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태풍 같던 바람이 지나가고 도진을 밀어내려는데 도깨비가 분노한 음성으로 호통 쳤다.
“그대들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군. 인간이여, 네 전력을 다하라.”
“좋습니다. 후회하지나 마세요.”
도진의 즉답에 이리가 얼른 도진을 밀어냈다.
“도진아. 절대 안 돼.”
“스승님, 방금 바람에 날아가서 저기 처박힐 뻔했잖아요. 내가 바로 옆에 없었으면 그 조그만 머리통이 수박처럼 깨지고 가는 팔다리가 가루만 남았겠죠.”
전혀, 그럴 일은 없었을 터였다. 도깨비가 일으킨 바람은 이리 선인의 앞에서 산들산들 흩어지고 말았을 테니까.
하지만 당신이 다쳤을 거라는 정도를 넘어서, 묘하게 잔인한 묘사에 이리는 입을 다물었다.
“떨어져 계세요, 스승님.”
“…그래.”
이리가 둥근 공터에서 벗어나 덤불 사이에 섰다.
도진이 뚜둑, 뚝 손목을 꺾으며 허공에 외쳤다.
“나오시죠, 산도깨비님. 전 준비 됐습니다. 언제까지 목소리로 시비만 걸 작정이죠?”
“오만한 인간이로다….”
도진의 눈앞에 몸집이 거대한 도깨비가 나타났다. 250cm 정도의 거구에 이마 위로 솟은 뿔은 두 개였으며, 팔다리의 두께가 도진의 머리만 했고, 모든 이빨이 송곳니처럼 날카로웠다. 갈색에 붉은 기가 섞인 피부는 거친 나무 기둥처럼 단단했는데, 몸의 관절 부위마다 회색 털과 푸른 털이 수북하게 돋아나 있어서 마치 메마른 대지에 싹이 난 풀 같았다. 흰자 속 검은 동공은 눈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작았고, 도깨비의 두 손은 그의 얼굴보다 더 커다랬다.
특히 도깨비의 옆에는 도진으로서는 처음 보는 도깨비방망이가 있었다. 굵은 가시가 군데군데 박힌 흑색의 도깨비방망이는 도깨비의 팔 한쪽만큼 두꺼웠으며, 땅 위에 세워져 있는 모습이 마치 산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 잡은 나무 같았다.
요리이기는 이마까지 올라오는 길고 도톰한 혀를 날름거렸다.
“규칙은 인간들의 씨름 기본 규칙과 같으나 장외는 없고 누구 하나가 완전히 뒤집히거나 대결을 포기하면 끝이 난다. 동의하는가?”
“동의합니다.”
“내가 흑이고 그대가 백이다.”
요리이기가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르자 공중에서 샅바가 튀어나왔다. 도진은 하얀색 샅바를 낚아챘다.
“청띠와 홍띠가 아니네요.”
도진이 허리에 샅바를 메며 의아해하자 이리가 설명했다.
“도깨비들 사이에서 청색, 홍색은 유행이 지났고 요즘은 흑백이 인기가 많아. 봐 봐, 털도 염색했잖아.”
“염색이었….”
“우리 대여점의 단골 고객이지.”
“이물 중에 염색약도 있었군요….”
“꽤나 인기 많은 품목이야. 조만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줄게. 요리이기는 씨름 경력이 500년이니까 방심하지 말고 잘해.”
“예. 걱정 마세요.”
도진은 꼬박꼬박 대답하면서 사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샅바 묶는 방법 모른다고 하고 스승님한테 부탁할까?’
가까이에서 샅바의 매듭을 묶어 주는 이리에게서는 분명 달콤한 향기가 날 것이다. 내리깐 눈꺼풀 밑으로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울 테고…. 따뜻한 숨결이 막 가슴과 목에 느껴지면 어떡하지? 부드러운 머리칼이 턱을 간지럽히면?
잘만 묶던 손길이 점점 느려지더니 나중에는 그냥 샅바를 풀어 버렸다.
“스승님, 저 샅바 맬 줄 모르겠어요. 와서 좀 묶어 주세요.”
“…….”
이리가 어이없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허공에 손을 저었다. 그러자 하얀색 샅바가 저절로 도진의 허리에 묶였다.
“제발 정신 차리고 해…. 산도깨비는 방심해도 이길 수 있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야.”
“언제는 전력을 다하지 말라면서요.”
“전력은 다하지 않아도 정신은 차려야 해.”
“완전 정신 차렸어요. 걱정 마세요, 스승님.”
도진이 개구쟁이 소년처럼 씩 웃었다. 이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산도깨비를 보는 것도 처음이고, 그 도깨비와 힘 대결하는 것도 처음인데 긴장은커녕 이 와중에도 음심을 품는 녀석이니 이쯤 되면 대단하다고밖에는….
저렇게 자신의 힘을 과신했다가 큰코다치는 일이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아직 어린 나이니 이 정도의 자신감은 있어도 될 듯싶어 일단 걱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대대로 도진과 같은 갈래의 인간들은 모두 저런 성격이었다.
겸손하기보다는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고, 상대를 민망하게 만들 정도로 자기 감정에 솔직했다. 유사 이래로 늘 저래 왔다.
“시작하지!”
도깨비와 인간의 씨름 대결이 시작됐다.
도진이 인간치고는 체격이 컸으나 도깨비 앞에 서니 신장 차이가 확연했다. 그래도 도진은 도깨비의 흑색 샅바를 단단히 붙잡았다. 이리가 시작을 외치고 인간과 도깨비가 동시에 힘을 줬다. 땅이 쿵, 움푹 파였으나 둘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짐 없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평소 온종일 힘 조절을 해 온 도진이기에, 얼마만큼 힘을 써도 될지 몰라 살짝 힘줘 봤더니 도깨비의 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도진은 당황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제법 단단하구나. 네놈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해보자!”
도깨비의 말에 도진이 살짝 미소 지었다.
‘거대한 바윗덩이 같군. 마음껏 해도 되겠지. 산도깨비가 겨우 이 정도에 다치진 않을 거고.’
도진은 승부를 길게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대나무 새알을 얻은 후에도 추가 공정에만 최소 두 시간이 더 걸리니까. 금방 승부를 짓고 얼른 돌아가서 작업해야만 했다.
흐읍! 도진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목에 핏대가 섰다. 캐주얼 셔츠가 투둑, 툭 찢어졌다.
지켜보던 이리는 혹여나 도진이 흥분할까 봐 전전긍긍했고, 요리이기는 순간 가해지는 압력에 깜짝 놀랐다.
“무슨 인간의 힘이……!”
요리이기의 성난 음성이 사방에서 메아리쳤다.
‘음?’
도진은 바로 앞에 있는 그에게서가 아니라 이 산의 모든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바로 넘어뜨리려고 하면 안 돼.’
도깨비와의 씨름 대결은 기술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힘 대결이다. 뒤집기나 꺾기, 무릎치기 같은 기술도 절대 통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한국 전설과 민담들을 섭렵해 온 도진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릴 때처럼 허리 근육에 힘을 주고 무릎을 굽혔다.
“……!”
과연 무거운 무게였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도진의 손등에 솟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옷 속에 숨겨진 짐승 같은 근육도 마찬가지였다. 도진은 읍! 하고 한번 기합을 준 후 그대로 힘을 줘서 위로 뽑은 후 뒤쪽으로 넘겨 버렸다.
쿵-!
거대한 소리와 함께 지면이 강하게 흔들렸다.
“무슨… 내 나무를!”
분명 뒤쪽으로 넘겼는데 신음은 앞쪽에서 흘러나왔다. 우거진 수풀에서 요리이기의 신형이 나타났다. 샅바를 멘 상태가 아니었다.
도진이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성인 남성 다섯 명이 양팔을 뻗어 빙 둘러도 둘레가 남을 크기의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있었다. 그 나무의 한가운데에 까만 줄이 있어서 자세히 보니 흑색 샅바였다.
도진이 500년은 족히 됐을 거대한 나무와 씨름 대결을 해서 뿌리째 뽑아낸 것이다. 요리이기가 황망한 투로 말했다.
“내 나무를 뿌리까지 들어내다니 대체 이런 괴물이 어디서 나타난 건가?”
“괴물이라니요. 당장 시내 가서 아무나 붙잡고 그쪽이랑 저 중 누가 괴물인지 말해 보라고 해요.”
“정말 인간이 맞나?”
“뭐, 반쯤은 인간 맞습니다. 반은 아니지만.”
도진이 옷의 구겨진 부분을 탁탁 펴며 답했다. 그는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요리이기가 도진에게 다가와 킁킁거리며 체취를 맡았다.
이리는 도깨비도 도진도 다치지 않은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수고했어, 도진아. 잘했어.”
“오랜만에 힘을 좀 쓰니까 시원하네요. 스승님, 칭찬으로 뽀-.”
“요리이기. 네 나무, 이대로 두면 죽을 텐데 어쩔 거야?”
요리이기가 혀를 찼다.
“저 나무를 다시 심으려면 산도깨비가 셋은 더 있어야 하고 다시 심더라도 뿌리까지 자리 잡게 할 수는 없겠군. 선인이 나무를 되살려 준다면 대나무 새알을 열 개 넘겨주지.”
“여섯 개밖에 없다며.”
“물론 거짓말이지. 선인은 거짓말을 못 하다 보니까 상대의 말이 거짓이라는 생각을 잘하지 못하더군. 이참에 알아 두게. 산도깨비는 기회만 있으면 거짓말을 한다네.”
“거짓말하려고 모습을 안 드러냈던 거구나.”
이리는 속았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감정의 고저가 없었다.
이리는 쓰러진 나무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나무껍질을 매만지면서 속삭였다.
“우암산은 참 살기 좋은 곳이었지? 아늑하고 따뜻하고…. 다시 대지의 품에서 쉴 수 있다면 좋을 거야.”
말을 마치자 나무의 굵은 뿌리가 꿈틀거렸다.
쿠구궁…….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뿌리의 움직임에 이리가 딛고 있던 흙바닥도 흔들렸다. 도진은 이리가 갸우뚱거리며 넘어지기 전에 허리를 낚아채 품에 안았다.
나무는 쓰러진 채로 움직여 먼저 뿌리를 단단하게 내린 후 거대한 기둥을 똑바로 세웠다. 대규모의 이동으로 인해 산 전체에 울림이 있었는데 마치 낮은 천둥소리 같았고, 굵은 뿌리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지진이 난 듯했다.
산 아랫자락의 인간들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 뉴스 속보를 찾아보고 있을 것이다.