신 뺨을 비비적거리고, 그의 목에 거듭 입을 맞추면서 벽장문을 열었다. 그러곤 아무렇게나 이불을 끄집어냈다. 두툼한 이불과 베개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 위에 한없이 조심스럽게 주완을 눕혔다. 숨결이 서로에게 끼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
“…….”
서로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주완은 권수혁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미끄러뜨려 두피를 쓰다듬고, 그의 넓은 등을 제게 빠짝 당겼다. 권수혁도 주완의 허벅지를 손안 가득 움켜쥐면서 고개를 비틀어 빈틈없이 입술을 맞물렸다. 두 입술 새에서 혀끝이 서로 닿아 애절하게 비벼졌다. 그리움의 크기만큼 다급하고 절절하게 서로를 빨아 당겼다.
주완의 숨이 가빠졌을 때에서야 서서히 고개를 뗐다. 주완은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권수혁을 올려다봤다. 눈동자가 어떤 순수한 열망에 젖어 있었다. 권수혁은 못 말린다는 듯 픽 웃더니 그의 손을 당겨 제 셔츠 단추를 쥐여 주었다. 주완이 눈치껏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고개 숙여 그의 이마와 눈가, 뺨, 입술에 마구 입술을 내려앉혔다. 그새 그의 손은 주완의 셔츠를 살살 들쳐 올려 맨허리를 만지작거렸다.
마지막 단추가 남았을 무렵, 권수혁이 벌떡 상체를 세웠다. 그러곤 주완을 까마득하게 내려다보며 셔츠를 양쪽으로 확 벌렸다. 단추가 바닥으로 퉁겨 나가면서 두툼한 상체가 완연히 드러났다.
멍하니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주완의 목울대가 가볍게 너울거렸다. 권수혁은 셔츠를 홱 내던지고, 고개 숙여 주완의 목에 쪽 입을 맞췄다. 주완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나직이 신음했다. 권수혁은 연방 셔츠 밖으로 드러난 목에만 집요하게 입술을 누르더니, 첫 번째 단추를 입에 물었다. 그러곤 혀만으로 단추를 풀었다.
단추 하나가 풀리면서 주완의 흰 목 일부가 드러났다. 권수혁은 그 부위에 어김없이 입술을 내려 앉혔다. 그러곤 쪽 소리가 나도록 세게 살갗을 빨아당겼다. 주완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읏.”
아프도록 빨아 당기던 부위에 재차 쪽 입을 맞추고 아래 단추로 내려간다. 오랫동안 그가 머물렀던 자리엔 또렷한 키스 마크가 새겨졌다.
권수혁은 두 번째 단추도, 세 번째 단추도 처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성껏 풀었다. 길어지는 기다림 때문인지, 정체 모를 초조함 때문인지 주완의 몸이 쉴 새 없이 바르작거렸다. 그런 반응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며 헐렁해진 셔츠 자락을 물어 뒤로 젖혔다. 그로써 훤히 드러난 연분홍빛 살점을 혀끝으로 짓누르며 가슴 전체를 함빡 머금었다.
“아읏… 읏… 아….”
주완이 진득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목부터 얼굴까지 점점이 열이 올랐다. 권수혁은 자꾸만 달아나려는 주완을 더 완강히 붙들고 말랑말랑한 살점에 연신 혀를 뭉쳤다. 그 선단을 완전히 파묻어 버릴 것처럼 짓이기다가 끝이 다시 뾰족해질 정도로 흡착해 당겼다. 후덥지근한 입 속에서 몸살 앓던 유두가 점점 꼿꼿해지기 시작했다.
권수혁이 부러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떼자, 주완의 뺨이 확 붉어졌다. 주완은 작게 끙끙대며 날렵한 코끝으로 반대편 유두를 가만가만 문지르던 권수혁을 만류했다.
“읏, 수혁 씨, 그러지 말고….”
“누가 이렇게 공들여 포장해 놨는데, 살살 풀어야 예의지.”
권수혁이 눈을 들고 주완을 똑똑히 보면서 중얼거렸다. 살짝 잠긴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왜인지 그 말이 어떤 선전 포고처럼 들렸다.
“하읏… 읏, 응, 앗….”
아니나 다를까, 권수혁이 계속 코끝으로 지분거리던 유두를 폭 파묻힐 만큼 마구잡이로 후벼 팠다. 민감한 부위에서 촉발된 간질간질하고 저릿한 감각에 주완의 허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권수혁은 그 허리를 꽉 붙들면서 그가 도망가면 도망가는 대로 집요하게 쫓아갔다. 한껏 짓이기던 살점을 쪽, 쪽 힘주어 빨아 당기자 주완의 허리가 움찔움찔 튀면서 뒤틀렸다.
“읏, 그, 만… 이상, 해, 응, 아읏…!”
금세 양쪽 유두가 흥건하게 젖은 채 퉁퉁 부어올랐다. 그 주변의 살갗도 울긋불긋해져선 선명한 잇자국이 남았다. 잔뜩 앓은 주완의 두 눈에도 여릿한 물기가 어렸다.
“하아… 하아… 읏.”
완전히 풀어져서, 또 조금은 원망 어린 눈빛으로 권수혁을 보던 주완의 얼굴이 재차 이지러졌다. 마지막 단추만 남겨 둔 권수혁이 대뜸 배꼽에 혀를 뭉텅 밀어 넣은 까닭이었다. 후미진 곳의 매듭을 헤아릴 기세로 고집스레 파고들어서 있는 대로 긁고, 후벼 판다. 배꼽 깊숙한 곳이 건드려질 때마다 그 안쪽까지 징징 울렸다. 금세 사타구니가 참을 수 없이 뻐근해지면서 절로 무릎이 맞붙었다.
“읏, 잠깐, 잠… 응, 아으읏….”
귀가 뭉개질 정도로 정신없이 앓다가 권수혁의 머리를 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몸이 이상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제야 주완을 올려다보는 권수혁의 두 눈에 전에 없던 흥분이 들끓었다. 연인이 된 후 처음으로 떨어져 지냈다. 그것도 무려 2주간이었다. 예정보다 길어져 버린 금욕 생활에 이성의 퓨즈가 금방이라도 나갈 듯 말 듯 했다.
주완이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쌓일 대로 쌓인 몸이 평소보다 민감하게 반응해 어째야 할 줄을 몰랐을 따름이었다.
권수혁은 자신을 막막하게 내려다보던 주완의 손을 붙들어 그곳에 쪽 입을 맞췄다. 붙들었던 손끝부터 손등, 손목, 팔로 점점이 입술을 누르면서 올라와 힘겹게 달싹거리던 입술을 머금었다. 동시에 능숙하게 그의 바지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렸다.
달짝지근해진 주완의 혀와 입술을 쪽, 쪽 가볍게 빨면서 속옷을 젖혀 열띤 성기를 집어 꺼냈다. 가만히 어루만지는 것만으로 주완의 몸이 흠칫흠칫했다.
“쉿.”
나직이 어르면서 새빨개진 목 깊숙이 얼굴을 파묻었다. 숨을 들이켜 한층 더 짙어진 체취를 만끽했다. 머릿속이 더 몽롱해졌다. 뜨끈뜨끈한 주완의 목에 연신 입술을 누르다가 입을 벌려 여린 살갗을 물었다. 동시에 밑에선 성기를 가만가만 훑었다.
“흐으, 흣… 앗, 읏, 아… 나, 나도….”
부들부들하며 거푸 앓던 주완이 권수혁의 중심부로 한껏 손을 뻗었다. 권수혁은 그의 목을 아플 만큼 세게 빨면서 그의 손을 제 성기로 이끌어 주었다. 그새 단단해진 살덩이를 그러쥔 주완이 서툰 손짓으로 두툼한 성기를 가만가만 매만졌다. 그것만으로도 권수혁의 등이 크게 너울거렸다. 귀에 감기는 숨소리도 사뭇 거칠어졌다.
혀로 주완의 귀 뒤쪽을 길게 핥아 올렸다. 이어 미열이 도는 그의 귓바퀴를 야금야금 머금으며 허스키하게 속삭였다.
“하아… 더 세게 해 봐.”
“읏, 으… 핫, 아앗….”
주완이 애써 제 성기를 북돋고 있는데도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권수혁은 결국 제 하반신을 주완에게 바짝 붙이고 스스로 허리를 짙게 문질러 댔다. 그 여파로 두 사람의 성기가 더 강하게 쓸렸다. 주완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아읏, 응, 아윽… 아, 하윽! 읏?”
엉망으로 앓다가 덜컥 숨을 삼켰다. 돌연 중심부가 홀가분해졌기 때문이다. 덩달아 손안에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던 권수혁의 성기가 쏙 빠져나갔다. 밑을 진득이 붙인 채 허리 짓까지 서슴지 않던 권수혁이 불쑥 상체를 일으킨 탓이었다. 권수혁은 주완의 바지와 속옷을 한데 잡아 확 벗겨 냈다. 밑이 서늘해지면서 주완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다음 순간 권수혁이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주완의 다리를 제 손으로 떠받쳤다. 그로 인해 허벅지와 복부가 맞닿으면서 주완의 몸이 반쯤 접히다시피 했다. 느닷없이 구도가 뒤집히면서 제 다리에 가려 권수혁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착각처럼 그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졌다고 느껴질 뿐이었다.
“…수혁 씨?”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엉덩이 쪽을 고요히 내려다보던 권수혁이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서늘한 예감이 스쳤다.
“자, 잠…!”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말려 보려는데, 권수혁이 다리를 당기는 바람에 재차 몸이 발라당 젖혀졌다. 이어서 그의 얼굴이 훤히 드러난 엉덩이 위로 파묻혔다. 날렵한 콧날이 엉덩이 골 사이를 파고드는 감각에 어금니를 물었다. 잇따라 미지근하고 물컹한 혀가 구멍 위로 떨어져 주변의 여린 살갗을 적셨다. 깊고 후미진 곳이 축축이 젖어 드는 감촉에 몸을 떨었다.
“흐읏, 읏… 아으, 읏….”
정성 들여 구멍을 갉작이던 권수혁이 혀끝에 힘을 줘서 안쪽을 눌렀다. 처음에는 단단히 버티던 입구가 조금씩, 조금씩 부드럽게 흐무러지며 그의 침입을 허락했다. 얇은 살갗을 쪽, 쪽 소리 내서 빨다가 재차 혀끝으로 구멍을 지분거렸다. 감질이 났다. 좀 더 확실하게 집어삼키고만 싶었다.
권수혁은 구멍에서 회음부, 음낭을 지나 성기까지 길게 핥고 올라와선 새빨개진 귀두를 머금었다. 이미 젖은 요도에 혀를 뭉쳐 감미롭게 빨면서 녹녹해진 구멍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선득한 이물감에 주완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를 달래듯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면서 진득하면서도 빠르게 구멍 안을 다졌다.
주완이 벌벌거리며 손을 뻗었다. 애처롭게 떨리던 손끝이 권수혁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고개를 들자, 울 것 같은 주완의 얼굴이 보였다.
“흣, 으… 빨리, 빨… 읏, 어 주세요.”
권수혁은 피곤한 낯빛으로 픽 웃었다. 아니, 몰릴 대로 몰려 정신력이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응, 하는 목소리가 나른하게 들렸다.
“진작 한계였어.”
다시 무릎이 가슴을 압박해 왔다. 덩달아 묵직한 살덩이가 툭 구멍 위로 떨어졌다. 그리웠던 살갗의 감촉을 기억이라도 하는 것처럼 성기가 매섭게 꿈틀거렸다. 주완은 숨을 누르며 곧 다가올 고난을 기다렸다.
슬쩍슬쩍 엉덩이 골에 제 성기를 문지르던 권수혁이 예고 없이 구멍을 짓치고 들어갔다. 내벽이 순식간에 확장되며 꾸역꾸역 거대한 성기를 삼켰다. 최대한 벌려 놓는다고 벌려 놨는데도 금세 성기가 빠듯하게 맞물리며 숨통을 조여 왔다. 복부가 부득부득 차오르는 느낌에 주완이 가슴을 부풀리며 막막하게 버둥거렸다.
“아… 아….”
권수혁의 어금니가 꽉 물렸다. 잇새에서는 빠득 이 갈리는 소리마저 새어 나왔다. 반쯤 물린 성기가 성에 차지 않았는지 자꾸 몸뚱이를 꺼덕거렸다.
권수혁은 숨을 한 번 돌리고 주완의 볼기를 양손으로 꽉 움켜쥐어 벌렸다. 그러곤 애매하게 걸려 있던 성기를 확 박아 넣었다. 뻑뻑하게 물려 있던 성기가 내벽을 할퀴며 단번에 밀려들어 갔다. 권수혁의 탄탄한 허벅지와 주완의 볼기가 퍽 소리를 내며 밀착됐다.
“…으윽.”
“하으… 읏….”
자극된 주완의 내벽이 느리게 꾸물거리면서 권수혁의 성기를 촘촘하게 옭아맸다. 권수혁은 그 감미로운 조임을 느끼면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저 미간을 찌푸린 채 감미로운 괴로움을 만끽하는 것뿐인데, 꼭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피가 들끓어 솟구치는 육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권수혁은 주완의 팔을 당겨 제 목에 두르게 했다. 그러곤 그의 허리를 붙잡고 밑을 팍팍 치대서 붙이기 시작했다. 안을 들쑤시고 휘저을수록 긴장으로 단단하게 굳었던 내벽이 허물어지며 부드러워졌다. 그 촘촘하면서도 기분 좋은 포근함에 저절로 귀 뒤의 솜털이 곤두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텅 빈 속이 채워지지 않았다. 식욕만 왕성해질 따름이었다.
차분하게 드나들던 권수혁의 성기가 점차 속도를 올렸다. 덩달아 삽입도 깊어져서 귀두만 겨우 남기고 빠져나갔다가 일거에 뿌리 끝까지 들이치길 반복했다. 푹푹 들쑤셔지는 내벽 곳곳이 아릿아릿했다. 얼얼한 배 속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아, 하….”
“아읏… 읏… 응, 읏… 하으읏!”
권수혁에게 꿰어져 간신히 신음만 흘리던 주완이 별안간 온몸을 쭈뼛 굳혔다. 그의 살갗에도 파릇하게 잔 소름이 돋았다. 모르고 지나치면 좋으련만, 속살을 쉼 없이 쑤석이던 권수혁이 멈칫하며 주완을 주시했다. 그의 얼굴이 엉망으로 이지러져 있었다. 흐리멍덩해진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권수혁은 주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해 놓고 밑을 팍, 팍 일정하게 처박았다. 애꿎은 입술을 물며 낮게 신음하던 주완이 어느 지점을 꿰뚫자 재차 화들짝 놀랐다. 권수혁은 주완의 당황한 얼굴에 눈을 고정한 채 귀두가 틀어박힌 그 부위를 뭉근하게 휘돌렸다. 그러자 주완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흐으, 으읏, 앗… 아응, 으, 으응.”
고통에 가까운 지독한 쾌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주완을 완강히 붙잡았다. 이어 베개를 그의 허리 밑에 받쳐 하반신을 들쳤다. 그런 후 그의 허벅지를 누르면서 잠시 멈춰 있던 성기를 폭력적으로 들이박았다. 주완에게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터졌다.
“하으읏! 읏, 아, 아읏, 윽, 응, 아읏!”
본능적으로 발끈발끈하는 그의 사지를 누르면서 예의 그 지점을 몇 번이고 들쑤시고, 짓이겼다. 권수혁에게 대책 없이 꿰어진 주완이 눈썹을 늘어뜨린 채 집요하고 무자비한 권수혁을 서운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그 눈빛마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몇 번이고 젖은 눈가와 발그레해진 뺨에 입술을 눌렀다. 다시는 아프게 하지 않을 것처럼, 미안한 것처럼 다정하고 세심하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하반신은 여전히 폭군이 따로 없었다. 돌덩이 같은 귀두에 거듭 다져진 점막이 저릿저릿했다.
“응, 읏, 아읏… 흣, 윽, 천, 흣….”
“하아, 하… 조금만.”
연신 나긋한 목소리로 주완을 달래면서 밑을 쉬지 않고 들쑤셨다. 깊이 처박았던 성기를 쭉 뽑아낼 때마다 머릿속의 회로도 다발째 뽑혀 나가는 것 같았다. 그 끔찍하도록 강렬한 쾌감에 눈앞이 다 어질어질했다. 목 안쪽에서 도무지 제 것 같지 않은 거친 숨소리가 불거졌다.
애꿎은 주완의 목만 발라먹을 듯이 마구 핥고, 짓씹으면서 녹녹해진 속살을 욕심껏 폭식했다. 거칠게 밀려드는 살덩이에 맥없이 쓸린 점막이 꿈질꿈질 성기 겉면에 들러붙어서 빨판처럼 살갗을 흡착하는 것 같았다. 그 쾌감을 아쉽게 떨치고 나올 때마다 귀두를 머금은 구멍이 움찔움찔 조여들며 어서 다시 들어오라고 보채는 느낌이었다. 그 모든 게 자의적이고 자기 합리화에 가까운 인식이었지만, 그만큼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점점 더 허리 움직임에 박차를 가했다. 금세 등줄기가 미끈하게 젖어 들었다. 후끈후끈 더해지는 열기로 등에서 여릿한 김마저 피어오르는 듯했다.
“하으, 읏, 응, 아, 아읏!”
“하아… 읏…!”
음낭이 뭉개질 정도로 과격하게 구멍을 쑤석이던 권수혁이 어느 순간부터 삽입 후 밑을 진득이 비비적거렸다. 덩달아 그의 성기가 주완의 몸속에서 휘돌면서 흐무러진 점막을 더 짓이겨 놓았다. 거듭된 삽입으로 예민해진 내벽도 성기 겉면의 굵은 핏대와 힘줄에 부득부득 긁혀 나갔다. 퉁퉁 부은 입구마저 음낭에 치이고 쓸려 아릿한 통증을 촉발했다. 견디기 버거운 쾌락에 주완의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흐읏, 으, 응, 수, 혁 씨….”
입술이 쉼 없이 달그락거리며 가쁜 숨과 뭉개진 신음을 흘렸다. 권수혁은 절박하게 자신을 찾는 주완의 손을 붙잡아 당기며 가슴을 맞붙였다. 그러곤 그의 뺨, 귀, 턱, 목 가릴 것 없이 입술을 붙이면서 최후의 스퍼트를 올렸다.
급격한 요의가 몰렸다. 뭉근하게 퍼지던 열감이 날카롭게 벼려진 송곳처럼 성기를 찌르는 듯했다. 권수혁의 잇새에서 다시금 이 갈리는 소리가 나면서 그의 아랫입술이 윗니에 꽉 베어 물렸다. 주완은 울음인지, 숨인지 모를 것을 삼키며 그저 그를 꼭 끌어안았다.
머지않아 권수혁의 성기가 주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뜨겁게 폭발했다.
“…크으으윽!”
“으읏… 읏, 아앗!”
주완이 자지러지며 동시에 울컥 사정했다. 그의 정액을 뒤집어쓴 권수혁의 복근이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권수혁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건지, 주완의 배 속에 머물던 성기를 두어 번 더 쑤셔 올렸다. 아직 부들부들 경련하던 그의 성기가 영역 표시 하듯 남은 정액을 마저 뿜어냈다.
짙은 여운에 부들부들 떨던 주완의 사지에서 주르륵 힘이 빠졌다. 순간이나마 돌처럼 몸을 굳혔던 권수혁도 그 위로 온전히 겹쳐 쓰러졌다. 권수혁이 힘을 빼면서 그의 무게가 고스란히 주완을 짓눌렀다. 주완은 작게 끙끙거리면서도 꾸역꾸역 권수혁을 안고 있었다.
권수혁은 픽 웃으며 몸을 돌려 주완과 바꿔 누웠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서로의 가슴이 찐득하게 맞붙었다가 떨어졌다. 주완은 그저 권수혁이 위에 얹혀서 덩달아 너울거릴 따름이었다.
“힘들었어?”
머리맡에서 나른한 권수혁의 목소리가 불거졌다. 주완은 숨만 쌕쌕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권수혁이 땀에 젖은 그의 이마에 머리카락에도 망설임 없이 입을 맞췄다.
한참 만에야 진정된 주완이 꼼지락거리며 권수혁의 흉터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슬쩍 고개를 뻗어 흉터 위에 입을 맞추고, 혀를 내밀어 할짝거리기까지 했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권수혁이 덜컥 주완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입술을 먼저 머금을 새도 없이 혀부터 뭉텅 들이치는 격렬한 키스였다. 미간마저 쓰게 구겨져 있었다.
주완 역시 눈썹을 늘어뜨리고 권수혁의 키스를 받으면서 연신 그의 흉터를 쓰다듬었다. 그 애틋하고 간지러운 손길에 속이 괜스레 뭉클해졌다.
키스 중에 자꾸만 허벅지에 쓸리는 뭔가가 신경 쓰였다. 잠시 입술을 떼고 슬쩍 뒤를 돌아봤다. 그런 주완의 시야에 그새 발기해 꼿꼿이 선 권수혁의 성기가 보였다. 놈은 거대한 몸뚱이를 양옆으로 흔들면서 주완의 허벅지 안쪽에 은근히 살을 비비적대고 있었다.
“어, 벌써….”
“응. 아직 부족해. 조금 더 먹어야겠어.”
권수혁은 감미롭게 속삭이며 양손으로 주완의 허벅지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의 긴 손가락이 볼기를 당겨 구멍을 벌렸다. 안쪽에 꽉 들어찼던 정액이 꿈질꿈질 회음을 핥으며 흘러내렸다. 주완이 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움츠렸다. 끝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려는 정액을, 권수혁의 성기가 도로 훑어서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곤 그 입구까지 귀두로 꾹 막아 버렸다.
권수혁의 ‘조금’은 주완의 ‘조금’과는 다를 거였다. 보통의 ‘조금’과도 다를 거였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순순히 그에게 저를 던졌다.
의지할 곳 없던 몸을 단단하고 포근하게 지탱해주는 권수혁만의 안위, 체온, 체취에 샅샅이 물들어 간다. 이렇게 야금야금, 종국에는 통째로 집어삼켜져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으음….”
가물가물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창호지 문 너머에서부터 푸르스름한 기운이 새어 들고 있었다. 동이 튼다는 징조였다.
잠자리가 바뀌었는데도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아니, 정말 아무런 꿈도 꾸지 않았던 건지는 모르겠다. 자는 내내 따뜻한 볕이 등을 어루만지는 느낌이 들었다. 고향 집에 돌아왔다는 심리가 빚은 착각이었는지, 정말 그런 꿈을 꿨는지 확신이 없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주위를 훑어봤다. 몇 번을 봐도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이 흩어지지 않았다. 허상이 아니었다.
다시 고개를 툭 떨어뜨리자, 권수혁의 팔이 머리 아래 와 닿았다. 밤새 그렇게 팔베개를 해 주었던 걸까. 다른 쪽 팔마저 주완의 허리에 단단히 감겨 있었다. 슬쩍 고개를 내빼 권수혁의 팔에는 목만 괴어 놓고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장거리 출장에 피곤했는지, 굳게 감긴 두 눈은 떠질 줄 몰랐다. 그에게서 새어 나오는 고른 숨소리가 달게 귀에 감겼다. 완전히 풀어져서 편안해진 얼굴을 보니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손을 들어 권수혁의 턱을 가만가만 만지작거렸다. 어깻죽지와 빗장뼈 아래쪽 흉터를 볼 땐 못내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젠 다 나아서 아플 리가 없는데도 한없이 조심스럽게 상처의 흔적들을 헤아렸다. 그러다 권수혁의 품에 파고들며 두 팔 가득 그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그의 넓은 가슴에 이마를 비비적거리기도 했다.
순간 권수혁의 숨소리가 흐트러졌다. 이어 그의 몸이 느릿하게 너울거렸다. 이어 큼직한 손이 주완의 귀와 뺨을 한데 감싸 왔다.
“…왜. 또 악몽이라도 꿨어?”
위쪽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새 깨어난 권수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사려 깊은 눈빛으로 주완의 낯빛을 살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다시 그를 꼭 끌어안았다.
“아뇨. 너무 행복해서요. 다 꿈일까 무서울 만큼 좋아서 그래요.”
잠잠히 안겨 있던 권수혁이 주완의 이마에 제 입술을 사뿐히 눌렀다가 떼어 냈다. 그러곤 살짝 잠겨 허스키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한테 미리 알릴까도 했는데. 일이 잘 안 풀리면 되레 실망만 줄까 봐 말 안 했어.”
“알아요. 어제까진 까맣게 모르고 걱정했는데, 이젠 다 알게 됐어요.”
권수혁이 재차 주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입술을 그대로 댄 채로 뜻밖의 소식을 속삭였다.
“네가 어렸을 때, 널 돌봐 줬다는 사람들 근황도 알아봤어. 다들 널 만나고 싶어 해.”
주완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
“…누구요? 설마 강릉 할머니랑 최 씨 아저씨요?”
권수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표정 그대로 굳어 있던 주완이 두서없이 질문을 던졌다.
“두 분 다 건강하세요? 어디 계셨대요? 그동안 잘 지내셨고요?”
“신기하네.”
“네? 뭐가요?”
“그 사람들도 네 소식 접하자마자 그것부터 물었다던데.”
별안간 속이 속절없이 뭉클해졌다. 귓속의 솜털이 일제히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괜히 울컥해서 눈물까지 날 것 같았다.
주완은 공연히 권수혁의 살갗을 살살 어루만지면서 사그라질 듯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빨리 만나고 싶어요.”
“그래. 그렇게 하자.”
다정하게 속삭이며 재차 서로를 당겨 안았다. 맞닿은 살갗에서 심장의 박동이 전해졌다. 서로 다른 속도로 뛰던 가슴이 차츰 하나로 박자를 맞춰 갔다.
기분 좋은 동화에 폭 잠겨 있던 주완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수혁 씨.”
“응?”
“아침 먹고 할아버지한테 안 갈래요?”
권수혁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서서히 입술을 늘어뜨렸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