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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은 서류 가방을 들지 않은 손을 이리에게 뻗었다. 허리를 감으려는 것이다. 물론 이리는 순순히 잡혀 주지 않고 부드럽게 빠져나왔다. 아쉽게 허공만 스친 도진이 이번엔 다른 핑계를 댔다.
“스승님, 돌부리랑 나무뿌리들이 많으니 조심하세요. 아니면 제가 안아 드릴까요?”
“돌부리랑 나무뿌리가 어디에? 평탄하기만 한걸.”
이리가 그렇게 말하고 나자 정말 그의 말처럼 되었다. 평탄한 흙바닥을 이리가 탁탁탁 가볍게 뛰어 올라갔다. 도진이 앞에 돌부리 하나라도 만들기 위해 기운을 끌어올리며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도진은 이리 선인과 겨루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래도 가게에만 있다가 스승님이랑 둘이서 공기 좋은 산 타니까 좋네요. 우리 새 직원 뽑으면 직원은 대여점 지키라고 하고 우리는 전국 일주해요.”
“일단 새 직원을 뽑고 나면 그때 이야기하자. 지원자가 아직까지 한 명도 없잖아.”
이리가 한숨을 쉬었다. 한숨이 나오는 건 도진도 마찬가지였다. 새 직원이 생기면 이리와의 시간을 공유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에도 도진은 꾸준히 구인 글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었다. 지금 대여점은 업무가 너무 많아서 수행할 시간도 없고, 이리와 알콩달콩할 시간도 없었다. 무엇보다 얼른 이리의 피곤함을 덜어 주고 싶었다.
“그 생령이었던 사람이 영감이 있다면 좋았을 텐데.”
“민지연?”
“이름을 아직도 기억해요? 뭐야. 어이없네. 스승님이 언제부터 기억력이 그렇게 좋았어요?”
“일주일도 안 지났어. 도진아.”
“그래도요. 빨리 머릿속에서 잊으세요. 어차피 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인데 뭘 피곤하게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스승님은 너무 정이 많다니까.”
“너는 너무 잔소리가 많아.”
“누누이 말하지만 잔소리할 일을 만들지 말라고요.”
“혼자 올 걸 그랬구나.”
“이런 잔챙이들 많은 곳에 이리 선인을 혼자 보내면 제가 김도진이 아니라 이도진이죠.”
‘잔챙이’라는 건 위아의 단계에 막 접어든 아주 작은 존재들을 일컫는 표현이다.
산에는 많은 위아들이 존재한다. 금저, 향랑, 소여우, 표잔 등 한국의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괴들. 야넨, 실구렁이, 한중이 같은 요물들. 이 중에서 야넨, 실구렁이, 한중이 같은 자그마한 것들이 ‘잔챙이’다. 짐승에서 요물로 막 진화한 어린 위아들.
이리는 잔챙이 위아들을 아주 귀여워해서, 먼저 다가오는 것들이 있으면 서슴없이 품에 안고 둥기둥기를 해 주곤 했다.
지금은 도진이 워낙 흉흉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고, 우암산을 지배하는 도깨비 요리이기가 무언가 일러 놓은 건지 먼저 다가오는 것들이 없었다. 대신 그 이리 선인에 대한 흠모의 시선을 보내며, 슬금슬금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단 것들 좀 있지?”
“스승님이 드실 거면 드리고, 잔챙이들 줄 거면 안 줄래요.”
“좀 꺼내 줘.”
“스승님이 드실 거예요?”
“도진아.”
“아, 잔챙이들만 줄 거면 안 준다고요. 이 초콜렛이랑 과자 비싼 거거든요. 도희가 외국 가서 사 온 거라고요.”
도희는 도진의 여동생으로 방학마다 해외여행을 가는데, 돌아올 때면 단 것들을 한가득 사 오고는 했다.
“도희가 사 온 거면 정말 맛있겠네. 애들도 주자. 나도 먹을게.”
“…내가 진짜.”
결국 도진이 멈춰 서서 서류 가방을 열었다. 잔챙이들은 대부분 잡식이라 초콜렛과 사탕도 잘 먹는다. 포장지도 잘 먹지만, 도진이 가만히 둘러보니 잔챙이들 사이에 산토끼, 고양이 같은 짐승들도 있어서 툴툴거리며 포장지를 벗겨 냈다.
초콜릿과 사탕을 뿌리자 잔챙이들이 삐이삐삐, 뀨우, 삥, 뺙뺙 소리를 내며 달라붙었다. 앙증맞은 손으로 초콜렛 조각을 집고 냠냠냠 갉아먹는 돌멩이 귀물, 사탕을 집어 들었다가 끈덕끈덕함에 옆에 있던 친구의 털에 닦아 버리는 새앙토끼 요물, 깃털이 찐득해지는 것도 모르고 빵을 쪼아 먹는 쇠박새 요물. 확실히 도진이 보기에도 귀엽긴 귀여웠다.
“정말 사랑스러워.”
이리가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맑게 웃었다. 도진은 초콜렛 하나를 까서 이리의 입 앞에 대령했다.
“스승님도 드세요.”
“고마워.”
“…입 벌리시죠?”
“내가 직접 먹을게.”
“진짜 언제 잔챙이 둔갑술이나 배워야지. 서러워서 원.”
구시렁거리는 도진의 손가락에서 이리가 초콜렛을 쏙 빼서 입에 넣었다.
“도진아. 너도 먹어. 맛있다.”
“전 됐어요. 단 거 먹으면 입 안이 말라서. 그리고 작고 예쁜 입술이 오물거리는 모습을 보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르네요.”
“…….”
이리가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감정 기복이 거의 없는 이리 선인이 유일하게 흔들릴 때가 바로 이런 때였다.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마…. 네가 이런 말 할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존나 좋아해 주면 됩니다.”
“나는 너한테 이유식을 타 먹였어.”
“네, 네. 이유식도 타 먹이고, 첫걸음마도 지켜보고, 기저귀도 갈아줬죠. 그렇게 수백 번 말씀해 보세요. 내가 알아듣고 납득하는지.”
도진이 대체 그게 연애에 걸림돌이 될 이유가 뭔지 전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이리는 그냥 말없이 손목의 팔찌만 만지작거렸다. 뭔가 난처할 때마다 항상 착용하고 다니는 검은색 실팔찌를 만지작거리는 게 이리의 습관이었다.
잔챙이들의 배를 채워 준 두 사람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는 정말로 도깨비의 영역에 접어들었는지 따라오는 위아들도 없어지고, 풀벌레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산신령이 다스리는 산은 짐승과 위아들이 어디든 자유롭게 노닐지만, 산도깨비가 다스리는 산은 이렇게 주인의 영역이 있어서 영역 안에는 그 무엇도 침범하지 못했다. 위아들은 당연하고 지능이 낮은 짐승들도 본능적으로 피한다.
이리는 적당히 너른 공터에 멈춰 섰다. 허리 높이의 수풀이 주변을 둘러싼 공터였다. 도진이 슬쩍 이리의 옆에 가까이 섰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탓이었다.
“요리이기.”
이리가 이름을 부르자 바람이 휙, 휘몰아쳤다. 우거진 수풀이 세찬 바람에 한 방향으로 누웠다. 도깨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음산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오랜만이로군, 선인.”
도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이리에게 말을 놓다니…….
대여점 고객 중 요물이나 요괴급의 어린 위아들은 뭣도 모르고 이리에게 말을 놓기는 하지만, 도깨비처럼 한 갈래의 끝에 있는 자가 말을 놓는 건 처음이었다.
“그자가 대여점의 그 유명한 부리부리한 신입 직원인가?”
“맞아. 도진아, 인사해. 청주 우암산의 산도깨비, 요리이기야.”
“뭐가 보여야 인사를 하죠.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 자한테 어떻게 인사를 합니까?”
“도진아….”
이리가 이마를 짚었다. 산도깨비는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온산을 울렸다.
“소문대로 오만한 인간이로군! 오만한 성정을 가진 인간은 맛이 좋지. 뒷배가 선인이 아니었다면 좋았으련만.”
“요리이기. 무서운 말 하지 말고…. 대나무 새알 다섯 개가 필요해. 가지고 있지?”
“쉽게 내줄 수 없지. 백 년에 다섯 개체만 태어나는데 벌써 네 번째 놈이 죽었어. 나한테 남은 알이 여섯 알밖에 없네.”
“대나무 새가 그렇게 희소하진 않을 텐데.”
“나는 진현계에 갈 수 없으니 내겐 이곳의 대나무 새가 전부이지. 부리부리한 직원이여, 나와 대나무 새알을 걸고 대결을 할 텐가?”
도깨비의 목소리에서 호승심이 느껴졌다. 도진이라는 존재가 도깨비의 경쟁심을 자극한 것이다. 이리는 승부를 좋아하는 도깨비가 이런 제안을 해올 줄은 당연히 예상했지만, 일단 형식상으로 에둘러 제안했다.
“나와 대결하는 건 어때?”
“선인은 나를 놀리는가? 내 아무리 한 산을 다스리는 도깨비라고 해도 만물의 주인인 그대의 앞에서는 한낱 미물일 뿐인데 그대와 승부를 하는 천치 짓거리는 하겠나.”
“선인과 승부했다는 타이틀 갖고 싶지 않아?”
“그런 칭호라면 이미 있네. 일전에 나비 선인과 겨뤘었지. 그것보다 이상하군. 나는 저자가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아. 어찌 이런 친숙한 느낌이 든단 말인가.”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몸을 숨긴 요리이기가 지척에서 도진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도진은 이리를 보호하듯 뒤로 숨기고 앞에 나섰다.
“좋습니다. 저와 겨루시죠. 어떤 대결을 원합니까?”
“산도깨비가 원하는 것이야 늘 한 가지지.”
“씨름 말이군요. 해 본 적은 없지만 대충 규칙은 압니다.”
도진이 서류 가방을 땅에 내려놓았다.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리는 더는 말리지 않았다. 일부러 도진을 데리고 온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도깨비 정도라면 도진의 괴력을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을 테니까…. 제자의 스트레스를 풀어 주기 위해 도깨비라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다.
가볍게 스트레칭하는 도진에게 이리가 조언했다.
“도진아.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마…. 도깨비를 다치게 하면 산에게서 미움 받는다.”
“으음, 도깨비와의 힘겨루기는 처음이라 어느 정도까지 조절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차라리 지더라도 너무 힘쓰지는 말고. 흥분하지도 말고. 우선 네 힘의… 1/5 정도부터 시작해 봐.”
“생각보다 약하군요. 알겠습니다.”
도진이 웃으며 답할 때 산골짜기에서 생성된 강한 바람이 그들을 향해 불었다. 어지간한 나무는 뽑혀 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강한 바람이었다.
도진은 재빨리 이리를 품에 안고 뒤돌아섰다. 품속의 이리는 조금 당황했다. 도진이 자꾸 이렇게 보호하려는 것처럼 굴 때마다 민망했다. 이건 마치 어린아이가… 아니, 자그마한 뱁새가 한번 으르렁거리는 것으로 천둥을 부르고 산사태를 일으키는 신수를 보호하려는 꼴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